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1220][십자가지기교회 주일낮예배: 갈라디아서 강해(45): 그리스도의 복음] 성령으로 살고 행함 (갈 5:24-26) 문병호 목사
24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25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
26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노엽게 하거나 서로 투기하지 말지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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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취록>
1. 영과 영혼을 구별하라
옛날 철학자들은 우리의 영혼이 고상해서 잘 계발하고 육체를 영혼과 분리시켜서 영혼으로만 살 수 있다면, 천사같이 살 수 있다면 신과 같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플라톤도, 아리스토테렐스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우리가 몇 주간 보는 성령은 영이라고 해서 우리의 영혼에서 나오는 소질이나 자질과 다릅니다. 하나님은 영이시지 영혼이 아닙니다. 영은 스스로 계심, 바로 하나님을 뜻합니다. 그래서 철학자들이, 이 세상이 인간의 영혼과 하나님을 혼동하는 것은 위험합니다. 영혼에 속한 것을 미화하고 극대화시키면 그것이 하나님의 자리인 것처럼 설교하기도 하고 가르치기도 합니다. 특별히 신사도운동이 그렇습니다.
2. 성령이 영육 간에 역사한다
하나님은 하나님이시고 성령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의 영혼은 피조물입니다. 영혼을 가진 존재는 천사와 사람 두 존재밖에 없습니다. 천사는 영혼으로, 인간은 영혼과 육체로 하나님이 빚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영혼은 육체와 함께 이 땅에 존재하고 성령이 임하면 육체와 영혼 모두에게 역사하십니다.
지난주까지 육체의 일과 성령의 열매에 대해 봤는데, 육체라는 것은 성령을 담지 않는, 받아들이지 않는 것을 표현할 뿐이지 육체를 저급하고 잘못된 것으로 보지 않습니다. 성경은 잘못된 금욕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성령은 영육 간에 모두 온전케 하십니다. 성령이 임한다는 것이 얼마나 좋은 말입니까. 감히 누가 성령을 부르고 잡아당기고 초대합니까? 성령은 절대적으로 인격적으로 단회적으로 우리에게 택함받은 백성에게 하나님의 뜻에 따라 때가 찬 경륜으로 임하시는 것입니다. 각자에 정한 시간에 성령이 임하면 우리 자신이 변하고 그리스도 안에 살게 되고 아멘의 순종이 생기고 하나님을 찬미하고 예배드리게 됩니다. 성령이 임하면 살아나게 되고 살아가게 되는데 하나님의 아들로 그렇습니다.
3. 성령으로 살고 행함
본문 25절입니다.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갈 5:25). "살면"이라는 말은 우리가 생명을 부여받는 것이고 뒤의 "행할지니"는 생활을 의미합니다. 행한다는 말은 5장 16절의 말씀처럼 성령을 따라 걷는 의미입니다. 이스라엘의 표현으로 '함께 걷는다'는 말은 '함께 행한다'는 의미입니다. 본문 25절의 성령으로 행할지니는 '스토이케오'라는 헬라어로 걷는다는 의미입니다. '따라 걷는다', '함께 걷는다'는 다 같은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성령으로 살아난 자는 성령을 따라 걷는다는 것이며, 이것을 바로 '행한다'는 말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16절, 25절의 '행한다'는 말이 헬라어로는 다른 단어인데 의미는 '성령을 따라 걷는다'는 것으로 동일합니다. 그래서 성령이 임하면 우리가 살아납니다. 성령으로 살면 성령으로 행하여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령으로 살아난 것이 은혜이므로 그를 따라 행하는 것은 은혜 가운데 이끌림을 받는 것입니다. 불가항력적으로 끌려가는 것입니다. 저는 삭개오가 불가항력적 은혜를 받아 새사람이 됐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들이 이전의 습성을 버리고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주고 잘못 거둔 것을 네 배로 갚아주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수치스럽게 살던 사람들이 메시아를 전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이 임하고 성령으로 행하는 사람입니다. 빛 없이 동굴 속에 살던 사람이 한 줄기 빛이 들어오니 그 빛을 따라 이리 보거나 저리 보지 않고 정진하는 것입니다. 불가항력적인 은혜입니다.
우리의 기도는 분명합니다. 우리는 그곳에 있고 하나님이 이끄십니다. 기도는 하나님과 대화하는 것이로되 대화라는 말을 쓰려면 하나님을 듣는 대화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는데 내가 하나님께서 그리 하시도록 하려고 부르짖는 것입니다. 내가 말하는 것 자체에 본질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하나님께 보이고 아뢰고 해서 하나님이 나를 보고 나를 들으시고 말씀하시는 것을 듣기 위한 것이 기도라는 말입니다. 바로 성령이 임하면 이러한 은혜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4. 그리스도가 다 이루신 의를 전가하는 성령
구약시대 때 성령은 신약시대와 동일합니다. 하나님은 영원하시고 삼위일체 이십니다. 그러나 신약의 성령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다 이루었음을 믿는 영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자기 자신을 주신 정점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그래서 성령이 임하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과 다 이루심을 본다(갈 3:1)는 것이 바로 십자가를 밝히 보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본다는 것은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셔서 그곳에서 죽기까지 순종하시고 자기 자신으로 주심으로 그렇습니다. 우리가 다 성령을 받았습니다(갈 3:2-5). 성령을 주시려고 주님이 이 땅에 오시고 다 이루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셨습니다. 그래서 내가 떠나는 것이 유익인 것은 또 다른 보혜사를 주시기 위함이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새 시대의 영입니다. 다 이루시고 주시고 죽고 부활하셔서 그 우편에서 우리에게 내려주시는데, 자기 자신을 버리신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그 자신을 우리에게 내려주시는 것입니다.
1) 개별적으로 임하시는 성령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나를 위하여"입니다. 신앙의 단위는 '나'입니다. 구원의 단위도 '나'입니다. '나를 위하여', '나의' 하나님입니다. 우리 하나님이 먼저가 아닙니다. 우리 하나님이 계신데 나의 하나님은 계시지 않는다면 그것은 잘못된 공동체 신앙입니다. 우리가 길을 가나 어디에서 생각을 하나 하늘을 쳐다보나 항상 나의 하나님입니다. 나의 하나님이 계시니 우리의 하나님도 보이는 것입니다.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입니다. 믿음이 오기 전에는 매일 몇 번 금식했냐, 몇 번 기도했냐 따졌고 그것이 주가 됩니다. 믿음이 오기 전에는 어떻게 손을 씻고 어디에 앉고 어디를 갔는지 전통과 유전이 문제가 됐습니다. 그러나 이제 주님이 오셔서 모든 의식을 폐하시고 율법을 완성하셨으므로 이전에는 율법에 매인 바 되었으나 이제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2) 양자의 영
손님과 아들은 다릅니다. 이를 가르는 딱 한 단어는 바로 자유입니다. 하갈의 자손과 아브라함의 자손입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습니다. 완전해서가 아니라 아들이니 아들입니다. 성령이 인격적으로 임하면 예수의 다 이루신 것이 우리 것이 되므로 아들의 신분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아들의 신분은 버릴 수도 없습니다. 불가항력적인 은혜, 신분입니다. 평범한 말 같아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는 말이 이 의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더 이상 저주 아래 있지 않습니다.
잘 믿고 따른다 하며 평생 율법을 연구하는 바리새인, 사두개인, 서기관들이 금식하고 기도하고 구약을 끊임없이 금식하면서 메시아에 대해 말을 합니다. 그러나 정작 예수가 왔을 때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성령을 받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베데스다에서 38년 된 병자가 낫고 실로암에서 눈먼 자가 눈을 뜨고 중풍병자가, 거라사 광인이, 수로보니게의 딸이, 백부장의 신하가, 열두 해 혈루병 환자가, 회당장 야이로의 딸이, 나인성 과부의 아들이, 나사로가 죽었다 살아나고 병에서 낫는 일이 있었습니다. 이런 모든 표적과 기적을 봐도 돌을 들어 죽이려 합니다. 그것이 인간의 심성입니다. 인간의 가장 악한 심성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의 마음 안에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을 주셨는데 하나님을 대체하기 위해, 대적하기 위해 우상을 만들어 섬기는 것입니다. 성령을 받지 않으면 다 그렇게 됩니다. 우상을 섬기고 성전에서 음행하고 자식을 태워 바치고 합니다. 보혜사 성령이 임해서 우리가 믿은 것입니다. 아무나 믿음을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쉽게 그저 수월하게 믿은 것 같아도 말입니다.
5. 성령이 임하여 누리는 복과 약속
성령을 인해 우리가 믿게 되어 우리가 두 가지를 누립니다. 우선 복을 누립니다. 아브라함의 복을 여러 가지로 이야기했었습니다. 땅, 후손의 복 등입니다. 그런데 그 복을 주님이 딱 집어 말씀하신 것이 팔복입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복이 주어집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믿음이 주어지면 약속이 주어집니다(갈 3:14). 성령이 임해 그리스도를 믿게 되면 복을 누리고 약속을 얻습니다. 성령의 약속, 이것은 즉 말씀에 붙어 있는 하나님의 복입니다.
1) 너는 내 것이라, 나는 그리스도의 것이라
그러므로 결국 우리에게 성령이 임하면 팔복, 성령의 열매가 역사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것이 됩니다.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내가 너를 낳았도다"(시 2:7). 하나님이 너는 내 것이라 하면 우리는 하나님은 내 것이라고 화답하여야 합니다. 이것은 교만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내 안에, 내가 하나님 안에 있습니다. 순서는 분명히 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먼저 내 것이라고 택하여 세워 주시면 이제 우리가 하나님이, 그리스도가, 성령이 내 것이라고 화답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붙들린 바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로 자녀들입니다. 일 년 내내 머물러도 객은 아버지라 부를 수 없습니다. 그러나 먼 곳에 가서 십 년만에 집에 와도 그 자식은 자식입니다. 아버지는 내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내 것이라고 담대히 말합니다. 영생이 바로 이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내 안에, 내가 하나님 안에 그리하여 우리가 하나되는 일이 있습니다(요 17:21).
본문 마지막 절은 헛된 영광을 구하지 말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내 것이라 부르고 나는 하나님을 내것으로 부르는 것, 완전하심의 우리에게 임재하심이 영광입니다. 하나님이 없이는 영광이 없습니다.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오셔서 영원히 떠나가지 않으십니다. 임마누엘 하나님이 우리 안에 계십니다. 성령이 임하면 떠나가지 않습니다. 떠나가지 않습니다. 여름에는 조금 더 밀착한 것 같고 겨울에는 떨어진 것 같아도 우리 편에서 하는 것이 아니라 임마누엘 하나님, 여호와 하나님이 언제나 우리 안에 함께 계시므로 동일합니다.
2) 팔복과 성령의 열매
그리스도가 산상보훈에서 천국의 헌장을 선포하시면서 가장 먼저 하신 것이 팔복입니다. 성령이 임하면 우리에게 복을 주시는 그것이 팔복입니다. 이 복을 누리는 자는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갈 5:24)입니다. 그리스도 예수께 속한 사람들입니다(롬 8:9; 갈 3:29). 이 세 가지가 다 같습니다. 소유격입니다. 너는 내 것이라는 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 그리스도의 사람, 그리스도의 것, 이것이 모두 같은 말입니다. 이 사람은 바로 팔복을 누리는데 이 복이 참 귀합니다. 그런데 팔복은 성령의 열매와 함께 있습니다. 지지난주에 육체의 일 열다섯 가지를 보고(그 이상이 더 있다고 말했고) 그 후에 성령의 열매는 아홉 가지로 봤습니다. 성령의 아홉가지 열매는 열매가 아홉가지라는 것이 아니라 누구나 누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로마서 12장, 고린도전서 14장은 교회 안에서 은사로서 열매가 있습니다. 이것은 교회에서의 직분과 연결되므로 개별적인 속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열매는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한 열매의 아홉 가지 맛과 같은 것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천국이 저희 것입니다. 심령이 가난한데 성령이 없으면 천국의 것을 소유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심령의 가난함을 주십니다. 그리하여 기도하게 하십니다. 사람은 문제가 없거나, 남으면 절대로 기도 안 합니다. 그러면 심령이 가난한 자는, 부족한 자는, 어떻게 천국이 저희 것입니까. 이는 이미 성령의 열매가 우리 안에서 역사해서 그 가운데 우리가 세상에 부대끼는 것입니다. 세상에 부대낄 때 우리가 가난해집니다. 이것은 굳이 표현하지 않아도 심령이 가난하다라고 느낍니다. 저 사람들은 저리 잘 어울리고 잘 노는데 왜 나는 외톨박이일까? 이것도 심령이 가난한 것입니다. 세상은 아름답고 추억이라 할 수 있어도 많은 경우 그것이 죄와 관계될 수 있습니다. '옛날에 친구들과 돌아다녔다', '그때가 좋았어'라고 합시다. 그런데 그것이 가출한 것에 대한 말이라면 죄에 대한 것일 수 있습니다. 이런 것들을 다 내려놓으면 가난해집니다. 친구도 없는 것 같고 그렇습니다.
그때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는 것입니다. 성령이 임하면 애통하고 눈물이 납니다. 다 좋은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눈물을 흘리고 애통합니다. 수치거리가 되고 예레미야와 같이 저주거리가 됩니다. 그래서 눈물이 있습니다. 밤새 기도해서 수치거리가 됩니다. 수치거리가 되기 위해 밤새 기도합니다. 애통하는 자는 위로가 있습니다. 신령한 위로를 받으려면 애통함이 있어야 합니다. 사랑, 희랑, 화평, 오래참음입니다. 성령의 열매가 우리 안에 역사를 합니다. 성령의 아홉 가지는 우리에게 다 있습니다. 하나님이 자녀 삼아 주시고 성령 주셨고 열매를 맺게 하십니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열매를 맺게 하고 또 너희 열매가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라"(요 15:16).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가 있는 장입니다. 내가 이제 인간이 조금 돼서 싸우지 않고, 희락하고, 남과 화평하고, 남을 불쌍히 여기는 자비, 양선이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뭔가 해야 할 것 같으면 항상 약속이 있습니다. 내가 어떠해서 그러는 것이 아니라 약속을 주시므로 친히 행하신다는 것입니다.
6. 받은 은혜에 대한 담대한 고백: 십자가에 못 박았다
본문은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갈 5:24)라고 합니다. 육체는 거듭나지 않은 것을 의미합니다. 십자가에 못 박았다라는 말은 이곳에서만 능동태로 나옵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이 십자가에 못 박았다고 합니다. 다른 곳은 모두 '못 박힌 것'으로 수동태입니다(갈 2:20). 우리에게는 수동태가 더 익숙합니다. 그리고 갈라디아서 6장 14절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본문 5장 24절만 능동태로 표현됩니다. 이것은 성령의 열매가 임하니까, 우리가 한 것이 아니지만 우리가 한 것으로 고백하고 믿는 것을 의미합니다. 믿음도 우리에게 주신 것인데 우리가 믿는다고 표현합니다. 이것과 같은 것입니다. 나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게 하셨으므로 우리가 십자가에 스스로 못 박았다고 담대히 고백하는 것입니다. 담대한 고백이 없으면 세상을 못 이깁니다. 본문이 바로 그것입니다. 대단하네, 사람이 못 박았네 이렇게 볼 것이 아니라 우리가 못 박혔기 때문에 못 박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이 임한 삶의 원리입니다. 사랑해 주시니 사랑하고 믿음 주시니 믿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사탄아 물러가라'고 하십시오. 그러나 은혜의 불가항력 가운데 그렇게 합니다. 지금까지는 못 박혔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와 함께 은혜를 누렸습니다. 그런데 본문은 이것을 담대히 고백하는 것입니다.
7. 헛된 영광을 구하지 말고 하나님을 찬양하라
이 가운데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헛된 영광을 구하지 말라는 본문 26절이 바로 이 말씀입니다. 헬라어로 헛된 영광은 비어 있는 영광을 의미합니다. 비어 있는 것은 바로 성령의 임재, 즉 성령의 임재가 없는 영광입니다. 영광은 자랑입니다. 그런데 성령이 비어 있습니다. 헛된 자랑인 것입니다. 성령의 역사가 없는 일, 이것은 헛된 자랑입니다. 땅의 영광을 구하고 사람에게 맞추는 영광을 구합니다. 내 자랑을 하는 것입니다. 칼빈은 내 자랑은 갈대에 나를 얹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공로를 과신하는 것이 가장 위험한 일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자랑하고 나도 자랑하고 이렇게 되지는 않습니다. 끊임없이 그 둘 사이에 갈등하다가 미친 자가 있습니다. 바로 사울 왕입니다. 그는 누가 봐도 총명하고 잘생기고 왕이 될 감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봐도 그가 미친 것은 자기 자랑이 남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예 내 자랑만 하면 그대로 살고, 하나님을 자랑하면 '아멘'인데 그것이 반반 섞이니 사울과 같이 영적으로 미쳐 버리는 것입니다. 엉뚱한 것을 찾는 것입니다. 죽은 사무엘을 불러내는 엉뚱한 일을 하는 것입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을 찾아야지 왜 죽은 사무엘을 찾습니까.
영광은 완전함이고 영광은 임재입니다. 완전하신 하나님이 우리 안에 있을 때 그렇지 않으면 헛된 영광입니다. 영어 단어가 생각이 납니다. Vainglory입니다. 빈 영광입니다. 헛된 영광, 텅 빈 영광입니다. 솔로몬도 그랬습니다. 처음에는 지혜를 구하고 판단을 잘 했습니다. 아버지 다윗의 영향을 받아서 말입니다. 그런데 이방의 왕들을 만나서 영향을 받았습니다.
다윗은 자신이 체험한 것을 시로 썼습니다. 시편입니다. 저는 어줍잖은 사람이지만 이 말씀을 해 봅니다. 저도 그리스도에 대한 시를 쓰고 싶습니다. 성경의 사실만 가지고 시를 쓰고 싶습니다. 제가 요즘 복음서를 거의 다 읽어 가고 있는데요, 그리스도에 대해 너무 모르는 것이 많은 것입니다. 천 페이지 넘게 기독론에 대해 썼는데 말입니다. 칼빈은 그리스도인은 사실만 노래하라고 말했습니다. 은유도 말고 미화도 말고 사실만 하라고 했습니다. 성경의 사실만 가지고 노래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그래서 저도 해 봤습니다. 하나님이 데려가시기 전에 그거라도 해볼 수 있지 않을까. 별다른 일이 아니라 누구라도 할 수 있는 일로 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에 대해 시를 써 보되 내 정서가 아닌 성경의 사실만을 가지고 말입니다.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지혜로운 자는 그의 지혜를 자랑하지 말라 용사는 그의 용맹을 자랑하지 말라 부자는 그의 부함을 자랑하지 말라 자랑하는 자는 이것으로 자랑할지니 곧 명철하여 나를 아는 것과 나 여호와는 사랑과 정의와 공의를 땅에 행하는 자인 줄 깨닫는 것이라 나는 이 일을 기뻐하노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렘 9:23-24). 자랑하는 자는 명철하여 하나님을 아는 것을 자랑하라고 합니다. 여호와는 사랑과 공의를 행하시는 분이심을 깨닫는 것을 자랑하라고 합니다. 지혜도, 부함도, 용맹도 자랑하지 말고 여호와를 아는 것과 여호와의 사랑과 긍휼, 자비, 공의, 진리를 아는 것을 자랑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그대로 따옴표해서 사도 바울이 말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고전 1:27-28). 없다고 두려워하거나 있다고 자랑 마시고, 없는 것, 천한 것, 약한 것을 들어서 있는 것, 유식한 것을 폐하시는 하나님이심을 기억하십시오.
8. 결론
몇 주간 성령에 대해 말씀을 나눴습니다. 우리가 성령을 다 받았고 그 열매가 우리 안에 역사합니다. 그리고 참 영광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날 위해 자기 자신을 드리신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삽니다. 우리에게 이 은혜가 넘치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참 영광을 돌리는 자들이 되길 바랍니다. 이 가운데 코로나로 힘들어도 부요함을 누리고 하나님이 형통케 하시는 은혜를 누리시길 축언합니다.
[20201220][십자가지기교회 주일낮예배: 갈라디아서 강해(45): 그리스도의 복음] 성령으로 살고 행함 (갈 5:24-26) 문병호 목사
24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25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
26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노엽게 하거나 서로 투기하지 말지니라
*음성파일: 게시물 하단 "관련링크"에서 청취 혹은 내려받기 가능합니다.
<녹취록>
1. 영과 영혼을 구별하라
옛날 철학자들은 우리의 영혼이 고상해서 잘 계발하고 육체를 영혼과 분리시켜서 영혼으로만 살 수 있다면, 천사같이 살 수 있다면 신과 같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플라톤도, 아리스토테렐스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우리가 몇 주간 보는 성령은 영이라고 해서 우리의 영혼에서 나오는 소질이나 자질과 다릅니다. 하나님은 영이시지 영혼이 아닙니다. 영은 스스로 계심, 바로 하나님을 뜻합니다. 그래서 철학자들이, 이 세상이 인간의 영혼과 하나님을 혼동하는 것은 위험합니다. 영혼에 속한 것을 미화하고 극대화시키면 그것이 하나님의 자리인 것처럼 설교하기도 하고 가르치기도 합니다. 특별히 신사도운동이 그렇습니다.
2. 성령이 영육 간에 역사한다
하나님은 하나님이시고 성령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의 영혼은 피조물입니다. 영혼을 가진 존재는 천사와 사람 두 존재밖에 없습니다. 천사는 영혼으로, 인간은 영혼과 육체로 하나님이 빚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영혼은 육체와 함께 이 땅에 존재하고 성령이 임하면 육체와 영혼 모두에게 역사하십니다.
지난주까지 육체의 일과 성령의 열매에 대해 봤는데, 육체라는 것은 성령을 담지 않는, 받아들이지 않는 것을 표현할 뿐이지 육체를 저급하고 잘못된 것으로 보지 않습니다. 성경은 잘못된 금욕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성령은 영육 간에 모두 온전케 하십니다. 성령이 임한다는 것이 얼마나 좋은 말입니까. 감히 누가 성령을 부르고 잡아당기고 초대합니까? 성령은 절대적으로 인격적으로 단회적으로 우리에게 택함받은 백성에게 하나님의 뜻에 따라 때가 찬 경륜으로 임하시는 것입니다. 각자에 정한 시간에 성령이 임하면 우리 자신이 변하고 그리스도 안에 살게 되고 아멘의 순종이 생기고 하나님을 찬미하고 예배드리게 됩니다. 성령이 임하면 살아나게 되고 살아가게 되는데 하나님의 아들로 그렇습니다.
3. 성령으로 살고 행함
본문 25절입니다.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갈 5:25). "살면"이라는 말은 우리가 생명을 부여받는 것이고 뒤의 "행할지니"는 생활을 의미합니다. 행한다는 말은 5장 16절의 말씀처럼 성령을 따라 걷는 의미입니다. 이스라엘의 표현으로 '함께 걷는다'는 말은 '함께 행한다'는 의미입니다. 본문 25절의 성령으로 행할지니는 '스토이케오'라는 헬라어로 걷는다는 의미입니다. '따라 걷는다', '함께 걷는다'는 다 같은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성령으로 살아난 자는 성령을 따라 걷는다는 것이며, 이것을 바로 '행한다'는 말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16절, 25절의 '행한다'는 말이 헬라어로는 다른 단어인데 의미는 '성령을 따라 걷는다'는 것으로 동일합니다. 그래서 성령이 임하면 우리가 살아납니다. 성령으로 살면 성령으로 행하여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령으로 살아난 것이 은혜이므로 그를 따라 행하는 것은 은혜 가운데 이끌림을 받는 것입니다. 불가항력적으로 끌려가는 것입니다. 저는 삭개오가 불가항력적 은혜를 받아 새사람이 됐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들이 이전의 습성을 버리고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주고 잘못 거둔 것을 네 배로 갚아주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수치스럽게 살던 사람들이 메시아를 전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이 임하고 성령으로 행하는 사람입니다. 빛 없이 동굴 속에 살던 사람이 한 줄기 빛이 들어오니 그 빛을 따라 이리 보거나 저리 보지 않고 정진하는 것입니다. 불가항력적인 은혜입니다.
우리의 기도는 분명합니다. 우리는 그곳에 있고 하나님이 이끄십니다. 기도는 하나님과 대화하는 것이로되 대화라는 말을 쓰려면 하나님을 듣는 대화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는데 내가 하나님께서 그리 하시도록 하려고 부르짖는 것입니다. 내가 말하는 것 자체에 본질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하나님께 보이고 아뢰고 해서 하나님이 나를 보고 나를 들으시고 말씀하시는 것을 듣기 위한 것이 기도라는 말입니다. 바로 성령이 임하면 이러한 은혜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4. 그리스도가 다 이루신 의를 전가하는 성령
구약시대 때 성령은 신약시대와 동일합니다. 하나님은 영원하시고 삼위일체 이십니다. 그러나 신약의 성령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다 이루었음을 믿는 영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자기 자신을 주신 정점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그래서 성령이 임하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과 다 이루심을 본다(갈 3:1)는 것이 바로 십자가를 밝히 보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본다는 것은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셔서 그곳에서 죽기까지 순종하시고 자기 자신으로 주심으로 그렇습니다. 우리가 다 성령을 받았습니다(갈 3:2-5). 성령을 주시려고 주님이 이 땅에 오시고 다 이루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셨습니다. 그래서 내가 떠나는 것이 유익인 것은 또 다른 보혜사를 주시기 위함이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새 시대의 영입니다. 다 이루시고 주시고 죽고 부활하셔서 그 우편에서 우리에게 내려주시는데, 자기 자신을 버리신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그 자신을 우리에게 내려주시는 것입니다.
1) 개별적으로 임하시는 성령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나를 위하여"입니다. 신앙의 단위는 '나'입니다. 구원의 단위도 '나'입니다. '나를 위하여', '나의' 하나님입니다. 우리 하나님이 먼저가 아닙니다. 우리 하나님이 계신데 나의 하나님은 계시지 않는다면 그것은 잘못된 공동체 신앙입니다. 우리가 길을 가나 어디에서 생각을 하나 하늘을 쳐다보나 항상 나의 하나님입니다. 나의 하나님이 계시니 우리의 하나님도 보이는 것입니다.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입니다. 믿음이 오기 전에는 매일 몇 번 금식했냐, 몇 번 기도했냐 따졌고 그것이 주가 됩니다. 믿음이 오기 전에는 어떻게 손을 씻고 어디에 앉고 어디를 갔는지 전통과 유전이 문제가 됐습니다. 그러나 이제 주님이 오셔서 모든 의식을 폐하시고 율법을 완성하셨으므로 이전에는 율법에 매인 바 되었으나 이제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2) 양자의 영
손님과 아들은 다릅니다. 이를 가르는 딱 한 단어는 바로 자유입니다. 하갈의 자손과 아브라함의 자손입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습니다. 완전해서가 아니라 아들이니 아들입니다. 성령이 인격적으로 임하면 예수의 다 이루신 것이 우리 것이 되므로 아들의 신분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아들의 신분은 버릴 수도 없습니다. 불가항력적인 은혜, 신분입니다. 평범한 말 같아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는 말이 이 의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더 이상 저주 아래 있지 않습니다.
잘 믿고 따른다 하며 평생 율법을 연구하는 바리새인, 사두개인, 서기관들이 금식하고 기도하고 구약을 끊임없이 금식하면서 메시아에 대해 말을 합니다. 그러나 정작 예수가 왔을 때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성령을 받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베데스다에서 38년 된 병자가 낫고 실로암에서 눈먼 자가 눈을 뜨고 중풍병자가, 거라사 광인이, 수로보니게의 딸이, 백부장의 신하가, 열두 해 혈루병 환자가, 회당장 야이로의 딸이, 나인성 과부의 아들이, 나사로가 죽었다 살아나고 병에서 낫는 일이 있었습니다. 이런 모든 표적과 기적을 봐도 돌을 들어 죽이려 합니다. 그것이 인간의 심성입니다. 인간의 가장 악한 심성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의 마음 안에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을 주셨는데 하나님을 대체하기 위해, 대적하기 위해 우상을 만들어 섬기는 것입니다. 성령을 받지 않으면 다 그렇게 됩니다. 우상을 섬기고 성전에서 음행하고 자식을 태워 바치고 합니다. 보혜사 성령이 임해서 우리가 믿은 것입니다. 아무나 믿음을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쉽게 그저 수월하게 믿은 것 같아도 말입니다.
5. 성령이 임하여 누리는 복과 약속
성령을 인해 우리가 믿게 되어 우리가 두 가지를 누립니다. 우선 복을 누립니다. 아브라함의 복을 여러 가지로 이야기했었습니다. 땅, 후손의 복 등입니다. 그런데 그 복을 주님이 딱 집어 말씀하신 것이 팔복입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복이 주어집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믿음이 주어지면 약속이 주어집니다(갈 3:14). 성령이 임해 그리스도를 믿게 되면 복을 누리고 약속을 얻습니다. 성령의 약속, 이것은 즉 말씀에 붙어 있는 하나님의 복입니다.
1) 너는 내 것이라, 나는 그리스도의 것이라
그러므로 결국 우리에게 성령이 임하면 팔복, 성령의 열매가 역사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것이 됩니다.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내가 너를 낳았도다"(시 2:7). 하나님이 너는 내 것이라 하면 우리는 하나님은 내 것이라고 화답하여야 합니다. 이것은 교만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내 안에, 내가 하나님 안에 있습니다. 순서는 분명히 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먼저 내 것이라고 택하여 세워 주시면 이제 우리가 하나님이, 그리스도가, 성령이 내 것이라고 화답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붙들린 바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로 자녀들입니다. 일 년 내내 머물러도 객은 아버지라 부를 수 없습니다. 그러나 먼 곳에 가서 십 년만에 집에 와도 그 자식은 자식입니다. 아버지는 내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내 것이라고 담대히 말합니다. 영생이 바로 이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내 안에, 내가 하나님 안에 그리하여 우리가 하나되는 일이 있습니다(요 17:21).
본문 마지막 절은 헛된 영광을 구하지 말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내 것이라 부르고 나는 하나님을 내것으로 부르는 것, 완전하심의 우리에게 임재하심이 영광입니다. 하나님이 없이는 영광이 없습니다.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오셔서 영원히 떠나가지 않으십니다. 임마누엘 하나님이 우리 안에 계십니다. 성령이 임하면 떠나가지 않습니다. 떠나가지 않습니다. 여름에는 조금 더 밀착한 것 같고 겨울에는 떨어진 것 같아도 우리 편에서 하는 것이 아니라 임마누엘 하나님, 여호와 하나님이 언제나 우리 안에 함께 계시므로 동일합니다.
2) 팔복과 성령의 열매
그리스도가 산상보훈에서 천국의 헌장을 선포하시면서 가장 먼저 하신 것이 팔복입니다. 성령이 임하면 우리에게 복을 주시는 그것이 팔복입니다. 이 복을 누리는 자는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갈 5:24)입니다. 그리스도 예수께 속한 사람들입니다(롬 8:9; 갈 3:29). 이 세 가지가 다 같습니다. 소유격입니다. 너는 내 것이라는 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 그리스도의 사람, 그리스도의 것, 이것이 모두 같은 말입니다. 이 사람은 바로 팔복을 누리는데 이 복이 참 귀합니다. 그런데 팔복은 성령의 열매와 함께 있습니다. 지지난주에 육체의 일 열다섯 가지를 보고(그 이상이 더 있다고 말했고) 그 후에 성령의 열매는 아홉 가지로 봤습니다. 성령의 아홉가지 열매는 열매가 아홉가지라는 것이 아니라 누구나 누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로마서 12장, 고린도전서 14장은 교회 안에서 은사로서 열매가 있습니다. 이것은 교회에서의 직분과 연결되므로 개별적인 속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열매는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한 열매의 아홉 가지 맛과 같은 것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천국이 저희 것입니다. 심령이 가난한데 성령이 없으면 천국의 것을 소유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심령의 가난함을 주십니다. 그리하여 기도하게 하십니다. 사람은 문제가 없거나, 남으면 절대로 기도 안 합니다. 그러면 심령이 가난한 자는, 부족한 자는, 어떻게 천국이 저희 것입니까. 이는 이미 성령의 열매가 우리 안에서 역사해서 그 가운데 우리가 세상에 부대끼는 것입니다. 세상에 부대낄 때 우리가 가난해집니다. 이것은 굳이 표현하지 않아도 심령이 가난하다라고 느낍니다. 저 사람들은 저리 잘 어울리고 잘 노는데 왜 나는 외톨박이일까? 이것도 심령이 가난한 것입니다. 세상은 아름답고 추억이라 할 수 있어도 많은 경우 그것이 죄와 관계될 수 있습니다. '옛날에 친구들과 돌아다녔다', '그때가 좋았어'라고 합시다. 그런데 그것이 가출한 것에 대한 말이라면 죄에 대한 것일 수 있습니다. 이런 것들을 다 내려놓으면 가난해집니다. 친구도 없는 것 같고 그렇습니다.
그때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는 것입니다. 성령이 임하면 애통하고 눈물이 납니다. 다 좋은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눈물을 흘리고 애통합니다. 수치거리가 되고 예레미야와 같이 저주거리가 됩니다. 그래서 눈물이 있습니다. 밤새 기도해서 수치거리가 됩니다. 수치거리가 되기 위해 밤새 기도합니다. 애통하는 자는 위로가 있습니다. 신령한 위로를 받으려면 애통함이 있어야 합니다. 사랑, 희랑, 화평, 오래참음입니다. 성령의 열매가 우리 안에 역사를 합니다. 성령의 아홉 가지는 우리에게 다 있습니다. 하나님이 자녀 삼아 주시고 성령 주셨고 열매를 맺게 하십니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열매를 맺게 하고 또 너희 열매가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라"(요 15:16).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가 있는 장입니다. 내가 이제 인간이 조금 돼서 싸우지 않고, 희락하고, 남과 화평하고, 남을 불쌍히 여기는 자비, 양선이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뭔가 해야 할 것 같으면 항상 약속이 있습니다. 내가 어떠해서 그러는 것이 아니라 약속을 주시므로 친히 행하신다는 것입니다.
6. 받은 은혜에 대한 담대한 고백: 십자가에 못 박았다
본문은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갈 5:24)라고 합니다. 육체는 거듭나지 않은 것을 의미합니다. 십자가에 못 박았다라는 말은 이곳에서만 능동태로 나옵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이 십자가에 못 박았다고 합니다. 다른 곳은 모두 '못 박힌 것'으로 수동태입니다(갈 2:20). 우리에게는 수동태가 더 익숙합니다. 그리고 갈라디아서 6장 14절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본문 5장 24절만 능동태로 표현됩니다. 이것은 성령의 열매가 임하니까, 우리가 한 것이 아니지만 우리가 한 것으로 고백하고 믿는 것을 의미합니다. 믿음도 우리에게 주신 것인데 우리가 믿는다고 표현합니다. 이것과 같은 것입니다. 나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게 하셨으므로 우리가 십자가에 스스로 못 박았다고 담대히 고백하는 것입니다. 담대한 고백이 없으면 세상을 못 이깁니다. 본문이 바로 그것입니다. 대단하네, 사람이 못 박았네 이렇게 볼 것이 아니라 우리가 못 박혔기 때문에 못 박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이 임한 삶의 원리입니다. 사랑해 주시니 사랑하고 믿음 주시니 믿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사탄아 물러가라'고 하십시오. 그러나 은혜의 불가항력 가운데 그렇게 합니다. 지금까지는 못 박혔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와 함께 은혜를 누렸습니다. 그런데 본문은 이것을 담대히 고백하는 것입니다.
7. 헛된 영광을 구하지 말고 하나님을 찬양하라
이 가운데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헛된 영광을 구하지 말라는 본문 26절이 바로 이 말씀입니다. 헬라어로 헛된 영광은 비어 있는 영광을 의미합니다. 비어 있는 것은 바로 성령의 임재, 즉 성령의 임재가 없는 영광입니다. 영광은 자랑입니다. 그런데 성령이 비어 있습니다. 헛된 자랑인 것입니다. 성령의 역사가 없는 일, 이것은 헛된 자랑입니다. 땅의 영광을 구하고 사람에게 맞추는 영광을 구합니다. 내 자랑을 하는 것입니다. 칼빈은 내 자랑은 갈대에 나를 얹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공로를 과신하는 것이 가장 위험한 일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자랑하고 나도 자랑하고 이렇게 되지는 않습니다. 끊임없이 그 둘 사이에 갈등하다가 미친 자가 있습니다. 바로 사울 왕입니다. 그는 누가 봐도 총명하고 잘생기고 왕이 될 감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봐도 그가 미친 것은 자기 자랑이 남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예 내 자랑만 하면 그대로 살고, 하나님을 자랑하면 '아멘'인데 그것이 반반 섞이니 사울과 같이 영적으로 미쳐 버리는 것입니다. 엉뚱한 것을 찾는 것입니다. 죽은 사무엘을 불러내는 엉뚱한 일을 하는 것입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을 찾아야지 왜 죽은 사무엘을 찾습니까.
영광은 완전함이고 영광은 임재입니다. 완전하신 하나님이 우리 안에 있을 때 그렇지 않으면 헛된 영광입니다. 영어 단어가 생각이 납니다. Vainglory입니다. 빈 영광입니다. 헛된 영광, 텅 빈 영광입니다. 솔로몬도 그랬습니다. 처음에는 지혜를 구하고 판단을 잘 했습니다. 아버지 다윗의 영향을 받아서 말입니다. 그런데 이방의 왕들을 만나서 영향을 받았습니다.
다윗은 자신이 체험한 것을 시로 썼습니다. 시편입니다. 저는 어줍잖은 사람이지만 이 말씀을 해 봅니다. 저도 그리스도에 대한 시를 쓰고 싶습니다. 성경의 사실만 가지고 시를 쓰고 싶습니다. 제가 요즘 복음서를 거의 다 읽어 가고 있는데요, 그리스도에 대해 너무 모르는 것이 많은 것입니다. 천 페이지 넘게 기독론에 대해 썼는데 말입니다. 칼빈은 그리스도인은 사실만 노래하라고 말했습니다. 은유도 말고 미화도 말고 사실만 하라고 했습니다. 성경의 사실만 가지고 노래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그래서 저도 해 봤습니다. 하나님이 데려가시기 전에 그거라도 해볼 수 있지 않을까. 별다른 일이 아니라 누구라도 할 수 있는 일로 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에 대해 시를 써 보되 내 정서가 아닌 성경의 사실만을 가지고 말입니다.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지혜로운 자는 그의 지혜를 자랑하지 말라 용사는 그의 용맹을 자랑하지 말라 부자는 그의 부함을 자랑하지 말라 자랑하는 자는 이것으로 자랑할지니 곧 명철하여 나를 아는 것과 나 여호와는 사랑과 정의와 공의를 땅에 행하는 자인 줄 깨닫는 것이라 나는 이 일을 기뻐하노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렘 9:23-24). 자랑하는 자는 명철하여 하나님을 아는 것을 자랑하라고 합니다. 여호와는 사랑과 공의를 행하시는 분이심을 깨닫는 것을 자랑하라고 합니다. 지혜도, 부함도, 용맹도 자랑하지 말고 여호와를 아는 것과 여호와의 사랑과 긍휼, 자비, 공의, 진리를 아는 것을 자랑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그대로 따옴표해서 사도 바울이 말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고전 1:27-28). 없다고 두려워하거나 있다고 자랑 마시고, 없는 것, 천한 것, 약한 것을 들어서 있는 것, 유식한 것을 폐하시는 하나님이심을 기억하십시오.
8. 결론
몇 주간 성령에 대해 말씀을 나눴습니다. 우리가 성령을 다 받았고 그 열매가 우리 안에 역사합니다. 그리고 참 영광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날 위해 자기 자신을 드리신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삽니다. 우리에게 이 은혜가 넘치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참 영광을 돌리는 자들이 되길 바랍니다. 이 가운데 코로나로 힘들어도 부요함을 누리고 하나님이 형통케 하시는 은혜를 누리시길 축언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