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1129][십자가지기교회 주일낮예배: 갈라디아서 강해(42): 그리스도의 복음] 육체의 일과 성령의 일 (1) (갈 5:19-23) 문병호 목사
19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20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21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22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23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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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취록>
1. 성령의 소욕
1) 애통함
날이 많이 추워졌습니다. 이런 시기 몸은 움츠러들어도 마음은 하나님께 더욱 붙들림이 있습니다. 성령이 우리에게 임하면 성령의 충만함으로 변화와 거듭남이 있습니다. 하지만 성령이 우리에게 임할 때 필히 우리 안에는 갈등이 일어납니다. 성령이 임하여 거듭나되 완전하지 않으므로 날마다 육체의 소욕과 성령이 서로 거스르고 다투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래서 더욱 몸부림치게 되는 부분이 있고 애통하는 것이 있습니다. 애통은 하나님의 은혜와 나의 연약함이 부딪치는 것입니다. 울며 눈물로 씨를 뿌리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의 모습입니다.
2) 원함과 간구
지난 주 17절은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서로 대적한다고 이야기합니다. 이 두 가지가 우리 안에서 일어납니다. 우리 안은 어떻게 보면 전쟁터입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성령이며, 성령이 원하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 안에는 그리스도가 사시므로 성령이 우리 안에서 원하는 것, 거듭난 우리가 원하는 것, 성령의 소욕이 생깁니다. 성령이 임하면 말씀의 감화가 생기고 말씀의 감화가 생기면 우리 안에 원하는 것이 생깁니다. 그것이 성령의 소욕, 내적 정서라고 합니다. 우리 안에 감동과 함께 움직임이 있는데 그것이 전체적으로 거룩한 소욕인 것입니다. 우리 안에 원하는 것이 생깁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원하는 것이 생깁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자 하는 원함이 생깁니다. 우리의 제1 가치관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사는 것,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자 하는 것이 됩니다. 우리가 감 하나도 따기 어려운데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어떻게 이룹니까.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를 간구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룬다는 말은 그러므로 겟세마네 기도와 같이 '아버지의 뜻을 이루소서, 원대로 하옵소서' 하며 은혜를 구하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거룩한 성령의 소욕이 생기면 은혜를 구하게 되고 은혜를 베푸시면 영광의 도구가 되는 것입니다.
3) 성령이 임하면
성령의 소욕은 거듭난 것입니다. 자연적으로 타고 나는 것이 아닙니다. 많이 배웠다고 가지는 것도 아닙니다. 성령이 임하면 거듭난 영의 정서가 생깁니다. 그 가운데 평안하게 되고 잠잠하고 담대하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갈렙과 같이 나서게 됩니다. 담대함으로 나서는데 그것은 은혜를 구하므로 그런 것이지 자질을 구하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닙니다. '애통하며 회개하는 마음을 충만하게 하소서', 이런 찬송의 가사와 같이 우리가 나아가는 것입니다.
4)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
지난주 봤던 18절,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성령을 따라 걷는데, 성령님이 이끄시는 바가 되면, 구약의 용어로 하면 구름 기둥, 불 기둥의 인도를 받게 되면, 18절에, 율법 아래 있지 않게 된다고 합니다. 성령이 임하면 능력이 임합니다. 그러나 그 질서는 은혜인 것입니다. 성령이 임하면 은혜가 우리 안에 역사합니다. 그래서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다고 얘기하는 것입니다. 성령이 임한 것은 애통함입니다. 은혜를 구하는 것입니다. 나는 할 수 없다고 말입니다. 그때 그것이 바로 눈물입니다. 성령이 임한다고 힘이 생기고 강해지는 것이 아니라 바짝 엎드려 울게 되는 것입니다. 내 마음의 원함이 있는데, 성령의 소욕이 있는데, '그 고난의 잔을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하는 애통함이 생기는 것입니다. 내가 잘 믿는 것 같은 때가 있습니다. 기분이 좋을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바짝 엎드리십시오. 아무것도 없을 때, 몸을 움찔할 힘조차 없을 때 하나님이 살리시고 함께 앉히십니다. 그래서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이나 공로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십자가 아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성령이 임하면 우리가 성령의 이끌림을 받는 의의 종이 되는 것입니다.
2. 육체의 일과 성령의 열매
본문 말씀을 이번주 다음주 두 번에 걸쳐 살펴보려고 합니다. 본문은 두 가지 일을 대비시키고 있습니다. 19절은 육체의 일을 열다섯 가지 나열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22절 성령의 열매를 아홉 가지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육체의 일과 성령의 열매인데, 먼저 기억할 것은 육체의 일은 복수로 썼습니다. 그리고 성령의 열매는 단수로 썼습니다. 그리고 육체의 일은 열다섯 가지를 이야기했으나 21절 본문은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고 해서 열다섯 가지에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더 많다, 끝도 없다고 표현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사실상 끝이 없는 것입니다. 죄는 하나님이 만드신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만든 것입니다. 다른 모든 것은 하나님이 만드셨으나 죄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죄는 언제 어떤 일로 생길지, 그 현상은 끝이 없습니다. 계속 생깁니다. 그래서 복수로 썼으나 실상은 끝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의 열매는, 성령의 역사가 다양하고 풍성함에도 불구하고, 한 영, 한 주, 한 은혜, 한 그리스도의 의를 이야기하므로 오직 성령의 열매라고 단수로 말씀했다고 봐도 되겠습니다.
또한 육체의 일은 분명하다고 합니다. 이 말은 모든 타락한 인류가 보편적으로 피할 수 없이 가지고 있는 것임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육체의 일은 분명하다는 것은 가시와 같이 자기 주장, 자기 판단, 자기애를 가지고 꼭 잡고 놓지 않는 것을 의미합니다. 누구에게나 피할 수 없는 것이고 누구든지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애, 자기 주장, 자질 등이 그런 것입니다. 모두가 다 자기가 잘났다고 합니다. 십자가 위에 내 생각도 학식도 직장도 얹어 놔야 합니다. 그러나 다 자기중심적입니다. 그러나 성령의 열매는 택함 받은 사람에게만 주어집니다. 은밀한 가운데 기도하고 받아 누리는 비밀입니다. 성령의 열매는 비밀스러운 역사입니다. 내가 주장해서 사랑하고 오래 참는 것이 아닙니다. 비밀입니다. 그리고 성령의 열매는 움켜쥐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부인하는 것입니다. 무명한듯 하나 유명합니다. 이름이 없는 듯 하나 하늘나라에 이름이 새겨져 있습니다. 성령의 열매는 누구에게 어떤 은사가 있다는 식으로 분명히 드러나지 않습니다. 하늘 아버지를 우리가 섬기고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 가운데 자기를 부인하고 겸손히 나가는 것이 바로 성령의 열매입니다. 성령의 열매에 대해서는 다음주에 더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3. 타락으로 인하여 부패한 육체의 일
육체에 속한 것은 다 무능하고 부패한 것입니다. 육체에 속했다고 할 때 영혼은 고상하고 육체는 저급하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영혼과 육체라고 해도 됩니다. 영육간의 삶으로 이 지상에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거듭나지 않은 것, 타락한 인류 가운데 일어나는 모든 일은 육체의 일입니다. 아담은 하나님이 순전하게 지었으나 순전함을 타락으로 말미암아 잃어버렸습니다. 그러므로 육체의 일이라는 것은 타락한 인류에 속한 모든 것이 육체의 일입니다. 전부 죄입니다. 전부 자의적이고 무분별하고 무질서하고 예측할 수 없습니다. 어릴 때 분명히 사필귀정이라는 말을 배웠습니다. 그런데 위인전을 읽으니 그렇지 않은 것입니다. 이순신 장군이 왜 그렇게 죽어야 하는지 의문이 생겼습니다. 하박국 선지자가 주님 앞에 서서 질문했듯 왜 악인은 흥하고 주의 백성은 힘든지 말입니다. 세상의 일은 무질서하고 맹목적이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요즘 학생들도 입시를 하는데 지금은 이것이 최고라고 해도 10년이 지나면 완전히 관점이 바뀔 수도 있습니다. 육체에 속한 것은 전부 예측할 수 없습니다. 그것에 소망을 두었다가는 전부 실망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조금 더 속이고 약삭 빨라야 한다는 것이 세상의 이치처럼 회자되는 것입니다. 육체의 일이라는 것이 바로 그런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 정, 의를 주셨는데 이제 타락한 인류는 아는 것도 느끼는 것도 뜻하는 것도 올바르지 않습니다. 이것이 바로 육체의 일입니다. 아무리 내 자신을 가꾸고 학식으로 수련하고 해도, 온갖 것들에 육체의 질서를 부여하고자 해도 안 됩니다.
4. 한 분 예수 그리스도의 영의 한 열매
그러나 성령의 열매, 성령의 역사는 하나로 갑니다. 부르신 이도, 주도, 믿음도, 세례도 하나입니다(엡 4:4-6). 그리고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은혜를 주셨다고 합니다(엡 4:7). 이 은혜의 특징은 15절에 나옵니다. "주도 한 분이시요 믿음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요"(엡 4:15). 신랑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로 하나가 되어 완성이 되는 것, 이것이 성령의 열매입니다. 육체의 일은 끊임없이 흩어지고 무질서합니다. 다툽니다. 그러나 성령의 소욕은 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받으므로 그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은혜를 누리므로 더 좋다 더 나쁘다 말하기보다 모두 예수 그리스도, 머리이신 그리스도께로 자라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이 어떻게 해야 하나님을 믿는 일을 하느냐고 '복수로' 물을 때 예수님은 '단수로'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라고 답변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한 가지입니다. 성령의 열매도 단수라는 말입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하나이고 그 맛이 아홉 가지인 것입니다. 열매는 하나이고 맛이 아홉 개라는 것입니다. 이 아홉가지 맛이 다 한 질서입니다.
5. 육체의 일들
구약의 율법에도 하지 말아야 할 것이 365가지, 해야 할 것이 248개로 나옵니다. 구약 율법에 나오는 것을 정리해 보면 이렇게 됩니다. 이것을 합치면 613의 명령이 됩니다. 본문에 나오는 15가지 육체의 일은 몇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우선 음욕과 관련된 것입니다.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입니다. 그 다음으로 다른 신을 섬기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다음으로 21절의 투기까지 사람의 관계를 다루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술취함과 방탕함은 하나님의 질서, 의를 벗어나는 문란한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또 그와 같은 것들이 많다고 하고 있습니다. 이를 더 자세히 살피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음행, 더러운 것, 호색
(1) 음행
음행이라고 함은 이성과 간음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질서는 생육하고 번성하고 충만하여 다스리고 지키라고 하신 것에 대해 가정을 이루라고 하셨습니다. 문화명령이라고도 하는데 이것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건전한 가정을 이루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문화명령과 함께 가정명령을 주셨습니다. 남녀가 부모를 떠나 한 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음행은 가정을 이룸 없이 간음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2) 더러운 것
더러운 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가증한 것입니다. 이런 것은 전부 더러운 것입니다. 질서에 속하지 않는 것입니다. 남녀의 마땅한 자리를 바꾸는 것 등이 전부 다 더러운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주신 그런 건전한 질서를 넘어서는 것입니다.
(3) 호색
호색은 특별히 과한 사치, 욕심 등을 아우릅니다. 성경은 가만히 보면 과한 욕심을 다 정욕과 연결합니다. 음란함이 깃들어 있습니다. 주로 보면 욕심쟁이가 음란합니다. 칼빈의 주석 같은 데에 보면 사치로운 잔치를 벌이고 이것으로 자기를 드러내고 치장하는 것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세 가지는 전체적으로 우리의 몸과 관련된 것입니다. "몸은 음란을 위하여 있지 않고 오직 주를 위하여 있으며"(고전 6:13). 그리고 "음행하는 자는 자기 몸에 죄를 범하느니라"(고전 6:18). 다른 것은 소유로 죄를 범하는데 이것은 몸으로 범하는 죄라고 합니다.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고전 6:19). 우리는 빛의 갑옷을 입고 빛의 자녀들처럼 행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고 로마서는 말씀합니다. 제자들이 무슨 음식이 더러운 것인지 물었을 때 주님은 들어가는 것으로 더럽게 하는 것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오히려 우리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 더러운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내 마음에서 나오는 더러운 것은 생각도 않고 먹는 것을 깨끗한 것으로 하는 것이 덧없다고 하신 것입니다. 특히 악한 생각의 첫 번째가 음란입니다. 그리고 도둑질, 살인, 간음, 음탕, 질투 등을 말합니다. 사람의 마음 중에 나오는 악한 것 중 첫번째가 음란입니다. 이렇게가 첫 세 가지입니다. 음행과 더러움입니다.
2) 우상 숭배, 술수
(1) 우상 숭배
20절은 우상 숭배를 말합니다. 모든 만물이 하나님의 능력과 신성을 드러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않고 감사하지도 않고 썩어질 새와 짐승과 걸어다니는 동물로 우상 숭배를 하는 것입니다. 타락한 인류는 누구에게나 우상 숭배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감사하지 않고 영화롭게 하지 않는 것이 우상 숭배이기 때문입니다.
(2) 술수
술수(주술)이라는 것은 신비한 능력을 나무에게서 찾고 산이나 물에서 찾고 무당을 찾아 점을 치는 것 등을 말합니다. 이것이 다 육체의 일이라는 것입니다. 점쟁이, 예언가 등을 찾는 것입니다. 주술입니다. 우상 숭배와 주술입니다. 이것은 즉 1계명을 바로 지키라는 말입니다.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 하나님만을 섬기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3) 원수를 맺는 것, 분쟁, 시기, 분냄, 당 짓는 것, 분리함, 이단, 투기
(1) 원수를 맺는 것
이후에는 인간 관계에 대해 여덟 가지가 나옵니다. 하나님을 멀리 하면 사람과 원수를 맺게 됩니다. 사실상 하나님은 원수라도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에게서 멀어지면 사람이 원수가 됩니다. 우리가 이것을 영적으로 분별해야 합니다.
(2) 분쟁
분쟁이 있습니다. 이것은 자기애와 자기중심성에서 나옵니다. 교만과 자기애와 자기중심성입니다. 그러나 상대를 누르고 때리고 분쟁합니다.
(3) 시기, 투기
이후에 시기가 나옵니다. 이 시기는 투기와 다릅니다. 시기는 같이 열심히 뛰면서 상대방을 판단하는 것입니다. 경쟁심을 의미할 수 있습니다. 투기는 내가 안되니 저 사람을 끌어 내리는 것입니다. 같이 뛰는데 그 사람이 잘못됐다 하는 것은 시기이고 투기는 아예 자신은 뛰지도 않으면서 뛰는 사람을 깎아내리는 것입니다. 시기는 바울파, 게바파, 그리스도파를 나누어 서로 열심히 하면서 자기가 낫다고 하는 것입니다. 은사도 마찬가지입니다. 말씀을 서로 잘 전한다고 다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시기는 열심은 있습니다. 특히 고린도교회에서 구제에 대해 시기가 많았습니다. 은사도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교회를 섬기는데 서로 시기하는 것입니다. 시기와 분쟁이 같이 열심을 내는 가운데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육체에 속한 일로 말하는 것입니다. "기록된 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라"(고전 1:31). 우리가 주의 일을 하는 것이 정말 감사한 일입니다. 종말적 신앙을 가지라고들 합니다. 죽음도 항상 묵상해야 합니다. 우리가 죽음의 순간에 내가 시기했다는 것이 얼마나 답답하겠습니까. 내가 내 경기장을 푯대를 향해 같이 뛰면 되는데 같이 뛰는 옆 사람을 시기하고 질투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요. 어릴 때 동네에서 학교에서 시기하던 일을 지금 생각하면 얼마나 어리석고 덧없는 것인지요.
(4) 분냄
마지막으로 분냄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으므로 분함을 발하는 것입니다. 가인이 안색을 변하여 분낸 것입니다. 가룟 유다가 향유를 붓는 여인에게 분낸 것처럼 자기 뜻대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이 옳다고 생각하고 구원의 백성이라고 생각했는데 예수님께서 사렙다 과부, 나아만 장군 등을 들어 이스라엘인인 것을 자랑하지 말라고 하니 죽이려 한 것입니다. 사실상 분냄을 없애려면 자기의 옳다 하는 바를 없애야 합니다. 하나님이 옳다고 하면 사라집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도 내가 옳다고 하면 분냄이 생깁니다. 우리가 말석에 앉으면 상석에 앉히시는 하나님입니다.
(5) 당 짓는 것
당 짓는 것은 사람의 판단에 따라 옳고 그른 것을 판단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혼자 하기에 답답하면 사람을 모읍니다. 진리는 좁은 문 좁은 길입니다. 분열은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입니다. 항상 예수께 붙어 있으면 우리가 서로 붙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가 멀어진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예수께 잘 붙어 있는데 서로 멀어진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하나가 되려면 예수님께 붙들려 있어야 합니다. 그저 기쁘고 즐겁고 예수님 앞에서 누리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서로 붙어 있게 됩니다. 예수에게서 멀어지면 우리가 서로 분열됩니다.
(6) 이단
이단은 종교적인 당을 짓는 것입니다. 투기는 이미 말씀을 드렸습니다.
4) 술 취함, 방탕함
그리고 술 취함과 방탕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늘 깨어서 기도해야 합니다. 술을 마시고 기도할 수 없습니다(엡 5:18). 술 취하는 것과 성령의 은혜 가운데 있는 것이 같이 있을 수 없습니다. 술을 마셔도 되니 안 되니 말할 것이 없습니다. 그리고 방탕함이라는 것은 아버지의 집을 떠나는 것입니다.
6. 결론
얍복강을 기도하고 건넌 야곱이 숙곳을 거쳐 세겜으로 정착을 합니다. 지난 번에 숙곳을 가보니 꽃이 아름다웠습니다. 이스라엘에서 정원이라고 할 수 있는 곳은 그곳 하나였습니다. 세겜은 가 보지 못했습니다. 야곱은 아름다운 숙곳을 지나 세겜에 정착하여 온갖 나쁜 일을 다 겪습니다. 세겜은 비옥하여 농사가 잘되는 곳입니다. 숙곳이나 세겜의 꽃과 정원이 아닌, 벧엘의 돌 제단을 쌓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사모가 광야를 그렇게 가보고 싶다고 한 그 마음을 제가 조금 이해했습니다. 돌이 차갑게 느껴지는 광야가 성령이 깃든 곳입니다. 꽃이 있고 풍성한 들판이 있다고 하는 곳이 아니라 말입니다.
[20201129][십자가지기교회 주일낮예배: 갈라디아서 강해(42): 그리스도의 복음] 육체의 일과 성령의 일 (1) (갈 5:19-23) 문병호 목사
19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20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21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22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23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음성파일: 게시물 하단 "관련링크"에서 청취 혹은 내려받기 가능합니다.
<녹취록>
1. 성령의 소욕
1) 애통함
날이 많이 추워졌습니다. 이런 시기 몸은 움츠러들어도 마음은 하나님께 더욱 붙들림이 있습니다. 성령이 우리에게 임하면 성령의 충만함으로 변화와 거듭남이 있습니다. 하지만 성령이 우리에게 임할 때 필히 우리 안에는 갈등이 일어납니다. 성령이 임하여 거듭나되 완전하지 않으므로 날마다 육체의 소욕과 성령이 서로 거스르고 다투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래서 더욱 몸부림치게 되는 부분이 있고 애통하는 것이 있습니다. 애통은 하나님의 은혜와 나의 연약함이 부딪치는 것입니다. 울며 눈물로 씨를 뿌리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의 모습입니다.
2) 원함과 간구
지난 주 17절은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서로 대적한다고 이야기합니다. 이 두 가지가 우리 안에서 일어납니다. 우리 안은 어떻게 보면 전쟁터입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성령이며, 성령이 원하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 안에는 그리스도가 사시므로 성령이 우리 안에서 원하는 것, 거듭난 우리가 원하는 것, 성령의 소욕이 생깁니다. 성령이 임하면 말씀의 감화가 생기고 말씀의 감화가 생기면 우리 안에 원하는 것이 생깁니다. 그것이 성령의 소욕, 내적 정서라고 합니다. 우리 안에 감동과 함께 움직임이 있는데 그것이 전체적으로 거룩한 소욕인 것입니다. 우리 안에 원하는 것이 생깁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원하는 것이 생깁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자 하는 원함이 생깁니다. 우리의 제1 가치관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사는 것,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자 하는 것이 됩니다. 우리가 감 하나도 따기 어려운데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어떻게 이룹니까.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를 간구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룬다는 말은 그러므로 겟세마네 기도와 같이 '아버지의 뜻을 이루소서, 원대로 하옵소서' 하며 은혜를 구하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거룩한 성령의 소욕이 생기면 은혜를 구하게 되고 은혜를 베푸시면 영광의 도구가 되는 것입니다.
3) 성령이 임하면
성령의 소욕은 거듭난 것입니다. 자연적으로 타고 나는 것이 아닙니다. 많이 배웠다고 가지는 것도 아닙니다. 성령이 임하면 거듭난 영의 정서가 생깁니다. 그 가운데 평안하게 되고 잠잠하고 담대하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갈렙과 같이 나서게 됩니다. 담대함으로 나서는데 그것은 은혜를 구하므로 그런 것이지 자질을 구하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닙니다. '애통하며 회개하는 마음을 충만하게 하소서', 이런 찬송의 가사와 같이 우리가 나아가는 것입니다.
4)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
지난주 봤던 18절,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성령을 따라 걷는데, 성령님이 이끄시는 바가 되면, 구약의 용어로 하면 구름 기둥, 불 기둥의 인도를 받게 되면, 18절에, 율법 아래 있지 않게 된다고 합니다. 성령이 임하면 능력이 임합니다. 그러나 그 질서는 은혜인 것입니다. 성령이 임하면 은혜가 우리 안에 역사합니다. 그래서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다고 얘기하는 것입니다. 성령이 임한 것은 애통함입니다. 은혜를 구하는 것입니다. 나는 할 수 없다고 말입니다. 그때 그것이 바로 눈물입니다. 성령이 임한다고 힘이 생기고 강해지는 것이 아니라 바짝 엎드려 울게 되는 것입니다. 내 마음의 원함이 있는데, 성령의 소욕이 있는데, '그 고난의 잔을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하는 애통함이 생기는 것입니다. 내가 잘 믿는 것 같은 때가 있습니다. 기분이 좋을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바짝 엎드리십시오. 아무것도 없을 때, 몸을 움찔할 힘조차 없을 때 하나님이 살리시고 함께 앉히십니다. 그래서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이나 공로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십자가 아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성령이 임하면 우리가 성령의 이끌림을 받는 의의 종이 되는 것입니다.
2. 육체의 일과 성령의 열매
본문 말씀을 이번주 다음주 두 번에 걸쳐 살펴보려고 합니다. 본문은 두 가지 일을 대비시키고 있습니다. 19절은 육체의 일을 열다섯 가지 나열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22절 성령의 열매를 아홉 가지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육체의 일과 성령의 열매인데, 먼저 기억할 것은 육체의 일은 복수로 썼습니다. 그리고 성령의 열매는 단수로 썼습니다. 그리고 육체의 일은 열다섯 가지를 이야기했으나 21절 본문은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고 해서 열다섯 가지에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더 많다, 끝도 없다고 표현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사실상 끝이 없는 것입니다. 죄는 하나님이 만드신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만든 것입니다. 다른 모든 것은 하나님이 만드셨으나 죄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죄는 언제 어떤 일로 생길지, 그 현상은 끝이 없습니다. 계속 생깁니다. 그래서 복수로 썼으나 실상은 끝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의 열매는, 성령의 역사가 다양하고 풍성함에도 불구하고, 한 영, 한 주, 한 은혜, 한 그리스도의 의를 이야기하므로 오직 성령의 열매라고 단수로 말씀했다고 봐도 되겠습니다.
또한 육체의 일은 분명하다고 합니다. 이 말은 모든 타락한 인류가 보편적으로 피할 수 없이 가지고 있는 것임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육체의 일은 분명하다는 것은 가시와 같이 자기 주장, 자기 판단, 자기애를 가지고 꼭 잡고 놓지 않는 것을 의미합니다. 누구에게나 피할 수 없는 것이고 누구든지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애, 자기 주장, 자질 등이 그런 것입니다. 모두가 다 자기가 잘났다고 합니다. 십자가 위에 내 생각도 학식도 직장도 얹어 놔야 합니다. 그러나 다 자기중심적입니다. 그러나 성령의 열매는 택함 받은 사람에게만 주어집니다. 은밀한 가운데 기도하고 받아 누리는 비밀입니다. 성령의 열매는 비밀스러운 역사입니다. 내가 주장해서 사랑하고 오래 참는 것이 아닙니다. 비밀입니다. 그리고 성령의 열매는 움켜쥐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부인하는 것입니다. 무명한듯 하나 유명합니다. 이름이 없는 듯 하나 하늘나라에 이름이 새겨져 있습니다. 성령의 열매는 누구에게 어떤 은사가 있다는 식으로 분명히 드러나지 않습니다. 하늘 아버지를 우리가 섬기고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 가운데 자기를 부인하고 겸손히 나가는 것이 바로 성령의 열매입니다. 성령의 열매에 대해서는 다음주에 더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3. 타락으로 인하여 부패한 육체의 일
육체에 속한 것은 다 무능하고 부패한 것입니다. 육체에 속했다고 할 때 영혼은 고상하고 육체는 저급하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영혼과 육체라고 해도 됩니다. 영육간의 삶으로 이 지상에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거듭나지 않은 것, 타락한 인류 가운데 일어나는 모든 일은 육체의 일입니다. 아담은 하나님이 순전하게 지었으나 순전함을 타락으로 말미암아 잃어버렸습니다. 그러므로 육체의 일이라는 것은 타락한 인류에 속한 모든 것이 육체의 일입니다. 전부 죄입니다. 전부 자의적이고 무분별하고 무질서하고 예측할 수 없습니다. 어릴 때 분명히 사필귀정이라는 말을 배웠습니다. 그런데 위인전을 읽으니 그렇지 않은 것입니다. 이순신 장군이 왜 그렇게 죽어야 하는지 의문이 생겼습니다. 하박국 선지자가 주님 앞에 서서 질문했듯 왜 악인은 흥하고 주의 백성은 힘든지 말입니다. 세상의 일은 무질서하고 맹목적이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요즘 학생들도 입시를 하는데 지금은 이것이 최고라고 해도 10년이 지나면 완전히 관점이 바뀔 수도 있습니다. 육체에 속한 것은 전부 예측할 수 없습니다. 그것에 소망을 두었다가는 전부 실망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조금 더 속이고 약삭 빨라야 한다는 것이 세상의 이치처럼 회자되는 것입니다. 육체의 일이라는 것이 바로 그런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 정, 의를 주셨는데 이제 타락한 인류는 아는 것도 느끼는 것도 뜻하는 것도 올바르지 않습니다. 이것이 바로 육체의 일입니다. 아무리 내 자신을 가꾸고 학식으로 수련하고 해도, 온갖 것들에 육체의 질서를 부여하고자 해도 안 됩니다.
4. 한 분 예수 그리스도의 영의 한 열매
그러나 성령의 열매, 성령의 역사는 하나로 갑니다. 부르신 이도, 주도, 믿음도, 세례도 하나입니다(엡 4:4-6). 그리고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은혜를 주셨다고 합니다(엡 4:7). 이 은혜의 특징은 15절에 나옵니다. "주도 한 분이시요 믿음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요"(엡 4:15). 신랑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로 하나가 되어 완성이 되는 것, 이것이 성령의 열매입니다. 육체의 일은 끊임없이 흩어지고 무질서합니다. 다툽니다. 그러나 성령의 소욕은 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받으므로 그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은혜를 누리므로 더 좋다 더 나쁘다 말하기보다 모두 예수 그리스도, 머리이신 그리스도께로 자라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이 어떻게 해야 하나님을 믿는 일을 하느냐고 '복수로' 물을 때 예수님은 '단수로'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라고 답변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한 가지입니다. 성령의 열매도 단수라는 말입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하나이고 그 맛이 아홉 가지인 것입니다. 열매는 하나이고 맛이 아홉 개라는 것입니다. 이 아홉가지 맛이 다 한 질서입니다.
5. 육체의 일들
구약의 율법에도 하지 말아야 할 것이 365가지, 해야 할 것이 248개로 나옵니다. 구약 율법에 나오는 것을 정리해 보면 이렇게 됩니다. 이것을 합치면 613의 명령이 됩니다. 본문에 나오는 15가지 육체의 일은 몇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우선 음욕과 관련된 것입니다.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입니다. 그 다음으로 다른 신을 섬기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다음으로 21절의 투기까지 사람의 관계를 다루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술취함과 방탕함은 하나님의 질서, 의를 벗어나는 문란한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또 그와 같은 것들이 많다고 하고 있습니다. 이를 더 자세히 살피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음행, 더러운 것, 호색
(1) 음행
음행이라고 함은 이성과 간음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질서는 생육하고 번성하고 충만하여 다스리고 지키라고 하신 것에 대해 가정을 이루라고 하셨습니다. 문화명령이라고도 하는데 이것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건전한 가정을 이루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문화명령과 함께 가정명령을 주셨습니다. 남녀가 부모를 떠나 한 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음행은 가정을 이룸 없이 간음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2) 더러운 것
더러운 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가증한 것입니다. 이런 것은 전부 더러운 것입니다. 질서에 속하지 않는 것입니다. 남녀의 마땅한 자리를 바꾸는 것 등이 전부 다 더러운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주신 그런 건전한 질서를 넘어서는 것입니다.
(3) 호색
호색은 특별히 과한 사치, 욕심 등을 아우릅니다. 성경은 가만히 보면 과한 욕심을 다 정욕과 연결합니다. 음란함이 깃들어 있습니다. 주로 보면 욕심쟁이가 음란합니다. 칼빈의 주석 같은 데에 보면 사치로운 잔치를 벌이고 이것으로 자기를 드러내고 치장하는 것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세 가지는 전체적으로 우리의 몸과 관련된 것입니다. "몸은 음란을 위하여 있지 않고 오직 주를 위하여 있으며"(고전 6:13). 그리고 "음행하는 자는 자기 몸에 죄를 범하느니라"(고전 6:18). 다른 것은 소유로 죄를 범하는데 이것은 몸으로 범하는 죄라고 합니다.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고전 6:19). 우리는 빛의 갑옷을 입고 빛의 자녀들처럼 행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고 로마서는 말씀합니다. 제자들이 무슨 음식이 더러운 것인지 물었을 때 주님은 들어가는 것으로 더럽게 하는 것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오히려 우리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 더러운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내 마음에서 나오는 더러운 것은 생각도 않고 먹는 것을 깨끗한 것으로 하는 것이 덧없다고 하신 것입니다. 특히 악한 생각의 첫 번째가 음란입니다. 그리고 도둑질, 살인, 간음, 음탕, 질투 등을 말합니다. 사람의 마음 중에 나오는 악한 것 중 첫번째가 음란입니다. 이렇게가 첫 세 가지입니다. 음행과 더러움입니다.
2) 우상 숭배, 술수
(1) 우상 숭배
20절은 우상 숭배를 말합니다. 모든 만물이 하나님의 능력과 신성을 드러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않고 감사하지도 않고 썩어질 새와 짐승과 걸어다니는 동물로 우상 숭배를 하는 것입니다. 타락한 인류는 누구에게나 우상 숭배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감사하지 않고 영화롭게 하지 않는 것이 우상 숭배이기 때문입니다.
(2) 술수
술수(주술)이라는 것은 신비한 능력을 나무에게서 찾고 산이나 물에서 찾고 무당을 찾아 점을 치는 것 등을 말합니다. 이것이 다 육체의 일이라는 것입니다. 점쟁이, 예언가 등을 찾는 것입니다. 주술입니다. 우상 숭배와 주술입니다. 이것은 즉 1계명을 바로 지키라는 말입니다.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 하나님만을 섬기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3) 원수를 맺는 것, 분쟁, 시기, 분냄, 당 짓는 것, 분리함, 이단, 투기
(1) 원수를 맺는 것
이후에는 인간 관계에 대해 여덟 가지가 나옵니다. 하나님을 멀리 하면 사람과 원수를 맺게 됩니다. 사실상 하나님은 원수라도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에게서 멀어지면 사람이 원수가 됩니다. 우리가 이것을 영적으로 분별해야 합니다.
(2) 분쟁
분쟁이 있습니다. 이것은 자기애와 자기중심성에서 나옵니다. 교만과 자기애와 자기중심성입니다. 그러나 상대를 누르고 때리고 분쟁합니다.
(3) 시기, 투기
이후에 시기가 나옵니다. 이 시기는 투기와 다릅니다. 시기는 같이 열심히 뛰면서 상대방을 판단하는 것입니다. 경쟁심을 의미할 수 있습니다. 투기는 내가 안되니 저 사람을 끌어 내리는 것입니다. 같이 뛰는데 그 사람이 잘못됐다 하는 것은 시기이고 투기는 아예 자신은 뛰지도 않으면서 뛰는 사람을 깎아내리는 것입니다. 시기는 바울파, 게바파, 그리스도파를 나누어 서로 열심히 하면서 자기가 낫다고 하는 것입니다. 은사도 마찬가지입니다. 말씀을 서로 잘 전한다고 다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시기는 열심은 있습니다. 특히 고린도교회에서 구제에 대해 시기가 많았습니다. 은사도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교회를 섬기는데 서로 시기하는 것입니다. 시기와 분쟁이 같이 열심을 내는 가운데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육체에 속한 일로 말하는 것입니다. "기록된 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라"(고전 1:31). 우리가 주의 일을 하는 것이 정말 감사한 일입니다. 종말적 신앙을 가지라고들 합니다. 죽음도 항상 묵상해야 합니다. 우리가 죽음의 순간에 내가 시기했다는 것이 얼마나 답답하겠습니까. 내가 내 경기장을 푯대를 향해 같이 뛰면 되는데 같이 뛰는 옆 사람을 시기하고 질투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요. 어릴 때 동네에서 학교에서 시기하던 일을 지금 생각하면 얼마나 어리석고 덧없는 것인지요.
(4) 분냄
마지막으로 분냄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으므로 분함을 발하는 것입니다. 가인이 안색을 변하여 분낸 것입니다. 가룟 유다가 향유를 붓는 여인에게 분낸 것처럼 자기 뜻대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이 옳다고 생각하고 구원의 백성이라고 생각했는데 예수님께서 사렙다 과부, 나아만 장군 등을 들어 이스라엘인인 것을 자랑하지 말라고 하니 죽이려 한 것입니다. 사실상 분냄을 없애려면 자기의 옳다 하는 바를 없애야 합니다. 하나님이 옳다고 하면 사라집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도 내가 옳다고 하면 분냄이 생깁니다. 우리가 말석에 앉으면 상석에 앉히시는 하나님입니다.
(5) 당 짓는 것
당 짓는 것은 사람의 판단에 따라 옳고 그른 것을 판단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혼자 하기에 답답하면 사람을 모읍니다. 진리는 좁은 문 좁은 길입니다. 분열은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입니다. 항상 예수께 붙어 있으면 우리가 서로 붙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가 멀어진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예수께 잘 붙어 있는데 서로 멀어진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하나가 되려면 예수님께 붙들려 있어야 합니다. 그저 기쁘고 즐겁고 예수님 앞에서 누리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서로 붙어 있게 됩니다. 예수에게서 멀어지면 우리가 서로 분열됩니다.
(6) 이단
이단은 종교적인 당을 짓는 것입니다. 투기는 이미 말씀을 드렸습니다.
4) 술 취함, 방탕함
그리고 술 취함과 방탕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늘 깨어서 기도해야 합니다. 술을 마시고 기도할 수 없습니다(엡 5:18). 술 취하는 것과 성령의 은혜 가운데 있는 것이 같이 있을 수 없습니다. 술을 마셔도 되니 안 되니 말할 것이 없습니다. 그리고 방탕함이라는 것은 아버지의 집을 떠나는 것입니다.
6. 결론
얍복강을 기도하고 건넌 야곱이 숙곳을 거쳐 세겜으로 정착을 합니다. 지난 번에 숙곳을 가보니 꽃이 아름다웠습니다. 이스라엘에서 정원이라고 할 수 있는 곳은 그곳 하나였습니다. 세겜은 가 보지 못했습니다. 야곱은 아름다운 숙곳을 지나 세겜에 정착하여 온갖 나쁜 일을 다 겪습니다. 세겜은 비옥하여 농사가 잘되는 곳입니다. 숙곳이나 세겜의 꽃과 정원이 아닌, 벧엘의 돌 제단을 쌓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사모가 광야를 그렇게 가보고 싶다고 한 그 마음을 제가 조금 이해했습니다. 돌이 차갑게 느껴지는 광야가 성령이 깃든 곳입니다. 꽃이 있고 풍성한 들판이 있다고 하는 곳이 아니라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