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329][십자가지기교회 주일낮예배: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10)] 타락과 원죄 (창 3:8-13) 문병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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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329][십자가지기교회 주일낮예배: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10)] 타락과 원죄 (창 3:8-13) 문병호 목사


(창 3:8)그들이 그 날 바람이 불 때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아담과 그의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창 3:9)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창 3:10)이르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창 3:11)이르시되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알렸느냐 내가 네게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열매를 네가 먹었느냐
(창 3:12)아담이 이르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창 3:13)여호와 하나님이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하였느냐 여자가 이르되 뱀이 나를 꾀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음성파일: 게시물 하단 "관련링크"에서 청취 혹은 내려받기 가능합니다.  


<녹취록>



1. 창세기의 타락 기사 


본문 말씀은 창세기 3장 타락의 부분입니다. 2장에서 언약을 맺어 동산의 모든 실과를 먹되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고 했는데 그것을 어기고 인류가 범죄했습니다. 본문을 보면, 바람이 불고 여호와가 동산을 거니시고 하나님의 소리가 있어서 아담과 그의 아내가 그것을 들었습니다. 평소라면 반갑고 하나님과 교제하였을 것이나 스스로 두려워 피하여 나무 사이에 숨었습니다. 나무는 숨는 곳이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 있는 것을 비춰 주고 함께 누리는 존재였는데 전혀 다른 용도로 사용되는 것입니다. 피조물이 허무한 데 사용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비추는 피조물이 하나님을 가리는 데 사용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네가 어디있느냐?"'라고 물으십니다. 아마 아담과 하와는 옛날에 이런 것을 친숙하고 기다리던 것으로 여겼을 것입니다. 그러나 본문에는 오히려 그것을 두려워하였습니다. 그 이유를 벗었다고 말합니다. 

벗은 것은 무엇이고 두려운 것은 무엇인가요? 벗은 것은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합니다. 그러나 그날따라 두려움이 온 것입니다. 수치가 들어온 것입니다. 뭔가에 지식이 들어오는데,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피해야 하는, 거짓과 저주와 수치의 지식이 들어온 것입니다. 불순종의 결과로 말입니다. 사실 인류 최고의 가치는 여호와가 얼굴을 드시고 비추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류가 그것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2. 타락 이전의 사람


1) 순전한 사람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보시기에 심히 좋게 지었습니다.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순전하게 지으셨습니다. 순수하고 완전하게 지으셨습니다. 그래서 피조물인 인간이 하나님과 인격적인 교제를 하고 하나님이 부여하신 권세, 다스리고 지키는, 생육하고 번성하고 충만한 권세 가운데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최고의 피조물 자리에 있었습니다(시 8:5). 


2) 하나님의 언약의 상대인 사람


하나님은 이제 그 인류에게 영생을 주시려고 언약을 맺으십니다. 그리하여 천사도 오르지 못하는 하나님의 자녀의 자리에 있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식과 정서와 의지를 주셔서 인격적인 순종을 받고 그 가운데 영광을 얻고자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영광을 받고자 하신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즉, 완전하신 하나님, 더 채워짐이 없으신 하나님, 영광조차 더할 수 없는 하나님이 그 영광에 인류를 참여하게 하고자 하심입니다. 그래서 언약을 체결하신 것입니다. 영생은 바로 하나님의 자녀 됨에 있습니다. 


3) 언약의 조건: 소극적 순종


이 언약의 순종은 큰 것이 아니었습니다. 단지 먹지 않으면 되는 소극적인 순종입니다. 하지 않으면 됩니다. 버릇이나 습관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안 하던 것을 안 하면 됩니다. 그러나 그것을 불순종했습니다. 소극적인 요구이므로 그것을 위반한 것은 적극적인 죄가 됐습니다. 하라는 것을 안 하면 소극적인 것, 게으른 것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지 말라는 것을 하면 반역입니다. 그러므로 많은 경우 불순종을 반역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외국에서는 불순종은 'revolt'라는 용어로 쓰기도 합니다. 


4) 인류의 언약적 머리인 아담


하나님은 아담을 머리로 삼아 인류에게 영생을 주고자 하셨습니다. 그러나 아담이 불순종하여 죄를 짓고 그것이 모든 인류에게 생래적인 것이 되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언약을 정하시는 대표성의 원리에 따른 것입니다. 뱀과 하와, 그리고 아담으로 죄가 이어지는 구조가 나타납니다. 사망의 형벌은 단순히 과일 하나 먹었다고 그런 것이 아닙니다. 사실상 언약의 대상은 아담이었으므로 과일을 먹어 죽는 자는 아담입니다. 하와는 아담의 죄로 말미암아 죽는 것입니다. 아담이 모든 인류의 머리입니다. 하와와 언약을 맺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사실상 뱀이 하와를 유혹하고 하와가 주어 아담이 먹었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변명입니다. 아담이 언약의 당사자이고 그가 선과 악을 알게 하는 과일을 먹어 죽음이 들어온 것입니다. 그 죽음으로 모든 인류가, 하와를 포함하여 죽게 된 것입니다. 천사와는 언약을 맺지 않았습니다. 


5) 자유의지를 가졌던 아담


그렇다면 아담에게는 자유의지가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죄를 짓지 않을 수 있는 의지가 있었으나 그 가운데 죄를 지은 것입니다. 어떤 상황, 형편에서 죄를 지었다고 우리는 말을 합니다. 이유 없는 무덤이 없다고들 합니다. 모든 죄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그런 조건하에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그것을 넘어서야 하는 존재입니다. 나의 죄의 원인을 다른 것에 돌릴 수 없는 것입니다. 자유의지로 인해서 말입니다. 그래서 남에게 죄를 자꾸 넘기는 모습이 인간의 가장 처참한, 타락한 모습입니다. 무슨 일이 있으면 국가 탓, 공동체 탓, 사람 탓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 탓이라고 해야 하는 것인데 말입니다. 사람은 언약을 자기가 맺어 놓고 다른 사람에게 미루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원죄는 하와의 죄가 아닙니다. 아담의 죄요, 최초의 죄인은 아담입니다. 그 전에는 타락한 천사가 있었을 뿐이었는데 말입니다. 



3. 타락에 있어서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


1)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그리고 이제 모든 사람이 다 죄인이 된 것입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가 있습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 보면 지혜롭고 거룩한 계획이 있어서 하나님이 죄를 허용하기를 기뻐하셨다고 합니다. 의아할 수 있는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가장 깊은 섭리가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지혜롭고 거룩한 계획이 있어서 죄를 허용하기를 기뻐하셨습니다. 또한 하나님은 자신의 영광을 위하여 그리하셨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가장 크고 지혜롭고 거룩한 계획에 따라 죄를 허용하셨습니다. 이것은 바로 그 죄인을 전적인 은혜로 구원하셔서, 첫째 아담의 죄를 사하시기 위하여, 마지막 혹은 둘째 아담인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그 예수로 말미암아 모든 의를 이루시고 그리하여 영광을 받으시겠다는 것을 의미한 것입니다. 


2) 허용적 작정


이것이 바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제6장 타락에 대한 내용의 첫 번째 구절입니다. 타락에 대해 말하기 전에 하나님의 뜻을 먼저 말하는 것입니다. 방임한 것이 아니라 뜻을 가지고 허용, 즉 작정이 있는 허용(허용적 작정)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런 비밀들을 보면 하나님이 주신 답이 있습니다. "율법이 들어온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롬 5:20). 작정을 가지고 허용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요 1:16). 하나님은 죄와 무관하십니다. 하나님은 죄를 지시도 조성도 작정도 않으십니다. 그러나 죄에 대한 놀라운 섭리가 있습니다. 



4. 아담의 죄


아담의 죄는 세 가지로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저도 이렇게 정리한 것이 처음입니다. 첫째는 불순종, 둘째는 배은망덕, 셋째는 교만입니다. 모두 각각 분리되어 돌아다니는 개념인데 말씀에 비추어 한 군데에서 생각해 봤습니다.


1) 불순종


첫째, 죄는 불순종입니다. 하나님은 인류에게 절대적인 순종을 요구하십니다. 어려우니 순종하라고 하면 상대적일 수 있습니다. 절대적인 순종의 특징은 아주 쉽습니다. 그러니 무조건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동산의 모든 과일을 다 주셨습니다. 그리고 선악과 하나를 먹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쓸데 없이 허탄하게 먹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절대적인 순종을 요구하시는 것은 마치 나아만에게 요단강에 일곱번 들어갔다 나오라는 것과 같고, 여리고를 그냥 돌라는 것과 같고, 요단강과 홍해를 그냥 걸어가라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이것을 어떻게 생각하나요? 그곳은 바다요, 강이요, 여리고의 철옹성이라고 인간이 조건을 가지고 나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절대적 순종을 말하는데 인간이 헤아려 그것을 거부하는 것, 절대적인 순종에 대해 상대적인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죄의 본질입니다. 

하나님은 과일에 가치가 있어서 먹지 말라고 한 것이 아닙니다. 과일은 그냥 하나의 미물일 뿐입니다. 그것 먹는다고 지혜롭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표일 뿐입니다. 점 하나 찍어 놓은 것과 같습니다. 마치 아무 의미도 없는 것을 보지 말라고 했는데, 그것을 본 것과 같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절대적 순종을 어긴 것입니다. 우리가 괜히 똑똑해서 뭐가 있는지 따지는 것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절대적으로 이루어 가시는 순종을 요구하시는데 말입니다.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순종은 언제나 쉬운 것입니다. 너무 쉬워서 안 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냥 따먹으라고, 마시라고 하십니다. 재배하고 우물 파라고 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이 떡이고 우물이십니다. 

무조건 순종이 선이고 바로 죄는 상대적인 불순종입니다. 상대적인 불순종이라는 말이 있겠습니까마는 내가 헤아리는 가운데 불순종이라고 보면 될 것 같습니다. 뱀이 이것을 치고 들어오는 것입니다. 뱀은 인간이 하나님과 같이 될 수 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붙들고 계시기 때문에 인간이 이미 탁월한 존재인데도, 뱀은 인간이 하나님의 절대성을 떠나면 하나님과 같이 될 수 있다고 유혹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오라고 하면 그 중간에 뭐가 있는지 아는 것이 신앙이 아닙니다. 더 어린아이와 같이 그저 오라고 하시면 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없던 길도 생기고 다리도 생기는 것입니다. 그저 발을 내디디면 물이 섭니다. 절대적이라는 것은 무조건적이라는 말입니다. 무조건적으로 하나님이 책임지시는 가운데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의심하는 것이 죄입니다. 


2) 배은망덕


둘째, 죄의 속성은 배은망덕입니다. 하나님은 인류에게 모든 것을 베푸시고 인류와 안식하셨습니다. 천사는 하나님이 일을 시키시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모든 것을 베푸십니다. 이 땅에 의인이 선인이 있을까요? 만약 그런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바로 감사하는 사람일 것입니다. 착한 사람은 감사하는 사람입니다. 결론은 그렇게 납니다. 감사하지 않는 사람은 다 악인이요 죄인입니다. 매일 불평하고 부정적이고 어긋나는 것은 다 죄입니다. 배은망덕입니다. 하나님은 다 베풀어 주셨는데 인간은 그것으로 자족치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사도 바울이 내 잔이 넘치나이다라는 말씀처럼 내가 약할 때 주님이 강함되시는 것을 고백한 것입니다. 이것은 감사의 영역인 것입니다. 


3) 교만


셋째, 죄의 본질은 교만입니다. 유다서를 보면 사탄이 자기의 처소를 떠났다고 합니다. 제자리에 없는 것입니다. 교만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요새 어려운 뉴스들이 많습니다. 어떻게 보면 너무 큰 일이 질병으로 일어났고, 젊은이들이 죄를 착안하고 어른이 가담하고 후원한 범죄로 일어납니다. 아이들의 죄를 훈계하기는커녕 어른이 돈 주고 사는 모습들을 볼 때 참 마음이 아픕니다. 

우리 인간은 하나님 안에 있는 것이 겸손입니다. 하나님 안에 머물기 좋아한 사람만 겸손합니다. 아무리 태생이 어떻다고 해도 하나님 앞에서는 의미가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서의 겸손은 의존성입니다. 하나님께 의존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의존하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어떻게 보면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존재 가치는, 이것이 과한 말일지 몰라도, 인간의 의존성에서 비롯됩니다. 어머니의 존재 가치는 아이의 의존성입니다. 아이가 의존하지 않으면 모성이라는 말이 없었을 것입니다. 아이가 태어나자마자 엄마를 업고 다닌다면 모성애라는 말이 나왔겠냐는 말입니다. 의사의 본질은 환자의 의존성에 있습니다. 그래서 의원은 건강한 자를 위하여 온 것이 아니라 병자를 위하여 있다고 우리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이 의존성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과 같이 되는 것이 아니라 말입니다. 하나님은 본질적으로 우리가 의존하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를 부르실 때 그들이 하나님께 나아오는 것은 의존성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피하여 숨는 것은 의존성을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니 죄입니다. 

기도하는 것은 전적인 의존입니다. 기도는 전적인 의존일 수밖에 없습니다. 기도 제목도 기도하면서 정하게 됩니다. 미리 정하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은 말도 안 됩니다. '하나님 어디로 가야 합니까'라고 묻는 것이 기도입니다. 그리고 가야 할지조차 물어보는 것입니다. 미리 어디로 갈지 정하고 물어보는 것은 기도가 아닙니다. 의존성, 끊임없이 하나님 쪽으로 가는 것입니다. 신앙은 인문학, 철학이 아닙니다. 불교는 천상천하 유아독존으로 인간의 가치를 말하지만, 인간의 가장 아름다운 모습은 의지하는 것입니다. 의지하지 않는 것이 교만이고 사탄은 우리가 의지하지 않게 하려고 우리에게 유혹합니다. 스스로 할 수 있다고 계속 속삭입니다. '왜 그렇게 굳이 하나님께 매일 의지하냐, 너가 얼마나 대단한 존재인데'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가끔씩 매스컴의 인터뷰를 보면, 스스로 자신을 믿는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끝에 '하나님이 사랑하시기에'라는 말이 붙으면 그나마 괜찮습니다. 그러나 그 말 없이 스스로 믿는다고 하면, 상당히 불안합니다. 그런 사람이 엉뚱한 사고를 치는 것을 많이 봅니다. 어제보다 오늘 더 기대는 것, 의지하는 것이 성화의 본질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두려워하는 것 한 가지는 어제보다 오늘 하나님을 내가 덜 의지하고 스스로 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것 외에는 두려워할 것이 없습니다. 죽으면 천국 가고 부활할 것입니다. 여호와를 멀리할까 하는 것이 저의 유일한 두려움입니다. 그래서 세상의 영화도, 즐거움도 두려움의 대상입니다. 그렇게 보면 내가 약할 때가 감사한 것입니다. 범사에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약한 것 자체가 좋은 것은 아니지만, 모든 상황에서 하나님께 기도하게 하시니 감사한 것입니다. 사자가 다가오니 기도하게 됩니다. 그것이 의존성입니다.

오로지 자존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신데 내가 스스로 자존해 보겠다는 것은 하나님이 원하지 않으십니다. 



5. 하나님을 경외함


하나님은 우리에게 원의, 즉 선함과 의로움과 거룩함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이제 인간이 타락하여 마음이 심히 부패하고 입에는 악독과 저주가 가득하고 모든 계획이 악하고 하나의 의인도 없고 죄를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향한 진정한 두려움이 없습니다(롬 3장; 창 6장; 렘 17장). 진정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습니다. 키에르케고르라는 철학자의 책 중에 <<죽음에 이르는 병>>이 있는데, 그 내용 중에 죽음에 이르는 절망이 있는데 하나님 안에서의 절망을 생명의 절망이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하나님을 진정 두려워하는 것은 바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두려움입니다(롬 3:10-19). 

오늘 본문은 옷을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피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여호와를 피하는 두려움입니다. 이것은 저주입니다. 두려움에는 두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진정한 두려움, 하나님께 나아가는 두려움, 복된 두려움입니다. 두 번째는 하나님의 낯을 피하는 두려움입니다. 이것은 저주입니다. 첫 번째 두려움을 경외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않으십니다. 우리의 수중에 계시지 않고 내가 가라 오라 하는 분이 아니십니다. 내 인과관계에 매이는 존재가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두려운 분이시되 우리를 품에 끌어 안으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하는 것입니다. 아들은 아버지를 두려워하나 아버지의 집에 거합니다. 그것이 경외입니다. 



6. 전적 타락, 전적 은혜


인류가 이 경외를 잃어버림으로 하나님을 피합니다.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려 하지도 않고 그럴 능력도 없습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것은 하나님을 기뻐하고 그의 법을 주야로 기뻐하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에 나아가기를 기뻐하십니까? 우리의 기쁨이 사실 거기에 있습니다. 본문 말씀의 '절대적'이라는 말을 생각할 때 그것은 어른스러운 것이 아니라 아이의 것처럼 느껴집니다. 뛰어들라고 할 때 아이는 경험이 없으므로 막 뛰어들어 갑니다. 그러나 어른들은 여러 가지를 따집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에 따라 인류를 지으셨으나 인간은 더 이상 하나님을 기뻐하게 할 수 없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칼빈이 말하듯 홍수와 같이 죄가 차서 압도했습니다. 그래서 영혼과 육체 어느 곳 하나 성한 곳이 없습니다. 그것이 전적 타락입니다. 하나님이 죄를 허용하신 것은 단순한 방임이 아니라 영광 받으시기 위함인데 죄 중에 있는 자에게 은혜를 베풀어 죄가 있는 곳에 은혜가 더하게 하려 하심입니다. 우리를 완전히 무능하고, 부패하게 하신 것은 전적 은혜를 베풀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누구도 '내가'라고 말할 수 없게 하신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이'라고 말하여 하나님께 영광 돌리게 하려 하시기 위해 이 죄를 두신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죄가 하나님의 것은 아닙니다. 요새 동성연애이니 이런 것들을 이야기하며 할 수 없이, 태어난 대로 죄를 짓는다고 합니다. 이것은 전혀 맞지 않습니다. 물론 마음의 힘든 것을 무조건 비난할 바는 아니지만, 우리는 하나님이 더 큰 은혜를 베푸시려고 그런 가운데 두었다고 말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눈을 멀게 한 것은 조상의 죄 때문에 아니라 영광을 받으시기 위해, 그 눈을 낫게 하여 그 눈으로 하나님을 찬미하는 도구로 삼기 위함이십니다. 인류는 죄가 없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죄 가운데 인류에게 더 큰 영광거리를 찾습니다. 그것이 전적 은혜입니다. 



7. 연약함 가운데 경외하며 하나님께 나아가자


우리는 이미 전적 은혜를 누립니다. 이것을 경외라고 했습니다. 성경의 가르침은 두려워하면서 하나님 편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열린 예배라고 하여 하나님을 친구처럼 여기는 것이 아니라, 지극한 두려움이 있는데 피하지 않고 끌려가는 것, 그것이 은혜의 본질입니다. 죄 지었을 때 기도하러 갑니다. 피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됐습니다. 그게 본질입니다. 세상은 죄 지으면 사람도 피합니다. 하물며 만물을 감찰하신 하나님이신데 우리는 죄를 지어도 오히려 나아가 기도합니다. 악한 죄를 지었으면 나무 사이로 숨어야 하는데 모여서 하나님의 낯을 찾습니다. 미스바 광장에 모인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말입니다. 무슨 일을 당하던지 그 일로 기도하면 선한 일입니다. 그러나 두려워할 것은 무슨 일로 말미암아 기도하지 못하고 여호와를 멀리한다면 그 일이야말로 악한 일입니다. 먹을 게 풍족할 때 기도를 많이 하나요 주릴 때 기도하나요? 바울과 같이 풍부할 때나 부족할 때나 있을 때나 없을 때나 기도한다면 좋겠지만, 우리의 연약함이 많으므로 하나님은 종종 우리를 주리게 하십니다. "통치자들과 권세들을 무력화하여 드러내어 구경거리로 삼으시고 십자가로 그들을 이기셨느니라"(골 2:15). 이 십자가의 이기심으로 19절의 말씀이 이어집니다. "머리를 붙들지 아니하는지라 온 몸이 머리로 말미암아 마디와 힘줄로 공급함을 받고 연합하여 하나님이 자라게 하시므로 자라느니라"(골 2:19). 우리는 모든 것을 맡기고 하나님께 자랍니다. 야곱의 브니엘, 여호와의 얼굴을 보았다, 그래서 이스라엘, 여호와와 겨루어 이겼다, 즉 여호와가 져 주신 것, 우리가 여호와께 나가면 여호와가 져주시는 것, 이것이 본질입니다. 



8. 결론


죄가 가져온 육적, 영적, 영원한 사망의 본질은 여호와를 피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회복되고 구원된 우리는 다시 여호와께 나아갑니다. 그것으로 족합니다.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하며 나아갑니다. 저에게 위로가 있다면 하나님이 길을 아시고 계획하신다는 것입니다. 제가 스스로 이것을 해야 한다면 얼마나 불안하고 힘들까요. 매일 근심할 것입니다. 그러나 너는 내 것이라고, 다 주시고, 하나님은 그저 순종을 통해 영광을 받으시려 하십니다. 과일 자체는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그 과일을 통해 하나님은 그저 절대적인, 쉽고 단순한 순종을 요구하신 것뿐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길을 가지 말라고 하시면 왜 그런지 묻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절대 의이자 절대 선으로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절대적인 순종 가운데 누리는 복이 모든 성도에게 있길 바랍니다. 코로나 가운데 이렇게나마 예배드리게 하셔서 감사합니다. 빨리 이 일이 넘어가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