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202][십자가지기교회 주일낮예배: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2)] 성경: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 (엡 2:20) 문병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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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202][십자가지기교회 주일낮예배: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2)] 성경: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 (엡 2:20) 문병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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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엡 2:20)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느니라
<녹취록>
1. 오직 성경(sola Scriptura)
지난 주에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서론 부분의 말씀을 디모데후서 3장 16절 말씀을 본문으로 해서 나누었습니다. 오늘부터는 이제 약 30주간 총회 <기독신문>에 기고될 내용에 대해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성경으로 시작합니다. 이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의 특징이기도 합니다. 즉, 하나님을 아는 지식, 계시부터 시작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장 잘 알고 널리 알려진, 종교개혁 이후 가장 중요한 책은 칼빈의 <<기독교 강요>>입니다. 이 책도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부터 시작합니다. 그래서 우리 신앙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아주 귀하게 여기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성경이 없이 신앙생활을 할 수 있을까요? 성경이 없다면 어떻게 믿을 것인가요?
어쩔 수 없이 사람의 말로 전해 들어야 하는데 사실상 성경은 일찍 형성이 됩니다. 구약 39권과 신약 27권이 일찍이 형성이 됩니다. 약 2세기부터 정경이라고 하여 66권이 정해지고 5세기경에 확정됩니다. 그 일에 큰 역할을 한 사람이 어거스틴입니다. 4세기 말에서 5세기 초의 사람입니다.
중세시대에는 성경이 있었으나 유명무실했습니다. 사제들은 성경을 읽고 연구하는데 일반 성도들은 우상과 같은 것을 보고 사제의 전하는 말을 듣고 전병을 먹고 집에 갈 뿐이었습니다. 그러다가 14세기 르네상스가 이탈리아에서 일어납니다. 이것은 인문주의 운동, 즉 인간의 발견입니다. 이는 중세의 신권통치를 거부하는 몸짓입니다. 그 방법은 인간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이때 처음에는 문학으로 시작했다가 독일 등지에서 미술로 발전합니다. 그런데 이 때 사실 처음 소설이 나온다고 봐도 됩니다. 보카치오니 신곡이니 하는 것들과 불란서의 라블레, 몽테뉴 등이 나옵니다. 이 인문주의가 근대정신이고 좋은 것 같습니다.
중세 때는 성경이 있었으나 라틴어로 되어 있고 사제들만 성경을 읽고 성도들은 미사를 통해 그저 듣기는 했으나 라틴어를 모르니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르네상스는 이제 성경 자체 자체를 읽지 않습니다. 인간이 쓴 소설과 문학작품을 읽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서도 최고의 인문주의자, 기독교 인문주의자로 인정받는 에라스무스 같은 사람들은 성경이 없어도 일반적인 지식으로도 구원에 이를 수 있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기독교인이지만 아주 지식적으로 뛰어나 기독교인문주의자라 불린 이들의 말은 언뜻 뛰어나 보이지만 매우 위험한 것입니다. 성경의 계시 없이 자연에 드러난 것만으로도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곳곳에 기독교인문주의자들이 발흥하는데, 기독교인이지만 사실상 성경을 읽어서 구원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 것입니다.
이런 흐름이 16세기까지 계속되다가 루터가 종교개혁을 한 것입니다. 이런 르네상스, 그리고 이후 산업혁명으로 이어지면서 과학적 진리는 더 명확해졌으나 하나님은 그저 기계장치의 신으로 남아 있는 것으로 치부되기도 합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종교개혁 이후 17세기에 작성되었습니다. 그런데 첫 장에 ‘일반적인 지식으로는 구원에 이를 수 없다’고 못박습니다. 본성의 빛, 이성의 깨달음, 지혜가 있고, 하나님의 창조의 사역에 대한 지혜가 모든 만물 가운데 있어도 그것으로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이를 수 없다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이 선언이 바로 이전까지의 사회, 과학, 인문주의적 발전하에 소멸되는 것처럼 보이던 성경의 진리를 밝힌 것입니다. 만약 종교개혁이 없었다면 르네상스를 거치면서 기독교는 완전히 소멸되었을 것입니다. 일반적으로는 르네상스는 아주 훌륭하고 중요한 일이지만, 일반계시만으로는 하나님을 알 수 없습니다.
2. 사람은 자기 지혜로, 자연계시만으로 하나님을 알 수 없다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그들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그들에게 보이셨느니라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롬 1:19-20). 기독교인문주의자들의 주장과는 다르게 자연계시만으로는 하나님을 알 수 없습니다. 성경이 없이는 하나님을 알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성경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고전 1:21; 2:14). 육에 속한 사람은 그냥 똑똑한 사람, 세상적으로 똑똑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세상적으로 똑똑할수록, 많이 알수록 허무주의, 퇴폐주의에 빠집니다. 세상은 적당히 모르니 사는 것입니다. 만약 안다면 전부 다 절망에 빠집니다. 왜냐면 아는 것이 영원한, 궁극적인 답을 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에서 안다는 것은 지극히 위험한 것입니다. 어느 정도 아는 것은 물론 좋은 일이지만, 깊이 알게 되면 견딜 수 없습니다. 그 지식이 하나님을 알게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왜냐면, 타락해서 그렇습니다. "기록된 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 생각하지도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고전 2:9).
3. 성경의 계시로 하나님을 안다
저는 요즘 기도하면 모든 곳에 광대하신 하나님으로 인해 기쁩니다. 그러면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을 알게 됩니까. "또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딤후 3:15). 구원이 바로 하나님을 아는 것이요, 하나님을 아는 것이 만물을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모르면 해도, 꽃도, 계곡의 흐르는 물도, 달도 모릅니다. 궁극적인 즐거움이 자연 앞에 없고 오히려 부대낄 뿐입니다. 그래서 낭만, 자연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에게 항상 퇴폐가 있습니다. 예술가 중에 그런 사람들이 많을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궁극적인 것을, 아름다운 것을 추구하는데 하나님을 모르기 때문에 구원에 이르는 지식을 얻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성경을 주셨습니다. 우리 십자가지기교회, 한국교회, 세계교회가 성경 없이 어떻게 신앙생활을 할 것이며, 어떻게 교독하고, 설교하고, 듣고, 신앙생활, 경건생활을 할까요? 하나님은 자기 지식을 성경에 기록해 주셔서 여호와를 알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스스로 자신을 드러내시고(자기 계시), 성경에 기록하게 하셨습니다. 이것 믿지 않으면 아무리 똑똑해도 허무합니다. 그것을 기독교인문주의라고 하는 것입니다. 대학교에 종교학과 이런 데 가면 이런 사람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기독교는 아는데 하나님은 모릅니다. 성경의 계시를 믿음으로, 마음으로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신앙인과 비신앙인의 차이입니다. 성경을 들고 다니는데, 이 성경을 믿느냐, 아니면 그저 들고 다니느냐의 차이입니다. 이 성경을 영으로 섭취하고 먹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기 지식을 성경에 기록해 주셨습니다. 제가 신학교 때 차영배 교수님이라는 분이 왜 하나님이 문자를 주셨는지 아냐고 물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 대답은 성경을 기록하게 하시려는 준비하셨다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진리입니다. 각 나라 언어는 자기 나라 언어로 성경을 만들라고 주신 것입니다. 틴데일이 영어 성경을, 루터가 독일어 성경을, 칼빈의 사촌이 불란서 성경을, 한글 성경을 이수정, 로스 선교사 등이 번역했습니다. 하나님이 문자를 주신 것은, 바벨탑처럼 인간이 연합하여 하나님과 맞서게 하려는 것이 아닌, 기록된 말씀으로 신앙생활 하라고 주신 것입니다.
4. 그리스도의 소식, 즉 복음으로서의 기록된 성경
"옛적에 선지자들을 통하여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히 1:1). 여러 모양으로, 현상으로 기적으로, 모세와 대면하심으로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말씀하신 말씀, 모든 계시 방법의 총화로 모아 제시하신 것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입니다. 아들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신 것의 기록이 성경입니다. 그래서 성경이 복음이라고 하면 됩니다. 왜요, 그리스도의 소식이니까. 구약은 오실 그리스도의 신약은 오신 그리스도의 소식입니다. 그러니까 성경은 그리스도의 소식입니다. 그것이 복음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들음으로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습니다. 그리스도가 육적으로 말씀하신 것뿐 아니라 구약 신약을 총괄하는 것입니다. 이제는 그리스도의 기록입니다. 그의 말씀을 우리가 받는 것입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딤후 3:16). 모든 성경이 무엇입니까? 모세와 선지자들이 기록하고 사도들이 기록한 모든 성경이 바로 나에 대해 쓴 것이라고 예수님이 부활하셔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이에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눅 24:27).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 열한 제자에게 나타나셔서 하신 말씀입니다. 모든 성경에 쓴 것이 자기에 관한 것이라고 제자들에게 이야기했는데 그 때도 제자들은 잘 못 알아들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음에도 불구하고 잘 이해하지 못하니 주님이 이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또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 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하시고"(눅 24:44). 다 이루었다고 하는 말씀은 예수님을 두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종교개혁은 성경으로 돌아가는 것인데, 그 성경은 오직 기록된 말씀입니다. 성경 없이는 안 된다는 것을 루터가 발견한 것입니다. 루터도 똑똑한 사람입니다. 아무리 공부하고 수련해 봐도 안 된단 말입니다. 하나님이 그를 비텐베르그의 교수로 보내셨습니다. 그런데 거기서 학생 가르치면서 성경을 넘기다 보니 진리를 발견한 것입니다. 성경이 전부 그리스도에 대한 말씀이라는 것을 발견한 것입니다. 신구약의 모든 성경이 그리스도에 대한 것임을 발견한 것입니다. 믿음에서 믿음에 이르고 오직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우리 개신교는 기독교인문주의자들처럼 성경을 들고만 다니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는, 즉 말씀을 먹는 종교입니다(롬 10:9-10). 이것이 종교개혁입니다. 우리는 성경의 말씀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그 말씀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말씀입니다.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마 11:27). 예수를 구주로 영접한 자만이 아버지를 안다는 말씀입니다.
제가 학회차 독일에 방문했을 때 구텐베르그 박물관을 가본 적이 있습니다. 우리는 직지심경을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로 생각하지만, 그들은 구텐베르그 인쇄술을 그렇게 여깁니다. 어쨌거나 구텐베르그 인쇄술이 왜 생겼느냐, 그곳에 가보니 구텐베르그 인쇄술로 만든 것은 전부 다 성경이었습니다. 인쇄술을 발명해서 찍은 모든 것이 성경입니다. 이미 그때 손바닥보다 작은 성경도 만들었습니다.
5. 믿음과 삶의 규범으로서의 성경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하나님의 말씀이 그의 영감으로 기록되고 믿음과 삶의 규범으로 주어졌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믿음의 규범입니다. 믿음은 하나님께 속하는 것이고 하나님과 함께 마주서는 것입니다. 마주보는 것입니다. 그것이 시작입니다. 그리고 종국에는 얼굴을 마주보는 것이 천국입니다. 믿음은 하나님과 함께 거하고 마주보는 것인데, 그 믿음이 무엇이냐 하니 말씀을 믿는 믿음입니다. 이 말씀의 규범이 바로 성경이라는 것입니다. 예전에는 말씀을 “법칙”으로 번역했는데, 저는 믿음과 삶의 “규범”이라고 번역하고자 합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영감에 의해 믿음과 삶의 규범으로 주어졌다." 하나님의 영감은 바로 성령의 감동, 역사입니다. 하나님이 친히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구원은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믿고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6. 하나님의 감동으로 기록된 성경
그러니 성경은 신령한 책입니다. 왜 신령하냐, 하나님의 감동으로 기록되었기 때문입니다. 그 성령은 어제 계시지만 오늘은 안 계시는 분이 아닙니다. 또한 성령은 변함이 없으십니다. 그러니 모세오경을 기록할 때 감동하신 그 성령이 오늘 우리가 그 책을 읽을 때도 동일하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니 믿음도, 성령도, 주도, 말씀도, 진리도 하나요, 그 진리의 기록이 성경입니다. 우리에게 이보다 더한 기쁨이 어디있냐요? 이것을 차단한 것이 중세입니다. 그런데 이 중세의 너무한 것을 절충하기 위한 것이 기독교인문주의입니다. 세상은 인문주의자들을 대단하게 생각합니다. 불란서 시청에 가도 ‘부데’라는 이름이 시청 앞에 적혀 있습니다. 그런데 이는 기독교인문주의자로서, 그저 성령의 감동을 알지 못하는 미적지근한 사람들입니다. 종교개혁은 오직 성경입니다.
7. 믿음으로 말씀을 받아 먹으라
‘받아 먹으라,’ ‘달도다.’ 에스겔의 이 말씀입니다. 어떻게 성경을 받아 먹습니까? 성령의 감동으로 그렇습니다. 심령의 말씀, 우리 안에 기록한 말씀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심령 가운데 듣게 하는 말씀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기록되었으니, 이렇게 우리가 받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 중에 하나도 하나님의 감동이 없는 것은 없습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기록이나, 패역한 일에 대한 기록이나(물론 그 일은 나쁜 것이나 우리의 교훈을 위해 주신 것입니다) 모두 하나님의 감동으로 기록된 것입니다. 이 말씀이 신앙과 삶의 규범입니다.
이 성경은 믿음의 말씀입니다. "그러면 무엇을 말하느냐 말씀이 네게 가까워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다 하였으니 곧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이라"(롬 10:8). 성경을 믿어야 합니다. 너무 간단하고 당연하다고 할 수 있으나 우리는 성경을 믿어야 하고, 하나님은 우리가 성경을 믿게 하십니다. 사실상 성경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먹는 것입니다. 시편 19편의 말씀처럼 이 말씀이 꿀송이보다 단 것입니다. 귀가 열리고 눈이 열립니다. 성경을 먹어야 힘이 나고 마른 뼈가 살아나고 30배, 60배, 100배의 열매가 열립니다. 음식은 많이 먹으면 음식에 치여 죽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꿀송이보다 답니다. 왜요, 영감된 말씀이요, 믿음의 규범이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믿냐고 묻지 마십시오. 성경으로 믿습니다. 성경에 다 가르쳐 줍니다. 성경 말씀을 믿습니다. 그리고 성경은 삶의 규범입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딤후 3:16). 그래서 성경 말씀에 우리의 삶의 길이 있습니다. 우리의 믿는 도리요, 살아가는 도리가 바로 성경입니다.
8. 성경의 완결성
우리는 성경 66권이 충분하고 그것이 완결된 것을 믿습니다. 다른 복음도 진리도 도도 없습니다. 오직 성경 말씀만이 우리가 받는 것입니다. 성경 외에 다른 것을 더하면 재앙이 있으리라고 경고하십니다. 성경은 다다익선이 아닙니다. 이것저것 더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모든 사람에게 증언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두루마리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것이요 만일 누구든지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두루마리에 기록된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여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계 22:18-19). 더해도 안 되고 빼도 안 됩니다. 주신 충분한 말씀을 안 받고 다른 것을 찾아 다니면 안 됩니다. 도마복음 같은 것은 쳐다볼 가치도 없습니다. 말씀에서 빼면 생명나무에서 제한다고 하십니다. 거룩한 성에 들어가지 못하게 됩니다. 이것은 우리가 어떤 자질을 가지고 성경을 열심히 읽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은혜 받은 사람들의 복에 대해 말씀한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의 칠 복 중 하나인 것입니다.
9. 성경의 무오성
순교자들이 성경을 목에 걸고 화형당했습니다. 성경이 무엇이길래 순교자들이 성경과 함께 파묻혔을까요? 우리는 성경의 무오함을 믿습니다. 성경에는 오류가 없습니다. 이 세상에 무오한 것은 하나님과 그의 말씀 뿐입니다. 그래서 이 강단의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야 합니다. "이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끊임없이 감사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받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도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가운데에서 역사하느니라"(살전 2:13).
10. 성경 말씀을 믿어야 기독교적 삶이 있다
우리 강단에서는 성경 외에 전하지 않습니다. 기독교인문주의자들처럼 성경에 대해 전한다고 해서 신앙인인 것은 아닙니다. 성경을 붙들고 사랑해야지 성경을 내려놓고 사랑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그것으로 말미암아 끝까지 사랑하고, 아가페, 궁극적으로 남을 사랑하고 순교적 사랑을 하는 것입니다.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은혜와 사도의 직분을 받아 그의 이름을 위하여 모든 이방인 중에서 믿어 순종하게 하나니"(롬 1:5). 다른 것이 아닙니다. 성경을 믿어 순종하게 됩니다. 성경을 읽을 때 순종하게 된다고 하면, 내가 순종해야 하는 각오가 아닌, 하나님이 그렇게 하게 하심을 알아야 합니다. 내 순종이 아니라 하나님의 열심이고 나는 그저 하나님께 얹혀 가는데, 그런데 하나님이 나에게 상급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저도 권면하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어떤 성도님들은 이것해야 저것해야 한다고 절치부심합니다. 예수님도 어떤 사람들의 열심이나 행동을 보고 구원에 이른다고 하신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그런데 그저 아무것도 안하느냐,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고 질타하십니다. 달란트라는 말은 선물도 되고 은사도 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은 은사입니다. 일하라고 주신 선물입니다. 그러니 순종입니다. 그러므로 선물 안 받으면 순종 못합니다. 성경을 받고 믿으면 선물로 순종합니다. 그래서 어거스틴 신학의 결론은 상급도 은혜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열심히 하나님께 봉사하고 충성하고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공로주의나 자질주의가 아닙니다. 모두 은혜입니다. 은혜가 넘치는 것입니다. “믿어 순종하게 되나니”(롬 1:5). 성경을 믿는 것입니다. 성경을 믿고 움직이면 은혜이고 감사고 영광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믿음과 삶의 규범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옛날에는 신앙과 행위의 법칙이라고 했습니다. 더 좋게 들리지만, 그대로 번역하면 믿음과 삶의 규범입니다. ‘신앙’이라는 말보다는 ‘믿음’이라는 말이 더 맞습니다. 그것이 바로 성경입니다.
11. 결론
성경 말씀에서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포도원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포도원은 기쁨입니다. 그것을 믿어 순종하는 것입니다. 성경 말씀 없이 순종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말씀 붙들고 순종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시험거리가 됩니다. 에스겔과 같이 말씀을 먹고 움직여야 합니다. 말씀 안 먹고 교회일 하지 마십시오. 말씀 먹고 교회일 해야 합니다. 그래야 기쁘고 즐겁고 멍에가 가벼운 것이 됩니다. 달란트는 은사, 선물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살다 죽어야 합니다. 성경이 내 인생의 동반자, 좌표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도 성경 성경 하니 성경을 목에 매고 죽임을 당한 것입니다. 우리 삶도 인생 끝날 때까지 성경 붙들고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제1장 전반부에 대한 말씀입니다. 이런 은혜와 영광과 감사와 상급이 성도님들께 충만하기를 축복합니다.
[20200202][십자가지기교회 주일낮예배: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2)] 성경: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 (엡 2:20) 문병호 목사
*음성파일: 게시물 하단 "관련링크"에서 청취 혹은 내려받기 가능합니다.
<녹취록>
1. 오직 성경(sola Scriptura)
지난 주에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서론 부분의 말씀을 디모데후서 3장 16절 말씀을 본문으로 해서 나누었습니다. 오늘부터는 이제 약 30주간 총회 <기독신문>에 기고될 내용에 대해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성경으로 시작합니다. 이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의 특징이기도 합니다. 즉, 하나님을 아는 지식, 계시부터 시작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장 잘 알고 널리 알려진, 종교개혁 이후 가장 중요한 책은 칼빈의 <<기독교 강요>>입니다. 이 책도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부터 시작합니다. 그래서 우리 신앙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아주 귀하게 여기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성경이 없이 신앙생활을 할 수 있을까요? 성경이 없다면 어떻게 믿을 것인가요?
어쩔 수 없이 사람의 말로 전해 들어야 하는데 사실상 성경은 일찍 형성이 됩니다. 구약 39권과 신약 27권이 일찍이 형성이 됩니다. 약 2세기부터 정경이라고 하여 66권이 정해지고 5세기경에 확정됩니다. 그 일에 큰 역할을 한 사람이 어거스틴입니다. 4세기 말에서 5세기 초의 사람입니다.
중세시대에는 성경이 있었으나 유명무실했습니다. 사제들은 성경을 읽고 연구하는데 일반 성도들은 우상과 같은 것을 보고 사제의 전하는 말을 듣고 전병을 먹고 집에 갈 뿐이었습니다. 그러다가 14세기 르네상스가 이탈리아에서 일어납니다. 이것은 인문주의 운동, 즉 인간의 발견입니다. 이는 중세의 신권통치를 거부하는 몸짓입니다. 그 방법은 인간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이때 처음에는 문학으로 시작했다가 독일 등지에서 미술로 발전합니다. 그런데 이 때 사실 처음 소설이 나온다고 봐도 됩니다. 보카치오니 신곡이니 하는 것들과 불란서의 라블레, 몽테뉴 등이 나옵니다. 이 인문주의가 근대정신이고 좋은 것 같습니다.
중세 때는 성경이 있었으나 라틴어로 되어 있고 사제들만 성경을 읽고 성도들은 미사를 통해 그저 듣기는 했으나 라틴어를 모르니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르네상스는 이제 성경 자체 자체를 읽지 않습니다. 인간이 쓴 소설과 문학작품을 읽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서도 최고의 인문주의자, 기독교 인문주의자로 인정받는 에라스무스 같은 사람들은 성경이 없어도 일반적인 지식으로도 구원에 이를 수 있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기독교인이지만 아주 지식적으로 뛰어나 기독교인문주의자라 불린 이들의 말은 언뜻 뛰어나 보이지만 매우 위험한 것입니다. 성경의 계시 없이 자연에 드러난 것만으로도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곳곳에 기독교인문주의자들이 발흥하는데, 기독교인이지만 사실상 성경을 읽어서 구원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 것입니다.
이런 흐름이 16세기까지 계속되다가 루터가 종교개혁을 한 것입니다. 이런 르네상스, 그리고 이후 산업혁명으로 이어지면서 과학적 진리는 더 명확해졌으나 하나님은 그저 기계장치의 신으로 남아 있는 것으로 치부되기도 합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종교개혁 이후 17세기에 작성되었습니다. 그런데 첫 장에 ‘일반적인 지식으로는 구원에 이를 수 없다’고 못박습니다. 본성의 빛, 이성의 깨달음, 지혜가 있고, 하나님의 창조의 사역에 대한 지혜가 모든 만물 가운데 있어도 그것으로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이를 수 없다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이 선언이 바로 이전까지의 사회, 과학, 인문주의적 발전하에 소멸되는 것처럼 보이던 성경의 진리를 밝힌 것입니다. 만약 종교개혁이 없었다면 르네상스를 거치면서 기독교는 완전히 소멸되었을 것입니다. 일반적으로는 르네상스는 아주 훌륭하고 중요한 일이지만, 일반계시만으로는 하나님을 알 수 없습니다.
2. 사람은 자기 지혜로, 자연계시만으로 하나님을 알 수 없다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그들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그들에게 보이셨느니라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롬 1:19-20). 기독교인문주의자들의 주장과는 다르게 자연계시만으로는 하나님을 알 수 없습니다. 성경이 없이는 하나님을 알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성경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고전 1:21; 2:14). 육에 속한 사람은 그냥 똑똑한 사람, 세상적으로 똑똑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세상적으로 똑똑할수록, 많이 알수록 허무주의, 퇴폐주의에 빠집니다. 세상은 적당히 모르니 사는 것입니다. 만약 안다면 전부 다 절망에 빠집니다. 왜냐면 아는 것이 영원한, 궁극적인 답을 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에서 안다는 것은 지극히 위험한 것입니다. 어느 정도 아는 것은 물론 좋은 일이지만, 깊이 알게 되면 견딜 수 없습니다. 그 지식이 하나님을 알게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왜냐면, 타락해서 그렇습니다. "기록된 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 생각하지도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고전 2:9).
3. 성경의 계시로 하나님을 안다
저는 요즘 기도하면 모든 곳에 광대하신 하나님으로 인해 기쁩니다. 그러면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을 알게 됩니까. "또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딤후 3:15). 구원이 바로 하나님을 아는 것이요, 하나님을 아는 것이 만물을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모르면 해도, 꽃도, 계곡의 흐르는 물도, 달도 모릅니다. 궁극적인 즐거움이 자연 앞에 없고 오히려 부대낄 뿐입니다. 그래서 낭만, 자연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에게 항상 퇴폐가 있습니다. 예술가 중에 그런 사람들이 많을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궁극적인 것을, 아름다운 것을 추구하는데 하나님을 모르기 때문에 구원에 이르는 지식을 얻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성경을 주셨습니다. 우리 십자가지기교회, 한국교회, 세계교회가 성경 없이 어떻게 신앙생활을 할 것이며, 어떻게 교독하고, 설교하고, 듣고, 신앙생활, 경건생활을 할까요? 하나님은 자기 지식을 성경에 기록해 주셔서 여호와를 알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스스로 자신을 드러내시고(자기 계시), 성경에 기록하게 하셨습니다. 이것 믿지 않으면 아무리 똑똑해도 허무합니다. 그것을 기독교인문주의라고 하는 것입니다. 대학교에 종교학과 이런 데 가면 이런 사람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기독교는 아는데 하나님은 모릅니다. 성경의 계시를 믿음으로, 마음으로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신앙인과 비신앙인의 차이입니다. 성경을 들고 다니는데, 이 성경을 믿느냐, 아니면 그저 들고 다니느냐의 차이입니다. 이 성경을 영으로 섭취하고 먹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기 지식을 성경에 기록해 주셨습니다. 제가 신학교 때 차영배 교수님이라는 분이 왜 하나님이 문자를 주셨는지 아냐고 물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 대답은 성경을 기록하게 하시려는 준비하셨다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진리입니다. 각 나라 언어는 자기 나라 언어로 성경을 만들라고 주신 것입니다. 틴데일이 영어 성경을, 루터가 독일어 성경을, 칼빈의 사촌이 불란서 성경을, 한글 성경을 이수정, 로스 선교사 등이 번역했습니다. 하나님이 문자를 주신 것은, 바벨탑처럼 인간이 연합하여 하나님과 맞서게 하려는 것이 아닌, 기록된 말씀으로 신앙생활 하라고 주신 것입니다.
4. 그리스도의 소식, 즉 복음으로서의 기록된 성경
"옛적에 선지자들을 통하여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히 1:1). 여러 모양으로, 현상으로 기적으로, 모세와 대면하심으로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말씀하신 말씀, 모든 계시 방법의 총화로 모아 제시하신 것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입니다. 아들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신 것의 기록이 성경입니다. 그래서 성경이 복음이라고 하면 됩니다. 왜요, 그리스도의 소식이니까. 구약은 오실 그리스도의 신약은 오신 그리스도의 소식입니다. 그러니까 성경은 그리스도의 소식입니다. 그것이 복음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들음으로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습니다. 그리스도가 육적으로 말씀하신 것뿐 아니라 구약 신약을 총괄하는 것입니다. 이제는 그리스도의 기록입니다. 그의 말씀을 우리가 받는 것입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딤후 3:16). 모든 성경이 무엇입니까? 모세와 선지자들이 기록하고 사도들이 기록한 모든 성경이 바로 나에 대해 쓴 것이라고 예수님이 부활하셔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이에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눅 24:27).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 열한 제자에게 나타나셔서 하신 말씀입니다. 모든 성경에 쓴 것이 자기에 관한 것이라고 제자들에게 이야기했는데 그 때도 제자들은 잘 못 알아들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음에도 불구하고 잘 이해하지 못하니 주님이 이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또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 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하시고"(눅 24:44). 다 이루었다고 하는 말씀은 예수님을 두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종교개혁은 성경으로 돌아가는 것인데, 그 성경은 오직 기록된 말씀입니다. 성경 없이는 안 된다는 것을 루터가 발견한 것입니다. 루터도 똑똑한 사람입니다. 아무리 공부하고 수련해 봐도 안 된단 말입니다. 하나님이 그를 비텐베르그의 교수로 보내셨습니다. 그런데 거기서 학생 가르치면서 성경을 넘기다 보니 진리를 발견한 것입니다. 성경이 전부 그리스도에 대한 말씀이라는 것을 발견한 것입니다. 신구약의 모든 성경이 그리스도에 대한 것임을 발견한 것입니다. 믿음에서 믿음에 이르고 오직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우리 개신교는 기독교인문주의자들처럼 성경을 들고만 다니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는, 즉 말씀을 먹는 종교입니다(롬 10:9-10). 이것이 종교개혁입니다. 우리는 성경의 말씀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그 말씀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말씀입니다.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마 11:27). 예수를 구주로 영접한 자만이 아버지를 안다는 말씀입니다.
제가 학회차 독일에 방문했을 때 구텐베르그 박물관을 가본 적이 있습니다. 우리는 직지심경을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로 생각하지만, 그들은 구텐베르그 인쇄술을 그렇게 여깁니다. 어쨌거나 구텐베르그 인쇄술이 왜 생겼느냐, 그곳에 가보니 구텐베르그 인쇄술로 만든 것은 전부 다 성경이었습니다. 인쇄술을 발명해서 찍은 모든 것이 성경입니다. 이미 그때 손바닥보다 작은 성경도 만들었습니다.
5. 믿음과 삶의 규범으로서의 성경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하나님의 말씀이 그의 영감으로 기록되고 믿음과 삶의 규범으로 주어졌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믿음의 규범입니다. 믿음은 하나님께 속하는 것이고 하나님과 함께 마주서는 것입니다. 마주보는 것입니다. 그것이 시작입니다. 그리고 종국에는 얼굴을 마주보는 것이 천국입니다. 믿음은 하나님과 함께 거하고 마주보는 것인데, 그 믿음이 무엇이냐 하니 말씀을 믿는 믿음입니다. 이 말씀의 규범이 바로 성경이라는 것입니다. 예전에는 말씀을 “법칙”으로 번역했는데, 저는 믿음과 삶의 “규범”이라고 번역하고자 합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영감에 의해 믿음과 삶의 규범으로 주어졌다." 하나님의 영감은 바로 성령의 감동, 역사입니다. 하나님이 친히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구원은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믿고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6. 하나님의 감동으로 기록된 성경
그러니 성경은 신령한 책입니다. 왜 신령하냐, 하나님의 감동으로 기록되었기 때문입니다. 그 성령은 어제 계시지만 오늘은 안 계시는 분이 아닙니다. 또한 성령은 변함이 없으십니다. 그러니 모세오경을 기록할 때 감동하신 그 성령이 오늘 우리가 그 책을 읽을 때도 동일하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니 믿음도, 성령도, 주도, 말씀도, 진리도 하나요, 그 진리의 기록이 성경입니다. 우리에게 이보다 더한 기쁨이 어디있냐요? 이것을 차단한 것이 중세입니다. 그런데 이 중세의 너무한 것을 절충하기 위한 것이 기독교인문주의입니다. 세상은 인문주의자들을 대단하게 생각합니다. 불란서 시청에 가도 ‘부데’라는 이름이 시청 앞에 적혀 있습니다. 그런데 이는 기독교인문주의자로서, 그저 성령의 감동을 알지 못하는 미적지근한 사람들입니다. 종교개혁은 오직 성경입니다.
7. 믿음으로 말씀을 받아 먹으라
‘받아 먹으라,’ ‘달도다.’ 에스겔의 이 말씀입니다. 어떻게 성경을 받아 먹습니까? 성령의 감동으로 그렇습니다. 심령의 말씀, 우리 안에 기록한 말씀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심령 가운데 듣게 하는 말씀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기록되었으니, 이렇게 우리가 받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 중에 하나도 하나님의 감동이 없는 것은 없습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기록이나, 패역한 일에 대한 기록이나(물론 그 일은 나쁜 것이나 우리의 교훈을 위해 주신 것입니다) 모두 하나님의 감동으로 기록된 것입니다. 이 말씀이 신앙과 삶의 규범입니다.
이 성경은 믿음의 말씀입니다. "그러면 무엇을 말하느냐 말씀이 네게 가까워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다 하였으니 곧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이라"(롬 10:8). 성경을 믿어야 합니다. 너무 간단하고 당연하다고 할 수 있으나 우리는 성경을 믿어야 하고, 하나님은 우리가 성경을 믿게 하십니다. 사실상 성경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먹는 것입니다. 시편 19편의 말씀처럼 이 말씀이 꿀송이보다 단 것입니다. 귀가 열리고 눈이 열립니다. 성경을 먹어야 힘이 나고 마른 뼈가 살아나고 30배, 60배, 100배의 열매가 열립니다. 음식은 많이 먹으면 음식에 치여 죽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꿀송이보다 답니다. 왜요, 영감된 말씀이요, 믿음의 규범이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믿냐고 묻지 마십시오. 성경으로 믿습니다. 성경에 다 가르쳐 줍니다. 성경 말씀을 믿습니다. 그리고 성경은 삶의 규범입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딤후 3:16). 그래서 성경 말씀에 우리의 삶의 길이 있습니다. 우리의 믿는 도리요, 살아가는 도리가 바로 성경입니다.
8. 성경의 완결성
우리는 성경 66권이 충분하고 그것이 완결된 것을 믿습니다. 다른 복음도 진리도 도도 없습니다. 오직 성경 말씀만이 우리가 받는 것입니다. 성경 외에 다른 것을 더하면 재앙이 있으리라고 경고하십니다. 성경은 다다익선이 아닙니다. 이것저것 더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모든 사람에게 증언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두루마리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것이요 만일 누구든지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두루마리에 기록된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여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계 22:18-19). 더해도 안 되고 빼도 안 됩니다. 주신 충분한 말씀을 안 받고 다른 것을 찾아 다니면 안 됩니다. 도마복음 같은 것은 쳐다볼 가치도 없습니다. 말씀에서 빼면 생명나무에서 제한다고 하십니다. 거룩한 성에 들어가지 못하게 됩니다. 이것은 우리가 어떤 자질을 가지고 성경을 열심히 읽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은혜 받은 사람들의 복에 대해 말씀한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의 칠 복 중 하나인 것입니다.
9. 성경의 무오성
순교자들이 성경을 목에 걸고 화형당했습니다. 성경이 무엇이길래 순교자들이 성경과 함께 파묻혔을까요? 우리는 성경의 무오함을 믿습니다. 성경에는 오류가 없습니다. 이 세상에 무오한 것은 하나님과 그의 말씀 뿐입니다. 그래서 이 강단의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야 합니다. "이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끊임없이 감사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받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도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가운데에서 역사하느니라"(살전 2:13).
10. 성경 말씀을 믿어야 기독교적 삶이 있다
우리 강단에서는 성경 외에 전하지 않습니다. 기독교인문주의자들처럼 성경에 대해 전한다고 해서 신앙인인 것은 아닙니다. 성경을 붙들고 사랑해야지 성경을 내려놓고 사랑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그것으로 말미암아 끝까지 사랑하고, 아가페, 궁극적으로 남을 사랑하고 순교적 사랑을 하는 것입니다.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은혜와 사도의 직분을 받아 그의 이름을 위하여 모든 이방인 중에서 믿어 순종하게 하나니"(롬 1:5). 다른 것이 아닙니다. 성경을 믿어 순종하게 됩니다. 성경을 읽을 때 순종하게 된다고 하면, 내가 순종해야 하는 각오가 아닌, 하나님이 그렇게 하게 하심을 알아야 합니다. 내 순종이 아니라 하나님의 열심이고 나는 그저 하나님께 얹혀 가는데, 그런데 하나님이 나에게 상급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저도 권면하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어떤 성도님들은 이것해야 저것해야 한다고 절치부심합니다. 예수님도 어떤 사람들의 열심이나 행동을 보고 구원에 이른다고 하신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그런데 그저 아무것도 안하느냐,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고 질타하십니다. 달란트라는 말은 선물도 되고 은사도 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은 은사입니다. 일하라고 주신 선물입니다. 그러니 순종입니다. 그러므로 선물 안 받으면 순종 못합니다. 성경을 받고 믿으면 선물로 순종합니다. 그래서 어거스틴 신학의 결론은 상급도 은혜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열심히 하나님께 봉사하고 충성하고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공로주의나 자질주의가 아닙니다. 모두 은혜입니다. 은혜가 넘치는 것입니다. “믿어 순종하게 되나니”(롬 1:5). 성경을 믿는 것입니다. 성경을 믿고 움직이면 은혜이고 감사고 영광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믿음과 삶의 규범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옛날에는 신앙과 행위의 법칙이라고 했습니다. 더 좋게 들리지만, 그대로 번역하면 믿음과 삶의 규범입니다. ‘신앙’이라는 말보다는 ‘믿음’이라는 말이 더 맞습니다. 그것이 바로 성경입니다.
11. 결론
성경 말씀에서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포도원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포도원은 기쁨입니다. 그것을 믿어 순종하는 것입니다. 성경 말씀 없이 순종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말씀 붙들고 순종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시험거리가 됩니다. 에스겔과 같이 말씀을 먹고 움직여야 합니다. 말씀 안 먹고 교회일 하지 마십시오. 말씀 먹고 교회일 해야 합니다. 그래야 기쁘고 즐겁고 멍에가 가벼운 것이 됩니다. 달란트는 은사, 선물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살다 죽어야 합니다. 성경이 내 인생의 동반자, 좌표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도 성경 성경 하니 성경을 목에 매고 죽임을 당한 것입니다. 우리 삶도 인생 끝날 때까지 성경 붙들고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제1장 전반부에 대한 말씀입니다. 이런 은혜와 영광과 감사와 상급이 성도님들께 충만하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