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1227][십자가지기교회 주일낮예배: 갈라디아서 강해(46): 그리스도의 복음]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함 (갈 6:1-5) 문병호 목사
1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너 자신을 살펴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
2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
3 만일 누가 아무 것도 되지 못하고 된 줄로 생각하면 스스로 속임이라
4 각각 자기의 일을 살피라 그리하면 자랑할 것이 자기에게는 있어도 남에게는 있지 아니하리니
5 각각 자기의 짐을 질 것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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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취록>
1. 갈라디아서의 구조: 진리와 행위의 열매
어제는 주보를 작성하는데, 52주가 되었습니다. 첫주가 있고 마지막 주가 있습니다. 오늘은 갈라디아서 마지막 장인 6장입니다. 로마서가 기독교 교리의 집성이라면, 그 핵심, 요약, 가장 고상한 것을 모아 놓은 것을 갈라디아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갈라디아서가 더 심오하고 상세하고 자세하고 전문적인 것이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1장은 그리스도의 복음밖에 없다고 전체적으로 소개하고 2-4장은 그리스도를 믿어서 구원에 이르는 도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1장은 복음에 대한 전반적인 선포라면, 2-4장은 그 복음이 무엇이냐, 즉 진리에 대해서 말하고 있고, 5장에서는 그 진리 가운데서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를 말합니다. 2-4장의 진리와 5장의 삶을 연결해 주는 것이 “자유”이고, 4장 말미에서 5장 초반에 걸쳐서 그리스도인의 자유가 나와 있습니다. 5장에서는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을 말합니다.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구원에 이르는데(2-4장), 그 믿음은 성령의 열매를 맺습니다. 그 열매는 아홉 가지 맛이 나는데, 대표적인 것 하나를 말하자면 사랑입니다. 그래서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입니다. 이처럼 갈라디아서는 진리와 행위가 같이 나옵니다. 먼저 올바른 진리, 길, 도, 말씀 가운데 서서 행위의 열매를 맺는다는 것입니다.
오늘 6장에서도 5절까지 말씀을 보면, 먼저 뭔가 잘못된 사람을 바로 잡으라는 말씀이 나오고, 2-5절은 각각 서로 짐을 져서 그리스도의 법을 완성하라고 합니다. 이렇게 2-5절은 행위를 말씀합니다. 그리고 1절을 보면,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라고 합니다. 이것은 진리의 영역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1절은 진리를 바로 세우고, 2-5절은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고 합니다. 이런 구조는 6절 이후에도 나옵니다.
2. 진리 변증의 역사
1) 변증의 필연성
제가 94년도에 신학교에 갔는데, 그때 많이 입에 오르내린 말이 ‘도전받는 보수신학’이었습니다. 그래서 자유주의신학이나 신신학에 경계했습니다. 그리고 변증학을 배웠습니다. 변증이란 무엇입니까? ‘변’(辨)이란 말로 따지는 것이고, ‘증’(證)은 올바른 것을 증거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변증이란 말은 뭔가하면 옳고 그른 것을 분별해서 옳은 것은 세우고 세울 뿐만 아니라 권하고 그릇된 것은 바로잡고 바로잡을 수 없으면 몰아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변증이라는 것이 기독교 신학 혹은 교회에서는 아주 중요하다고 신학교 입학 때부터 가르쳐 주셨습니다.
사탄은 거짓의 아비요 미혹과 불법의 영이요 적그리스도의 영이요, 적그리스도와 적이 된다고 번역이 될 수 있지만, 그리스도를 흉내 낸다, 그리스도와 반대한다고 하면 표가 나는데 겉으로 보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행하고 능력까지 행한다고 나섭니다. 성전 중앙에 사탄이 앉아 있는 것입니다. 적그리스도의 영이 그리스도를 가장하고 지배합니다. 이것이 바로 세상의 모습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도의 신앙은 예와 아니요가 분명해야 하고 옳고 그름이 분명해야 하고 시시비비를 가려야합니다.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가, 무엇이 되고 무엇이 안되는가, 이것을 성경에서는 여호와 하나님과 바알을, 또 하나님과 돈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2) 사도 시대
그래서 우리가 초대교회에서 보면 교회가 이제 오순절 성령을 받아서 제일 처음에 교회가 세워졌을 때, 하나님이 사도들을 세우시는데, 우리가 12사도, 그중에 하나인 가룟 유다가 떨어져나가서 11사도가 된 후, 또 하나를 채워서 12사도가 되었는데 그 시대를 우리가 사도 시대라고 합니다. 마지막 사도가 사도 바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도 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지경을 넓혀 가고 로마까지 가고 사도 바울은 스페인까지 가려고 했고 그게 바로 사도 시대입니다.
2) 속사도 시대
그리고 사도들이 죽고 나니까 사도들을 이은 사람들이 나옵니다. 이를 속사도 시대하고 합니다. 1세기 말, 2세기 초에 속사도 시대인데 그중 대표적인 사람이 폴리캅입니다. 속사도 시대에는 많이 순교하면서 이제 개교회를 하나씩 세워 갑니다. 사도들은 전체적으로 지경을 넓혔다면 속 사도는 그 말씀, 그 지경에 교회를 세우고 교회의 말씀을 하나씩 하나씩 전해서 교회의 씨를 뿌리는 것입니다. 2세기에 많이 순교합니다. 지도자들 거의 죽어요. 사도들도 속사도들도 거의 다 순교합니다. 사도 요한도 가장 오래 살았지만 밧모섬에서 순교합니다. 사도들도 제자들도 속사도들도 순교합니다.
3) 변증가 시대
그때 교회들을 세워서 기록된 말씀을 가지고 교회에서 터를 잡고 교회에서 그 말씀이 흥황해 가고 교회에서 그 말씀이 뿌리를 내리고 열매를 맺으니까 본격적으로 이단이 들어옵니다. 사탄의 역사가 교회 안에서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서 거짓 교리들이 들어옵니다. 물론 초대교회 때부터 없지 않아 있었습니다. 그 기록이 갈라디아서입니다. 있었지만은 본격적으로 전쟁같이 교회 안에서 일어납니다. 그래서 그때를 변증가의 시대라고 합니다. 그때 하나님은 진리를 옳게 이야기하고 옳은 것을 옳다고 이야기하는 변증가들을 세웁니다. 대표적으로 저스틴이라는 사람입니다. 이 분도 순교합니다. 변증가들을 세워서 교회의 진리를 수호합니다.
4) 교부 시대
진리를 수호하다 보니 저쪽에서 다른 이야기를 하면 이 쪽에서 옳은 이야기를 해야 하니까 체계적으로 연구한 사람들이 나옵니다. 그 사람들이 바로 교부들입니다. 이 교부들에 의해서 교리들이 형성되고 신학이 형성되고 이것이 바로 우리 기독교입니다. 그래서 사도 시대, 속사도 시대, 변증가 시대, 교부 시대, 이 교부 중에 최고의 교부는 우리가 알다시피 어거스틴입니다. 초대교회에 어거스틴에 의해서 모든 교리들이 정립됩니다.
5) 종교개혁
그런데 그것이 오래 가지 못하고 중세 교회가 되면서 그 교리들이 또 왜곡되고 그래서 일어난 것이 바로 16세기의 종교개혁입니다. 그래서 이 어거스틴을 잘 받아들이고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교리화한 사람이 바로 칼빈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이 전통에 서 있습니다. 바로 사도 시대, 속사도 시대, 변증가 시대, 교부 시대 그리고 종교개혁, 이 전통의 우리 개신교가 서 있습니다.
교회에는 바로 이러한 옳고 그름을 바로 세워서 그릇된 것은 그릇되다 하고 옳은 것은 옳다고 하는 그것을 말해 주는 것이 먼저 선결되어야 행위의 열매가 맺습니다. 이것이 오늘 1절의 말씀입니다.
3. 그리스도의 은혜를 바로 믿으라
1) “형제들아”
“형제들아.” 우리가 갈라디아서에서 가장 많이 호칭이 나오는 것이 바로 “형제들아”입니다. 앞서 5장 13절에서도 그전에도 계속 나옵니다. 사도 바울이 특별히 갈라디아 교회에 “형제들아”라고 부른 이유가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1장 1절에 보면 사람들에게 난 것이 아니요 사람들에게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라고 말씀하는데, 여기 형제들은 다 하나님께로 나고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사람들을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형제입니다. 형제들은 자매들을 포함합니다. 우리가 형제 자매입니다. 성경에서 많은 경우 형제들은 자매들을 포함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형제요 자매입니다. 그리고 이 “형제들아” 하는 것은 갈라디아서 1장 12절에서 보면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 그래서 사도 바울이 “형제들아”라고 말을 할 때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 사람에게 난 것도 아니고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고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요 1:12). “형제들아”라는 뜻은 하나님으로부터 구원받은 자들이라는 뜻입니다.
둘째, 사람에게 받은 것도 아니요 사람에게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다. 우리가 살아가고 우리가 좁은 길, 좁은 문으로 나아가고 우리가 열매 맺는 것은 바로 사람에게 받은 것도 아니요 사람에게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2)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갈 6:1). 여기 ‘범죄’라는 말은 헬라어로 두 단어가 있습니다. ‘하마르티아’와 ‘프로파토라’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이것은 비슷한 말로 볼 수 있는데 여기서는 ‘프로파토라’라는 단어를 썼습니다. 보통 죄라는 말은 ‘하마르티아’라는 단어를 쓰는데 여기서는 원어 그대로 보면 죄보다도 좀 넓은 개념인 허물, 잘못이라고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형제들아 사람이 무슨 잘못한데, 잘못한 일에 걸려 넘어지거든, 사람이 만일 어떤 실수에 걸려 넘어지거나, 잘못에 걸려 넘어지거든’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제가 아까 모두에 1절은 진리를 이야기한다고 했습니다. 여기에 “사람이 만일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은 ‘사람이 만일 올바른 진리에 서 있지 않고 그릇된 진리로 걸려 넘어지거든’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5장 11절을 보면, “십자가의 걸림돌”이 있습니다. 십자가의 걸림돌에 넘어지는 사람은 십자가의 능력을 믿지 않고 십자가를 미련하다고 하는 사람, 곧 그리스도의 은혜가 아니라 내 공로를 말하는 사람, 내 자질을 말하는 사람, 그 사람을 여기 6장 1절이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원어를 말씀 드린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모퉁이 돌이 되셔서 우리의 주가 되시는데, 그리스도가 나의 반석이 되시는 것이 아니고 나의 머릿돌이 되시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가 걸려 넘어지는 돌이 되는 사람, 이게 곧 어떤 사람일까요? 지금까지 갈라디아서를 봤을 때 곧 은혜가 아니라 내 자질을 이야기하는 사람, 내 의를 이야기하는 사람입니다. 십자가의 도가 믿지 않는 사람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믿는 우리에게는 능력이 된다는 고린도전서 1장 18절의 말씀처럼 십자가의 도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6장 1절의 말씀을 잘 봐야 합니다. 그래서 제가 설명을 길게 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오해하시면 안 됩니다. 무슨 범죄나 무슨 행위가 아니라 바로 6장 1절은 다음 주에 보는 6장 6절과 통합니다. “가르침을 받는 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갈 6:6)와 관계됩니다. 그래서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이라는 말의 의미는 ‘무슨 잘못으로 걸려넘어지거든,’ ‘오직 그리스도 오직 십자가 오직 은혜에 아멘하지 않고 내 공로로 내 의로, 내 자질로 나서거든’, 달리 말하면 ‘십자가를 밝히 보지 못하고 다른 꾐에 넘어가 있거든’, 또 우리가 5장 7절에 보면 ‘진리에 순종하지 아니하는 사람, 진리를 멀리하거든’, 또 우리가 갈라디아서 5장 8절에 보면 ‘너희를 부르신 이에게서 난 것이 아닌 것을 가지고 거기에 걸려 넘어지거든’을 의미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은혜로 삽니다. 성경에서 걸려 넘어지는 것은 내가 잘났다고 해서 걸려 넘어지는 것입니다. 내가 못났다고 해서 걸려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없다고 걸려지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미련하다고 걸려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잘났다고 해서 걸려넘어지는 것입니다. 내가 지혜롭다고 생각해서 걸려넘어지는 것입니다. 내가 많이 가졌다고 생각해서 걸려넘어지는 것입니다.
3)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너 자신을 살펴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
제가 여기에서 변증을 이야기했습니다. 옳고 그름을 바로 세우는 것이 무엇인가? 그리스도만 붙들면 됩니다. 그래서 2절로 연결이 됩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복음, 오직 그리스도의 의, 그것에서 걸려넘어진 사람이 있거든 신령한 너희는’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오늘 1절에 “신령한 너희는”이라는 말은 ‘성령을 받은 너희는’이라고 해석하면 됩니다. 3장 2절에 보면 성령을 받았다라고 나옵니다. 바로 이 말씀입니다. “심령으로”(엔 퓨뉴마티, 성령 가운데), “온유한 심령으로”(엔 퓨뉴마티 프로마테토스, 온유의 성령 가운데)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온유가 무엇입니까? 23절의 성령의 열매입니다. 이 성령의 9가지 맛은 다 있다고 했습니다. 그 명사형입니다. 여기서 보면 너희는 성령을 받은 너희는 온유의 성령 가운데서 이렇게 해석합니다. 온유의 성령 가운데서 이 말은 우리가 성령을 받아서 온유한 심령을 가졌다는 말입니다.
혹시 기억하십니까? 온유는 울타리 안에서 내적으로 즙을 짜는 것이라고 제가 이야기 했었습니다. 영적인 즙이다. 불쑥불쑥 튀어나온 것이 아니라 꾹 짜는 것, 온유는 눌러서 즙이 나오는 것, 그 온유의 성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너 자신을 살펴봐라는 것입니다. 남을 정죄하기 앞서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너 자신을 살펴봐라. 항상 우리는 다른 사람이 커 보이면요. 다른 사람의 티가 보이면요 100% 내 안에 들보가 있습니다. 악하니까 악함이 보입니다. 다른 사람의 티가 보이면 100% 내 안에 들보가 있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저 사람 왜 저럴까? 나는 더하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다른 사람의 티가 보이면 내 눈에 들보가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돌로 칠려거든 100% 나부터 돌로 쳐야 합니다. 100%입니다. 누군가를 정죄하려고 할 때 먼저 나 자신을 정죄해야 합니다. 그거 아니면 전혀 아무 유익이 없고 무익합니다. 정죄도 해서는 안 됩니다. 이래도 해서 안 되고 저래서도 안 됩니다. 결론은 판단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판단하다 보면은 지치기 때문입니다. 판단하다 보면은 내가 못 살겠다고 느껴집니다. 남을 판단하면 내 것이 더 커 보입니다.
진리의 그릇됨이 있을 때,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도, 오직 구원으로 믿음에 이르는 도에 있어서 그릇됨이 있을 때, 여기서 우리는 먼저 남을 정죄하기 앞서서 내 자신을 온유의 성령의 은사로 즙을 짜야 합니다. 그래야 즐겁습니다. 불쑥 불쑥 나오는 것은 하나도 즐겁지가 않습니다. 그것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고린도교회에 일이 많습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은 아직 사도로 대접도 해 주지 않습니다. 사도가 아니라고 그럽니다. 고린도전서 4장 15절에 보면 그리스도의 예수 안에서 내가 복음으로서 너희를 낳았다고 이야기합니다. 사도 바울의 이런 말씀이 갈수록 더 새겨집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내가 복음으로써 너희를 낳았다. 고린도전서 4장 15절, 그리고 21절을 보면, “너희가 무엇을 원하느냐 내가 매를 가지고 너희에게 나아가랴 사랑과 온유한 마음으로 나아가랴.” 이 때 온유한 마음도 오늘 온유한 심령과 똑같은 표현입니다. 이것도 똑같습니다. 온유의 성령으로 나아가랴, 그리고 갈라디아서 5장 23절에 나오는 성령의 열매의 온유가 이 표현과 똑같습니다. 매를 가지고 나아가랴 내가 매를 들면 들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내가 너희를 복음으로 낳았으니 내가 매를 가지고 나아가랴 사랑과 온유한 마음으로 나아가랴.
여러분, 우리는 9가지 맛을 가진 한 가지 열매를 받았습니다. 다 받았다고 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성령의 열매입니다. 우리 안에 온유함이 있습니다. 우리는 성령으로 삽니다.
4. 그리스도의 은혜로 살라
1) 그리스도의 성취에 아멘 하여 누리라
이제 그래서 “신령한 너희는”, 즉 ‘성령을 받은 우리는’ 뭘 해야 즐겁겠습니까? 성령의 열매대로 은사대로 행해야 즐겁습니다. 그것이 온유한 심령으로 살펴보아 너도 심판을 받을까 두려워하라 그렇게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2절에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라고 합니다. ‘그리스도의 법’이라는 말은 전체 신구약 성경에서 여기 한군데만 나옵니다. 2절에 관하여 제가 주석을 읽어 보면 크게 두 가지 해석이 나옵니다. 첫째, 그리스도의 법을 율법으로 해석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가 모든 율법을 순종했으니까 우리도 율법을 지키라는 것으로 봅니다. 그러면 이것은 지금까지 내용과 맞지 않습니다. 지금까지는 무엇입니까?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습니다. 2장 16절에 그렇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믿고 들음으로 성령을 받았습니다. 3장 2절에 그렇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씨고 아브라함의 씨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그렇게 해석하면 안 됩니다.
둘째, 또 다른 주석자들은 그리스도의 법은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는 것은 그리스도를 본받아서 성취하라는 것이 됩니다. 이것도 말은 좋지만 우리가 그리스도를 본받아서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할 수 있습니까? 이것은 더 무서운 이야기입니다. 율법을 지키라는 것보다 더 무섭죠. 우리가 십자가에 매달리라는 것입니까? 우리가 할 수 있습니까?
주석을 보면, 많은 신학자들이 이 두 가지로 해석해 놓았습니다. 이렇게 해석하면 지금까지의 갈라디아서와 맞지 않습니다. 우리는 먼저 그리스도의 법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법은 아까 말씀 드렸던 고전도전서 1장 18절의 십자가의 도입니다. 여기서 ‘도’가 로고스입니다. 십자가의 말씀, 십자가의 도가 바로 그리스도의 법입니다. 그리스도의 법은 은혜의 법입니다. 그리스도의 법은 대속의 법입니다. 그리스도의 법은 그리스도가 다 이루신 법입니다. 그리스도가 다 이루신 법을 어떻게 우리가 또 성취합니까? 뭔가 남은 것을 성취하는 것이 아닙니다. 골로새서에 보면 그리스도의 고난을 내 잔에 채운다. 그리스도가 고난이 모자라서 내가 고난을 받아서 완전하게 한다라고 해석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가 모든 것을 다 이루셨는데 그것에 아멘 하면서 그 은혜를 누리는 것입니다.
오늘 여기 말씀도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는 성령의 열매로, 성령의 은혜로, 그리스도의 의로, 그리스도의 온전케 하심으로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구하여서 얻고 그리고 그리스도가 예가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고후 1:20).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다 이루었다는 말씀입니다. “그런즉 우리가 아멘하여.” 그리스도의 법의 성취는 ‘아멘’입니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라”(요 14:13). 그리스도께 구하여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그리스도가 예가 되고 우리는 아멘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짐을 져서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는 것이 아니라, 엄밀하게 말하서, 그리스도의 법, 은혜를 누림으로써 서로 짐을 지라는 것입니다. 이것도 열매이지, 조건이 아닙니다.
2)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니 그리스도 외에 헛된 자랑을 하지 말라
이것을 아는 것은 3절에 있습니다. “만일 누가 아무 것도 되지 못하고 된 줄로 생각하면 스스로 속임이라”(갈 6:3). 우리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무엇(something)이 된 줄로 생각하면 스스로 속이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직 은혜, 전적 은혜입니다. 우리 자신은 완전 무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고전 1:28). 이 고백이 우리의 아멘입니다. “각각 자기의 일을 살피라”(갈 6:4). “각각 자기의 짐을 질 것이라"(갈 6:5). 이것이 무엇이냐면 “짐을 서로 지라”(갈 6:2)입니다. 순서가 중요합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닌 무(메데이스, nothing)입니다. 그런데 무언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자기 기만입니다. 자기 기만은 교만을 낳고,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다. 교만은 거짓에서 나옵니다. 거짓의 영은 교만의 영입니다. 우리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그저 은혜를 받고 아멘한 자입니다. 그저 하나님이 내게 세우신 데로 나를 살피는 것입니다.
“각각 자기의 일을 살피라 그리하면 자랑할 것이 자기에게는 있어도 남에게는 있지 아니하리니”(갈 6:4). 이것도 자랑할 것이 자기에게는 있다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자기의 일’은 단수입니다. 요한복음 6:29에서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에서 “하나님의 일”은 단수입니다. 제자들은 복수로 물었지만, 예수님은 단수로 대답하셨습니다. 자기의 일을 살피면 자랑할 것이 자기에게만 있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일대일로 서라는 의미입니다. 포도원에는 빨리 들어오건 늦게 들어오건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자랑할 것이 나에게만 있다는 것은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은사와 달란트 대로 자랑하라는 것입니다. 자랑은 하나님 앞에서 하는 버릇을 들이면 편안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랑 받고 자랑하면 마음이 평안합니다. 그러나 사람에게 사람에게 자랑하고 자랑을 취하려고 하면 안 됩니다. 남과 비교해서 자랑하거나 남의 것 취하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것을 하나님께 자랑하라는 것입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나라에서 일도 하고 주인과 함께 음식도 먹는 것입니다.
3) 그리스도의 은혜를 누림으로 자기 십자가를 지라
“각각 자기의 짐을 질 것이라”(갈 6:5). 여기서 “짐”이라는 말은 마태복음에서 나오는 “짐”과 같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마 11:28-30). 그러므로 각각 자기의 짐을 지는 것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 16:24). 이 짐은 쉽고 그 멍에는 가볍습니다. 우리는 짐을 져야 합니다. 그러나 그 짐은 십자가의 짐, 주님의 짐입니다. 주님의 짐은 주님이 아시는 짐입니다. 이 짐은 가볍습니다. 가벼운 정도가 아니라 우리를 날개와 같이 끌고 올라가는 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일대일로 서야 합니다. 우리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이 다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다 하셨다는 것이 그리스도의 법이고, 그리스도가 다 하셨다고 아멘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법의 성취입니다. 우리는 각자각자 어떤 사람은 핸들을 잡고 가고, 어떤 사람은 패달을 밟고 경치를 구경합니다. 이것이 각자 짐을 지는 것입니다. 각각의 짐대로 각각의 일을 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아무것도 아닌데, 예수님이 날 위해 죽으심으로 우리를 지체로 삼아 주셔서 누구는 핸들을 잡고, 누구는 패달을 밟습니다. 각자 짐을 지는 것입니다. 무엇이든지 자기가 된 줄로 여기면 자기를 속이는 것입니다. 서로 짐을 지라는 것이 그것입니다.
5. 그리스도 은혜만을 겸손히 구하며 성도의 기쁨을 도우라
“네게 있는 믿음을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가지고 있으라 자기가 옳다 하는 바로 자기를 정죄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롬 14:22). 이것이 바로 오늘 말씀과 통합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것만 헤아리라는 것입니다. 자기가 옳다 하는 바로 자기를 정죄하지 않는 자가 복이 있고, 자기가 옳다 하는 바로 자랑하지 않는 자도 복이 있습니다. 헛자랑 하지 말자는 것입니다. 헛된 영광을 구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많은 경우에 괜한 샅바를 잡습니다. 샅바는 하나님과 잡아야 합니다. 얍복강의 야곱처럼 말입니다. 하나님을 이길 수 없지만 하나님과 샅바를 잡아야 합니다. 져도 하나님께 져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져 주시고,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주십니다. 즉 네가 이겼다라고 하십니다. 야곱의 환도뼈가 나갔는데도 야곱이 이겼다고 해 주십니다. 세상과 사람과 샅바를 잡지 마시고, 하나님과만 잡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과 씨름하고, 하나님 앞에 눈물 흘려야 하고, 우리는 죽은 듯 방불하지만 다시금 생명을 얻기 위해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일어서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샅바를 잡는 것은 교만한 것이 아니라 겸손한 것입니다. 자식이 아버지와 샅바를 잡지 이웃집 아저씨와 샅바를 잡겠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우리는 성탄절에 “큰 기쁨의 좋은 소식”(눅 2:10)을 들었습니다. 이 기쁨(카라)은 우리가 누리는 기쁨이었습니다. 이 기쁨은 큰 기쁨입니다. 그런데 이 기쁨은 어디에서 옵니까?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눅 2:14). 여기서 기뻐하심은 하나님의 기뻐하심(유도키아)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기뻐하심(유도키아)를 기뻐합니다(카라).
“우리가 너희 믿음을 주관하려는 것이 아니요 오직 너희 기쁨을 돕는 자가 되려 함이니 이는 너희가 믿음에 섰음이라”(고후 1:24).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는 것은 기쁨을 돕고 나누는 것입니다.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하지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눅 2:10). 여기서 “큰 기쁨”이 언급되고, “그들이 [그에게 경배하고] 큰 기쁨으로 예루살렘에 돌아가 늘 성전에서 하나님을 찬송하니라”(눅 24:52-53). 여기에서도 “큰 기쁨”이 나옵니다. 이들에게 무슨 일이 있어서 큰 기쁨이 있었을까요? 누가복음의 마지막 부분을 보면, 부활하신 예수님이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를 만나셔서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셨습니다(눅 24:27). 그러자 그들의 마음이 뜨거워졌습니다(눅 24:32). 그리고 부활하신 예수님이 또 숨어 있는 제자들에게도 나타나셔서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눅 24:44)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이에 그들의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눅 24:45). 부활하신 예수님이 성경에 쓴 바 자기에게 관해 쓴 바를 설명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그 말씀을 들을 때 마음이 뜨거워졌습니다. 이 일이 부활하신 주님이 행하신 큰 일입니다.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 마음을 뜨겁게 받게 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큰 기쁨입니다.
6. 결론
우리는 바로 이런 큰 기쁨을 나누고 돕는 사람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우리가 이 일로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는 것입니다. 이는 우리가 모자란 무엇을 채우는 것이 아니라 아멘 하고 기뻐하고 함께 누리는 것입니다.
[20201227][십자가지기교회 주일낮예배: 갈라디아서 강해(46): 그리스도의 복음]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함 (갈 6:1-5) 문병호 목사
1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너 자신을 살펴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
2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
3 만일 누가 아무 것도 되지 못하고 된 줄로 생각하면 스스로 속임이라
4 각각 자기의 일을 살피라 그리하면 자랑할 것이 자기에게는 있어도 남에게는 있지 아니하리니
5 각각 자기의 짐을 질 것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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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취록>
1. 갈라디아서의 구조: 진리와 행위의 열매
어제는 주보를 작성하는데, 52주가 되었습니다. 첫주가 있고 마지막 주가 있습니다. 오늘은 갈라디아서 마지막 장인 6장입니다. 로마서가 기독교 교리의 집성이라면, 그 핵심, 요약, 가장 고상한 것을 모아 놓은 것을 갈라디아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갈라디아서가 더 심오하고 상세하고 자세하고 전문적인 것이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1장은 그리스도의 복음밖에 없다고 전체적으로 소개하고 2-4장은 그리스도를 믿어서 구원에 이르는 도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1장은 복음에 대한 전반적인 선포라면, 2-4장은 그 복음이 무엇이냐, 즉 진리에 대해서 말하고 있고, 5장에서는 그 진리 가운데서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를 말합니다. 2-4장의 진리와 5장의 삶을 연결해 주는 것이 “자유”이고, 4장 말미에서 5장 초반에 걸쳐서 그리스도인의 자유가 나와 있습니다. 5장에서는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을 말합니다.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구원에 이르는데(2-4장), 그 믿음은 성령의 열매를 맺습니다. 그 열매는 아홉 가지 맛이 나는데, 대표적인 것 하나를 말하자면 사랑입니다. 그래서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입니다. 이처럼 갈라디아서는 진리와 행위가 같이 나옵니다. 먼저 올바른 진리, 길, 도, 말씀 가운데 서서 행위의 열매를 맺는다는 것입니다.
오늘 6장에서도 5절까지 말씀을 보면, 먼저 뭔가 잘못된 사람을 바로 잡으라는 말씀이 나오고, 2-5절은 각각 서로 짐을 져서 그리스도의 법을 완성하라고 합니다. 이렇게 2-5절은 행위를 말씀합니다. 그리고 1절을 보면,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라고 합니다. 이것은 진리의 영역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1절은 진리를 바로 세우고, 2-5절은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고 합니다. 이런 구조는 6절 이후에도 나옵니다.
2. 진리 변증의 역사
1) 변증의 필연성
제가 94년도에 신학교에 갔는데, 그때 많이 입에 오르내린 말이 ‘도전받는 보수신학’이었습니다. 그래서 자유주의신학이나 신신학에 경계했습니다. 그리고 변증학을 배웠습니다. 변증이란 무엇입니까? ‘변’(辨)이란 말로 따지는 것이고, ‘증’(證)은 올바른 것을 증거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변증이란 말은 뭔가하면 옳고 그른 것을 분별해서 옳은 것은 세우고 세울 뿐만 아니라 권하고 그릇된 것은 바로잡고 바로잡을 수 없으면 몰아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변증이라는 것이 기독교 신학 혹은 교회에서는 아주 중요하다고 신학교 입학 때부터 가르쳐 주셨습니다.
사탄은 거짓의 아비요 미혹과 불법의 영이요 적그리스도의 영이요, 적그리스도와 적이 된다고 번역이 될 수 있지만, 그리스도를 흉내 낸다, 그리스도와 반대한다고 하면 표가 나는데 겉으로 보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행하고 능력까지 행한다고 나섭니다. 성전 중앙에 사탄이 앉아 있는 것입니다. 적그리스도의 영이 그리스도를 가장하고 지배합니다. 이것이 바로 세상의 모습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도의 신앙은 예와 아니요가 분명해야 하고 옳고 그름이 분명해야 하고 시시비비를 가려야합니다.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가, 무엇이 되고 무엇이 안되는가, 이것을 성경에서는 여호와 하나님과 바알을, 또 하나님과 돈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2) 사도 시대
그래서 우리가 초대교회에서 보면 교회가 이제 오순절 성령을 받아서 제일 처음에 교회가 세워졌을 때, 하나님이 사도들을 세우시는데, 우리가 12사도, 그중에 하나인 가룟 유다가 떨어져나가서 11사도가 된 후, 또 하나를 채워서 12사도가 되었는데 그 시대를 우리가 사도 시대라고 합니다. 마지막 사도가 사도 바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도 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지경을 넓혀 가고 로마까지 가고 사도 바울은 스페인까지 가려고 했고 그게 바로 사도 시대입니다.
2) 속사도 시대
그리고 사도들이 죽고 나니까 사도들을 이은 사람들이 나옵니다. 이를 속사도 시대하고 합니다. 1세기 말, 2세기 초에 속사도 시대인데 그중 대표적인 사람이 폴리캅입니다. 속사도 시대에는 많이 순교하면서 이제 개교회를 하나씩 세워 갑니다. 사도들은 전체적으로 지경을 넓혔다면 속 사도는 그 말씀, 그 지경에 교회를 세우고 교회의 말씀을 하나씩 하나씩 전해서 교회의 씨를 뿌리는 것입니다. 2세기에 많이 순교합니다. 지도자들 거의 죽어요. 사도들도 속사도들도 거의 다 순교합니다. 사도 요한도 가장 오래 살았지만 밧모섬에서 순교합니다. 사도들도 제자들도 속사도들도 순교합니다.
3) 변증가 시대
그때 교회들을 세워서 기록된 말씀을 가지고 교회에서 터를 잡고 교회에서 그 말씀이 흥황해 가고 교회에서 그 말씀이 뿌리를 내리고 열매를 맺으니까 본격적으로 이단이 들어옵니다. 사탄의 역사가 교회 안에서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서 거짓 교리들이 들어옵니다. 물론 초대교회 때부터 없지 않아 있었습니다. 그 기록이 갈라디아서입니다. 있었지만은 본격적으로 전쟁같이 교회 안에서 일어납니다. 그래서 그때를 변증가의 시대라고 합니다. 그때 하나님은 진리를 옳게 이야기하고 옳은 것을 옳다고 이야기하는 변증가들을 세웁니다. 대표적으로 저스틴이라는 사람입니다. 이 분도 순교합니다. 변증가들을 세워서 교회의 진리를 수호합니다.
4) 교부 시대
진리를 수호하다 보니 저쪽에서 다른 이야기를 하면 이 쪽에서 옳은 이야기를 해야 하니까 체계적으로 연구한 사람들이 나옵니다. 그 사람들이 바로 교부들입니다. 이 교부들에 의해서 교리들이 형성되고 신학이 형성되고 이것이 바로 우리 기독교입니다. 그래서 사도 시대, 속사도 시대, 변증가 시대, 교부 시대, 이 교부 중에 최고의 교부는 우리가 알다시피 어거스틴입니다. 초대교회에 어거스틴에 의해서 모든 교리들이 정립됩니다.
5) 종교개혁
그런데 그것이 오래 가지 못하고 중세 교회가 되면서 그 교리들이 또 왜곡되고 그래서 일어난 것이 바로 16세기의 종교개혁입니다. 그래서 이 어거스틴을 잘 받아들이고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교리화한 사람이 바로 칼빈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이 전통에 서 있습니다. 바로 사도 시대, 속사도 시대, 변증가 시대, 교부 시대 그리고 종교개혁, 이 전통의 우리 개신교가 서 있습니다.
교회에는 바로 이러한 옳고 그름을 바로 세워서 그릇된 것은 그릇되다 하고 옳은 것은 옳다고 하는 그것을 말해 주는 것이 먼저 선결되어야 행위의 열매가 맺습니다. 이것이 오늘 1절의 말씀입니다.
3. 그리스도의 은혜를 바로 믿으라
1) “형제들아”
“형제들아.” 우리가 갈라디아서에서 가장 많이 호칭이 나오는 것이 바로 “형제들아”입니다. 앞서 5장 13절에서도 그전에도 계속 나옵니다. 사도 바울이 특별히 갈라디아 교회에 “형제들아”라고 부른 이유가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1장 1절에 보면 사람들에게 난 것이 아니요 사람들에게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라고 말씀하는데, 여기 형제들은 다 하나님께로 나고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사람들을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형제입니다. 형제들은 자매들을 포함합니다. 우리가 형제 자매입니다. 성경에서 많은 경우 형제들은 자매들을 포함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형제요 자매입니다. 그리고 이 “형제들아” 하는 것은 갈라디아서 1장 12절에서 보면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 그래서 사도 바울이 “형제들아”라고 말을 할 때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 사람에게 난 것도 아니고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고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요 1:12). “형제들아”라는 뜻은 하나님으로부터 구원받은 자들이라는 뜻입니다.
둘째, 사람에게 받은 것도 아니요 사람에게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다. 우리가 살아가고 우리가 좁은 길, 좁은 문으로 나아가고 우리가 열매 맺는 것은 바로 사람에게 받은 것도 아니요 사람에게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2)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갈 6:1). 여기 ‘범죄’라는 말은 헬라어로 두 단어가 있습니다. ‘하마르티아’와 ‘프로파토라’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이것은 비슷한 말로 볼 수 있는데 여기서는 ‘프로파토라’라는 단어를 썼습니다. 보통 죄라는 말은 ‘하마르티아’라는 단어를 쓰는데 여기서는 원어 그대로 보면 죄보다도 좀 넓은 개념인 허물, 잘못이라고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형제들아 사람이 무슨 잘못한데, 잘못한 일에 걸려 넘어지거든, 사람이 만일 어떤 실수에 걸려 넘어지거나, 잘못에 걸려 넘어지거든’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제가 아까 모두에 1절은 진리를 이야기한다고 했습니다. 여기에 “사람이 만일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은 ‘사람이 만일 올바른 진리에 서 있지 않고 그릇된 진리로 걸려 넘어지거든’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5장 11절을 보면, “십자가의 걸림돌”이 있습니다. 십자가의 걸림돌에 넘어지는 사람은 십자가의 능력을 믿지 않고 십자가를 미련하다고 하는 사람, 곧 그리스도의 은혜가 아니라 내 공로를 말하는 사람, 내 자질을 말하는 사람, 그 사람을 여기 6장 1절이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원어를 말씀 드린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모퉁이 돌이 되셔서 우리의 주가 되시는데, 그리스도가 나의 반석이 되시는 것이 아니고 나의 머릿돌이 되시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가 걸려 넘어지는 돌이 되는 사람, 이게 곧 어떤 사람일까요? 지금까지 갈라디아서를 봤을 때 곧 은혜가 아니라 내 자질을 이야기하는 사람, 내 의를 이야기하는 사람입니다. 십자가의 도가 믿지 않는 사람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믿는 우리에게는 능력이 된다는 고린도전서 1장 18절의 말씀처럼 십자가의 도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6장 1절의 말씀을 잘 봐야 합니다. 그래서 제가 설명을 길게 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오해하시면 안 됩니다. 무슨 범죄나 무슨 행위가 아니라 바로 6장 1절은 다음 주에 보는 6장 6절과 통합니다. “가르침을 받는 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갈 6:6)와 관계됩니다. 그래서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이라는 말의 의미는 ‘무슨 잘못으로 걸려넘어지거든,’ ‘오직 그리스도 오직 십자가 오직 은혜에 아멘하지 않고 내 공로로 내 의로, 내 자질로 나서거든’, 달리 말하면 ‘십자가를 밝히 보지 못하고 다른 꾐에 넘어가 있거든’, 또 우리가 5장 7절에 보면 ‘진리에 순종하지 아니하는 사람, 진리를 멀리하거든’, 또 우리가 갈라디아서 5장 8절에 보면 ‘너희를 부르신 이에게서 난 것이 아닌 것을 가지고 거기에 걸려 넘어지거든’을 의미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은혜로 삽니다. 성경에서 걸려 넘어지는 것은 내가 잘났다고 해서 걸려 넘어지는 것입니다. 내가 못났다고 해서 걸려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없다고 걸려지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미련하다고 걸려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잘났다고 해서 걸려넘어지는 것입니다. 내가 지혜롭다고 생각해서 걸려넘어지는 것입니다. 내가 많이 가졌다고 생각해서 걸려넘어지는 것입니다.
3)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너 자신을 살펴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
제가 여기에서 변증을 이야기했습니다. 옳고 그름을 바로 세우는 것이 무엇인가? 그리스도만 붙들면 됩니다. 그래서 2절로 연결이 됩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복음, 오직 그리스도의 의, 그것에서 걸려넘어진 사람이 있거든 신령한 너희는’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오늘 1절에 “신령한 너희는”이라는 말은 ‘성령을 받은 너희는’이라고 해석하면 됩니다. 3장 2절에 보면 성령을 받았다라고 나옵니다. 바로 이 말씀입니다. “심령으로”(엔 퓨뉴마티, 성령 가운데), “온유한 심령으로”(엔 퓨뉴마티 프로마테토스, 온유의 성령 가운데)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온유가 무엇입니까? 23절의 성령의 열매입니다. 이 성령의 9가지 맛은 다 있다고 했습니다. 그 명사형입니다. 여기서 보면 너희는 성령을 받은 너희는 온유의 성령 가운데서 이렇게 해석합니다. 온유의 성령 가운데서 이 말은 우리가 성령을 받아서 온유한 심령을 가졌다는 말입니다.
혹시 기억하십니까? 온유는 울타리 안에서 내적으로 즙을 짜는 것이라고 제가 이야기 했었습니다. 영적인 즙이다. 불쑥불쑥 튀어나온 것이 아니라 꾹 짜는 것, 온유는 눌러서 즙이 나오는 것, 그 온유의 성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너 자신을 살펴봐라는 것입니다. 남을 정죄하기 앞서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너 자신을 살펴봐라. 항상 우리는 다른 사람이 커 보이면요. 다른 사람의 티가 보이면요 100% 내 안에 들보가 있습니다. 악하니까 악함이 보입니다. 다른 사람의 티가 보이면 100% 내 안에 들보가 있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저 사람 왜 저럴까? 나는 더하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다른 사람의 티가 보이면 내 눈에 들보가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돌로 칠려거든 100% 나부터 돌로 쳐야 합니다. 100%입니다. 누군가를 정죄하려고 할 때 먼저 나 자신을 정죄해야 합니다. 그거 아니면 전혀 아무 유익이 없고 무익합니다. 정죄도 해서는 안 됩니다. 이래도 해서 안 되고 저래서도 안 됩니다. 결론은 판단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판단하다 보면은 지치기 때문입니다. 판단하다 보면은 내가 못 살겠다고 느껴집니다. 남을 판단하면 내 것이 더 커 보입니다.
진리의 그릇됨이 있을 때,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도, 오직 구원으로 믿음에 이르는 도에 있어서 그릇됨이 있을 때, 여기서 우리는 먼저 남을 정죄하기 앞서서 내 자신을 온유의 성령의 은사로 즙을 짜야 합니다. 그래야 즐겁습니다. 불쑥 불쑥 나오는 것은 하나도 즐겁지가 않습니다. 그것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고린도교회에 일이 많습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은 아직 사도로 대접도 해 주지 않습니다. 사도가 아니라고 그럽니다. 고린도전서 4장 15절에 보면 그리스도의 예수 안에서 내가 복음으로서 너희를 낳았다고 이야기합니다. 사도 바울의 이런 말씀이 갈수록 더 새겨집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내가 복음으로써 너희를 낳았다. 고린도전서 4장 15절, 그리고 21절을 보면, “너희가 무엇을 원하느냐 내가 매를 가지고 너희에게 나아가랴 사랑과 온유한 마음으로 나아가랴.” 이 때 온유한 마음도 오늘 온유한 심령과 똑같은 표현입니다. 이것도 똑같습니다. 온유의 성령으로 나아가랴, 그리고 갈라디아서 5장 23절에 나오는 성령의 열매의 온유가 이 표현과 똑같습니다. 매를 가지고 나아가랴 내가 매를 들면 들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내가 너희를 복음으로 낳았으니 내가 매를 가지고 나아가랴 사랑과 온유한 마음으로 나아가랴.
여러분, 우리는 9가지 맛을 가진 한 가지 열매를 받았습니다. 다 받았다고 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성령의 열매입니다. 우리 안에 온유함이 있습니다. 우리는 성령으로 삽니다.
4. 그리스도의 은혜로 살라
1) 그리스도의 성취에 아멘 하여 누리라
이제 그래서 “신령한 너희는”, 즉 ‘성령을 받은 우리는’ 뭘 해야 즐겁겠습니까? 성령의 열매대로 은사대로 행해야 즐겁습니다. 그것이 온유한 심령으로 살펴보아 너도 심판을 받을까 두려워하라 그렇게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2절에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라고 합니다. ‘그리스도의 법’이라는 말은 전체 신구약 성경에서 여기 한군데만 나옵니다. 2절에 관하여 제가 주석을 읽어 보면 크게 두 가지 해석이 나옵니다. 첫째, 그리스도의 법을 율법으로 해석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가 모든 율법을 순종했으니까 우리도 율법을 지키라는 것으로 봅니다. 그러면 이것은 지금까지 내용과 맞지 않습니다. 지금까지는 무엇입니까?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습니다. 2장 16절에 그렇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믿고 들음으로 성령을 받았습니다. 3장 2절에 그렇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씨고 아브라함의 씨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그렇게 해석하면 안 됩니다.
둘째, 또 다른 주석자들은 그리스도의 법은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는 것은 그리스도를 본받아서 성취하라는 것이 됩니다. 이것도 말은 좋지만 우리가 그리스도를 본받아서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할 수 있습니까? 이것은 더 무서운 이야기입니다. 율법을 지키라는 것보다 더 무섭죠. 우리가 십자가에 매달리라는 것입니까? 우리가 할 수 있습니까?
주석을 보면, 많은 신학자들이 이 두 가지로 해석해 놓았습니다. 이렇게 해석하면 지금까지의 갈라디아서와 맞지 않습니다. 우리는 먼저 그리스도의 법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법은 아까 말씀 드렸던 고전도전서 1장 18절의 십자가의 도입니다. 여기서 ‘도’가 로고스입니다. 십자가의 말씀, 십자가의 도가 바로 그리스도의 법입니다. 그리스도의 법은 은혜의 법입니다. 그리스도의 법은 대속의 법입니다. 그리스도의 법은 그리스도가 다 이루신 법입니다. 그리스도가 다 이루신 법을 어떻게 우리가 또 성취합니까? 뭔가 남은 것을 성취하는 것이 아닙니다. 골로새서에 보면 그리스도의 고난을 내 잔에 채운다. 그리스도가 고난이 모자라서 내가 고난을 받아서 완전하게 한다라고 해석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가 모든 것을 다 이루셨는데 그것에 아멘 하면서 그 은혜를 누리는 것입니다.
오늘 여기 말씀도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는 성령의 열매로, 성령의 은혜로, 그리스도의 의로, 그리스도의 온전케 하심으로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구하여서 얻고 그리고 그리스도가 예가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고후 1:20).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다 이루었다는 말씀입니다. “그런즉 우리가 아멘하여.” 그리스도의 법의 성취는 ‘아멘’입니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라”(요 14:13). 그리스도께 구하여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그리스도가 예가 되고 우리는 아멘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짐을 져서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는 것이 아니라, 엄밀하게 말하서, 그리스도의 법, 은혜를 누림으로써 서로 짐을 지라는 것입니다. 이것도 열매이지, 조건이 아닙니다.
2)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니 그리스도 외에 헛된 자랑을 하지 말라
이것을 아는 것은 3절에 있습니다. “만일 누가 아무 것도 되지 못하고 된 줄로 생각하면 스스로 속임이라”(갈 6:3). 우리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무엇(something)이 된 줄로 생각하면 스스로 속이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직 은혜, 전적 은혜입니다. 우리 자신은 완전 무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고전 1:28). 이 고백이 우리의 아멘입니다. “각각 자기의 일을 살피라”(갈 6:4). “각각 자기의 짐을 질 것이라"(갈 6:5). 이것이 무엇이냐면 “짐을 서로 지라”(갈 6:2)입니다. 순서가 중요합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닌 무(메데이스, nothing)입니다. 그런데 무언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자기 기만입니다. 자기 기만은 교만을 낳고,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다. 교만은 거짓에서 나옵니다. 거짓의 영은 교만의 영입니다. 우리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그저 은혜를 받고 아멘한 자입니다. 그저 하나님이 내게 세우신 데로 나를 살피는 것입니다.
“각각 자기의 일을 살피라 그리하면 자랑할 것이 자기에게는 있어도 남에게는 있지 아니하리니”(갈 6:4). 이것도 자랑할 것이 자기에게는 있다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자기의 일’은 단수입니다. 요한복음 6:29에서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에서 “하나님의 일”은 단수입니다. 제자들은 복수로 물었지만, 예수님은 단수로 대답하셨습니다. 자기의 일을 살피면 자랑할 것이 자기에게만 있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일대일로 서라는 의미입니다. 포도원에는 빨리 들어오건 늦게 들어오건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자랑할 것이 나에게만 있다는 것은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은사와 달란트 대로 자랑하라는 것입니다. 자랑은 하나님 앞에서 하는 버릇을 들이면 편안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랑 받고 자랑하면 마음이 평안합니다. 그러나 사람에게 사람에게 자랑하고 자랑을 취하려고 하면 안 됩니다. 남과 비교해서 자랑하거나 남의 것 취하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것을 하나님께 자랑하라는 것입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나라에서 일도 하고 주인과 함께 음식도 먹는 것입니다.
3) 그리스도의 은혜를 누림으로 자기 십자가를 지라
“각각 자기의 짐을 질 것이라”(갈 6:5). 여기서 “짐”이라는 말은 마태복음에서 나오는 “짐”과 같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마 11:28-30). 그러므로 각각 자기의 짐을 지는 것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 16:24). 이 짐은 쉽고 그 멍에는 가볍습니다. 우리는 짐을 져야 합니다. 그러나 그 짐은 십자가의 짐, 주님의 짐입니다. 주님의 짐은 주님이 아시는 짐입니다. 이 짐은 가볍습니다. 가벼운 정도가 아니라 우리를 날개와 같이 끌고 올라가는 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일대일로 서야 합니다. 우리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이 다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다 하셨다는 것이 그리스도의 법이고, 그리스도가 다 하셨다고 아멘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법의 성취입니다. 우리는 각자각자 어떤 사람은 핸들을 잡고 가고, 어떤 사람은 패달을 밟고 경치를 구경합니다. 이것이 각자 짐을 지는 것입니다. 각각의 짐대로 각각의 일을 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아무것도 아닌데, 예수님이 날 위해 죽으심으로 우리를 지체로 삼아 주셔서 누구는 핸들을 잡고, 누구는 패달을 밟습니다. 각자 짐을 지는 것입니다. 무엇이든지 자기가 된 줄로 여기면 자기를 속이는 것입니다. 서로 짐을 지라는 것이 그것입니다.
5. 그리스도 은혜만을 겸손히 구하며 성도의 기쁨을 도우라
“네게 있는 믿음을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가지고 있으라 자기가 옳다 하는 바로 자기를 정죄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롬 14:22). 이것이 바로 오늘 말씀과 통합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것만 헤아리라는 것입니다. 자기가 옳다 하는 바로 자기를 정죄하지 않는 자가 복이 있고, 자기가 옳다 하는 바로 자랑하지 않는 자도 복이 있습니다. 헛자랑 하지 말자는 것입니다. 헛된 영광을 구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많은 경우에 괜한 샅바를 잡습니다. 샅바는 하나님과 잡아야 합니다. 얍복강의 야곱처럼 말입니다. 하나님을 이길 수 없지만 하나님과 샅바를 잡아야 합니다. 져도 하나님께 져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져 주시고,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주십니다. 즉 네가 이겼다라고 하십니다. 야곱의 환도뼈가 나갔는데도 야곱이 이겼다고 해 주십니다. 세상과 사람과 샅바를 잡지 마시고, 하나님과만 잡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과 씨름하고, 하나님 앞에 눈물 흘려야 하고, 우리는 죽은 듯 방불하지만 다시금 생명을 얻기 위해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일어서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샅바를 잡는 것은 교만한 것이 아니라 겸손한 것입니다. 자식이 아버지와 샅바를 잡지 이웃집 아저씨와 샅바를 잡겠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우리는 성탄절에 “큰 기쁨의 좋은 소식”(눅 2:10)을 들었습니다. 이 기쁨(카라)은 우리가 누리는 기쁨이었습니다. 이 기쁨은 큰 기쁨입니다. 그런데 이 기쁨은 어디에서 옵니까?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눅 2:14). 여기서 기뻐하심은 하나님의 기뻐하심(유도키아)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기뻐하심(유도키아)를 기뻐합니다(카라).
“우리가 너희 믿음을 주관하려는 것이 아니요 오직 너희 기쁨을 돕는 자가 되려 함이니 이는 너희가 믿음에 섰음이라”(고후 1:24).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는 것은 기쁨을 돕고 나누는 것입니다.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하지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눅 2:10). 여기서 “큰 기쁨”이 언급되고, “그들이 [그에게 경배하고] 큰 기쁨으로 예루살렘에 돌아가 늘 성전에서 하나님을 찬송하니라”(눅 24:52-53). 여기에서도 “큰 기쁨”이 나옵니다. 이들에게 무슨 일이 있어서 큰 기쁨이 있었을까요? 누가복음의 마지막 부분을 보면, 부활하신 예수님이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를 만나셔서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셨습니다(눅 24:27). 그러자 그들의 마음이 뜨거워졌습니다(눅 24:32). 그리고 부활하신 예수님이 또 숨어 있는 제자들에게도 나타나셔서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눅 24:44)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이에 그들의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눅 24:45). 부활하신 예수님이 성경에 쓴 바 자기에게 관해 쓴 바를 설명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그 말씀을 들을 때 마음이 뜨거워졌습니다. 이 일이 부활하신 주님이 행하신 큰 일입니다.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 마음을 뜨겁게 받게 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큰 기쁨입니다.
6. 결론
우리는 바로 이런 큰 기쁨을 나누고 돕는 사람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우리가 이 일로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는 것입니다. 이는 우리가 모자란 무엇을 채우는 것이 아니라 아멘 하고 기뻐하고 함께 누리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