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1222][십자가지기교회 주일낮예배: 사도신경(12)] 아멘 (롬 11:36; 계 22:21) 문병호 목사
(롬 11:36)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
(계 22:21) 주 예수의 은혜가 모든 자들에게 있을지어다 아멘
<녹취록>
1. 성경의 "아멘"
우리가 11주간 사도신경의 사실상 내용을 살펴보았습니다. 첫 시간에는 믿는다는 것의 의미를 살펴보았고, 실제로 내용 부분을 열 번 살펴 보았습니다. 다른 책들을 보면 사도신경의 "아멘"을 따로 다루지는 않는데, 오늘은 사도신경의 "아멘"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살펴보고자 합니다.
성경은 "태초에"라는 창세기 1장 1절의 첫 번째 말씀으로 시작해서 오늘 본문으로 삼은 요한계시록 22장 21절, "주 예수의 은혜가 모든 자들에게 있을지어다 아멘"이라는 말로 끝이 납니다. "태초에"라는 말은 창세의 때를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요한복음 1장 1절은 "태초에 말씀에 계시니라"라고 하여 "태초에"라는 말이 다시 나타납니다. 태초에 삼위일체 하나님이 계심을 요한복음이 정확히 말하는 것입니다. 창세기 1장 1절은 태초에 오직 하나님이 계신데 그가 삼위일체이고, 태초에 아무 존재도 없이 삼위일체 하나님만 계신 가운데서 천지와 인간을 지으시고 인류와 언약을 맺으시고, 인간이 언약을 어겨 타락했을지라도 영 그들을 버리지 아니하시고 구약에 오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주시고, 이제 때가 차매 여자에게서 예수님이 나시고 그가 이 땅에 오셔서 모든 의를 다 이루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시고 보좌 우편에 앉으시고, 때가 차매 예수님이 내려오시고 성도가 부활하고 그리고 마지막 심판이 있는데 의인들은 심판 이후에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영원한 복락을 누립니다. 이 모든 말씀에 대한 "아멘"이 요한계시록의 본문에 나오는 것입니다. "태초에"와 "아멘"이라는 두 단어 사이에 하나님의 어떠하심, 존재, 사역이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1) "아멘"의 문자적 의미
"아멘"이라는 말은 구약 히브리어의 "아멘"를 신약 헬라어로 그대로 옮긴 것입니다. 문자적으로는 '진실로,' '참으로,' '확실히'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많이 사용되니 "아멘"이 뜻을 만들어 갑니다. 그래서 우리 말로는 '그러하외다,' '그렇습니다,' '참으로 그렇습니다,' '확실히 그렇습니다' 등의 뜻으로 볼 수 있습니다.
2) "아멘"의 성경적 의미
(1) 송영
"아멘"은 크게 세 가지 뜻 정도로 성경에 나타납니다. 먼저, 예배를 드리고 하나님께 영광을 올리고(송영), 하나님께 찬송을 드릴 때 마지막 회중이 화답하는 말로 구약에 특히 많이 기록됩니다.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영원부터 영원까지 송축할지로다 하매 모든 백성이 아멘 하고 여호와를 찬양하였더라"(대상 16:36). 이런 것은 찬양, 예배, 송영에 대한 화답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네 생물이 이르되 아멘 하고 장로들은 엎드려 경배하더라"(계 5:14). 이런 것이 바로 찬양에 대한 화답입니다. 우리도 다 찬양의 질서가 있습니다. 먼저 송영의 찬양은 하나님에 대한 부름입니다. 그리고 교독하고 찬양을 드립니다. 이 때의 찬양은 바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내려주시는 것에 대한 우리의 화답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성가대에서 예배 때 드리는 찬송이 그런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가대는 "나 같은 죄인 살리신"과 같은 찬양은 온당치 않습니다. 우리가 올려드리는 것도 맞지만 하나님이 내려주실 때 그 반응으로 우리가 올려드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영광 가운데 임재로 내려오실 때 우리가 반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을 읽고 찬송을 드립니다. 이 때 찬송이 회중 찬송이며 화답하는 찬송입니다. 바로 "아멘"입니다. 시편에도 그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제가 신학교에서 경건훈련원장 할 때 이를 철저히 지키고자 했습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영원부터 영원까지 송축할지로다 아멘 아멘"(시 41:13). 특별히 시편에 보면 "아멘, 아멘" 이렇게 두 번 나올 때가 있습니다. 두 번 나오는 것은 굳이 그렇게 볼 필요는 없지만,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른다는 정도의 말씀이라 생각하면 될 것 같습니다. 이것은 꼭 그 해석이 정해진 것이 아니나 저는 그렇게 생각을 해 봅니다. 마음과 입의 화답으로 말입니다(롬 10:10). 그러므로 우리가 찬송하거나 기도하거나 또 말씀 듣거나 할 때 "아멘" 하는 것은 좋은 것입니다. 너무 예배에 방해되게 "아멘"을 많이 하지 않는 이상 말입니다.
(2)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객관적 확정과 주관적 확신
두 번째 "아멘"은 바로 '그러하외다' 하여 객관적으로 확정하고 주관적으로 확신하는 것입니다. 확정이란 말은 객관적인 진리로 정한다는 것이고, 주관적이란 말은 '나에게 그러하외다,' 나의 하나님으로 믿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어떤 사실이나 규범을 선포하고 그것에 대해 회중이 '그러하외다'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특히 구약에 보면 패역한 인간으로, 그리심산에서 축복할 때는 하나님이 아멘을 명령하시지 않습니다. 그러나 에발산에서 저주를 선포할 때는 모든 백성이 아멘 하게 명령하십니다. "이 율법의 말씀을 실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신 27:26). 여호와 하나님이 규범을 주시거나 사실을 알려주실 때 그러하외다, 아멘 하는 것은 우리가 그것을 지키겠다는 의미로 쓰인 것입니다. 한편 이스라엘 백성에게 양자되심을 주시고 언약을 세웠는데 그들에게서 그리스도가 나시고 그가 만물 위에 계시고 세세에 찬양받으실 하나님이시라는 선포에 대해 아멘 하는 것이 로마서에서 나옵니다. "그들은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들에게는 양자 됨과 영광과 언약들과 율법을 세우신 것과 예배와 약속들이 있고 조상들도 그들의 것이요 육신으로 하면 그리스도가 그들에게서 나셨으니 그는 만물 위에 계셔서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시니라 아멘"(롬 9:4-5).
(3) 기원
세 번째 "아멘"은 신약에서 가장 빈번한 것입니다. 이번 설교를 준비하면서 성경에 나오는 "아멘"을 다 살펴보았습니다. 세 번째 아멘은 특별히 신약시대에서 단순히 그렇다고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 너머로 기원(祈願)하고 바랄 때 쓰입니다. 기원은 기본적으로 여호와 하나님을 인정해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부류의 "아멘"이라는 것은 그럴 때 사용된 것입니다. 가장 대표적으로 주기도문이 있습니다. 마지막 부분에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니다 아멘"라고 합니다.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롬 11:36)도 그것입니다.
여호와를 인정하면서 바랍니다. 인정하는 만큼 바라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어떠하심을 알아야 기도가 제대로 나옵니다. 기도의 폭과 지경이 생깁니다.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 돌아"간다는 것과 "그에게 영광이 세세히 있을지어다"라는 것은 기원입니다. 기원이지만 그 영광 가운데 하나님의 자녀 됨을 누린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고후 1:20). 예수 그리스도가 "예"의 순종을 하셨고 우리는 "아멘" 하는데, 이것은 예수의 것을 내 것으로 삼아 달라는 기원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먼저 고백을 한 가운데서의 기원입니다. "교회 안에서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이 대대로 영원무궁하기를 원하노라 아멘"(엡 3:21). 이런 기원 역시 신약성경에서 "아멘" 하는 말로 가장 많이 나타납니다. "오직 그에게만 죽지 아니함이 있고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시고 어떤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또 볼 수 없는 이시니 그에게 존귀와 영원한 권능을 돌릴지어다 아멘"(딤전 6:16).
인생의 제일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를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두 가지가 분리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 우리의 즐거움이 되고 우리의 유익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우리가 즐거워하는 것이 이분법적으로 존재하면 안됩니다.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데 나에게 불리한 것이 없습니다. 그러니 두 번 생각할 것이 없습니다. 기원이라는 것이 바로 그런 의미입니다. 만물이 그에게서 말미암고 그에게로 돌아간다는 말에는 우리의 기원, 간구와 소원이 담겨 있습니다. 기원이 없는 간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간구가 아닙니다. 내가 아주 잘될지라도 하나님의 영광을 가린다면 잘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일시적으로 대적들이 이기게도 하십니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께 영광되는 것은 아닙니다. "모든 선한 일에 너희를 온전하게 하사 자기 뜻을 행하게 하시고 그 앞에 즐거운 것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 가운데서 이루시기를 원하노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무궁토록 있을지어다 아멘"(히 13:21). 모든 선한 일에 온전하게 해서 자기 뜻을 행하고 그 앞에 즐거운 것을 바로 우리 가운데 이루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즐거운 것이 우리 안에 이루어지기를, 그리고 "영광이 세세 무궁토록 그에게 있을지어다. 아멘" 하는 것입니다. "아멘"의 의미가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께 즐거운 것이 우리에게 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 내게 임하는 것입니다. 그것 외에 우리에게 기쁜 것이 뭐가 있을까요? 하나님이 즐거워하지 않는 것으로 우리에게 기쁜 것이 무엇이 있을까요? 기쁨의 근원은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까? 그 기쁨이 나에게 전달되는 것입니다.
철든 자식은 부모가 기뻐하는 것보다 더 기쁜 일이 없습니다. 저도 옛날에는 몰랐습니다. 그저 막무가내로 자기 일생을 부모 효도 하는데 맡기는 듯한 그런 사람의 인생관을 알 수 없었습니다. 텔레비전에 보면 낙향해서 20년, 30년 부모를 모신 사람의 이야기가 나오면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제 보니 효자가 따로 없는 것 같습니다. 부모가 기뻐하는 곳에 관점을 두면 효자입니다. 내가 내 기분으로 효도하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부모가 기뻐하는 일을 하면 그것이 효자거든요.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일까보냐." 하나님이 즐거워하시는 일이 우리에게 기쁨이 됩니다. 기원은 있으나 그저 빼앗듯 취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는 방식으로 치부하고 명예를 세우는 것은 분토와 같습니다. 한 길로 왔다가 일곱 길로 흩어집니다. 여호와를 즐거워하고 여호와 하나님이 기뻐하는 일로 우리의 기쁨을 삼아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즐거워하시는 것보다 우리에게 더 즐거운 일이 없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모든 선한 일에 너희를 온전하게 하사 자기 뜻을 행하게 하시고 그 앞에 즐거운 것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 가운데서 이루시기를 원하노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무궁토록 있을지어다 아멘"(히 13:21). 그리고 오늘 두 번째 본문 바로 앞 구절에 한 번 더 아멘이 나옵니다. "이것들을 증언하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계 22:20). 마라나타입니다.
2. 사도신경의 "아멘"
우리 사도신경에도 "아멘"이 나옵니다. 주기도문에 "아멘"이 나오는 것은 이해되는데, 사도신경에 나오는 것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앞에서 "아멘"은 첫 번째는 화답하는 것이요, 두 번째는 확정하고 확신하는 것이요, 세 번째는 간구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사도신경에서 "아멘"은 두 번째 의미에 가장 가깝습니다. 그러므로 사도신경에서는 확정하고 확신하는 것이 일차적인 의미입니다. 우리가 "아멘" 할 때는 금방 고백한 것이 '확실하다,' '진실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와 함께 첫 번째 의미, 즉 송영의 의미도 있습니다. 특별히 처음 부분에서 삼위일체 고백은 '그러하외다'도 되고 송영도 됩니다. 영광을 올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특별히 "저리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과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살 것을 믿사옵니다"는 '그러하외다'와 '간구'가 동시에 됩니다. 심판은 소망입니다. 우리의 죄 사함이 의인의 심판 가운데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가장 큰 소망이자 위로입니다. 그러므로 그런 것들이 우리에게 간구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바로 이 "아멘"이 다 네 가지 뜻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특별히 두 번째 의미는 두 가지 의미, 즉 확정과 확신이라는 의미를 가지니 말입니다. 즉, 첫째는 송영(영광 올림)이요, 둘째는 객관적 확정이요, 셋째는 주관적 확신이요, 넷째는 간구입니다.
1) 삼위일체 하나님께 대한 송영
"아멘"은 바로 삼위일체 하나님의 계심과 역사하심에 대한 송영을 담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신경하고 "아멘" 할 때는 삼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삼위 하나님은 언제나 함께 계시고 일하시고 존귀와 영광과 위엄 가운데 함께 계십니다. 삼위 하나님께 항상 동일한 예배와 찬양을 돌려야 합니다. 우리가 삼위일체 하나님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찬양하고 고백할 때 그것을 마음에 두고 찬양하고 고백해야 합니다. 그래서 모든 일 가운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계획하신다고 하면 성부께, 하나님이 지혜이시다, 경륜이시다, 뜻이시다 하면 성자께, 하나님이 이루신다 하면 성령께 영광입니다. 물론 이 세 분이 한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계획할 때도 성부 하나님께 영광, 하나님의 지혜와 뜻하심에 대해서도 성자 하나님께 영광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께 동등한 영광을 올립니다. 이것은 바로 성경이 말씀하는 대로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첫 번째 아멘은 송영입니다.
2) 삼위일체 하나님의 존재와 사역에 대한 객관적 확정
그렇다면 사도신경의 두 번째 아멘, 즉 객관적인 확정은 어떨까요? 이것은 하나님이 창조와 구원의 역사를 다 이루었다는 것에 대한 아멘입니다. 객관적으로 확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창조의 모든 역사를 다 이루셨다, 우리는 진화론에 서 있지 않다, 각종 동산의 실과와 각 종류대로 지으셨다는 것을 믿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들을 이 땅에 보내셔서, 마지막 날 지으신 인간과 언약을 맺으셔서 자녀 삼고자 하셨는데 이 언약에 인간이 실패하니,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모든 구원의 역사를, 구약의 절기와 제사의 모든 요구를 다 이루심을 믿는 것이 두 번째 아멘의 의미입니다. 창조주 하나님, 구속주 하나님, 만물을 지으시고 운행하시고 보존하시고 통치하시고 새롭게 하시는 분이요, 그 자신이 아들을 주셔서 죽기까지 내어주시고 그와 함께 모든 것을 주시는(롬 8:30), 다 이루신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백 퍼센트 다 이루심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90% 하고 인간이 10%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류가 아무리 우주를 개발할지라도 창조의 다 이루심에 가닿을 수 없고 인간이 아무리 훌륭하다고 해도 예수의 다 이루심에 한 치도 가닿지 못하는 것입니다. 객관적으로 다 이루심을 확정하는 고백입니다.
3) 삼위일체 하나님의 존재와 사역에 대한 주관적 확신
세 번째, 이렇게 다 이루신 것이 나를 위한 것임을 "아멘" 하는 것입니다. 확신입니다. 나를 위해 잉태되고 나를 위해 나셨고 나를 위해 죽으셨고 나를 위해 부활하셨고 나를 위해 하늘에 오르셨고 나를 위해 보좌에 좌정하사 나를 위해 중보하시고, 나를 위해 때가 되면 다시 오실 것임을 내가 믿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아멘"의 의미입니다. 다윗의 형 일곱이 다 신앙이 좋고 유다 지파로서 가문이 좋았습니다. 그러나 어찌 보면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는 믿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또 다윗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나를 사자의 발톱과 곰의 발톱에서 건져내셨은즉 나를 이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사울이 다윗에게 이르되 가라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기를 원하노라"(삼상 17:37). 이는 다윗이 골리앗에게 나가면서 하는 말입니다. 양치기이던 다윗이 곰에게서도 사자에게서도 보호하신 하나님이 골리앗에게서도 구원해 내시리라는 것을, 그리고 그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으로 믿은 것입니다. 전부 하나님을 믿고 기름 부음 받고 주의 종 되고 싶다고 나섰지만, 아무도 골리앗 앞에 나서지 못할 때 다윗은 나의 하나님으로 믿은 것입니다. 이것이 귀한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 할 때 항상 이것이 귀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전에는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 우리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였도다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딤전 1:13-15). 주의 종은 은혜를 받은 사람이어야 하고 말씀에 서서 그때 그때 지시에 따라야 합니다. 사도 바울의 말이 힘이 있는 것이, 내가 죄인 중의 괴수요, 비방자요 박해자인데, 하나님이 나에게 긍휼을 베푸셔서 나를 능하게 하셨다, 즉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믿었을 때 하나님의 객관적 진리가 선포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우리가 볼 수 있습니다. 다윗의 경우나 바울의 경우, 성경이 다 이렇습니다. 폴리캅도 순교할 때 '하나님이 평생 나를 한 번도 배반하시지 않았는데 내가 어찌 하나님을 배반하겠냐'며 죽었습니다. 우리는 항상 성경을 읽을 때 "그들의" 하나님으로 읽으면 안됩니다. 못난 것도 잘난 것도, 다 내 것이 되어야 합니다. 불평하는 이스라엘을 볼 때 그들의 이야기로 보면 안 되고 내 이야기로 보아야 합니다.
4) 삼위일체 하나님께 대한 기원
마지막으로 기원의 아멘입니다. 그리스도의 몸된 연합체인 교회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자라가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구원하신 하나님이 날마다 우리를 거룩하게 빚어 가십니다. 살아나게 하셨으니 살아가게 하십니다. 그것을 우리가 네 번째 의미, 즉 기원으로 보는 것입니다. 성도의 기원은 한가지인데, 즉 자라감입니다. 머리이신 그리스도께로 자라갑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의를 누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자라가는 것은 누리는 것입니다. 잘 누리는 나무가 가을에 실과를 맺습니다. 성도도 자꾸 뭔가 한다고 하지 마십시오. 잘 누리는 것이 자라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제보다 오늘 더 의지하는 것, "아멘" 가운데 자라가고 아멘의 순종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고후 1:20). 우리 교회도 항상 그렇습니다. 다음의 다섯 가지에서 자라 갑시다. 예배에서 자라 갑니다. 말씀에서 자라 갑시다. 기도에서 자라 갑니다. 고백에서 자라 갑니다. 그리고 헌신에서 자라 갑니다. 주를 위해 나를 드리는 헌신입니다. 이렇게 다섯 가지 자라감이 있습니다. 헌신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하는 것입니다. 주는 것이 복되다고 하셨으니 섬겨야 합니다.
3. 결론
우리는 사도신경에서 "아멘" 하는 것에 네 가지 의미가 있다고 살펴보았습니다. 이 아멘의 네 가지 의미,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것, 객관적으로 그러하다고 하는 확정하는 것, 주관적으로, 나에게 그러하다고 하는 확신하는 것, 마지막으로 하나님께 영광되는 것이 나에게 즐겁다는 소원으로서 간구하는 것이 사도신경의 "아멘"의 의미라고 살펴봤습니다. 사도신경 말씀을 지금까지 열두 번에 걸쳐 살펴보는 기회를 가졌는데, 우리가 고백하는 사도신경이 얼마나 귀한지 다시금 살펴보고 고백할 때마다 이 네 가지를 잘 생각하면서 고백하면 좋겠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20191222][십자가지기교회 주일낮예배: 사도신경(12)] 아멘 (롬 11:36; 계 22:21) 문병호 목사
(롬 11:36)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
(계 22:21) 주 예수의 은혜가 모든 자들에게 있을지어다 아멘
<녹취록>
1. 성경의 "아멘"
우리가 11주간 사도신경의 사실상 내용을 살펴보았습니다. 첫 시간에는 믿는다는 것의 의미를 살펴보았고, 실제로 내용 부분을 열 번 살펴 보았습니다. 다른 책들을 보면 사도신경의 "아멘"을 따로 다루지는 않는데, 오늘은 사도신경의 "아멘"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살펴보고자 합니다.
성경은 "태초에"라는 창세기 1장 1절의 첫 번째 말씀으로 시작해서 오늘 본문으로 삼은 요한계시록 22장 21절, "주 예수의 은혜가 모든 자들에게 있을지어다 아멘"이라는 말로 끝이 납니다. "태초에"라는 말은 창세의 때를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요한복음 1장 1절은 "태초에 말씀에 계시니라"라고 하여 "태초에"라는 말이 다시 나타납니다. 태초에 삼위일체 하나님이 계심을 요한복음이 정확히 말하는 것입니다. 창세기 1장 1절은 태초에 오직 하나님이 계신데 그가 삼위일체이고, 태초에 아무 존재도 없이 삼위일체 하나님만 계신 가운데서 천지와 인간을 지으시고 인류와 언약을 맺으시고, 인간이 언약을 어겨 타락했을지라도 영 그들을 버리지 아니하시고 구약에 오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주시고, 이제 때가 차매 여자에게서 예수님이 나시고 그가 이 땅에 오셔서 모든 의를 다 이루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시고 보좌 우편에 앉으시고, 때가 차매 예수님이 내려오시고 성도가 부활하고 그리고 마지막 심판이 있는데 의인들은 심판 이후에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영원한 복락을 누립니다. 이 모든 말씀에 대한 "아멘"이 요한계시록의 본문에 나오는 것입니다. "태초에"와 "아멘"이라는 두 단어 사이에 하나님의 어떠하심, 존재, 사역이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1) "아멘"의 문자적 의미
"아멘"이라는 말은 구약 히브리어의 "아멘"를 신약 헬라어로 그대로 옮긴 것입니다. 문자적으로는 '진실로,' '참으로,' '확실히'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많이 사용되니 "아멘"이 뜻을 만들어 갑니다. 그래서 우리 말로는 '그러하외다,' '그렇습니다,' '참으로 그렇습니다,' '확실히 그렇습니다' 등의 뜻으로 볼 수 있습니다.
2) "아멘"의 성경적 의미
(1) 송영
"아멘"은 크게 세 가지 뜻 정도로 성경에 나타납니다. 먼저, 예배를 드리고 하나님께 영광을 올리고(송영), 하나님께 찬송을 드릴 때 마지막 회중이 화답하는 말로 구약에 특히 많이 기록됩니다.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영원부터 영원까지 송축할지로다 하매 모든 백성이 아멘 하고 여호와를 찬양하였더라"(대상 16:36). 이런 것은 찬양, 예배, 송영에 대한 화답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네 생물이 이르되 아멘 하고 장로들은 엎드려 경배하더라"(계 5:14). 이런 것이 바로 찬양에 대한 화답입니다. 우리도 다 찬양의 질서가 있습니다. 먼저 송영의 찬양은 하나님에 대한 부름입니다. 그리고 교독하고 찬양을 드립니다. 이 때의 찬양은 바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내려주시는 것에 대한 우리의 화답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성가대에서 예배 때 드리는 찬송이 그런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가대는 "나 같은 죄인 살리신"과 같은 찬양은 온당치 않습니다. 우리가 올려드리는 것도 맞지만 하나님이 내려주실 때 그 반응으로 우리가 올려드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영광 가운데 임재로 내려오실 때 우리가 반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을 읽고 찬송을 드립니다. 이 때 찬송이 회중 찬송이며 화답하는 찬송입니다. 바로 "아멘"입니다. 시편에도 그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제가 신학교에서 경건훈련원장 할 때 이를 철저히 지키고자 했습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영원부터 영원까지 송축할지로다 아멘 아멘"(시 41:13). 특별히 시편에 보면 "아멘, 아멘" 이렇게 두 번 나올 때가 있습니다. 두 번 나오는 것은 굳이 그렇게 볼 필요는 없지만,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른다는 정도의 말씀이라 생각하면 될 것 같습니다. 이것은 꼭 그 해석이 정해진 것이 아니나 저는 그렇게 생각을 해 봅니다. 마음과 입의 화답으로 말입니다(롬 10:10). 그러므로 우리가 찬송하거나 기도하거나 또 말씀 듣거나 할 때 "아멘" 하는 것은 좋은 것입니다. 너무 예배에 방해되게 "아멘"을 많이 하지 않는 이상 말입니다.
(2)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객관적 확정과 주관적 확신
두 번째 "아멘"은 바로 '그러하외다' 하여 객관적으로 확정하고 주관적으로 확신하는 것입니다. 확정이란 말은 객관적인 진리로 정한다는 것이고, 주관적이란 말은 '나에게 그러하외다,' 나의 하나님으로 믿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어떤 사실이나 규범을 선포하고 그것에 대해 회중이 '그러하외다'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특히 구약에 보면 패역한 인간으로, 그리심산에서 축복할 때는 하나님이 아멘을 명령하시지 않습니다. 그러나 에발산에서 저주를 선포할 때는 모든 백성이 아멘 하게 명령하십니다. "이 율법의 말씀을 실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신 27:26). 여호와 하나님이 규범을 주시거나 사실을 알려주실 때 그러하외다, 아멘 하는 것은 우리가 그것을 지키겠다는 의미로 쓰인 것입니다. 한편 이스라엘 백성에게 양자되심을 주시고 언약을 세웠는데 그들에게서 그리스도가 나시고 그가 만물 위에 계시고 세세에 찬양받으실 하나님이시라는 선포에 대해 아멘 하는 것이 로마서에서 나옵니다. "그들은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들에게는 양자 됨과 영광과 언약들과 율법을 세우신 것과 예배와 약속들이 있고 조상들도 그들의 것이요 육신으로 하면 그리스도가 그들에게서 나셨으니 그는 만물 위에 계셔서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시니라 아멘"(롬 9:4-5).
(3) 기원
세 번째 "아멘"은 신약에서 가장 빈번한 것입니다. 이번 설교를 준비하면서 성경에 나오는 "아멘"을 다 살펴보았습니다. 세 번째 아멘은 특별히 신약시대에서 단순히 그렇다고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 너머로 기원(祈願)하고 바랄 때 쓰입니다. 기원은 기본적으로 여호와 하나님을 인정해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부류의 "아멘"이라는 것은 그럴 때 사용된 것입니다. 가장 대표적으로 주기도문이 있습니다. 마지막 부분에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니다 아멘"라고 합니다.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롬 11:36)도 그것입니다.
여호와를 인정하면서 바랍니다. 인정하는 만큼 바라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어떠하심을 알아야 기도가 제대로 나옵니다. 기도의 폭과 지경이 생깁니다.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 돌아"간다는 것과 "그에게 영광이 세세히 있을지어다"라는 것은 기원입니다. 기원이지만 그 영광 가운데 하나님의 자녀 됨을 누린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고후 1:20). 예수 그리스도가 "예"의 순종을 하셨고 우리는 "아멘" 하는데, 이것은 예수의 것을 내 것으로 삼아 달라는 기원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먼저 고백을 한 가운데서의 기원입니다. "교회 안에서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이 대대로 영원무궁하기를 원하노라 아멘"(엡 3:21). 이런 기원 역시 신약성경에서 "아멘" 하는 말로 가장 많이 나타납니다. "오직 그에게만 죽지 아니함이 있고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시고 어떤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또 볼 수 없는 이시니 그에게 존귀와 영원한 권능을 돌릴지어다 아멘"(딤전 6:16).
인생의 제일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를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두 가지가 분리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 우리의 즐거움이 되고 우리의 유익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우리가 즐거워하는 것이 이분법적으로 존재하면 안됩니다.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데 나에게 불리한 것이 없습니다. 그러니 두 번 생각할 것이 없습니다. 기원이라는 것이 바로 그런 의미입니다. 만물이 그에게서 말미암고 그에게로 돌아간다는 말에는 우리의 기원, 간구와 소원이 담겨 있습니다. 기원이 없는 간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간구가 아닙니다. 내가 아주 잘될지라도 하나님의 영광을 가린다면 잘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일시적으로 대적들이 이기게도 하십니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께 영광되는 것은 아닙니다. "모든 선한 일에 너희를 온전하게 하사 자기 뜻을 행하게 하시고 그 앞에 즐거운 것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 가운데서 이루시기를 원하노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무궁토록 있을지어다 아멘"(히 13:21). 모든 선한 일에 온전하게 해서 자기 뜻을 행하고 그 앞에 즐거운 것을 바로 우리 가운데 이루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즐거운 것이 우리 안에 이루어지기를, 그리고 "영광이 세세 무궁토록 그에게 있을지어다. 아멘" 하는 것입니다. "아멘"의 의미가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께 즐거운 것이 우리에게 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 내게 임하는 것입니다. 그것 외에 우리에게 기쁜 것이 뭐가 있을까요? 하나님이 즐거워하지 않는 것으로 우리에게 기쁜 것이 무엇이 있을까요? 기쁨의 근원은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까? 그 기쁨이 나에게 전달되는 것입니다.
철든 자식은 부모가 기뻐하는 것보다 더 기쁜 일이 없습니다. 저도 옛날에는 몰랐습니다. 그저 막무가내로 자기 일생을 부모 효도 하는데 맡기는 듯한 그런 사람의 인생관을 알 수 없었습니다. 텔레비전에 보면 낙향해서 20년, 30년 부모를 모신 사람의 이야기가 나오면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제 보니 효자가 따로 없는 것 같습니다. 부모가 기뻐하는 곳에 관점을 두면 효자입니다. 내가 내 기분으로 효도하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부모가 기뻐하는 일을 하면 그것이 효자거든요.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일까보냐." 하나님이 즐거워하시는 일이 우리에게 기쁨이 됩니다. 기원은 있으나 그저 빼앗듯 취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는 방식으로 치부하고 명예를 세우는 것은 분토와 같습니다. 한 길로 왔다가 일곱 길로 흩어집니다. 여호와를 즐거워하고 여호와 하나님이 기뻐하는 일로 우리의 기쁨을 삼아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즐거워하시는 것보다 우리에게 더 즐거운 일이 없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모든 선한 일에 너희를 온전하게 하사 자기 뜻을 행하게 하시고 그 앞에 즐거운 것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 가운데서 이루시기를 원하노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무궁토록 있을지어다 아멘"(히 13:21). 그리고 오늘 두 번째 본문 바로 앞 구절에 한 번 더 아멘이 나옵니다. "이것들을 증언하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계 22:20). 마라나타입니다.
2. 사도신경의 "아멘"
우리 사도신경에도 "아멘"이 나옵니다. 주기도문에 "아멘"이 나오는 것은 이해되는데, 사도신경에 나오는 것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앞에서 "아멘"은 첫 번째는 화답하는 것이요, 두 번째는 확정하고 확신하는 것이요, 세 번째는 간구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사도신경에서 "아멘"은 두 번째 의미에 가장 가깝습니다. 그러므로 사도신경에서는 확정하고 확신하는 것이 일차적인 의미입니다. 우리가 "아멘" 할 때는 금방 고백한 것이 '확실하다,' '진실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와 함께 첫 번째 의미, 즉 송영의 의미도 있습니다. 특별히 처음 부분에서 삼위일체 고백은 '그러하외다'도 되고 송영도 됩니다. 영광을 올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특별히 "저리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과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살 것을 믿사옵니다"는 '그러하외다'와 '간구'가 동시에 됩니다. 심판은 소망입니다. 우리의 죄 사함이 의인의 심판 가운데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가장 큰 소망이자 위로입니다. 그러므로 그런 것들이 우리에게 간구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바로 이 "아멘"이 다 네 가지 뜻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특별히 두 번째 의미는 두 가지 의미, 즉 확정과 확신이라는 의미를 가지니 말입니다. 즉, 첫째는 송영(영광 올림)이요, 둘째는 객관적 확정이요, 셋째는 주관적 확신이요, 넷째는 간구입니다.
1) 삼위일체 하나님께 대한 송영
"아멘"은 바로 삼위일체 하나님의 계심과 역사하심에 대한 송영을 담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신경하고 "아멘" 할 때는 삼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삼위 하나님은 언제나 함께 계시고 일하시고 존귀와 영광과 위엄 가운데 함께 계십니다. 삼위 하나님께 항상 동일한 예배와 찬양을 돌려야 합니다. 우리가 삼위일체 하나님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찬양하고 고백할 때 그것을 마음에 두고 찬양하고 고백해야 합니다. 그래서 모든 일 가운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계획하신다고 하면 성부께, 하나님이 지혜이시다, 경륜이시다, 뜻이시다 하면 성자께, 하나님이 이루신다 하면 성령께 영광입니다. 물론 이 세 분이 한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계획할 때도 성부 하나님께 영광, 하나님의 지혜와 뜻하심에 대해서도 성자 하나님께 영광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께 동등한 영광을 올립니다. 이것은 바로 성경이 말씀하는 대로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첫 번째 아멘은 송영입니다.
2) 삼위일체 하나님의 존재와 사역에 대한 객관적 확정
그렇다면 사도신경의 두 번째 아멘, 즉 객관적인 확정은 어떨까요? 이것은 하나님이 창조와 구원의 역사를 다 이루었다는 것에 대한 아멘입니다. 객관적으로 확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창조의 모든 역사를 다 이루셨다, 우리는 진화론에 서 있지 않다, 각종 동산의 실과와 각 종류대로 지으셨다는 것을 믿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들을 이 땅에 보내셔서, 마지막 날 지으신 인간과 언약을 맺으셔서 자녀 삼고자 하셨는데 이 언약에 인간이 실패하니,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모든 구원의 역사를, 구약의 절기와 제사의 모든 요구를 다 이루심을 믿는 것이 두 번째 아멘의 의미입니다. 창조주 하나님, 구속주 하나님, 만물을 지으시고 운행하시고 보존하시고 통치하시고 새롭게 하시는 분이요, 그 자신이 아들을 주셔서 죽기까지 내어주시고 그와 함께 모든 것을 주시는(롬 8:30), 다 이루신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백 퍼센트 다 이루심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90% 하고 인간이 10%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류가 아무리 우주를 개발할지라도 창조의 다 이루심에 가닿을 수 없고 인간이 아무리 훌륭하다고 해도 예수의 다 이루심에 한 치도 가닿지 못하는 것입니다. 객관적으로 다 이루심을 확정하는 고백입니다.
3) 삼위일체 하나님의 존재와 사역에 대한 주관적 확신
세 번째, 이렇게 다 이루신 것이 나를 위한 것임을 "아멘" 하는 것입니다. 확신입니다. 나를 위해 잉태되고 나를 위해 나셨고 나를 위해 죽으셨고 나를 위해 부활하셨고 나를 위해 하늘에 오르셨고 나를 위해 보좌에 좌정하사 나를 위해 중보하시고, 나를 위해 때가 되면 다시 오실 것임을 내가 믿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아멘"의 의미입니다. 다윗의 형 일곱이 다 신앙이 좋고 유다 지파로서 가문이 좋았습니다. 그러나 어찌 보면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는 믿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또 다윗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나를 사자의 발톱과 곰의 발톱에서 건져내셨은즉 나를 이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사울이 다윗에게 이르되 가라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기를 원하노라"(삼상 17:37). 이는 다윗이 골리앗에게 나가면서 하는 말입니다. 양치기이던 다윗이 곰에게서도 사자에게서도 보호하신 하나님이 골리앗에게서도 구원해 내시리라는 것을, 그리고 그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으로 믿은 것입니다. 전부 하나님을 믿고 기름 부음 받고 주의 종 되고 싶다고 나섰지만, 아무도 골리앗 앞에 나서지 못할 때 다윗은 나의 하나님으로 믿은 것입니다. 이것이 귀한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 할 때 항상 이것이 귀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전에는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 우리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였도다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딤전 1:13-15). 주의 종은 은혜를 받은 사람이어야 하고 말씀에 서서 그때 그때 지시에 따라야 합니다. 사도 바울의 말이 힘이 있는 것이, 내가 죄인 중의 괴수요, 비방자요 박해자인데, 하나님이 나에게 긍휼을 베푸셔서 나를 능하게 하셨다, 즉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믿었을 때 하나님의 객관적 진리가 선포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우리가 볼 수 있습니다. 다윗의 경우나 바울의 경우, 성경이 다 이렇습니다. 폴리캅도 순교할 때 '하나님이 평생 나를 한 번도 배반하시지 않았는데 내가 어찌 하나님을 배반하겠냐'며 죽었습니다. 우리는 항상 성경을 읽을 때 "그들의" 하나님으로 읽으면 안됩니다. 못난 것도 잘난 것도, 다 내 것이 되어야 합니다. 불평하는 이스라엘을 볼 때 그들의 이야기로 보면 안 되고 내 이야기로 보아야 합니다.
4) 삼위일체 하나님께 대한 기원
마지막으로 기원의 아멘입니다. 그리스도의 몸된 연합체인 교회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자라가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구원하신 하나님이 날마다 우리를 거룩하게 빚어 가십니다. 살아나게 하셨으니 살아가게 하십니다. 그것을 우리가 네 번째 의미, 즉 기원으로 보는 것입니다. 성도의 기원은 한가지인데, 즉 자라감입니다. 머리이신 그리스도께로 자라갑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의를 누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자라가는 것은 누리는 것입니다. 잘 누리는 나무가 가을에 실과를 맺습니다. 성도도 자꾸 뭔가 한다고 하지 마십시오. 잘 누리는 것이 자라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제보다 오늘 더 의지하는 것, "아멘" 가운데 자라가고 아멘의 순종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고후 1:20). 우리 교회도 항상 그렇습니다. 다음의 다섯 가지에서 자라 갑시다. 예배에서 자라 갑니다. 말씀에서 자라 갑시다. 기도에서 자라 갑니다. 고백에서 자라 갑니다. 그리고 헌신에서 자라 갑니다. 주를 위해 나를 드리는 헌신입니다. 이렇게 다섯 가지 자라감이 있습니다. 헌신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하는 것입니다. 주는 것이 복되다고 하셨으니 섬겨야 합니다.
3. 결론
우리는 사도신경에서 "아멘" 하는 것에 네 가지 의미가 있다고 살펴보았습니다. 이 아멘의 네 가지 의미,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것, 객관적으로 그러하다고 하는 확정하는 것, 주관적으로, 나에게 그러하다고 하는 확신하는 것, 마지막으로 하나님께 영광되는 것이 나에게 즐겁다는 소원으로서 간구하는 것이 사도신경의 "아멘"의 의미라고 살펴봤습니다. 사도신경 말씀을 지금까지 열두 번에 걸쳐 살펴보는 기회를 가졌는데, 우리가 고백하는 사도신경이 얼마나 귀한지 다시금 살펴보고 고백할 때마다 이 네 가지를 잘 생각하면서 고백하면 좋겠다는 말씀을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