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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213][십자가지기교회 주일낮예배: 갈라디아서 강해(44): 그리스도의 복음] 육체의 일과 성령의 열매 3 (갈 5:19-23) 문병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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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213][십자가지기교회 주일낮예배: 갈라디아서 강해(44): 그리스도의 복음] 육체의 일과 성령의 열매 3 (갈 5:19-23) 문병호 목사


19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20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21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22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23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음성파일: 게시물 하단 "관련링크"에서 청취 혹은 내려받기 가능합니다. 



<녹취록>



1. 성탄과 보혜사 성령


해마다 12월이 되고 성탄이 가까워지면 성탄 찬양도 부르고 성탄 덕담도 하지만, 최근에는 이런 것들이 잠잠해진 것 같습니다. 미국에서 공부할 때 사역하는 교회에서 청년부를 만들어 새벽송도 해 봤습니다. 연초부터 코로나를 겪고 있습니다. 처음 겪는 일도 시간이 지나면 그런 일이 있었나 싶기도 합니다. 이것도 그럴 것입니다. 이런 예외적인 일이 있다고 해서 일상을 멀리하거나, 삶의 본질적인 것을 놓칠 수 없습니다. 코로나가 소란스러운 것은 이것이 모든 사람에게 왔기 때문입니다. 한 사람 한 사람 인생을 살펴보면, 코로나 같은 일을 겪는 사람들이 있어 왔습니다. 자기만이 알고 있는 힘든 일도 겪을 수 있습니다. 이런 때 아기 예수의 오심, 하늘에는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를 생각합니다. 아기 예수가 이 땅에 오셔서 우리를 감싸주시고, 힘든 것을 대신 져 주시고, 온유한 심령으로 우리를 이끌어 주시기를 바랍니다. 

주님이 이 땅에 오셔서 모든 의를 다 이루시고, 구원의 창시자요, 믿는 도리의 사도시요, 모든 것을 우리를 대신하셔서 다 이루셨습니다. 사람들은 여느 때와 다름 없이 살고 있었지만, 그 고요한 구유에 나셔서 모든 일들을 다 이루시고, 그 예수가 죽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보좌 우편에서 우리에게 성령을 내려주시고 누구든지 성도들은 다 성령을 받습니다. 성령을 받지 않는 성도는 없습니다. 성령은 인격적이고 단회적이고 절대적으로 임합니다. 그릇을 보고 임하지 않습니다. 그릇이 크다고 많이, 작다고 적게 임하지 않습니다. 그릇을 만들어 주시면서 우리에게 오시는 것입니다. 미리 준비된 그릇에 오시는 것이 아니라 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지경을 넓혀 가시면서, 지경 자체를 만들면서 오십니다. 우리는 그릇이 되지 못합니다. 악한 것을 담는 그릇은 있지만 거룩한 것을 담을 그릇은 전혀 없습니다. 물질이나 양이나 소유가 아닌 살아 계신 성령님이 인격적으로 우리에게 들어오십니다. 그래서 두 번 들어오시지 않고 한 번 들어오십니다. 한 번 들어오시면 그분이 사랑하셔서 전적으로 오시므로 임마누엘, 우리와 항상 함께 계시면서 우리에게 지시해 주시기도 하고 안위해 주시기도 하고 채워 주시기도 하고 심지어 우리가 모르는 것조차 기도해 주시기도 합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이 성령을 충만하게 받았습니다. 그래서 성령 충만은 없는 것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 이미 들어오신 성령이 마음껏 사시는 것입니다. 성령 충만은 다시 받는 것이 아니라 성령이 내 안에 마음껏 사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때때로 그렇지 않은 것처럼 기도할 때가 있지만 말입니다. 그래서 깨어서 기도하고 말씀 읽고 경건에 힘쓰는 것입니다. 우리의 발자국은 다 삐뚤삐뚤 합니다. 누구도 직선으로 걷지 못합니다. 그러나 성령이 임하면 끊임없이 우리를 새롭게 하시고 인도하십니다. 그래서 성령의 충만이라는 것은 우리가 이 땅에서 온전히 될 수 없지만 이미 임하신 성령이 우리 안에 역사하는 것입니다. 그 성령이 우리 안에 역사함으로 우리가 열매이자 알곡이 되는 것입니다. 



2. 성령의 열매


지난주부터 살펴본 22절부터의 아홉 가지 열매가 모두 단수라고 말씀드렸습니다. 19절, 육체의 일은 복수입니다. 그러나 성령의 열매는 단수입니다. 그래서 아홉 가지 열매라고 하지 말고 한 열매의 아홉 가지 맛이라고 하는 것이 좋습니다. 성령을 받은 모두에게 다 주시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의 다양한 은사로 볼 것이 아니라 성령의 열매는 모두에게 다 주시는 단수로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번 설교에서는 지난주에 이어 나머지 다섯 가지 열매에 대해 살펴보려고 합니다. 


1) 사랑


지난주에 사랑에 대해서는 사랑을 받았으므로 사랑한다고 했습니다. 눈치밥을 먹은 것이 아니라 사랑밥을 먹었으니 우리가 다른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순절 성령이 임하여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큰 일을 방언으로 하는데 그 일은 예수 그리스도가 죽고 부활하신 일입니다. 그것을 말하고 모이고 떡을 떼고 있는 것과 없는 것 모두 나누고 가르치고 한 것입니다. 그 영을 받으니 서로 사랑한 것입니다. 제일 먼저 사랑이 나온 것은 이것이 성도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본질적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누구에게나 사랑 받고 사랑 받은 사람이니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2) 희락


그리고 희락은 하나님이 우리를 기뻐하심을 이기지 못하시므로 이것이 우리 기쁨의 근원이 되는 것입니다. 스바냐서의 '그가 너를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신다'는 그 말씀입니다. 그것이 우리 기쁨의 근원이 되는 것입니다. 누군가 나로 인해 기뻐한다고 할 때 그것이 나의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여호와를 기뻐하는 것이 우리의 힘입니다. 하박국 선지자의 말처럼 여호와를 인하여 기뻐하고 구원의 하나님으로 인하여 기뻐하는 것입니다. 우리 안의 내밀한 기쁨이 있는 것입니다. 


3) 화평


화평에 대해서도 지난주 살펴보았습니다. 누구에게나 기쁨이 주어지는 것으로 살펴봤다면, 기뻐하려고 노력조차 할 필요가 없다고, 우리 자체가 기쁨 덩어리라고 살펴보았다면 화평은 자기 자리에 있는 것입니다. 샬롬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자리에 우리는 우리의 자리에 있는 것입니다. 주님이 화평케 하는 자로 오신 것은 하나님과 인류의 자리를 제대로 자리매김 하게 하심으로 담을 허물기 위함입니다. 사랑과 희락과 화평은 본질적으로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비추는 것뿐입니다. 그래서 화목은 다른 것이 없습니다. 옆집과 화목하려 한다면 신경을 써야 하겠지만 하나님과의 화목은 다른 것이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리에, 하나님은 하나님의 자리에 있으면 됩니다. 내가 눈을 들어 성소에 계신, 성산에 계신 하나님을 보리라. 하나님은 만유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의 평화는 바로 하나님은 하나님의 자리에 우리는 우리의 자리에 있을 때 있습니다. 


4) 오래 참음


다음으로 오래 참음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이것은 바로 하나님의 때를 우리가 기다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일을 감당한다면 우리의 스케줄대로 하면 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일을 할 때는 하나님의 때를 기다려야 합니다. 하나님의 때는 하나님이 영광을 받을 때요, 우리가 영적 결실을 얻을 때입니다. 그러니 기다려야 합니다. 나아만이 강에 한 번에 들어가지 않은 것도, 여리고 성을 여러 번 돌게 하신 것도 하나님의 때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일을 이루실 때는 분명히 두 바퀴, 세 바퀴 돌 때가 있습니다. 한 바퀴, 두 바퀴 돌아서 이루어진다면 내가 잘한 것으로 압니다. 어느 기도는 땅에 떨어진다고 하는데, 그런 기도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다 들으십니다. 우리의 몸짓 하나도 헤아리십니다. 우리의 심령의 갈등, 원망이나 아쉬움도 헤아리십니다. 인간의 부모도 자녀에 대해 그리 아는데 하물며 하늘에 계신 하나님은 어찌하겠습니까. 하나님 편에서 끌고 가시는 것과 우리 편에서 참는 것, 그러므로 견인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끌어 가십니다. 처음 세 열매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해 주셔서 우리가 비추는 것이라면 오래 참음은 때를 기다리는 것이고, 이제 나머지 열매는 우리가 드러내는 것입니다.


5) 자비


자비는 우리가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성령이 임하면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자비를 베풀게 된다는 것입니다. 자비는 지은 사람이 지은 것에 대해 가지고 있는 불쌍히 여겨서 돌보는 마음입니다. 낳아 봐야 알고 만들어 봐야 아는 그 심정이 바로 자비의 심정입니다. 

자비라는 것은 첫째로 긍휼의 마음입니다. 영어로 compassion 즉, 함께 고난을 받는 것입니다. 자비는 바로 함께 고난을 받는 것입니다. 옛날 성경에는 '체휼'이라고 했습니다. 몸으로 불쌍히 여기는 것입니다. 함께 아프고 함께 괴로워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무정한 세상이라고 하셨습니다. 

둘째는 함께 성령의 숨을 쉬는 것입니다. 라틴어에 '콘스피라치오'(conspiratio)라는 말이 있습니다. 함께 호흡한다는 의미입니다. 그게 바로 자비입니다. 아파하는 자와 함께 아파하고 목마른 자와 같이 목마른 자리에서 물 한 잔을 주고 병원에 있는 자에게 위문하는 것, 이런 것이 바로 소자에게 한 것이 나에게 한 것이라는 주님의 말씀, 자비의 영역입니다. 성령이 임하여 자비의 마음을 갖기 때문에 원수를 내 몸과 같이 사랑하게 됩니다. 이해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이 악한 것을, 사람이 악하다기보다 세상이 악하다는 것을 이해하니 말입니다. 그러니 악인도 불쌍하게 여기게 됩니다. 내 자식을 괴롭힌 자를 용서해 달라고 하는 것이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그래서 뉴스에 나오는 것이 항상 피해자의 보호자들은 처벌이 약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쉬운 일은 아닙니다만 긍휼이 있으면 원수조차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이것이 바로 자비입니다. 고난은 같이 덜어 준다고 해도 죄 짓는 것을 용서하는 일은 정말 어려운 입입니다. 주님은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는 데 멈추면 안 된다고 하셨습니다. 네 원수를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자비라는 것이 내가 낮아지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나는 선하고 다른 사람은 악하다고 생각하면 절대 불가능합니다. 저 사람은 티가 있고 나에게 들보가 있다고 생각할 때 비로소 원수도 사랑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 마음이 없이는 원수를 사랑할 수 없습니다. 나도 사기꾼이다, 나도 강도다, 나도 살인자라는 마음이 있어야 자비의 심정이 생깁니다. 그렇지 않고는 도저히 힘듭니다. 그것이 바로 자비의 마음입니다. 무정하면 편하게 살 것 같아도 괴롭습니다. 용서하면 이 세상이 소망입니다. 어떻게 보면 괴롭히는 사람이 편안히 살 것 같아도 용서하는 사람이 편안히 삽니다. 그것이 믿는 자에게 주시는 성령의 은사라고 생각합니다. 자비입니다. 자비라는 말을 한마디로 한다면 부성적 긍휼, 아버지가 베푸는 마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용서할 수 있습니다. 함께 아파할 수 있습니다. 성령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야 우리가 삽니다. 나는 절대 용서 못한다고 하는 사람은 자기가 먼저 죽습니다. 하나님이 아신다고 해야 자비의 마음, 밟히고 밟혀도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생깁니다.


6) 양선


다음으로 양선이 있습니다. 양선은 구약에도 신약에도 나오는 선하신 하나님이라는 단어에 쓰이는 말입니다. 구약에서는 '토브', 신약에서는 '아가토스'입니다. 그런데 몇 번 말씀을 드린 것처럼 '선한다'는 말은 '진리 가운데 복되다'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선하신 하나님, 우리를 선하게 하소서'라고 할 때 선에는 복이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착한 사람이 복된 것입니다. 이 복되다는 말은 진리 가운데 착한 것입니다. 진리 가운데 복된 것, 그것이 선한 것입니다. 말씀대로 선하고, 예배 가운데 선하고, 하나님이 기뻐하심 가운데 선합니다. 우리가 기도하는 것은 바로 이 부분입니다. 말씀 가운데 복을 받는 것이요, 이것이 선한 것입니다. 그래서 여호와가 우리를 선히 보신다고 하면 복되게 하신다는 말과 같습니다. 그런데 결코 하나님은 우리를 불법 가운데, 불의 가운데, 비진리 가운데 복되게 하지 않으십니다. 그것은 선이 아닙니다. 구약 히브리어의 '토브'라는 단어, 신약 헬라어의 '아가토스'라는 말은 말씀에 반듯히 서 있을 때 복된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이것은 바로 성화, 날마다 성화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말씀을 붙들고 기도하면서 복을 누립니다. 무엇을 구하기 전에 기도하게 하십니다. 그래야 말씀에 맞습니다. '그리 아니하실지라도'가 있기 때문입니다. 진리 가운데 복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비진리 가운데 복을 누리게 절대 하나님이 하시지 않습니다. 그것은 선이 아닙니다. 이것을 피해 가게, 모면하게 하소서, 불법을 자행하게 하면서 복되게 하소서, 이런 것이 이루어진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멸망시키실 때 입니다. 성령을 받으면 말씀이 좋아지고 그것을 붙들고 기도하니 진리 가운데 복되고 바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양선입니다.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느니라"(벧후 1:4). 성령을 받은 사람은 올바른 가운데 복을 누립니다. 그러니 복은 상급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복, 신령한 복입니다. 밥 한끼 먹고 버리는 것이 아니라 계속 누리는 것이 상급입니다. 이것이 양선입니다. 선량하고 선한 것입니다. 선이라고 해도 됩니다. 우리가 복된 것은 모두 상급이 되어야 합니다. 이 땅에서 그저 누리고 버리는 것이 아닙니다. 이 땅에서는 누리고 하늘나라에서는 상급인 것, 그것이 바로 복입니다. 하나도 땅에 떨어져 그냥 없어지지 않습니다. 이것이 바로 양선이며 그래서 우리가 선을 위해, 착하기 위해, 말씀 붙들고 기도하면서 복돼야 합니다. 말씀 붙들고 우리가 기도하면 다 열립니다. 그런 경험을 많이 하게 하십니다. 그것이 복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상급입니다. 성도에게 주십니다. 체험주의가 아닙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7) 충성


다음으로는 충성이 있습니다. 충성은 믿음이라는 말과 같이 쓰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을 따르고 하나님께 충실하는 것, 그것이 바로 충성입니다.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고전 4:2). 믿지 않는데 충성할 수 없습니다. 헬라어로 '피스티스'입니다. 믿음도 충실함도 됩니다. Faith도 되고 faithfulness도 됩니다. 그것이 바로 충성입니다. 믿음도 되고 충성도 됩니다. 좌로 우로 치우치지 않고 말씀만 보고 갑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담대히 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충성입니다. 주님도 이땅에서 하나님의 아들로 충성을 다했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그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하고"(마 25:21). 충성할 수 있는 자리에 세우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굳이 모세를 요나를 들어 일하시는 것은, 사울을 들어 이방의 빛을 삼아 일하시는 것은, 어부 베드로를 들어 일하시고 충성을 요구하시는 것은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고 자기의 능력과 친히 행하심을 드러내시기 위함입니다. 미련한 자를 들어 지혜로운 자를 부끄럽게 하시는 것입니다. 있는 자를 없는 자를 들어 부끄럽게 하십니다. 

성령의 지시대로, 감동대로 충성합니다. 아멘의 종입니다. 충성입니다. 충성이라고 하면 군대에서의 복종을 생각할 수 있으나, 충성이라는 것은 하나님이 길을 내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울은 당대 최고의 지식인이었습니다 베냐민 지파 가말리엘 수하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어찌해야 하는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때 하나님이 이리 오라고 하셨고 따라갔습니다. 그것이 충성입니다. 시므온도 그랬습니다. 정결례를 행하러 오신 예수를 보고 '종을 이제 평안히 놓아 주시는 도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길을 내시고 우리는 쫓아가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1차 전도여행 후 소아시아로 가려고 했으나 전날 밤 마게도냐인이 꿈에 나타나게 하셔서 방향을 바꾸셨습니다. 충성이라는 것은 그런 것입니다. 여호와의 지시하심에 따른 것입니다. 맡은 자에게 구할 것은 충성입니다. 서머나 교회도 환란과 궁핍이 있었습니다. 대박해가 있으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죽도록 충성하면 생명의 관을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생명의 면류관입니다. 충성이라는 것에는 지시가 있습니다. 지시가 있고 상급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지시에 충실히 따르는 것, 그것이 복되다는 것입니다. 


8) 온유


성령의 복을 받으면 충성과 온유의 마음이 생깁니다. 우리에게 성령이 임하면 온유한 마음이 생깁니다. 온유는 울타리 안에 머무는 것입니다.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마 5:5). 우리 주님께서도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지고 배우라고 하셨습니다. 온유라는 것은 우리 안에서 삭이는 것입니다. 빨리 타서 재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온유는 삭이는 것입니다. 과일에도 과즙이 있고 고기에도 육즙이 있다고 합니다. 우리에게도 영적인 즙이 있는데 온유입니다. 푹 배어서 즙이 나와야 합니다. 그것이 온유입니다. 우리의 영혼에 성령의 삶에 영적인 즙이 있습니다. 삐져나오는 것은 깊은 맛이 없습니다. 깊이 삭여야 합니다. 그것이 온유입니다. 파인애플 껍데기로 요리를 할 수 없습니다. 빛은 스스로 빛이 없습니다. 부딪쳐야 빛이 납니다. 온유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부딪쳐야 우리에게도 색이 납니다. 내가 스스로 빛이라고 하면 안 됩니다. 달은 밝은 이유는 해의 빛이 비쳐서 그런 것입니다. 온유는 말씀에 부딪쳐서 하나님의 뜻에 부딪쳐서 나와야 합니다. 내가 무엇을 하겠다고 하면 온유가 아닙니다. 소금은 자기를 주장하는 것이 아니고 맛을 도와주는 것입니다. 다른 맛을 살려 줍니다. 이것도 온유입니다. 내가 맛이 있다고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다른 맛을 도와줍니다. 촛불은 자기를 불태워서 향과 빛을 냅니다. 자기를 깎고 태우고 소진하면서 그때 온유한 자가 기업을 얻는 것입니다. 내가 기업을 얻으려면 온유해지고 깎이고 소진돼야 합니다. 내가 스스로 빛이 나면 안 됩니다. 그것이 바로 온유입니다. "그러나 온유한 자들은 땅을 차지하며 풍성한 화평으로 즐거워하리로다"(시 37:11).


9) 절제


마지막 열매는 절제입니다. 저는 절제를 가장 고급스러운 덕목이라고 생각합니다. 자기를 쳐서 복종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은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은 아니니"(고전 10:23). 절제라는 것은 성령의 또 다른 맛이라기보다 모든 여덟 가지 맛을 드러내는 방식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내가 선하고 양선이 있으니 너는 악하다고 말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은 먹거나 마시거나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고전 10:31). 사람들 모인 데서 내가 이런 능력이 있다고 자랑하는 것은 성령의 덕이 아닙니다. 절제가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가장 고상한 것입니다. 덕을 세우는 것입니다.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웁니다. 절제하려고 하면 터집니다. 우리는 터지고 병에 걸립니다. 절제하는 한 가지 방법은 오직 기도하는 것입니다. 기도 안하고 절제하면 혈압이 오르고 쓰러집니다. 터집니다. 기도 안하면 한 쪽만 보이지만 기도하면 만유의 하나님이 여러 모습을 보이시고 인도하십니다. 만유 안에 만유의 하나님이 인도하십니다. 이성으로 하면 이쪽으로만 갑니다. 저쪽으로만 가고 삐져 나옵니다. 복이 없습니다. 온유가 없습니다. 맛이 없습니다. 기도는 하나님 앞에 가서 아뢰는 것입니다. 기도는 대화이되 듣는 대화입니다. 자꾸 내가 말하는 것이 기도라고 하지 말고 그 자리에 가서 듣는다고 생각하십시오. 기도의 본질이 이것입니다. 절제라는 것은 나의 것이 없고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라는 마음, 거룩함, 구별하여 드리는 것과 같습니다. 그때 우리가 절제가 생깁니다.



3.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불가항력적 은혜 


이러한 법을 금지할 법이 없습니다. 어떤 법도 성령의 이 능력을 막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불가항력적인 은혜로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심령에 마음에 새겨집니다. 이 법을 아무 법도 이기지 못합니다. 온유가 강퍅함을 이깁니다. 이것을 막을 금지할 법이 없습니다. 

성령의 은혜, 아홉 가지 맛이 나는 열매입니다. 코로나로 어려움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이 임하면 성령이 하십니다. 내가 덜 기도해서 덜 아멘해서 덜 의지해서 그렇습니다. 가장 중요한 말씀은 그릇을 보고 주시는 것이 아니라 성령이 임하면 그릇이 커지는 것입니다. 내게 무엇을 채워달라고 하지 마시고 성령이 임하니 '하나님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라고 기도합니다. 없는 것을 들어 있는 것을 폐하십니다. 약한 자를 들어 강한 자를 부끄럽게 하십니다. 미련함이 지헤를 부끄럽게 합니다. 내 그릇과 내 스케줄을 잡아놓고 기도하십니까, 성령이 임하면 그릇을 만들어서 채우십니다.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 흡족한즉 너희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에 게으르지 않고 열매 없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니와"(벧후 1:8). 베드로는 가장 핍박이 임할 때 소아시아 교회에 두 가지를 얘기합니다. 그리스도를 알고 성령의 열매를 맺으라는 것입니다. 성령의 열매는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뼈에 사무치는 말씀입니다. 그리스도를 알면 열매를 맺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절입니다.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 영광이 이제와 영원한 날까지 그에게 있을지어다"(벧후 3:18). 



4. 결론


우리가 이제 말씀을 마칩니다. 성령의 열매가 더 풍성해지는 것은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바라봐야 합니다. 그러면 다 그칩니다. 다 이루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