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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201][십자가지기교회 주일낮예배: 사도신경(7)] 부활의 첫 열매 (요 20:18; 고전 15:3-4) 문병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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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201][십자가지기교회 주일낮예배: 사도신경(7)] 부활의 첫 열매 (요 20:18; 고전 15:3-4) 문병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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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20:18)

막달라 마리아가 가서 제자들에게 내가 주를 보았다 하고 또 주께서 자기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르니라  



(고전 15:3)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고전 15:4)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녹취록>



1. 주님의 죽음과 부활을 함께 묵상하라


계속되는 사도신경의 고백을 보고 있습니다. 오늘은 부활하신 주님,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시는 주님에 대한 고백입니다. 고린도전서 본문은 예수님이 성경대로 장사되시고 성경대로 사흘만에 부활하신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막달라 마리아가 부활하신 주님을 제자들에게 알리는 요한복음 본문과 바울이 부활의 도를 전하는, 성경대로 죽으시고 성경대로 사흘만에 살아나신 복음의 선포인 고린도전서 본문입니다.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은 아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죽음이 없이는 부활이 없고 부활이 없다면 죽음은 헛될 뿐입니다. 초대교회 힐라리우스라는 교부는 죽음을 묵상하면 부활을 묵상하고 부활을 묵상하면 죽음을 묵상하라고 했습니다. 



2. 부활을 알려면 먼저 예수가 누구신지 알아야 한다


1) 베드로의 신앙고백: 삼중직(그리스도)으로 일하시는 하나님의 아들


주님은 베드로의 고백을 들으실 때 처음으로 죽으시고 부활하실 것을 예언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6장의 말씀입니다. 그리고 다음 장은 제자들이 예수님이 누구신지에 대해 뚜렷히 믿지 않은 것처럼 보이자 예수님이 제자들을 변화산에 데려가셔서 참 하나님이시자 참 사람이신 것을 알려주시고 또 다시 죽으시고 사흘만에 부활하실 것을 재차 예언하십니다.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 예언은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실 즈음 더 구체적으로 고난, 죽으심, 부활을 말씀하셨습니다. 왜 베드로의 고백을 듣고 비로소 이 말씀을 하셨을까요? 그것을 알 때 부활의 의미를 깨닫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자기를 무엇으로 생각하는지 물으셨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예수님을 이런저런 선지자로 여겼음을 이야기했습니다. 요지는 예수님을 하나의 사람으로 봤다는 것입니다. 조금 뛰어난 사람 중 하나로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자신을 제자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으십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대답합니다. 이것은 사도신경의 모판이 되는 고백입니다. 

“그리스도”는 헬라어로 ‘크리스토스,’ 기름 부음 받은 자, 구약의 메시야입니다. 이는 곧 선지자요, 제사장이요, 왕입니다. 이 세 직분은 하나님의 일꾼들입니다. 기름 부음 받음은 안수, 권능을 받는 것, 하나님의 일을 하라는 성결함과 능력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라는 말은 예수님이 왕으로, 선지자로, 제사장으로 오신 하나님의 아들임을 고백한 것입니다. 사람의 아들이 이 삼중직으로 일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말 그대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아들로서 사람의 아들로 오셔서 지금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자 사람의 아들이심을 말하는 것입니다. 


2) 그리스도의 부활: 인성에 따라 죽으시고 신성에 따라 죽음을 이기심 


이 고백을 듣고 예수님께서 비로소 이 고백 위에 교회를 세우겠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예수께서 죽으실 것과 사흘만에 부활하실 것을 예언하십니다(마 17:23). 왜 베드로가 예수님을 단지 뛰어난 사람이 아니라 삼위일체 하나님이시라고 정확하게 고백하니 그제서야 예수님이 부활에 대해 말씀하신 것일까요? 바로 우리를 위하여 대속물이 되시는 주, 죽으시고 부활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자 사람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이면 그저 남을 위하여 죽을 뿐 대속의 죽음이 아니요, 그저 하나님으로만 계신다면 죽으실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으로는 죽음을 이길 수 없고 하나님으로서는 죽음을 느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으로서는 자기의 죽음을 제물로 바치고, 하나님의 권능으로 죽음을 이기시고 살아나신 것입니다. 즉 사람으로서는 죽으신 그분은 하나님이시니 죽음을 이기고 다시 살아나신, 부활의 주인이라는 것입니다. 존 오웬은 그리하여 예수님의 죽음은 죽음 안에서 죽음을 죽이는 죽음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부활의 신앙을 가지려면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지 바로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도 그래서 베드로의 그 고백을 듣고 그 고백 위에 교회를 세우시리라는 것과 죽음의 부활의 말씀을 예언하신 것입니다. 


3) 원죄가 없으신 그리스도


주님은 죄가 없으시면서 죄 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받으십니다. 왜 그러셨습니까? 주님은 죄향(罪向)도 죄성(罪性)도 죄행(罪行)도 없으십니다. 죄의 본성도, 죄의 성향도, 죄의 행위도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물에 의해서 마음이 움직입니다. 탐심을 갖고 단지 억제하는 것입니다. 이미 탐심을 가진 것이 죄이고 회개해야 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죄의 본성, 죄의 성향, 원죄도 자범죄도 없으십니다.


4) 죄인을 대신하여 죄인의 자리에 서신 무죄하신 그리스도


그렇지만 왜 죄가 없는 분이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받았느냐(막 1:4), 이에 대해 주님이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3:15). 우리의 죄인의 자리에서 우리 대신에 세례를 받으신 것이 합당하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것을 세례 요한이 알아듣고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요 1:29)라고 말한 것입니다. 본문의 베드로의 고백도, 예수님이 그 고백 위에 예언의 말씀을 하신 것도 이와 비슷합니다. 예수님이 죽으시고 부활하시겠다고 말씀하시니 베드로가 “그리 마옵소서”(마 16:22)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니 주님께서 “사탄아 내 뒤로 물러 가라 …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마 16:23)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일은 대속을 말합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하신 일은 대속입니다(마 20:45). 


5) 대속의 의를 다 이루신 그리스도


주님이 대속의 의를 이루기 위해 죄인의 죄를 받으셔야 하고 죽기까지 고난을 당하셔야 합니다. 그러나 죽음 가운데 계시면 죽음이 헛됩니다. 하나님이시므로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셔야 합니다. 그의 죽음이 죽음을 죽이는 죽음이 되는 것, 그것이 바로 부활입니다. 죽음으로 죽음을 죽이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입니다. 주님은 죽음에 복종하신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에 복종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 3:16). 이것이 아버지의 뜻입니다. 그래서 대속의 의를 이루려고 예수님이 죽으신 것입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는 고백을 했으나 베드로는 즉시 주님의 죽음과 부활에 대해 항변하여 “주여 그리 마옵소서”라고 합니다. 그러자 주님께서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라고 하셨습니다. 


6) 참 하나님이자 참 사람이신 예수만이 우리의 ‘고엘’(기업 무를 자)이시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심은 자신의 죽음으로 우리와 함께 죽고 부활하심으로 우리를 살리려 하심입니다.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시고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자 가운데 부활하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십니다(롬 1:3-4). 다윗의 아비가 이새이고 이새의 조상이 보아스와 룻입니다. 보아스가 이방 여인 룻을 위하여 기업을 무릅니다. 그리고 아내로 삼습니다. 그래서 보아스와 룻 사이에 후손으로 이새와 다윗이 태어나고 예수가 오십니다. 예수님이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는데, 이것을 통해 알게 되는 것은 보아스와 룻같이 예수님이 우리를 무르신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는 모두 외인이요 나그네로 하나님을 모르는 자인데 우리를 물러 주신 것입니다. 자기의 죽음을 값으로 삼아 우리를 무르시기 위해 주님이 오신 것입니다. 죽음을 값으로 삼으니 한 몸이 되는 것입니다. 죽음을 값으로 삼으니 남편이 되고 신랑이 되는 것입니다. 신랑과 신부는 한 몸입니다. 


7) 하나님이신 분이 사람도 되신 것이지, 사람이 하나님이 된 것이 아니다


그런데 그분은 성결의 영으로는 하나님이십니다. 죽은 자들 가운데 부활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자 사람의 아들로 고백하지 않으면 전부 다 절망합니다. 예수님을 그저 잘난 한 사람으로 알면 좋을 때는 좋은데, 예수님이 고난이나 핍박을 당하면 스스로 절망에 빠져 예수를 못 박으라고 하게 됩니다.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 즉 하나님이자 사람의 아들이라는 고백이 뚜렷하면 예수님의 낮아지심과 비우심에 대한 고백도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잘못 알고 있으면 나중에 필히 예수를 핍박하는 곳에 서게 됩니다. 왜요? 예수는 그저 뛰어난 인간으로서만 계셔야 되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도 그런 고백을 했으나 예수님이 고난을 받는다고 하니 “그리 마옵소서”라고 한 것입니다. 그리고 마태복음 17장에서 다시 예수님이 변화산에서 모습을 보여 주십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또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사흘만에 부활하신다고 하니 제자들이 근심했다고 합니다. 여전히 근심한 것입니다. 이런 일은 베드로가 디베랴 바닷가에서 예수님을 만날 때, 나머지 제자들은 성령을 받을 때까지 계속됩니다. 


8) 신인양성의 중보자


주님은 생명을 버릴 권세와 얻을 권세 모두 가지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사람과 하나님 사이의 유일한 중보자이십니다.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그렇지 않다 하는 이 없도다 그는 육신으로 나타난 바 되시고 영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으시고 천사들에게 보이시고 만국에서 전파되시고 세상에서 믿은 바 되시고 영광 가운데서 올려지셨느니라”(딤전 3:16). “그의 아들에 관하여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롬 1:3-4). 그리고 우리가 오후에 계속 찬미하는 빌립보서 말씀입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빌 2:6-11). 



3. 생명의 주


1) 우리를 위하여


예수님은 사람의 아들로서는 죽으시고 하나님의 아들로서는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셨습니다. 그가 첫 열매이고 우리는 그를 잇는 후속 열매가 되는 은혜가 있습니다. 주님은 이렇게 우리의 주님이 되셨습니다. 주님이 이 땅에 오심은 우리를 위한 것입니다. 주님이 이 땅에 오셔서 죽으신 것은 로마 병정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 때문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오시고 죽으신 것입니다. 우리가 1차적 원인이고 나머지는 모두 도구일 뿐입니다. 빌라도도 로마 군인도 도구일 뿐입니다. 칼빈은 이것을 최고 큰 승리라고 했습니다. 가장 큰 주님의 일을 대적의 손을 이용해 이루셨다고 했습니다. 택함 받은 우리 때문에 오시고 그 의를 이루려고 가룟 유다, 안나스 가야바, 빌라도 등 온갖 죄인의 손을 이용해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로마 병정이 아닌 나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를 죽였도다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일의 증인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솔로몬 행각에서의 설교입니다. 선천적 앉은뱅이를 베드로와 요한이 기도하러 올라가다가 고치고 사람들이 놀라자 베드로가 설교한 것입니다. “생명의 주를 죽였도다 그러나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그를 살리셨으니 우리가 이 일에 증인이라”(행 3:15). 이것이 신약시대 최고의 메시지, 설교입니다. 이 세 줄에 다 들어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죽였다. 왜요? 예수가 나 때문에 죽었으니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로마 병정을 용서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로마 병정을 원수로 삼고 반 유대주의라는 것이 생깁니다. 히틀러는 예수를 죽인 유대인을 우리가 죽여야 한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잘못됐습니다. 그들이 없이는 하나님의 일을 이룰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악인을 들어 하나님이 선한 일을 하십니다. 그 때 우리가 악인을 보복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2) 우리가 증인이다


‘내가 예수를 죽였다.’ 이 고백이 있어야 성찬의 떡과 잔이 내 살과 피라는 고백이 가능합니다. 우리가 예수를 죽였습니다. 우리 때문에 예수가 오셨습니다. 그래서 그 살과 피가 우리 것입니다. 그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셨으니 우리가 이 일의 증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승천하시면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 증인은 부활의 증인입니다. 초대교회는 입만 열면 이 부활의 도를 전합니다. 그러니 입만 열면 다 죽임을 당합니다. 순교 당할 때도 모두 웃고 축복하면서 죽습니다. 즐겁게 사자 밥이 되고 창에 찔리고 모두 스데반과 같이 순교하니 어찌 로마가 이기겠습니까? 그것을 본 왕비와 관리와 황제가 바뀌는 것입니다. 이 일이 부활의 증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안에 죽은 자의 부활이 있다고 하니 남자만 오천 명이 믿었다고 기록된 것입니다(행 4:2). 


3) 예수의 죽음과 부활로 말미암아 우리의 죽음이 죽는다


아들의 죽음을 우리를 위한 죽음으로 받으시고 그 죽음이 죽음을 죽이는 죽음이 된 것입니다. 사망의 더러운 것, 죽음의 현상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 것들을 바로 예수님이 죽음으로 싹 다 죽여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생명의 죽음이요 대속의 죽음입니다. “그 이름을 믿으므로 그 이름이 너희가 보고 아는 이 사람을 성하게 하였나니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너희 모든 사람 앞에서 이같이 완전히 낫게 하였느니라”(행 3:16). 그래서 예수님이 우리의 생명의 주가 되신 것입니다. 

초대교회는 이 부활의 도를 전했고 세상은 이것을 싫어했습니다. 헬라 철학이 당대 유행이었는데 이것을 싫어했습니다. 불교나 유교는 육신의 저급한 것을 벗어나는 영혼의 해탈을 추구하는데, 부활의 도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다시 살아납니다. 그래서 지금 이 몸의 정체성을 유지하되 신비한 몸으로 부활체로 바뀌는데 세상이 이것을 믿지 못하니 핍박하는 것입니다. 요한일서는 이런 핍박하는 자들을 적그리스도라고 합니다. 


4) 부활의 능력


고린도전서의 본문 말씀은 예수의 죽음과 함께 내가 죽고 부활과 함께 내가 다시 살아나 예수의 죽음과 부활에 연합하여 새로운 삶을 살게 한다고 합니다(롬 6:5). 많은 사람들이 표적을 구할 때 예수님은 요나의 표적밖에는 구할 것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다른 표적을 구할 것이 없습니다. 우리에게 표적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사흘 동안 죽으셨다 다시 살아나신 부활의 표적입니다. 예수님은 죄와 흠이 없는 가운데 죽으셨습니다. 사람의 아들로 죽기 위해 오셨고 하나님의 아들로서 죽음을 이기셔서 부활의 권능으로 우리에게 임하셔서 우리의 부활의 주가 되십니다. 

초대교회 아타나시우스는 부활이 성령의 열매요, 터툴리안은 죽은 자들의 부활은 기독교인들의 확신이요 그것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고 있다고 했습니다.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죽음이 무용합니다. 부활에 의해 주님의 죽음이 복음이 되었습니다. 주님의 죽음이 부활로 복음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고린도전서 15장입니다. 부활이 없으면 믿음도, 전하는 도도 헛것입니다. 

부활로 우리가 거듭나고 새 것이 됩니다. 새 생명과 새 생활을 얻습니다.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 한 사도 바울의 말처럼 우리도 날마다 부활의 권능을 체험합니다. 생명과 생활의 권능을 날마다 체험합니다. ‘나는 날마다 죽노라’ 하면서 날마다 일어나는 것입니다. 우리는 믿는 자, 거룩한 자, 신자와 성도입니다. 우리는 모두 부활의 증인입니다. 부활의 증인은 내 안에서 날마다 새롭게 소생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권능을 믿고 ‘아멘’ 하는 것이요,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는 것’이라고 고백하는 자입니다. 


5) 부활 소망


우리가 바라는 것이 이 세상의 삶뿐이면 우리가 더욱 불쌍한 것입니다. 부활의 도가 없이 예수님을 믿는다면 말입니다. 부활의 소망이 없으면 한평생 우리가 죽음의 종노릇 합니다(히 2:15). 저는 최근에 그런 생각을 해 봤습니다. 죽음을 우리가 선하게 기쁘게 맞이하려면 부활의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마지막에 주님이 재림하시고 그 때 우리가 부활합니다. 그 부활의 소망이 없으면 이 땅에서의 죽음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죽음은 부활의 소망으로 넘어가는 것입니다. 죽음을 죽음으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죽음은 지나가는 것이 아닙니다. 과정이라는 말입니다. 

부활의 신앙이 있어야 우리가 죽음의 종노릇을 하지 않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죽음에 속한 것이 좋고 죽음 때문에 맨날 벌벌 떨고 종노릇하게 됩니다. 그러나 부활의 소망이 있으면 생명이 속한 것에 마음을 쓰고 주는 것을 받는 것보다 즐거워하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희락과 화평을 누리는 것입니다. 부활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로 돌이키는 것입니다. 돌아가는 것입니다. 

아담이 나무 뒤에 숨었다가 앞으로 나서는 것이 부활이요 탕자가 돌아오는 것이 부활이요 나사로가 무덤에서 나오는 것, 맹인이 눈을 뜨는 것, 열두 해 혈루병 환자가 예수님의 겉옷을 만지는 순간이 부활입니다. 바로 생명이신 예수님과 가까이 있는 것이 부활입니다. 그래서 내 모든 삶을 예수 쪽으로 방향을 돌리는 것, 그것이 부활을 맛보는 것입니다. 

밝은 빛을 좋아하십시오. 그것이 생명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부활의 몸으로 맛을 보고 마지막에는 부활체로 영화롭게 됩니다. 마지막에 우리가 다 부활합니다. 신령하고 영화로운 몸으로 봅니다. 강한 몸으로 변합니다. 



4. 결론


우리가 이 부활의 증인입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내가 주를 보았다고 합니다. 이것에 모든 말씀이 다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에서 자신의 자격에 대한 논쟁이 있자 세 가지를 이야기합니다. 

첫째, 진리가 내 안에 있다고 합니다.

둘째, 부활의 주를 본 것을 이야기합니다(고전 9:1).

셋째, 약할 때 강함이라고 말합니다. 내가 약할 때 하나님이 강함, 내가 죽을 때 하나님이 살아남을 말한 것입니다. 

우리도 주의 종으로 살려면 이것이 있어야 합니다. 내가 죽을 때 생명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썩지 않고 밀알이 삼십배 육십배 결실을 맺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자랑할 것은 우리의 약함이요, 그것으로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부활의 신앙입니다. 예수님이 세 번에 걸쳐 죽고 부활하심을 예언하시며 죽음을 항상 언급하신 것은 죽음이 없이는 부활의 권능이없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약함을 고백함 없이는 부활이 없다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죽음을 지는 것이요, 죽음을 지는 것이 생명을 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부활의 권능입니다. 내가 약할 때 강함이요, 내가 썩어져 죽어야 삼십배 육십배 백배의 밀알의 결실이 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