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216][십자가지기교회 주일낮예배: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4)] 거룩하신 삼위일체 하나님 (마 3:16-17) 문병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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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216][십자가지기교회 주일낮예배: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4)] 거룩하신 삼위일체 하나님 (마 3:16-17) 문병호 목사


(마 3:16)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마 3:17)하늘로부터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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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취록>



1. 삼위일체 하나님은 오직 성경에서만 계시된다


1) 성경의 삼위일체 하나님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세례를 받으신다는 것은 공생애를 시작하심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으로서는 성령이 나가시나 사람으로서는 성령을 받으십니다. 하늘로부터 소리가 있어 말씀하신 것을 봅니다.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마 3:16). 여기서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을 볼 수 있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고후 13:13);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마 28:19). 성경에는 하나님은 분명 한 분이십니다. 그런데 어떻게 성경에는 성부 성자 성령의 하나님이 계시다고 하는데, 이것은 성경에 기록된 대로 계시된 대로 받아들일 뿐입니다. 세상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이는 비밀이요, 비밀은 가장 불변하는 진리입니다. 세상의 어떤 것보다 논리적입니다. 세상에서 어떤 것도 줄 수 없는 비밀스러운 역사가 일어나서 하나님이 살아 계심을 알게 됩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을 알게 되고 고백하게 되는 것은 오직 성경 말씀을 통해서입니다. 


2) 신에 대해 묻는 인간: 종교성


인간은 지혜의 인간이라고 합니다.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라고 합니다. 그리고 보니 다시 더 지혜로운 인간이 있어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Homo sapiens sapiens)라고 명명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걸어다닌다고 해서 호모 에렉투스(Homo erectus)라고 합니다. 그리고 사람은 말을 하는 존재라고 하여 호모 로쿠엔스(Homo loquens)라고도 합니다. 사람은 이런 특징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불의 인간이라고 하여 명명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사실 인간을 가장 인간답게 하는 것은 호모 쿠아에렌스(Homo quaerens), 질문하는 존재라고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은 특별히 궁극적으로 신에 대해 묻는 존재입니다. 동물은 그렇지 않습니다. 동물은 종교적인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하나님을 온전히 섬기지 않더라도 종교성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제2차 전도여행을 빌립보 마게도니아 첫 성, 데살로니아, 베뢰아로 거쳐 아덴에 도착합니다. 그런데 거기서 사람들을 보고 범사에 종교성이 많음을 보고 놀랍니다. 철학도 많아서 스토아 철학이니 운명론이니 많습니다. 그리고 에피쿠로스 학파도 있어서 신은 창조만 하고 섭리는 하지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 도시 사람들이 신에 대해 많이 묻기도 했습니다. 그렇다면 아덴에 하나님에 대한 답이 있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알지 못하는 신에게까지 예배를 드렸던 것입니다. 


3) 인간은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 수 없다


근대 철학에서 가장 생각을 많이 한 사람은 데카르트일 것입니다. 그는 질문을 던지면 인간이 답을 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신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존재고 그렇다면 신은 존재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것으로 신 존재 증명을 하려고 했습니다. 인간이 생각할 수 있으면 생각하는 대상이 되는 것은 존재해야 한다고 말입니다. 데카르트는 그래서 신을 증명할 수 있다고 <<방법서설>>이라는 책에서 말했습니다. 

그런데 데카르트가 상당히 서구 문명의 발전한 철학자같이 여겨지나 소크라테스만도 못합니다. 소크라테스는 너 자신을 알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사실, 데카르트는 자기 자신을 몰랐던 것입니다. 생각하는 나 자신은 어디서 왔느냐는 질문에는 답을 못한 것입니다. 자기 자신이 어디에서 왔는지, 스스로에 대해서 모르면서 내가 나도 모르는데 신에 대해 무슨 질문을 던지고 그것으로 신을 증명한다는 말입니까. 똑똑하고 멋있는 질문 던지는 사람 많습니다. 깊은 묵상도 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러나 모두 다 나로부터 나간 것이요, 나는 시작이 있는 존재입니다. 어떤 존재에 시작이 있음은 거창해 보이나 만들어진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출발부터가 모르는 존재입니다. 평생 질문 던지는데 평생 내 시작도 알지 못하고, 다만 시작이 있다는 것만 알고 갑니다. 인간은 사실상 많이 아는 것 같고 신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것 같지만, 그것은 답을 줄 수 없는 인간의 한계를 드러낼 뿐입니다. 


4) 삼위일체를 하나님께서 알려 주신다


하나님은 사람이 하나님이 누구신지 묻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그러나 사람이 그 답을 하려고 하는 것은 싫어하십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이여 알려 주시옵소서"라고 묻는 것을 좋아하십니다. 모세가 여호와 하나님께 이름을 묻듯이 하나님께 물어보는 것을 좋아하십니다. 엘리야도 하나님께 여쭈었습니다. 다윗도 여호와께 여쭈었습니다. 여호와께 밤새 질문하고 한마디 합니다. 그것이 시편입니다. 여호와의 뜻을 알고 율례와 법도와 규례를 알고 기뻐 침상을 적십니다. 하나님이 밤새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내가 궁극적으로 탐구해서 아는 것이 아닙니다. 사실상 우리는 여호와가 누구신지에 대해 질문을 던질 때, 이성이 가닿을 수 없는 곳에 부딪치는 것입니다. 

한 분 하나님이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으로 계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삼위일체의 비밀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큰 감동 가운데 신령하고 고상한 지식으로 받을 뿐이지 인간이 풀어 갈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삼위일체에 대해 그림으로 설명하는 것을 아무것도 보지 마십시오. 삼위일체는 성경 말씀대로 보면 그림을 볼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동일하신 분입니다. 성부 성자 성령은 각각 하나님이시요 서로 동일하신데 하나로 계십니다. 이것이 삼위일체의 비밀입니다. 



2. 한 분이신 하나님


1) 유일신과 다신


하나님은 한 분 이십니다. 한 분이신데 여럿 중에 한 분이 아니라 유일하신 한 분이십니다. 그러니 유일신이십니다. 기독교는 유일신 사상입니다. 세상의 모든 종교는 다신교입니다. 그 중 하나를 섬기는 것입니다. 그것이 단일신론입니다. 모든 단일신교는 다신교를 전제합니다. 불교도 그렇습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그렇지 않습니다. 여럿 중 한 분의 하나님이 아니라 오직 유일하신 하나님 여호와로 섬깁니다. 다른 신은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신 6:4). 유일하신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너희는 옛적 일을 기억하라 나는 하나님이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느니라 나는 하나님이라 나 같은 이가 없느니라"(사 46:9). 

세상에는 다다익선인 것이 많습니다. 대체로 그렇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신을 여럿 섬기면 좋은 것이 결코 아닙니다. 매 석공이 상을 만드는데 내일 또 한 사람이 신을 만드니 아예 미리 만들어 놓고 이름만 짓는 것입니다. 그것이 아덴의 상황이었습니다. 어디든지 가면 유럽에는, 동양에도 '판테온'이 있습니다. '판'(pan)은 모든, '떼온'(theon)은 신이란 의미입니다. 모든 신을 모아놓은 곳입니다. 세계의 지성이 모인다는 소르본대학교 바로 앞에 판테온이 있습니다. 한국도 그런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다다익선이 아니요, 유일한 하나님만 섬겨야 합니다. 다른 신은 신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바알과 여호와를 어찌 함께 섬기느냐 말입니다. 한 편을 정해야 합니다. "영원하신 왕 곧 썩지 아니하고 보이지 아니하고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이 영원무궁하도록 있을지어다 아멘"(딤전 1:17).


2) 우상 숭배


하나님은 좌로나 우로나 한 분 하나님일 뿐입니다. 그 하나님께 더 가까이 더 근접해서 가는 것, 그것이 우리의 신앙생활입니다. 그것 외에 다른 것이 없습니다. 뭔가 일이 잘 안 되면 날을 잡아 보고 점 치러 가고 이런 것들은 다 필요 없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 기도하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면 됩니다. 하나님이라는 이름을 하나님 외에 쓰면 그것이 바로 우상입니다. 하나님의 자리에 다른 것을 세우는 것이 우상입니다. 제2계명에서 말한 큰 계명입니다. 만들어도 안 되고 섬겨도 안 되고 바라보고 마음 감동받아도, 그 앞에 절해도 안 됩니다. 왜 하나님이 우상 숭배를 싫어하실까요? 그것은 하나님 것을 그 쪽으로 옮기는 것이라 그렇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에서 깊은 하나님에 대한 '아멘'이 있어야 하는데 우상은 이것을 방해하는 것입니다. 가급적이면 다 내려놓으십시오. 우리 성도님들은 모형 조형 다 필요 없습니다. 촛대도 어떤 것도 거추장스러운 것일 뿐입니다. 내가 그냥 무릎 꿇고 기도할 곳만 있으면 됩니다. 다른 것은 다 필요 없습니다. 보고 감동을 느끼고 음악 듣고 감동 느낄 필요 없습니다. 내 귀가 쏠리고 눈이 쏠리면 그것도 우상입니다. 보는 것 느끼는 것 맛보는 것이 침범하니 다 내려놓는 것입니다. 우상이라고 해서 동상이나 어떤 큰 조형을 생각할 뿐 아니라 날마다 살아가면서 여호와와 나와의 깊은 사귐을 방해하는 것들이 다 우상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상의 제물을 먹는 일에 대하여는 우리가 우상은 세상에 아무 것도 아니며 또한 하나님은 한 분밖에 없는 줄 아노라"(고전 8:4). 우상을 왜 이렇게 많이 이야기할까요? "열국의 우상은 은금이요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이라"(시 135:15). 

시작이 있는 것은 불완전한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과 저는 모두 불완전합니다. 시작이 없으신 분과 사귐이 있을 때만 만족합니다. 그런 존재는 오직 하나님 한 분이십니다. 시간과 공간도 시작이 있습니다. 영원하신 시작도 없으신 하나님의 품에 안기면 영원에 동참하고 맛보게 됩니다. 우상은 속이는 것이요 가증한 것입니다. 가증하다는 것은 저주거리라는 말입니다. 우상은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덜 기도하고 덜 열심을 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상을 섬겨서는 안 됩니다. 


3) 참 하나님을 참 하나님에게서 배우라


"오직 여호와는 참 하나님이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이시요 영원한 왕이시라 그 진노하심에 땅이 진동하며 그 분노하심을 이방이 능히 당하지 못하느니라"(렘 10:10). 삼위일체 하나님이시니 살아 계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들이 우리에 대하여 스스로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너희 가운데에 들어갔는지와 너희가 어떻게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살아 계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는지와"(살전 1:9). 우리는 알게 모르게 세상의 우상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칼빈은 인간의 마음은 우상의 공장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유일신을 만났습니다. 전능하시고 스스로 계시는 하나님을 섬겨 우리가 우상을 버립니다. 그 사슬같이 세상의 우상은 절대 육체를 거역하지 않습니다. 보기에 좋고 듣기에 좋고 즐겁게 합니다. 그러나 영적으로는 사슬이 됩니다. 그런데 성령이 임하면 싹 다 잘라 주십니다. 이제 살아 계신 하나님만 만나게 하십니다. 내가 필요하면 들려주시고 지시해 주시고 내 속에서 나와 함께 모든 것을 함께 하십니다. 



3. 영이신 하나님


여호와 하나님을 아는 것은 내 자신을 하나님 편에 세워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우상을 버리는 것입니다. 피조물을 의지하지 말고 섬기지 마십시오. 직장에서는 섬기십시오. 그러나 영적으로 섬기지 마십시오. 사람의 교훈을 하나님의 교훈보다 귀하게 여기지 마십시오. 진짜 사람을 사랑하려면 그 사람에게 하나님을 소개하고 전도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을 사랑한다고 해서 그들을 따르는 것은 좋지만 영적으로 존경해서 하나님의 자리에 새기면 안됩니다. 특별히 예술이 그런 영역입니다. 사람들을 섬기게 됩니다. 그럴 때 우리는 하나님을 바라봐야 합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계십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창 1:31). 만물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심히 좋습니다. 그러나 완전하지는 않습니다. 인간도 완전하지는 않습니다. 완전하지 않다는 말은 연약하다는 말입니다. 모든 피조물은 연약하고 하나님만 오직 완전하십니다. 사람 붙들고 든든하다고 하지 마십시오. 불탄 부지깽이에 불과합니다. 화력도 없고 그저 부서지고 맙니다. 사람을 의지하는 것은 바위를 갈대 위에 얹는 것입니다. 사람 의지하는 것보다 후회되는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붙드십시오. 시작이자 끝이요, 완전하신 유일하신 분입니다. 그 하나님을 붙들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만들어진 존재가 아닙니다. 그러니 영이십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요 4:24). 완전한 하나님의 품에 안기는 것이 사귐입니다. 



4. 무한하고 영원하신 하나님


1) 시간의 주이신 하나님


하나님은 무한하시고 영원하시고 시공에 갇히지 아니하십니다.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습니다. 하나님은 시간도 주장하십니다. 역사상의 하나님만 계시는 것이 아닙니다. 시간이 있기 전에 하나님이 계십니다. 그것을 표현할 수는 없지만 말입니다. 시간도 하나님이 만드신 것입니다. 시간 안에 존재하는 것만 과학자들은 이야기합니다. 시간을 신처럼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시간을 만드셨습니다. 인생은 흘러갑니다. 아이도 금방 어른이 됩니다. 단계별로 우리가 다 겪었습니다. 저 노인이 고적하게 혼자 앉아있는 것처럼 보여도 산도 건너고 물도 건넜습니다. 대체로 인간이 사는 것이 똑같습니다. 두 번 죽는 사람도 두 번 나는 사람도 한 명도 없습니다. 

인간은 헛되고 헛됩니다. 돈이 아무리 많아도 어디가서 주사나 맞고 있습니다. 재벌 후손들이 마약을 많이 하는 이유는 그럴 수 밖에 없습니다. 부모들로부터 다 물려받으니 말입니다. 부모 것을 물려 받으려면 그만큼 훈련을 받아야 합니다. 부모조차도 불완전하지만 말입니다. 완전한 것은 하나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 완전합니다. 사람이 공짜로 주는 것은 받지 마십시오. 값 없는 점심이 없다고 했습니다. 사람은요 절대 공짜로 점심을 사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공짜로 주십니다. 사람이 공짜라고 주는 것은 나중에 더 달라고 합니다. 차라리 조건을 내세우고 사 주는 것이 정직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필요하면 시간도 주십니다. 히스기야의 생명도 연장해 주십니다. 누가 시간까지 줍니까? 부모도 의사도 시간을 줄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시간을 주십니다. 야베스에게 지경을 넓혀 주십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우리 건강과 먹을 것을 걱정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풀어 주시면 시간조차도 주십니다. 시간과 공간을 주장하십니다. 이 설교를 준비하면서 하루가 천 년같고 천 년이 하루같다는 것을 정말 그렇다고 깨닫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시간을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영원하신 왕 곧 썩지 아니하고 보이지 아니하고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이 영원무궁하도록 있을지어다 아멘"(딤전 1:17). 이 표현이 시간도 공간도 넘어섭니다. 시간과 공간에 갇히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시간을 거꾸로 엎어서라도 우리를 회복시키십니다. 우리는 조금도 옛날 것을 돌이킬 수 없으나 하나님은 우리의 옛날 것이라도 바꾸어 주십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의 하나님이십니다. 


2) 우리에게 맞추어 주시는 하나님


왜 고민하고 힘들어하시나요, 그것은 인간이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때 하나님께 맡기면 풀리지 않는 문제가 없고 강도라도 낙원으로 데려가십니다. 십자가 그 자리에서 말입니다. 솔로몬이 신앙이 가장 좋을 때는 언제인가요? "하나님이 참으로 땅에 거하시리이까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이라도 주를 용납하지 못하겠거든 하물며 내가 건축한 이 성전이오리이까"(왕상 8:27). 솔로몬이 이 신앙이 있었다면 훨씬 더 잘 했을 것입니다. 솔로몬이 물론 참 온전한 사람이었으나 다윗의 교훈이 남아 있을 때 그랬습니다. 아비의 교훈을 잃어버리니 타락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담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고급스러운 성전도 하나님을 담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여호와가 우리의 이 작은 마음에 담기는 것, 오시는 것은 여호와가 우리에게 맞추어주셔서 들어오실 때입니다. 우리가 여호와를 담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가 우리를 담아 주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내가 가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가 우리에게 내려오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늘로 올라갈 수 없으니 하나님이 내려오시고 우리가 영접할 수 없으니 예수님을 보내셔서 영접하게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안을 수 있고 같이 드실 수 있습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요 1:12-13). 하나님이 택함 받은 백성에게 우리 속으로 들어오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안다고 신앙고백 하는 것입니다. 



5.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가까이 하라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합니다. 경외라는 말은 두려워하면서도 가까이 가는 것입니다. 두려워한다고 멀리하는 것은 자녀가 아닙니다. 우리가 죄지었을 때 하나님으로부터 도망가지 않습니다. 기도하고 있다는 것에 감사하십시오. 그것이 중요합니다. 세상 인간, 경찰로부터도 우리가 죄 지으면 도망치는데 모든 것을 지으신 하나님 앞에 어떻게 죄 지은 우리가 나아갑니까? 그것은 우리에게 이미 자녀의 심령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죄인 중에 괴수라고 고백하면서도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런 하나님이 우리를 알아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아가페 사랑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입니다. 완전하신 분이 사랑하시니 완전한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처음과 끝을 지으신 분이 사랑하시니 처음과 끝을 온전케 하는 사랑입니다. 이것을 아는 자는 하나님 품을 즐거워하고 어떠하심을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내리사랑, 아가페 사랑이 이것입니다. 부모의 사랑도 내리사랑이나, 창조주, 조물주가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것이 내리사랑입니다. 

<<기독교 강요>>를 이제 거의 쓸 것을 다 썼습니다. 곧 네 권으로 출간됩니다. 같이 교회에서 예배드렸기에 제가 할 수 있었습니다. 책마다 앞에 성경 한 절을 쓰는데요, 이번 책에는 두 말 할 것 없이 이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고후 12:9) 이 <<기독교 강요>> 번역본이 오백 년 읽힐지 천 년 읽힐지 모릅니다. 그때에도 이 성경 구절이 여전히 남아 있을 것입니다. 내가 약한 것들을 자랑하리니 그래서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입니다. 의사는 우리가 다 나았다고 하면 떠납니다. 사도 바울은 그렇지 않습니다. 내가 약한 것을 자랑함은 그리스도를 머물게 하려 한 것입니다. 그러니 사도 바울이 약았습니다. 죄인 중에 괴수라고 해야 예수님이 우리 가까이 머물기 때문입니다. 어려운 것이 많습니다. 환경으로, 내적으로, 외적으로, 정신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럴 때 이루십니다. 다윗은 그 쫓겨다니면서 창이 그 코 앞까지 왔었지만, 하나님은 다윗을 다윗을 통일 왕국의 왕으로 삼으십니다. 소나기가 내려도 하나님이 길을 찾게 하십니다. 평안하다고 하여 기도하지 않는 모습보다 신음 가운데 끙끙 앓는 소리로라도 하나님을 찾는 모습이 귀합니다. 나의 약함을 내어놓고 예수 그리스도가 옆에 바짝 계신 그 모습이 인생의 가장 아름다운 그림입니다.



6. 결론: 하나님이 우리를 마스터하셨다


하나님은 한 분이십니다. 그 삼위일체 하나님은 비밀 가운데 계십니다. 완전하시고 무한하시고 오래 참으시고 사랑이 많으시고 우리를 기뻐하십니다. "너는 내 것이라.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도다." 하나님은 낳은 사랑을 하시는 분입니다.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일까보냐." 우리의 사랑은 그저 사랑이 아니라 낳은 사랑입니다. 아들을 대신 주셔서 낳으셨습니다. 그래서 아들과 함께 자녀의 자리, 상속자의 자리에 올리셨습니다. 두려워할 것은 하나뿐입니다. 그리스도가 나를 떠나는 것입니다. 모든 삶에 있어서 그리스도를 가까이 모시도록 힘쓰십시오. 나의 죄로 인해서도 그리스도를 가까이 모십시오. 죄를 지으라는 말이 아닙니다. 절망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하나님을 안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우리를 아신 바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아신 바 되어 우리가 불가항력적으로 알 수 밖에 없게 된 것입니다. 산 길을 가는데 하나님이 우리 이름을 불가항력적으로 부르십니다. 그 때 우리가 예 하고 대답합니다. 그것이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우리는 불가항력적으로 하나님이 아신 바 된 자들입니다. <<기독교 강요>> 서문에 쓴 것이 그것입니다. 그 서문 마지막에 칼빈이 하나님을 마스터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칼빈을 마스터했다는 말이 나옵니다. 하나님이 마스터한 인간, 우리 성도님들 모두에게 그런 은혜가 있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