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412][십자가지기교회 주일낮예배: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12)] 중보자의 인격 (롬 1:3-4) 문병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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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412][십자가지기교회 주일낮예배: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12)] 중보자의 인격 (롬 1:3-4) 문병호 목사 


(롬 1:3)그의 아들에 관하여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롬 1:4)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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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취록>



1. 인간을 위해 죽고 다시 살아난 신은 없다 


사람은 여러 가지를 만들지만, 가장 기상천외한 것이 신입니다. 모든 민족, 종족, 마을마다 신이 있습니다. 일본은 집마다, 방마다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무언가를 의지하고 싶고, 붙들고 싶어 합니다. 설혹 그것이 틀리더라도 사람은 맹목성이 있어서 붙들기를 멈추지 않습니다. 이단들은 자기들이 틀린 줄 알아도, 나오지 못하는 것은 자기가 스스로를 합리화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이단에 머무는 심리라고 합니다. 그래서 예민하고 더 배운 사람이 이단에게 더 맹목적이게 된다고 들었습니다. 이렇듯 사람은 신을 만들고 의지하는데, 내가 만들어서 버릴 수 없게 됩니다. 세상에는 신이라는 개념을 가지고 초월자, 초자연이라고 부르면서 섬기지만, 사실상 어떤 신도 누군가를 위하여 죽지 않았습니다. 죽는 신이 있더라도, 죽기 위해 온 신은 없습니다. 굴복하고 복종하는 죽음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남을 위해 죽을지라도 다시 살아남이 없습니다. 아무리 착한 사람이 죽을지라도 그 죽음을 이겼다고 여기지 않습니다. 죽음 앞에서는 두렵고, 허무한 것입니다. 



2. 그리스도는 언약을 이루시기 위해 죽고 부활하셨다


오늘 말씀을 보면, 우리 주님은 죽음의 자리에 서시려고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습니다. 이는 마태복음 1:1에서도 언급됩니다. 예언된 다윗의 후손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창세기 3:15의 여인의 후손, 이사야 7:14과 마태복음 1:23의 임마누엘이 육신으로 오신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이 육신으로 오신 것은 죽기 위함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죽어 부활하시기 위함입니다. 창세기 2장에서 언약 체결하고 3장에서는 타락하여 모든 인간이 죽었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자기 형상으로 창조하신 것은 인간과 안식하시고, 인간과 언약을 맺으시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에게만 인격적 순종을 요구하십니다. 천사는 단지 심부름꾼이지 언약의 상대자가 아닙니다. 인간만이 지정의로 여호와의 뜻을 순종하고 찬양합니다. 그러나 이제 모든 인류가 태생적으로 이것에 대해 무능해졌습니다. 



3. 인간 회복의 길: 부활의 도


1) 나의 죽음을 알아야 그리스도의 부활을 누린다


그렇다면, 이제 어떻게 하나님이 처음 인간을 지으신 목적을 이루실까요? 그것은 죽고 사는 길밖에 없습니다. 부활의 도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죄사함이 없이는 구원받지 못합니다. 애통함 없이는 아무도 화평을 누릴 수 없습니다. 이것이 부활의 도입니다. 이제는 우리가 흑암 가운데 거함이 있습니다. 우리에겐 욕심도 있습니다. 죄로부터 중립적인 인간은 아무도 없습니다. 모든 인간이 거짓과 시기와 질투 등을 하며 베푸는 것에는 늦고 취하는 것에는 빠릅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가 구원을 얻는 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난마같이 얽혀 있는 마지막 결정체인 죽음으로인데, 십자가는 이 총체적인 죽음에 속한 것으로부터 이 모든 흑암을 끌어모아 죽음을 깨뜨린 것입니다. 죽지 않고 살아난다는 것은 모두 거짓입니다. 비유하면 우리는 이미 더러워진 걸레입니다. 처음부터 하얀 걸레가 없습니다. 태생적으로 사망에 속한 우리입니다. 그래서 4절에 예수님이 "성결의 영으로는"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온갖 더럽고 부정적인 것을 말갛게 깨끗히 하셔서 주시는 영인 것입니다. 그분이 바로 오늘 말씀에 부활하셨고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다고 합니다. 

시편도 그러듯 우리의 찬미는 큰 슬픔과 애통함 가운데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의 부활의 도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것을 알았습니다. 내가 죄인 중에 괴수라고 했습니다. 그저 한 말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정말 자신의 비참함을 알았기 때문에 이 말을 한 것인데 그 가운데는 믿는 구석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 죄를 위해 예수께서 오신 것입니다. 내가 죄인 중의 괴수임을 알아야, 내 죄를 십자가에 못 박아야 십자가의 부활의 삶을 누림을 알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항상 부정적인듯 하나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이 오직 유일한 부활의 도입니다. 


2) 살려 주는 영이신 그리스도


부활의 도가 아닌 단 한 번의 약속이 나오는데 에덴 동산에서 하신 아담과의 언약입니다. 그것은 처음부터 산 사람이 지키는 약속인데 우리는 그런 상태가 아니므로 살려 주는(life-giving) 영이 있어야 합니다. 죄 짓기 전의 첫 사람 아담은 산 영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살려 주는 영이 있어야 합니다. 내가 스스로 못 삽니다. 물에 빠진 인간이 뭔가 해 본다고 자꾸 흔들지만 더 밑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은 이와 같은 상태의 우리를 살리시는데 그것이 바로 본문의 성결의 영입니다. 기독교는 부활의 종교입니다. 

우리에게는 내 죄와 허물이 상식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의롭다 하는 것이 특별한 것입니다. 착한 것이 특별하고, 더럽고 거짓되고 남 욕하는 것이 정상입니다. 특별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결의 영으로, 살려 주시는 영으로 우리에게 오셔서 생명을 주시는 것입니다. 생명은 스스로 우리가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성결의 영이신 예수께서 넣어 주셔야 하는 것입니다. 부활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역사적인 사건이기도 하지만 우리에게 더 큰 의미는 그 예수가 부활하신 그 권능의 열매가 우리에게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날마다 죽노라 하면서 날마다 사노라 하는 것입니다. 매일 죽고 매일 사는 것이 부활의 도입니다. 

옆에 사람들 보면 다 착하게 보이고 나만 왜 이럴까 할 때가 있습니다. 이런 생각도 어떻게 보면 죄의 현상입니다. 죄는 내 것보다 남의 것이 좋아 보이게 합니다. 내 것이 좋아 보여야 할 때는 하나님이 내게 주실 때여야 합니다. 하나님이 주셔서 좋아 보이면 그것을 나누고 싶어 합니다. 


3) 이전보다 더 나은 회복


우리는 오늘 말씀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참 하나님이시자 참 사람이 되신 것은 그 안에 생명이 있으신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것을 봅니다. 태초에 아담을 만들어 한 번 순종을 보시려 했다면, 둘째 아담, 마지막 아담 예수를 사람의 아들로 나게 하셔서 그가 죽고 부활하심으로 의를 이루고자 하셨습니다. 죽는 도와 부활의 도가 없이는 믿음이 헛것입니다. 결코 우리는 스스로 착하지 못합니다. 자기 부인이 있을 때 하나님은 이전보다 낫게 하십니다. 성경은 절대 이전과 같이 하는 경우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담대한 것입니다.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합니다. 부활의 도를 알아야, 썩는 밀알의 도를 알아야 우리가 성도의 거룩에 이룰 수 있습니다. 당장 보기 싫고 초라해 보여도 생명이 있는 흙에 떨어져야 열매를 맺습니다. 


4) 죽음을 죽인 그리스도의 죽음


아버지 품 속에 계신 성자 예수께서, 생명이자 태초로부터 계신 그분(요 1:4)이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스스로 생명이신 분이 오셔서 죽음에 복종하셨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죄의 삯은 사망이기에, 공의로운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 생명이신 분이 이 땅에 오셔서 죽으심으로써 죽음을 죽이신 것입니다. 아주 옛날에 초대 교회의 교부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 죽으시고 사도들이 있는데 사도들도 죽고 나서 그들의 제자(속사도), 그리고 그들의 제자인 교부들은 이것을 '생명으로 미끼로 던졌는데 사망이 그것을 삼겨서 일순간 이겼다고 했지만 이후 그 안에서 탁 퍼뜨려져서 사망을 죽인 것'으로 비유했습니다. 생명이신 분이 이 땅에 오셔서 죽으시는 것을 마귀 사탄은 자기가 이긴 것으로 생각했는데 오히려 생명을 삼킨 사망이 죽어 버린 것입니다. 그러니 사망을 이기는 죽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생각에는 일부 과한 부분이 있을 수 있어도 일리가 있습니다. 


5) 우리의 죄 값을 치러 죽으시 위해 사람이 되신 하나님


말씀이 육신이 되었는데 그것에 생명이 있습니다. 그 생명을 사망이 삼킨 것, 즉 빛을 어둠이 삼키는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이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난 것은 예수님이 사람이 되셨기 때문입니다. 생명이신 분이 사람으로서 우리의 자리에 오셔서 죽으신 것입니다. 죽으러 오신 분이 왕이신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메시아가 오면 무력으로 로마를 물리칠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와서 기껏 한다는 말이 자신의 수난을 예고하신 것이었습니다. 즉 다윗의 혈통에 나신 것은, 생명이신 분이 사람의 아들로 오셔서 우리의 죄 값을 치르려고 죽음을 죽으신 것입니다. 그 죽음이 바로 왕의 권세입니다. 죽음을 죽이는 것입니다. 사망의 삯은 사망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입니다. 다윗의 아들, 왕이자 메시아로 오셔서 죽으셨습니다. 그분은 4절에, 하나님이십니다. 성결의 영으로는 부활하사, 하나님이 아들로 이 땅에 오셔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것입니다. 참 사람이시자 참 사람이신 예수님이 하나님으로만 계시면 죽을 수 없고 사람으로서만 계시면 죽음을 이길 수 없는데 하나님이자 사람으로 오셔서 죽음을 죽으시되 죽음을 이기신 것입니다. 이 사건이 바로 성육신입니다. 


6) 성육신이 없으면 부활도 없다


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육신 하시지 아니하시면 죽음도 없고 부활도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아멘'은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시고"부터 시작되어야 합니다. 이것 없이 부활의 고백은 없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믿지 않는 것이 바로 신신학, 자유주의 신학입니다. 동정녀 마리아로 나심을 믿는지에 따라 바른 믿음의 여부가 결정됩니다. 동정녀 잉태가 없이 부활을 믿는다는 것은 거짓 믿음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죽으실 수 없습니다. 빛은 절대 어둠에 굴복할 수 없습니다. 또한 사람의 아들로만 계시면 죽음에서 다시 살아날 수 없습니다. 이것을 누가 생각할 수 있었습니까? 이스라엘 사람들은 모세와 다윗을 잘 알아 오히려 이 대속의 교리를 알지 못한 것입니다. 그리고 부활의 도를 몰랐습니다. 그러니 부활의 도를 전하는 것을 싫어한 것입니다. 죽어야 사는 이 도를 싫어한 것입니다. 그래서 성육신이 없으면 부활이 없고 부활이 없으면 부활의 도 전하는 것도, 우리의 믿음도 헛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동정녀 잉태, 즉 성육신이 없으면 부활의 도가 없습니다. 자기 죽음도 감당하지 못하는 이단은, 그러므로 구원의 도가 없습니다. 생명의 아들이신 예수께서 사람이 되시고 그 생명을 가지고 인간으로 죽으심으로 사망을 이기신 것입니다. 그 생명이 탁 터져서 죽음이 깨지고 무덤의 돌이 깨진 것입니다. 휘장이 위로부터 갈린 것입니다. 지성소가 열린 것입니다. 이제는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의 몸으로 구원을 얻게 된 그 빛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7) 살려 주시는 영으로 부활의 도를 살라


그래서 우리가 빛의 자녀가 되려면, 그 생명을 누리려면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살려 주시는 영을 받아야 합니다. 우리는 원래 산 영이 아니란 말입니다. 우리는 동사적 신앙이 아닙니다. 명사적 신앙입니다. 내가 무엇을 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무엇을 주셔서 입니다. 부활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부활의 첫 열매가 아닙니다. 예수님이 첫 열매이고 우리는 우리 한국교회의 믿음의 선배가 말한 것처럼 "후속 열매"입니다. 

세상의 온갖 부조리와 죄 가운데 우리가 힘듭니다. 그러나 오히려 이 세상에서는 이것이 정상이라고 고백해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죽어야 사는 부활의 도가 있을 뿐입니다. 어려운 것을 절대 어렵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제가 가장 평화로울 때가 언제인지 돌이켜보면, 배가 자주 아팠는데 어머니 옆에 누워 있을 때 그 배가 덜 아파지는 그 순간입니다. 아픔을 겪으니 건강한 것이 감사한 것입니다. 그것이 부활의 도입니다. 여러분들, 슬픔과 절망과 갈등이 없는 것을 너무 기뻐하지 마십시오. 우리 주님이 이 땅에 오셔서 모든 죄 된 것을 깨뜨린 부활의 도를 생각하고 갈망하십시오. 천국에 가면 더 이상 시기와 죄와 갈등이 없습니다. 그러니 이 땅에서는 사도 바울과 같이 내가 죄인 중의 괴수라, 날마다 죽노라는 고백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이 이 땅에 오셔서 은혜의 해를 선포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즉 선택받은 자들은 누구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하셨습니다. 우리 앞에는 분명 요단과 홍해가 있습니다. 우리에게 꽃길만이 아닌 험로를 주신 것은 바로 부활의 도입니다. 성경은 창세기부터 야곱, 이삭에 이어 모든 인물이 이에 대한 것입니다. 요즘 <<기독교 강요>> 번역을 정리하면서 보니 구약의 모든 인물이 정말 힘들게 살았습니다. 부활의 도입니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라"(롬 14:8-9). 부활의 도에 속한 자는 죽은 게 죽은 게 아니요 산 것이 산 것이 아닙니다.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라, 죽어 있으면 살 것을 생각하고 살아 있으면 죽을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는 어떻게 할 수가 없습니다.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은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고 그저 하늘에서 만나와 메추라기 주실 것을 바랄 뿐이었습니다. 그나마 낫다고 하는 벧엘도 풀조차 없어서 돌을 베고 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야말로 광야에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없을 뿐 아니라 가만히 있으면 죽습니다. 그런데 만나와 메추라기를 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부활의 도입니다. 우리는 죽었다와 살았다를 함께 붙들어야 합니다. 



4. 결론


유명한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라는 교부는 죽음과 부활을 함께 묵상하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사나 죽으나, 특히 코로나 전염병 시국을 맞아 이 극명한 죽음과 삶의 교차점에서 이를 더 생각하게 됩니다. 사실 성도들은 모든 문제가 삶과 죽음의 문제입니다. 모든 문제가 코로나와 똑같습니다. 사나 죽으나 내가 그리스도의 것입니다. 힘을 냅시다. 이것이 죽음 같아도 지혜롭기만 하다면 모든 것이 말씀과 기도로 거룩해짐을 믿어야 합니다. 이것이 지나고 나면 어떻게 대처하느냐에 따라 어느 국가가 아주 흥왕할 수도 있다는 뉴스도 나옵니다. 우리나라가 그럴 여력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나라만큼 부지런하고 재능이 있는 사람들이 없습니다. 여러분 조금 힘드시더라도 겨울에 오히려 생명 작용이 가장 강하다는 것을 생각하시고 움을 틔울 것을 기다리며 인내하십시다. 부활의 도에 대해 이와 같이 전해 보았습니다. 삶과 죽음을 꼭 함께 묶어서 가지시고 묵상하십시오. 그러면 평안과 넘치는 위로가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