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906][십자가지기교회 주일낮예배: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33)] 성찬: 성화의 비밀 (고전 11:23-27) 문병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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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906][십자가지기교회 주일낮예배: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33)] 성찬: 성화의 비밀 (고전 11:23-27) 문병호 목사 


23   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 주께 받은 것이니 곧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떡을 가지사

24   축사하시고 떼어 이르시되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25   식후에 또한 그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셨으니

26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그가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

27   그러므로 누구든지 주의 떡이나 잔을 합당하지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의 몸과 피에 대하여 죄를 짓는 것이니라


*음성파일: 게시물 하단 "관련링크"에서 청취 혹은 내려받기 가능합니다.



<녹취록>


1. 오직 기독교에만 있는 몸의 부활


우리가 살다보면 몸이 참 유익합니다. 몸이 있어서 향기도 맡고 맛도 보고, 몸이 있어서 다니기도 하고 또 운동도 해서 기분도 좋아지고 등산도 하고, 몸이 참 좋습니다. 그래서 몸이 건강해야 됩니다. 몸이 건강하지 않으면 어려움이 많습니다. 좋을 때는 참 한 없이 좋은 것이 몸인데 몸이 아프면 또 몸 만큼 힘든 것도 없습니다. 몸이 없으면 안 아플 텐데 영혼만 있으면 안 아플 텐데 이런 생각을 우리가 할 수 있습니다. 정신은 말짱한데, 더 말짱한데, 몸은 너무나 힘들고 움직이지도 않고 고통스럽습니다. 이럴 때는 그렇게 생각해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저는 그렇게까지 생각해 본적은 없지만, ‘아, 몸이 없으면 좋겠다. 그냥 영혼만 있으면 좋겠다.’ 그런 생각을 해볼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너무 몸이 고난하고, 살다보면 전쟁의 위험도 있고, 당장 몸 때문에 먹어야 되고, 또 창에 찔릴까봐 피해야 되고, 동굴에 숨어야 되고. 

이러니까 플라톤이나 이런 철학자들은 육체와 영혼을 일단 분리해서 보기 시작했고, 그리고 ‘육체는 저급하다.’ 그리고 ‘육체는 감옥이다.’ 이렇게 이야기 했습니다. 그래서 이 현세의 삶 가운데 육신의 감옥 안에 있지만 이 현세의 삶을 떠나면, 곧 죽으면 육신을 버리고 영혼으로만 산다, 그래서 죽음 이후에 복이 있다, 머 이런 것입니다. 대체로 인류가 생각하는 종교성은 여기까지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 고통이 많다, 불교는 무슨 고해다, 고통의 바다다, 이렇게도 이야기 하고, 모든 고통이 얼마나 많은지 숫자도 헤아릴 수 없어 이것저것 이야기 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공통점이 무엇입니까? 육신은 저급하다는 것입니다. 육신은 버려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기독교만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죽고 나서 영혼과 육체가 분리되지만, 그리하여 이제 영혼으로만 천국에 인격으로 거하지만, 그것이 끝이 아니라 부활이 있습니다. 다시 영혼과 육체가 연합하여, 결합하여 몸을 이루고 그것이 온전한 상태로 영원히 영생을 누리는 그 상태, 바로 부활이 있습니다. 왜 우리 기독교는 부활이 있겠습니까? 이것을 초대교회 철학자들은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헬라 철학자들은 이것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자기들은 ‘육신은 저급하고, 그래서 버리고 영혼으로만 있으면 좋을 것 같은데 왜 기독교는 부활을 이야기 하는가?’ 그래서 부활의 도를 전하는 자들을 핍박하고 부활이 없다 하고. 그리고 그리스도를 믿겠는데, 부활은 못 믿겠다 이것입니다. 그리고 나아가서 하나님의 아들이 저급한 육신으로 온다, 이것도 못 믿겠다. 그래서 성육신도 못 믿겠다, 부활도 못 믿겠다. 그런데 우리가 복음서나, 또 특별히 사도 요한이 전하는 글이나 또 바울이 전하는 글에 보면 바로 성육신과 부활 이게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 됩니다. 그래서 죽음이 없으면 부활이 없고. 



2. 기독교의 핵심 진리인 부활과 성찬


왜 우리는 이렇게 몸의 부활을 이야기합니까? 왜 다시 영혼과 육체가 만나는 것을 이야기 합니까?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영혼과 육체의 몸으로 오셔서 모든 질고와 환난을 겪으시고, 고난을 겪으시고, 그리고 우리를 구원 하셔서, 그 몸으로 구원하셔서, 이제 다시 부활하는 몸은 그 몸이 어떤 눈물이나 애통이나 질병이나 썩어짐에 종속되지 아니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그 은혜로 영화로운 몸으로, 완전한 몸으로 그 소망이 있기 때문에 바로 부활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부활의 몸이 여전히 아프고, 부활의 몸이 여전히 고통스럽고, 부활의 몸이 여전히 썩고, 부활의 몸이 여전히 수치스럽다면 우리는 아무 소망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셔서 자기 몸을 우리에게 주시고, 그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의 아들이 되셔서 우리와 동일한 영혼과 육체의 몸을 가지시고 그 가운데 상하고 찔리시고(사 53:5), 그리고 모든 질고를 겪으시고(사 53:4), 이사야 53장 4절의 ‘질고’라는 것은 “그가 우리를 위하여 질고를 겪으셨다” 특별히 질고라는 것은 영혼의 고통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사야 53장 5절에,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찔리고 상함은 특별히 육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가 이사야 53장 4절 질고, 영혼의 고통을 겪으시고, 5절, 바로 상하고 찔리고, 곧 육체의 고통을 겪으시고, 그래서 이사야 53장 10절에 보면 바로 우리를 위하여 ‘속건제물’로 드려지셨다. 벌써 이사야가 예언한 것입니다. 그가 영혼의 질고를 겪으시고 육신의 상함과 찔림 가운데 곧 육신으로 죽으심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를 위하여 속건제물로 드려지심은, 여기 이사야 53장 10절에 속건제물은 ‘속죄제물’로 해석해도 됩니다. 번역해도 됩니다. ‘아샴’이라고 하는데, 속건제물, 속죄제물로 드려서, 아주 중요한 말씀입니다. 아버지의 기뻐하시는 뜻을 성취하리로다. 이사야 53장 10절입니다. 아버지의 기뻐하시는 뜻을 성취하리로다. 

자, 여기에 이미 예언된 말씀입니다. 이사야 53장에서 4절, 5절, 10절을 대표적으로 말씀드렸지만, 아버지의 기뻐하시는 뜻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그의 백성을 자녀 삼는 것입니다. 바로 우리 믿는 성도들, 신자들을 자녀 삼는 것인데, 이를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혼의 고통을 겪으시고 육신의 고통을 겪으시는, 영혼과 육신의 몸 가운데서 속건제물, 속죄제물, 화목제물로 드려지셔서 우리의 구원을 이루신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여 주님께서 영혼과 육체로 오셔서 우리를 위하여 영혼과 육체의 고난을 겪으시고 우리를 위하여 속건제물로 드리셔서 아버지의 뜻을 이루느냐? 여러분들, ‘이리하여 아버지의 뜻을 이룬, 이리하여 의를 이룸이 합당하다’ 이 말씀을 기억하시죠? 예수님이 세례 받으실 때, 세례 요한이 ‘그리 마옵소서’ 할 때 예수님이 머라고 하셨습니까? “이리하여 의를 이룸이 합당하다.” 똑같습니다, 이 말씀이. “이리하여 의를 이룸이 합당하다.” 예수님이 세례를 받아서 의를 이룬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영혼과 육신의 몸 가운데서, 우리 자리에서 세례를 받으시는, 죄가 없으시면서 죄인의 세례를 받으시고, 그리고 속건제물로 드려지셔서, 죄로 인한 질고와, 특별히 질고는 죄로 인한 고통이거든요, 죄로 인한 질고와 그리고 상함과 찔림을 받으시는, 이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이루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우리가 그치면 안 됩니다. 예수님이 왜 육신의 몸을, 영혼을 우리를 위하여 속건제물로 드리셨을까요? 그것은 바로 죽음에 머물기 위한 것이 아니라 죽어 다시 살아나시기 위한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부활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영혼과 육신의 몸으로 오셔서 죽으신 것은 그 몸으로 부활하시고자 하심입니다. 그 몸으로 부활하신 것은 부활의 첫 열매로 우리를 부활의 다음 열매로 삼기 위하심입니다. 그러면 우리를 예수님의 부활의 첫 열매에 동참하는 둘째 열매로 삼기 위함입니다. 부활에 참여한다(롬 6:5). 우리가 그의 죽음과 부활에 참여하게 되는 것,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구원을 이루시는 뜻입니다. 그것은 영혼과 육체의 몸 가운데의 부활입니다. 몸의 부활입니다. 이 몸의 부활이 하나님이 뜻하시는 영생의 모습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의 백성이 영혼으로만 사는 것을 원치 아니하시고 영혼과 육신의 몸으로 영원히 사는 것을 원하십니다. 누구와 함께? 그리스도와 함께.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입니다. 이것이 구원의 작정이고, 이것은 어떤 철학에도 어떤 세속 종교에도 없습니다. 오직 우리 기독교에만 유일하게 있습니다. 왜요?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의 아들이 되신 성육신은 기독교 외에는 없습니다. 유일한 기독교의 진리이고 말씀입니다. 이것을 기념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이 바로 성찬입니다. 



3. 성찬


1) 세례와 성찬의 정의


그래서 우리가 성찬에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에 참여합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아예 성찬을 몸과 피의 성례라고 정의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의 성례다. 우리의 가장 큰 소망이 무엇입니까? 부활입니다. 사도 바울은 뭐라고 했습니까? 부활이 없으면 복음이 헛되다, 믿음도 헛되다, 그리스도의 죽음도 헛되다, 우리의 전하는 것도 헛되다, 부활이 없으면 다 헛되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무엇입니까? 바로 우리 기독교 진리를 직시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우리 기독교의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 우리가 살과 피로, 그의 살과 피에 연합하여서, 우리가 그와 함께 죽고 그와 함께 부활해서 그리하여 그의 신부로서 영원히 함께 사는 것, 이것을 이 땅에서 미리, 이미 인침을 받은 그 자격을 갖추는 것이 세례라면, 이제 그 자격의 신분을 누리는 것이 바로 성찬입니다. 

지난주에 우리는 세례에 대해서 보았습니다. 오늘 말씀은 성찬입니다. 우리가 여전히 이 땅에 살면서 육신의 부활, 몸의 부활에 소망이 없다면 그것은 기독교를 기독교답지 않게 믿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래서 ‘부활의 소망이다.’ 여러분, 부활의 소망을 갖고 있습니까? ‘부활의 소망이다.’ 어떻게 보면 이 땅에서 우리에게 질고가 많습니다. 코로나 19도 육신의 질고입니다. 인간이 대단한 것 같아도 1년 내내 코로나라고 해서 현미경으로 찍은 무슨 왕관 같이, 코로나가 왕관이라는 뜻이잖아요, 왕관같이 생긴 바이러스 그것만 보지 우리가 무엇을 압니까? 전부다 유추해서 이럴 때는 어떻더라, 이럴 때는 머 그런 변종이다. 인간이 아무리 달에 가고 화성을 탐사하고 목성까지 간다고 해도 그 눈에 안 보이는 질병하나, 우리 육신이 당하는 이 고통 하나 해결하지 못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겨우 한다는 것이 마스트 써라. 어떻게 보면 이것은 원시시대하고 똑같은 것 아닙니까? 무엇이 들어오니 마스크 써라, 이것은 누구라도 하는 이야기 아닙니까?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이 이것 밖에 없습니다. 

어떻게 보면 우리가 이럴 때 생각해 보는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몸을 저급하고 몸을 벗어나서 영혼으로만 사는 그러한 세속적인, 불교적인 그러한 해탈 개념이 아니라 ‘우리는 몸의 부활을 소망한다’ 이 말입니다. 그 부활의 소망을 표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이 바로 세례와 성찬인데, 특별히 세례는 그러한 부활의 생명을 인침을 받는 것, 그런 부활의 생명의 신분을 갖는 것이 세례라면, 성찬은 그 부활의 새것으로, 부활의 신분으로 살아가는 은혜, 그것을 우리에게 제시해 주는 것이 바로 성찬입니다. 그래서 세례가 성도의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시작의 표라면, 성찬은 성도의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계속의 표입니다. 그래서 세례는 시작이고 생명이고, 성찬은 바로 그 생명 가운데 누림, 열매, 그래서 자라감, 세례가 생명이라면 성찬은 생활입니다. 그것을 기념하는 것입니다. 신약의 성례는 오직 이 세례와 성찬 두 가지 밖에 없습니다. 


2) 성찬과 성육신 신앙


오늘 말씀에 보면 23절에 “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 주께 받은 것이니.” 이런 말씀은 잘 합니다. 당연히 하나님의 영감된 말씀을 기록하는 사도 바울인데, 당연히 성경은 다 그렇습니다. 그러나 오늘 특별히 보면, ‘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 주께 받은 것이니’ 먼저 이렇게 서론을 뗍니다. 운을 뗍니다. 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이 무엇이라는 것입니까? 간단하게 바로 그 밑에 입니다. 여기서는 지금 성찬을 이야기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성찬은 아까 말씀과 같이 부활의 신앙입니다. 부활의 신앙. 성육신 신앙이 있기 때문에 성찬의 아멘이 있는 것입니다. 부활의 신앙이 없고, 성육신 신앙이 없는데 성찬이다, 오늘날 많습니다. 자유주의 신학, 잘못된 신학. 부활은 안 믿으면서, 성육신은 제대로 안 믿으면서, 모여서 매일 성찬만 거행하자고 그럽니다. 부산에서 WCC 할 때 양산 통도사의 중도 부르고, 그렇게 해서 성찬에 참여하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저 아프리카에서 WCC 할 때는 온갖 잡신들, 무당 푸닥거리 하는 사람들도 다 불러가지고 같이 오늘 우리가 하나가 되었다고 하면서 성찬하고, 그것은 성찬이 아닙니다. 

성찬은 성육신 신앙에 서 있어야 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의 아들이 되셔서 그 말씀이 육신이 되사, 그 말씀이 사람들의 생명이요, 빛이요, 생명의 말씀, 그래서 그가 그 육신 가운데 상하고 찢기고 질고를 당하고, 그리하여 그 육신이 휘장이고 그 육신이 찢어져서 지성소가 찢어지고 그 속으로 우리가 들어가고, 이 성육신의 신앙. 그리하여 그의 죽음과 연합하고 그의 부활과 연합하는 이 부활의 신앙,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의 신앙, 이것이 아멘 될 때 세례와 성찬이 있는 것입니다. 


3) 수찬정지


그렇기 때문에 성찬에 참여하지 못한다는 것은 사실상 죽음을 뜻합니다. 그래서 죄를 짓고 성령의 능력을 부인하고, 그래서 권징 당하고, 이러면 교회에서 쫓겨나는 것이 수찬 정지입니다. 성찬에 참여하지 못하게 하면 사실상 그것은 죽은 몸입니다. 그것이 바로 권징입니다. 치리입니다. 수찬정지, 그러면 성찬에 참여 안 하면 되지, 믿으면 되지, 그것이 압니다.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닙니다. 

바로 오늘 보면, ‘내가 전한 것은 부활의 신앙’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부활의 신앙을 고린도전서 15장에서 가장 길게 부활에 대한 신앙을 썼습니다. 그 부활의 신앙이 핵심인데, 그 부활의 신앙을 여기서는 성찬을 가지고 이야기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아셔야 합니다. 그래서 주께서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입니다. 


4) 성찬과 말씀의 제정


26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주의 죽으심을 그가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다.” 이게 다 부활 신앙입니다. 종말 신앙입니다. 이 부활 신앙, 종말 신앙에 무엇이 있느냐? 오늘 23절, 25절에 성찬에 제정이 있다 이 말입니다. 이것을 우리가 아셔야 됩니다. 주께서 날 위해 죽으시고 우리가 그와 함께 죽고, 주께서 나를 위해 부활하시고 우리가 그와 함께 일어나고, 그와 함께 살리시고 일어나고 보좌 우편에 앉히신지라. 지난주에도 했습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나고 함께 일으킴을 받고 함께 보좌 우편에 앉히신지라. 그래서 성찬이라는 것이 바로 여기에 위치하고 있다. 이런 말은 잘 안하거든요, 내가 너희에게 받은 것은 주께 받은 것이니, 당연히 말하죠, 주께 받은 거죠. 그런데 이 주께 받았다는 것은 특별히 사도 바울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다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서 주님께 들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보면 성찬은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에 오늘 이 말씀과 거의 비슷하게 “먼저 떡을 가지고 축사하시고 떼어 가라사대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먹을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이것은 마태, 마가, 누가에 다 나옵니다. 그리고 “식후에 잔을 가지사 또 축복하고 가라사대 이 잔은 새 언약의 피다.” 이것도 조금 내용은 다르지만 마태, 마가, 누가에 다 나옵니다. 요한복음은 이 말씀이 직접적으로 안 나옵니다. 그러나 이것은 바로 주께서 잡히시던 밤, 마가 다락방에 그때, 바로 잡하시기, 겟세마네 기도하러 가시고 잡히시잖아요, 가룟 유다가 배반해서 로마 병사들이 몽치를 들고 와서 잡잖아요. 예수님이 잡히시는데, 그 밤에 요한복음에 보면 마가다락방에서 성령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 14장에서 16장. 그때도 가만히 보시면 요한복음 15장에 무엇이 나옵니까?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 한 몸 됨입니다. 그것이 바로 성찬입니다. 성찬에 대한 말씀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4장, 16장도 바로 성령의 오심에 대한 말씀과 함께, 그 성령의 오심과 말씀과 함께 부활의 신앙을 이야기 하는데, 그것이 바로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로, 그것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그의 살을 먹고 그의 피를 마시고, 그리하여 한 몸 되고 자라가는, 그러니까 바로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고 그리하여 열매를 맺는 그것을 우리에게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5) 성찬과 성화: 계속적 거행


성찬은 성화의 은혜를 이야기 합니다. 세례는 단번에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그래서 법정적으로 그 은혜를 인칩니다. 그래서 세례는 그 순간 종국적으로 베풀어집니다. 그래서 두 번 세례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성찬은 반복적, 계속적인 성화의 은혜를 이야기하기 때문에 이생의 삶 가운데서 누차 거행이 됩니다. 그래서 성찬을 우리가 정기적으로 행하고. 성찬은 꼭 언제 행하라 그게 아닙니다. 성찬은 우리가 행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례는 또 행하고 또 행하고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특별히 세례는 교회적으로 이야기 하면 입교하는 것이기 때문에 한 번만 해야 됩니다. 세례는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지체로서 이제 한 몸을 이루는 그 교회의 지체가 되는 것이기 때문에 세례는 한 번만, 입교는 한 번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찬은 교회 안에서 머리이신 그리스도께로 날마다 자라가는 것이기 때문에 반복해서 계속해서 성찬은 참여하는 것입니다. “아, 성찬 참여 많이 했는데 이번에 빠져도 안 되겠습니까?” 그것은 안 됩니다. 


6) 기념으로서의 성찬


세례의 씻음은 하나님의 자녀와 교인이 되는 신분을 얻음을 이야기 하고, 성찬의 먹음과 마심은 그 신분을 누리는 것을 이야기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례와 성찬은 그리스도의 의로 신분을 얻고 그리스도의 의로 그 신분을 누리는, 열매를 맺는 그것을 기념하고 찬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영적인 봉헌이다’ 이렇게 말을 하고 있습니다. 제가 성경을 많이 인용하지만 지금은 웨스트민스터 우리가 좀 또 강해의 성격도 있기 때문에 이런 말씀을 드립니다. 그래서 세례든 성찬이든 기억하고 감사하고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우리 같이 한 번 해볼까요. 기억, 감사, 송영. 기억하고 감사하고 영광을 올리는 것입니다. 이것을 한 단어로 오늘 24절 25절에 보면 ‘기념’이라고 합니다. 라틴어로 ‘commemoratio’(코메모라티오)라고 합니다. ‘commemoration’. 어떻게 보면 기억을 모은다는 그런 뜻도 있지만, 단순히 그런 문자적인 의미만 아니라, 기억하고 그리고 감사하고 그리고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7) 영적임재설


이 기념은 단순히 과거의 것을 기억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우리가 성찬이다 이러면 주께서 죽으심을 오실 때까지 증거하라 26절에 이렇게 하니까 죽으심만을 자꾸 이야기 하는데 아닙니다. 성찬은 지금 현존하시는 보좌 우편에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그 예수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찬을 바로 아셔야 됩니다. 그 몸이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은 것을 기억하는 것이지, 성찬의 현존은, 지금 떡과 잔에 참여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현존입니다. 그것은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보좌 우편에 계신, 사람으로서는 보좌 우편에 계시고, 인성으로서는 보좌 우편에 계시고, 신성으로서는 모든 곳에 계신, 그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찬의 의미는 두 가지입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현존, 그리고 살과 피를 먹고 마심. 그러면 지금 예수 그리스도는 몸으로는 보좌 우편에 계시잖아요? 그래서 우리는 영적으로 먹고 마심. 제가 너무 구체적인 신학적인 이야기까지는 하진 않지만, 여기까지는 우리가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물질적으로 육체적으로 먹고 마시는 것이 아니라, 로마 카톨릭은 떡과 잔이 살과 피로 변화 되어서 그 변화된 살과 피를 먹고 마신다, 그것을 육체적으로 먹고 마신다는 것입니다. 물질적으로 먹고 마신다는 것입니다. 그건 되지 않는 이야기입니다. 그리스도의 인성은 보좌 우편에 계십니다. 저 루터란도 잘못된 것입니다. ‘떡과 잔이 살과 피이다’라고 분명히 오늘 말씀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내 몸이니’ 그리고 ‘새 언약이니’ 딱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새 언약의 피입니다. 그러니까 ‘몸이다, 피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루터란들도 성찬을 잘못 거행하고 있습니다. 루터란은 떡과 잔 안에 있거나, 옆에 있거나, 아래에 있는 것을 먹고 마신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전부다 이것은 실제적이지 않거나 또 영적이지 않거나 그런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성찬에 어떻게 참여합니까? 바로 성찬에는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참 하나님이시고 참 사람이심으로 그는 보좌 우편에 영혼과 육체로 계시지만 하나님으로서 모든 곳에 계시기 때문에 우리가 그 살과 피에 현존, 그리고 그 살과 피를 먹고 마심을 영적으로 합니다. 그래서 꼭 고백할 것은 영적으로 살과 피를 먹고 마심은 실제적으로 먹고 마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육체적으로 물질적으로 먹고 마시는 것은 아닙니다. 이것을 가장 정확하게 두 번 세 번 이야기 하는 곳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이고, 대요리문답, 소요리문답에 다 나오는 것입니다. 성찬론은 이것만이 진리입니다. 설교에서 이렇게 말하면 꾀 좀 복잡하게 느껴질지 모르겠습니다. 이것을 우리가 ‘영적임재설’이다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8) 성찬과 말씀의 제정: ‘이다’


떡과 잔이 살과 피로 변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떡과 잔이 살과 피로 변했으니까 이제 떡과 잔은 중요하다고 하면서 그것을 높이 쳐들어서 흔들고 숭배하고 숭앙하고 또 그것을 가지고 다니면서 흔들고 그리고 그것을 어느 병에 보관해 가지고 지금도 노틀담 어느 구석에 모셔 넣고, 그런 것은 다 안 된다고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물질이 아님으로, 물질을 숭배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로마 카톨릭에서 이렇게 높이거나 하잖아요, 잔을 이렇게 높이거나 하잖아요. 그것은 안 된다 이 말입니다. 막 들고 다니면서 이렇게 하거나 안 된다 이 말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꽉 모셔 놓는 거나 그거 안 된다 이 말입니다. 왜입니까? 성찬의 의미는 말씀의 제정에 따라. 그 말씀의 제정이 무엇입니까? 오늘 말씀입니다. 마태, 마가, 누가, 그리고 그 말씀을 주께 받았다라고 고린도전서에도 전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고린도전서의 오늘 이 말씀은 사도들이 전한, 마태, 마가, 누가가 전한 그 말씀보다 조금 뒤졌거니, 조금 머 해석이거니 이렇게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바로 주님이 다시 들려주신 말씀입니다. 그래서 마태, 마가, 누가, 고린도전서 11장의 말씀은 같이 보시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제정된 말씀입니다. 제정된 말씀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주님이 말씀하신 것입니다. 잡히시던 밤에 잔을 들어 축복하시고 떼어 가라사대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나의 몸이라고 분명히 했습니다. 너희를 위하는 나의 몸이다, 대속의 몸이다, 이 말입니다. 그리고 잔을 가지고 식후에 이것은 새 언약의 피다. 새 언약이 무엇입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 자신을 주셔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이것은 새 언약의 피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 마다 나를 기념하라. 그래서 제정된 말씀이 있습니다. 그 말씀이 무엇입니까? ‘이다’라는 것입니다. 분명히 ‘이다’입니다, ‘떡이 몸이다.’ ‘잔이 피이다.’ ‘이다’입니다. 분명히 제정된 말씀이 있습니다. 


9) 성찬: 제정된 말씀에 따라 성령의 역사로


그런데 이 ‘이다’는 제정된 말씀은, 주님이 제정하신 말씀은 어떻게 역사합니까? 성령의 능력으로 역사한다 이 말입니다. 사제가 기도해서 떡과 잔이 살과 피로 변하고 그것이 아니라 이 말입니다. 성령의 역사가 있다 이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 성찬에는 성령의 역사, 그것을 특별히 ‘우리가 우리의 마음을 들어 올려’ 이런 표현을 많이 씁니다. 그것은 회개하고 말씀 읽고. 그래서 옛날에는 성찬 거행하기 한 달 전부터 계속 복음서 같은 것을 가르쳤습니다, 특별히 예수님 죽음과 부활. 그리고 성찬을 거행했습니다. 그게 성령의 역사입니다. 우리도 그렇게 해야 됩니다. 말씀을 계속, 그때 많이, 성찬 전에 더 많이 가르쳐야 합니다. 특별히 죽으심과 부활의 말씀. 

그 말씀을 가르치고, 성령의 역사, 그래서 분별해서 믿음으로 받아야 합니다. 우리는 분별해서 믿음으로 받는 이것을 영적인 먹음이라고 합니다. 마심이란 말까지 써도 되지만 잘 안 씁니다. 영적인 먹음이라고만 합니다. 이것은 무엇입니까? 성령의 역사로 분별해서 먹어야 합니다. 

저 성당, 로마 카톨릭 같이 사제가 축복기도하면 사제의 공로로 떡과 잔이 살과 피로 변해서 누가 먹든지 그냥 그것은 살과 피이고, 이것은 말이 안 됩니다. 우리는 언제 떡과 잔이 살과 피이다 입니까? 우리는 받아 먹을 때입니다. 무슨 역사로? 말씀의 제정에 따른 성령의 역사. 주의 말씀은 능치 못함이 없음이다. 무엇이 우리가 모순입니까, 성찬이. 하나님이, 예수님이 제정된 말씀을 주시고 성령의 역사가 있으면, 우리는 성육신을 믿잖아요, 말씀에 따라 믿잖아요. 15장에 나옵니다. 말씀에 따라 죽으시고 부활하셨다고 나옵니다. 우리는 말씀에 따라 성육신을 믿고 말씀에 따라 부활을 믿고 말씀에 따라 성찬을 믿는다 이 말입니다. 그 제정된 말씀을 성령의 역사로. 


10) 성찬의 세 가지 요소: 보이는 표징, 제정의 말씀(약속), 성령의 역사


그래서 성찬의 세 가지 요소는, 첫째, 표징이 있어야 됩니다. 표징이 무엇입니까? 세례 때는 물이고 성찬 때는 떡과 잔이 표징이라고 합니다. 떡과 잔 이건 보이는 것입니다. 성례에는 보이는 표징이 있어야 됩니다. 둘째, 약속의 말씀이 있어야 됩니다. 그게 제정의 말씀입니다. 지난주에는 우리가 제정의 말씀, 마태복음 28장 19절, 20절 봤습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이 제정의 말씀입니다. 셋째, 성령의 역사가 있어야 됩니다. 그래서 기도하고 회개하고, 마음을 들어 올리란 말은 꼭 이때 쓰는 말입니다. 제가 유학 가서도 이것을 설교로 한 번 들은 적이 있는데, 이 때 쓰는 것이 바로 사닥다리, 야곱의 사닥다리입니다. 우리가 하늘로 올라가고 내려가고, 천사가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 영적인 그것 있잖아요. 그래서 성찬의 세 가지 요소를 말하라고 하면 보이는 표징과 제정의 말씀과 이걸 약속이라고도 해요, 제정의 말씀과 성령의 역사가 있어야 됩니다. 


11) 칼빈의 성찬론과 다양한 성찬론들: 칼빈의 성찬론만이 옳다.


이 성찬론은 칼빈의 성찬론 밖에 없습니다. 나머진 다 틀립니다. 로마 카톨릭은 떡과 잔이 살과 피로 변한다고 하는데, 이것을 우리가 ‘화체설’이라고 합니다. 틀립니다. 루터란은 또 ‘떡과 잔이 살과 피이다’라고 안 하고 ‘살과 피가 떡과 잔과 함께 있다’라고 이야기 합니다. 성경에 ‘함께 있다’는 말이 어디에 있습니까, ‘이다’라고 그랬지. 이것은 루터란입니다. 이것을 ‘함께 있다,’ ‘공재설’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저 인문주의자들 쯔빙글리라고 하는 사람이 있고, 블링거라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특별히 쯔빙글리라고 하는 사람은 ‘떡과 잔은 살과 피를 상징할 뿐이다’ 이렇게 이야기 했습니다. 그것은 실제가 아니라고 이야기 했습니다. 그것도 ‘상징설’이라고 합니다. 오늘 설교에 너무 이런 전문적인 용어를 많이 쓰는지 모르겠는데, 오늘은 특별히 우리가, 제가 전에도 머 할 때 이렇게 안 했습니다 만은, 우리가 그래도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배울 때는 했어요, 제가. 그런데 오늘은 특별히 우리가 웨스트민스터를 우리가 조목에 따라 주일 설교를 하고 있기 때문에 조금 전문적인 그런 이야기를 제가 해 보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찬에서는 말씀과 성령과 표징과 그 요소들이 있어야 됩니다. 


12) 함께 행해져야 하는 분병과 분잔


우리 성찬은 말씀에 따라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말씀에 따라서 떡과 잔이 살과 피이다. 그렇기 때문에 꼭 두 번 각각 받아야 됩니다. 로마 카톨릭은 또 이것도 잘못된 것입니다. 한 표징 안에 살과 피가 같이 있다 이렇게 하면서 전병만 하나 주고 집에 보냅니다. 그것은 안 됩니다. 우리는 분병과 분잔을 함께 해야 됩니다. 그래서 떡을 받고 잔을 받고 두 번 해야 됩니다. 떡만 받아서도 안 되고, 잔만 받아서도 안 됩니다. 떡과 잔을 받아야 됩니다. 


13) 세례 받은 자만 참여할 수 있는 성찬


그리고 성찬은 세례 받은 자에게만 거행됩니다. 왜입니까?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그리스도와 연합의 시작의 표가 세례이고, 그리스도와 연합의 계속의 표가 성찬이기 때문에, 시작이 없이는 계속이 없기 때문입니다. 저는 꼭 그렇게 이야기 합니다. 그래서 세례가 없이는 성찬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말이 안 됩니다. 그래서 세례도 안 받았는데 무조건 다 성찬 주는 그것은 성찬이 아닙니다. 성찬은 말씀대로 해야 됩니다. 


14) 회중에 속한 자만 참여할 수 있는 성찬


그리고 회중에 속하지 않거나 회중 밖에 있는 사람에게 성찬을 줄 수 없습니다. 성찬은 공적으로 교회 안에서 이루어져야 됩니다. 회중도 아닌데 성찬 주거나 그것은 안 됩니다. 그리고 회중 바깥에 있는, 지금 예배를 드리지 않는데, 저 구석에서, 예를 들어, 전화 받고 있는 그분한테 성찬 안 됩니다. 성찬은 정확하게 드려야 됩니다. 


15) 실제이나 영적인 성찬


성찬은 무엇입니까? 그리스도의 현존과 그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심, 다만 실제이나 영적으로 먹고 마심. 실제입니다. 그러나 영적인 것입니다. 이게 아멘이 있어야 됩니다. 실제라고 해서 물질을 먹는 것이 아닙니다. 실제라고 해서 육체를 먹는 것이 아닙니다. 무슨 살을 뜯어 먹는 것이 거나, 피를 마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영적으로 실제입니다. 실제이나 영적으로 먹고 마십니다. 


16) 목사에게만 주어진 성례 거행권


그렇기 때문에 성찬은 말씀의 거행, 말씀 선포권이 있는 목사에게만 성례 거행권을 준 것입니다. 그래서 목사 외에는 성찬을 거행할 수가 없습니다. 장로가 성찬을 거행한다, 그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신분의 높낮이가 아니라 말씀 선포권, 성례 거행권을 함께 가지고 있는 목사가 그것을 행하는 것입니다. 


17) 성찬의 유일한 의인 그리스도의 의: 그리스도와의 연합


우리가 성찬을 거행할 때 그 성찬 자체가 공로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찬의 떡과 잔 자체가 공로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으로 받아야 됩니다. 그리스도의 의를 믿음으로 아멘 할 때, 그 떡과 잔이 살과 피로 제시가 되고, 실체가 우리 안에 역사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제가 기도했기 때문에 떡과 잔 자체가 가치가 있다, 그것은 안 됩니다. 

그리고 성찬에 참여한 것이 우리의 공로가 될 수 없습니다. 내가 성찬에 몇 번 참여했고. 또 로마 카톨릭은 성찬에 참여한 자체가 공로가 됩니다. 그래서 특별히 베드로 성당에 가서 참여한 성찬, 그것은 더 큰 공로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게 바로 순례 사상입니다. 순례라는 개념이 거기서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는 순례라는 개념이 없습니다. 

성찬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의 밖에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의 밖에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고 그가 우리를 위하여 살과 피를 주셔서 우리가 이제 그와 함께 자녀 되고, 그의 신부가 되고, 그의 접붙임을 받고,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요. 특별히 예수 그리스도께서 마가 다락방에서 가르치시고 난 다음에, 요한복음 17장에 보듯이, 17장 21절에 “하나님과 내가 하나이듯이 저들도 우리와 하나 되게 하소서” 그것이 예수님의 기도의 핵심입니다. 그것이 바로 성찬의 의미입니다. 성찬의 비밀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4. 결론: 성찬을 통해 누리는 부활의 소망과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함께 하심


여러분, 우리의 지상의 몸은 후패합니다. 썩어 갑니다. 아픕니다. 안 아픈 사람 있습니까? 아픕니다. 조건이 좋으니까 안 아픈 것입니다. 조건이 좋으니까 안 아픈 것입니다. 이것을 감사해야 됩니다. 조금만 조건을 나쁘게 하면 다 아픕니다. 일교차를 한 30도 나게만 하나님께서 만들어버리시면 다 아픕니다. 안 아프다 하지 마십시오. 그냥 안 아플 조건을 주셨다 라고 감사해야지, 나는 안 아파, 나는 견뎌, 그것은 말도 안 되는 이야기입니다. 어느 정도 일교차에, 어느 정도 견딜만 하게 했기 때문에 안 아픈 것이지 사실 안 아픈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도 그래서 일찍 하나님 나라에 가서 하나님과 함께 몸이 거하는 것이 좋겠다 라는 그런 기도까지 했었습니다. 얼마나 그 몸 때문에 상하고 찢기고 했습니까? 사도 바울이 ‘아이고, 이 몸이 없으면 물에도 안 빠질 걸, 이 몸이 없으면 맞지도 않고, 태장도 안 맞고, 곤장도 안 맞았을 걸, 이 몸이 없으면 욱여쌈도 안 당했을 걸, 이 몸이 없으면 멍석말이도 안 당했을 걸, 이 몸이 없으면 짐승의 습격도 안 당했을 걸.’ 얼마나 사도 바울이 몸 때문에 고생했습니까? 이 몸이 없으면 로마 감옥에 갇히지도 않았을 것을. 그러나 사도 바울은 일체의 비밀이 무엇이냐, 부활의 비밀을 알았다 이것입니다. 제가 여러분들께 전하는 것이겠습니까? 성경이 여러분에게 전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찬으로 하나님의 자녀 됨의 신분을 누리는 것, 그것은 부활의 소망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영육 간에 오시고 그 예수님이 영육 간에 몸으로 다 자기 자신을 드려서 죽었기 때문에 그가 질고로 그가 상하고 찢김으로 그가 고통당하심으로 우리가 온전한 구원을 누린 것입니다. 성찬의 은혜는 바로 그것에 있습니다. 

우리가 코로나로 어렵습니다. 저는 어렵다 하지만은 아마 저는 피부로 많이 못 느끼는데 정말 많이 어려운 분들이 있습니다. 저는 학교서 수업을 못하고 우리 학생들 도무지 수업이 어렵고 예배도 못 드리고 이게 참 어렵고, 정말 힘듭니다. 신학생들은 모여서 단체로 기숙사 생활을 하면서 경건 훈련이라 하는 1년 내내 프로그램들도 있는데, 이런 것 일체 못하고 있습니다. 이제 올해 학교 다니는 우리 학생들은 그것을 못하고 이제 그냥 나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이 참 마음이 아픕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에서, 이제 말씀을 마치겠지만, 영적으로 먹고 마심이 실제적이라는 것, 그래서 그 은혜를 우리에게 베풀어주시는 이 은혜가 있습니다. 우리 십자가지기 성도님, 또 이 예배 함께 참여하시는 성도님들도 모든 분들에게 하나님의 안위하심과 또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함께 하심 그 소망으로 우리가 넉넉히 굳건히 이기는 그러한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