(마 28:18)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마 28: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마 28: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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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취록>
1. 성례
1) 보이지 않는 은혜를 드러내는 표징
세례와 성찬 이 두 가지는 신약 시대의 성례입니다. 이것 외에 다른 성례는 없습니다. 성례는 보이지 않는 은혜를 드러내는 표징입니다. 은혜가 크다 작다 말은 하지만 보일 수 없습니다. 보이면 은혜가 아닙니다. 그래서 은혜는 우리 전체를 휘감고, 전적 은혜, 오직 은혜입니다.
2) 신자가 연약하기 때문에 주어짐
우리가 연약합니다. 우리가 마지막에 하나님을 마주 보면 성례가 필요 없습니다. 그러나 이 땅의 삶에서 하나님을 직접 보지 못합니다. 우리는 성화 단계에 있지 영화 단계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로마 가톨릭에서 잘못 가르치는 것 중에 하나는 뛰어난 사제나 성자 중에는 이 땅에서 하나님을 직접 본다고 합니다. 그러나 잘못된 것입니다. 우리는 불완전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을 이 땅에서 온전히 다 시각에 담을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보이는 표 두 가지, 즉 세례와 성찬을 주신 것입니다. 인간은 보여야 믿고, 만지고 들여야 믿기에 하나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헤아리셔서 이 땅에서 세례와 성찬을 제정하셨습니다. 세례는 보이고 만져지는 물로 씻어 옛사람이 죽고 새사람이 사는 거듭남을 표하게 하시고, 성찬은 떡과 잔으로 되어 있는데, 양식과 음료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드러내게 하셨습니다. 어찌 보면, 신앙생활하며 ‘하나님 보여 주세요, 만지게 해 주세요’ 이런 마음이 들거든 세례와 성찬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어떤 표적이나 기적보다 세례와 성찬이 귀한 것입니다.
3) 신약 시대에는 두 가지 성례밖에 없다: 세례와 성찬
세례와 성찬으로 족하고, 이 둘 외에는 성례가 없습니다. 이것이 신약 시대의 격에 맞는 신앙생활입니다. 구약 시대 신앙생활은 아동기적 경륜에 있었지만, 신약 시대 신앙생활은 성숙한 것입니다. 이렇듯 우리는 성숙함이 있지만 완전치 않아 하나님께서 두 가지 성례, 즉 세례와 성찬을 주셨습니다. 세례는 살아남의 표이고, 성찬은 살아감의 표입니다. 생명은 한 번이기에 세례는 한 번만 드리고, 살아감은 지속되는 것이기에 성찬은 반복해서 드립니다. 세례는 그리스도와의 사귐의 시작의 표,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시작의 표, 성찬은 그리스도와 사귐의 계속의 표입니다. 이 두 가지만 있으면 됩니다. 이 외에는 없습니다. 시작이 있고, 계속이 있고, 완성이 있습니다. 간단합니다. 완성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 이루어집니다. 이것이 처음 인쳐지는 것이 세례입니다.
2. 세례 제정의 말씀
1) 대위임명령
마태복음 마지막 장의 마지막 세 절을 ‘대사명’, ‘대위임명령’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감람산에서 승천하실 때, 그때 제자들에게 귀한 말씀을 남기십니다. 그 가운데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세례를 주라는 것입니다. 제자를 삼아서 세례를 베풀라고 명령하십니다. 성찬은 주님이 잡히시던 밤에 마가의 다락방에서 제정하셨습니다. 세례는 오늘 본문에서 제정하셨습니다. 감람산에서 승천하실 때 제정하셨습니다. 제자를 삼아서 세례를 주라는 것에서 강조점은 세례를 베푸는 데 있습니다. 19절을 보면, “모든 민족에게”, 20절은 “세상 끝날까지” 세례를 주라고 하십니다. 이스라엘, 유대인뿐만 아니라 모든 민족에게 세례를 주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가르치고 세례를 주라고 하십니다. 모든 민족에게 세례를 주라는 의미는 두 가지 의미가 있는데, 민족을 불문하고, 노소를 불만하고 가르쳐서 세례를 주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대위임명령입니다.
2) 말씀을 가르치고 지키는 자리에 섬
20절을 보시면, 세례를 받아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가르쳐 지키게 하라고 하십니다. 세례를 받은 사람은 그리스도가 분부한 것을 가르치고 지키는 자리에 서게 된다는 것입니다. 세례가 중요한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가 가르치고 분부한 것을 가르치고 지키는 자격을 얻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세례를 받는 것은 귀한 일로서 그리스도가 분부한 것을 행하는 자리에 서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크게 보면, 다 제자가 되고 사도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례의 중요한 의미입니다. 구약의 할례보다 신약의 세례가 더 성숙된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을 분부한 자리에 서는데, 하나님의 약속이 있습니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인치는 것이 세례입니다. 사도행전 1:8도 주님이 승천하시며 하신 말씀입니다. “땅끝까지”, “세상 끝날까지”, “항상 함께 있으리라.” 그리스도가 가르치고 분부한 것을 지켜 행하는 것입니다.
목사 되는 것보다 세례받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세례받는 것은 언약 백성 됨을 인치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대명령을 받는 것입니다.
3. 세례의 두 가지 의미
세례는 크게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 구원의 의미입니다. 옛사람이 죽고 새사람이 살아납니다. 이것을 중생이라고 합니다. 죄사함과 씻음과 회개가 언급됩니다. 옛것은 지나가고 새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둘째, 교회의 지체가 되는 것입니다. 이를 입교라고 합니다.
첫째 의미만 말하는 것은 절반만 얘기하는 것입니다. 교회의 지체로서 거듭나는 것입니다. 교회는 안 다니는데, 세례받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세례는 교회에 입교하여 교회의 지체가 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보다 정확한 질서가 있는 것이 없습니다. 별나게 믿는 게 틀린 것입니다. 별나게 이상한 데서 세례받는 것은 다 틀린 겁니다. 우리는 그저 교회에서 예배드리고, 직분 받고, 섬기고, 선교하고, 전도하고, 세례 받고, 성찬 받는 것이 정확하게 신앙생활 하는 것입니다. 세례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자 교인이 되는 것입니다,.
4. 세례가 표하는 은혜 네 가지
세례가 표하는 은혜는 무엇일까요?
세례와 성찬은 그것 자체가 은혜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세례를 받았다고 거듭나는 것이 아니라 거듭남을 표하는 것입니다. 세례 받아 구원 받는 것이 아닙니다. 세례에 중생의 은혜가 있는 것이 아니라, 믿어서 구원에 이르고 믿어서 거듭납니다. 이것을 인치고, 표하는 것이 세례입니다.
세례가 표하는 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회개, 죄사함, 씻음을 표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죄를 사하시면 우리가 회개합니다. 죄를 사하시는 은혜를 우리를 회개를 시키십니다. 회개에는 공로가 없습니다. 기도를 많이 해서 회개가 터졌다는 것이 아예 들린 것은 아니지만 본질은 아닙니다. 회개는 은혜로 말미암습니다. 크게 꼬꾸라져야 회개가 아닙니다. 얌전히 회개하는 이도 있고 격하게 회개하는 이도 있다. 주님이 주시는 것은 화목입니다. 회개는 화목에 이르는 것이지, 자기 공로 자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둘째, 내가 그리스도의 것이라는 것을 표합니다. 세례는 자기 부인을 이야기합니다. 무엇을 하듯 내 것을 주장하지 않습니다. 초대교회에 동굴에서 예배드릴 때는 세례 받는 것이 그야말로 그리스도의 것,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구약으로 말하면, 할례를 받고, ‘내가 아브라함의 집 사람이야’라고 하는 것이듯, 신약에서는 세례를 받고, ‘내가 그리스도의 영을 받아 그리스도의 것이 되었다’라고 얘기하는 것입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시는 것입니다.
셋째, 예수와 함께 살고, 예수와 함께 죽고, 예수와 함께 일으킴을 받고, 예수와 함께 보좌 우편에 앉는 것을 표합니다. 에베소서 2:5-6에서 강하게 나타납니다.
세례의 표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무슨 환상을 보고 꿈을 꿉니까? 이것이 그리스도와 함께 살고 죽고 일으킴을 받고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는 것입니다.
넷째, 빛이신 그리스도와 합하여 빛의 자녀가 되고 빛을 드러내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본문에서도 가르친 것을 지키게 하라고 하십니다. 세례를 받음을 빛이 임함을 말합니다. 빛이 임하면 빛을 드러내지 않을 수 없습니다. 향이 임하면 향을 숨길 수 없습니다. 향을 내려고 노력하지 말고, 향이신 그리스도를 믿으십시오. 그러지 않고 향을 내려고 하면 내 공로가 됩니다. 영적인 순서는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그 그리스도가 드러나는 것입니다. 행실은 믿음의 열매입니다. 나무가 제대로 서 있기만 하면 열매는 저절로 맺힙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나무입니다. 지혜로운 농부는 나무의 흙갈이를 해 주고 가지치기도 합니다. 이것은 열매 가꾸는 것이 아니라 나무를 가꾸는 것입니다. 행실을 가꾸는 것이 아니라 믿음을 가꾸어야 합니다. 믿음을 가꾸어야 행실이 맺힙니다. 이것이 우리의 신앙입니다. 세례를 받고 내 힘으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를 붙들어야 합니다. 신앙생활은 어려운 것 없습니다. 그리스도가 내 안에 계심을 믿으십시오. 오늘 말씀에 위로가 되는 것은 세상 끝날까지 내가 너희와 함께 하신다 하셨습니다.
5. 세례의 대상
세례는 어른만 받는 것이 아니라 아이들도 받습니다. 구약 때의 할례는 육체를 베는 것이지만, 구약의 할례는 모형이고, 실체는 신약 시대의 그리스도의 할례입니다. 그리스도의 할례는 유아세례입니다. 오늘날 유아세례는 그리스도를 믿는 언약의 약속 가운데서 주어지는 것입니다. 신약시대의 할례는 그리스도를 믿어 받는 것입니다. 유아세례는 이렇게 성경적 근거를 갖고 있습니다. 아브라함, 모세, 다윗 등은 하나님과 언약을 맺을 때 “너희와 너희 자손에게”라고 합니다. 언약은 당대뿐만 아니라 후대로 이어집니다.
신약을 보면, 통상 어느 가정에 가서 세례를 줄 때는 가족 전부에게 세례를 주었습니다. 자주 장사 루디아, 간수장도 가족이 세례를 받았습니다. 회당장 그리스보도 가족이 전부 세례를 받았습니다. 모든 민족을 제자를 삼아 세례를 주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민족을 넘어 땅끝까지, 그리고 남녀, 노소를 불문하고 세례를 줄 것을 의미합니다. 침례교는 유아세례를 거부합니다. 이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우리는 세례를 줍니다. 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특별히, 부부의 어느 한 편만 믿어도 자녀에게 세례를 줍니다. 고린도전서 7:14를 보면, 부부 중 한 편이 믿으면 그로 인하여 자녀가 깨끗하게 된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부부는 한 몸이기 때문에 그 자녀는 깨끗하게 됩니다.
6. 결론
세례의 큰 능력은 세례를 주는 물에 있는 것이 아니라 물은 거듭남의 표입니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라고 했듯이, 보혜사 성령이 우리에게 임하기 때문에 거듭납니다. 그래서 세례를 두 번 받지 않습니다. 순복음은 성령 세례를 따로 또 얘기합니다. 우리는 세례가 하나밖에 없습니다. 물세례는 성령 세례를 표하는 것입니다. 방언을 받아야 성령 세례를 받았다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죄 사함을 받으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1:18을 보면, 말씀으로 우리를 낳았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았다고 했습니다. 베드로전서 1:23-25을 보면, “너희가 거듭난 것은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 이 말씀을 잘 붙드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거듭난 것은 썩어질 씨, 물로 된 것이 아니라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된 것입니다. 세례나 성찬은 물이나 떡과 잔에 효력이 있는 것이 아니라 제정의 말씀에 능력이 있습니다. 이것이 세세토록 시들지도 않고 마르지도 않습니다.
요새 어렵습니다. 이럴 때일수록 열매가 아니라 나무, 믿음이 중요함을 기억합시다. 흔들리지 말고 조심하며 지내시기 바랍니다.
[20200830][십자가지기교회 주일낮예배: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32)] 세례: 거듭남과 입교 (마 28:18-20) 문병호 목사
(마 28:18)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마 28: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마 28: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음성파일: 게시물 하단 "관련링크"에서 청취 혹은 내려받기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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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성례
1) 보이지 않는 은혜를 드러내는 표징
세례와 성찬 이 두 가지는 신약 시대의 성례입니다. 이것 외에 다른 성례는 없습니다. 성례는 보이지 않는 은혜를 드러내는 표징입니다. 은혜가 크다 작다 말은 하지만 보일 수 없습니다. 보이면 은혜가 아닙니다. 그래서 은혜는 우리 전체를 휘감고, 전적 은혜, 오직 은혜입니다.
2) 신자가 연약하기 때문에 주어짐
우리가 연약합니다. 우리가 마지막에 하나님을 마주 보면 성례가 필요 없습니다. 그러나 이 땅의 삶에서 하나님을 직접 보지 못합니다. 우리는 성화 단계에 있지 영화 단계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로마 가톨릭에서 잘못 가르치는 것 중에 하나는 뛰어난 사제나 성자 중에는 이 땅에서 하나님을 직접 본다고 합니다. 그러나 잘못된 것입니다. 우리는 불완전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을 이 땅에서 온전히 다 시각에 담을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보이는 표 두 가지, 즉 세례와 성찬을 주신 것입니다. 인간은 보여야 믿고, 만지고 들여야 믿기에 하나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헤아리셔서 이 땅에서 세례와 성찬을 제정하셨습니다. 세례는 보이고 만져지는 물로 씻어 옛사람이 죽고 새사람이 사는 거듭남을 표하게 하시고, 성찬은 떡과 잔으로 되어 있는데, 양식과 음료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드러내게 하셨습니다. 어찌 보면, 신앙생활하며 ‘하나님 보여 주세요, 만지게 해 주세요’ 이런 마음이 들거든 세례와 성찬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어떤 표적이나 기적보다 세례와 성찬이 귀한 것입니다.
3) 신약 시대에는 두 가지 성례밖에 없다: 세례와 성찬
세례와 성찬으로 족하고, 이 둘 외에는 성례가 없습니다. 이것이 신약 시대의 격에 맞는 신앙생활입니다. 구약 시대 신앙생활은 아동기적 경륜에 있었지만, 신약 시대 신앙생활은 성숙한 것입니다. 이렇듯 우리는 성숙함이 있지만 완전치 않아 하나님께서 두 가지 성례, 즉 세례와 성찬을 주셨습니다. 세례는 살아남의 표이고, 성찬은 살아감의 표입니다. 생명은 한 번이기에 세례는 한 번만 드리고, 살아감은 지속되는 것이기에 성찬은 반복해서 드립니다. 세례는 그리스도와의 사귐의 시작의 표,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시작의 표, 성찬은 그리스도와 사귐의 계속의 표입니다. 이 두 가지만 있으면 됩니다. 이 외에는 없습니다. 시작이 있고, 계속이 있고, 완성이 있습니다. 간단합니다. 완성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 이루어집니다. 이것이 처음 인쳐지는 것이 세례입니다.
2. 세례 제정의 말씀
1) 대위임명령
마태복음 마지막 장의 마지막 세 절을 ‘대사명’, ‘대위임명령’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감람산에서 승천하실 때, 그때 제자들에게 귀한 말씀을 남기십니다. 그 가운데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세례를 주라는 것입니다. 제자를 삼아서 세례를 베풀라고 명령하십니다. 성찬은 주님이 잡히시던 밤에 마가의 다락방에서 제정하셨습니다. 세례는 오늘 본문에서 제정하셨습니다. 감람산에서 승천하실 때 제정하셨습니다. 제자를 삼아서 세례를 주라는 것에서 강조점은 세례를 베푸는 데 있습니다. 19절을 보면, “모든 민족에게”, 20절은 “세상 끝날까지” 세례를 주라고 하십니다. 이스라엘, 유대인뿐만 아니라 모든 민족에게 세례를 주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가르치고 세례를 주라고 하십니다. 모든 민족에게 세례를 주라는 의미는 두 가지 의미가 있는데, 민족을 불문하고, 노소를 불만하고 가르쳐서 세례를 주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대위임명령입니다.
2) 말씀을 가르치고 지키는 자리에 섬
20절을 보시면, 세례를 받아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가르쳐 지키게 하라고 하십니다. 세례를 받은 사람은 그리스도가 분부한 것을 가르치고 지키는 자리에 서게 된다는 것입니다. 세례가 중요한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가 가르치고 분부한 것을 가르치고 지키는 자격을 얻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세례를 받는 것은 귀한 일로서 그리스도가 분부한 것을 행하는 자리에 서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크게 보면, 다 제자가 되고 사도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례의 중요한 의미입니다. 구약의 할례보다 신약의 세례가 더 성숙된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을 분부한 자리에 서는데, 하나님의 약속이 있습니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인치는 것이 세례입니다. 사도행전 1:8도 주님이 승천하시며 하신 말씀입니다. “땅끝까지”, “세상 끝날까지”, “항상 함께 있으리라.” 그리스도가 가르치고 분부한 것을 지켜 행하는 것입니다.
목사 되는 것보다 세례받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세례받는 것은 언약 백성 됨을 인치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대명령을 받는 것입니다.
3. 세례의 두 가지 의미
세례는 크게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 구원의 의미입니다. 옛사람이 죽고 새사람이 살아납니다. 이것을 중생이라고 합니다. 죄사함과 씻음과 회개가 언급됩니다. 옛것은 지나가고 새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둘째, 교회의 지체가 되는 것입니다. 이를 입교라고 합니다.
첫째 의미만 말하는 것은 절반만 얘기하는 것입니다. 교회의 지체로서 거듭나는 것입니다. 교회는 안 다니는데, 세례받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세례는 교회에 입교하여 교회의 지체가 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보다 정확한 질서가 있는 것이 없습니다. 별나게 믿는 게 틀린 것입니다. 별나게 이상한 데서 세례받는 것은 다 틀린 겁니다. 우리는 그저 교회에서 예배드리고, 직분 받고, 섬기고, 선교하고, 전도하고, 세례 받고, 성찬 받는 것이 정확하게 신앙생활 하는 것입니다. 세례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자 교인이 되는 것입니다,.
4. 세례가 표하는 은혜 네 가지
세례가 표하는 은혜는 무엇일까요?
세례와 성찬은 그것 자체가 은혜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세례를 받았다고 거듭나는 것이 아니라 거듭남을 표하는 것입니다. 세례 받아 구원 받는 것이 아닙니다. 세례에 중생의 은혜가 있는 것이 아니라, 믿어서 구원에 이르고 믿어서 거듭납니다. 이것을 인치고, 표하는 것이 세례입니다.
세례가 표하는 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회개, 죄사함, 씻음을 표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죄를 사하시면 우리가 회개합니다. 죄를 사하시는 은혜를 우리를 회개를 시키십니다. 회개에는 공로가 없습니다. 기도를 많이 해서 회개가 터졌다는 것이 아예 들린 것은 아니지만 본질은 아닙니다. 회개는 은혜로 말미암습니다. 크게 꼬꾸라져야 회개가 아닙니다. 얌전히 회개하는 이도 있고 격하게 회개하는 이도 있다. 주님이 주시는 것은 화목입니다. 회개는 화목에 이르는 것이지, 자기 공로 자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둘째, 내가 그리스도의 것이라는 것을 표합니다. 세례는 자기 부인을 이야기합니다. 무엇을 하듯 내 것을 주장하지 않습니다. 초대교회에 동굴에서 예배드릴 때는 세례 받는 것이 그야말로 그리스도의 것,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구약으로 말하면, 할례를 받고, ‘내가 아브라함의 집 사람이야’라고 하는 것이듯, 신약에서는 세례를 받고, ‘내가 그리스도의 영을 받아 그리스도의 것이 되었다’라고 얘기하는 것입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시는 것입니다.
셋째, 예수와 함께 살고, 예수와 함께 죽고, 예수와 함께 일으킴을 받고, 예수와 함께 보좌 우편에 앉는 것을 표합니다. 에베소서 2:5-6에서 강하게 나타납니다.
세례의 표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무슨 환상을 보고 꿈을 꿉니까? 이것이 그리스도와 함께 살고 죽고 일으킴을 받고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는 것입니다.
넷째, 빛이신 그리스도와 합하여 빛의 자녀가 되고 빛을 드러내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본문에서도 가르친 것을 지키게 하라고 하십니다. 세례를 받음을 빛이 임함을 말합니다. 빛이 임하면 빛을 드러내지 않을 수 없습니다. 향이 임하면 향을 숨길 수 없습니다. 향을 내려고 노력하지 말고, 향이신 그리스도를 믿으십시오. 그러지 않고 향을 내려고 하면 내 공로가 됩니다. 영적인 순서는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그 그리스도가 드러나는 것입니다. 행실은 믿음의 열매입니다. 나무가 제대로 서 있기만 하면 열매는 저절로 맺힙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나무입니다. 지혜로운 농부는 나무의 흙갈이를 해 주고 가지치기도 합니다. 이것은 열매 가꾸는 것이 아니라 나무를 가꾸는 것입니다. 행실을 가꾸는 것이 아니라 믿음을 가꾸어야 합니다. 믿음을 가꾸어야 행실이 맺힙니다. 이것이 우리의 신앙입니다. 세례를 받고 내 힘으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를 붙들어야 합니다. 신앙생활은 어려운 것 없습니다. 그리스도가 내 안에 계심을 믿으십시오. 오늘 말씀에 위로가 되는 것은 세상 끝날까지 내가 너희와 함께 하신다 하셨습니다.
5. 세례의 대상
세례는 어른만 받는 것이 아니라 아이들도 받습니다. 구약 때의 할례는 육체를 베는 것이지만, 구약의 할례는 모형이고, 실체는 신약 시대의 그리스도의 할례입니다. 그리스도의 할례는 유아세례입니다. 오늘날 유아세례는 그리스도를 믿는 언약의 약속 가운데서 주어지는 것입니다. 신약시대의 할례는 그리스도를 믿어 받는 것입니다. 유아세례는 이렇게 성경적 근거를 갖고 있습니다. 아브라함, 모세, 다윗 등은 하나님과 언약을 맺을 때 “너희와 너희 자손에게”라고 합니다. 언약은 당대뿐만 아니라 후대로 이어집니다.
신약을 보면, 통상 어느 가정에 가서 세례를 줄 때는 가족 전부에게 세례를 주었습니다. 자주 장사 루디아, 간수장도 가족이 세례를 받았습니다. 회당장 그리스보도 가족이 전부 세례를 받았습니다. 모든 민족을 제자를 삼아 세례를 주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민족을 넘어 땅끝까지, 그리고 남녀, 노소를 불문하고 세례를 줄 것을 의미합니다. 침례교는 유아세례를 거부합니다. 이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우리는 세례를 줍니다. 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특별히, 부부의 어느 한 편만 믿어도 자녀에게 세례를 줍니다. 고린도전서 7:14를 보면, 부부 중 한 편이 믿으면 그로 인하여 자녀가 깨끗하게 된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부부는 한 몸이기 때문에 그 자녀는 깨끗하게 됩니다.
6. 결론
세례의 큰 능력은 세례를 주는 물에 있는 것이 아니라 물은 거듭남의 표입니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라고 했듯이, 보혜사 성령이 우리에게 임하기 때문에 거듭납니다. 그래서 세례를 두 번 받지 않습니다. 순복음은 성령 세례를 따로 또 얘기합니다. 우리는 세례가 하나밖에 없습니다. 물세례는 성령 세례를 표하는 것입니다. 방언을 받아야 성령 세례를 받았다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죄 사함을 받으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1:18을 보면, 말씀으로 우리를 낳았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았다고 했습니다. 베드로전서 1:23-25을 보면, “너희가 거듭난 것은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 이 말씀을 잘 붙드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거듭난 것은 썩어질 씨, 물로 된 것이 아니라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된 것입니다. 세례나 성찬은 물이나 떡과 잔에 효력이 있는 것이 아니라 제정의 말씀에 능력이 있습니다. 이것이 세세토록 시들지도 않고 마르지도 않습니다.
요새 어렵습니다. 이럴 때일수록 열매가 아니라 나무, 믿음이 중요함을 기억합시다. 흔들리지 말고 조심하며 지내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