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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206][십자가지기교회 주일낮예배: 갈라디아서 강해(43): 그리스도의 복음] 육체의 일과 성령의 열매 2 (갈 5:19-23) 문병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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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206][십자가지기교회 주일낮예배: 갈라디아서 강해(43): 그리스도의 복음] 육체의 일과 성령의 열매 2 (갈 5:19-23) 문병호 목사


(갈 5:19)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갈 5:20)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갈 5:21)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갈 5:22)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갈 5:23)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음성파일: 게시물 하단 "관련링크"에서 청취 혹은 내려받기 가능합니다. 


<녹취록>



1. 성령의 열매: 아홉 가지 맛을 내는 한 열매


동일한 본문으로 지난 주 이번 주 이렇게 두 번 봅니다. 지난 주에는 육체의 일에 대해서 여러 가지를 말하고 있는 것을 우리가 보았습니다. 오늘은 성령의 열매 아홉 가지에 대한 그런 말씀입니다. 이미 지난 주에 말씀을 드렸지만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옛날 성경에는 현저하니 이렇게 되어 있는데 이번 성경에는 분명한, 그렇게 많이 읽어가지고 저는, 찬송도 그렇고 성경도 그렇고 자주 옛날 것이 입에서 많이 나오는데요, 그래서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그래서 쭉 열거한 것을 지난 주에 우리가 하나씩 하나씩, 보통 그냥 쭉쭉 보고 넘어갈 수도 있지만, 성경은 다 영감된 말씀이고 하나씩 하나씩 이렇게 쭉 나열하더라도 성경에 나올 때, 한 번씩 이렇게 새겨 보는 것이 좋아요. 한 단어 한 단어. 그러니까 전부 나쁜 거 쭉 있더라 이렇게 하지 마시고. 그래서 지난 주에 조목조목 살펴보았고, 이런 것들이 복수로 나타나고, 무엇보다도 여기 열거한 것만이 다가 아니라 21절에 다른 것들도 더 있다 이렇게 이야기 하는 것을 우리가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보게 되시는 성령의 열매는 사실상 단수로 되어 있다, 그런데 이제 아홉 가지, 그래서 저는 한 열매의 아홉 가지 맛이다 이렇게 한 번 언제부턴가 생각해 봤습니다. 그리고 이 아홉 가지 열매 중에 어떤 사람은 이것을 복수로 생각해서 아홉 가지 열매가 있는데 누구는 어떤 열매가 있고, 이렇게 자꾸 은사, 은사는 하나님이 다양하게 주시거든요. 어떤 사람은 잘 뛰는 발과 같은 은사를 주시고, 어떤 사람은 잘 만지게 손과 같은 은사를 주시고, 어떤 사람은 잘 보게 눈과 같은 은사, 은사는 이렇게 각양각색으로 다양하게 나누어 주시지만 오늘 여기의 말씀은 어떤 은사, 성령의 은사는 교회의 직분을 위한 것입니다. 여러분. 직분 없는 곳에 은사 없습니다. 대원칙입니다. 은사를 가지고, 교회는 안 다니면서 은사가 있다, 그런 은사는 없습니다. 모든 은사는 교회의 직분을 위한 은사거든요. 

그런데 오늘 여기의 말씀은 우리가 그렇게 봐도 영 틀린 것은 아니지만 아홉 가지 중에 어떤 사람은 뭐만 가지고 있다 이렇게 은사를 이야기 하듯이 보지 말고, 한 열매인데, 성령을 받으면 이 아홉 가지가 다 우리 안에서 맛을 낸다. 그래서 누구든지 이 성령의 열매, 오늘 우리가 살펴보는 이 아홉 가지는 다 주어져 있다, 은혜의 선물로 주어져 있다. 그렇게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고 저는 여깁니다. 



2. 성령 임재


성령이 임하여야 그리스도의 것이 내 것이 됩니다. 성령이 임하여야 바로 그리스도께서 다 이루신 그것이 믿어집니다. 그래서 성령이 임하여야 믿음이 주어지고 그리스도를 믿게 되고 알게 되고 그리스도의 것을 내 것으로 삼게 됩니다. 

성령은 절대적으로, 인격적으로, 단회적으로 임합니다. 일전에도 제가 이 세 단어를 쓴 적이 있습니다. 절대적이고 인격적이고 단회적으로 임한다. 말이 좀 전문적으로 들릴지 몰라도 내용은 다 아는 것입니다. 


1) 절대적 임재


첫째, 성령은 절대적으로 임합니다. 딱 한 마디로 제가 설명해 볼께요. 절대적으로 임한다는 말은 무엇인가하면, 물은 그릇의 양만큼 들어가죠, 물은 그릇의 양만큼 들어가죠, 그렇죠? 그릇이 1리터 짜리면 물은 1리터만 담을 수 있죠. 그러나 성령은 그렇지 않습니다. 성령은 절대적으로 임하기 때문에 성령이 임하면 그릇이 바뀝니다. 성령이 임하면 그릇이 바뀌어요. 제가 이것을 설명하려고 많이 궁리해 봤어요. 많이 궁리해 봤어요. 이게 답이에요. 절대적으로 임한다는 것은 우리 그릇 자체를 바꾸는 거예요. 물은 있는 그릇에 채워지기 때문에 자질만큼만 들어가요. 그러나 성령은 자질이 없어도 작아도 그런 것 따지지 않아요. 성령이 임하면 그릇 자체가 바뀌어요. 그릇을 크게 하면서 성령이 임해요. 그래서 이 조건, 저 조건 따져가지고 성령이 임하는 것이 아니라 무조건적으로 임해요. 그래서 내가 받을, 요만큼 받을만 하니까 받았다, 이것이 아니란 말이에요, 성령은. 성령은 내 자신이 변화되고 내가 거듭나요. 그래서 성령이 임하면 거듭나고 성령이 임하면 성령이 나를 지배하고 그래서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내 안에 성령이 사심으로 내 지경이 넓어지고, 야베스의 말씀, 야베스와 같이 지경이 넓어지고, 그리고 세 부대가 돼요. 큰 부대가 되고 새 신령한 부대가 돼서 새 술을 거기에 담는다 이말이에요. 우리는 뭔가 조건을 가지고 성령을 받은 것이 아니에요. 성령은 각자의 조건, 됨됨에 따라 주어진 것이 아니라 무조건 주어집니다. 성령의 임재는 절대적입니다. 우리는 성령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이 아닌데, 성령이 우리에게 들어오셔서 우리를 새롭게 만듭니다. 교부는 성령이 임하시는 것을 중생이라고 했고 재창조라고 했습니다. 성령은 우리를 넓히셔서 우리를 채우십니다. 


2) 인격적 임재


둘째, 성령은 인격적으로 임하십니다. 성령은 삼위일체 하나님이십니다. 물질과 같이 양적으로 조금 더 들어오고 덜 들어고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은 인격이십니다. 그리고 삼위일체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성령이 임하면 성부, 성자, 성령이 임하시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아버지가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그리스도가 내 안에 함께 살고, 성령이 내 안에 계십니다. 한 번 임하면 완전히 임하시는 것입니다. 성령은 한 번 임하시면 완전히 임하시어 우리 안에 살게 됩니다. 성령은 인격이시기 때문에, 성령이 내게 임하면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성령이 사시고, 내가 성령을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이 나를 감동시키시고 내 속에서 친히 간구하십니다. 성령은 인격이시기 때문입니다. 성령이 임하시면 내 안에 사시면서 나를 지배하시고 인도하시고 이끄시고 지시하십니다. 그리고 성령이 임하면 빌 바를 알지 못하는 우리에게 빌 바를 알려주시고 친히 간구하시고 애통하십니다. 왜냐하면 성령이 인격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령이 임하면 회개하고 감사하고 예배하고 기도하고 지식이 거듭나고 내 의지가 거듭나고 내 정서도 거듭납니다. 지정의가 다 거듭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영이 사십니다.


3) 단회적 임재


셋째, 성령은 단회적으로 임하십니다. 그래서 성령이 임하면 주님이 내 안에 사심입니다. 성령 충만은 주님이 내 안에 마음껏 사심입니다. 어떻게 내 안에 마음껏 사시는 것입니까? 말씀 충만, 기도 충만입니다. 말씀, 기도, 예배입니다. 성령은 인격이시기 때문에 단번에 임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단번에 거듭나고, 단번에 회개하고, 단번에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단번에 의롭다 함을 받습니다. 성령은 한 번 임하시면 떠나지 않으십니다. 임마누엘의 영이십니다. 



3.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은혜를 누림으로써 맺히는 열매


성령은 살아 계시기 때문에 필히 열매를 맺으십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말씀입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여기에 “오직”이라는 말은 지난 주에 보았던 육신에 속한 모든 것을 밀어내는 오직 한 가지입니다. 그 영의 역사가 우리에게 임하여 맺는 열매가 성령의 열매입니다. 성령은 오늘 조금 내일 조금 받고 기도하면 좀더 받는 것이 아닙니다. 나무가 계속 살아서 열매가 있듯이, 성령이 떠나지 않으시니 열매가 맺힙니다. 열매는 살아 있어서 맺히는 것입니다. 열매는 하루 아침에 달리는 것이 아니라 봄날부터 시작해서 가을까지 있는 것입니다. 성령이 살아 있기에 생명의 열매가 있습니다. 살아 있는 것은 빛에 속했기에 빛의 열매입니다. 그리고 요한복음 1:4에 말씀이 생명의 빛이기 때문에 말씀의 열매입니다. 생명의 열매, 빛의 열매, 말씀의 열매입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은 열매로 알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살아 있기 때문에 열매를 맺습니다. 그러므로 성령은 필히 열매를 맺습니다. 살아서 씨가 떨어져 열매가 맺습니다. 주님이 특별히 열매에 대해서 많이 말씀하셨습니다. 씨는 길가, 바위, 가시나무 밭에 떨어지면 죽으나 옥토에서는 삼십 배, 육십 배, 백 배의 열매를 맺습니다. 마태복음 13장의 이 씨 뿌리는 비유는 우리는 전부 옥토입니다. 우리는 다 살아 있고 열매 맺게 되어 있습니다. 이사야 5:2처럼 우리는 극상품 포도나무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열매를 맺게 하십니다.

우리의 씨는 궁극적으로 그리스도의 씨입니다. 갈라디아서 3:16처럼, 여럿을 가리켜 자손이라 하지 않고 한 사람을 가리켜 씨라고 했다고 했습니다. 그 씨가 그리스도이고, 아브라함의 후손은 그리스도를 믿는 자입니다. 그리스도의 것이 아브라함의 후손입니다. 그렇게 보면, 우리 안에 떨어진 씨는 다 그리스도의 씨입니다. 그 그리스도의 씨가 극상품 포도나무로 열매를 맺습니다. 

열매를 맺는다는 것은 인고하며 고생하다가 맺는 것이 아니라, 누리다가 맺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의 열매라는 것은, 우리가 성령을 누리는 것입니다. 일년 내내 누리고 지금도 누리는 것입니다. 나무, 까치도 누립니다.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육신의 부모도 좋은 것으로 줄줄 알거든 누가 생선을 달라하면 뱀을 주고 떡을 달라 하면 돌을 줍니까? 주를 위한 고생은 세상의 고생과 다릅니다. 주를 위한 고생은 즐거운 것입니다. 누리는 것입니다. 성령이 우리에게 임하면 오늘 아홉 가지 열매를 누리고, 그 열매가 마지막에 천국 창고에 들어가는 알곡이 됩니다. 지금 우리가 누립니다. 그리고 그것이 마지막 때에 천국 창고에 들이는 알곡이 됩니다. 지금은 가라지와 알곡을 알 수 없고 열매로 압니다. 성령이 임하면, 우리는 살아 있기 때문에 살아 있는 자의 열매를 맺습니다. 그래서 성령의 열매를 맺는 것은 성령의 열매를 누리는 것이고,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 영광이 됩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누림이요, 영광이요, 상급입니다. 그 아홉 가지 누림거리, 영광거리, 상급거리, 천국 곳간 알곡이 바로 오늘 본문 말씀입니다.


1) 사랑


고린도전서 13:13에서 믿음, 소망, 사랑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 했고, 13:2에서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것도 아니요”라고 했습니다. 사랑은 아홉 가지 중에서 가장 앞에 있고, 본질적인 것입니다. 사랑은 누군에게는 있고 없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고, 하나님이 내 안에 계시니, 사랑이 내 안에 들어오는 것입니다. 즉 사랑은 본질적인 것입니다. 사랑은 본질적으로 성도에게 다 주어지는 것입니다. 요한일서 4:7,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세상의 사랑은 성경에서 말하는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고,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그 하나님이 우리 안에 들어오시니, 즉 성령이 임하시니, 사랑의 하나님이 내 안에 임하십니다. 그러니 우리가 사랑의 지시, 명령, 영향 안에서 살아갑니다. 

세상에 눈칫밥을 먹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저는 눈칫밥은 먹은 적은 없는데, 고등학생 때 자취하며 주인집 눈치를 본 적은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사랑밥을 먹습니다. 즉 우리는 사랑을 받고 큰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으니 다른 이를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 사랑이 본질적으로 주어져 받았습니다. 오순절 성령이 임하시니, 떡을 떼고 기도하고 가르치고 전도하기에 힘씁니다. 이것이 사랑입니다. 이것은 어떤 사람만 그러한 것이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이 그러한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을 아가페라고 합니다. 먼저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서 우리가 사랑의 빚진 자로서 살아가는 사랑이 아가페의 사랑입니다. 세상에는 세 가지 사랑이 있다고 합니다. 이웃 간의 일반적인 사랑은 ‘필리아’라고 하고, 가족 간의 사랑을 ‘스토르게’라고 합니다. 부부간의 사랑을 ‘에로스’라고 합니다. ‘아가페’는 굳이 말하면, 거듭난 사랑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셔서, 은혜에 절인 사람들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삭개오가 네 배를 갚는 것입니다. 사랑의 하나님이 지시하는 대로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발에 눈물을 흘리고 머리로 닦고 입을 맞추고 향유를 부은 여인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사랑이 바로 ‘아가페’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사랑 밥을 먹었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 ‘아가페’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내 구원의 공로가 됨을 믿고, 그리스도의 사랑이 나를 구원하셨음을 믿고 지는 십자가가 ‘아가페’입니다. 


2) 희락


희락은 기쁨, 즐거움입니다. 성령이 임하면 기쁨이 있습니다. 은밀하고 내밀한 기쁨, 누구도 앗아갈 수 없는 신령한 기쁨이 있습니다.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믿음의 역사, 사랑의 수고, 소망의 인내’라는 칭찬을 받았습니다. 데살로나가전서 1:6을 보면, “성령의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 주를 본받은 자가 되었으니”라고 합니다. “성령의 기쁨으로”라고 표현합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16, “항상 기뻐하라”라고 합니다. ‘항상, 쉬지 않고, 범사에’는 본질적인 것이고 신분적인 것이어서, 사안, 사건에 따라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기뻐하는 것입니다. 성령이 임하여 거듭나면 그냥 기쁜 것입니다. 성령의 기쁨입니다. 희락입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개역개정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이라고는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기쁨을 받은 존재이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존재입니다. 스냐바 3:17, “그가 너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고”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사랑하시니까 사랑하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니까 기뻐합니다. 내게 주시는 하나님의 기쁨은, 내가 항상 기뻐함은 하나님이 나를 기뻐하시기 때문입니다. 느헤미야가 성벽 건축할 때 어려울 때, “여호와로 인하여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느 10:10). 시편 89:15, “즐겁게 소리칠 줄 아는 백성은 복이 있나니 여호와여 그들이 여호와의 얼굴 빛 안에서 다니리로다.” 

철학자가 되시려거든 심각하십시오. 그러나 신자, 성도, 교인이 되시려거든 무조건 기뻐하시기 바랍니다. 아무 일 없으면 기뻐하시기 바랍니다. 친구 없으면 내 안의 주님 바라보고, 일이 없으면 내 안의 주님을 바라보십시오. 

기쁨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기쁨은 주의 종들이 줄 수 없습니다. 그래서 고린도후서 1:24을 보면 주의 종은 “기쁨을 돕는 자”라고 했습니다. 제가 여러분을 어떻게 기쁘게 합니까? 하나님이 기쁨을 주시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금식을 자랑하니, 예수님은 신랑이 있는 동안에는 즐거워하고 신랑을 빼앗기면 그 때 슬퍼하고 금식하라고 하셨습니다. 금식이 나쁘다는 것이 아닙니다. 심각하게 배고픈 것을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도구로 생각하지 말고, 여호와를 기뻐하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자녀가 부모 앞에서 기뻐해야 합니다. 기쁨을 앗아가려는 것이 있거든 금식해서 금식을 회복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금식의 의미입니다. 내가 밥 먹어도 감사와 기쁨이 없으면 금식을 해서 그 기쁨을 회복하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잘 새겨 들으셔야 합니다. 하박국 3:17-18,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우리는 고백신앙입니다. 괜히 슬퍼하지 말고 괜히 기뻐하고 즐거워하십시오. 


3) 화평


구약에서는 ‘샬롬’, 신약에서는 ‘에이레네’인데, 화평, 평강이라고도 합니다. 화평은 하나님과 우리의 자리매김이 잘 되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리를 넘보면 화평이 깨집니다. 하나님이 하실 일을 하나님께 맡기는 것이 화평입니다. 기뻐함과 화평은 함께 있습니다.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우리 주님이 평강의 왕이십니다. 그가 징계를 받으심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립니다. 우리는 죄인이기에 마땅히 두려워해야 할 자이지만, 우리가 두려워하지 않는 것은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써 우리가 화평을 누리기 때문입니다. 죄 의식은 모두 그리스도께 맡기시기 바랍니다.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라고 에베소서 2:14에 말씀합니다. 이런 말씀은 꽉 붙들어야 합니다. 그 무엇으로도 우리를 평화롭게 하지 못합니다. 세상이 시끄럽든 조용하든, 그는 우리의 화평이시기에 우리는 화평합니다. 그는 “평강의 왕”(사 9:6)이십니다. 그가 화목케 하는 분으로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부탁하셨습니다(고후 5:18-19). 우리가 화평을 누리가 화평을 전한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화목제물이시고(요일 4:10) 속건제물이십니다(사 53:10). 우리에게 화평이 없는 이유는 첫째, 과거의 일 때문입니다. 그러나 다 하나님께 맡기셔야 합니다. 어린아이처럼 말씀을 붙드셔야 합니다.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그래서 그가 화목케 하시고 우리에게 화목케 하는 말씀을 부탁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싸움을 부추기지 말고 화목시켜야 합니다. 가정과 사회와 직장에서 그러해야 합니다. 


4) 오래 참음


믿음에는 본질적인 요소들이 있고, 그것에 따르는 요소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믿으면 평안한 마음, 즉 평정이 있습니다. 평정하고 고요한 마음이 생깁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평강이 생기고 잠잠함이 생기고 오래 참음이 생깁니다. 이것은 믿음에 따르는 선물들입니다. 평정은 잠잠한 것입니다. 성도에게 평정한 마음은 중요합니다. 믿음은 간단합니다. 믿는 것은 말씀을 믿는 것이고 고백하는 것이고 찬양하는 것이고 예배드리는 것입니다. 다른 것은 비본질적인 것입니다. 평정한 마음이 생기면, 잠잠함, 화평, 오래 참음이 따릅니다.

오래 참음은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농부가 추수의 때를 기다리듯이 말입니다. 우리 주님도 기다리시다가 때가 차매 오셨습니다(갈 4:4). 가장 흑암이 짙을 때, 예수님은 그 흑암을 끌어 안고 죽으셨습니다. 누가복음 21:19, “너희의 인내로 너희 영혼을 얻으리라.” 작년과 연초에도 이러한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말씀을 붙들고 기도하고, 기도한즉 참으라고 했습니다. 

때가 있습니다. 회당장 야이로의 딸이 죽어가도 예수님은 때를 보셨습니다. 나사로이 죽어가도 예수님은 때를 보셨습니다. 그리고 때가 되었을 때 살리셨습니다. 다 때가 있으니 참아야 하고, 하나님은 참음을 보십니다. 이방 장군 나아만이 나병이 걸렸습니다. 자기 나라의 강물보다 좋지 못한 요단강에 일곱 번 들어가라는 엘리사의 말에 나아만은 순종하여 7번까지 인내하면 몸을 담갔습니다. 여리고도 한 바퀴만 돈 것이 아니라 6일 동안을 하루에 한 바퀴만 돌라고 하고 마지막 날에 일곱 바퀴를 돌고 함성을 지르게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다 하셨다는 감사의 함성입니다. 무엇이든지 이렇게 때가 있습니다. 

기다라는 즐거움이 있습니다. 기다릴 줄 알아야 즐겁습니다.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때를 기다려야 합니다. 때가 차매를 기다려야 합니다. 그리하지 아니하실지라도 기다려야 합니다. 오래 참으면 끝내 끌고 가십니다. 견인은 '牽引'도 되고, '堅忍'도 됩니다. 하나님이 끝까지 끌고 가시기 때문에 우리는 끝까지 참습니다. 요셉은 오래 기다렸습니다. 믿음의 맹장들은 감옥, 구덩이에서도 기다렸습니다. 하만을 빨리 죽이면 좋았을지라도, 하나님은 그가 장대 세울 때까지 기다리셨다가 모르드개와 에스더의 기도를 들으시고 하만을 그 장대에 달리게 하십니다. 오래 참음의 즐거움이 있습니다. 그러나 쉽게, 금방은 안 됩니다. 오래 참아야 그러한 열매가 맺힙니다. 



4. 결론 


사랑, 희락, 화평, 오래 참음을 생각하시고, 이것을 붙들고, 이것을 나에게 주셨다는 것을 감사하셨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