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315][십자가지기교회 주일낮예배: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8)] 사람, 하나님의 형상 (시 8:4-8) 문병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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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315][십자가지기교회 주일낮예배: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8)] 사람, 하나님의 형상 (시 8:4-8) 문병호 목사
(시 8:4)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
(시 8:5)
그를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
(시 8:6)
주의 손으로 만드신 것을 다스리게 하시고 만물을 그의 발 아래 두셨으니
(시 8:7)
곧 모든 소와 양과 들짐승이며
(시 8:8)
공중의 새와 바다의 물고기와 바닷길에 다니는 것이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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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취록>
1.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나 자신을 아는 지식
제가 요새 기도하면서 하나님이 누구신가에 대해 묵상하고 있습니다. 당연히 우리가 이러한 묵상을 해야겠지요. 그런데, 하나님을 찾는 나는 누구인가도 생각해 봅니다. 인간은 일반 사물과는 다르게 하나님의 형상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은 사람 됨, 사람임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알려면 하나님을 먼저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형상이 무엇을 의미하지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것은 깊이 생각해 볼 부분입니다.
만물이 그대로 있을지라도, 우리가 변하여 만물을 전혀 새롭게 볼 수도 있습니다. 목련이 그대로 있어도 우리에게 전혀 다른 것이 될 수도 있습니다. 천국은 사물이 변하는 곳이라기보다는 내가 변하는 곳입니다. 지금 우리가 보는 대로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사실상,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을 갖고 있고, 하나님을 찾고 부르고, 하나님은 우리와 가까이 하시고, 하나님과 우리는 감히 인격적 교제, 사귐(요일 1:6)이 있다고 표현됩니다. 이 모든 것을 총체적으로 모을 때, 이것이 하나님의 형상 됨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형상이 이러니 이러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모든 우리의 모습들을 모아보니, 그것이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역으로 정의되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은 누구신가
저는 기도하며 "하나님은 누구신가"를 생각해 봤습니다. 과학은 10차원까지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몇 차원이실까요? 하나님은 차원이 없으십니다. 하나님은 시간과 공간, 인과관계에 구애되지 않으십니다. 우리는 그러하신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우리는 차원이 없으신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이러한 형상으로 사람이 지음을 받았고, 사람이 타락하여 그 형상을 상실했습니다. 타락 후에도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을 가지고 있는데, 왜 하나님의 형상을 상실했다고 그럴까요? 물론 사람에게 "불씨"가 남았다고 말하기도 하지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만한 것은 사람에게서 모두 상실되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구원을 받으면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 땅에서 그 회복된 형상으로 살고, 마지막 때 부활하여 그 회복된 형상이 완성된다고 합니다.
제가 "주여, 주여"라고 부르며 기도할 때, '이렇게 부르는 내 모습이 무엇이냐, 나는 어찌하여 부르짖고 있는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은혜의 모습, 즉, 예배, 기도, 부르짖는 모습입니다. 이런 모습은 천국에서도 계속됩니다. 보좌의 어린 양께 찬송을 드리고 기도를 올립니다. 이런 것이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3. 스스로 계신 하나님만이 창조주이시다
하나님은 스스로 계신 분이십니다. 스스로 계신다는 것은 피조물 가운데 있을 수 없어 설명될 수 없습니다. 스스로 계시는 분은 스스로 있지 않은 것의 창조주이십니다. 스스로 계시는 이는 하나님밖에 없고, 스스로 존재할 수 없는 것은 어떤 존재에 의해서 존재해야 하는데, 그 존재는 스스로 계신 하나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스스로 계신 분임을 '아멘' 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창조주이심을 '아멘'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역으로, 하나님이 창조주이심을 '아멘' 하는 자는 하나님이 스스로 계시는 분이심을 '아멘' 하는 것입니다.
사실상, 과학자들은 스스로 존재하는 것을 이해할 수 없기에, 세상은 그저 그렇게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든 것을 없는 데서 있게 하시는, 유일하신 스스로 계신 분이십니다. 스스로 계신 분은 공간, 시간, 인간의 판단에도 구애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이름을 물었을 때,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스스로 계신 하나님을 부르는 것은 천지의 창조주를 부르는 것입니다. 이것은 곧 나를 지으신 하나님을 부르는 것입니다.
4. 사람은 누구인가
오늘 본문인 시편 8편은 "온 땅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라고 하면 창조에 대한 노래를 담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달과 별은 우리 은하계를 넘어섭니다. 그리고 4절에서는 사람에 대해서 말씀합니다.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 시편의 기자는 모든 피조물들 가운데 사람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노래하고 있습니다. 물론 "사람"과 "인자"는 시편 기자인 다윗을 가리킬 수 있지만, 여기서는 강조적 표현입니다. "인자"는 사람에게서 난 사람입니다. 시편 8편은 천지창조와 인간창조를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 인간을 5절에서는 "그를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을 오해해서, 인간은 하나님만큼은 못해도,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히브리서 1:5과 2장에서 인용을 보면, 여기의 "인자"와 "사람"이 예수님을 칭하게 되고,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를 천사들보다 조금 못하게 했다고 인용합니다. 시편 8:1-3은 천지창조, 4-5절은 인간창조의 위대함, 6-8절은 인간의 다스림, 9절은 후렴으로서 1절을 반복합니다.
1) 하나님의 형상
창세기 1:26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여기서 "우리"는 삼위일체를 의미하기도 하고, 장엄 복수이기도 합니다. 엘로힘(하나님) 자체가 복수형입니다. 창세기 1:27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오늘 말씀을 여러분들이 귀하게 기억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1) "생기를 ... 불어넣으시니"
그러므로 스스로 계신 하나님이 자기의 형상으로 사람을 만드셨는데, 어떻게 창조하셨는지가 창세기 2:7에 나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창 2:7). "생기를 ... 불어넣으시니 ... 생령이 되니라." 제가 이 부분을 설교한 적이 없으니, 오늘은 이것을 설명하겠습니다. "생기"라는 말은 하나님의 생명입니다. 하나님의 생명을 불어넣으셨는데, '불어넣었다'는 말은 하나님의 일부를 주셨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되면 사람은 하나님의 일부가 됩니다. 그러므로 '불어넣었다'는 말은 하나님이 그 생명을 주셨다는 의미입니다. 문자적으로 하나님이 숨을 불어넣었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어떤 형체나 모양으로 이해하면 안 됩니다. 어쨌든 성경의 이 표현은 하나님의 형상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이 자기의 생명을 불어넣으셨다는 것은 하나님이 사람을 자신의 일부가 아닌,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불어넣으신 그 생명이 바로 사람의 영혼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생령이 되었습니다. 즉 살아 있는 영혼이 되었습니다.
(2) "생령이 되니라"
여기서 하나님이 생명을 불어넣으셨는데, 그 생명이 인간의 구조에 있어서는 영혼이 됩니다. 하나님의 생명이 인간의 영혼이라고 말해도 맞습니다. 그러나 엄밀하게 말하자면, 사람은 먼저 흙으로 조성이 되었는데, 이때까지는 물체입니다. 그 후 하나님이 생명을 불어넣으니, 그 순간 흙이 육체가 됩니다. 영혼이 몸은 육체라고 부르지 않기에, 흙을 육체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육체가 먼저 있고 영혼이 있게 된 것이 아니라, 영혼과 육체가 그 순간 동시에 존재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영혼과 육체의 인간 존재가 된 것입니다. 이러한 인간 존재를 하나님이 "생령이 된지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살아 있는 영혼'이라는 의미입니다.
(3) 살아 있는 영혼
요한복음 4:24에서 "하나님은 영이시니"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영이신데, 창세기 2장에서 그 하나님의 영을 사람에게 불어넣으신 것이 "생기"로 표현되었습니다. 생명을 불어넣어서 그것이 우리에게 살아 있는 영혼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최초의 아담과 하와는 살아 있는 영혼입니다. 살아 있는 영혼이란 무엇일까요? 하나님이 생명을 불어넣으시면, 그 생명은 하나님과 무관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교제하게 되고, 하나님을 알게 되고, 느끼고, 하나님을 향하여 선을 행할 의지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살아 있는 영혼입니다.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를 지으셨을 때, 그들에게 생기를 불어넣으셨느데, 즉 영혼을 불어 넣으셨는데, 그 영혼은 살아 있는 영혼입니다. 여기서 '살아 있다'라는 의미는 바로 크게 세 가지를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첫째, 여호와와 함께 있는 영혼이다.
둘째, 여호와를 경외하는 영혼이다.
셋째, 여호와의 말씀에 순종하는 영혼이다.
그래서 우리 인간이 생령이 되었다는 것, 즉 살아 있는 영혼이 되었다는 것은 여호와와 함께 있고, 여호와를 경외하며, 여호와께 존귀를 올리는 영혼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형상은 살아 있는 영혼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 가지를 떠나면 죽는 것입니다. 이것이 영적 사망입니다. 즉 하나님과 함께 있지 않고, 여호와를 경외하지 않으며, 여호와께 순종하지 않으면 그것은 죽은 것입니다.
(4) 오직 인간은 피조물임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계시는 하나님의 형상을 소유한다
고린도전서 15:45 "기록된 바 첫 사람 아담은 생령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 창세기 2:7과 고린도전서 15:45에서 공히 "생령"(living soul)이라고 번역한 것은 잘한 것입니다. 첫 사람 아담은 살아 있는 영혼이었습니다. 즉 자존하시는 하나님과 교통하는 존재입니다. 우리가 영화롭게 되면, 목련 꽃이 다르게 보입니다. 우리는 변화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을 가졌습니다. 피조된 모든 만물은 그대로 머물러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형상을 받은 우리는 스스로 존재하지 못하나 스스로 계신 하나님의 형상을 가졌습니다. 이 부분을 깊이 묵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모든 만물은 다 지어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만 스스로 계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창조주이십니다. 그런데, 하나님과 피조물 사이에서 인간만이 피조물임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계신 하나님의 형상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 드린다는 것은 하나님의 회복된 형상을 가졌다는 것이며, 매우 놀라운 일입니다. 하나님의 생기로 생령이 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다시 생령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존하시는 하나님과 교제하고 교통하고 있습니다.
2) 구원: 즉 하나님의 형상(생명) 회복
시편 8:4-5은 시편 2:7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내가 너를 낳았도다," 즉 하나님의 자녀 됨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첫 번째 특권입니다. 6-8절은 따라오는 두 번째 특권입니다. 시편 36:9 "진실로 생명의 원천이 주께 있사오니 주의 빛 안에서 우리가 빛을 보리이다." "생명의 원천이 주께 있사오니" "주의 빛." 그리고 요한복음 1:4 "그(성자)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이 생명은 살아 있는 것이며 빛입니다. 시편에는 기도한다는 개념, 복이라는 개념, 구원이라는 개념이 많이 나옵니다. 구원은 신약의 개념으로만 생각하기 쉽습니다. 시편 18:46 "여호와는 살아 계시니 나의 반석을 찬송하며 내 구원의 하나님을 높일지로다." 사실상 여호와만 살아 계십니다. 살아 계신 여호와의 형상을 가진 우리 인류는 하나님의 형상 가운데서만 살아 있습니다. 이것을 영적 생명이라고 합니다. 이 영적 생명, 즉 영혼이 육체와 결합했을 때, 육체의 생명이라고 말합니다. 죽음은 육체의 생명이 떨어져 나가고 영적 생명으로 남는 것이며, 이것이 천국에 가 있는 것입니다. 이 생명이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시편 2:12 "여호와께 피하는 모든 사람은 다 복이 있도다." 여호와께 피한다는 것은 여호와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살아 있다는 것은 '내가 네 안에, 네가 내 안에' 있는 것이고, 믿음은 여호와께 나아가는 것인데,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형상, 즉 생명의 개념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지평을 열어 줍니다. 이것은 어떤 과학으로도 설명할 수 없고, 과학을 넘어서 있습니다. 하나님은 만유의 하나님, 만유 밖의 하나님, 만유의 통일이십니다. 그 하나님과 우리가 교통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스스로 계신 하나님과 교제하고 그분께 영광을 올립니다.
시편 13:5 "나는 오직 주의 사랑을 의지하였사오니 나의 마음은 주의 구원을 기뻐하리이다." 시편 기자가 말하는 구원이란,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그 형상을 회복하여 하나님과 교제하고, 하나님을 예배하고, 순종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구원입니다.
시편 16:8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그가 나의 오른쪽에 계시므로 내가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 여호와가 내 오른쪽에 계신다는 것은 단지 수사가 아니라 자존하시는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인 우리는 모든 피조물에 갖혀 있지 않고 과학에 예속되어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사물의 이름을 짓는 존재이지 사물에 종속되는 존재가 아닙니다. 시편 16:9 "이러므로 나의 마음이 기쁘고 나의 영도 즐거워하며 내 육체도 안전히 살리니." 이것이 성경적 인간관입니다. 영혼이 하나님의 형상의 본질입니다. 왜냐하면 육체는 영혼과 함께 있다가 분리되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 육체는 부활 때 영화롭게 됩니다. 시편 16:10-11 "이는 주께서 내 영혼을 스올(지옥)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를 멸망시키지 않으실 것임이니이다 주께서 생명의 길을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충만한 기쁨이 있고 주의 오른쪽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 이 구절들을 베드로가 오순절 성령을 받고 첫 설교에서 인용했습니다. 왜냐하면 이 구절들에 핵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구원, 생명이 여호와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으로 기도할 때, 전능하신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입니다. 예배적으로 표현하면, 영광의 임재에 참여하는 것이고, 송영으로 말하자면, 그에게 영광을 돌리고 그와 함께 영광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이 형상을 인간이 받았기에 인간 창조가 위대하고 고귀한 것입니다. 시편 8:4-6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 그를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 주의 손으로 만드신 것을 다스리게 하시고 만물을 그의 발 아래 두셨으니." 인간이 이 세상을 다스리는 것보다 이전에 있는 것은 하나님과의 교제입니다. 먼저는 하나님과의 교제이고, 그것에 따라오는 것이 만물을 다스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하나님과의 교제가 깨지면, 엉컹퀴가 나고 땀흘리고 수고하게 됩니다. 이처럼 시편 8편은 창조의 노래이지만, 창조 중에서도 특별한 창조를 노래합니다.
3) 하나님은 사람과 언약을 맺기 위하여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으셨다
천사조차도 하나님이 자녀로 부르지 않았지만 사람을 자녀로 삼으셨습니다. 즉 언약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하나님의 형상을 주신 이유는 사람과 언약을 맺으시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이 사람과 언약을 맺으시려는 목적은 사람을 하나님의 자녀 삼으시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지으신 모든 뜻이 드러났습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사람을 지으셔서, 사람과 언약을 맺으시고, 사람이 그 언약에 순종하여 하나님이 사람을 자신의 자녀 삼고자 하셨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언약에 불순종하여 하나님의 자녀 됨은커녕 원래 주어진 하나님의 형상도 잃어버려 완전히 멸망에 처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아무것도 없는 것, 즉 무(無)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영접하면, 다시 생명의 빛, 생명, 생기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4) 창조의 아름다움
시편 8:1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주의 영광이 하늘을 덮었나이다." 아름답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뜻에 맞다는 의미입니다. 궁극적으로 아름다운 것은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심히 좋은 것이 아름다운 것입니다(창 1:31). "주의 영광이 하늘을 덮었나이다." 만물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선하게 지었다는 것이 아름답다는 것이다. 칼빈의 말대로, 만물은 눈부신 영광의 극장, 훈장, 거울, 옷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즉 모든 만물은 하나님의 자신의 행하심을 빛나게 드러내심입니다.
그러나 시편 8편은 만물이 아름답고, 하나님의 선하심을 드러내고, 영광을 드러낸다고 하는 데 머무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창조에 나아갑니다. 칼빈은 말하기를, 인간은 만물을 즐기는 관객이자, 하나님의 극장에서 하나님 앞에 영광을 올리는 배우라고 했습니다.
5) 만물과 예배
성경은 만물 안에서 예배를 드리는 것, 즉 예배가 온전할 때 만물이 온전함을 말씀합니다. 시편은 이런 말씀을 많이 만납니다. 시편의 구원은 하나님께 다시 돌아가는 것입니다. 즉 살아 있는 영혼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구약적 구원입니다.
시편 24:1 "땅과 거기에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 가운데에 사는 자들은 다 여호와의 것이로다." 시편 기자는 창조를 말합니다. 그러나 이어서 시편 24:3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가 누구며 그의 거룩한 곳에 설 자가 누구인가"라고 하며 성소 개념을 말합니다. 하나님께 예배하는 개념입니다. 그리고 시편 24:7-8 "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지어다 영원한 문들아 들릴지어다 영광의 왕이 들어가시리로다 영광의 왕이 누구시냐 강하고 능한 여호와시요 전쟁에 능한 여호와시로다." 하나님께 영광 올리는 것을 말씀합니다. 이와 같이 자연 안에 머물러 있지 않고 자연을 통하여 여호와 하나님의 거룩한 땅으로 나아갑니다. 창세기에서도 1장에서 만물이 주어지고, 2장에서 에덴 동산이 주어지는데, 에덴 동산은 거룩하신 하나님과 교제하는 터입니다. 그런데 불순종하니 그 동산에서 추방됩니다. 왜냐하면 그 동산은 여호와께 영광 돌리는 터이기 때문입니다. 그 동산에 있는 사람은 시편 24:-4과 같은 사람입니다.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가 누구며 그의 거룩한 곳에 설 자가 누구인가 곧 손이 깨끗하며 마음이 청결하며 뜻을 허탄한 데에 두지 아니하며 거짓 맹세하지 아니하는 자로다." 한마디로 유다서 말씀처럼 자기 자리를 모르고 교만한 사람은 에덴 동산에 있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만물을 지으신 것은 에덴 동산을 두시기 위함이고, 그 에덴 동산은 바로 인간이 하나님과 교제하는 곳입니다. 그곳에 있어야 살아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타락하여 에덴의 동쪽으로 추방됩니다.
시편 33:6 "여호와의 말씀으로 하늘이 지음이 되었으며 그 만상을 그의 입 기운으로 이루었도다." 여기서도 창조를 말씀하고, 이어서 사람에 대해 말씀합니다. 시편 33:13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굽어보사 모든 인생을 살피심이여."
오늘 설교의 제목은 "인간,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인간이 피조물의 이름을 짓는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할까요? 인간이 피조물에 갇혀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조금 쉽게 생각해 보겠습니다. 저는 지금 우리가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어떤 시각을 가질지 모른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우리가 보는 목련이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어떻게 보일지 우리는 아무도 모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우리가 보는 모습으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즉 우리가 변한다는 것입니다. 모든 시편은 그렇게 노래합니다. 여호와께서 만물을 지으신 것을 말씀하고, 그 후에 인간에게로 돌아갑니다. 인간이 만물에 복속되지 않고 인간이 만물을 넘어섭니다.
어찌보면, 질병도 신학적, 성경적으로 말하자면, 제가 구체적으로 말씀드리지 못하지만, 뭔가 인간이 자꾸 자연에 예속되어 가는 것입니다. 그런 결과의 부작용으로 나타나는 것이 바이러스라고 생각됩니다. 그런 결과로 인간이 자연을 넘어서지 못하고 부대끼는 것입니다. 어찌보면 이 땅에 주어진 것입니다.
시편 29편에 "여호와의 소리"에 대해서 여러 가지로 말씀하는데, 그 말씀의 주제는 11절에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힘을 주심이여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평강의 복을 주시리로다"(시 29:11). 모든 만물을 통하여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 인간을 붙드신다는 것입니다.
시편 25:12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 누구냐 그가 택할 길을 그에게 가르치시리로다" 여기서 "경외"는 쉽게 생각할 말이 아닙니다. "경외"는 생명, 즉 살아 있음이고, 이는 스스로 계신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가 즐거운 것입니다. 시편 25:14 "여호와의 친밀하심이 그를 경외하는 자들에게 있음이여 그의 언약을 그들에게 보이시리로다." "여호와의 친밀하심"은 요한일서 1:6의 "사귐"과 연결됩니다. 여호와와 사귐은 "생령이 된지라"입니다(창 2:7). 이것이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여호와의 친밀하심"이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그리고 "그의 언약을 그들에게 보이시리로다"는 창세기 2장의 언약과 연결됩니다. 이처럼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고 인간이 기록한 것이 아닙니다. 여기에 창세기 2:7과 언약 체결이 다 들어 있습니다.
5. 결론
제가 후반부 말씀도 더 준비했는데, 오늘 제가 여러분과 나누고 싶은 것은 영적 생명, 육적 생명이 무엇인지입니다. 영적 생명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생명인데, 하나님과 붙어 있는 속성이 있는 생명입니다. 이것은 영생이라고도 합니다. 하나님과 떨어져 있으면 그것은 생명이 아닙니다. 이렇게 영생의 영혼의 존재가 육체와 결합하여 인간이 지상에서 살아갑니다. 그런데 인간이 타락해서 그 영생의 존재인 영혼이 다 타락했습니다. 이것은 멸절이고, 존재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요한복음 1:4 생명의 말씀이 계시고, 그 말씀 안에 생명이 있고,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인데, 그래서 그 말씀이신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자는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자녀가 된다는 것은 언약의 성취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창조 목적은 뚜렷합니다. 즉 하나님은 우리 인간을 자녀 삼고자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자녀로서의 영광을 받고자 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제가 어제 제 아내와 산에 가서 "십자가지기교회"라는 이름이 윤리적으로 들리는 것이 아닌가라는 얘기를 나누어 보았습니다. 그리고 밤에 설교 준비를 하다가 그렇게 생각한 것을 회개를 했습니다. 십자가를 지는 것은 윤리가 아닙니다. 십자가를 지는 것은 그 생명으로 가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6:14 "...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내가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말은 윤리적인 차원의 말이 아닙니다. 이것은 본질적인 것입니다. 윤리적인 것은 따라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십자가를 통하여서,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박히고 세상도 십자가에 못박혀, 생명으로 나아갑니다.
저는 기도할 때마다 자존하시는 하나님을 묵상하는데, 그것을 뭐라 표현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 스스로 계신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나는 무엇입니까? "사람이 무엇이기에, 인자가 무엇이기에"가 답입니다. 내가 무엇이길래 스스로 계시는 하나님을 부르겠습니까? 십자가가 없이는 제가 스스로 계신 하나님을 부를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제가 십자가지기교회라는 이름이 윤리적이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했으니 나는 아직도 멀었고, 나는 가짜다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이름을 짓는, 즉 모든 만물을 다스리는 그 완성태가 새 하늘과 새 땅에서의 우리의 삶입니다. 그 이전에 온전한 자녀 됨이 있습니다. 이것이 오늘 시편 8편의 노래입니다.
[20200315][십자가지기교회 주일낮예배: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8)] 사람, 하나님의 형상 (시 8:4-8) 문병호 목사
*음성파일: 게시물 하단 "관련링크"에서 청취 혹은 내려받기 가능합니다.
<녹취록>
1.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나 자신을 아는 지식
제가 요새 기도하면서 하나님이 누구신가에 대해 묵상하고 있습니다. 당연히 우리가 이러한 묵상을 해야겠지요. 그런데, 하나님을 찾는 나는 누구인가도 생각해 봅니다. 인간은 일반 사물과는 다르게 하나님의 형상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은 사람 됨, 사람임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알려면 하나님을 먼저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형상이 무엇을 의미하지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것은 깊이 생각해 볼 부분입니다.
만물이 그대로 있을지라도, 우리가 변하여 만물을 전혀 새롭게 볼 수도 있습니다. 목련이 그대로 있어도 우리에게 전혀 다른 것이 될 수도 있습니다. 천국은 사물이 변하는 곳이라기보다는 내가 변하는 곳입니다. 지금 우리가 보는 대로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사실상,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을 갖고 있고, 하나님을 찾고 부르고, 하나님은 우리와 가까이 하시고, 하나님과 우리는 감히 인격적 교제, 사귐(요일 1:6)이 있다고 표현됩니다. 이 모든 것을 총체적으로 모을 때, 이것이 하나님의 형상 됨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형상이 이러니 이러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모든 우리의 모습들을 모아보니, 그것이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역으로 정의되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은 누구신가
저는 기도하며 "하나님은 누구신가"를 생각해 봤습니다. 과학은 10차원까지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몇 차원이실까요? 하나님은 차원이 없으십니다. 하나님은 시간과 공간, 인과관계에 구애되지 않으십니다. 우리는 그러하신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우리는 차원이 없으신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이러한 형상으로 사람이 지음을 받았고, 사람이 타락하여 그 형상을 상실했습니다. 타락 후에도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을 가지고 있는데, 왜 하나님의 형상을 상실했다고 그럴까요? 물론 사람에게 "불씨"가 남았다고 말하기도 하지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만한 것은 사람에게서 모두 상실되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구원을 받으면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 땅에서 그 회복된 형상으로 살고, 마지막 때 부활하여 그 회복된 형상이 완성된다고 합니다.
제가 "주여, 주여"라고 부르며 기도할 때, '이렇게 부르는 내 모습이 무엇이냐, 나는 어찌하여 부르짖고 있는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은혜의 모습, 즉, 예배, 기도, 부르짖는 모습입니다. 이런 모습은 천국에서도 계속됩니다. 보좌의 어린 양께 찬송을 드리고 기도를 올립니다. 이런 것이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3. 스스로 계신 하나님만이 창조주이시다
하나님은 스스로 계신 분이십니다. 스스로 계신다는 것은 피조물 가운데 있을 수 없어 설명될 수 없습니다. 스스로 계시는 분은 스스로 있지 않은 것의 창조주이십니다. 스스로 계시는 이는 하나님밖에 없고, 스스로 존재할 수 없는 것은 어떤 존재에 의해서 존재해야 하는데, 그 존재는 스스로 계신 하나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스스로 계신 분임을 '아멘' 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창조주이심을 '아멘'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역으로, 하나님이 창조주이심을 '아멘' 하는 자는 하나님이 스스로 계시는 분이심을 '아멘' 하는 것입니다.
사실상, 과학자들은 스스로 존재하는 것을 이해할 수 없기에, 세상은 그저 그렇게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든 것을 없는 데서 있게 하시는, 유일하신 스스로 계신 분이십니다. 스스로 계신 분은 공간, 시간, 인간의 판단에도 구애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이름을 물었을 때,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스스로 계신 하나님을 부르는 것은 천지의 창조주를 부르는 것입니다. 이것은 곧 나를 지으신 하나님을 부르는 것입니다.
4. 사람은 누구인가
오늘 본문인 시편 8편은 "온 땅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라고 하면 창조에 대한 노래를 담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달과 별은 우리 은하계를 넘어섭니다. 그리고 4절에서는 사람에 대해서 말씀합니다.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 시편의 기자는 모든 피조물들 가운데 사람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노래하고 있습니다. 물론 "사람"과 "인자"는 시편 기자인 다윗을 가리킬 수 있지만, 여기서는 강조적 표현입니다. "인자"는 사람에게서 난 사람입니다. 시편 8편은 천지창조와 인간창조를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 인간을 5절에서는 "그를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을 오해해서, 인간은 하나님만큼은 못해도,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히브리서 1:5과 2장에서 인용을 보면, 여기의 "인자"와 "사람"이 예수님을 칭하게 되고,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를 천사들보다 조금 못하게 했다고 인용합니다. 시편 8:1-3은 천지창조, 4-5절은 인간창조의 위대함, 6-8절은 인간의 다스림, 9절은 후렴으로서 1절을 반복합니다.
1) 하나님의 형상
창세기 1:26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여기서 "우리"는 삼위일체를 의미하기도 하고, 장엄 복수이기도 합니다. 엘로힘(하나님) 자체가 복수형입니다. 창세기 1:27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오늘 말씀을 여러분들이 귀하게 기억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1) "생기를 ... 불어넣으시니"
그러므로 스스로 계신 하나님이 자기의 형상으로 사람을 만드셨는데, 어떻게 창조하셨는지가 창세기 2:7에 나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창 2:7). "생기를 ... 불어넣으시니 ... 생령이 되니라." 제가 이 부분을 설교한 적이 없으니, 오늘은 이것을 설명하겠습니다. "생기"라는 말은 하나님의 생명입니다. 하나님의 생명을 불어넣으셨는데, '불어넣었다'는 말은 하나님의 일부를 주셨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되면 사람은 하나님의 일부가 됩니다. 그러므로 '불어넣었다'는 말은 하나님이 그 생명을 주셨다는 의미입니다. 문자적으로 하나님이 숨을 불어넣었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어떤 형체나 모양으로 이해하면 안 됩니다. 어쨌든 성경의 이 표현은 하나님의 형상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이 자기의 생명을 불어넣으셨다는 것은 하나님이 사람을 자신의 일부가 아닌,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불어넣으신 그 생명이 바로 사람의 영혼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생령이 되었습니다. 즉 살아 있는 영혼이 되었습니다.
(2) "생령이 되니라"
여기서 하나님이 생명을 불어넣으셨는데, 그 생명이 인간의 구조에 있어서는 영혼이 됩니다. 하나님의 생명이 인간의 영혼이라고 말해도 맞습니다. 그러나 엄밀하게 말하자면, 사람은 먼저 흙으로 조성이 되었는데, 이때까지는 물체입니다. 그 후 하나님이 생명을 불어넣으니, 그 순간 흙이 육체가 됩니다. 영혼이 몸은 육체라고 부르지 않기에, 흙을 육체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육체가 먼저 있고 영혼이 있게 된 것이 아니라, 영혼과 육체가 그 순간 동시에 존재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영혼과 육체의 인간 존재가 된 것입니다. 이러한 인간 존재를 하나님이 "생령이 된지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살아 있는 영혼'이라는 의미입니다.
(3) 살아 있는 영혼
요한복음 4:24에서 "하나님은 영이시니"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영이신데, 창세기 2장에서 그 하나님의 영을 사람에게 불어넣으신 것이 "생기"로 표현되었습니다. 생명을 불어넣어서 그것이 우리에게 살아 있는 영혼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최초의 아담과 하와는 살아 있는 영혼입니다. 살아 있는 영혼이란 무엇일까요? 하나님이 생명을 불어넣으시면, 그 생명은 하나님과 무관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교제하게 되고, 하나님을 알게 되고, 느끼고, 하나님을 향하여 선을 행할 의지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살아 있는 영혼입니다.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를 지으셨을 때, 그들에게 생기를 불어넣으셨느데, 즉 영혼을 불어 넣으셨는데, 그 영혼은 살아 있는 영혼입니다. 여기서 '살아 있다'라는 의미는 바로 크게 세 가지를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첫째, 여호와와 함께 있는 영혼이다.
둘째, 여호와를 경외하는 영혼이다.
셋째, 여호와의 말씀에 순종하는 영혼이다.
그래서 우리 인간이 생령이 되었다는 것, 즉 살아 있는 영혼이 되었다는 것은 여호와와 함께 있고, 여호와를 경외하며, 여호와께 존귀를 올리는 영혼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형상은 살아 있는 영혼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 가지를 떠나면 죽는 것입니다. 이것이 영적 사망입니다. 즉 하나님과 함께 있지 않고, 여호와를 경외하지 않으며, 여호와께 순종하지 않으면 그것은 죽은 것입니다.
(4) 오직 인간은 피조물임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계시는 하나님의 형상을 소유한다
고린도전서 15:45 "기록된 바 첫 사람 아담은 생령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 창세기 2:7과 고린도전서 15:45에서 공히 "생령"(living soul)이라고 번역한 것은 잘한 것입니다. 첫 사람 아담은 살아 있는 영혼이었습니다. 즉 자존하시는 하나님과 교통하는 존재입니다. 우리가 영화롭게 되면, 목련 꽃이 다르게 보입니다. 우리는 변화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을 가졌습니다. 피조된 모든 만물은 그대로 머물러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형상을 받은 우리는 스스로 존재하지 못하나 스스로 계신 하나님의 형상을 가졌습니다. 이 부분을 깊이 묵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모든 만물은 다 지어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만 스스로 계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창조주이십니다. 그런데, 하나님과 피조물 사이에서 인간만이 피조물임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계신 하나님의 형상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 드린다는 것은 하나님의 회복된 형상을 가졌다는 것이며, 매우 놀라운 일입니다. 하나님의 생기로 생령이 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다시 생령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존하시는 하나님과 교제하고 교통하고 있습니다.
2) 구원: 즉 하나님의 형상(생명) 회복
시편 8:4-5은 시편 2:7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내가 너를 낳았도다," 즉 하나님의 자녀 됨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첫 번째 특권입니다. 6-8절은 따라오는 두 번째 특권입니다. 시편 36:9 "진실로 생명의 원천이 주께 있사오니 주의 빛 안에서 우리가 빛을 보리이다." "생명의 원천이 주께 있사오니" "주의 빛." 그리고 요한복음 1:4 "그(성자)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이 생명은 살아 있는 것이며 빛입니다. 시편에는 기도한다는 개념, 복이라는 개념, 구원이라는 개념이 많이 나옵니다. 구원은 신약의 개념으로만 생각하기 쉽습니다. 시편 18:46 "여호와는 살아 계시니 나의 반석을 찬송하며 내 구원의 하나님을 높일지로다." 사실상 여호와만 살아 계십니다. 살아 계신 여호와의 형상을 가진 우리 인류는 하나님의 형상 가운데서만 살아 있습니다. 이것을 영적 생명이라고 합니다. 이 영적 생명, 즉 영혼이 육체와 결합했을 때, 육체의 생명이라고 말합니다. 죽음은 육체의 생명이 떨어져 나가고 영적 생명으로 남는 것이며, 이것이 천국에 가 있는 것입니다. 이 생명이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시편 2:12 "여호와께 피하는 모든 사람은 다 복이 있도다." 여호와께 피한다는 것은 여호와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살아 있다는 것은 '내가 네 안에, 네가 내 안에' 있는 것이고, 믿음은 여호와께 나아가는 것인데,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형상, 즉 생명의 개념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지평을 열어 줍니다. 이것은 어떤 과학으로도 설명할 수 없고, 과학을 넘어서 있습니다. 하나님은 만유의 하나님, 만유 밖의 하나님, 만유의 통일이십니다. 그 하나님과 우리가 교통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스스로 계신 하나님과 교제하고 그분께 영광을 올립니다.
시편 13:5 "나는 오직 주의 사랑을 의지하였사오니 나의 마음은 주의 구원을 기뻐하리이다." 시편 기자가 말하는 구원이란,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그 형상을 회복하여 하나님과 교제하고, 하나님을 예배하고, 순종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구원입니다.
시편 16:8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그가 나의 오른쪽에 계시므로 내가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 여호와가 내 오른쪽에 계신다는 것은 단지 수사가 아니라 자존하시는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인 우리는 모든 피조물에 갖혀 있지 않고 과학에 예속되어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사물의 이름을 짓는 존재이지 사물에 종속되는 존재가 아닙니다. 시편 16:9 "이러므로 나의 마음이 기쁘고 나의 영도 즐거워하며 내 육체도 안전히 살리니." 이것이 성경적 인간관입니다. 영혼이 하나님의 형상의 본질입니다. 왜냐하면 육체는 영혼과 함께 있다가 분리되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 육체는 부활 때 영화롭게 됩니다. 시편 16:10-11 "이는 주께서 내 영혼을 스올(지옥)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를 멸망시키지 않으실 것임이니이다 주께서 생명의 길을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충만한 기쁨이 있고 주의 오른쪽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 이 구절들을 베드로가 오순절 성령을 받고 첫 설교에서 인용했습니다. 왜냐하면 이 구절들에 핵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구원, 생명이 여호와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으로 기도할 때, 전능하신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입니다. 예배적으로 표현하면, 영광의 임재에 참여하는 것이고, 송영으로 말하자면, 그에게 영광을 돌리고 그와 함께 영광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이 형상을 인간이 받았기에 인간 창조가 위대하고 고귀한 것입니다. 시편 8:4-6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 그를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 주의 손으로 만드신 것을 다스리게 하시고 만물을 그의 발 아래 두셨으니." 인간이 이 세상을 다스리는 것보다 이전에 있는 것은 하나님과의 교제입니다. 먼저는 하나님과의 교제이고, 그것에 따라오는 것이 만물을 다스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하나님과의 교제가 깨지면, 엉컹퀴가 나고 땀흘리고 수고하게 됩니다. 이처럼 시편 8편은 창조의 노래이지만, 창조 중에서도 특별한 창조를 노래합니다.
3) 하나님은 사람과 언약을 맺기 위하여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으셨다
천사조차도 하나님이 자녀로 부르지 않았지만 사람을 자녀로 삼으셨습니다. 즉 언약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하나님의 형상을 주신 이유는 사람과 언약을 맺으시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이 사람과 언약을 맺으시려는 목적은 사람을 하나님의 자녀 삼으시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지으신 모든 뜻이 드러났습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사람을 지으셔서, 사람과 언약을 맺으시고, 사람이 그 언약에 순종하여 하나님이 사람을 자신의 자녀 삼고자 하셨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언약에 불순종하여 하나님의 자녀 됨은커녕 원래 주어진 하나님의 형상도 잃어버려 완전히 멸망에 처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아무것도 없는 것, 즉 무(無)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영접하면, 다시 생명의 빛, 생명, 생기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4) 창조의 아름다움
시편 8:1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주의 영광이 하늘을 덮었나이다." 아름답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뜻에 맞다는 의미입니다. 궁극적으로 아름다운 것은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심히 좋은 것이 아름다운 것입니다(창 1:31). "주의 영광이 하늘을 덮었나이다." 만물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선하게 지었다는 것이 아름답다는 것이다. 칼빈의 말대로, 만물은 눈부신 영광의 극장, 훈장, 거울, 옷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즉 모든 만물은 하나님의 자신의 행하심을 빛나게 드러내심입니다.
그러나 시편 8편은 만물이 아름답고, 하나님의 선하심을 드러내고, 영광을 드러낸다고 하는 데 머무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창조에 나아갑니다. 칼빈은 말하기를, 인간은 만물을 즐기는 관객이자, 하나님의 극장에서 하나님 앞에 영광을 올리는 배우라고 했습니다.
5) 만물과 예배
성경은 만물 안에서 예배를 드리는 것, 즉 예배가 온전할 때 만물이 온전함을 말씀합니다. 시편은 이런 말씀을 많이 만납니다. 시편의 구원은 하나님께 다시 돌아가는 것입니다. 즉 살아 있는 영혼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구약적 구원입니다.
시편 24:1 "땅과 거기에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 가운데에 사는 자들은 다 여호와의 것이로다." 시편 기자는 창조를 말합니다. 그러나 이어서 시편 24:3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가 누구며 그의 거룩한 곳에 설 자가 누구인가"라고 하며 성소 개념을 말합니다. 하나님께 예배하는 개념입니다. 그리고 시편 24:7-8 "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지어다 영원한 문들아 들릴지어다 영광의 왕이 들어가시리로다 영광의 왕이 누구시냐 강하고 능한 여호와시요 전쟁에 능한 여호와시로다." 하나님께 영광 올리는 것을 말씀합니다. 이와 같이 자연 안에 머물러 있지 않고 자연을 통하여 여호와 하나님의 거룩한 땅으로 나아갑니다. 창세기에서도 1장에서 만물이 주어지고, 2장에서 에덴 동산이 주어지는데, 에덴 동산은 거룩하신 하나님과 교제하는 터입니다. 그런데 불순종하니 그 동산에서 추방됩니다. 왜냐하면 그 동산은 여호와께 영광 돌리는 터이기 때문입니다. 그 동산에 있는 사람은 시편 24:-4과 같은 사람입니다.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가 누구며 그의 거룩한 곳에 설 자가 누구인가 곧 손이 깨끗하며 마음이 청결하며 뜻을 허탄한 데에 두지 아니하며 거짓 맹세하지 아니하는 자로다." 한마디로 유다서 말씀처럼 자기 자리를 모르고 교만한 사람은 에덴 동산에 있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만물을 지으신 것은 에덴 동산을 두시기 위함이고, 그 에덴 동산은 바로 인간이 하나님과 교제하는 곳입니다. 그곳에 있어야 살아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타락하여 에덴의 동쪽으로 추방됩니다.
시편 33:6 "여호와의 말씀으로 하늘이 지음이 되었으며 그 만상을 그의 입 기운으로 이루었도다." 여기서도 창조를 말씀하고, 이어서 사람에 대해 말씀합니다. 시편 33:13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굽어보사 모든 인생을 살피심이여."
오늘 설교의 제목은 "인간,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인간이 피조물의 이름을 짓는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할까요? 인간이 피조물에 갇혀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조금 쉽게 생각해 보겠습니다. 저는 지금 우리가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어떤 시각을 가질지 모른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우리가 보는 목련이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어떻게 보일지 우리는 아무도 모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우리가 보는 모습으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즉 우리가 변한다는 것입니다. 모든 시편은 그렇게 노래합니다. 여호와께서 만물을 지으신 것을 말씀하고, 그 후에 인간에게로 돌아갑니다. 인간이 만물에 복속되지 않고 인간이 만물을 넘어섭니다.
어찌보면, 질병도 신학적, 성경적으로 말하자면, 제가 구체적으로 말씀드리지 못하지만, 뭔가 인간이 자꾸 자연에 예속되어 가는 것입니다. 그런 결과의 부작용으로 나타나는 것이 바이러스라고 생각됩니다. 그런 결과로 인간이 자연을 넘어서지 못하고 부대끼는 것입니다. 어찌보면 이 땅에 주어진 것입니다.
시편 29편에 "여호와의 소리"에 대해서 여러 가지로 말씀하는데, 그 말씀의 주제는 11절에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힘을 주심이여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평강의 복을 주시리로다"(시 29:11). 모든 만물을 통하여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 인간을 붙드신다는 것입니다.
시편 25:12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 누구냐 그가 택할 길을 그에게 가르치시리로다" 여기서 "경외"는 쉽게 생각할 말이 아닙니다. "경외"는 생명, 즉 살아 있음이고, 이는 스스로 계신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가 즐거운 것입니다. 시편 25:14 "여호와의 친밀하심이 그를 경외하는 자들에게 있음이여 그의 언약을 그들에게 보이시리로다." "여호와의 친밀하심"은 요한일서 1:6의 "사귐"과 연결됩니다. 여호와와 사귐은 "생령이 된지라"입니다(창 2:7). 이것이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여호와의 친밀하심"이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그리고 "그의 언약을 그들에게 보이시리로다"는 창세기 2장의 언약과 연결됩니다. 이처럼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고 인간이 기록한 것이 아닙니다. 여기에 창세기 2:7과 언약 체결이 다 들어 있습니다.
5. 결론
제가 후반부 말씀도 더 준비했는데, 오늘 제가 여러분과 나누고 싶은 것은 영적 생명, 육적 생명이 무엇인지입니다. 영적 생명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생명인데, 하나님과 붙어 있는 속성이 있는 생명입니다. 이것은 영생이라고도 합니다. 하나님과 떨어져 있으면 그것은 생명이 아닙니다. 이렇게 영생의 영혼의 존재가 육체와 결합하여 인간이 지상에서 살아갑니다. 그런데 인간이 타락해서 그 영생의 존재인 영혼이 다 타락했습니다. 이것은 멸절이고, 존재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요한복음 1:4 생명의 말씀이 계시고, 그 말씀 안에 생명이 있고,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인데, 그래서 그 말씀이신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자는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자녀가 된다는 것은 언약의 성취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창조 목적은 뚜렷합니다. 즉 하나님은 우리 인간을 자녀 삼고자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자녀로서의 영광을 받고자 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제가 어제 제 아내와 산에 가서 "십자가지기교회"라는 이름이 윤리적으로 들리는 것이 아닌가라는 얘기를 나누어 보았습니다. 그리고 밤에 설교 준비를 하다가 그렇게 생각한 것을 회개를 했습니다. 십자가를 지는 것은 윤리가 아닙니다. 십자가를 지는 것은 그 생명으로 가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6:14 "...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내가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말은 윤리적인 차원의 말이 아닙니다. 이것은 본질적인 것입니다. 윤리적인 것은 따라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십자가를 통하여서,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박히고 세상도 십자가에 못박혀, 생명으로 나아갑니다.
저는 기도할 때마다 자존하시는 하나님을 묵상하는데, 그것을 뭐라 표현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 스스로 계신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나는 무엇입니까? "사람이 무엇이기에, 인자가 무엇이기에"가 답입니다. 내가 무엇이길래 스스로 계시는 하나님을 부르겠습니까? 십자가가 없이는 제가 스스로 계신 하나님을 부를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제가 십자가지기교회라는 이름이 윤리적이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했으니 나는 아직도 멀었고, 나는 가짜다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이름을 짓는, 즉 모든 만물을 다스리는 그 완성태가 새 하늘과 새 땅에서의 우리의 삶입니다. 그 이전에 온전한 자녀 됨이 있습니다. 이것이 오늘 시편 8편의 노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