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110][십자가지기교회 주일낮예배: 갈라디아서 강해(48): 그리스도의 복음] 그리스도의 십자가만 자랑함 (갈 6:11-14) 문병호 목사
11 내 손으로 너희에게 이렇게 큰 글자로 쓴 것을 보라
12 무릇 육체의 모양을 내려 하는 자들이 억지로 너희에게 할례를 받게 함은 그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박해를 면하려 함뿐이라
13 할례를 받은 그들이라도 스스로 율법은 지키지 아니하고 너희에게 할례를 받게 하려 하는 것은 그들이 너희의 육체로 자랑하려 함이라
14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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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취록>
1. "내 손으로 너희에게 이렇게 큰 글자로 쓴 것을 보라"
이제 갈라디아서가 거의 결론 부분으로 다가가고 있습니다. 본문 11절의 말씀은 "내 손으로 너희에게 이렇게 큰 글자로 쓴 것을 보라"라고 하고 있습니다. 이 당시에는 대서자가 있어서 대필 작업을 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11절부터는 직접 자필로 쓴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특별히 교회를 향한 서신이라고 하지만 수신자가 있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서신은 편지의 형식을 띠고 있지만 개인의 편지처럼 여기면 안 됩니다. 영감된 하나님의 말씀의 기록인 것입니다. 서신서는 문안의 인사, 축복의 말씀이 있습니다. 그리고 교훈이 있습니다. 여기에는 교리적인 것들이 들어 있습니다. 그리고 권면과 견책, 그리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송영이 들어 있습니다. 어느 서신서나 이런 것들이 공통적으로 들어 있습니다.
갈라디아서의 대주제는 성령으로 시작하고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시작하여 잘 믿었는데, 소아시아, 지금 터키 지역으로 초창기에 전도여행을 가서 교회를 개척하고 믿음의 터가 잘 잡혔는데 곧 다른 복음이 들어오니 이에 대해 권면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다른 복음'은 다른 종교가 아닌 유대교, 구약의 의식, 형식을 버리지 못한 것을 의미합니다. 무엇보다도 할례를 행해야 한다는 말을 합니다. 유대인도 할례를 행할 필요가 없는데 이방인에게 할례를 요구하는 문제가 생긴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큰 글자로 쓴다고 한 것은 자세히 알 수 없으나 강조하기 위해 그런 것이라고 보기도 하고 사도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를 만난 이후 눈이 안 좋아서 크게 글씨를 썼다고 볼 수 있습니다.
2. "육체의 모양을 내려 하는 자들"
본론을 이야기하고 마지막 인사를 하기 전에 다시 한번 요약하는 부분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우선 육체의 모양을 내는 자들은 외식하는 자들, 바깥으로 장식하고 모양을 내는 자들, 즉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의를 다 이루시고 그것을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는 복음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자질로, 의식으로, 율법주의로 구원을 주장하는 자들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겉으로 보면 더 나아 보입니다. 열심을 내다가 거기서 부족하고 연약한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분히 고의성을 가지고 은밀히 자기들의 주장을 펼치는 사람들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오직 은혜 아래 있는 백성들, 한마디로 주님의 품에 안긴 양과 같은 자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도를 전해야 하는데 자꾸 양이 무엇을 해야 한다고 말하니 그 도가 깨진 것입니다.
양은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육체의 모양을 내려 하는 자들이 바로 이것입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에서 외식하는 자들을 향하여 평토장한 무덤, 회칠한 무덤과 같다고 하셨습니다. 즉 죽어 있는데 겉으로 표가 나지 않는 것을 의미합니다. 봉분이 있으면 죽은 자가 묻힌 것이라고 알 수 있는데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회칠한 무덤도 칠을 해서 번듯해 보이지만 속은 죽어있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에서 말하는 것은 자질주의, 형식주의, 윤리주의입니다. 달리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 이루심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여전히 구약의 그림자에 머물러 있는 그런 사람들이 바로 육체의 모양을 내려는 사람들입니다.
3. "억지로 너희에게 할례를 받게 함은"
왜 이들이 육체의 모양을 내려 하나요? 특히 6절은 할례를 받게 한다고 합니다. 할례가 어떻게 구원의 공로가 됩니까? 할례는 구약시대에 있던 표일 뿐입니다. 아브라함이 열국의 아비가 되고 그 후손이 할례를 받는 것입니다. 할례가 구원의 예표, 포피를 베어 이스라엘의 백성을 표하는 것이지 실체가 되거나 능력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스마엘도 할례를 이삭보다 먼저 받았습니다. 그러나 이스마엘은 아브라함의 씨에 들지 못하지 않습니까. 믿어야 아브라함의 씨인 것입니다. 그래서 할례는 표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제는 거듭난 것, 옛 것을 베어낸 것을 표시하여 진정한 할례의 표의 성취가 세례가 된 것입니다. 예수와 함께 살고 함께 죽는 십자가의 부활의 도로 성취가 되었는데, 포피를 베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자신의 몸 자체가 죽으심으로 실체를 주셨는데, 예수도 믿고 할례도 거행하는 것이 말이 되느냐 말입니다. 둘 다 좋다는 것은 신앙에서 없습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는데, 성령을 받아 십자가를 밝히 보이거늘, 그곳에서 창에 찔리고 물과 피를 흘리시고 온 몸을 찔리고 부어서, 빻아서, 태워서 드리는 모든 제물로 다 드리신 예수의 십자가를 안다면 포피를 베는 것 하나가 어떤 의미도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4. 보이지 않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음으로 바라보라
하늘 법정에서 인쳐서 주시는 예수님의 의는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내가 지키고 행하고 드러내고 남기고 할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내가 주가 될 것도, 드러낼 것도, 남길 것도 전혀 없습니다. 우리는 오직 십자가를 바라보되 영적으로 바라보는 것뿐입니다. 사도 바울은 십자가를 실제로 보지 못했을 것입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을 보지 못했습니다. 심지어 제자들도 사도 요한 정도를 제외하고는 다 도망가서 보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여자들만 보았습니다. 이제는 영적인 눈을 떠서 십자가만 봐야 합니다. 다른 것은 모두 우상입니다. 다른 것을 보면서 신앙생활 하면 안 됩니다. 보이는 것에 마음을 기울이면 안 됩니다. 말씀 읽고 십자가를 영적으로 바라보는 것뿐입니다. 눈에 보이는 상으로 십자가를 만들 필요도 없습니다.
5. 그리스도는 구약을 다 이루셨으므로 구약으로 돌아가서는 안 된다
구약의 절기는 정기적으로 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유월절 양이 우리를 위해 되셨습니다. 또 오순절에 칠칠절, 맥추절의 첫 열매,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시고, 장막절에 천국 창고에 알곡을 들이는 수장절, 장막 안에 거하는 것 즉 주님의 신부가 되는 것이 구약의 절기의 의미입니다.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주님의 신부가 되는 것이 이 땅에서 이미 이루어지지만 영원한 터가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이루어집니다. 그것이 장막절, 수장절, 초막절의 의미요 이루어진 것입니다. 다 주님이 이루신 것입니다. 안식일도 안식일의 주인이 주님이라고 선포하셨습니다. 안식일 섬기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주일에 주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요일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절기를 섬기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의 실체요 성취요 우리의 신랑이 되신 예수를 섬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실체로서 성취된 과거의 모형을 다시 지키자고 하니 안 된다는 것입니다. 구약으로 돌아가는 것은 다시 육체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구약이 틀린 것은 아니나 그것으로 돌아가서는 안 됩니다. 구약의 인물이 모두 예수를 바라보고 믿었는데 지금 예수를 믿는 우리가 왜 구약으로 다시 돌아갑니까. 히브리서 11장에 나오는 구약의 선진들이 모두 예수를, 모세도 오실 예수를 바라고 인내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참 것의 그림자인 손으로 만든 성소에 들어가지 아니하시고 바로 그 하늘에 들어가사 이제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 나타나시고"(히 9:24). '참 것'은 바로 그리스도입니다. 모든 종류의 제사를 그리스도께서 다 이루셨습니다. 언약도 이루시고 절기도, 정결례도, 제사도 이루신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말입니다.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골 2:17). 신약, 더 나은 새 언약의 삶을 사는 백성들로 이제 이미 이루어진 구약을 읽으면 그래서 더 마음이 기쁘고 확신이 생기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밝히 보는 신앙인 것입니다. 구약의 성도는 올 십자가를 바라보았으나 밝히 보지는 못 했습니다. 몸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고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고"(마 27:51). "성소의 휘장이 한가운데가 찢어지더라"(눅 23:45). 이 두 가지를 묶어 보면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한 가운데로 찢어졌습니다. 이 휘장은 성서와 지성소를 나누는 휘장입니다. 아무도 들어가지 못합니다. 대제사장이 일 년에 한 번 대속죄일에 들어가는 곳의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로 찢어진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하신 일입니다. 아래로부터 위로 한 것은 인간이 한 것이지만 말입니다. 꼰 실은 태우거나 풀 수는 있어도 자르기는 정말 어렵습니다. 이 찢어진 휘장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육체요, 그것이 우리의 살 길이라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제사와 할례와 절기와 언약과 모든 것이 그 십자가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니 다 이루었다고 하시고 돌아가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 외에는 알 것도 말할 것도 없다고 사도 바울이 말한 것입니다. 알 것도, 말할 것도 없습니다. 십자가의 도만 전하는 것입니다. 본문 14절입니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갈 6:14).
6. "그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박해를 면하려 함뿐이라"
왜 이렇게 굳이 할례를 자꾸 하라고 했을까요? 인간의 마음에 남아 있는 공로주의입니다. 성경의 말씀은 지금 이 시대에도 유효합니다. 처음에는 눈물 콧물 다 쏟고 손을 들고 나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마음이었다가 손이 내려가고 신을 신고 띠를 두르고 칼을 들고 내 공로를 내세우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손을 든다는 것은 나는 아무것도 못한다는 말입니다. 신발을 벗는다는 말은 광야에서는 한 발걸음도 안 간다는 말입니다. 왜 다시 내 공로가 생기느냐, 본문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는 박해를 면하려고 한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이 돌아가신 것은 유대인의 왕이라는 명분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따르는 무리는 박해가 따랐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피하기 위해 할례를 행하는 것입니다.
낮에는 로마 카톨릭, 밤에는 개신교라는 말이 종교개혁 때도 있었습니다. 니고데모가 밤에 은밀히 예수님을 만나러 옵니다. 그래서 니고데모주의자라는 말이 종교개혁 당시에 있었습니다. 섞이는 것입니다. 낮에는 유대인이고 밤에는 십자가의 도를 전합니다. 박해를 면하기 위해 그렇게 한 것입니다. 13절의 말씀에 보면 육체를 자랑하려고 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갈라디아 사람들에게 육체를 자랑하려 한다는 것은 바로 우리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하지 않고 사람에게 보이고 인정받으려고 하다 보면 외양을 추구하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자로 내가 스스로 잘나고 뛰어남을 드러내려고 하는 마음이 있다는 것입니다.
주일학교 전도사도 하다 보면 몇 명이 모이고 얼마나 일사분란하게 행사를 잘 했는지 등에 대해 자랑하는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들이 자랑거리가 되는 것은 결코 아니지 않습니까? 지도자들이 복음으로 자기의 자랑을 삼으려고 하다 보면 결국 사람의 눈에 맞추게 됩니다. 그러니 결국 좋은 교회가 없습니다. 그저 하나님의 은혜만 있을 뿐입니다. 어떤 교회가 좋다고 말할 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지난 주 역대상을 읽으며 솔로몬에 대해 생각을 해봤습니다. 에시온게벨을 저도 가봤는데 습도가 정말 높습니다. 오빌, 지금의 에티오피아에서 금을 실어서 오고, 그리고 지금의 스페인이나 지중해 지방 등에서도 금을 실어서 왔습니다. 은도 하찮게 여겼다고 합니다. 금으로 방패까지 만든다고 했습니다. 솔로몬은 그런 면에서 자랑거리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왜 당대에도 신앙을 못지켰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7.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루리라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 5:48). 사실상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을 흡족하게 순종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거기에 가닿을 수 없습니다.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기도 지키지 못하면서 다른 사람을 지키게 하는, 그것으로 구원에 이른다고 하는 사람들은 전부 다 외식주의, 형식주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자랑할 것은 14절, 그리스도의 십자가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라는 말씀은 이사야 9장 7절에 나옵니다.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사 9:7). 이사야의 예언의 말씀입니다.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고 합니다. 이 말은 결국 만군의 영호와의 열심은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신 것이라는 사실을 의미합니다. 그 예수 그리스도가 어디서 구원의 의를 이루셨냐 하니 바로 십자가입니다.
요한복음에 태초로부터 계신 말씀(요 1:1)이 육신이 되신 것(요 1:14)은 그 육신을 십자가에 달기 위해서입니다. 이제는 더 이상 육안으로 볼 것이 없습니다. 단 두 가지 외에는 말입니다. 세례와 성찬입니다. 다른 것은 볼 것도 없고 구할 필요도 없습니다. 세례의 물로 씻음, 성찬의 떡과 잔, 그리스도의 살과 피, 이 두 가지 외에는 육안으로 볼 것이 없습니다. 영안으로 볼 것은 딱 하나입니다. 십자가입니다. 십자가가 밝히 보이거늘. 예수님 얼굴 그리지 마십시오. 십자가를 보십시오. 십자가가 밝히 보이거늘. 주님의 얼굴이 보고 싶거든 그는 마른 땅의 연한 가지처럼 흠모할 것이 없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성경은 우리가 성경만 읽으라고 주신 것입니다. 웃는 예수 얼굴을 그려서 볼 필요도 없습니다. 다 부질없습니다. 십자가만을 보면 됩니다.
8.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십자가를 어떻게 자랑합니까. 본문 12절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14절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라고 합니다. 여기에도 상당히 고양되는 마음이 있습니다. 십자가를 자랑하는 것은 교수대를 자랑하는 것과 같습니다. 조선시대로 하면 능지처참 하는 형틀을 자랑하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나가서 교수대를 자랑하지 않습니다. 얼마나 낯설게 들리겠습니까. 그래서 십자가를 자랑한다고 하면 전부 다 걸림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구원을 얻은 우리에게는 능력이 되는 것입니다(고전 1:18). 우리가 십자가를 볼 때는 마음에 큰 기쁨이 있습니다. 십자가를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자랑하기 때문입니다. 나의 주 예수 그리스도, 그 달리신 값으로 나를 사시려고 값 주고 사신 주가 되신 곳인 십자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 예수만을 내가 자랑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갈 3:13). 우리의 저주를 가져가시기 위함입니다.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벧전 2:24).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의 죄를 자랑합니다. "기록된 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라"(고전 1:31).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전 2:2). 우리가 자랑할 것은 이것 하나뿐입니다. 십자가만을 알기로 작정한 것입니다.
9.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태초로부터 계신 생명의 말씀이 육신이 되셨는데 우리가 그 독생자의 영광을 보니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데 그 영광의 육신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서 우리가 만난 것인데 지성소를 찢고 들어가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다 십자가입니다. 홍해가 갈라진 것, 지성소 휘장이 갈라진 것, 이 모든 것의 실체는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주님의 몸이 찢어짐으로 성소의 휘장이 찢어졌기에 휘장은 주님의 육체라고 성경에서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요한복음 새벽 강해의 제목이 '십자가의 지성소'였습니다.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고전 1:23). 고린도교회는 많이 힘들었습니다. 좋은 교회는 분명하나 문제도 많이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런 교회에 대해 십자가만 전합니다. 바로 십자가는 죽고 살아나는 그 형틀입니다. 십자가는 좁은 문, 좁은 길, 목자가 기다리는 곳이 십자가입니다. 주님이 죽으셨습니다. 죽으실 수 없는 분이 죽으시고 저주받을 수 없는 분이 저주 당하셨습니다. 그러니 십자가는 생명의 터입니다. 죽으시되 생명을 이끄시려고 죽으셨습니다. 그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을 때 지진이 나고 터와 바위가 갈라지고 죽은 자들이 살아난 것입니다. 십자가에 죄인이 죽은 것이야 마땅하지만 죄 없고 흠 없고 티 없는 하나님의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가 죽으셨으니 그런 것입니다.
십자가는 우리가 죽어도 주의 것이요 살아도 주의 것이요를 드러내는 곳입니다. 십자가를 밝히 바라볼 때 세상이 나를 향해 못 박힙니다(갈 6:14). 이 말은 즉 세상의 것이 나에게 들어오지 못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십자가가 없으면 우리에게 세상의 것이, 온갖 마귀 사탄의 화전이 다 날아옵니다. 그러나 십자가가 있으면 세상이 나를 향해 십자가에 못 박힙니다. 즉, 세상 것이 못 들어옵니다. 내가 참고 견디고 걸러내는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로만 마귀 사탄의 궤계와 미혹을 막아 줍니다. 또한 세상을 향하여 내가 못 박혔습니다. 세상과 내가 서로 향하여 십자가에 못 박힙니다. 나도 십자가에 나가고 싶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에 붙들리면 다 걸러집니다. 내가 해서는 안 됩니다. 십자가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십자가를 자랑합니다. 십자가만이 공로입니다. 유일한 소망입니다. 십자가만이 우리의 유일한 영광입니다. 우리가 십자가지기교회라고 해서 간혹은 십자가를 너무 좁게만 바라보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십자가가 전부입니다. 십자가만 알기로 했고 사나 죽으나 십자가만 전부입니다.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 15:31). 한 가지 자랑이 있는데 날마다 죽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렇나요? 십자가를 붙들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를 붙들면 내가 날마다 죽는 것입니다. 우리는 죽어서 사는 십자가의 도를 잘 배워야 하는 주의 백성입니다. 십자가가 우리의 초장입니다. 십자가가 우리의 물가입니다. 십자가가 모든 기적의 터이고 우리를 천국으로 이끄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입니다.
[20210110][십자가지기교회 주일낮예배: 갈라디아서 강해(48): 그리스도의 복음] 그리스도의 십자가만 자랑함 (갈 6:11-14) 문병호 목사
11 내 손으로 너희에게 이렇게 큰 글자로 쓴 것을 보라
12 무릇 육체의 모양을 내려 하는 자들이 억지로 너희에게 할례를 받게 함은 그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박해를 면하려 함뿐이라
13 할례를 받은 그들이라도 스스로 율법은 지키지 아니하고 너희에게 할례를 받게 하려 하는 것은 그들이 너희의 육체로 자랑하려 함이라
14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음성파일: 게시물 하단 "관련링크"에서 청취 혹은 내려받기 가능합니다.
<녹취록>
1. "내 손으로 너희에게 이렇게 큰 글자로 쓴 것을 보라"
이제 갈라디아서가 거의 결론 부분으로 다가가고 있습니다. 본문 11절의 말씀은 "내 손으로 너희에게 이렇게 큰 글자로 쓴 것을 보라"라고 하고 있습니다. 이 당시에는 대서자가 있어서 대필 작업을 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11절부터는 직접 자필로 쓴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특별히 교회를 향한 서신이라고 하지만 수신자가 있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서신은 편지의 형식을 띠고 있지만 개인의 편지처럼 여기면 안 됩니다. 영감된 하나님의 말씀의 기록인 것입니다. 서신서는 문안의 인사, 축복의 말씀이 있습니다. 그리고 교훈이 있습니다. 여기에는 교리적인 것들이 들어 있습니다. 그리고 권면과 견책, 그리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송영이 들어 있습니다. 어느 서신서나 이런 것들이 공통적으로 들어 있습니다.
갈라디아서의 대주제는 성령으로 시작하고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시작하여 잘 믿었는데, 소아시아, 지금 터키 지역으로 초창기에 전도여행을 가서 교회를 개척하고 믿음의 터가 잘 잡혔는데 곧 다른 복음이 들어오니 이에 대해 권면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다른 복음'은 다른 종교가 아닌 유대교, 구약의 의식, 형식을 버리지 못한 것을 의미합니다. 무엇보다도 할례를 행해야 한다는 말을 합니다. 유대인도 할례를 행할 필요가 없는데 이방인에게 할례를 요구하는 문제가 생긴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큰 글자로 쓴다고 한 것은 자세히 알 수 없으나 강조하기 위해 그런 것이라고 보기도 하고 사도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를 만난 이후 눈이 안 좋아서 크게 글씨를 썼다고 볼 수 있습니다.
2. "육체의 모양을 내려 하는 자들"
본론을 이야기하고 마지막 인사를 하기 전에 다시 한번 요약하는 부분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우선 육체의 모양을 내는 자들은 외식하는 자들, 바깥으로 장식하고 모양을 내는 자들, 즉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의를 다 이루시고 그것을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는 복음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자질로, 의식으로, 율법주의로 구원을 주장하는 자들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겉으로 보면 더 나아 보입니다. 열심을 내다가 거기서 부족하고 연약한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분히 고의성을 가지고 은밀히 자기들의 주장을 펼치는 사람들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오직 은혜 아래 있는 백성들, 한마디로 주님의 품에 안긴 양과 같은 자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도를 전해야 하는데 자꾸 양이 무엇을 해야 한다고 말하니 그 도가 깨진 것입니다.
양은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육체의 모양을 내려 하는 자들이 바로 이것입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에서 외식하는 자들을 향하여 평토장한 무덤, 회칠한 무덤과 같다고 하셨습니다. 즉 죽어 있는데 겉으로 표가 나지 않는 것을 의미합니다. 봉분이 있으면 죽은 자가 묻힌 것이라고 알 수 있는데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회칠한 무덤도 칠을 해서 번듯해 보이지만 속은 죽어있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에서 말하는 것은 자질주의, 형식주의, 윤리주의입니다. 달리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 이루심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여전히 구약의 그림자에 머물러 있는 그런 사람들이 바로 육체의 모양을 내려는 사람들입니다.
3. "억지로 너희에게 할례를 받게 함은"
왜 이들이 육체의 모양을 내려 하나요? 특히 6절은 할례를 받게 한다고 합니다. 할례가 어떻게 구원의 공로가 됩니까? 할례는 구약시대에 있던 표일 뿐입니다. 아브라함이 열국의 아비가 되고 그 후손이 할례를 받는 것입니다. 할례가 구원의 예표, 포피를 베어 이스라엘의 백성을 표하는 것이지 실체가 되거나 능력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스마엘도 할례를 이삭보다 먼저 받았습니다. 그러나 이스마엘은 아브라함의 씨에 들지 못하지 않습니까. 믿어야 아브라함의 씨인 것입니다. 그래서 할례는 표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제는 거듭난 것, 옛 것을 베어낸 것을 표시하여 진정한 할례의 표의 성취가 세례가 된 것입니다. 예수와 함께 살고 함께 죽는 십자가의 부활의 도로 성취가 되었는데, 포피를 베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자신의 몸 자체가 죽으심으로 실체를 주셨는데, 예수도 믿고 할례도 거행하는 것이 말이 되느냐 말입니다. 둘 다 좋다는 것은 신앙에서 없습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는데, 성령을 받아 십자가를 밝히 보이거늘, 그곳에서 창에 찔리고 물과 피를 흘리시고 온 몸을 찔리고 부어서, 빻아서, 태워서 드리는 모든 제물로 다 드리신 예수의 십자가를 안다면 포피를 베는 것 하나가 어떤 의미도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4. 보이지 않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음으로 바라보라
하늘 법정에서 인쳐서 주시는 예수님의 의는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내가 지키고 행하고 드러내고 남기고 할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내가 주가 될 것도, 드러낼 것도, 남길 것도 전혀 없습니다. 우리는 오직 십자가를 바라보되 영적으로 바라보는 것뿐입니다. 사도 바울은 십자가를 실제로 보지 못했을 것입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을 보지 못했습니다. 심지어 제자들도 사도 요한 정도를 제외하고는 다 도망가서 보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여자들만 보았습니다. 이제는 영적인 눈을 떠서 십자가만 봐야 합니다. 다른 것은 모두 우상입니다. 다른 것을 보면서 신앙생활 하면 안 됩니다. 보이는 것에 마음을 기울이면 안 됩니다. 말씀 읽고 십자가를 영적으로 바라보는 것뿐입니다. 눈에 보이는 상으로 십자가를 만들 필요도 없습니다.
5. 그리스도는 구약을 다 이루셨으므로 구약으로 돌아가서는 안 된다
구약의 절기는 정기적으로 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유월절 양이 우리를 위해 되셨습니다. 또 오순절에 칠칠절, 맥추절의 첫 열매,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시고, 장막절에 천국 창고에 알곡을 들이는 수장절, 장막 안에 거하는 것 즉 주님의 신부가 되는 것이 구약의 절기의 의미입니다.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주님의 신부가 되는 것이 이 땅에서 이미 이루어지지만 영원한 터가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이루어집니다. 그것이 장막절, 수장절, 초막절의 의미요 이루어진 것입니다. 다 주님이 이루신 것입니다. 안식일도 안식일의 주인이 주님이라고 선포하셨습니다. 안식일 섬기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주일에 주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요일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절기를 섬기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의 실체요 성취요 우리의 신랑이 되신 예수를 섬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실체로서 성취된 과거의 모형을 다시 지키자고 하니 안 된다는 것입니다. 구약으로 돌아가는 것은 다시 육체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구약이 틀린 것은 아니나 그것으로 돌아가서는 안 됩니다. 구약의 인물이 모두 예수를 바라보고 믿었는데 지금 예수를 믿는 우리가 왜 구약으로 다시 돌아갑니까. 히브리서 11장에 나오는 구약의 선진들이 모두 예수를, 모세도 오실 예수를 바라고 인내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참 것의 그림자인 손으로 만든 성소에 들어가지 아니하시고 바로 그 하늘에 들어가사 이제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 나타나시고"(히 9:24). '참 것'은 바로 그리스도입니다. 모든 종류의 제사를 그리스도께서 다 이루셨습니다. 언약도 이루시고 절기도, 정결례도, 제사도 이루신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말입니다.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골 2:17). 신약, 더 나은 새 언약의 삶을 사는 백성들로 이제 이미 이루어진 구약을 읽으면 그래서 더 마음이 기쁘고 확신이 생기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밝히 보는 신앙인 것입니다. 구약의 성도는 올 십자가를 바라보았으나 밝히 보지는 못 했습니다. 몸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고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고"(마 27:51). "성소의 휘장이 한가운데가 찢어지더라"(눅 23:45). 이 두 가지를 묶어 보면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한 가운데로 찢어졌습니다. 이 휘장은 성서와 지성소를 나누는 휘장입니다. 아무도 들어가지 못합니다. 대제사장이 일 년에 한 번 대속죄일에 들어가는 곳의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로 찢어진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하신 일입니다. 아래로부터 위로 한 것은 인간이 한 것이지만 말입니다. 꼰 실은 태우거나 풀 수는 있어도 자르기는 정말 어렵습니다. 이 찢어진 휘장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육체요, 그것이 우리의 살 길이라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제사와 할례와 절기와 언약과 모든 것이 그 십자가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니 다 이루었다고 하시고 돌아가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 외에는 알 것도 말할 것도 없다고 사도 바울이 말한 것입니다. 알 것도, 말할 것도 없습니다. 십자가의 도만 전하는 것입니다. 본문 14절입니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갈 6:14).
6. "그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박해를 면하려 함뿐이라"
왜 이렇게 굳이 할례를 자꾸 하라고 했을까요? 인간의 마음에 남아 있는 공로주의입니다. 성경의 말씀은 지금 이 시대에도 유효합니다. 처음에는 눈물 콧물 다 쏟고 손을 들고 나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마음이었다가 손이 내려가고 신을 신고 띠를 두르고 칼을 들고 내 공로를 내세우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손을 든다는 것은 나는 아무것도 못한다는 말입니다. 신발을 벗는다는 말은 광야에서는 한 발걸음도 안 간다는 말입니다. 왜 다시 내 공로가 생기느냐, 본문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는 박해를 면하려고 한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이 돌아가신 것은 유대인의 왕이라는 명분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따르는 무리는 박해가 따랐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피하기 위해 할례를 행하는 것입니다.
낮에는 로마 카톨릭, 밤에는 개신교라는 말이 종교개혁 때도 있었습니다. 니고데모가 밤에 은밀히 예수님을 만나러 옵니다. 그래서 니고데모주의자라는 말이 종교개혁 당시에 있었습니다. 섞이는 것입니다. 낮에는 유대인이고 밤에는 십자가의 도를 전합니다. 박해를 면하기 위해 그렇게 한 것입니다. 13절의 말씀에 보면 육체를 자랑하려고 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갈라디아 사람들에게 육체를 자랑하려 한다는 것은 바로 우리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하지 않고 사람에게 보이고 인정받으려고 하다 보면 외양을 추구하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자로 내가 스스로 잘나고 뛰어남을 드러내려고 하는 마음이 있다는 것입니다.
주일학교 전도사도 하다 보면 몇 명이 모이고 얼마나 일사분란하게 행사를 잘 했는지 등에 대해 자랑하는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들이 자랑거리가 되는 것은 결코 아니지 않습니까? 지도자들이 복음으로 자기의 자랑을 삼으려고 하다 보면 결국 사람의 눈에 맞추게 됩니다. 그러니 결국 좋은 교회가 없습니다. 그저 하나님의 은혜만 있을 뿐입니다. 어떤 교회가 좋다고 말할 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지난 주 역대상을 읽으며 솔로몬에 대해 생각을 해봤습니다. 에시온게벨을 저도 가봤는데 습도가 정말 높습니다. 오빌, 지금의 에티오피아에서 금을 실어서 오고, 그리고 지금의 스페인이나 지중해 지방 등에서도 금을 실어서 왔습니다. 은도 하찮게 여겼다고 합니다. 금으로 방패까지 만든다고 했습니다. 솔로몬은 그런 면에서 자랑거리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왜 당대에도 신앙을 못지켰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7.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루리라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 5:48). 사실상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을 흡족하게 순종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거기에 가닿을 수 없습니다.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기도 지키지 못하면서 다른 사람을 지키게 하는, 그것으로 구원에 이른다고 하는 사람들은 전부 다 외식주의, 형식주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자랑할 것은 14절, 그리스도의 십자가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라는 말씀은 이사야 9장 7절에 나옵니다.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사 9:7). 이사야의 예언의 말씀입니다.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고 합니다. 이 말은 결국 만군의 영호와의 열심은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신 것이라는 사실을 의미합니다. 그 예수 그리스도가 어디서 구원의 의를 이루셨냐 하니 바로 십자가입니다.
요한복음에 태초로부터 계신 말씀(요 1:1)이 육신이 되신 것(요 1:14)은 그 육신을 십자가에 달기 위해서입니다. 이제는 더 이상 육안으로 볼 것이 없습니다. 단 두 가지 외에는 말입니다. 세례와 성찬입니다. 다른 것은 볼 것도 없고 구할 필요도 없습니다. 세례의 물로 씻음, 성찬의 떡과 잔, 그리스도의 살과 피, 이 두 가지 외에는 육안으로 볼 것이 없습니다. 영안으로 볼 것은 딱 하나입니다. 십자가입니다. 십자가가 밝히 보이거늘. 예수님 얼굴 그리지 마십시오. 십자가를 보십시오. 십자가가 밝히 보이거늘. 주님의 얼굴이 보고 싶거든 그는 마른 땅의 연한 가지처럼 흠모할 것이 없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성경은 우리가 성경만 읽으라고 주신 것입니다. 웃는 예수 얼굴을 그려서 볼 필요도 없습니다. 다 부질없습니다. 십자가만을 보면 됩니다.
8.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십자가를 어떻게 자랑합니까. 본문 12절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14절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라고 합니다. 여기에도 상당히 고양되는 마음이 있습니다. 십자가를 자랑하는 것은 교수대를 자랑하는 것과 같습니다. 조선시대로 하면 능지처참 하는 형틀을 자랑하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나가서 교수대를 자랑하지 않습니다. 얼마나 낯설게 들리겠습니까. 그래서 십자가를 자랑한다고 하면 전부 다 걸림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구원을 얻은 우리에게는 능력이 되는 것입니다(고전 1:18). 우리가 십자가를 볼 때는 마음에 큰 기쁨이 있습니다. 십자가를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자랑하기 때문입니다. 나의 주 예수 그리스도, 그 달리신 값으로 나를 사시려고 값 주고 사신 주가 되신 곳인 십자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 예수만을 내가 자랑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갈 3:13). 우리의 저주를 가져가시기 위함입니다.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벧전 2:24).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의 죄를 자랑합니다. "기록된 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라"(고전 1:31).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전 2:2). 우리가 자랑할 것은 이것 하나뿐입니다. 십자가만을 알기로 작정한 것입니다.
9.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태초로부터 계신 생명의 말씀이 육신이 되셨는데 우리가 그 독생자의 영광을 보니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데 그 영광의 육신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서 우리가 만난 것인데 지성소를 찢고 들어가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다 십자가입니다. 홍해가 갈라진 것, 지성소 휘장이 갈라진 것, 이 모든 것의 실체는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주님의 몸이 찢어짐으로 성소의 휘장이 찢어졌기에 휘장은 주님의 육체라고 성경에서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요한복음 새벽 강해의 제목이 '십자가의 지성소'였습니다.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고전 1:23). 고린도교회는 많이 힘들었습니다. 좋은 교회는 분명하나 문제도 많이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런 교회에 대해 십자가만 전합니다. 바로 십자가는 죽고 살아나는 그 형틀입니다. 십자가는 좁은 문, 좁은 길, 목자가 기다리는 곳이 십자가입니다. 주님이 죽으셨습니다. 죽으실 수 없는 분이 죽으시고 저주받을 수 없는 분이 저주 당하셨습니다. 그러니 십자가는 생명의 터입니다. 죽으시되 생명을 이끄시려고 죽으셨습니다. 그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을 때 지진이 나고 터와 바위가 갈라지고 죽은 자들이 살아난 것입니다. 십자가에 죄인이 죽은 것이야 마땅하지만 죄 없고 흠 없고 티 없는 하나님의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가 죽으셨으니 그런 것입니다.
십자가는 우리가 죽어도 주의 것이요 살아도 주의 것이요를 드러내는 곳입니다. 십자가를 밝히 바라볼 때 세상이 나를 향해 못 박힙니다(갈 6:14). 이 말은 즉 세상의 것이 나에게 들어오지 못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십자가가 없으면 우리에게 세상의 것이, 온갖 마귀 사탄의 화전이 다 날아옵니다. 그러나 십자가가 있으면 세상이 나를 향해 십자가에 못 박힙니다. 즉, 세상 것이 못 들어옵니다. 내가 참고 견디고 걸러내는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로만 마귀 사탄의 궤계와 미혹을 막아 줍니다. 또한 세상을 향하여 내가 못 박혔습니다. 세상과 내가 서로 향하여 십자가에 못 박힙니다. 나도 십자가에 나가고 싶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에 붙들리면 다 걸러집니다. 내가 해서는 안 됩니다. 십자가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십자가를 자랑합니다. 십자가만이 공로입니다. 유일한 소망입니다. 십자가만이 우리의 유일한 영광입니다. 우리가 십자가지기교회라고 해서 간혹은 십자가를 너무 좁게만 바라보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십자가가 전부입니다. 십자가만 알기로 했고 사나 죽으나 십자가만 전부입니다.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 15:31). 한 가지 자랑이 있는데 날마다 죽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렇나요? 십자가를 붙들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를 붙들면 내가 날마다 죽는 것입니다. 우리는 죽어서 사는 십자가의 도를 잘 배워야 하는 주의 백성입니다. 십자가가 우리의 초장입니다. 십자가가 우리의 물가입니다. 십자가가 모든 기적의 터이고 우리를 천국으로 이끄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