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포하는 교회

주일낮예배


갈라디아서 강해

선포하는 교회  |  주일예배 설교


갈라디아서 강해


           

[20210117][십자가지기교회 주일낮예배: 갈라디아서 강해(49): 그리스도의 복음] 새로 지으심을 받는 것 (갈 6:15-16) 문병호 목사

관리자
조회수 170


[20210117][십자가지기교회 주일낮예배: 갈라디아서 강해(49): 그리스도의 복음] 새로 지으심을 받는 것 (갈 6:15-16) 문병호 목사


15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는 것만이 중요하니라

16   무릇 이 규례를 행하는 자에게와 하나님의 이스라엘에게 평강과 긍휼이 있을지어다


<녹취록> 


*음성파일: 게시물 하단 "관련링크"에서 청취 혹은 내려받기 가능합니다. 



1. 서론 


우리가 지난 주부터 갈라디아서 결론 부분에 도달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십자가 외에는 자랑할 것이 없으며 자신이 십자가를 향해 그리고 세상이 십자가를 향해 못 박혔다고 하여 십자가의 도(고전 1:18)를 말한 바 있습니다. 본문의 두 절 역시 지난 주 이런 말씀을 확증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16절은 이 규례를 행하는 자, 하나님의 이스라엘에게 평강과 긍휼이 있으리로다라고 하여 서신 말미에 축복의 인사를 하고 있습니다. 서신서 말미에는 그렇게 되기를 바란다는 축복과 하나님의 복이 임하기를 바라는 권고가 있는 것입니다. 

본문의 두 절은 십자가 외에는 다른 공로가 없음, 그리고 그 규례를 행하는 자, 함께 걷는 자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십자가의 도가 세상에서는 미련한 것이로되 구원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능력이라고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에서 말한 바 있습니다. 십자가를 붙들어야 내가 세상에 대해 못 박히고 세상의 것이 내게 들어오려고 할 때 십자가에 못 박힙니다. 그래야 세상 속에 살되 세상을 이기며 살게 됩니다. 세상 것이 그대로 들어오면 아무리 강한 사람도 그 냉기에 다 쓰러지고 맙니다. 세상의 서릿발 같은, 우는 사자와 같은 것에 다 넘어집니다. 어떨 때는 강함으로 어떨 때는 달콤함과 유혹으로 걸려 넘어집니다. 그러나 세상이 나를 향하여 세상이 십자가에 못 박힐 때는, 그렇게 채로 걸러 들어올 때는 성도가 보호를 받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의 것이 그대로 나간다면, 나의 자랑할 것들이 그대로 나가면 안 됩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고 채로 걸러서 나가야 그것이 온전하고 유익이 됩니다. 그저 있는 대로 자랑하고 아는 대로 세상에서 이야기하면 모두 걸려 넘어지고 맙니다.



2. 십자가의 중심성


지난주에도 말씀을 드렸지만 우리는 십자가만 알고(고전 1:2) 십자가만 전하고(고전 1:23), 십자가만 자랑합니다. 우리가 자랑하는 십자가는 나무 형틀이 아닌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갈 6:15). 그래서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 알고 전하고 자랑한다고 지난 주 말씀을 새겼습니다. 십자가가 길입니다. 다른 길이 없습니다. 십자가 외에는 천국 가는 길이 없습니다. 십자가가 진리입니다. 다른 것은 전부 거짓입니다. 십자가가 도입니다. 로고스입니다. 말씀입니다. 진리입니다. 그리고 십자가가 생명입니다. 그 외에는 전부 죽음이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입니다. 전부 우는 사자와 같이 악어 떼와 같이 우글거리는 마귀 사탄의 이빨 속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십자가가 우리의 보호처, 피난처, 평화의 안식처, 은신처입니다. 십자가가 유일한 길이요 진리요 생명입니다. 십자가는 그리스도가 대속의 죽음을 죽으신 그 터이고 저주의 형벌을 받으신 터입니다. 아무 죄 없는 하나님의 아들, 참 빛이 이 땅에 오셔서 죽으셨으므로 그 십자가는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의 터가 되었습니다. 아들을 주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시는(롬 8:32) 하나님의 터입니다. 

십자가는 부활의 필요충분조건입니다. 십자가 없이는 부활이 없고 부활이 없이는 십자가가 없습니다. 부활이 없이는 우리의 전하는 도가 헛것이요 믿음도 수고도 모두 헛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5장입니다. 함께 죽음이 없으면 함께 살아남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가 없으면 전하는 것도 복음도 헛되고 모든 것이 값싼 것이 되어 버립니다. 십자가는 뒤로 하고 이 땅의 재물과 명예를 탐한들 헛것입니다. 배설물과 분토와 같은 것으로 우리를 얽어매여 모두 전도자의 말처럼 헛된 것이 될 뿐입니다. 그러나 십자가를 부여잡으면 그곳에 영생이 있고 영원히 쇠하지 않는 열매가 있고 하나님과 하나가 되게 하십니다. 오늘 교독문으로 요한계시록 21장을 읽었습니다. 이 말씀과 같은 내용인 것입니다. 



3. 십자가의 그리스도


예수는 십자가에서 자기 자신을 향기로운 희생 제물로 자기 자신을 드리셨습니다. 그리하여 우리 자신을 값을 주고 사셨습니다(고전 7:23). 소유를 사신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을 사셨는데, 소유를 주고 사신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단번에 영원히 드리셔서 우리 자신을 값주고 사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의 터입니다. 사람들은 십자가의 주님을 악의로 못 박았습니다. 선의가 아닙니다. 사람들이 대속의 사역을 이루러 오신 메시아는 예언된 말씀에 따라 죽어야 한다고 하면서 울면서 선의로 하나님의 섭리를 따져 그러지 않았습니다. 철저히 악의로 그렇게 했습니다. 가장 흉악한 살인자와 반역자인 '바라바'라는 죄인을 풀어 주고 예수를 못 박으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바로 인간이 예수를 얼마나 사지에 몰아넣고 저주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가장 흉악한 바라바보다 더 악한 죄인으로 여긴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들을 미워하지 않으시고 저주하지 않으셨습니다.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하나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인간의 그릇된 지식, 옳다 하는 바, 그것조차도 용서하신 것입니다. 행위만 용서하시는 것만이 아니라 말입니다. 어떻게 보면 거의 마지막 기도를 십자가에서 드리신 것입니다. 



4. 십자가의 유일성


갈라디아서를 첫 번째 볼 때 말씀드린 것처럼 흔히 이 책의 주제로 말하는 이신칭의, 언약, 성령, 그리스도의 자유 등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십자가입니다. 십자가가 밝히 보이고 십자가만 자랑하고 우리가 십자가에 못 박힌 바 된 내용 등을 말하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는 믿음으로 구원에 이른다고 하는 최고의 서신서입니다. 로마서도 모든 교리가 집약되어 있으나, 갈라디아서는 로마서의 요약이라기보다 훨씬 더 교리적이고 심오한 부분이 있습니다. 단순히 요약이라고 볼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종교개혁자들이 갈라디아서 주석에 힘을 쏟고 그 과정에 종교개혁의 주요 교리가 정립된 것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갈 2:16) 구원에 이릅니다. "그리스도의 복음"(갈 1:7)밖에 없습니다. "오직 한 사람을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갈 3:16). 이와 같이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고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고 언약은 예수 그리스도를 유일한 머리로 삼는 언약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성령의 약속에 대해서도 말합니다. "듣고 믿음으로"(갈 3:2) 성령을 받았고, "성령의 약속"을 받았습니다. 이 성령의 약속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갈 3:14)입니다. 믿는 자가 아브라함의 씨이며 이들이 성령을 받습니다. 그들에게 성령을 주시고 성령을 그들이 받았으니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이 우리로부터가 아니라 성령을 부어 주심으로 시작된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갈라디아서는 올바른 믿음, 복음, 언약이 모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또한 올바른 성령은 그리스도의 영을 받는 것이라고 전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전하는데, 십자가 사건이 있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십자가가 자유의 길입니다. 존 스토트 목사님의 갈라디아서 주석의 제목이기도 합니다. 십자가 외에는 다 떨어져 죽고 맙니다. 십자가의 그리스도를 믿고 전하고 유일한 머리로 삼고 유일한 복의 근원으로 삼는 것, 그것이 갈라디아서의 주제인데, 그것을 "규례"라고 16절은 말하는 것입니다.



5. 규준인 십자가의 도를 따름


여기에서 "규례"라는 말은 '카논'이라고 합니다. 캐논이라는 말은 들어 보셨지요? 본래 이 단어는 '자', '갈대'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행한다'는 말은 '따라서 걷는다'는 뜻입니다. 5장 25절 등에 나오는 표현은 모두 성령으로 살아나서 성령으로 걷는데, 그 따라 걷는 기준이 되는 것이 바로 캐논이라는 것입니다. 즉 규준, 길, 표준을 따라 걷는 자에게 평강과 긍휼이 있을 것이라고 축복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의 도라는 말입니다. 이 캐논, 자라는 말이 기독교 역사에 중요하게 쓰입니다. 성경의 정경을 정함에 있어 무엇이 진짜 하나님이 주신 감동된 말씀이냐고 할 때 바로 캐논이라는 말을 씁니다. 확고한 기준, 규준을 말하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전체에서 이 캐논을 따라 걷고 행하는 자를 말하는 것입니다. 로마 가톨릭은 이 캐논을 교회법으로 비꾸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일 년에 몇 번이라도 캐논이라는 말을 예배에서 사용합니다. 우리는 교회법이 아닌 성경이 잣대이자 기준입니다. 특별히 그 성경 중에서 복된 소식, 복음, 그 복음의 정점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인 것입니다. 지난 주 14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인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달리신 십자가를 역사적으로 규정하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우리 주가 달려 죽으신 십자가를 따라 걷는 자로 내용을 전개하는 것입니다. 마지막 찬송할 때 "주와 같이 길가는 것 즐거운 일 아닌가"라는 가사가 있었습니다. 십자가를 내가 지고 주를 따라가고 이제부터 예수님만 나의 보배 삼고 세상의 부귀 영화 모두 잊겠다고 했습니다. 바로 이 말씀입니다. 십자가의 도를 따르는 자에게 평강과 긍휼이 있다는 것입니다. 



6. 십자가: 하나님이 져 주시는 터


이 규례를 행하는 자에게와 하나님의 이스라엘에게입니다. 이것을 여러 주석에서 해석합니다. 저희는 그저 이 두 개를 같이 묶어서 봅니다.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에 우리는 항상 주목해야 합니다. 이스라엘은 야곱의 하나님이 야곱에게 주신 이름입니다. 얍복강에서 종들을 다 보내고 홀로 기도할 때 얼마나 간절히 했는지 허벅지 관절이 치심을 받아 힘을 쓰지 못하는 상태가 되어 버렸습니다. 야곱이 밤새 씨름해서 힘을 얻은 것이 아니라 근육이 절단되어 버렸습니다. 그런데 이겼다고 말합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겨루어 이겼다는 뜻입니다. 야곱이니 괜찮다고 볼 수가 없습니다. 흔한 말로 불구가 되어 버린 것인데 어떻게 이겼다고 합니까. 하나님이 져 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로 인간이 이긴 것입니다. 기도하면 하나님이 져 주십니다. 내 근육 가지고 이기는 것이 아닙니다.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가 이기시는 것입니다.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기시는 것이 이사야서 말씀입니다. 이 열심의 정점이 아들을 보내셔서 죽기까지 순종하신 그 열심입니다.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의 정점은 여러 자연 현상도 있으나 아들을 보내어 죽기까지 순종하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과 겨루어 이겼다는 이름은 다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져 주셨다는 것입니다. 

뼈 빠지게 기도하니까 져 주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긍휼입니다. 불쌍히 여겨주시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은 불쌍히 여겨주셨다는 이름인데, 사실 야곱이 얼마나 기도를 대단하게 했겠습니까. 그저 우리와 비슷하게 간절히 기도했을 뿐일 것입니다. 다만 간절히, 곧 형이 나를 만나면 죽일 것 같으니 간절히 할 수 없이 매달린 것 아니겠습니까. 야곱이 기도의 박사가 돼서 우리와 다른 차원의 신령한 기도를 신비주의적인 기도를 드렸겠습니까. 어떻게 보면 일차원적인 것이 아닙니까. 근육을 쳤다는 말은 그저 그냥 육체적이고 일차원적으로 간절히 기도한 것입니다. 주님도 땀이 피가 되듯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셨습니다. 거창한 이론이 아니라 원하거든 지나가게 하시는데 아버지 원대로 하옵소서, 이렇게 간절히 기도한 것입니다. 우리가 십자가의 기준대로 살아감에 있어서, 십자가를 붙듬에 있어서, 십자가가 승리의 터인데 그것은 내가 이기는 터가 아니라 하나님이 져 주시는 터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기게 하시는 터라는 말씀입니다. 날마다 우리가 이 가운데 있는 것이 은혜입니다. 엉엉 울고 다녀도 말입니다. 모두 보고 만지는데 나는 못 보고 못 만질 때, 혈루병 걸린 여인, 향유병 깨뜨린 여인 같이 그런 때 말입니다. 백부장도 그렇습니다. 이들은 전부 다 연약한 사람들입니다. 뒤로 남 모르게 예수님께 간절히 가닿은 사람들입니다. 그들을 예수님께서 '네 믿음이 크도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7. 십자가로 말미암은 새로운 피조물


본문 15절은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것도 아니라고 합니다.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는 것만이 중요하다고 합니다. 원문은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것도 아니고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는 것만 있다고 되어 있습니다. 우선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말은 그것을 행하는 것이 자랑이 안 될 뿐 아니라 안 하는 것도 자랑거리가 안 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어려운 말 같지만, 하는 것 자랑하지 말라고 하면 안 하는 것을 자랑합니다. 미신 지키지 말라고 하니 그것을 안한 것을 자랑거리로 삼는데 그러지 말라는 것입니다. 술 안 마신 것, 미신 안 지킨 것이 자랑거리가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의식주의가 구원이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의식주의는 언제나 한다, 안 한다만을 따집니다. 그러나 안 하는 것으로도 구원에 절대 이르지 못합니다. 우리 믿는 자들은 이런 논의 자체에 들어가면 안 됩니다. 사탄이 노리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사탄은 행하지 않는 것에 교묘하게 인간의 의를 집어 넣습니다. 할례는 행하는 것도 행하지 않는 것도 모두 자랑이 아닙니다. 행하지 않았다고 구원에 이르는 것이 절대 아닙니다. 오직 십자가의 도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이 내 대신에 십자가에 못 박히는 것입니다. 새로 지으심을 받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습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새로운 피조물과 새로 지으심을 받는 것이 똑같은 말입니다. 헬라어로 새로운 피조물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을 '오직 새로운 피조물이 중요하니'로 해석해도 됩니다. 그래서 15절을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것도 아니로되 새로운 피조물만 있다고 번역해도 됩니다. 물론 한글 성경은 이를 친절하게 성경을 해 두긴 했습니다. 새로운 피조물만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옛것이 지나가니 새것이 되었다고 하여 이전의 것이 쓸모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새것, 거듭난 것, 그리스도의 값으로 사신 것으로 연초에 말씀을 나눴습니다. 오늘 나눠드린 코팅된 말씀이 사실 전부 다 성경의 말씀인데요, 서른 두 구절이 들어 있는데 그중 고린도전서 5장 17절이 두 번 나옵니다. 이것은 어느 책에서 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 십자가지기교회 설교에서 나눈 말씀입니다. 아멘이고 고백입니다. 캐논, 즉 말씀, 정경, 이 말씀을 기도로 심어 마음판에 새기는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이든 심은 대로 거두리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음악을 들으면서 달립니다. 이것은 서로 반대되는 것이 아니라 잘 달리기 위해 음악을 듣는 것입니다. 말씀과 기도도 그렇습니다. 말씀을 잘 새기기 위해 기도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기도로 마음판에 심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는 것, 그것만이 중요하다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것밖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말씀입니다(사 43:18-19; 65:17-19). 새 하늘과 새 땅과 새 백성의 말씀을 이사야 선지자가 선포합니다. 이사야서에는 구약과 신약, 요한계시록까지 전부가 다 나옵니다. 행하는 것이 아무것도 아닌만큼 행하지 않은 것도 공로가 아닙니다. 우리에게 공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밖에 없는 줄로 믿습니다. 십자가를 지고 가는 것이 복됩니다. 제가 어설픈 생각을 해 봤습니다. 휠체어를 뒤에서 젊은이가 어머니를 태워 끌고 가는데 땀을 뻘뻘 흘립니다. 그것을 보면서 저도 그렇게 해 볼 어머니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 봤습니다. 휠체어에 앉아 가는 것보다 끌고 가는 것이 더 복되다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섬기는 것이 섬김 받는 것보다 복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십자가를 지고 가는 것이 복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8. 십자가로 말미암은 평강과 긍휼


십자가의 도의 캐논, 이것을 행하는 자에게 평강과 긍휼이 있습니다. 평강이라는 것은 바로 하나님이 하나님의 자리에 계시고 우리는 우리의 자리에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가 연결시키는 것입니다. 상천하지의 유일한 아버지인 하나님, 아빠 아버지라 부르는 아버지가 평강입니다. 평강은 주관적으로는 우리 안에 잠잠함을 줍니다. 우리가 잠잠하다는 것이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잠잠함, 믿음, 평화, 평강입니다. 그리고 평강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관계이기도 합니다. 아버지는 아버지의 자리에 우리는 우리의 자리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평강이라는 말은 우리 주관적으로는 잠잠함이 있습니다. 그러나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계속 우리 주님은 사방에 난리의 소문이 들리고 처처에 선지자가 있다고 하는 혼란한 말세에 잠잠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요새도 그렇습니다. 온갖 이상한 목사라고 하는 사람들이 처처에서 나옵니다. 이 가운데 우리 마음의 잠잠함이 생기는데 이것은 아버지와 우리 사이의 담대함에서 나옵니다. 이 평강을 그 잠잠함을, 그 아버지 되심의 담대함과 즐거움을 십자가에서 얻는다는 말입니다. 지난 주 14절과 십자가로 연결지어야 합니다. 

그리고 긍휼이 있습니다. 불쌍히 여기시는 것이 우리의 유일한 소망입니다. 어느 목사님께 학교에 가서 이야기했습니다. 그런데 그분이 너무 힘들어하시길래 이 말을 했더니 그렇게 고마워했습니다. 여호와가 불쌍히 여기심이 우리의 소망입니다. 긍휼은 바로 체휼, 한 몸이 되어 느껴 주시는 것입니다. 함께 당해 주시는 것이 긍휼입니다. 사실상 하나님이 하시는 모든 것은 다 긍휼입니다. 자비라고 해도 됩니다. 긍휼과 자비입니다.

규례라는 단어를 14절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연결지어 보아야 합니다. 그래서 이것 외에는 어떤 것도 자랑하지도 전하지도 않는다, 이것이 유일한 소망이자 구원, 구약과 신약의 모든 분수령, 신구약의 총합이 십자가의 도이니 그것을 따라 행하는 것으로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때 평강과 긍휼이 있을지어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복과 은혜와 안위가 넘치기를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