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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124][십자가지기교회 주일낮예배: 갈라디아서 강해(50): 그리스도의 복음] 예수의 흔적 (갈 6:17-18) 문병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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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124][십자가지기교회 주일낮예배: 갈라디아서 강해(50): 그리스도의 복음] 예수의 흔적 (갈 6:17-18) 문병호 목사
 

(갈 6:17)○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 
(갈 6:18)○형제들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심령에 있을지어다 아멘



*음성파일: 게시물 하단 "관련링크"에서 청취 혹은 내려받기 가능합니다. 



<녹취록> 




1. 서론


설교에는 주제설교라는 것이 있고 강해설교가 있습니다. 주제설교는 주제를 잡아서 설교를 하는 것인데, 연중 절기 설교도, 성도의 유익을 위해 환란 시 위로를 위해 하기도 하고 시험이 있을 때는 교리를 위주로 하기도 합니다. 강해설교는 성경을 순차적으로 강해해 나가는 설교입니다. 이것이 함께 잘 어우러지면 좋습니다. 본문은 갈라디아서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저는 계속 설교 노트에 한 주간의 설교 내용을 일곱, 여덟 페이지 정도로 써 봅니다. 타이핑을 치면 뭔가 사소한 것들을 수정하려고 하고 그러다 보니 맥이 끊깁니다. 갈라디아서를 특별히 강해 하면서 그 가운데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33주간 설교했고 <기독신문>에 연재가 되기도 했습니다. 어떤 분이 이에 대해 연락 주셔서 왜 강해설교를 하지 않느냐고 묻기도 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를 다른 서신서에 비해 특별히 한 주제에 몰두하고 있습니다. 에베소서나 빌립보서나 골로새서 등은 전체적으로 성도님들이 당한 처지와 우리의 어떠한 은혜, 그리고 삶을 종합적으로 말한다면 갈라디아서는 오직 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원받는 그 구원의 복음의 도를 설명하고 변증하는 특성이 강합니다. 본문 17절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이 있다고 하는 표현은 여러 가지로 해석이 가능합니다. 크게 보면 이 내 몸의 흔적은 갈라디아서의 주제에 맞추어 '은혜의 증인이 바로 나다', '내가 은혜거리다'라고 보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내가 아무것도 아닌데 많이 은혜 받은 흔적이 나에게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2. 참 성도의 표지: 경건의 비밀, 새로운 피조물


하나님은 아들을 보내 주시고 보혜사 성령을 부어 주심으로 이제 교회에게 더 이상 보이는 표로 많이 나타내시지 않습니다. 그 보이는 표로, 살아남의 표로 세례, 살아감의 표로 성찬이라는 두 가지를 주셨습니다. 같은 맥락에서 교회는 어떤 휘장이나 장식이 아닌 말씀의 선포, 성례의 시행, 권징의 시행, 이것들을 표지로 사용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참 성도의 표는 올바른 말씀을 듣고 고백하고, 예배에 열심히 참석하고 기도에 힘쓰는 것이 있을 것입니다. 신앙고백은 보이지 않습니다. 고백 자체가 보이는 것이 아닙니다. 예배도 보이지 않습니다. 겉으로 참석하는 것은 드러나나 참되게 예배하는 것이나, 말씀에 진실되게 아멘 하는 것 등은 모두 보이지 않습니다. 무엇보다 성도의 가장 귀한 표지는 믿음의 비밀, 경건의 비밀입니다. 누구에게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내가 아멘 하는 믿음의 비밀, 그리고 기도하면 하나님이 응답하신다는 경건의 비밀, 내가 하나님 말씀대로 살려고 하면 부요하게 하신다는 것에 대한 아멘, 이런 것들이 경건의 비밀입니다. 이것은 누가 설명하거나 말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와 같은 것들은 우리에게 있는 흔적입니다. 

지난 주 15절에 본 것처럼 할례도 무할례도 아무것이 아닙니다. 원어에는 '없다'고 표현됩니다. 그러하면,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는 것만 있다고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본문과 같이 번역한 것입니다. 물론 잘 된 번역입니다. 그러나 보다 직설적으로 '없다', '있다'로 원어는 말하는 것입니다. 할례를 받는 것도 아무것도 아니고 할례를 안 받는 것도 아무것도 아니라는 말입니다.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은 것만 있다는 말입니다. 지난 주에 이것을 고린도후서 5장 17절의 새로운 피조물이라는 말과 같은 의미라고 살펴보았습니다. 새 것, 거듭난 것, 그리스도의 값으로 사신 것입니다. 지난 주에도 나누어 드렸었는데요, 조금 더 모양이 좋게 이 말씀을 정리하여 다시 나눠 드린 코팅지가 있습니다. 전부 다 성경 구절입니다. 성경 구절이 서른 세 번 나오는데 고린도후서 5장 17절은 두 번 나옵니다. 하늘나라에 가져갈 것은 새 것, 거듭난 것, 피 값 주고 사신 것뿐입니다. 나머지는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만이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가 아브라함의 후손이고, 그런 자만이 하나님의 아들이고 그리스도의 것이고 천국의 상속자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보았던 갈라디아서의 말씀입니다.



3. 예수의 흔적


1) 교회를 위한 괴로움


이 갈라디아서의 말씀 가운데 바로 내가 예수의 흔적을 가졌다고 오늘 말씀하는 것입니다. 본문 17절은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사도 바울이 괴로운 것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물리적 고난과 박해도 힘든 것에 해당될 것입니다. 그러나 고린도후서 11장 28절을 보면 '그 외에도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것이 있다'고 말합니다. 주의 종이 날마다 눌리는 것이 무엇일까요? 먼저는 내 자신의 진보에 대한 의식이요, 그 이후에는 구령에 대한 사역, 진리를 바로 전파하여 그것이 열매를 맺는 것일 것입니다. 신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저는 한 가지만은 믿습니다. 즉 무슨 일이 있든 그들의 중심은 주의 일을 향한 눌림이 있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방법이 미숙하고 그럴 수 있으나 어쨌거나 아이 하나라도 더 교회에 데려오려는 마음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도 바울의 이 말도 더 이상 자신을 헛된 진리로 괴롭히지 말라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진리는 내놓기가 쉽지 않습니다. 언제든지 옳은 것을 열심히 배워 취직하면 세상에서 그대로 말하면 칭찬을 받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많은 경우 틀린 것이 횡행하며 거짓 선지자들이 오다니며, 참 진리는 주머니 속에 넣어놓고 끙끙거릴 일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거짓 복음을 가지고 내 앞에 나타나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2) 내게 베풀어진 은혜의 흔적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이 있다, 내가 은혜 덩어리이니 거짓 복음, 자질, 공로, 형식, 율법 가지고 나타나는데 나를 봐라, 내가 바로 은혜거리라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율법으로 말하면 나보다 잘 아는 자가 없으나 내가 다메섹에서 그리스도를 만났으니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이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지금 내 모습에서 율법이나 공로가 아닌 은혜가 보이지 않느냐고 말하는 것입니다.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신비적으로 해석하면 안 됩니다. 예수의 흔적은 그저 은혜의 흔적입니다. 나는 안 되는데 예수님이 나를 변화시켜 주신 그 흔적입니다. 나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그 하나님의 자녀대로 복을 누리고 후사 되고 상속자 되는 복을 누린 증인이 내 육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내 육체에 그리스도의 흔적이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비진리는 무당이나 어떤 다른 것들보다 공로주의, 자질주의, 내가 잘난 것으로 구원받는 줄 아는 것을 의미합니다. 내가 잘했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내가 못했다고 쉽게 절망합니다. 양 극단을 왔다갔다 합니다. 교만하지 않아야 절망하지 않습니다. 자랑하려거든 절망할 준비도 해야 합니다. 자랑할 것도 없고 자랑 안 할 것도 없는 것입니다. 할례도 아니고 무할례도 아닙니다. 했다는 것도 아니고 안 했다는 것도 아닙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만 있습니다.


3) 나는 약하고 하나님은 강하신 흔적


사도 바울은 옥중서신들에서 자신이 복음에 매인 바 됐다고 합니다(엡 6:19-20). 복음의 비밀을 알리기 위해 옥중에 들어갔다고 합니다. 쇠사슬에 매였다고 합니다. 이것이 사도 바울의 믿음입니다. 감옥에 들어가는 것으로도 복음의 진보가 있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빌 1:22-23). 누군가 사도 바울이 능력이 없어 감옥에 들어갔다고 업신여기면서 복음을 전하면 그것으로도 복음의 진보가 있으니 좋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해로 여기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다는 것입니다. "내가 교회의 일꾼 된 것은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내게 주신 직분을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려 함이니라"(골 1:25); "우리가 그를 전파하여 각 사람을 권하고 모든 지혜로 각 사람을 가르침은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 함이니"(골 1:28). 주의 종이 전하는 말씀은 완전합니다. 주의 종은 완전하지 않으나 말입니다. 이것으로 주의 종이 귀한 것입니다. 사람이 잘나거나 능력이 있어서가 아니라 주의 종을 심부름꾼 삼아 주의 종에게 하나님이 말씀을 맡깁니다. 그 말씀이 보배라는 것입니다. 말씀을 제대로 행하지 않고 거짓 선지자들이 흥왕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이 사도 바울의 가장 큰 근심이라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고 말씀하고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이 있다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영어로 '스티그마'라고 합니다. 흔적인데, 예수의 흔적이 나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주석학자들은 그 당시의 성도들은 문신처럼 예수, 즉 '크리스토스'의 첫 자인 엑스 자를 새기고 다녔다고 하기도 하는데 그것은 완전히 잘못된 것입니다. 이 흔적은 그저 바울이 박해를 받은 흔적입니다. 약함 가운데 강하게 하신 흔적입니다. 졌는데 이겼다고 해 주신 흔적입니다. 수술을 하면 수술 자국이 있습니다. 그래서 낫게 한 흔적이 남습니다. 사도 바울의 흔적의 의미는 예수께서 이기신 흔적입니다. 나를 부인하고 하나님이 이기신 은혜의 흔적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싸매 주신 흔적이 나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저도 모두 있습니다. 예수님의 흔적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하심이 사람보다 강하니라"(고전 1:25). 하나님 앞에서 어리석음이 세상의 어떤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나님 앞에서 약한 것이 세상의 어떤 사람보다 강합니다. 그러니 부득불 자랑하되 나의 약한 것을 자랑한다는 것입니다. 예수의 흔적은 약한 것을 자랑하는 것입니다. 이래야 아멘이 있고 평강이 있고 하늘이 열립니다. 은혜를 자랑하지 않고 자질을 자랑하면 땅이 열리고 무저갱으로 들어갑니다. 이 겨울을 버틸 수 없습니다. 이것은 실체입니다. 진짜 자랑할 것은 내 약함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약한 것이 세상보다 강하고 하나님 앞에서 미련한 것이 세상보다 지혜롭기 때문입니다.

제가 이번에 <<기독교 강요>> 번역을 완료하고 쓴 첫 구절이 이것입니다.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고후 12:9). 그리스도의 능력이 머물기 원하면 약한 것을 자랑해야 합니다. 계속해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고후 12:10)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곤고는 영혼의 고난입니다. 이와 같은 것들을 예수의 흔적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4) 내 공로는 없고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만 붙드는 흔적


우리는 십자가만을 자랑하고 십자가의 증인입니다. 버나드라는 신학자는 공로 없음이 공로로서 족하다고 했습니다. 공로 없음이 유일한 공로거리임을 자랑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공로 없다는 것으로 나가기가 참 힘듭니다. 어릴 때 뭘 하나 해도 선생님 앞에 나가려면 뭔가 한 게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인간의 본능입니다. 그런데 공로 없음이 자랑으로 족하다고 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누구를 찾으실까요? 양에게 어떤 공로가 있지 않습니다. 선한 목자, 양의 문, 생명의 주, 떡, 양식, 우리 주님이십니다. 우리 주님이 다 안아 주시고 축복해 주시고 기도해 주십니다. 예수의 흔적, '스티그마'는 바로 그것입니다. 내 무능이, 내 미련함이, 내 없음이, 내 부인이 나는 날마다 죽노라 하는 것이 바로 예수의 흔적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야곱이 기도할 때 환도뼈가 위골됐습니다. 그것이 바로 흔적입니다. 사실 인간은 약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이기게 하신 것입니다. 이스라엘 하나님과 겨루어 분명히 졌는데 이기게 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흔적입니다. 저도 기도원에서 겨울에 보일러가 꺼져서 보일러 붙들고 기도하고, 비가 오는데 비닐 아래서 기도한 흔적이 있습니다. 저에게는 이것이 흔적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감사할 때는 나를 내세울 때가 아닙니다. 오직 은혜, 전적 은혜, 하나님의 전적 긍휼과 자비 가운데서의 이끄심, 이것이 우리의 규례라는 것입니다. 규례, 캐논, 우리의 기준은 바로 긍휼이 은혜라는 것입니다. 스데반을 죽인 사울에 대해 성경에서 곧이어 나오는 장면이 다메섹 도상에서의 사건입니다. 새롭게 지으심을 받은 것입니다. 성경은 모세도 애굽의 왕궁에서 어떻게 보면 왕까지 될 수 있었던 그것이 아니라 미디언에 쫓겨 갔을 때 그것을 거듭남으로 보는 것입니다. 세상은 왕이 될 수 있었는데 아깝다라고 말하지만 말입니다. 우리의 흔적은 바로 그것입니다.



4. 예수의 흔적으로 승리함


여호수아의 말씀입니다. "네 평생에 너를 능히 대적할 자가 없으리니 내가 모세와 함께 있었던 것 같이 너와 함께 있을 것임이니라 내가 너를 떠나지 아니하며 버리지 아니하리니 강하고 담대하라 ... 우로나 좌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리하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니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수 1:5-9). 지난 주 아슬아슬한 순간들이 몇번 있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 특별히 감사했습니다. 우리는 실족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제가 기도를 많이 하지도 못했는데 장인어른이 기도를 많이 하셨나 보다라고 생각하기까지 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십니다. 주야로 말씀을 묵상하고 행하면 그것이 우리의 담대함입니다. 불법을 절대로 행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계속 올라갑니다. 조금 내려갈 때는 더 높이시기 위한 것입니다. 강하고 담대함이 없으면 은혜를 조금 받으면 거기서 실족합니다.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은 끌고 올라 가십니다. 이것이 담대함입니다. 여호수아는 한 번도 전쟁에서 진 적이 없습니다. 우리가 예수의 흔적으로만 이깁니다. 내 능력, 공로로는 안 됩니다. 본문 18절의 두 단어, 은혜와 아멘이 바로 그것입니다. 



5. 은혜와 아멘


인사말을 여러가지로 할 수 있으나 그것마저도 은혜와 아멘으로 한 것입니다. 성경은 태초로부터 시작해서 아멘으로 끝납니다. 아멘은 하나님에 대한 송영이고 하나님의 일에 대한 확증입니다. 그리고 아멘은 내가 하나님의 자녀 됨에 대한 확신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아멘은 자라감에 대한 확신입니다. 아멘은 고백의 소리고 간구의 소리고 자라감의 소리입니다. 우리가 영차 영차 하면서 운동회 때 줄을 당깁니다. 이처럼 아멘 하면서 당기는 것입니다. 고백, 간구, 자라감의 소리입니다. 아멘을 많이 하십시오. 학교 다닐 때 테니스 선수를 하다가 회심한, 아멘 전도사가 있었습니다. 무조건 설교할 때 아멘 하니 나중에 선생님한테 혼났습니다. 설교에 방해가 된다고 말입니다. 아멘 많이 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앞에서 약하고 어리석은 것이 세상보다 강하고 지혜롭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주신 말씀 붙들고 아멘 하며 사는 모든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