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426][십자가지기교회 주일낮예배: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14)] 자유의지 (마 7:17-18) 문병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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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426][십자가지기교회 주일낮예배: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14)] 자유의지 (마 7:17-18) 문병호 목사
(마 7:17)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마 7:18)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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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취록>
1. 씨와 나무와 열매
우리가 매 주일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보고 있습니다. 전국 교회가 잘 읽고 계시리라고 믿고 있습니다. <기독신문>에 동일한 내용이 연재되고 있습니다.
본문은 자유의지에 대한 것입니다. 자유의지가 문제가 되는 이유, 그것은 의지의 약하고 강함이 문제가 아닙니다. 거듭난 사람은 자유의지가 있고 그렇지 않은 자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중심을 보시므로 거듭나지 않은 사람이 열심히 선하게 착하게 산다고 해도 하나님이 받으실 만한 의지가 아닙니다. 그래서 본문은 아무리 다른 것이 뛰어나도 못된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반대도 마찬가지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이 본문에 비추어 거듭난 사람은 약해고 부족해도 예배를 하나님이 받으십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받으실 만한 기뻐하시는 의지로 드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본문을 정한 이유입니다.
요한일서 3장 9절은 하나님의 씨가 우리에게 있다고 말합니다. 갈라디아서에도 한 씨가 있는데 여럿을 가리켜 말하지 않고 그리스도를 칭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 씨가 우리 안에 있는 것입니다. 봄되면 그런 생각을 합니다. 겨울에는 그것이 어떤 나무인지 모르다가도 봄이 되면 알게 됩니다. 이는 씨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근본은 씨입니다. 줄기도 둥치도 아니고 바로 씨입니다. 씨가 다르면 뿌리와 나무와 열매가 다릅니다. 그런데 우리 안에는 바로 하나님의 씨가 있습니다. 그래서 죄를 지을 수 없다고 강하게 얘기해 버립니다. 그런데 우리는 죄를 짓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죄를 지어서는 안 되는 사람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죄를 실제로 못 짓는 것이 아니라 죄를 지으면 안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2. 보시기 심히 좋았더라
하나님이 인류를 지으셔서 자유의지를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하늘과 땅과 바다와 우주의 별과 땅의 짐승, 바다의 고기, 수목, 천사까지 다 지으셨습니다. 모든 공간과 시간을 지으시고 마지막에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지으신 것이 보니 다 심히 좋았다고 하셨습니다. 심히 좋았다는 것이 무엇일까요? 일차적으로 하나님의 뜻에 맞았다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창세기에 보면 만물을 짓고 사람을 지으십니다. 만물 가운데 생육하고 번성하고 후손도 낳고 충만하게 하십니다. 그리고 더불어서 다스리고 정복하라는 명령을 오직 인간에게만 주십니다. 즉, 하나님이 보시기에 심히 보기 좋았다는 것은 모양이나 어떤 다른 것보다 만물이 인간과 더불어 생육하고 번성하고 충만하게, 인간 중심의 창조를 하신 것과, 인간이 다스리고 정복하기에 합당하게 지으신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 모습대로 보기 좋았더라고 하신 것입니다. 즉, 만물이 인간을 위해서 존재하며 인간은 그것을 다스리고 정복하는 것을 하나님의 뜻으로 보는 것입니다.
3. 안식
하나님은 이와 같이 인간을 마지막으로 창조를 마치시고 제칠일에 안식하십니다. 안식일이 제칠일인데 이 안식은 그저 단순히 쉰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 날에 안식하셨음이니라"(창 2:3).
1) 복되고 거룩함
(1) 복됨
성경에서 복이라는 말은 선함 가운데 누리는 것입니다. 즉, 먼저 선해야 합니다. 그리고 올바른 가운데 누리는 것입니다. 죄 지으면서 누리는 것을 복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복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진리에 부합하면서 그 가운데 누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만물을 복되게 하신 것은 그 만물들이 제자리에 있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인간과 어울리고 조화로운 질서 가운데 있었던 것입니다. 안식은 첫째로 이와 같은 상태를 의미합니다.
(2) 거룩
그리고 두 번째로 거룩하게 하셨습니다. 거룩은 하나님을 향해 별도로 드려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보통 거룩이라고 하면 구별만 얘기하는데 거룩이라는 말은 구별해서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내가 창고에만 쌓아 두었다고 해서 거룩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드려진 바 되어야 거룩입니다. 그러면 안식일은 무엇이냐 하면, 복되고 거룩한 날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과 관계를 의미합니다. 안식일은 특별히 하나님과 바로 그의 구원받은 자들, 인간과 안식하신 것을 의미합니다. 인간이 안식의 주체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지 않다고 정곡을 찌르는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아멘! 제가 이 말씀을 비로소 이번에 설교 준비하면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이 말씀으로 박사 논문을 썼는데도 말입니다. 안식일은 하나님이 창조 후 인간과 더불어 인간을 복되게 하시고 거룩하게 하심으로서 안식하는 것이 그 본질인 것입니다.
2) 안식의 열매: 인격적 순종
하나님이 우리에게 제자리에 있게 하셨습니다. 복은 질서 가운데, 진리 가운데, 의 가운데 누리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성경에서 선하다는 말은 바로 이 뜻입니다. 우리가 행여 조금 굶는다고 해서 죄 안 짓는 것이 낫습니다. 죄 지어서 베푸는 것을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복되게 하시고 우리는 거룩하게 구별해서 드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안식의 개념입니다. 제자리에 있으면서 누리고 우리를 구별해서 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모습의 열매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순종입니다. 그래서 안식일 다음에 자연히 하나님은 우리 사람에게 순종을 요구하셨습니다. 순종은 당연한 열매, 복을 누리는 자가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게 바쳐지는 당연한 열매입니다. 가만히 놔두면 순종합니다. 그래서 가만히 있으라고 약속을 한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언약을 맺은 것입니다. 선악과를 따 먹지 마라고, 그저 가만히 있으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을 누릴 줄 알면 죄를 안 짓습니다. 무엇을 해서 인간이 죄를 짓는 것이 아닙니다. 안식일을 가만히 있어 잘 누리기만 하면 죄를 안 짓는 것입니다.
안식을 하게 하셨다는 것을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안식을 하게 하셨으면 거기에서 당연히 우리는 안 할 것을 하지 말아야 하고, 제자리에 있으면 복의 상태인데, 마귀 사탄의 사주를 받은 뱀이 하와를 꾀고 하와가 아담에게 과일을 권해서 결국은 죄를 짓게 된 것입니다. 언약을 맺어서 하나님이 인간을 죄의 유혹을 받게 만든 것처럼 생각하면 안 됩니다.
4. 자유의지
1) 하나님의 형상, 인격적 순종, 회복된 자유의지
여기에서 자유의지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지었을 때 자기의 형상대로 지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알게(하나님을 인식하게) 하고, 하나님을 느끼고(우리의 내적 심성이 본성적으로 하나님을 향하고[정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의지를 주셨습니다. 이것이 인간에게 하나님이 주신 자유의지입니다. 우리 인간은 첫 번째 지식과 첫 번째 감정과 첫 번째 의지가 하나님을 향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인간 본연의 모습이고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인간은 첫 마음, 첫 의지, 첫 행위를 하나님께 드리게 되어 있습니다. 마치 인간이 어머니를 사랑하고 좋아해도 아버지에게 잘 보이고 인정받으려 하는 본능적인 원함이 있듯 말입니다. 이 지식과 감정과 의지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그때 인간이 가지는 것이 자유의지입니다.
2) 회복된 자유의지로 복됨을 충실히 누리라
우리는 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서 한 장을 가지고 자유의지를 다루었는지 생각해 봐야 합니다. 이것이 과연 그렇게 큰 주제인지 회의할 수 있으나, 하나님은 인간이 본능적으로, 기계적으로 짐승처럼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자유의지를 주셔서 선악과를 따 먹지 않기만 하면, 즉 하나님이 주신 모든 것을 자기 자리에서 누리기만 하면 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처럼 복을 받았으니 우리는 하나님께 다시 거룩하게 구별하여 드립니다. 이와 같이 자유의지를 가지고 머물러 있으면 영생의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위해 언약을 맺으신 것입니다. 창조 후 에덴 동산에서 주신 이 첫 번째 언약은 그저 누리면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이것을, 그저 누리는 것을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요즘에는 먹을 것이 풍부합니다. 이전에는 먹을 것이 늘 부족했습니다. 그래서 누리는 것을 조금 더 잘 알았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요즘은 소득이 높아지고 먹을 것이 남아 돕니다. 그런데 그 돈과 물질로 말하기조차 거북한 죄를 짓는 데 씁니다. 우리 성도님들은 누릴 줄 알아야 합니다. 제가 자주 말씀드리듯이 해마다 진달래가 빨리 지는 것 같습니다. 벚꽃도 빨리 지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 자리에서 제가 회개를 했습니다. 내가 벚꽃을 일 분이라도 제대로 보았느냐 말입니다. 한창 피었을 때 십 분조차도 제대로 보고 누리지 않았으면서 벚꽃이 빨리 진다고 말하니 우리는 얼마나 누릴 줄 모릅니까. 제가 공부한 미국의 미시간, 영국의 에든버러 등과 비교해도 우리나라처럼 아름다운 햇살이 가득한 곳은 없습니다. 우리가 보면 얼마나 누릴 것이 많습니까? 집에 있어서 바깥에 못 나간다고 하는데 그럼 우리가 작년에는 얼마나 많이 나갔습니까? 가지 말라고 하면 못 가게 하냐고 하는데, 갈 수 있을 때는 정작 가지 않습니다. 즉, 누리지는 않고 취하는 데만 익숙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동산 모든 실과를 먹게 하고 동물의 이름을 짓게 할 정도로 지식도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걸 누리지 않고 또 다른 지식을 찾으며 선악과를 따 먹고 불순종한 것입니다. 우리는 자유의지라고 하면 갈렙과 같이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 하면서 주도적으로 행하는 것을 생각합니다. 그러나 자유의지의 기본은 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안식이 귀합니다. 안식일은 복되게 하고 거룩하게 하신 사람을 위한 것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이 혜택을 베푸는 것은 빨리 잊어버리고 새로운 것만을 찾습니다. 우리 인간은 하나님이 자유의지를 주셨습니다. 그리고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언약은 누리라는 것입니다. 뭘 하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저 선악과를 따 먹지 말라고만 하셨습니다.
가족 간에도 가까이 있을 때 누리십시오. 멀리 있을 때 그리워하지 마시고 말입니다. 성도간에도 그렇습니다. 이런 질병으로 인해 성도 간에도 멀리 떨어져 있으니 얼마나 그립습니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자유의지를 주셔서 안식하게 하셨습니다.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마 11:30). 하나님은 결코 어려운 것을 인간에게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3) 뜻을 다하여 순종
제가 미시간에 있을 때 화란 사람들이 개척한 곳이어서 그런지 튤립이 많았습니다. 풍차도 있고요. 거기도 네덜란드처럼 튤립 축제를 합니다. 제가 화란에 예전에 학회 차 갔을때 튤립 축제에 가 본 적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교회 앞에 보면 튤립이 바람이 불 때 꽃봉이 흔들립니다. 그런데 그것을 볼 때마다 드는 생각은 기도하면서 몸이 흔들리는 것 같다는 것입니다.
자유의지가 없는 식물도 뭔가에 정성을 쏟는데 인격체로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셨습니다. 그 목적은 마음과 뜻과 정성과 목숨과 생명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신명기의 말씀을 이루기 위함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면 이 교훈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는지 내가 스스로 말함인지 알리라"(요 7:17). 우리가 의지를 가지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행할 때 우리가 하나님의 교훈을 알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내가 오늘 하늘과 땅을 불러 너희에게 증거를 삼노라 내가 생명과 사망과 복과 저주를 네 앞에 두었은즉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고"(신 30:19). 이것이 바로 자유의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시시각각 선택을 요구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생명의 길, 복의 길에 서야 합니다.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도다 듣는 자도 오라 할 것이요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 하시더라"(계 22:17). 우리의 자유의지가 어디에 있습니까? 인간은 타락 이후 자유의지를 상실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 앞에서 선을 행하는 의지인데 인간은 중심이 타락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우리에게 하나님이 씨앗을 주셨습니다. 우리에게 심겨진 하나님의 씨는 여호와를 즐거워하고 찾고 영적 예배를 드리는 것을 즐거워하는(롬 12:1), 이것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할렐루야 그의 성소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며 그의 권능의 궁창에서 그를 찬양할지어다"(시 150:1). 시편의 이 모습이 순종하는 인간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주시지 않은 것을 찾지 않으십니다. 인간은 타락 후 아주 조금 자연의지만 남게 되었습니다. 세상에서 아무리 사람들이 강한 의지를 발휘한다고 해도 하나님은 중심을 보시므로 씨가 없는 자들의 의지는 찾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비록 작아 보이고 부족해 보여도 하나님의 뜻을 찾아 순종하면 그것이 바로 하나님 앞에서 기뻐하시는 일이요, 참된 자유의지입니다.
4) 첫 지식, 첫 마음, 첫 의지, 첫 사랑을 다시 하나님께 드리라
자유의지라는 것은 타락하기 전에 하나님 앞에 첫 지식과 첫 마음과 첫 의지를 드리는 것이라고 서두에 말씀했습니다. 인간은 이제 아무도 그렇게 못합니다. 그러나 구원을 받으면 우리 안에 자유의지가 다시 생깁니다. 그래서 어거스틴이라는 교부는 우리가 다시 죄를 지을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는 다 범죄하지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하나님께로부터 나신 자가 그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그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요일 5:18);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그도 범죄하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났음이라"(요일 3:9). 인간이 죄를 지을 수 없다고 얘기합니다. 왜요?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님이 우리를 지키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요구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베푸셨습니다. 거듭난 지식과 거듭난 의지와 거듭난 감정을 주셨습니다. "내가 스스로 할 수 없으니 그저 누립니다" 하면서 눈물로 씨를 뿌릴 때 많은 열매를 누릴 수 있습니다. 그것을 바로 성경은 좋은 나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좋은 나무는 그저 잘 누리는 나무입니다. 내가 뭔가를 한다고 하면서 뿌리가 왔다갔다 하면 아무것도 못 맺습니다. 좋은 나무는 딱 뿌리를 박고 누리는 것입니다. 아무리 봐도 성경은 누리는 것을 공로라고 합니다. 아무리 봐도 하나님은 누리는 것에 상급을 주십니다. 저도 스스로 보면 일프로도 누리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면서 막연히 없다고 하고 부족하도 하고 비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누리는 것을 공로 삼아 주십니다.
5. 결론
오늘의 말씀을 정리하면 자유의지라는 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다시 일어나는 것입니다. 다시 일어서는 것은 씨가 있기 때문입니다. 자유의지를 주신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거듭나게 해서 회복하신 것은 영 죽게 하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씨가 있으므로 다시 일어나는 것이 자유의지입니다. 우리의 최고 자유의지는 다시 일어나는 것, 소생하는 것입니다. 그 힘과 의지를 우리를 구원하여 회복해 주셨습니다. 바울이 말한 그 모든 고난을 당하더라도 우리는 다시 일어납니다.
둘째, 변함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변함 없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무엇을 했다는 것으로 세어 보기보다 무엇을 계속 하는지를 헤아려 보기 바랍니다. 뭔가 많이 한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움직이는 나무는 나그네에게 절대 그늘을 주지 못합니다. 세상에서 쓰이는 사람이 되려면 변함없이 그 자리에 있어야 합니다. 팔불출 같은 말이지만 제가 이번에 <<기독교 강요>>를 번역한 것이 제 집사람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변함없이 그 자리에 있어 줘서 감사하다는 마음으로 번역을 했습니다.
셋째, 맡기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맡기는 것이 최고의 자유의지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쓰려면 쓰시도록 내 자신을 맡기는 것이 자유의지입니다.
자유의지는 이와 같이 다시 일어서고 소생하고 오래 그 자리에서 견디고, 그리고 하나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가장 아름다운 신앙의 모습입니다. 이것이야말로 가장 강한 의지, 굳은 의지, 참 자유의지입니다. 우리 성도님들이 당연히 다 좋은 나무로 아름다운 열매를 맺는 길로 나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20200426][십자가지기교회 주일낮예배: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14)] 자유의지 (마 7:17-18) 문병호 목사
(마 7:17)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마 7:18)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음성파일: 게시물 하단 "관련링크"에서 청취 혹은 내려받기 가능합니다.
<녹취록>
1. 씨와 나무와 열매
우리가 매 주일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보고 있습니다. 전국 교회가 잘 읽고 계시리라고 믿고 있습니다. <기독신문>에 동일한 내용이 연재되고 있습니다.
본문은 자유의지에 대한 것입니다. 자유의지가 문제가 되는 이유, 그것은 의지의 약하고 강함이 문제가 아닙니다. 거듭난 사람은 자유의지가 있고 그렇지 않은 자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중심을 보시므로 거듭나지 않은 사람이 열심히 선하게 착하게 산다고 해도 하나님이 받으실 만한 의지가 아닙니다. 그래서 본문은 아무리 다른 것이 뛰어나도 못된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반대도 마찬가지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이 본문에 비추어 거듭난 사람은 약해고 부족해도 예배를 하나님이 받으십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받으실 만한 기뻐하시는 의지로 드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본문을 정한 이유입니다.
요한일서 3장 9절은 하나님의 씨가 우리에게 있다고 말합니다. 갈라디아서에도 한 씨가 있는데 여럿을 가리켜 말하지 않고 그리스도를 칭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 씨가 우리 안에 있는 것입니다. 봄되면 그런 생각을 합니다. 겨울에는 그것이 어떤 나무인지 모르다가도 봄이 되면 알게 됩니다. 이는 씨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근본은 씨입니다. 줄기도 둥치도 아니고 바로 씨입니다. 씨가 다르면 뿌리와 나무와 열매가 다릅니다. 그런데 우리 안에는 바로 하나님의 씨가 있습니다. 그래서 죄를 지을 수 없다고 강하게 얘기해 버립니다. 그런데 우리는 죄를 짓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죄를 지어서는 안 되는 사람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죄를 실제로 못 짓는 것이 아니라 죄를 지으면 안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2. 보시기 심히 좋았더라
하나님이 인류를 지으셔서 자유의지를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하늘과 땅과 바다와 우주의 별과 땅의 짐승, 바다의 고기, 수목, 천사까지 다 지으셨습니다. 모든 공간과 시간을 지으시고 마지막에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지으신 것이 보니 다 심히 좋았다고 하셨습니다. 심히 좋았다는 것이 무엇일까요? 일차적으로 하나님의 뜻에 맞았다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창세기에 보면 만물을 짓고 사람을 지으십니다. 만물 가운데 생육하고 번성하고 후손도 낳고 충만하게 하십니다. 그리고 더불어서 다스리고 정복하라는 명령을 오직 인간에게만 주십니다. 즉, 하나님이 보시기에 심히 보기 좋았다는 것은 모양이나 어떤 다른 것보다 만물이 인간과 더불어 생육하고 번성하고 충만하게, 인간 중심의 창조를 하신 것과, 인간이 다스리고 정복하기에 합당하게 지으신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 모습대로 보기 좋았더라고 하신 것입니다. 즉, 만물이 인간을 위해서 존재하며 인간은 그것을 다스리고 정복하는 것을 하나님의 뜻으로 보는 것입니다.
3. 안식
하나님은 이와 같이 인간을 마지막으로 창조를 마치시고 제칠일에 안식하십니다. 안식일이 제칠일인데 이 안식은 그저 단순히 쉰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 날에 안식하셨음이니라"(창 2:3).
1) 복되고 거룩함
(1) 복됨
성경에서 복이라는 말은 선함 가운데 누리는 것입니다. 즉, 먼저 선해야 합니다. 그리고 올바른 가운데 누리는 것입니다. 죄 지으면서 누리는 것을 복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복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진리에 부합하면서 그 가운데 누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만물을 복되게 하신 것은 그 만물들이 제자리에 있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인간과 어울리고 조화로운 질서 가운데 있었던 것입니다. 안식은 첫째로 이와 같은 상태를 의미합니다.
(2) 거룩
그리고 두 번째로 거룩하게 하셨습니다. 거룩은 하나님을 향해 별도로 드려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보통 거룩이라고 하면 구별만 얘기하는데 거룩이라는 말은 구별해서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내가 창고에만 쌓아 두었다고 해서 거룩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드려진 바 되어야 거룩입니다. 그러면 안식일은 무엇이냐 하면, 복되고 거룩한 날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과 관계를 의미합니다. 안식일은 특별히 하나님과 바로 그의 구원받은 자들, 인간과 안식하신 것을 의미합니다. 인간이 안식의 주체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지 않다고 정곡을 찌르는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아멘! 제가 이 말씀을 비로소 이번에 설교 준비하면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이 말씀으로 박사 논문을 썼는데도 말입니다. 안식일은 하나님이 창조 후 인간과 더불어 인간을 복되게 하시고 거룩하게 하심으로서 안식하는 것이 그 본질인 것입니다.
2) 안식의 열매: 인격적 순종
하나님이 우리에게 제자리에 있게 하셨습니다. 복은 질서 가운데, 진리 가운데, 의 가운데 누리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성경에서 선하다는 말은 바로 이 뜻입니다. 우리가 행여 조금 굶는다고 해서 죄 안 짓는 것이 낫습니다. 죄 지어서 베푸는 것을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복되게 하시고 우리는 거룩하게 구별해서 드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안식의 개념입니다. 제자리에 있으면서 누리고 우리를 구별해서 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모습의 열매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순종입니다. 그래서 안식일 다음에 자연히 하나님은 우리 사람에게 순종을 요구하셨습니다. 순종은 당연한 열매, 복을 누리는 자가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게 바쳐지는 당연한 열매입니다. 가만히 놔두면 순종합니다. 그래서 가만히 있으라고 약속을 한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언약을 맺은 것입니다. 선악과를 따 먹지 마라고, 그저 가만히 있으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을 누릴 줄 알면 죄를 안 짓습니다. 무엇을 해서 인간이 죄를 짓는 것이 아닙니다. 안식일을 가만히 있어 잘 누리기만 하면 죄를 안 짓는 것입니다.
안식을 하게 하셨다는 것을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안식을 하게 하셨으면 거기에서 당연히 우리는 안 할 것을 하지 말아야 하고, 제자리에 있으면 복의 상태인데, 마귀 사탄의 사주를 받은 뱀이 하와를 꾀고 하와가 아담에게 과일을 권해서 결국은 죄를 짓게 된 것입니다. 언약을 맺어서 하나님이 인간을 죄의 유혹을 받게 만든 것처럼 생각하면 안 됩니다.
4. 자유의지
1) 하나님의 형상, 인격적 순종, 회복된 자유의지
여기에서 자유의지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지었을 때 자기의 형상대로 지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알게(하나님을 인식하게) 하고, 하나님을 느끼고(우리의 내적 심성이 본성적으로 하나님을 향하고[정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의지를 주셨습니다. 이것이 인간에게 하나님이 주신 자유의지입니다. 우리 인간은 첫 번째 지식과 첫 번째 감정과 첫 번째 의지가 하나님을 향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인간 본연의 모습이고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인간은 첫 마음, 첫 의지, 첫 행위를 하나님께 드리게 되어 있습니다. 마치 인간이 어머니를 사랑하고 좋아해도 아버지에게 잘 보이고 인정받으려 하는 본능적인 원함이 있듯 말입니다. 이 지식과 감정과 의지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그때 인간이 가지는 것이 자유의지입니다.
2) 회복된 자유의지로 복됨을 충실히 누리라
우리는 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서 한 장을 가지고 자유의지를 다루었는지 생각해 봐야 합니다. 이것이 과연 그렇게 큰 주제인지 회의할 수 있으나, 하나님은 인간이 본능적으로, 기계적으로 짐승처럼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자유의지를 주셔서 선악과를 따 먹지 않기만 하면, 즉 하나님이 주신 모든 것을 자기 자리에서 누리기만 하면 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처럼 복을 받았으니 우리는 하나님께 다시 거룩하게 구별하여 드립니다. 이와 같이 자유의지를 가지고 머물러 있으면 영생의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위해 언약을 맺으신 것입니다. 창조 후 에덴 동산에서 주신 이 첫 번째 언약은 그저 누리면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이것을, 그저 누리는 것을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요즘에는 먹을 것이 풍부합니다. 이전에는 먹을 것이 늘 부족했습니다. 그래서 누리는 것을 조금 더 잘 알았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요즘은 소득이 높아지고 먹을 것이 남아 돕니다. 그런데 그 돈과 물질로 말하기조차 거북한 죄를 짓는 데 씁니다. 우리 성도님들은 누릴 줄 알아야 합니다. 제가 자주 말씀드리듯이 해마다 진달래가 빨리 지는 것 같습니다. 벚꽃도 빨리 지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 자리에서 제가 회개를 했습니다. 내가 벚꽃을 일 분이라도 제대로 보았느냐 말입니다. 한창 피었을 때 십 분조차도 제대로 보고 누리지 않았으면서 벚꽃이 빨리 진다고 말하니 우리는 얼마나 누릴 줄 모릅니까. 제가 공부한 미국의 미시간, 영국의 에든버러 등과 비교해도 우리나라처럼 아름다운 햇살이 가득한 곳은 없습니다. 우리가 보면 얼마나 누릴 것이 많습니까? 집에 있어서 바깥에 못 나간다고 하는데 그럼 우리가 작년에는 얼마나 많이 나갔습니까? 가지 말라고 하면 못 가게 하냐고 하는데, 갈 수 있을 때는 정작 가지 않습니다. 즉, 누리지는 않고 취하는 데만 익숙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동산 모든 실과를 먹게 하고 동물의 이름을 짓게 할 정도로 지식도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걸 누리지 않고 또 다른 지식을 찾으며 선악과를 따 먹고 불순종한 것입니다. 우리는 자유의지라고 하면 갈렙과 같이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 하면서 주도적으로 행하는 것을 생각합니다. 그러나 자유의지의 기본은 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안식이 귀합니다. 안식일은 복되게 하고 거룩하게 하신 사람을 위한 것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이 혜택을 베푸는 것은 빨리 잊어버리고 새로운 것만을 찾습니다. 우리 인간은 하나님이 자유의지를 주셨습니다. 그리고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언약은 누리라는 것입니다. 뭘 하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저 선악과를 따 먹지 말라고만 하셨습니다.
가족 간에도 가까이 있을 때 누리십시오. 멀리 있을 때 그리워하지 마시고 말입니다. 성도간에도 그렇습니다. 이런 질병으로 인해 성도 간에도 멀리 떨어져 있으니 얼마나 그립습니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자유의지를 주셔서 안식하게 하셨습니다.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마 11:30). 하나님은 결코 어려운 것을 인간에게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3) 뜻을 다하여 순종
제가 미시간에 있을 때 화란 사람들이 개척한 곳이어서 그런지 튤립이 많았습니다. 풍차도 있고요. 거기도 네덜란드처럼 튤립 축제를 합니다. 제가 화란에 예전에 학회 차 갔을때 튤립 축제에 가 본 적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교회 앞에 보면 튤립이 바람이 불 때 꽃봉이 흔들립니다. 그런데 그것을 볼 때마다 드는 생각은 기도하면서 몸이 흔들리는 것 같다는 것입니다.
자유의지가 없는 식물도 뭔가에 정성을 쏟는데 인격체로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셨습니다. 그 목적은 마음과 뜻과 정성과 목숨과 생명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신명기의 말씀을 이루기 위함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면 이 교훈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는지 내가 스스로 말함인지 알리라"(요 7:17). 우리가 의지를 가지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행할 때 우리가 하나님의 교훈을 알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내가 오늘 하늘과 땅을 불러 너희에게 증거를 삼노라 내가 생명과 사망과 복과 저주를 네 앞에 두었은즉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고"(신 30:19). 이것이 바로 자유의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시시각각 선택을 요구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생명의 길, 복의 길에 서야 합니다.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도다 듣는 자도 오라 할 것이요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 하시더라"(계 22:17). 우리의 자유의지가 어디에 있습니까? 인간은 타락 이후 자유의지를 상실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 앞에서 선을 행하는 의지인데 인간은 중심이 타락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우리에게 하나님이 씨앗을 주셨습니다. 우리에게 심겨진 하나님의 씨는 여호와를 즐거워하고 찾고 영적 예배를 드리는 것을 즐거워하는(롬 12:1), 이것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할렐루야 그의 성소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며 그의 권능의 궁창에서 그를 찬양할지어다"(시 150:1). 시편의 이 모습이 순종하는 인간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주시지 않은 것을 찾지 않으십니다. 인간은 타락 후 아주 조금 자연의지만 남게 되었습니다. 세상에서 아무리 사람들이 강한 의지를 발휘한다고 해도 하나님은 중심을 보시므로 씨가 없는 자들의 의지는 찾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비록 작아 보이고 부족해 보여도 하나님의 뜻을 찾아 순종하면 그것이 바로 하나님 앞에서 기뻐하시는 일이요, 참된 자유의지입니다.
4) 첫 지식, 첫 마음, 첫 의지, 첫 사랑을 다시 하나님께 드리라
자유의지라는 것은 타락하기 전에 하나님 앞에 첫 지식과 첫 마음과 첫 의지를 드리는 것이라고 서두에 말씀했습니다. 인간은 이제 아무도 그렇게 못합니다. 그러나 구원을 받으면 우리 안에 자유의지가 다시 생깁니다. 그래서 어거스틴이라는 교부는 우리가 다시 죄를 지을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는 다 범죄하지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하나님께로부터 나신 자가 그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그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요일 5:18);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그도 범죄하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났음이라"(요일 3:9). 인간이 죄를 지을 수 없다고 얘기합니다. 왜요?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님이 우리를 지키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요구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베푸셨습니다. 거듭난 지식과 거듭난 의지와 거듭난 감정을 주셨습니다. "내가 스스로 할 수 없으니 그저 누립니다" 하면서 눈물로 씨를 뿌릴 때 많은 열매를 누릴 수 있습니다. 그것을 바로 성경은 좋은 나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좋은 나무는 그저 잘 누리는 나무입니다. 내가 뭔가를 한다고 하면서 뿌리가 왔다갔다 하면 아무것도 못 맺습니다. 좋은 나무는 딱 뿌리를 박고 누리는 것입니다. 아무리 봐도 성경은 누리는 것을 공로라고 합니다. 아무리 봐도 하나님은 누리는 것에 상급을 주십니다. 저도 스스로 보면 일프로도 누리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면서 막연히 없다고 하고 부족하도 하고 비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누리는 것을 공로 삼아 주십니다.
5. 결론
오늘의 말씀을 정리하면 자유의지라는 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다시 일어나는 것입니다. 다시 일어서는 것은 씨가 있기 때문입니다. 자유의지를 주신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거듭나게 해서 회복하신 것은 영 죽게 하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씨가 있으므로 다시 일어나는 것이 자유의지입니다. 우리의 최고 자유의지는 다시 일어나는 것, 소생하는 것입니다. 그 힘과 의지를 우리를 구원하여 회복해 주셨습니다. 바울이 말한 그 모든 고난을 당하더라도 우리는 다시 일어납니다.
둘째, 변함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변함 없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무엇을 했다는 것으로 세어 보기보다 무엇을 계속 하는지를 헤아려 보기 바랍니다. 뭔가 많이 한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움직이는 나무는 나그네에게 절대 그늘을 주지 못합니다. 세상에서 쓰이는 사람이 되려면 변함없이 그 자리에 있어야 합니다. 팔불출 같은 말이지만 제가 이번에 <<기독교 강요>>를 번역한 것이 제 집사람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변함없이 그 자리에 있어 줘서 감사하다는 마음으로 번역을 했습니다.
셋째, 맡기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맡기는 것이 최고의 자유의지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쓰려면 쓰시도록 내 자신을 맡기는 것이 자유의지입니다.
자유의지는 이와 같이 다시 일어서고 소생하고 오래 그 자리에서 견디고, 그리고 하나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가장 아름다운 신앙의 모습입니다. 이것이야말로 가장 강한 의지, 굳은 의지, 참 자유의지입니다. 우리 성도님들이 당연히 다 좋은 나무로 아름다운 열매를 맺는 길로 나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