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503][십자가지기교회 주일낮예배: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15)] 구원의 소명 (롬 8:28-30) 문병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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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503][십자가지기교회 주일낮예배: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15)] 구원의 소명 (롬 8:28-30) 문병호 목사
(롬 8: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롬 8:29)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롬 8:30)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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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취록>
1. 소명
오늘은 소명에 대해서 보고자 합니다. 칭의, 성화라는 말은 많이 쓰지만, "소명"이라는 말은 그다지 주목받지 못하는 듯합니다. 고전을 보면 가장 길게 다루는 부분이 "소명"입니다. 사명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소명이라고 부릅니다. 소명은 두 가지로 봅니다. 첫째, 구원에 이르도록 부르심입니다. 둘째, 그 부르신 자들을 하나님의 뜻 가운데 사용하시는 부르심입니다. 즉, 사명입니다.
사실상, 하나님은 절대적이십니다. 계심도, 행하심도, 그 뜻도, 이끄심도 절대적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전부 상대적입니다. 인간은 해가 멀거나 가까워도 옷을 벗거나 입습니다. 하나님이 행하시는 것은 전부 절대적입니다. 하나님은 절대자이십니다. 하나님은 절대 뜻을 갖고, 절대 섭리와 경륜으로 그 절대적인 계획을 이루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은 불변합니다. 우리가 보기에 하나님이 변덕스럽게 보일지라도,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다 헤아라지 못해서 그렇지 하나님은 불변하십니다.
2. 합력하여 선을 이루심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롬 8:30).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 "합력"이라는 말에 우리의 이해가 가닿지 못하곤 합니다. 우리는 한 면만 보고 판단할 때가 있습니다. 하나가 좋으면 좋고, 하나가 나쁘면 나쁘다고만 생각하지, 그 모든 것이 조화를 이룬다는 생각을 못합니다. 그래서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것에 대해 무감각하기 쉽습니다. 조금 좋으면 난리가 나고, 조금 못하면 포기하거나 팽개치고 타인과 같이 여기기도 합니다.
1) 창세전 작정
하나님의 일은 특별히 시간적 합력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미리"가 세 번 나옵니다. '미리 아시다', '미리 정하다'가 두 번 나옵니다. 우리가 여기 존재하는 것은 하나님이 미리 아신 것입니다. 언제부터 아셨냐면, 창세전부터 아셨습니다. 창조의 선포가 있기 전에 우리를 미리 아셨습니다.
2) 절대적 소명
절대적인 하나님이 가장 절대적인 뜻을 보이는 것이 바로, 선택, 부르심, 즉 소명입니다. 하나님은 부르심에 있어서 절대성을 보여 주십니다. 구원을 이루어 가는 삶에 있어서 우리가 열심을 낼 부분이 있습니다만, 우리가 도무지 가닿을 수 없이 기다릴 수밖에 없는 것은 바로 부르심입니다. 포도원에 주인이 부르기 전에는 포도원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절대성이 나타나는 부분이 바로 부르심입니다. 간혹 우리가 힘들고 어렵거나 평탄할 때도 있지만, 불변하게 하나님께 감사한 경우는 나를 지명하여 불러주셨을 때입니다. 하나님이 택하셔서 부르신 것에 하나님의 절대성이 가장 나타납니다.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롬 9:15). 불쌍히 여김을 받는 입장에서는 단지 받을 뿐이지, 어떻게 할 수 없습니다.
3) 전부 은혜
하나님은 우리에게 "오직" 그리고 "전부/전적" 은혜를 베푸십니다. "오직" 은혜만 고백하다 보면, 어쩔 때만, 부분적으로만 "오직" 은혜라고 고백할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전부"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하지 않을 때가 있을 수 있습니다. 요셉과 모세는 고난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요셉이 국무총리 되었을 때만 "오직" 하나님의 은혜라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신다고 할 때, "오직" 은혜, "전부" 은혜, 좋을 때도 나쁠 때도 은혜, 합력하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전체적으로 보는 눈으로 복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3. 긍휼히 여기셔서 택하시고 부르심
하나님이 오직 긍휼히 여기심으로 하나님이 우리를 택하셨습니다. 불쌍히 여긴다는 것은 긍휼히 여긴다는 말입니다. 구별하자면, 불쌍히 여긴다는 것은 나누어 준다는 의미이고, 긍휼(矜恤)이라는 말은 체휼(體恤)이라고 할 수 있는데, "휼"(恤)자에는 마음(心)과 피(血)가 들어가 있습니다. 꼭 한자로 말할 필요가 없지만, 원어적으로도 체휼이라는 말은 그 사람과 한 몸이 되어 느껴 주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입장, 우리의 몸에서 느껴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한 몸이 되어 우리의 아픔을 아십니다.
야곱은 고생도 많았고, 긍휼도 많이 받았습니다. 야곱은 얍복강을 넘어 올 때, 벧엘의 약속을 갖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과거 벧엘에서 야곱을 열두 지파의 조상이 될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야곱은 날 때부터 하나님의 택함과 정함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자주 야곱에게 그 약속을 상기시켜 주십니다. 하나님은 얍복강에서 야곱과 씨름하실 때 져 주십니다. 그에게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주십니다. 야곱은 하나님의 얼굴을 보고(벧엘), 겨루어 이겼다고 일컬어집니다. 여러분, 하나님과 겨루어 이길 자가 어디에 있습니까? 이긴 자가 환도뼈가 빠질 수 있습니까? 둔부의 힘줄이 끊어질 수 있습니까? 야곱의 주의 천사/사람, 즉 하나님과 씨름하여 이겼다는데, 둔부의 힘줄이 끊어졌다고 하니, 사실상 야곱이 진 것입니다. 하나님은 야곱의 둔부 힘들을 끊으시고, 아무도 야곱에게서 하나님의 사랑을 끊을 수 없다는 것을 알려 주십니다.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 8:37-39). 우리가 넉넉히 이기는데, 그 이김은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둔부의 힘줄은 끊기지만, 하나님의 사랑에서는 끊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이처럼 인생에 속한 것에서는 끊어지게 하시고, 하나님의 사랑에서는 끊어지지 않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를 택하시고 긍휼히 여겨 부르심이며, 넉넉한 이김입니다. 하나님이 져 주시는 것은 하나님이 사랑을 항상 베푸시는 것입니다. 부모가 자녀에게 져 준다는 것은 사랑을 베푸는 것입니다. 못해도 용서하고 아무리 밉상이라도 밥상을 차려 주는 것입니다. 우리의 것이 끊겨 보여도, 합력하여 하나님은 선을 이루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져 주심이며, 우리에게 넉넉히 이긴다고 말씀해 주십니다. 우리의 것은 끊긴 듯하지만, 죽은 듯 방불했지만, 잉태할 힘을 주시듯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져 주십니다. 육체는 약하게 하시고, 영적으로 강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합력하여 선을 이루십니다.
4. 일반적 소명과 효과적 소명
하나님은 듣든지 아니 듣든지(에스겔),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디모데후서), 세상 끝날까지(마태복음), 땅끝까지(사도행전) 복음을 전하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만민이 복음을 듣게 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가리지 않고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사람이 있다면 어디든 가는 것입니다. 모든 곳에 복음을 전하지만, 모든 사람이 복음을 영접하는 것은 아닙니다. 마태복음 10장을 보면, 주님께서 열두 제자를 파송하실 때 평안의 복음을 영접하지도 않고 듣지도 않는 자들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때는 신발을 털고 나오라고 하셨습니다. 즉 관계가 없다는 의미입니다.
그 복음을 믿는 자는 택함 받은 자입니다. 택함 받은 자만 복음을 믿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을 일반적인 소명이라고 부릅니다. 저희가 이 동네에서 전도지 등을 통해 복음을 전했지만, 아직 이 동네에서 한 분도 교회로 오시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미리 아시고 미리 정한 자들은 복음을 슬쩍 듣기만 해도 아멘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나가서 전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복음의 아름다운 발로 나갑니다. 하나님이 택하신 자들만이 복음에 "아멘" 합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전하다가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택함 받은 백성을 만들거나 그 곳에 있게 할 수 없습니다. 다만, 하나님은 복음을 땅끝까지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마지막 때가 언제인지에 대해 이성으로 말할 수 없지만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볼 때, 복음이 땅끝에 이르렀을 때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쉽게 판단할 수 없습니다. 오직 은혜로 택하심을 받은 사람만이(롬 11:5, 7) 복음을 영접합니다. 오직 은혜로 택하심을 받은 사람만이 에스겔 말씀처럼 돌 같은 마음이 제거되고, 어린아이의 살 같은 부드러운 마음이 생깁니다. 그 말씀이 들어오면, 깊은 것이라도 영적으로 통달하게 됩니다. 오직 은혜로 택함 받은 자들에게는 말씀이 성령과 함께 역사합니다. 그래서 성령이 영적인 것을 영적으로 분별하게 하십니다. 그때, 눈이 뜨이고 귀가 열리는 것입니다.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마 13:16). 모든 이가 다 듣고 보는 것이 아니라 소명을 받은 사람만이 그러합니다.
이것은 절대적인 은혜요, 불가항력인 하나님의 이끄심입니다. 베드로는 주님에게 떠나소서라고 했지만, 주님께서 부르시니 거부할 수 없었습니다. 부자 청년은 자기가 주님을 따라갈 수 있을 것이라 스스로 생각했지만, 택하심이 없으니 주님을 따라가지 않습니다. 오직 우리가 택함을 받은 것은 오직 부르시는 이로 말미암은 것입니다(롬 9:11). 우리가 부름을 받았기 때문에 어딘가로 간 것입니다. 우리가 부르시는 이로 말미암아 눈과 귀가 열리면 따라 나서게 됩니다. 이는 창세전에 택함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5. 하나님이 택하신 자를 기뻐하신다
1) 하나님의 기쁨과 택함 받은 기쁨
하나님은 우리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신다고 하셨습니다(습 3:17). 부모가 자녀로 인하여 이기지 못하는 기쁨보다 큰 기쁨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면, 우리에게 기쁨이 충만합니다. 요한복음 15:11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는 자들의 표는 하나님이 나를 얼마나 기뻐하는지 자신이 아는 것입니다. 자식은 자기가 부모의 기쁨을 받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부모에게 떼도 쓰는 것입니다. 택함 받은 백성의 가장 중요한 점은 하나님이 나를 기뻐하신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쁨이 충만해지는 것입니다. 이처럼 기쁨이 연결되어야 합니다. 이 기쁨을 하나님이 주십니다. 이 기쁨이 있어서 예배하고 복음을 전합니다.
2) 하나님의 열심과 우리의 열심
하나님이 열심을 내셔서 우리를 부르시고 이끄십니다. 우리의 열심이 아니라 하나님의 열심입니다. 여호와의 열심으로 큰 일이 이루어집니다. 우리가 모르는 전쟁을 하나님이 하십니다. 히스기야 왕 때 앗수르의 산헤립의 군대를 하나님이 이기게 하십니다. "남은 자는 예루살렘에서부터 나올 것이요 피하는 자는 시온 산에서부터 나오리니 여호와의 열심이 이 일을 이루리라 하셨나이다 하니라"(왕하 19:31). 유다는 힘이 없어 이길 수 없었지만, 하나님이 앗수르 군대 185,000명을 하루 아침에 송장으로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기뻐하시면 아무도 우리의 기쁨을 앗아갈 자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너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기쁨의 근원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자녀는 부모의 기쁨의 근원입니다. 하나님이 히스기야를 기뻐하시니 적도 물리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기쁨이 합력하여 선을 이룹니다.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것은 간혹은 위험과 고난에 처하는 것이 포함됩니다. 저는 이 교회에 하나님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심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진리의 등대가 되게 해 달라고, 진리의 파수꾼, 끝까지 가닿는 빛의 역할을 하게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가 있으면 하나님을 따라 나서게 됩니다. 엘리사도 소를 버리고, 베드로는 어망을 버리고, 사마리아 여인은 물동이를 버리고, 사도 바울은 최고의 지식을 다 버리고 주님을 따라 나섰습니다. 즉 합력한다는 것입니다. 버리고, 끊게 하시고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어지지 않게 하십니다. 바알과 하나님을 동시에 섬기지 못하듯이, 세상과 하나님을 동시에 섬기지 못합니다. 이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것입니다. 벳세메스의 암소 두 마리를 생각해 보십시오. 새끼가 있는 이 암소는 한 번도 메 보지 않은 법궤를 멨습니다. 그리고 새끼 소를 집에 가둬 두었습니다. 그 암소는 좌우로 치우지지 않고 울면서 갔다고 했습니다. 주의 종은 한 번도 가보지 않은 주의 길을 가는 것입니다. 그 암소는 결국 번제로 바쳐지게 됩니다. 우리의 인생이 이렇습니다.
6.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시기 위하여 부르심
하나님이 부르신 자들은 합력하여 선을 이룹니다. 우리가 원해서 된 것도, 달음박질해서 된 것도 아닙니다(롬 9:16).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난 것도 아니고(요 1:13),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것입니다. 에서의 자리가 아니라 야곱의 자리, 이스마엘의 자리가 아니라 이삭의 자리, 므낫세의 자리가 아니라 에브라임의 자리로 부르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미리 아시고 미리 정하셔서 때가 차서 우리를 부르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합력해서 선을 이루시기 위함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우리도 예수와 같이 되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7. 부르심의 소망: 불가항력적 은혜와 견인
우리에게는 부르심의 소망이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신다는 약속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돌보시고 싸우십니다. 우리가 잘나서 택함 받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힘의 위력으로 부르심의 소망을 주셨습니다.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 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엡 1:18-19). 힘의 위력이라는 것은 불가항력적이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절대적으로 우리를 내 것이라 하십니다. 이것이 부르심의 소망입니다. 나를 부르신 하나님이 나에게 주시는 소망입니다. 누가 나를 하나님의 사랑,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하나님의 기쁘신 뜻, 뜻의 결정, 뜻의 비밀, 계획(엡 1:5, 9, 10)에 따라 우리가 부름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셨기 때문에 우리가 예배를 드립니다. 하나님이 우리 아이들도 부르십니다. 성경을 보면, 주님은 아이들이 내게 나아오는 것을 막지 말라고 하시고, 아이들은 안으시고, 안수하시고, 축복하셨습니다. 아이들이 나아왔습니다. 아이들은 비록 이성적인 고백을 할지는 몰라도 부르심에 응답은 합니다. 아이들은 인식은 못해도 나아갑니다. 그래서 유아세례를 베푸는 것입니다. 예수님께 나아왔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아이들이 부모에게 업혀 왔든, 수레에 실려 왔든, 나아올 수 없는 자임에도 나아왔다면, 하나님이 부르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부르시면, 하나님의 위력으로, 불가항력적으로 끌고 가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부르심의 절대성입니다.
8. 결론: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
합동 측에 300만 성도, 2만 교회가 보는 기독신문에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가 연재되는데, 거기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철저히 수동적이다." 영어로는 "altogether passive"입니다. 내가 나서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절대적으로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신 것입니다(롬 1:6). 하나님의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습니다(롬 11:29). 하나님의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벧후 1:10). 택하심과 부르심을 굳게 하십시오. 누가 뭐라 하든 하나님이 나를 부르셨음을 믿으십시오. 그때 부르심의 소망이 넘칠 것입니다. 이러한 은혜가 있기를 축복해 봅니다.
[20200503][십자가지기교회 주일낮예배: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15)] 구원의 소명 (롬 8:28-30) 문병호 목사
*음성파일: 게시물 하단 "관련링크"에서 청취 혹은 내려받기 가능합니다.
<녹취록>
1. 소명
오늘은 소명에 대해서 보고자 합니다. 칭의, 성화라는 말은 많이 쓰지만, "소명"이라는 말은 그다지 주목받지 못하는 듯합니다. 고전을 보면 가장 길게 다루는 부분이 "소명"입니다. 사명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소명이라고 부릅니다. 소명은 두 가지로 봅니다. 첫째, 구원에 이르도록 부르심입니다. 둘째, 그 부르신 자들을 하나님의 뜻 가운데 사용하시는 부르심입니다. 즉, 사명입니다.
사실상, 하나님은 절대적이십니다. 계심도, 행하심도, 그 뜻도, 이끄심도 절대적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전부 상대적입니다. 인간은 해가 멀거나 가까워도 옷을 벗거나 입습니다. 하나님이 행하시는 것은 전부 절대적입니다. 하나님은 절대자이십니다. 하나님은 절대 뜻을 갖고, 절대 섭리와 경륜으로 그 절대적인 계획을 이루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은 불변합니다. 우리가 보기에 하나님이 변덕스럽게 보일지라도,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다 헤아라지 못해서 그렇지 하나님은 불변하십니다.
2. 합력하여 선을 이루심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롬 8:30).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 "합력"이라는 말에 우리의 이해가 가닿지 못하곤 합니다. 우리는 한 면만 보고 판단할 때가 있습니다. 하나가 좋으면 좋고, 하나가 나쁘면 나쁘다고만 생각하지, 그 모든 것이 조화를 이룬다는 생각을 못합니다. 그래서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것에 대해 무감각하기 쉽습니다. 조금 좋으면 난리가 나고, 조금 못하면 포기하거나 팽개치고 타인과 같이 여기기도 합니다.
1) 창세전 작정
하나님의 일은 특별히 시간적 합력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미리"가 세 번 나옵니다. '미리 아시다', '미리 정하다'가 두 번 나옵니다. 우리가 여기 존재하는 것은 하나님이 미리 아신 것입니다. 언제부터 아셨냐면, 창세전부터 아셨습니다. 창조의 선포가 있기 전에 우리를 미리 아셨습니다.
2) 절대적 소명
절대적인 하나님이 가장 절대적인 뜻을 보이는 것이 바로, 선택, 부르심, 즉 소명입니다. 하나님은 부르심에 있어서 절대성을 보여 주십니다. 구원을 이루어 가는 삶에 있어서 우리가 열심을 낼 부분이 있습니다만, 우리가 도무지 가닿을 수 없이 기다릴 수밖에 없는 것은 바로 부르심입니다. 포도원에 주인이 부르기 전에는 포도원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절대성이 나타나는 부분이 바로 부르심입니다. 간혹 우리가 힘들고 어렵거나 평탄할 때도 있지만, 불변하게 하나님께 감사한 경우는 나를 지명하여 불러주셨을 때입니다. 하나님이 택하셔서 부르신 것에 하나님의 절대성이 가장 나타납니다.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롬 9:15). 불쌍히 여김을 받는 입장에서는 단지 받을 뿐이지, 어떻게 할 수 없습니다.
3) 전부 은혜
하나님은 우리에게 "오직" 그리고 "전부/전적" 은혜를 베푸십니다. "오직" 은혜만 고백하다 보면, 어쩔 때만, 부분적으로만 "오직" 은혜라고 고백할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전부"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하지 않을 때가 있을 수 있습니다. 요셉과 모세는 고난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요셉이 국무총리 되었을 때만 "오직" 하나님의 은혜라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신다고 할 때, "오직" 은혜, "전부" 은혜, 좋을 때도 나쁠 때도 은혜, 합력하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전체적으로 보는 눈으로 복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3. 긍휼히 여기셔서 택하시고 부르심
하나님이 오직 긍휼히 여기심으로 하나님이 우리를 택하셨습니다. 불쌍히 여긴다는 것은 긍휼히 여긴다는 말입니다. 구별하자면, 불쌍히 여긴다는 것은 나누어 준다는 의미이고, 긍휼(矜恤)이라는 말은 체휼(體恤)이라고 할 수 있는데, "휼"(恤)자에는 마음(心)과 피(血)가 들어가 있습니다. 꼭 한자로 말할 필요가 없지만, 원어적으로도 체휼이라는 말은 그 사람과 한 몸이 되어 느껴 주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입장, 우리의 몸에서 느껴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한 몸이 되어 우리의 아픔을 아십니다.
야곱은 고생도 많았고, 긍휼도 많이 받았습니다. 야곱은 얍복강을 넘어 올 때, 벧엘의 약속을 갖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과거 벧엘에서 야곱을 열두 지파의 조상이 될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야곱은 날 때부터 하나님의 택함과 정함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자주 야곱에게 그 약속을 상기시켜 주십니다. 하나님은 얍복강에서 야곱과 씨름하실 때 져 주십니다. 그에게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주십니다. 야곱은 하나님의 얼굴을 보고(벧엘), 겨루어 이겼다고 일컬어집니다. 여러분, 하나님과 겨루어 이길 자가 어디에 있습니까? 이긴 자가 환도뼈가 빠질 수 있습니까? 둔부의 힘줄이 끊어질 수 있습니까? 야곱의 주의 천사/사람, 즉 하나님과 씨름하여 이겼다는데, 둔부의 힘줄이 끊어졌다고 하니, 사실상 야곱이 진 것입니다. 하나님은 야곱의 둔부 힘들을 끊으시고, 아무도 야곱에게서 하나님의 사랑을 끊을 수 없다는 것을 알려 주십니다.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 8:37-39). 우리가 넉넉히 이기는데, 그 이김은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둔부의 힘줄은 끊기지만, 하나님의 사랑에서는 끊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이처럼 인생에 속한 것에서는 끊어지게 하시고, 하나님의 사랑에서는 끊어지지 않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를 택하시고 긍휼히 여겨 부르심이며, 넉넉한 이김입니다. 하나님이 져 주시는 것은 하나님이 사랑을 항상 베푸시는 것입니다. 부모가 자녀에게 져 준다는 것은 사랑을 베푸는 것입니다. 못해도 용서하고 아무리 밉상이라도 밥상을 차려 주는 것입니다. 우리의 것이 끊겨 보여도, 합력하여 하나님은 선을 이루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져 주심이며, 우리에게 넉넉히 이긴다고 말씀해 주십니다. 우리의 것은 끊긴 듯하지만, 죽은 듯 방불했지만, 잉태할 힘을 주시듯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져 주십니다. 육체는 약하게 하시고, 영적으로 강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합력하여 선을 이루십니다.
4. 일반적 소명과 효과적 소명
하나님은 듣든지 아니 듣든지(에스겔),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디모데후서), 세상 끝날까지(마태복음), 땅끝까지(사도행전) 복음을 전하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만민이 복음을 듣게 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가리지 않고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사람이 있다면 어디든 가는 것입니다. 모든 곳에 복음을 전하지만, 모든 사람이 복음을 영접하는 것은 아닙니다. 마태복음 10장을 보면, 주님께서 열두 제자를 파송하실 때 평안의 복음을 영접하지도 않고 듣지도 않는 자들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때는 신발을 털고 나오라고 하셨습니다. 즉 관계가 없다는 의미입니다.
그 복음을 믿는 자는 택함 받은 자입니다. 택함 받은 자만 복음을 믿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을 일반적인 소명이라고 부릅니다. 저희가 이 동네에서 전도지 등을 통해 복음을 전했지만, 아직 이 동네에서 한 분도 교회로 오시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미리 아시고 미리 정한 자들은 복음을 슬쩍 듣기만 해도 아멘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나가서 전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복음의 아름다운 발로 나갑니다. 하나님이 택하신 자들만이 복음에 "아멘" 합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전하다가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택함 받은 백성을 만들거나 그 곳에 있게 할 수 없습니다. 다만, 하나님은 복음을 땅끝까지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마지막 때가 언제인지에 대해 이성으로 말할 수 없지만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볼 때, 복음이 땅끝에 이르렀을 때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쉽게 판단할 수 없습니다. 오직 은혜로 택하심을 받은 사람만이(롬 11:5, 7) 복음을 영접합니다. 오직 은혜로 택하심을 받은 사람만이 에스겔 말씀처럼 돌 같은 마음이 제거되고, 어린아이의 살 같은 부드러운 마음이 생깁니다. 그 말씀이 들어오면, 깊은 것이라도 영적으로 통달하게 됩니다. 오직 은혜로 택함 받은 자들에게는 말씀이 성령과 함께 역사합니다. 그래서 성령이 영적인 것을 영적으로 분별하게 하십니다. 그때, 눈이 뜨이고 귀가 열리는 것입니다.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마 13:16). 모든 이가 다 듣고 보는 것이 아니라 소명을 받은 사람만이 그러합니다.
이것은 절대적인 은혜요, 불가항력인 하나님의 이끄심입니다. 베드로는 주님에게 떠나소서라고 했지만, 주님께서 부르시니 거부할 수 없었습니다. 부자 청년은 자기가 주님을 따라갈 수 있을 것이라 스스로 생각했지만, 택하심이 없으니 주님을 따라가지 않습니다. 오직 우리가 택함을 받은 것은 오직 부르시는 이로 말미암은 것입니다(롬 9:11). 우리가 부름을 받았기 때문에 어딘가로 간 것입니다. 우리가 부르시는 이로 말미암아 눈과 귀가 열리면 따라 나서게 됩니다. 이는 창세전에 택함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5. 하나님이 택하신 자를 기뻐하신다
1) 하나님의 기쁨과 택함 받은 기쁨
하나님은 우리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신다고 하셨습니다(습 3:17). 부모가 자녀로 인하여 이기지 못하는 기쁨보다 큰 기쁨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면, 우리에게 기쁨이 충만합니다. 요한복음 15:11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는 자들의 표는 하나님이 나를 얼마나 기뻐하는지 자신이 아는 것입니다. 자식은 자기가 부모의 기쁨을 받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부모에게 떼도 쓰는 것입니다. 택함 받은 백성의 가장 중요한 점은 하나님이 나를 기뻐하신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쁨이 충만해지는 것입니다. 이처럼 기쁨이 연결되어야 합니다. 이 기쁨을 하나님이 주십니다. 이 기쁨이 있어서 예배하고 복음을 전합니다.
2) 하나님의 열심과 우리의 열심
하나님이 열심을 내셔서 우리를 부르시고 이끄십니다. 우리의 열심이 아니라 하나님의 열심입니다. 여호와의 열심으로 큰 일이 이루어집니다. 우리가 모르는 전쟁을 하나님이 하십니다. 히스기야 왕 때 앗수르의 산헤립의 군대를 하나님이 이기게 하십니다. "남은 자는 예루살렘에서부터 나올 것이요 피하는 자는 시온 산에서부터 나오리니 여호와의 열심이 이 일을 이루리라 하셨나이다 하니라"(왕하 19:31). 유다는 힘이 없어 이길 수 없었지만, 하나님이 앗수르 군대 185,000명을 하루 아침에 송장으로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기뻐하시면 아무도 우리의 기쁨을 앗아갈 자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너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기쁨의 근원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자녀는 부모의 기쁨의 근원입니다. 하나님이 히스기야를 기뻐하시니 적도 물리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기쁨이 합력하여 선을 이룹니다.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것은 간혹은 위험과 고난에 처하는 것이 포함됩니다. 저는 이 교회에 하나님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심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진리의 등대가 되게 해 달라고, 진리의 파수꾼, 끝까지 가닿는 빛의 역할을 하게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가 있으면 하나님을 따라 나서게 됩니다. 엘리사도 소를 버리고, 베드로는 어망을 버리고, 사마리아 여인은 물동이를 버리고, 사도 바울은 최고의 지식을 다 버리고 주님을 따라 나섰습니다. 즉 합력한다는 것입니다. 버리고, 끊게 하시고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어지지 않게 하십니다. 바알과 하나님을 동시에 섬기지 못하듯이, 세상과 하나님을 동시에 섬기지 못합니다. 이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것입니다. 벳세메스의 암소 두 마리를 생각해 보십시오. 새끼가 있는 이 암소는 한 번도 메 보지 않은 법궤를 멨습니다. 그리고 새끼 소를 집에 가둬 두었습니다. 그 암소는 좌우로 치우지지 않고 울면서 갔다고 했습니다. 주의 종은 한 번도 가보지 않은 주의 길을 가는 것입니다. 그 암소는 결국 번제로 바쳐지게 됩니다. 우리의 인생이 이렇습니다.
6.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시기 위하여 부르심
하나님이 부르신 자들은 합력하여 선을 이룹니다. 우리가 원해서 된 것도, 달음박질해서 된 것도 아닙니다(롬 9:16).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난 것도 아니고(요 1:13),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것입니다. 에서의 자리가 아니라 야곱의 자리, 이스마엘의 자리가 아니라 이삭의 자리, 므낫세의 자리가 아니라 에브라임의 자리로 부르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미리 아시고 미리 정하셔서 때가 차서 우리를 부르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합력해서 선을 이루시기 위함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우리도 예수와 같이 되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7. 부르심의 소망: 불가항력적 은혜와 견인
우리에게는 부르심의 소망이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신다는 약속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돌보시고 싸우십니다. 우리가 잘나서 택함 받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힘의 위력으로 부르심의 소망을 주셨습니다.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 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엡 1:18-19). 힘의 위력이라는 것은 불가항력적이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절대적으로 우리를 내 것이라 하십니다. 이것이 부르심의 소망입니다. 나를 부르신 하나님이 나에게 주시는 소망입니다. 누가 나를 하나님의 사랑,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하나님의 기쁘신 뜻, 뜻의 결정, 뜻의 비밀, 계획(엡 1:5, 9, 10)에 따라 우리가 부름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셨기 때문에 우리가 예배를 드립니다. 하나님이 우리 아이들도 부르십니다. 성경을 보면, 주님은 아이들이 내게 나아오는 것을 막지 말라고 하시고, 아이들은 안으시고, 안수하시고, 축복하셨습니다. 아이들이 나아왔습니다. 아이들은 비록 이성적인 고백을 할지는 몰라도 부르심에 응답은 합니다. 아이들은 인식은 못해도 나아갑니다. 그래서 유아세례를 베푸는 것입니다. 예수님께 나아왔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아이들이 부모에게 업혀 왔든, 수레에 실려 왔든, 나아올 수 없는 자임에도 나아왔다면, 하나님이 부르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부르시면, 하나님의 위력으로, 불가항력적으로 끌고 가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부르심의 절대성입니다.
8. 결론: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
합동 측에 300만 성도, 2만 교회가 보는 기독신문에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가 연재되는데, 거기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철저히 수동적이다." 영어로는 "altogether passive"입니다. 내가 나서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절대적으로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신 것입니다(롬 1:6). 하나님의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습니다(롬 11:29). 하나님의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벧후 1:10). 택하심과 부르심을 굳게 하십시오. 누가 뭐라 하든 하나님이 나를 부르셨음을 믿으십시오. 그때 부르심의 소망이 넘칠 것입니다. 이러한 은혜가 있기를 축복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