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1122][십자가지기교회 주일낮예배: 갈라디아서 강해(41): 그리스도의 복음]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 (갈 5:16-18) 문병호 목사
16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17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18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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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취록>
1. 서론
갈라디아서의 대 주제는 예수 그리스도,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복음이요 이것을 전하는 것입니다. 오직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에 이르는데 그 예수가 무슨 일을 행하셨느냐, 십자가에서 저주의 죽음을 죽으신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갈라디아서에서 복음, 믿음, 칭의, 아브라함의 복, 성령, 열매 등을 논하지만 가장 중한 것은 십자가라는 것을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 앞에 밝히 보이거늘"(갈 3:1). 반복해서 말씀을 드리는 내용입니다. 또한 6장 14절은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자랑할 것이 없다고 말씀합니다. 어떻게 십자가를 밝히 보며 그것이 우리의 자랑이 되나요? 그것은 오직 성령이 우리에게 임해야 합니다. 성령이 임하지 않으면 십자가도 보이지 않고 봐도 십자가가 걸림돌이 됩니다. 성령이 임하면 이 십자가가 구원의 능력이 되는데 그렇지 않으면 미련한 것이 됩니다(고전 1:18). 사도 바울은 십자가의 도를 전하는 자들을 잔멸하기 위해 애쓴 청년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빛을 받아 꼬꾸라졌습니다. 세속의 똑똑한 눈은 닫히고 영적인 눈이 열릴 때 십자가를 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의 서신을 읽어보면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종, 십자가에 매인 바 된 종이라는 말을 계속 볼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못 박힘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않기로 작정했다고 고백합니다.
2. 성령이 임해야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얻는다
1) 십자가에 못 박하신 그리스도를 알라
이스라엘 백성은 구약에 456번 메시아에 대한 예언이 나오는데 정작 그들은 예수를 봐도 몰랐습니다. 그러나 보혜사 성령이 임한 자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못합니다. 알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더 귀한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베르나르두스라는 중세 신학자가 있습니다. 그는 십자가와 그리스도 외에는 어떤 말도 향기가 없다고 했습니다. 예수 더 알기 원한다는 찬송도 우리가 부릅니다. 대속해 주신 사랑, 크고도 넓은 은혜를 간절히 알기 원합니다.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고전 1:23). 고린도교회에 분쟁이 많고 분파가 생기고 논란과 다툼이 이어졌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들에게 편지를 쓰면서 가장 처음 하는 말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알기 원하는 것과 그것 외에 다른 것은 알지 않기로 했다는 것입니다.
2) 성령이 임하면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게 된다
성령이 임하면 십자가가 보입니다. 그 자리에 가 있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가 내 살과 피가 되는 것을 믿습니다. 성령이 임하면 십자가를 알게 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그가 못 박히신 십자가만을 알기 원하게 됩니다. 우리는 모두 사도 바울과 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빛에 쏘여 넘어졌다가 다시 눈이 뜨인 사람들입니다. 성령이 임하면 십자가를 알고 전하고 자랑하고 십자가가 능력이 됩니다. 그리고 성령이 임하면 주님이 말씀하신 십자가, 그 멍에를 지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보이지 않습니다. 성령이 임한 사람을 겉으로 봐서 알지 못합니다. 추위도 그렇습니다. 보이지 않습니다. 그저 단풍이 지는 것으로 알게 될 뿐입니다. 사람들의 옷을 보고 알 수 있습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갈 3:27). 그리스도의 옷을 입은 사람은 성령을 받았습니다. 겨울에 코트를 입은 사람을 보면 추위가 온 것을 아는 것처럼 말입니다.
3. 성령이 임하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는다
1) 성령이 임하면 성향이 변한다
성령 받은 여부는 그가 어디로 가는가를 보면 압니다. 교회로 가는가, 세상에 머무는가, 이런 것들을 통해 알게 됩니다. 이전에는 좋던 것이 싫어지는 것도 그 현상입니다. 입맛도 달라지고 귀맛도, 듣는 것도 달라집니다. 이전에는 그렇게 좋았던게 이제는 싫고 오직 말씀이 달콤합니다. 말씀을 들으면 편안하고 말입니다. 무릎도 꿇고 손도 들면서 감사하다고 회개하게 됩니다. 이전에는 이성을 좋아했는데 이제는 은혜의 큰 논리에 잠기게 됩니다. 성령이 임하면 우리 입맛도 귀맛도, 오감도 달라집니다. 믿음의 비밀이 그것입니다. 성령이 임하면 그렇게 됩니다. 콩 심은데 콩 나고 팥 심은데 팥 납니다. 열매를 보면 압니다. 아무리 잎사귀가 거창해도 가을의 열매를 봐야 알곡과 피를 구분하게 됩니다.
2) 성령이 임하면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다
갈라디아서 5장 24절은 말씀합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갈 5:24). 우리가 죽는 것도 못합니다. 아무도 못 죽습니다. 붙이는 것도 못하지만 뜯어내지도 못합니다. 성령이 임하면 그런데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고 합니다. 이전의 내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령이 임하면 죽는데 십자가에서 죽습니다. 십자가에서 죽어야 부활합니다. 어떻게 죽습니까? 주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우리가 그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말씀합니다. 우리 죽음의 터는 십자가입니다. 그곳에서 우리가 스스로 못 죽습니다. 예수가 그 자리에서 죽어서 우리 주 예수께서 죽어서 그의 상한 몸이 그의 찢긴 몸이 생명의 살 길이 되는 것입니다. 어거스틴이 이전의 방탕한 시절 알던 여자를 만났습니다. 그 여자가 어거스틴을 알아보자 그는 자기는 여자를 알아보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그 말인즉슨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는 것입니다. 이전의 나는 그리스도와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것입니다. 성령을 받으면 눈도 귀도 입도 코도 바뀝니다. 우리가 모두 바뀝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룹니다(갈 4:19). 그래서 사도 바울의 기도는 내가 해산하는 수고를 다 하는 것, 즉 우리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 위한 수고를 다하는 것으로 한다는 것입니다. 저 역시 그렇습니다. 우리 성도님들을 위해 할 수 있는 기도가 있다면 본질적으로 그것 하나입니다. 다른 것들은 물론 중요하지만, 본질적으로 부수적인 기도이라는 말입니다.
4. 성령의 인도하심
1) 서로 대립되는 육체의 소욕과 성령의 소욕
성령을 따라 행하라는 말은 영어로 '성령을 따라 걸으라'는 말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있는 그대로 하면 성령을 따라 걸으라는 말이 더 가깝습니다. 성령에 의해서 걸음 걸음을 쫓아가라는 것입니다.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갈 5:17). 우리는 그대로 두면 성령이 앞섭니다. 그러나 성령이 임하면 성령이 우리를 이끌어 갑니다. 구약시대 불기둥, 불기둥으로 이끌어가듯 말입니다. 곧 성령의 임재, 그리스도의 머리에 의해 이끌리는 것입니다. 육체의 소욕과 성령의 소욕은 서로 분명히 거스릅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임한 가장 중요한 표는 자기 부인입니다. 내 것, 육체의 소욕을 그대로 가지고 있고 성령의 소욕도 갖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자기를 부인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합니다. 내가 부인하지 못합니다. 절대 할 수 없습니다. 죽는 것도 내 스스로 할 수 없습니다. 내가 스스로 죽는 죽음은 죽어서는 안 되는 죽음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와 함께 죽으면 제대로 죽는 것입니다. 나를 부인하는 것은 그래서 십자가 아래 못 박혀야 합니다.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을 따라 행하는 것입니다.
2) 성령이 임해야 육체의 욕심이 버려진다
본문 16절을 자세히 보면 육체의 욕심을 먼저 버려 성령을 따라 행하는 것이 아닙니다. 결코 어두움을 버려 빛을 맞이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16절의 순서를 잘 알아야 합니다. 성령이 임하면 불가항력적으로 성령에 이끌려 가고 사도 바울과 같이 불가항력적으로 눈이 멀고 사흘만에 예수의 도를 전하는 자가 됩니다. 사울에서 바울로 바뀌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우리가 준비를 해서 회개를 해서 뉘우쳐서 성령을 받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빛이 우리에게 임하면 어둠이 없어집니다. 육체의 소욕을 없애려 하지 마십시오. 안 됩니다. 성령대로 살려고 하십시오. 우리는 긍정적 신앙입니다. 세상에는 뺄셈하고 남은게 맞다고 합니다. 그러나 성경의 신앙은 빛이 있으라고 하면 있는 것입니다. 성령이 임하면 이전 것은 기억하지 아니하나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이전 것은 언제 어디 갔는지도 모릅니다. 성령이 임하면 그렇습니다. 바로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것, 이것이 성령을 따라 행하는 것인데, 이것이 우리의 노력이 아니라 바로 보혜사 성령이 임하면, 성령이 우리에게 주어지면 우리가 그러한 자리에 서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나 죽으나 주님의 것이라고 고백하게 됩니다(롬 14:8).
3) 자기 부인의 본질은 하나님의 은혜이다
여러분과 저, 모든 세상의 성도님들은 조금 더 그리스도께 가려고 합니다. 조금 더 그의 성품을 닮고자 하고 조금 더 그의 형상으로 빚어지려고 합니다. 우리가 몸부림치고 내가 안된다고 가슴 치고 이런 것은 어떻게 보면 은혜에서는 비본질입니다. 본질은 은혜가 이기네, 믿음이 이기네 입니다. 은혜와 믿음입니다. 십자가의 빛은 무덤을 가르고 죽은 자를 살게 했습니다. 십자가의 빛은 지성소의 휘장을 위에서 아래로 갈랐습니다. 성령이 임하면 우리가 불가항력적으로 바뀝니다. 어떻게 보면 다른 것은 부수적입니다. 성령의 불이 임하면 이전의 것은 다 타버립니다. 종이, 나무, 철, 모든 것이 불에 녹아집니다.
4) 성령을 따라 행함
그 성령이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본문에서 성령이 인도하신다는 말과 성령을 따라 행하라는 말은 그대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를 묘사해 본다면 성령이 이끄시니 우리가 그를 따라 걸어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령을 따라 행하라는 말은 원어로 '페리파테오', 성령을 따라 걸어간다는 의미입니다. 머리는 그리스도이십니다.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디로 갈지 내일 아침은커녕 오늘 밤의 일도 모릅니다. 구름이 한 자리에 몇 십 년 동안 머물기도 했습니다. 구약의 불기둥, 구름기둥은 성령의 임재대로 우리가 따라가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5.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리라"
1) 십자가 아래 있지 않은 것은 율법 아래에 있다
이렇게 성령을 따라 행하는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성령을 따라 행하는 것이 십자가 아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육체의 일은 첫째로 더럽고 둘째로 교만합니다. 17절은 육체의 소욕과 성령의 소욕이 매일 싸운다고 합니다. 육체의 소욕은 편하기 위해 거짓말을 하라고 합니다. 성령의 소욕은 진리를 말하라고 합니다. 거듭나지 않은 것, 육체에 속한 것은 타락하고 더러운 것도 되지만, 갈라디아서에서 더 얘기하려는 것은 거듭나지 않은 것은, 성령에 속하지 않은 것은 자꾸 내가 하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율법 아래 있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시작했다가 육체로 마치겠냐고 3장 3절에서 말한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육체는 다시금 율법 아래로 은혜를 벗어나 들어가는 것입니다. 성령이 임하면 은혜 아래 거합니다.
2) 불가항력적인 임마누엘 성령
성령을 따라서 행하다는 말은 곧 성령의 불가항력적 이끄심을 따라 가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속으로 먼저 들어가 그와 하나 된 자가 전혀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영은 임마누엘의 영입니다. 그리스도께서 하늘 보좌 우편에서 부어 주시는 영입니다. 기도할 때 하나님 속으로 들어가려 합니까? 안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품으셔야 합니다. 우리는 어떻게 보면 하나님 눈에 띄는 것입니다. 양이 목자 앞에 있으면 목자가 양을 안고 초장으로 물가로 데려가듯 말입니다. 보혜사 성령은 그러므로 임마누엘의 영입니다.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 28:20). 보혜사 성령이 임하면 한번 임하면 결코 떠나지 않습니다. 계속 근심하십니다. 세상 끝날까지 항상, 반드시 너희와 함께하신다고 합니다(출 3:12; 요 14:16). 이런 성경구절이 참 좋은 것입니다. '항상, 반드시, 영원히, 너희와 함께, 너희 속에'입니다. 보혜사 성령은 우리를 떠나가시지 않습니다. 임마누엘의 하나님입니다.
3) 성령으로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간다
처녀에게서 나신 그 예수 그리스도, 보혜사 성령이 임하면 진리가 임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디에서 죽고 어디에서 살지 알게 됩니다.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계신 것을 알게 되고 가르치신 것을 알게 되고 깨닫게 됩니다. 무엇보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압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성령이 임하니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알지 않기로 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진리의 영입니다. 예수 외에 진리가 없습니다. 모든 것이 예수를 알아야 압니다. 예수 모르면 다 틀립니다. 예수 모르면 아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모르면 아무것도 모르는 것입니다. 예수 모르는 그 사랑은 사랑도 아닙니다. 예수 모르는 사랑은 사랑도 아닙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영을 받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고 합니다(히 3:1; 12:2).
이 진리의 영이 임하면 아빠 아버지라 부르며 예수의 이름으로 간구합니다. 십자가로 쫓아가는 것입니다. 어제 최 집사님 집을 심방하면서 십자가의 멍에가 우리의 보호처라고 말했습니다. 거북이의 껍질이 멍에처럼 보이나 거북이를 보호하듯 말입니다. 어떻게 보면 멍에가 힘들어 보입니다. 십자가의 멍에가 우리의 보호막이고 껍질입니다. 그 안에서 우리가 예배도 드리고 기도도 드리고 영적 양식도 먹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의지합니다.
6. 그리스도 안에서 삶
1) 그리스도를 믿음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행하리니"(요 14:13, 14). 예수 그리스도의 영입니다. 성령은 그리스도가 내 안에 들어오는 영입니다. 갈라디아서에서는 십자가를 강조하되 성령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령이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고 성령을 우리에게 주셔서 성령과 함께 살게 하십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아직까지 우리가 육체 가운데 있습니다. 그러나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 안에 사는 것입니다. 성령이 임하면 그리스도와 함께 내가 못 박힙니다. 좁은 길 좁은 문은 십자가의 길입니다. 십자가의 나무 길, 좁은 길로 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거기에서 찢겨진 그리스도의 살 속으로 지성소의 문이 열립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너무 감사합니다. 이것이 바로 부활의 못 박힘, 생명의 못 박힘입니다.
2) 그리스도가 내 안에 사심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시는 것입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사는 것이니 그 길을 내가 걷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그리스도가 걸으시는 것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나'를 주어로 하지 말아야 합니다. 끝내 기도는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하면서 하나님 편으로 모든 것을 가져가는 것입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닙니다. 은유이고 비유가 아닙니다. 실제고 사실입니다. 성령이 임하면 이제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사십니다. 무엇을 하듯 십자가에 얹어 놔야 합니다. 십자가의 길로 가야 합니다. 다른 건 다 무가치합니다. 내 사업을 십자가에 올려놔야 합니다. 학업도 십자가에 기도도 십자가 위에 올려놔야 합니다. 내가 사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사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내 안에 내가 그리스도 안에 하나가 돼서 사는데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사는 것입니다. 이제는 이런 믿음 안에 살아가는 것입니다.
3) 성령이 임하면 하나님이 나의 주어가 되신다
믿음은 사실 너무나 명료하여 뒷전으로 밀립니다. 내가 똑똑하고 내가 하니 그렇습니다. 그러나 성령이 임하면, 마지막까지 기도하는 것은 내가 주어가 되지 않기 위해 기도하는 것입니다. 기도는 마지막 깊이까지 들어가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듣는 것입니다. 기도는 본질상 '아멘' 입니다. 왜요, 내가 사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기도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사니까 '도와주세요', 내가 하니까 '해주세요' 하는 것이 아닙니다. 본질은 하나님께 듣고 하나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성령이 임하면 우리 주님께서 니고데모에게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다고 하신 것처럼, 사마리아 여인에게 갈하지 않는 생수요 영과 진리로 에배드린다고 하신 것처럼, 증거하는 것이 물과 성령과 피라고 하신 것처럼(요일 5:8) 성령이 임하면 우리가 다 준비됩니다. 물과 성령이라고 하신 것은 깨끗해져야, 성령이 임하면 깨끗해져야 하나님이 쓰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4) 삼위일체 하나님의 영의 역사
올해 초부터 여호와 삼마, 여호와가 거기 계시다라는 것을 생각하기로 했습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영을 받습니다. 성부가 우리 안에 계심으로 우리가 자녀가 되고, 성자가 우리 안에 계시므로 우리가 그의 신부가 되고, 성령이 우리 안에 임하시고 우리 안에 계시므로 우리가 열매를 맺습니다(갈 5:22). 우리가 자녀가 되고 신부가 되고 성령의 열매를 맺는 것이 모두 삼위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심으로 말미암습니다. 우리가 영의 소욕을 따라야 하고 영의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성령의 임하심이 우리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자꾸 뭔가 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행위도 부담이 아닙니다. 끌려가는 것입니다. 나무가 뭔가 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저 바람에 비에 끌려갈 뿐입니다. 성령을 우리에게 주시고 우리가 성령을 받은 것이 육체와 율법의 행위가 아닙니다.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이 율법의 행위로냐 혹은 듣고 믿음으로냐"(갈 3:2), "너희에게 성령을 주시고 너희 가운데서 능력을 행하시는 이의 일이 율법의 행위에서냐 혹은 듣고 믿음에서냐"(갈 3:5).
7. 내가 앞서지 말고 하나님의 은혜를 따르라
우리는 하나님의 영을 받았습니다. 성령을 받아서 하나님의 열매를 모두 다 맺습니다. 성령의 열매를 다음에 우리가 보겠지만, 그 모든 열매의 맛을 우리가 냅니다. 말하려고도 행하려고도 구하려고도 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탄식하게 하십시오. 하나님이 행하게 하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이 외치게 하십시오. 사가랴가 입이 막혔듯, 우리 예수님이 가장 큰 소리, 다 이루었다는 소리를 거의 혀가 천정에 붙어서 하셨습니다. 우리가 행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행하십니다. 구하는 것조차도 성령이 친히 탄식하여 하십니다. 달리 말하면 진정 원하십시오.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갈 6:17). 우리가 원하는 것이 뭘까요? 성령이 행하시는 것입니다.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시는 것, 그리스도가 원하는 것을 육체가 못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진정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한다고 했습니다.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롬 7:22). 진정 원하는 것을 구하십시오. 그러나 진정 원하는 것은 은혜 받는 것입니다. 우리가 은혜 받아야 날개가 달리고 멀리 보고 신령한 것을 먹습니다.
제가 기도하지 마라 구하지 마라 외치지 마라고 하니 문자 그대로 받지 마십시오. 외치라는 말입니다. 입을 닫고 외치라는 말입니다. 성전의 그룹과 같이 날개로 가리고 외치라는 말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가장 크게 외칠 때 입이 닫히고 외칩니다. 우리는 십자가의 길이 가장 좁지만 가장 넓은 길입니다. 그 길이 시온의 대로입니다.
오늘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 교회에 하는 말이 그것입니다. 갈라디아 사람들이 복음을 일찍 받고 칭찬을 받을 만합니다. 그런데 그들이 자꾸 율법으로 자신의 삶으로, 행위로, 넓은 길로 가려고 합니다. 내가 원하는 것을 하나님도 원하신다는 확신의 기도, 이것이 믿음의 기도입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그것입니다. 내가 지금 간구하는 것을 하나님도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될 때 하나님이 행하시고 하나님이 나를 들어 사용하십니다. 그것이 바로 아직 육체가 있되 내가 행하는 것이 아니요 믿음으로, 나를 위해 자기 자신을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으로 행하는 것의 의미입니다(갈 2:20).
8. 결론
성령이 우리 안에서 역사해서, 우리가 신령한 시와 찬미, 예배를 하나님께 드리고, 성령의 이끄심을 받아 동행하고 성령의 이끄심으로 우리가 십자가에 못 박히고, 자녀 삼고 신부 삼고 열매 맺게 하시는 그 삶을 많이 '아멘' 했습니다. 그러나 두려운 것은 성령으로 시작했다가 육체로 마치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맡기십시오. '눕자', '졸자', '자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끊임없이 하나님의 은혜에 맡기고 그 장중에 붙들릴 때 우리가 다윗과 같이 크게 사용될 것입니다.
[20201122][십자가지기교회 주일낮예배: 갈라디아서 강해(41): 그리스도의 복음]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 (갈 5:16-18) 문병호 목사
16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17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18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리라
*음성파일: 게시물 하단 "관련링크"에서 청취 혹은 내려받기 가능합니다.
<녹취록>
1. 서론
갈라디아서의 대 주제는 예수 그리스도,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복음이요 이것을 전하는 것입니다. 오직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에 이르는데 그 예수가 무슨 일을 행하셨느냐, 십자가에서 저주의 죽음을 죽으신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갈라디아서에서 복음, 믿음, 칭의, 아브라함의 복, 성령, 열매 등을 논하지만 가장 중한 것은 십자가라는 것을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 앞에 밝히 보이거늘"(갈 3:1). 반복해서 말씀을 드리는 내용입니다. 또한 6장 14절은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자랑할 것이 없다고 말씀합니다. 어떻게 십자가를 밝히 보며 그것이 우리의 자랑이 되나요? 그것은 오직 성령이 우리에게 임해야 합니다. 성령이 임하지 않으면 십자가도 보이지 않고 봐도 십자가가 걸림돌이 됩니다. 성령이 임하면 이 십자가가 구원의 능력이 되는데 그렇지 않으면 미련한 것이 됩니다(고전 1:18). 사도 바울은 십자가의 도를 전하는 자들을 잔멸하기 위해 애쓴 청년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빛을 받아 꼬꾸라졌습니다. 세속의 똑똑한 눈은 닫히고 영적인 눈이 열릴 때 십자가를 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의 서신을 읽어보면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종, 십자가에 매인 바 된 종이라는 말을 계속 볼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못 박힘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않기로 작정했다고 고백합니다.
2. 성령이 임해야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얻는다
1) 십자가에 못 박하신 그리스도를 알라
이스라엘 백성은 구약에 456번 메시아에 대한 예언이 나오는데 정작 그들은 예수를 봐도 몰랐습니다. 그러나 보혜사 성령이 임한 자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못합니다. 알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더 귀한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베르나르두스라는 중세 신학자가 있습니다. 그는 십자가와 그리스도 외에는 어떤 말도 향기가 없다고 했습니다. 예수 더 알기 원한다는 찬송도 우리가 부릅니다. 대속해 주신 사랑, 크고도 넓은 은혜를 간절히 알기 원합니다.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고전 1:23). 고린도교회에 분쟁이 많고 분파가 생기고 논란과 다툼이 이어졌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들에게 편지를 쓰면서 가장 처음 하는 말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알기 원하는 것과 그것 외에 다른 것은 알지 않기로 했다는 것입니다.
2) 성령이 임하면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게 된다
성령이 임하면 십자가가 보입니다. 그 자리에 가 있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가 내 살과 피가 되는 것을 믿습니다. 성령이 임하면 십자가를 알게 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그가 못 박히신 십자가만을 알기 원하게 됩니다. 우리는 모두 사도 바울과 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빛에 쏘여 넘어졌다가 다시 눈이 뜨인 사람들입니다. 성령이 임하면 십자가를 알고 전하고 자랑하고 십자가가 능력이 됩니다. 그리고 성령이 임하면 주님이 말씀하신 십자가, 그 멍에를 지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보이지 않습니다. 성령이 임한 사람을 겉으로 봐서 알지 못합니다. 추위도 그렇습니다. 보이지 않습니다. 그저 단풍이 지는 것으로 알게 될 뿐입니다. 사람들의 옷을 보고 알 수 있습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갈 3:27). 그리스도의 옷을 입은 사람은 성령을 받았습니다. 겨울에 코트를 입은 사람을 보면 추위가 온 것을 아는 것처럼 말입니다.
3. 성령이 임하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는다
1) 성령이 임하면 성향이 변한다
성령 받은 여부는 그가 어디로 가는가를 보면 압니다. 교회로 가는가, 세상에 머무는가, 이런 것들을 통해 알게 됩니다. 이전에는 좋던 것이 싫어지는 것도 그 현상입니다. 입맛도 달라지고 귀맛도, 듣는 것도 달라집니다. 이전에는 그렇게 좋았던게 이제는 싫고 오직 말씀이 달콤합니다. 말씀을 들으면 편안하고 말입니다. 무릎도 꿇고 손도 들면서 감사하다고 회개하게 됩니다. 이전에는 이성을 좋아했는데 이제는 은혜의 큰 논리에 잠기게 됩니다. 성령이 임하면 우리 입맛도 귀맛도, 오감도 달라집니다. 믿음의 비밀이 그것입니다. 성령이 임하면 그렇게 됩니다. 콩 심은데 콩 나고 팥 심은데 팥 납니다. 열매를 보면 압니다. 아무리 잎사귀가 거창해도 가을의 열매를 봐야 알곡과 피를 구분하게 됩니다.
2) 성령이 임하면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다
갈라디아서 5장 24절은 말씀합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갈 5:24). 우리가 죽는 것도 못합니다. 아무도 못 죽습니다. 붙이는 것도 못하지만 뜯어내지도 못합니다. 성령이 임하면 그런데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고 합니다. 이전의 내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령이 임하면 죽는데 십자가에서 죽습니다. 십자가에서 죽어야 부활합니다. 어떻게 죽습니까? 주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우리가 그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말씀합니다. 우리 죽음의 터는 십자가입니다. 그곳에서 우리가 스스로 못 죽습니다. 예수가 그 자리에서 죽어서 우리 주 예수께서 죽어서 그의 상한 몸이 그의 찢긴 몸이 생명의 살 길이 되는 것입니다. 어거스틴이 이전의 방탕한 시절 알던 여자를 만났습니다. 그 여자가 어거스틴을 알아보자 그는 자기는 여자를 알아보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그 말인즉슨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는 것입니다. 이전의 나는 그리스도와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것입니다. 성령을 받으면 눈도 귀도 입도 코도 바뀝니다. 우리가 모두 바뀝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룹니다(갈 4:19). 그래서 사도 바울의 기도는 내가 해산하는 수고를 다 하는 것, 즉 우리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 위한 수고를 다하는 것으로 한다는 것입니다. 저 역시 그렇습니다. 우리 성도님들을 위해 할 수 있는 기도가 있다면 본질적으로 그것 하나입니다. 다른 것들은 물론 중요하지만, 본질적으로 부수적인 기도이라는 말입니다.
4. 성령의 인도하심
1) 서로 대립되는 육체의 소욕과 성령의 소욕
성령을 따라 행하라는 말은 영어로 '성령을 따라 걸으라'는 말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있는 그대로 하면 성령을 따라 걸으라는 말이 더 가깝습니다. 성령에 의해서 걸음 걸음을 쫓아가라는 것입니다.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갈 5:17). 우리는 그대로 두면 성령이 앞섭니다. 그러나 성령이 임하면 성령이 우리를 이끌어 갑니다. 구약시대 불기둥, 불기둥으로 이끌어가듯 말입니다. 곧 성령의 임재, 그리스도의 머리에 의해 이끌리는 것입니다. 육체의 소욕과 성령의 소욕은 서로 분명히 거스릅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임한 가장 중요한 표는 자기 부인입니다. 내 것, 육체의 소욕을 그대로 가지고 있고 성령의 소욕도 갖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자기를 부인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합니다. 내가 부인하지 못합니다. 절대 할 수 없습니다. 죽는 것도 내 스스로 할 수 없습니다. 내가 스스로 죽는 죽음은 죽어서는 안 되는 죽음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와 함께 죽으면 제대로 죽는 것입니다. 나를 부인하는 것은 그래서 십자가 아래 못 박혀야 합니다.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을 따라 행하는 것입니다.
2) 성령이 임해야 육체의 욕심이 버려진다
본문 16절을 자세히 보면 육체의 욕심을 먼저 버려 성령을 따라 행하는 것이 아닙니다. 결코 어두움을 버려 빛을 맞이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16절의 순서를 잘 알아야 합니다. 성령이 임하면 불가항력적으로 성령에 이끌려 가고 사도 바울과 같이 불가항력적으로 눈이 멀고 사흘만에 예수의 도를 전하는 자가 됩니다. 사울에서 바울로 바뀌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우리가 준비를 해서 회개를 해서 뉘우쳐서 성령을 받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빛이 우리에게 임하면 어둠이 없어집니다. 육체의 소욕을 없애려 하지 마십시오. 안 됩니다. 성령대로 살려고 하십시오. 우리는 긍정적 신앙입니다. 세상에는 뺄셈하고 남은게 맞다고 합니다. 그러나 성경의 신앙은 빛이 있으라고 하면 있는 것입니다. 성령이 임하면 이전 것은 기억하지 아니하나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이전 것은 언제 어디 갔는지도 모릅니다. 성령이 임하면 그렇습니다. 바로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것, 이것이 성령을 따라 행하는 것인데, 이것이 우리의 노력이 아니라 바로 보혜사 성령이 임하면, 성령이 우리에게 주어지면 우리가 그러한 자리에 서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나 죽으나 주님의 것이라고 고백하게 됩니다(롬 14:8).
3) 자기 부인의 본질은 하나님의 은혜이다
여러분과 저, 모든 세상의 성도님들은 조금 더 그리스도께 가려고 합니다. 조금 더 그의 성품을 닮고자 하고 조금 더 그의 형상으로 빚어지려고 합니다. 우리가 몸부림치고 내가 안된다고 가슴 치고 이런 것은 어떻게 보면 은혜에서는 비본질입니다. 본질은 은혜가 이기네, 믿음이 이기네 입니다. 은혜와 믿음입니다. 십자가의 빛은 무덤을 가르고 죽은 자를 살게 했습니다. 십자가의 빛은 지성소의 휘장을 위에서 아래로 갈랐습니다. 성령이 임하면 우리가 불가항력적으로 바뀝니다. 어떻게 보면 다른 것은 부수적입니다. 성령의 불이 임하면 이전의 것은 다 타버립니다. 종이, 나무, 철, 모든 것이 불에 녹아집니다.
4) 성령을 따라 행함
그 성령이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본문에서 성령이 인도하신다는 말과 성령을 따라 행하라는 말은 그대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를 묘사해 본다면 성령이 이끄시니 우리가 그를 따라 걸어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령을 따라 행하라는 말은 원어로 '페리파테오', 성령을 따라 걸어간다는 의미입니다. 머리는 그리스도이십니다.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디로 갈지 내일 아침은커녕 오늘 밤의 일도 모릅니다. 구름이 한 자리에 몇 십 년 동안 머물기도 했습니다. 구약의 불기둥, 구름기둥은 성령의 임재대로 우리가 따라가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5.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리라"
1) 십자가 아래 있지 않은 것은 율법 아래에 있다
이렇게 성령을 따라 행하는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성령을 따라 행하는 것이 십자가 아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육체의 일은 첫째로 더럽고 둘째로 교만합니다. 17절은 육체의 소욕과 성령의 소욕이 매일 싸운다고 합니다. 육체의 소욕은 편하기 위해 거짓말을 하라고 합니다. 성령의 소욕은 진리를 말하라고 합니다. 거듭나지 않은 것, 육체에 속한 것은 타락하고 더러운 것도 되지만, 갈라디아서에서 더 얘기하려는 것은 거듭나지 않은 것은, 성령에 속하지 않은 것은 자꾸 내가 하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율법 아래 있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시작했다가 육체로 마치겠냐고 3장 3절에서 말한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육체는 다시금 율법 아래로 은혜를 벗어나 들어가는 것입니다. 성령이 임하면 은혜 아래 거합니다.
2) 불가항력적인 임마누엘 성령
성령을 따라서 행하다는 말은 곧 성령의 불가항력적 이끄심을 따라 가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속으로 먼저 들어가 그와 하나 된 자가 전혀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영은 임마누엘의 영입니다. 그리스도께서 하늘 보좌 우편에서 부어 주시는 영입니다. 기도할 때 하나님 속으로 들어가려 합니까? 안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품으셔야 합니다. 우리는 어떻게 보면 하나님 눈에 띄는 것입니다. 양이 목자 앞에 있으면 목자가 양을 안고 초장으로 물가로 데려가듯 말입니다. 보혜사 성령은 그러므로 임마누엘의 영입니다.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 28:20). 보혜사 성령이 임하면 한번 임하면 결코 떠나지 않습니다. 계속 근심하십니다. 세상 끝날까지 항상, 반드시 너희와 함께하신다고 합니다(출 3:12; 요 14:16). 이런 성경구절이 참 좋은 것입니다. '항상, 반드시, 영원히, 너희와 함께, 너희 속에'입니다. 보혜사 성령은 우리를 떠나가시지 않습니다. 임마누엘의 하나님입니다.
3) 성령으로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간다
처녀에게서 나신 그 예수 그리스도, 보혜사 성령이 임하면 진리가 임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디에서 죽고 어디에서 살지 알게 됩니다.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계신 것을 알게 되고 가르치신 것을 알게 되고 깨닫게 됩니다. 무엇보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압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성령이 임하니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알지 않기로 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진리의 영입니다. 예수 외에 진리가 없습니다. 모든 것이 예수를 알아야 압니다. 예수 모르면 다 틀립니다. 예수 모르면 아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모르면 아무것도 모르는 것입니다. 예수 모르는 그 사랑은 사랑도 아닙니다. 예수 모르는 사랑은 사랑도 아닙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영을 받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고 합니다(히 3:1; 12:2).
이 진리의 영이 임하면 아빠 아버지라 부르며 예수의 이름으로 간구합니다. 십자가로 쫓아가는 것입니다. 어제 최 집사님 집을 심방하면서 십자가의 멍에가 우리의 보호처라고 말했습니다. 거북이의 껍질이 멍에처럼 보이나 거북이를 보호하듯 말입니다. 어떻게 보면 멍에가 힘들어 보입니다. 십자가의 멍에가 우리의 보호막이고 껍질입니다. 그 안에서 우리가 예배도 드리고 기도도 드리고 영적 양식도 먹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의지합니다.
6. 그리스도 안에서 삶
1) 그리스도를 믿음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행하리니"(요 14:13, 14). 예수 그리스도의 영입니다. 성령은 그리스도가 내 안에 들어오는 영입니다. 갈라디아서에서는 십자가를 강조하되 성령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령이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고 성령을 우리에게 주셔서 성령과 함께 살게 하십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아직까지 우리가 육체 가운데 있습니다. 그러나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 안에 사는 것입니다. 성령이 임하면 그리스도와 함께 내가 못 박힙니다. 좁은 길 좁은 문은 십자가의 길입니다. 십자가의 나무 길, 좁은 길로 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거기에서 찢겨진 그리스도의 살 속으로 지성소의 문이 열립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너무 감사합니다. 이것이 바로 부활의 못 박힘, 생명의 못 박힘입니다.
2) 그리스도가 내 안에 사심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시는 것입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사는 것이니 그 길을 내가 걷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그리스도가 걸으시는 것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나'를 주어로 하지 말아야 합니다. 끝내 기도는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하면서 하나님 편으로 모든 것을 가져가는 것입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닙니다. 은유이고 비유가 아닙니다. 실제고 사실입니다. 성령이 임하면 이제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사십니다. 무엇을 하듯 십자가에 얹어 놔야 합니다. 십자가의 길로 가야 합니다. 다른 건 다 무가치합니다. 내 사업을 십자가에 올려놔야 합니다. 학업도 십자가에 기도도 십자가 위에 올려놔야 합니다. 내가 사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사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내 안에 내가 그리스도 안에 하나가 돼서 사는데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사는 것입니다. 이제는 이런 믿음 안에 살아가는 것입니다.
3) 성령이 임하면 하나님이 나의 주어가 되신다
믿음은 사실 너무나 명료하여 뒷전으로 밀립니다. 내가 똑똑하고 내가 하니 그렇습니다. 그러나 성령이 임하면, 마지막까지 기도하는 것은 내가 주어가 되지 않기 위해 기도하는 것입니다. 기도는 마지막 깊이까지 들어가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듣는 것입니다. 기도는 본질상 '아멘' 입니다. 왜요, 내가 사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기도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사니까 '도와주세요', 내가 하니까 '해주세요' 하는 것이 아닙니다. 본질은 하나님께 듣고 하나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성령이 임하면 우리 주님께서 니고데모에게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다고 하신 것처럼, 사마리아 여인에게 갈하지 않는 생수요 영과 진리로 에배드린다고 하신 것처럼, 증거하는 것이 물과 성령과 피라고 하신 것처럼(요일 5:8) 성령이 임하면 우리가 다 준비됩니다. 물과 성령이라고 하신 것은 깨끗해져야, 성령이 임하면 깨끗해져야 하나님이 쓰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4) 삼위일체 하나님의 영의 역사
올해 초부터 여호와 삼마, 여호와가 거기 계시다라는 것을 생각하기로 했습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영을 받습니다. 성부가 우리 안에 계심으로 우리가 자녀가 되고, 성자가 우리 안에 계시므로 우리가 그의 신부가 되고, 성령이 우리 안에 임하시고 우리 안에 계시므로 우리가 열매를 맺습니다(갈 5:22). 우리가 자녀가 되고 신부가 되고 성령의 열매를 맺는 것이 모두 삼위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심으로 말미암습니다. 우리가 영의 소욕을 따라야 하고 영의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성령의 임하심이 우리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자꾸 뭔가 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행위도 부담이 아닙니다. 끌려가는 것입니다. 나무가 뭔가 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저 바람에 비에 끌려갈 뿐입니다. 성령을 우리에게 주시고 우리가 성령을 받은 것이 육체와 율법의 행위가 아닙니다.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이 율법의 행위로냐 혹은 듣고 믿음으로냐"(갈 3:2), "너희에게 성령을 주시고 너희 가운데서 능력을 행하시는 이의 일이 율법의 행위에서냐 혹은 듣고 믿음에서냐"(갈 3:5).
7. 내가 앞서지 말고 하나님의 은혜를 따르라
우리는 하나님의 영을 받았습니다. 성령을 받아서 하나님의 열매를 모두 다 맺습니다. 성령의 열매를 다음에 우리가 보겠지만, 그 모든 열매의 맛을 우리가 냅니다. 말하려고도 행하려고도 구하려고도 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탄식하게 하십시오. 하나님이 행하게 하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이 외치게 하십시오. 사가랴가 입이 막혔듯, 우리 예수님이 가장 큰 소리, 다 이루었다는 소리를 거의 혀가 천정에 붙어서 하셨습니다. 우리가 행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행하십니다. 구하는 것조차도 성령이 친히 탄식하여 하십니다. 달리 말하면 진정 원하십시오.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갈 6:17). 우리가 원하는 것이 뭘까요? 성령이 행하시는 것입니다.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시는 것, 그리스도가 원하는 것을 육체가 못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진정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한다고 했습니다.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롬 7:22). 진정 원하는 것을 구하십시오. 그러나 진정 원하는 것은 은혜 받는 것입니다. 우리가 은혜 받아야 날개가 달리고 멀리 보고 신령한 것을 먹습니다.
제가 기도하지 마라 구하지 마라 외치지 마라고 하니 문자 그대로 받지 마십시오. 외치라는 말입니다. 입을 닫고 외치라는 말입니다. 성전의 그룹과 같이 날개로 가리고 외치라는 말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가장 크게 외칠 때 입이 닫히고 외칩니다. 우리는 십자가의 길이 가장 좁지만 가장 넓은 길입니다. 그 길이 시온의 대로입니다.
오늘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 교회에 하는 말이 그것입니다. 갈라디아 사람들이 복음을 일찍 받고 칭찬을 받을 만합니다. 그런데 그들이 자꾸 율법으로 자신의 삶으로, 행위로, 넓은 길로 가려고 합니다. 내가 원하는 것을 하나님도 원하신다는 확신의 기도, 이것이 믿음의 기도입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그것입니다. 내가 지금 간구하는 것을 하나님도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될 때 하나님이 행하시고 하나님이 나를 들어 사용하십니다. 그것이 바로 아직 육체가 있되 내가 행하는 것이 아니요 믿음으로, 나를 위해 자기 자신을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으로 행하는 것의 의미입니다(갈 2:20).
8. 결론
성령이 우리 안에서 역사해서, 우리가 신령한 시와 찬미, 예배를 하나님께 드리고, 성령의 이끄심을 받아 동행하고 성령의 이끄심으로 우리가 십자가에 못 박히고, 자녀 삼고 신부 삼고 열매 맺게 하시는 그 삶을 많이 '아멘' 했습니다. 그러나 두려운 것은 성령으로 시작했다가 육체로 마치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맡기십시오. '눕자', '졸자', '자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끊임없이 하나님의 은혜에 맡기고 그 장중에 붙들릴 때 우리가 다윗과 같이 크게 사용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