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112][십자가지기교회 주일낮예배: 갈라디아서 강해(32): 그리스도의 복음] 초등학문에 따른 종 노릇 (갈 4:8-11) 문병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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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 4:8)
○그러나 너희가 그 때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여 본질상 하나님이 아닌 자들에게 종 노릇 하였더니
(갈 4:9)
이제는 너희가 하나님을 알 뿐 아니라 더욱이 하나님이 아신 바 되었거늘 어찌하여 다시 약하고 천박한 초등학문으로 돌아가서 다시 그들에게 종 노릇 하려 하느냐
(갈 4:10)
너희가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키니
(갈 4:11)
내가 너희를 위하여 수고한 것이 헛될까 두려워하노라
<녹취록>
1. 초등학문으로는 아들의 영을 받지 못하여 하나님을 알 수 없다
우리가 본문에서 ‘초등학문으로 다시 돌아가서 되겠느냐’는 경고의 말씀을 봅니다. 약하고 천박한 초등학문, 이것은 사도 바울이 1장에서 다른 복음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이것은 초등학교에서 가르치는 기본원리나 기초지식이 아니라, 실체 이전의 그림자, 형식적인 것, 덜 여문 것 등을 의미합니다. 구체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실체를 영접하지 못한 예비 단계의 학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초등 학문이 영 잘못된 것이 아니라 실체가 왔는데 다시 이것으로 돌아가는 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도 어렸을 때에 이 세상의 초등학문 아래에 있어서 종 노릇 하였더니”(갈 4:3). 결국 초등학문이라는 것은 그 아들의 영, 예수 그리스도의 영, 주의 영, 아빠 아버지라 부르는 그 아들의 영, 지난 번에 살펴본 이 네 가지로 표현된 그 영을 받지 못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영을 받은 자가 아들이고 유업을 이을 자인데 그 도리를 가르쳐주지 못하는 학문을 초등학문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성도들의 삶의 모습은 삶 그 자체가 아니라 하나하나가 신분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자녀와 상속자 답게 살아가는 것이고 우리의 삶의 모습이 이것을 드러냅니다. 본문 7절의 우리가 자녀이고 상속자이면 우리가 아버지를 아빠 아버지라 부른다고 했습니다(롬 8:15; 갈 4:6). 그리고 우리가 그 아들과 함께 형제가 되었으므로, 자녀가 되었으므로 아무도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롬 8:35-39). 산상복음의 그 대주제가 바로 하나님의 아버지이심과 우리의 자녀임입니다. 여기에서도 보면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일까보냐, 하물며 너희일까보냐라고 하여 “하물며”를 두 번 강조합니다. 우리의 자녀 됨을 강조한 것입니다.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엡 5:8);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롬 13:12).
이 자녀의 영을 받으면 진리가 너희를 거룩하게 하고 자유롭게 한다고 말합니다. 이 하나님의 아들의 영, 그 아들의 영을 본문 8절은 특히 ‘그 영을 받으면 하나님을 아는 자가 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영을 받기 전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고 합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 17:3). 여기에서 ‘앎’으로써 영생에 이른 자, 그 자가 바로 하나님을 아는 자, 즉 하나님의 자녀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본문은 우리가 이전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본질상 하나님이 아닌 자들에게 종 노릇했다고 합니다. 사탄은 종이라고 패찰을 붙인 것이 아니라 아주 교만하고 자기를 높이면서 종노릇하게 합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교만한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가면 무릎을 꿇고 주의 참된 자녀 됨이 있게 합니다. 세상은 우리에게 종이 아닌 주인시켜 준다고 하여 고개를 빳빳하게 들게 하지만 알고 보면 종노릇 시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9절을 보면, 약하고 천박한 초등학문에 봉사한다고 합니다. 아무 능력이 없는 것이요 천박한 것입니다. 또한 날과 달과 절기를 삼가 지킨다고 합니다. 아주 두려워하면서 말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말입니다. 이런 모습을 말해 주는 이유는 갈라디아교회가 당시 이렇게 돌아가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를 만났는데 다시 옛날로 돌아가려 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에 대해 경종을 울리는 말씀입니다.
2. 하나님을 아는 지식
1) 인격적 지식
과연 ‘안다’는 것이 무엇인가요? 구약에서 안다는 말은 히브리어로 ‘야다,’ 신약에서는 ‘기노스코,’ ‘오이다,’ ‘에이도’ 등으로 사용됩니다. 성경에서 안다는 것은 인격적인 지식입니다. 한 몸이 되는 지식, 한 몸을 이루는 지식, 부부처럼 사귐과 서로 닮아가는 것이 있는 지식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것을 쉽게 과학지식 등으로 비교할 수 없습니다. 마리아가 성령잉태 했을 때 ‘남자를 알지 못한다’고 한 그 지식입니다.
2) 창조자에 의존한 지식
부모가 자식을 안다고 할 때 부모는 낳은 자이기에 자식을 아는 것입니다. 마이크도 지은 사람이 그것을 압니다. 설계도를 가진 사람이 마이크를 잘 압니다. 우리 자녀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은 자식이 아니라 부모입니다. 여기서 ‘안다’는 지식은 아버지가 아들을 알고, 하나님이 우리를 아는 지식입니다.
본문 9절 말씀에 우리가 하나님을 ‘안다’ 하고 ‘하나님이 아신 바 되었거늘’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안다고 하지만 사실상 하나님이 우리를 아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나무를 안다고 하면 그것은 내가 나무를 아는 것입니다. 자동차를 몬다고 하면 자동차를 내가 아는 것입니다. 세상은 그렇습니다. 철학이든 무엇이든 말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그렇지 않습니다. 인간이 아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아신 바 되었으므로 그런 것입니다.
하나님을 우리가 안다라고 하라면, 우리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물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아신 바 되었다는 것이 바로 이 의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아신 바 대로 움직이는 것입니다.
3) 영생의 지식
내가 안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영생은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하나님의 아들을 아는 것이라는 말은 곧 그의 아들을 보내신 자의 은혜를 아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요한복음 말씀과 같이 이제는 하나님의 말씀을 아는 것이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몽학선생, 초등학문을 벗어나는 것입니다. 예수를 앎으로 하나님을 알아 영생에 이르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복음이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을 따르는 것을 내가 이상하게 여기노라”(갈 1:6). 이 복음 외에 어찌 다른 복음을 쫓느냐는 것이 갈라디아서의 주제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 생명이고 빛되신 이 말씀, 빛의 근원인 참 빛(요 1:9)을 영접하면 영생을 얻는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약성경은 전부 다 아는 것이요, 아는 것은 ‘들음으로’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말씀이 생명이고 빛인 것입니다.
4)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
사도 바울은 이것을 우리에게 정확히 전해줍니다.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후 2:2). 이것은 그저 하나의 지식이 아닌 생명의 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 못 박히심, 날 위해 죽으신 것을 아는 것입니다. 이 진리를 통해 그를 알고 그와 사귐이 있는 것입니다. 그 진리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래서 바로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아서 주를 가르치겠느냐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느니라”(고전 2:16).
5) 성령에 의해 감화된 지식
그리스도가 내 속에 임하여 내가 그리스도를 전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너희는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니 이는 먹으로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쓴 것이며 또 돌판에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육의 마음판에 쓴 것이라”(고후 3:3). 우리가 그리스도의 편지라는 것은 그리스도의 모든 지식을 우리 안에 다 써놨다는 것입니다. 아까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내가 알아서 쓰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이 역사하고 하나님이 아신 바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알아 주시면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을 알고 세상을 알고, 모든 지식을 하나님께 여쭈는 것입니다. 우리의 살아가는 윤리, 철학, 과학지식도 하나님께 여쭈고 궁극적으로 내 자신도 하나님께 여쭤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의 지식, 감정, 의지 조차도 알지 못합니다. 우리가 환란 날에 얼마나 잘 견딜지 아무도 모릅니다. 나조차도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를 아신 바 되면 우리가 압니다. 우리가 어찌 그리스도를 아느냐, 그래서 전하겠냐 하지만, 그리스도의 마음을 그리스도의 심장을 가졌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의 역사로 내가 그리스도의 편지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송구영신 예배 때 본 예레미야의 말씀이 새 언약에 우리 마음의 법을 새겨주신 것, 새 영, 새 마음, 새 언약, 이것이 모두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들어오셔서 새겨 주는 것입니다(겔 36:27-28).
6) 긍휼의 그릇에 담긴 보배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버림 받은 자니라”(고후 13:5). 성경은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스스로 아는 자라고 합니다. 스스로 안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안에 영을 주셔서 하나님이 알게 하셨다는 의미입니다. “이는 그들로 마음에 위안을 받고 사랑 안에서 연합하여 확실한 이해의 모든 풍성함과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깨닫게 하려 함이니 그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느니라”(골 2:2-3).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비밀이요, 지식과 지혜의 모든 보화가 그리스도께 감춘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가 내 안에 살면 이 모든 것이 내 안에 있는데 이 비밀을 우리가 맡은 자라고 하는 것입니다(골 4:1). 이것이 하나님을 아는 백성의 모습이요 사도 바울이 계속 전하는 것입니다.
“누가 너를 남달리 구별하였느냐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냐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 같이 자랑하느냐”(고전 4:7). 우리는 질그릇, 토기입니다. 가장 흔하고 천한 질그릇에 보화를 담았다고 한 것입니다. 그래서 빌립보서에 내 주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을 아는 것이라고 하는 고백이 바로 이것에서 나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앎으로 성부를 알고 성령을 아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들을 영접하면 삼위 하나님을 영접하는 것, 곧 삼위일체 신앙이 여기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고린도교회가 사도 바울의 사도권에 대해 의심할 때, 첫번째 내세운 것은 그리스도의 진리가 그 속에 있다는 것이었습니다(고후 11:10). 그리고 많은 환란과 고난을 당하지만 약할 때 강함이라, 부득불 자랑하노니 나의 약한 것을 자랑한다는 것은 곧 약할 때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을 증언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 본질상 거듭나서 하나님을 아는 자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백성 답게 사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편지입니다.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내 안에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심장을 가졌습니다. 믿음이 있고 없고는 현상이 아닌 고백입니다. 고백의 가장 중요한 표는 '아멘'입니다. '간구'입니다. 내가 누구를 찾느냐가 내가 누구를 믿느냐 입니다. 내가 십자가를 바라보고 예수를 찾으면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세상의 지식은 분토와 같으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합니다. 이 지식은 여러 개 중에 하나를 택하는 그런 지식이 아니라 언제든 세상에서 우리가 구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지식입니다. 직장, 가정, 공부할 때도 언제든 자나 깨나 그냥 본능적으로 예수를 찾아야 합니다.
억울한 일이 있습니까. 주님 보시면 억울한 것이 사라집니다. 예수님의 고난을 바라보면 우리의 억울함이 사라집니다.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고상함이요 다른 지식은 분토와 같습니다(빌 3:8). 우리가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이 우리를 아십니다. 낳은 자, 지은 자가 우리를 압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낳으셨습니다. 육신은 부모가 낳았으나, 영육간의 조성자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창세 전부터 아셨습니다(엡 1:4). 창세 전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실 때 이미 아셨습니다. 그 때 이미 우리를 긍휼의 그릇, 불쌍한 그릇으로 삼으신 것입니다. 포도그릇은 포도를, 국그릇은 국을 채웁니다. 긍휼의 그릇은 긍휼을 채웁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불쌍히 여기심을 채우는 그릇입니다. 내 공로를 채우지 않습니다. 불쌍히 여기시는 것을 채우는 그릇이므로 그래서 우리가 그릇을 닦아야 합니다.
너무 불쌍하지 않으면 불쌍하게 만드십니다. 그런 것도 고맙게 여겨야 합니다. 그 때 하나님이 긍휼을 베풀려고 준비하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친구도 없고 부모도 없게 하는 것도 그런 의미에서 감사히 여겨야 하는 것입니다. 긍휼의 그릇으로 우리를 아신 바 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아신 바 된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입니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롬 9:13).
3. 내 백성이 지식이 없어 망하는도다
구약에도 보면 호세아서를 통해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도다라는 말을 많이 합니다(호 4:6). 호세아서에서 가장 지식을 많이 이야기합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여호와께서 이 땅 주민과 논쟁하시나니 이 땅에는 진실도 없고 인애도 없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없고”(호 4:1). 이 말씀이 꼭 구약 선지서에만 나오는 말씀이 아닙니다. 이 땅에 지금 진실이 얼마나 많습니까? 매스컴도 법정도 시장의 사람들도 이 땅에 얼마나 진실이 있습니까? 인애도 이 땅에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인애도 없는 세상입니다.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호 6:6). 인애를 원하고 사랑하는 것을 원하고 하나님을 아는 것을 번제와 제사보다 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호세아서를 가만히 보면 호세아의 아내는 고멜로 음란한 여인입니다. 하나님이 그렇게까지 하시냐 할 정도로 그렇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고멜의 음란함이 무지와 통합니다. 모르면 음란합니다. 호세아서의 음란은 무지와 통합니다. 그래서 진실도 인애도 여호와를 아는 지식도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호세아서입니다. 범죄보다 수양보다 인애를 원하고 여호와를 아는 지식을 원하는 것입니다. 본문 말씀도 8절, 하나님을 알지 못하여 하나님이 아닌 자들에게 종노릇 한다고 합니다. 이것이 바로 음란이고 우상입니다. 이것이 바로 선지서들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교훈입니다. 진리의 지식, 하나님의 말씀이 땅에 떨어진 것이요, 그것이 음란이 들어온 것입니다. 성경 붙들고 말씀 공부하는 것을 게을리 하면 안됩니다. 말씀 외의 것이 들어오면 다 음란한 것입니다. 음란한 것이 별것이 없습니다.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요 8:44). 마귀 사탄을 한마디로 하면 거짓입니다. 거짓은 진리가 없는 것입니다.
4. 다 이루신 그리스도만으로 충분하니 초등학문으로 돌아가지 말라
본문은 우리를 힘들게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힘들게 하는 곳으로 가지 말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아는 지식은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요, 고백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모시고 아빠 아버지로 부르는 자녀로 살라는 것입니다. 부모 없는 자처럼 살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압니다. 그리고 누가 그리스도를 알아서 전하냐고 할 때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다고 합니다. 이성으로 생각하면 그리스도를 전할 자 없으나 성령이 임하여 내 마음판에 그리스도의 편지를 써 주셨다,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다고 하는 것이 우리가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있다는 것입니다.
모른다고 하지 마십시오. 알기 때문에 아는 것에 힘쓰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가 항상 말하는 것입니다. 믿으니 믿음에 힘쓰고 거룩하니 거룩에 힘쓰고 아니까 알기에 힘씁니다. 그것이 바로 고백신앙입니다. 이것에 다 들어 있습니다. 힘써서 믿고 아는 것이 아닙니다. 힘써서 구원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구원을 받았으니 구원 이르기에 힘쓰고 지식을 주시니 알기에 힘쓰고 거룩하게 하시니 성도의 거룩함에 힘쓰는 것입니다. 초등학문으로 돌아가는 것은 사탄이 버티고 있는 지식, 교만하고 하나님과 같이 되게 한다는 거짓의 지식입니다. 일시적으로 기분이 좋습니다. 우리도 초등학문에 속한 자였으나 아들을 보내 아들의 영을 우리에게 주셔서 유업 이을 자, 자녀로 삼아 주셨습니다. 그러니 이제 다시는 초등학문에 돌아가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을 이제 네 가지로 예시합니다.
날을 지키지 않습니다. 날 자체에 능력이 있는 것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달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유대의 절기도 그렇습니다. 유월절, 오순절, 초막절을 지키지 않습니다. 해를 지키지도 않습니다.
안식년을 지키거나 하지 않습니다. 희년 이런 것도 의미는 좋습니다마는 특별히 생각하거나 지키지 않습니다. 우리 학교에서는 그래서 안식년이라고 하지 않고 연구년이라고 합니다. 그런 거 생각할 시간에 예수 얘기 한 번 더 합니다. 부흥은 희년 따져서 된 적이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믿어서 부흥에 이르는 것일 뿐입니다.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꼭 보면 희년이나 이런 것들을 따집니다. 마치 대단한 신앙이나 되는 것처럼 말합니다.
우리는 사순절이니 이런 말들도 쓰지 않습니다. 일년 내내 예수 그리스도, 예수 날 위해 죽으신 것을 말할 뿐입니다. 물론 성경 읽으면서 기억하는 것은 좋습니다. 무조건 나쁘다고 하는 것이 아니요, 본질을 놓치면 안 된다는 말입니다. 에딘버러에서 공부할 때도 항상 아쉬운 것이 그런 것이었습니다. 절기를 생각하며 초 같은 것을 갖다 놓고 그 의미를 새기는 것들 말입니다.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습니다. 구약에서 그렇게 갈구하던 메시아로 오셔서 모든 율법과 의를 다 이루셨는데 왜 다시 그것으로 돌아가려 합니까? 십자가만 해도 넘치고 벅찹니다. 더 이상 다른 것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다 이루었다는 그 말씀 하나면 족합니다. 99%로 아닌 백프로 다 이루셨다고 하셨는데 무엇이 더 필요합니까. 우리는 적극적인 신앙생활 하면 됩니다. 약한 것에 매일 필요가 없습니다.
5. 결론
이성적인 신앙생활은 따져서 믿는 것입니다. 헤롯과 빌라도가 나쁘고 안나스와 가야바가 나쁘니 예수가 좋다, 이런 식으로 믿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놔두고 예수를 믿으라는 것입니다. 성경은 어둠이 없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빛이 있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을 영적으로 직시하면 됩니다.
여호와 삼마가 오늘 설교에 적용이 됩니다. 여호와가 함께 계시고 마음 판에 새겨지고 내가 여호와의 편지입니다. 주일성수 잘 하십시오. 여호와가 함께 계십니다. 주일 성수는 내 인격이 여호와와 함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십일조나 헌금도 잘 하십시오. 내 마음이 있는 곳에 보물이 있다고 했습니다. 내 물질도 마음도 여호와 삼마 하십시오. 그리고 아플수록 예배에 힘쓰십시오. 우리의 가정이, 인격이, 내 소유가 여호와 삼마여야 합니다. 여호와가 함께 계십니다. 주신 이도 거두신 이도 여호와요, 이 한가지를 알라는 것을 우리가 기억해야 합니다. 결국 우리 말씀은 여호와께서 반드시(출 3:12) 영원토록(요 14:6) 세상 끝날까지(마 28:2) 항상 함께 계십니다. 이런 은혜가 우리 성도님께 있기를 기도합니다.
[20200112][십자가지기교회 주일낮예배: 갈라디아서 강해(32): 그리스도의 복음] 초등학문에 따른 종 노릇 (갈 4:8-11) 문병호 목사
*음성파일: 게시물 하단 "관련링크"에서 청취 혹은 내려받기 가능합니다.
<녹취록>
1. 초등학문으로는 아들의 영을 받지 못하여 하나님을 알 수 없다
우리가 본문에서 ‘초등학문으로 다시 돌아가서 되겠느냐’는 경고의 말씀을 봅니다. 약하고 천박한 초등학문, 이것은 사도 바울이 1장에서 다른 복음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이것은 초등학교에서 가르치는 기본원리나 기초지식이 아니라, 실체 이전의 그림자, 형식적인 것, 덜 여문 것 등을 의미합니다. 구체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실체를 영접하지 못한 예비 단계의 학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초등 학문이 영 잘못된 것이 아니라 실체가 왔는데 다시 이것으로 돌아가는 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도 어렸을 때에 이 세상의 초등학문 아래에 있어서 종 노릇 하였더니”(갈 4:3). 결국 초등학문이라는 것은 그 아들의 영, 예수 그리스도의 영, 주의 영, 아빠 아버지라 부르는 그 아들의 영, 지난 번에 살펴본 이 네 가지로 표현된 그 영을 받지 못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영을 받은 자가 아들이고 유업을 이을 자인데 그 도리를 가르쳐주지 못하는 학문을 초등학문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성도들의 삶의 모습은 삶 그 자체가 아니라 하나하나가 신분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자녀와 상속자 답게 살아가는 것이고 우리의 삶의 모습이 이것을 드러냅니다. 본문 7절의 우리가 자녀이고 상속자이면 우리가 아버지를 아빠 아버지라 부른다고 했습니다(롬 8:15; 갈 4:6). 그리고 우리가 그 아들과 함께 형제가 되었으므로, 자녀가 되었으므로 아무도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롬 8:35-39). 산상복음의 그 대주제가 바로 하나님의 아버지이심과 우리의 자녀임입니다. 여기에서도 보면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일까보냐, 하물며 너희일까보냐라고 하여 “하물며”를 두 번 강조합니다. 우리의 자녀 됨을 강조한 것입니다.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엡 5:8);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롬 13:12).
이 자녀의 영을 받으면 진리가 너희를 거룩하게 하고 자유롭게 한다고 말합니다. 이 하나님의 아들의 영, 그 아들의 영을 본문 8절은 특히 ‘그 영을 받으면 하나님을 아는 자가 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영을 받기 전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고 합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 17:3). 여기에서 ‘앎’으로써 영생에 이른 자, 그 자가 바로 하나님을 아는 자, 즉 하나님의 자녀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본문은 우리가 이전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본질상 하나님이 아닌 자들에게 종 노릇했다고 합니다. 사탄은 종이라고 패찰을 붙인 것이 아니라 아주 교만하고 자기를 높이면서 종노릇하게 합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교만한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가면 무릎을 꿇고 주의 참된 자녀 됨이 있게 합니다. 세상은 우리에게 종이 아닌 주인시켜 준다고 하여 고개를 빳빳하게 들게 하지만 알고 보면 종노릇 시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9절을 보면, 약하고 천박한 초등학문에 봉사한다고 합니다. 아무 능력이 없는 것이요 천박한 것입니다. 또한 날과 달과 절기를 삼가 지킨다고 합니다. 아주 두려워하면서 말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말입니다. 이런 모습을 말해 주는 이유는 갈라디아교회가 당시 이렇게 돌아가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를 만났는데 다시 옛날로 돌아가려 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에 대해 경종을 울리는 말씀입니다.
2. 하나님을 아는 지식
1) 인격적 지식
과연 ‘안다’는 것이 무엇인가요? 구약에서 안다는 말은 히브리어로 ‘야다,’ 신약에서는 ‘기노스코,’ ‘오이다,’ ‘에이도’ 등으로 사용됩니다. 성경에서 안다는 것은 인격적인 지식입니다. 한 몸이 되는 지식, 한 몸을 이루는 지식, 부부처럼 사귐과 서로 닮아가는 것이 있는 지식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것을 쉽게 과학지식 등으로 비교할 수 없습니다. 마리아가 성령잉태 했을 때 ‘남자를 알지 못한다’고 한 그 지식입니다.
2) 창조자에 의존한 지식
부모가 자식을 안다고 할 때 부모는 낳은 자이기에 자식을 아는 것입니다. 마이크도 지은 사람이 그것을 압니다. 설계도를 가진 사람이 마이크를 잘 압니다. 우리 자녀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은 자식이 아니라 부모입니다. 여기서 ‘안다’는 지식은 아버지가 아들을 알고, 하나님이 우리를 아는 지식입니다.
본문 9절 말씀에 우리가 하나님을 ‘안다’ 하고 ‘하나님이 아신 바 되었거늘’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안다고 하지만 사실상 하나님이 우리를 아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나무를 안다고 하면 그것은 내가 나무를 아는 것입니다. 자동차를 몬다고 하면 자동차를 내가 아는 것입니다. 세상은 그렇습니다. 철학이든 무엇이든 말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그렇지 않습니다. 인간이 아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아신 바 되었으므로 그런 것입니다.
하나님을 우리가 안다라고 하라면, 우리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물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아신 바 되었다는 것이 바로 이 의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아신 바 대로 움직이는 것입니다.
3) 영생의 지식
내가 안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영생은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하나님의 아들을 아는 것이라는 말은 곧 그의 아들을 보내신 자의 은혜를 아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요한복음 말씀과 같이 이제는 하나님의 말씀을 아는 것이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몽학선생, 초등학문을 벗어나는 것입니다. 예수를 앎으로 하나님을 알아 영생에 이르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복음이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을 따르는 것을 내가 이상하게 여기노라”(갈 1:6). 이 복음 외에 어찌 다른 복음을 쫓느냐는 것이 갈라디아서의 주제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 생명이고 빛되신 이 말씀, 빛의 근원인 참 빛(요 1:9)을 영접하면 영생을 얻는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약성경은 전부 다 아는 것이요, 아는 것은 ‘들음으로’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말씀이 생명이고 빛인 것입니다.
4)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
사도 바울은 이것을 우리에게 정확히 전해줍니다.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후 2:2). 이것은 그저 하나의 지식이 아닌 생명의 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 못 박히심, 날 위해 죽으신 것을 아는 것입니다. 이 진리를 통해 그를 알고 그와 사귐이 있는 것입니다. 그 진리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래서 바로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아서 주를 가르치겠느냐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느니라”(고전 2:16).
5) 성령에 의해 감화된 지식
그리스도가 내 속에 임하여 내가 그리스도를 전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너희는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니 이는 먹으로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쓴 것이며 또 돌판에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육의 마음판에 쓴 것이라”(고후 3:3). 우리가 그리스도의 편지라는 것은 그리스도의 모든 지식을 우리 안에 다 써놨다는 것입니다. 아까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내가 알아서 쓰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이 역사하고 하나님이 아신 바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알아 주시면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을 알고 세상을 알고, 모든 지식을 하나님께 여쭈는 것입니다. 우리의 살아가는 윤리, 철학, 과학지식도 하나님께 여쭈고 궁극적으로 내 자신도 하나님께 여쭤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의 지식, 감정, 의지 조차도 알지 못합니다. 우리가 환란 날에 얼마나 잘 견딜지 아무도 모릅니다. 나조차도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를 아신 바 되면 우리가 압니다. 우리가 어찌 그리스도를 아느냐, 그래서 전하겠냐 하지만, 그리스도의 마음을 그리스도의 심장을 가졌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의 역사로 내가 그리스도의 편지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송구영신 예배 때 본 예레미야의 말씀이 새 언약에 우리 마음의 법을 새겨주신 것, 새 영, 새 마음, 새 언약, 이것이 모두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들어오셔서 새겨 주는 것입니다(겔 36:27-28).
6) 긍휼의 그릇에 담긴 보배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버림 받은 자니라”(고후 13:5). 성경은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스스로 아는 자라고 합니다. 스스로 안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안에 영을 주셔서 하나님이 알게 하셨다는 의미입니다. “이는 그들로 마음에 위안을 받고 사랑 안에서 연합하여 확실한 이해의 모든 풍성함과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깨닫게 하려 함이니 그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느니라”(골 2:2-3).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비밀이요, 지식과 지혜의 모든 보화가 그리스도께 감춘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가 내 안에 살면 이 모든 것이 내 안에 있는데 이 비밀을 우리가 맡은 자라고 하는 것입니다(골 4:1). 이것이 하나님을 아는 백성의 모습이요 사도 바울이 계속 전하는 것입니다.
“누가 너를 남달리 구별하였느냐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냐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 같이 자랑하느냐”(고전 4:7). 우리는 질그릇, 토기입니다. 가장 흔하고 천한 질그릇에 보화를 담았다고 한 것입니다. 그래서 빌립보서에 내 주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을 아는 것이라고 하는 고백이 바로 이것에서 나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앎으로 성부를 알고 성령을 아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들을 영접하면 삼위 하나님을 영접하는 것, 곧 삼위일체 신앙이 여기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고린도교회가 사도 바울의 사도권에 대해 의심할 때, 첫번째 내세운 것은 그리스도의 진리가 그 속에 있다는 것이었습니다(고후 11:10). 그리고 많은 환란과 고난을 당하지만 약할 때 강함이라, 부득불 자랑하노니 나의 약한 것을 자랑한다는 것은 곧 약할 때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을 증언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 본질상 거듭나서 하나님을 아는 자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백성 답게 사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편지입니다.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내 안에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심장을 가졌습니다. 믿음이 있고 없고는 현상이 아닌 고백입니다. 고백의 가장 중요한 표는 '아멘'입니다. '간구'입니다. 내가 누구를 찾느냐가 내가 누구를 믿느냐 입니다. 내가 십자가를 바라보고 예수를 찾으면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세상의 지식은 분토와 같으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합니다. 이 지식은 여러 개 중에 하나를 택하는 그런 지식이 아니라 언제든 세상에서 우리가 구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지식입니다. 직장, 가정, 공부할 때도 언제든 자나 깨나 그냥 본능적으로 예수를 찾아야 합니다.
억울한 일이 있습니까. 주님 보시면 억울한 것이 사라집니다. 예수님의 고난을 바라보면 우리의 억울함이 사라집니다.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고상함이요 다른 지식은 분토와 같습니다(빌 3:8). 우리가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이 우리를 아십니다. 낳은 자, 지은 자가 우리를 압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낳으셨습니다. 육신은 부모가 낳았으나, 영육간의 조성자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창세 전부터 아셨습니다(엡 1:4). 창세 전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실 때 이미 아셨습니다. 그 때 이미 우리를 긍휼의 그릇, 불쌍한 그릇으로 삼으신 것입니다. 포도그릇은 포도를, 국그릇은 국을 채웁니다. 긍휼의 그릇은 긍휼을 채웁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불쌍히 여기심을 채우는 그릇입니다. 내 공로를 채우지 않습니다. 불쌍히 여기시는 것을 채우는 그릇이므로 그래서 우리가 그릇을 닦아야 합니다.
너무 불쌍하지 않으면 불쌍하게 만드십니다. 그런 것도 고맙게 여겨야 합니다. 그 때 하나님이 긍휼을 베풀려고 준비하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친구도 없고 부모도 없게 하는 것도 그런 의미에서 감사히 여겨야 하는 것입니다. 긍휼의 그릇으로 우리를 아신 바 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아신 바 된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입니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롬 9:13).
3. 내 백성이 지식이 없어 망하는도다
구약에도 보면 호세아서를 통해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도다라는 말을 많이 합니다(호 4:6). 호세아서에서 가장 지식을 많이 이야기합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여호와께서 이 땅 주민과 논쟁하시나니 이 땅에는 진실도 없고 인애도 없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없고”(호 4:1). 이 말씀이 꼭 구약 선지서에만 나오는 말씀이 아닙니다. 이 땅에 지금 진실이 얼마나 많습니까? 매스컴도 법정도 시장의 사람들도 이 땅에 얼마나 진실이 있습니까? 인애도 이 땅에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인애도 없는 세상입니다.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호 6:6). 인애를 원하고 사랑하는 것을 원하고 하나님을 아는 것을 번제와 제사보다 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호세아서를 가만히 보면 호세아의 아내는 고멜로 음란한 여인입니다. 하나님이 그렇게까지 하시냐 할 정도로 그렇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고멜의 음란함이 무지와 통합니다. 모르면 음란합니다. 호세아서의 음란은 무지와 통합니다. 그래서 진실도 인애도 여호와를 아는 지식도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호세아서입니다. 범죄보다 수양보다 인애를 원하고 여호와를 아는 지식을 원하는 것입니다. 본문 말씀도 8절, 하나님을 알지 못하여 하나님이 아닌 자들에게 종노릇 한다고 합니다. 이것이 바로 음란이고 우상입니다. 이것이 바로 선지서들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교훈입니다. 진리의 지식, 하나님의 말씀이 땅에 떨어진 것이요, 그것이 음란이 들어온 것입니다. 성경 붙들고 말씀 공부하는 것을 게을리 하면 안됩니다. 말씀 외의 것이 들어오면 다 음란한 것입니다. 음란한 것이 별것이 없습니다.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요 8:44). 마귀 사탄을 한마디로 하면 거짓입니다. 거짓은 진리가 없는 것입니다.
4. 다 이루신 그리스도만으로 충분하니 초등학문으로 돌아가지 말라
본문은 우리를 힘들게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힘들게 하는 곳으로 가지 말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아는 지식은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요, 고백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모시고 아빠 아버지로 부르는 자녀로 살라는 것입니다. 부모 없는 자처럼 살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압니다. 그리고 누가 그리스도를 알아서 전하냐고 할 때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다고 합니다. 이성으로 생각하면 그리스도를 전할 자 없으나 성령이 임하여 내 마음판에 그리스도의 편지를 써 주셨다,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다고 하는 것이 우리가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있다는 것입니다.
모른다고 하지 마십시오. 알기 때문에 아는 것에 힘쓰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가 항상 말하는 것입니다. 믿으니 믿음에 힘쓰고 거룩하니 거룩에 힘쓰고 아니까 알기에 힘씁니다. 그것이 바로 고백신앙입니다. 이것에 다 들어 있습니다. 힘써서 믿고 아는 것이 아닙니다. 힘써서 구원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구원을 받았으니 구원 이르기에 힘쓰고 지식을 주시니 알기에 힘쓰고 거룩하게 하시니 성도의 거룩함에 힘쓰는 것입니다. 초등학문으로 돌아가는 것은 사탄이 버티고 있는 지식, 교만하고 하나님과 같이 되게 한다는 거짓의 지식입니다. 일시적으로 기분이 좋습니다. 우리도 초등학문에 속한 자였으나 아들을 보내 아들의 영을 우리에게 주셔서 유업 이을 자, 자녀로 삼아 주셨습니다. 그러니 이제 다시는 초등학문에 돌아가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을 이제 네 가지로 예시합니다.
날을 지키지 않습니다. 날 자체에 능력이 있는 것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달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유대의 절기도 그렇습니다. 유월절, 오순절, 초막절을 지키지 않습니다. 해를 지키지도 않습니다.
안식년을 지키거나 하지 않습니다. 희년 이런 것도 의미는 좋습니다마는 특별히 생각하거나 지키지 않습니다. 우리 학교에서는 그래서 안식년이라고 하지 않고 연구년이라고 합니다. 그런 거 생각할 시간에 예수 얘기 한 번 더 합니다. 부흥은 희년 따져서 된 적이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믿어서 부흥에 이르는 것일 뿐입니다.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꼭 보면 희년이나 이런 것들을 따집니다. 마치 대단한 신앙이나 되는 것처럼 말합니다.
우리는 사순절이니 이런 말들도 쓰지 않습니다. 일년 내내 예수 그리스도, 예수 날 위해 죽으신 것을 말할 뿐입니다. 물론 성경 읽으면서 기억하는 것은 좋습니다. 무조건 나쁘다고 하는 것이 아니요, 본질을 놓치면 안 된다는 말입니다. 에딘버러에서 공부할 때도 항상 아쉬운 것이 그런 것이었습니다. 절기를 생각하며 초 같은 것을 갖다 놓고 그 의미를 새기는 것들 말입니다.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습니다. 구약에서 그렇게 갈구하던 메시아로 오셔서 모든 율법과 의를 다 이루셨는데 왜 다시 그것으로 돌아가려 합니까? 십자가만 해도 넘치고 벅찹니다. 더 이상 다른 것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다 이루었다는 그 말씀 하나면 족합니다. 99%로 아닌 백프로 다 이루셨다고 하셨는데 무엇이 더 필요합니까. 우리는 적극적인 신앙생활 하면 됩니다. 약한 것에 매일 필요가 없습니다.
5. 결론
이성적인 신앙생활은 따져서 믿는 것입니다. 헤롯과 빌라도가 나쁘고 안나스와 가야바가 나쁘니 예수가 좋다, 이런 식으로 믿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놔두고 예수를 믿으라는 것입니다. 성경은 어둠이 없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빛이 있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을 영적으로 직시하면 됩니다.
여호와 삼마가 오늘 설교에 적용이 됩니다. 여호와가 함께 계시고 마음 판에 새겨지고 내가 여호와의 편지입니다. 주일성수 잘 하십시오. 여호와가 함께 계십니다. 주일 성수는 내 인격이 여호와와 함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십일조나 헌금도 잘 하십시오. 내 마음이 있는 곳에 보물이 있다고 했습니다. 내 물질도 마음도 여호와 삼마 하십시오. 그리고 아플수록 예배에 힘쓰십시오. 우리의 가정이, 인격이, 내 소유가 여호와 삼마여야 합니다. 여호와가 함께 계십니다. 주신 이도 거두신 이도 여호와요, 이 한가지를 알라는 것을 우리가 기억해야 합니다. 결국 우리 말씀은 여호와께서 반드시(출 3:12) 영원토록(요 14:6) 세상 끝날까지(마 28:2) 항상 함께 계십니다. 이런 은혜가 우리 성도님께 있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