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1004][십자가지기교회 주일낮예배: 갈라디아서 강해(35): 그리스도의 복음] 자유자의 자녀들 (갈 4:21-26) 문병호 목사
(갈 4:21)
○내게 말하라 율법 아래에 있고자 하는 자들아 율법을 듣지 못하였느냐
(갈 4:22)
기록된 바 아브라함에게 두 아들이 있으니 하나는 여종에게서, 하나는 자유 있는 여자에게서 났다 하였으며
(갈 4:23)
여종에게서는 육체를 따라 났고 자유 있는 여자에게서는 약속으로 말미암았느니라
(갈 4:24)
이것은 비유니 이 여자들은 두 언약이라 하나는 시내 산으로부터 종을 낳은 자니 곧 하갈이라
(갈 4:25)
이 하갈은 아라비아에 있는 시내 산으로서 지금 있는 예루살렘과 같은 곳이니 그가 그 자녀들과 더불어 종 노릇 하고
(갈 4:26)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
<녹취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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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율법은 약속이 있는 계명이다
율법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삶의 규범입니다. 길이 없으면 갈 수 없습니다. 율법은 길과 같습니다. 이번에 멀리 혹은 가까이 많이 다녀오셨을 것입니다. 이것이 길이 있으므로 가능합니다. 우리 인생은 천성을 향해 나아가고 그리스도의 품에 안기고 그리스도를 경배하고 경외해야 하는데 그 방법을 알려 주시는 것이 율법입니다. 우리 교회는 매주 주일에 십계명을 같이 읽습니다. 4계명까지는 하나님을 향한, 나머지는 이웃을 향한 계명으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계명을 매주 고백합니다. 율법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을 봅니다. 사랑하라고 명하시니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보고, 베풀라고 명하시니 우리에게 후히 대하시는 하나님을 봅니다. 율법은 우리를 절망하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길을 모르면 헤맵니다. 길을 알면 멀어서 힘들긴 해도 절망하지는 않습니다. 애쓰는 것과 절망하는 것은 다릅니다. 율법은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눈물로 씨를 흘리고 기쁨으로 단을 거두는 그 길을 알려 줍니다. 율법은 하나님의 어떠하심과 그를 어떻게 닮아야 하는지, 그 뜻을 보여 줍니다. 그러니 율법은 달콤한 것입니다. 율법에는 명령이 있고 약속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명령하시면 항상 약속을 함께 두십니다. 왜요, 하나님의 명령은 사람의 힘으로는 지킬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있어야 지킬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항상 명령을 율법으로 하실 때는 약속을 주시는 것입니다. 친히 이루겠다는 약속입니다. 그래서 율법은 약속의 법, 언약의 법, 약속 있는 계명입니다.
2.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
1) 하나님의 약속을 저버린 자들
그런데 갈라디아에 들어온 어떤 자들이 약속은 버리고 명령만 생각합니다. 이렇게 되면 처음에는 자신이 잘났다는 교만함으로 율법주의자가 됩니다. 그런데 계속 하나님의 법을 지키려고 해도 안 되니 결국에는 율법 폐지론자가 됩니다. 그래서 율법에는 항상 하나님의 약속이 있다는 것을 붙들어야 하나님의 법을 눈을 밝게 하는 것으로, 달콤한 것으로 받게 됩니다. 만약 율법에서 언약, 약속을 빼 버리면 율법주의자가 되었다가 율법폐지론자가 됩니다. 잠시 서 있는 듯하나 곧 고꾸라지는 것입니다. 본문 21절은 이런 사람들을 율법 아래에 있고자 하는 자들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도 율법을 버리지 않아야 하지만 약속과 함께 붙들어야 합니다. 율법 아래에 있고자 하는 자들은 율법을 붙잡되 약속은 저버리는 자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아래가 아닌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저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율법을 잘 지킨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율법 아래에 있는 사람이고, '나는 율법 못지키겠어'라고 말하는 사람도 율법 아래에 있는 사람입니다. "이는 가만히 들어온 거짓 형제들 때문이라 그들이 가만히 들어온 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가 가진 자유를 엿보고 우리를 종으로 삼고자 함이로되"(갈 2:4). 처음에는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에 이르는 자유가 좋다고 하며 들어와 놓고는 율법을 가지고 종을 삼고자 하는 자들이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입니다.
율법은 귀합니다. 신령합니다. 율법은 눈을 밝게 하고 마음을 즐겁게 합니다. 그러나 율법에서 약속을 빼 버리면, 즉 하나님의 은혜 없이 법만을 생각하면 그 즉시 우리가 율법 아래에 매이게 됩니다.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 대해 갈라디아서는 여러 곳에서 말합니다. 즉 율법 아래에 매인 바 된 자들(갈 3:23), 율법의 행위에 속한 자들(갈 3:13) 등으로 말합니다. 이런 자들은 십자가 아래가 아닌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입니다.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 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갈 3:1), "죄가 너희를 주장하지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음이라"(롬 6:14). 은혜 아래, 십자가 아래에 있는 자들이 바로 우리인데 가만히 들어와서 거짓 복음을 전하는 이들은 당을 짓고 사람을 얽어매어 자유케 하는 복음에서 멀어지게 합니다. 바로 이런 사람들은 십자가 아래, 은혜 아래에 있지 않은 자들입니다. 율법의 행위로 사람이 의롭게 된다고 보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값없이, 오직 전적으로 은혜를 받아 구원을 얻는데, 이 자들은 그러지 않은 자들입니다.
2) 율법을 바로 알라
성경은 이를 초등학문 아래에 종노릇하는 자들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초등학문은 전문적으로 말하자면 '일반 은총'을 말합니다. 믿는 자뿐 아니라 모든 자들에게 과일이 열립니다.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사로잡을까 주의하라 이것은 사람의 전통과 세상의 초등학문을 따름이요 그리스도를 따름이 아니니라"(골 2:8). 초등학문을 따르는 사람들은 율법을 모두 다 이루시고 성취하신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이 아니라 율법을 따르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평생 초등학교만 다닐 수 있습니까. 초등학교 다니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나 평생 초등학교만 다닐 수 없습니다. 넓지는 않아도 초등학교 교정은 깊습니다. 그런데 계속 그곳에만 있을 수는 없습니다. 매일 집 앞에서 도랑만 보며 종이배만 띄워서는 어부가 아닙니다. 초등학문이 그것입니다. 큰 물은 바위 위가 아니라 바위 밑으로 흐릅니다. 산곡의 물소리는 재잘거리며 바위 위로 흐르지만 웅장한 물은 바위 밑으로 흐릅니다. 이 초등학문은 거기까지 가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본문 28절 후반부는 율법을 듣지 못하였느냐고 묻습니다. 이 말은 율법을 바로 알라는 말입니다. 율법을 바로 모르니 율법 아래에 있고자 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스라엘아 들으라'(신 6:4)는 말이 바로 이것입니다. 법이 없으면, 길이 없으면 소망이 없습니다. 차를 타고 길로 가야 소망입니다. 길이 없으면 어디로 가도 그저 헤맬 뿐 소망이 없습니다. 그러나 법만 가지고는 소망이 없습니다. 우리는 그 길을 갈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길은 명령이고 힘은 약속입니다.
3) 약속 없는 명령은 저주이다
그러므로 명령만 듣고 약속은 바라보지 않는 자들은 율법의 저주 아래 매인 자로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버릇같이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고 능력을 주시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말씀하시기만 하면 능력주시니 말씀하시라고만 기도해도 됩니다. 하나님은 약속 없이, 성취 없이, 친히 이루심 없이 명령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보지 않고 명령만 붙들고 '내가 이제 준비가 됐으니 하나님 일 한번 해보겠다'고 하면 절대 안 됩니다. 하나님의 일은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비도덕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지만, 내 도덕으로 하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일은 거듭난 것으로 합니다. 타고난 것으로도, 내가 성취한 것으로도 하지 않습니다.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은 저주 아래 있는 자들입니다. 저주는 하나님을 떠나는 것입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전능자의 팔을 떠나는 것이 저주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요 우리를 끝까지 먼저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창세 전에 우리를 짓기 전부터 작정하시고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선택하셔서 사랑하십니다. 그 하나님을 떠나는 것이 저주입니다.
4) 율법에는 약속이 있기에 위로가 된다
하나님은 영이십니다. 스스로 계십니다. 하나님은 계시지 않는 곳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므로 영의 예배를 받습니다. 우리를 온전케 하시고 모든 것을 주장케 하십니다. 만유의, 모든 곳에 계신 하나님이십니다. 율법은 바로 그런 하나님을 우리가 찾게 하는 길입니다. 하나님은 신실하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아버지의 사랑과 돌보심, 긍휼과 관용을 베푸십니다. 그리고 아버지의 그러한 모든 은혜를 우리에게 베푸십니다. 호의를 베푸십니다. 그래서 부성적 사랑, 부성적 호의, 부성적 자비/긍휼, 부성적 돌보심인 것입니다. 아버지로서의 사랑과 호의, 긍휼히 여기심인 것입니다. 얼마나 위로가 필요합니까. 제가 어찌 여러분을 위로하겠습니까? 하나님이 여러분의 위로자가 되십니다. 보혜사 성령이 우리 안에서 속삭이십니다. 율법이 우리에게 위로가 되는 것은 그 명령에 약속이 있기 때문입니다.
5) 약속으로 말미암은 것이 복되다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은 속이는 자들이요 가만히 들어온 자들이라고 했는데, 이들은 아브라함의 복이 율법을 지켜야 있다고 속인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갈라디아서는 430년 이후의 율법이 아브라함의 언약을 폐지하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아브라함의 복은 행위로 말미암은 것이 아닌 믿음의 복이요, 그 아브라함의 믿음은 한 후손을 믿은 것인데, 그 후손이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갈 3:17). 결국 아브라함의 복은 율법을 지켜서 되는 것이 아닌 그리스도를 믿어서 되는 것입니다. 이삭을 바치는 것은 따르는 것이지 그것 자체로 구원에 이르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자가 아들을 바치는 것입니다. 공기는 아무도 못 만듭니다. 은혜는 공기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잘 해봤자 공기가 없으면 불과 몇분 만에 죽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있고, 그리고 명령이 있습니다. 은혜 받은 백성에게 능력을 더하여 주셔서 약속으로 명령을 지키게 하시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에게 두 아들이 있는데 한 명은 애굽의 여종 하갈에게서 났습니다. 여종에게서, 즉 첩이 된 애굽 여자 하갈에게서 이스마엘이 납니다. 그리고 두 번째 아들은 이삭입니다. 사라에게서 난 아들입니다. 본문은 이 두 아들에 대해 한 명은 하갈, 나머지는 자유 있는 여자, 즉 사라에게서 났다고 합니다. 그리고 여종에게서 난 이스마엘은 육체를 따라 났다고 합니다. 사람의 뜻을 따라 난 것입니다. 그리고 자유 있는 여자에게서는 약속으로 말미암았다고 대조를 합니다. 이스마엘은 여종에게서 났고 그는 육체를 따라 난 것입니다. 그리고 자유 있는 여자인 사라에게서는 이삭이 나는데 약속으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합니다.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요 1:13). 이 두 아들을 대조하는 것은 아브라함의 복이 혈통, 육정, 사람의 뜻이 아닌 하나님께로부터 난 이삭에게 간다는 것을 말하기 위함입니다.
3. 육체를 따라 난 자와 약속으로 말미암은 자
1) 존재와 소유
바로 하갈은 여종입니다. 여종은 '파이디스케'라고 하는데 시종드는 자입니다. 요새는 물론 '종'이란 말을 쓰면 안 됩니다만 당시에는 종을 소유물로 여겨졌습니다. 그래서 몸이 종에게 맡겨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라가 여종을 통해 자신 남편의 아이를 낳도록 한 것입니다. 하갈은 누구냐 하면 존재로 사는 것이 아니라 소유로 사는 사람입니다. 그러니 종입니다. 필요하면 부르고 쓰고 하는 도구입니다. 그리고 그 주인이 사람입니다. 안주인이 종에게 남편에게로 가라고 하면 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유 있는 여자는 여종이 아닌 아내입니다. 아내는 남편과 한 몸입니다. 한 몸이라는 것은 소유가 아닌 존재입니다. 자유 있는 여자는 한 존재입니다.
2) 하나님께 속한 자와 사람에게 속한 자
그리고 자유 있는 여자는 하나님께 속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자입니다. 그것이 바로 자유 있는 여자입니다. 여종에게서 난 자는 사람에게 속한 사람에게서 난 자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녀로 사는 것이 아니라 기껏해야 이 땅에서 물건같이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살아 있으나 죽은 것으로 보는 것입니다. 그것에서 난 자녀, 그것이 바로 이스마엘입니다. 그러나 자유 있는 여자는 바로 아내입니다. 한 몸 된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하나님을 주인으로 삼는 자입니다. 하나님이 가라고 하면 가고 서라고 하면 서는 자입니다. 그 자유 있는 여자에게서 난 것입니다. 여종에게서 난 자는 육체를 따라 났다고 본문 23절은 말합니다. 이것은 일반적인 출생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나는 것이 아니라 말입니다. 일반적 출생도 대단한 것입니다. 인간 존재 자체가 대단합니다. 그러나 영생의, 언약의 자녀가 아닙니다. 또한 사람의 뜻에 따라 났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아브라함과 사라가 아이가 없으니 기도하지 않고 자의로, 임의로 여종을 통해 아이를 가진 것입니다. 사람의 뜻입니다. 이것이 바로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입니다.
3) 성령으로 난 자와 육체를 따라 난 자
세 번째는 육체를 따라 난 것은 성령으로 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다 성령으로 거듭났습니다.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갈 3:3),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갈 5:17). 육체를 따라 난 것은 성령을 따라 난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약속과 은혜에 따라 난 자가 아니라 율법 아래에 매인 자입니다.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리라"(갈 5:18). 성령으로 나지 못하니 율법 아래에 있게 됩니다. 그리고 육체를 따라 난 자는 아직 자신의 육체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않은 자들입니다.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리라"(갈 5:24).
4) 정욕으로 일을 시작하지 말라
정욕으로, 사람의 뜻으로 시작하지 마십시오. 육체를 따라 난 것은 약속에 속한 것이 되지 못합니다. 롯은 눈에 보기 좋은 소알 땅으로 갔습니다. 그러나 그곳은 소돔과 고모라 땅이 되었습니다.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합니다. 바짝 눌려졌을 때 시작하십시오. 툭툭 튀어나올 때가 아니라 말입니다. 생명은 바짝 가라앉았을 때 태동합니다. 어쨌든 내 뜻과 생각으로 하려면 안 됩니다. 그러다 안 되니 절망하고 홧김에 남한테 화내고 분노를 표출하는 그런 뉴스가 요즘에 정말 많습니다. 불특정 다수를 해치는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이것이 시대의 분위기입니다. 이것은 다 육체를 따라 사는 것입니다. 육체가 즐거우면 가고, 쓰고, 그냥 그렇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 세태가 그렇습니다.
5) 나 중심으로(육체를 따라)이 아닌 약속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라
무엇보다 육체를 따른다는 것은 중심을 하나님이 아닌 나에게 두는 것입니다. 중심을 나에게 두면 절망입니다. 중심을 나에게 두면 안 됩니다. 내가 잘한다고도 못한다고도 하지 마십시오. 잘한다고 안하는 것보다 못한다고 안하는 것도, 그것도 육체를 따른 것입니다. 본문 23절은 '육체를 따라'라고 합니다. 이것은 사실상 육체가 끌고 간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그 다음에 나오는 약속으로 말미암아, '디에팡델리아스'라고 하는 말은 약속이 붙어 있다는 말입니다. '육체를 따라'는 육체가 끌고 가는 것이고 '약속으로 말미암는다'는 것은 약속에 내가 이끌려 가는 표현입니다.
우리는 언약으로 말미암아 났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에 속합니다. 이삭이 나기 전에 하나님의 약속이 있었습니다(창 15장; 17장; 18장). 계속 약속해 주셨습니다. 우리에게도 사실 하나님이 계속 약속하십니다. 한 번만 하시는 것도 아닙니다. 아브라함에게도 계속 하셨던 것처럼 말입니다. 100세가 다 된 이 부부에게 또 약속을 하십니다. 그리고 여호와의 사자가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께 능하지 못한 일이 있겠느냐?"(창 18:14) 이것과 비슷한 말씀이 또 나옵니다. 마리아가 남자를 알지 못하는 가운데 잉태하니 천사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하지 못함이 없느니라'고 말합니다(눅 1:37). 그리고 가브리엘이 마리아에게 나타나서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하지 못하심이 없느니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약속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냅니다. 그래서 잉태할 수 있는 힘을 주신 것입니다(히 11:11). 그리고 이 약속으로 말미암은 자녀는 믿음의 후손입니다. 아브라함, 사라에 대해 믿음이 있다 없다 많이 말하지만 그들은 믿음의 부부였습니다.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롬 4:18). 이것이 최고 큰 믿음입니다. 조건이 안 되는데 믿은 것입니다. 우리 십자가지기 성도님들, 못한다는 말 절대 하지 마십시오. 못하는 조건에서 하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은 것입니다. 하나님이 온전하게 하시고 충만케 하시고 번성케 하십니다. 하나님이 지시하실 것입니다. 사라는 어떨까요? 약속하신 이가 미쁘신 줄을 알았습니다. 사라도 바랄 수 없는 중에 믿은 것입니다. 그 약속 가운데 이삭이 난 것입니다.
4. 하늘의 예루살렘을 바라라
본문 후반부는 "이것은 비유니 이 여자들은 두 언약이라"고 말합니다. 성경에 '비유'라고 말하는 것은 매우 드뭅니다. 사라와 하갈을 두 언약이라고 말합니다. "이 하갈은 아라비아에 있는 시내 산으로서 지금 있는 예루살렘과 같은 곳이니 그가 그 자녀들과 더불어 종 노릇 하고"(갈 4:25). 24-25절은 해석이 많지만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시내산은 율법을 의미합니다. 율법 아래에 있는 자녀들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25절 후반부는 지금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이 잘못 믿고, 율법주의에 빠져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하갈의 자녀들이고, 26절의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하늘의 예루살렘(히 12:22)입니다. 이 땅의 예루살렘은 율법 아래에 짓눌려 있습니다. 지금 이스라엘이 그렇습니다. 그것을 흠모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다 율법 아래에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지상의 예루살렘입니다. 우리는 위에 있는 예루살렘(갈 4:26), 우리의 본향을 바랍니다. "이는 그가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라"(히 11:10), "본향"(히 11:14-16), "하늘의 예루살렘"(히 11:22), "영구한 도성"(히 13:14). 히브리서는 바울이 히브리인들에게 쓴 것입니다. 이 서신에서 우리의 본향은 지상의 예루살렘이 아닌 하늘 예루살렘, 새 하늘과 새 땅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는 바로 지상의 새 예루살렘입니다. 열린 문, 인내의 말씀, 빌라델비아 교회가 칭찬을 받은 바로 그것입니다. 돈 모아서 시내산 갈 생각하지 마시고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 보십시오. 천성을 향해 가는 성도들이 앞길의 장애를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터가 굳고 아름다운 우리의 본향은 천성에 있습니다. 가보기는 하시되 영적 본향은 우리가 비행기 타고 가는 그 시내산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하늘, 천성길 가는 노잣돈을 마련해야 합니다.
5. 결론: 벗는 자유가 아닌 입는 자유
자유가 무엇입니까? 일차적으로 자유는 무엇인가를 벗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말하는 자유는 오히려 입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 입으려 하는 것입니다.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갈 4:26). 이것은 비유인데, 우리가 자유자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무엇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입는 것입니다. 구석에서 자기들끼리 모여 있는 것이 아닙니다. 창조하는 것, 부요하게 하는 것입니다. 자유를 다섯 가지로 정리해 봤습니다.
첫째, 자유는 영생을 얻는 것입니다. 영생이 없으면 한평생 매여 죽음에 종노릇 합니다(히 2:15).
둘째, 빛을 얻으면 어둠으로부터 자유롭습니다. 어둠의 권세가 빛을 이기지 못합니다(엡 5:8).
셋째, 영혼을 얻으면 육체로부터 자유롭습니다. "너희의 인내로 너희 영혼을 얻으리라"(눅 21:19). 자유는 버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것을 취하는 것입니다.
넷째,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주로 삼으면 세상의 종으로 살지 않습니다. 세상의 종노릇 하지 않습니다(롬 14:8).
다섯째, 주님의 멍에를 매면 세상의 멍에로부터 자유롭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마 11:28-30).
[20201004][십자가지기교회 주일낮예배: 갈라디아서 강해(35): 그리스도의 복음] 자유자의 자녀들 (갈 4:21-26) 문병호 목사
<녹취록>
*음성파일: 게시물 하단 "관련링크"에서 청취 혹은 내려받기 가능합니다.
1. 율법은 약속이 있는 계명이다
율법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삶의 규범입니다. 길이 없으면 갈 수 없습니다. 율법은 길과 같습니다. 이번에 멀리 혹은 가까이 많이 다녀오셨을 것입니다. 이것이 길이 있으므로 가능합니다. 우리 인생은 천성을 향해 나아가고 그리스도의 품에 안기고 그리스도를 경배하고 경외해야 하는데 그 방법을 알려 주시는 것이 율법입니다. 우리 교회는 매주 주일에 십계명을 같이 읽습니다. 4계명까지는 하나님을 향한, 나머지는 이웃을 향한 계명으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계명을 매주 고백합니다. 율법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을 봅니다. 사랑하라고 명하시니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보고, 베풀라고 명하시니 우리에게 후히 대하시는 하나님을 봅니다. 율법은 우리를 절망하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길을 모르면 헤맵니다. 길을 알면 멀어서 힘들긴 해도 절망하지는 않습니다. 애쓰는 것과 절망하는 것은 다릅니다. 율법은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눈물로 씨를 흘리고 기쁨으로 단을 거두는 그 길을 알려 줍니다. 율법은 하나님의 어떠하심과 그를 어떻게 닮아야 하는지, 그 뜻을 보여 줍니다. 그러니 율법은 달콤한 것입니다. 율법에는 명령이 있고 약속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명령하시면 항상 약속을 함께 두십니다. 왜요, 하나님의 명령은 사람의 힘으로는 지킬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있어야 지킬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항상 명령을 율법으로 하실 때는 약속을 주시는 것입니다. 친히 이루겠다는 약속입니다. 그래서 율법은 약속의 법, 언약의 법, 약속 있는 계명입니다.
2.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
1) 하나님의 약속을 저버린 자들
그런데 갈라디아에 들어온 어떤 자들이 약속은 버리고 명령만 생각합니다. 이렇게 되면 처음에는 자신이 잘났다는 교만함으로 율법주의자가 됩니다. 그런데 계속 하나님의 법을 지키려고 해도 안 되니 결국에는 율법 폐지론자가 됩니다. 그래서 율법에는 항상 하나님의 약속이 있다는 것을 붙들어야 하나님의 법을 눈을 밝게 하는 것으로, 달콤한 것으로 받게 됩니다. 만약 율법에서 언약, 약속을 빼 버리면 율법주의자가 되었다가 율법폐지론자가 됩니다. 잠시 서 있는 듯하나 곧 고꾸라지는 것입니다. 본문 21절은 이런 사람들을 율법 아래에 있고자 하는 자들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도 율법을 버리지 않아야 하지만 약속과 함께 붙들어야 합니다. 율법 아래에 있고자 하는 자들은 율법을 붙잡되 약속은 저버리는 자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아래가 아닌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저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율법을 잘 지킨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율법 아래에 있는 사람이고, '나는 율법 못지키겠어'라고 말하는 사람도 율법 아래에 있는 사람입니다. "이는 가만히 들어온 거짓 형제들 때문이라 그들이 가만히 들어온 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가 가진 자유를 엿보고 우리를 종으로 삼고자 함이로되"(갈 2:4). 처음에는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에 이르는 자유가 좋다고 하며 들어와 놓고는 율법을 가지고 종을 삼고자 하는 자들이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입니다.
율법은 귀합니다. 신령합니다. 율법은 눈을 밝게 하고 마음을 즐겁게 합니다. 그러나 율법에서 약속을 빼 버리면, 즉 하나님의 은혜 없이 법만을 생각하면 그 즉시 우리가 율법 아래에 매이게 됩니다.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 대해 갈라디아서는 여러 곳에서 말합니다. 즉 율법 아래에 매인 바 된 자들(갈 3:23), 율법의 행위에 속한 자들(갈 3:13) 등으로 말합니다. 이런 자들은 십자가 아래가 아닌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입니다.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 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갈 3:1), "죄가 너희를 주장하지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음이라"(롬 6:14). 은혜 아래, 십자가 아래에 있는 자들이 바로 우리인데 가만히 들어와서 거짓 복음을 전하는 이들은 당을 짓고 사람을 얽어매어 자유케 하는 복음에서 멀어지게 합니다. 바로 이런 사람들은 십자가 아래, 은혜 아래에 있지 않은 자들입니다. 율법의 행위로 사람이 의롭게 된다고 보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값없이, 오직 전적으로 은혜를 받아 구원을 얻는데, 이 자들은 그러지 않은 자들입니다.
2) 율법을 바로 알라
성경은 이를 초등학문 아래에 종노릇하는 자들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초등학문은 전문적으로 말하자면 '일반 은총'을 말합니다. 믿는 자뿐 아니라 모든 자들에게 과일이 열립니다.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사로잡을까 주의하라 이것은 사람의 전통과 세상의 초등학문을 따름이요 그리스도를 따름이 아니니라"(골 2:8). 초등학문을 따르는 사람들은 율법을 모두 다 이루시고 성취하신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이 아니라 율법을 따르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평생 초등학교만 다닐 수 있습니까. 초등학교 다니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나 평생 초등학교만 다닐 수 없습니다. 넓지는 않아도 초등학교 교정은 깊습니다. 그런데 계속 그곳에만 있을 수는 없습니다. 매일 집 앞에서 도랑만 보며 종이배만 띄워서는 어부가 아닙니다. 초등학문이 그것입니다. 큰 물은 바위 위가 아니라 바위 밑으로 흐릅니다. 산곡의 물소리는 재잘거리며 바위 위로 흐르지만 웅장한 물은 바위 밑으로 흐릅니다. 이 초등학문은 거기까지 가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본문 28절 후반부는 율법을 듣지 못하였느냐고 묻습니다. 이 말은 율법을 바로 알라는 말입니다. 율법을 바로 모르니 율법 아래에 있고자 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스라엘아 들으라'(신 6:4)는 말이 바로 이것입니다. 법이 없으면, 길이 없으면 소망이 없습니다. 차를 타고 길로 가야 소망입니다. 길이 없으면 어디로 가도 그저 헤맬 뿐 소망이 없습니다. 그러나 법만 가지고는 소망이 없습니다. 우리는 그 길을 갈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길은 명령이고 힘은 약속입니다.
3) 약속 없는 명령은 저주이다
그러므로 명령만 듣고 약속은 바라보지 않는 자들은 율법의 저주 아래 매인 자로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버릇같이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고 능력을 주시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말씀하시기만 하면 능력주시니 말씀하시라고만 기도해도 됩니다. 하나님은 약속 없이, 성취 없이, 친히 이루심 없이 명령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보지 않고 명령만 붙들고 '내가 이제 준비가 됐으니 하나님 일 한번 해보겠다'고 하면 절대 안 됩니다. 하나님의 일은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비도덕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지만, 내 도덕으로 하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일은 거듭난 것으로 합니다. 타고난 것으로도, 내가 성취한 것으로도 하지 않습니다.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은 저주 아래 있는 자들입니다. 저주는 하나님을 떠나는 것입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전능자의 팔을 떠나는 것이 저주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요 우리를 끝까지 먼저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창세 전에 우리를 짓기 전부터 작정하시고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선택하셔서 사랑하십니다. 그 하나님을 떠나는 것이 저주입니다.
4) 율법에는 약속이 있기에 위로가 된다
하나님은 영이십니다. 스스로 계십니다. 하나님은 계시지 않는 곳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므로 영의 예배를 받습니다. 우리를 온전케 하시고 모든 것을 주장케 하십니다. 만유의, 모든 곳에 계신 하나님이십니다. 율법은 바로 그런 하나님을 우리가 찾게 하는 길입니다. 하나님은 신실하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아버지의 사랑과 돌보심, 긍휼과 관용을 베푸십니다. 그리고 아버지의 그러한 모든 은혜를 우리에게 베푸십니다. 호의를 베푸십니다. 그래서 부성적 사랑, 부성적 호의, 부성적 자비/긍휼, 부성적 돌보심인 것입니다. 아버지로서의 사랑과 호의, 긍휼히 여기심인 것입니다. 얼마나 위로가 필요합니까. 제가 어찌 여러분을 위로하겠습니까? 하나님이 여러분의 위로자가 되십니다. 보혜사 성령이 우리 안에서 속삭이십니다. 율법이 우리에게 위로가 되는 것은 그 명령에 약속이 있기 때문입니다.
5) 약속으로 말미암은 것이 복되다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은 속이는 자들이요 가만히 들어온 자들이라고 했는데, 이들은 아브라함의 복이 율법을 지켜야 있다고 속인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갈라디아서는 430년 이후의 율법이 아브라함의 언약을 폐지하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아브라함의 복은 행위로 말미암은 것이 아닌 믿음의 복이요, 그 아브라함의 믿음은 한 후손을 믿은 것인데, 그 후손이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갈 3:17). 결국 아브라함의 복은 율법을 지켜서 되는 것이 아닌 그리스도를 믿어서 되는 것입니다. 이삭을 바치는 것은 따르는 것이지 그것 자체로 구원에 이르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자가 아들을 바치는 것입니다. 공기는 아무도 못 만듭니다. 은혜는 공기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잘 해봤자 공기가 없으면 불과 몇분 만에 죽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있고, 그리고 명령이 있습니다. 은혜 받은 백성에게 능력을 더하여 주셔서 약속으로 명령을 지키게 하시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에게 두 아들이 있는데 한 명은 애굽의 여종 하갈에게서 났습니다. 여종에게서, 즉 첩이 된 애굽 여자 하갈에게서 이스마엘이 납니다. 그리고 두 번째 아들은 이삭입니다. 사라에게서 난 아들입니다. 본문은 이 두 아들에 대해 한 명은 하갈, 나머지는 자유 있는 여자, 즉 사라에게서 났다고 합니다. 그리고 여종에게서 난 이스마엘은 육체를 따라 났다고 합니다. 사람의 뜻을 따라 난 것입니다. 그리고 자유 있는 여자에게서는 약속으로 말미암았다고 대조를 합니다. 이스마엘은 여종에게서 났고 그는 육체를 따라 난 것입니다. 그리고 자유 있는 여자인 사라에게서는 이삭이 나는데 약속으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합니다.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요 1:13). 이 두 아들을 대조하는 것은 아브라함의 복이 혈통, 육정, 사람의 뜻이 아닌 하나님께로부터 난 이삭에게 간다는 것을 말하기 위함입니다.
3. 육체를 따라 난 자와 약속으로 말미암은 자
1) 존재와 소유
바로 하갈은 여종입니다. 여종은 '파이디스케'라고 하는데 시종드는 자입니다. 요새는 물론 '종'이란 말을 쓰면 안 됩니다만 당시에는 종을 소유물로 여겨졌습니다. 그래서 몸이 종에게 맡겨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라가 여종을 통해 자신 남편의 아이를 낳도록 한 것입니다. 하갈은 누구냐 하면 존재로 사는 것이 아니라 소유로 사는 사람입니다. 그러니 종입니다. 필요하면 부르고 쓰고 하는 도구입니다. 그리고 그 주인이 사람입니다. 안주인이 종에게 남편에게로 가라고 하면 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유 있는 여자는 여종이 아닌 아내입니다. 아내는 남편과 한 몸입니다. 한 몸이라는 것은 소유가 아닌 존재입니다. 자유 있는 여자는 한 존재입니다.
2) 하나님께 속한 자와 사람에게 속한 자
그리고 자유 있는 여자는 하나님께 속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자입니다. 그것이 바로 자유 있는 여자입니다. 여종에게서 난 자는 사람에게 속한 사람에게서 난 자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녀로 사는 것이 아니라 기껏해야 이 땅에서 물건같이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살아 있으나 죽은 것으로 보는 것입니다. 그것에서 난 자녀, 그것이 바로 이스마엘입니다. 그러나 자유 있는 여자는 바로 아내입니다. 한 몸 된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하나님을 주인으로 삼는 자입니다. 하나님이 가라고 하면 가고 서라고 하면 서는 자입니다. 그 자유 있는 여자에게서 난 것입니다. 여종에게서 난 자는 육체를 따라 났다고 본문 23절은 말합니다. 이것은 일반적인 출생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나는 것이 아니라 말입니다. 일반적 출생도 대단한 것입니다. 인간 존재 자체가 대단합니다. 그러나 영생의, 언약의 자녀가 아닙니다. 또한 사람의 뜻에 따라 났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아브라함과 사라가 아이가 없으니 기도하지 않고 자의로, 임의로 여종을 통해 아이를 가진 것입니다. 사람의 뜻입니다. 이것이 바로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입니다.
3) 성령으로 난 자와 육체를 따라 난 자
세 번째는 육체를 따라 난 것은 성령으로 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다 성령으로 거듭났습니다.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갈 3:3),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갈 5:17). 육체를 따라 난 것은 성령을 따라 난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약속과 은혜에 따라 난 자가 아니라 율법 아래에 매인 자입니다.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리라"(갈 5:18). 성령으로 나지 못하니 율법 아래에 있게 됩니다. 그리고 육체를 따라 난 자는 아직 자신의 육체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않은 자들입니다.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리라"(갈 5:24).
4) 정욕으로 일을 시작하지 말라
정욕으로, 사람의 뜻으로 시작하지 마십시오. 육체를 따라 난 것은 약속에 속한 것이 되지 못합니다. 롯은 눈에 보기 좋은 소알 땅으로 갔습니다. 그러나 그곳은 소돔과 고모라 땅이 되었습니다.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합니다. 바짝 눌려졌을 때 시작하십시오. 툭툭 튀어나올 때가 아니라 말입니다. 생명은 바짝 가라앉았을 때 태동합니다. 어쨌든 내 뜻과 생각으로 하려면 안 됩니다. 그러다 안 되니 절망하고 홧김에 남한테 화내고 분노를 표출하는 그런 뉴스가 요즘에 정말 많습니다. 불특정 다수를 해치는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이것이 시대의 분위기입니다. 이것은 다 육체를 따라 사는 것입니다. 육체가 즐거우면 가고, 쓰고, 그냥 그렇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 세태가 그렇습니다.
5) 나 중심으로(육체를 따라)이 아닌 약속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라
무엇보다 육체를 따른다는 것은 중심을 하나님이 아닌 나에게 두는 것입니다. 중심을 나에게 두면 절망입니다. 중심을 나에게 두면 안 됩니다. 내가 잘한다고도 못한다고도 하지 마십시오. 잘한다고 안하는 것보다 못한다고 안하는 것도, 그것도 육체를 따른 것입니다. 본문 23절은 '육체를 따라'라고 합니다. 이것은 사실상 육체가 끌고 간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그 다음에 나오는 약속으로 말미암아, '디에팡델리아스'라고 하는 말은 약속이 붙어 있다는 말입니다. '육체를 따라'는 육체가 끌고 가는 것이고 '약속으로 말미암는다'는 것은 약속에 내가 이끌려 가는 표현입니다.
우리는 언약으로 말미암아 났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에 속합니다. 이삭이 나기 전에 하나님의 약속이 있었습니다(창 15장; 17장; 18장). 계속 약속해 주셨습니다. 우리에게도 사실 하나님이 계속 약속하십니다. 한 번만 하시는 것도 아닙니다. 아브라함에게도 계속 하셨던 것처럼 말입니다. 100세가 다 된 이 부부에게 또 약속을 하십니다. 그리고 여호와의 사자가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께 능하지 못한 일이 있겠느냐?"(창 18:14) 이것과 비슷한 말씀이 또 나옵니다. 마리아가 남자를 알지 못하는 가운데 잉태하니 천사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하지 못함이 없느니라'고 말합니다(눅 1:37). 그리고 가브리엘이 마리아에게 나타나서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하지 못하심이 없느니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약속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냅니다. 그래서 잉태할 수 있는 힘을 주신 것입니다(히 11:11). 그리고 이 약속으로 말미암은 자녀는 믿음의 후손입니다. 아브라함, 사라에 대해 믿음이 있다 없다 많이 말하지만 그들은 믿음의 부부였습니다.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롬 4:18). 이것이 최고 큰 믿음입니다. 조건이 안 되는데 믿은 것입니다. 우리 십자가지기 성도님들, 못한다는 말 절대 하지 마십시오. 못하는 조건에서 하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은 것입니다. 하나님이 온전하게 하시고 충만케 하시고 번성케 하십니다. 하나님이 지시하실 것입니다. 사라는 어떨까요? 약속하신 이가 미쁘신 줄을 알았습니다. 사라도 바랄 수 없는 중에 믿은 것입니다. 그 약속 가운데 이삭이 난 것입니다.
4. 하늘의 예루살렘을 바라라
본문 후반부는 "이것은 비유니 이 여자들은 두 언약이라"고 말합니다. 성경에 '비유'라고 말하는 것은 매우 드뭅니다. 사라와 하갈을 두 언약이라고 말합니다. "이 하갈은 아라비아에 있는 시내 산으로서 지금 있는 예루살렘과 같은 곳이니 그가 그 자녀들과 더불어 종 노릇 하고"(갈 4:25). 24-25절은 해석이 많지만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시내산은 율법을 의미합니다. 율법 아래에 있는 자녀들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25절 후반부는 지금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이 잘못 믿고, 율법주의에 빠져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하갈의 자녀들이고, 26절의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하늘의 예루살렘(히 12:22)입니다. 이 땅의 예루살렘은 율법 아래에 짓눌려 있습니다. 지금 이스라엘이 그렇습니다. 그것을 흠모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다 율법 아래에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지상의 예루살렘입니다. 우리는 위에 있는 예루살렘(갈 4:26), 우리의 본향을 바랍니다. "이는 그가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라"(히 11:10), "본향"(히 11:14-16), "하늘의 예루살렘"(히 11:22), "영구한 도성"(히 13:14). 히브리서는 바울이 히브리인들에게 쓴 것입니다. 이 서신에서 우리의 본향은 지상의 예루살렘이 아닌 하늘 예루살렘, 새 하늘과 새 땅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는 바로 지상의 새 예루살렘입니다. 열린 문, 인내의 말씀, 빌라델비아 교회가 칭찬을 받은 바로 그것입니다. 돈 모아서 시내산 갈 생각하지 마시고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 보십시오. 천성을 향해 가는 성도들이 앞길의 장애를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터가 굳고 아름다운 우리의 본향은 천성에 있습니다. 가보기는 하시되 영적 본향은 우리가 비행기 타고 가는 그 시내산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하늘, 천성길 가는 노잣돈을 마련해야 합니다.
5. 결론: 벗는 자유가 아닌 입는 자유
자유가 무엇입니까? 일차적으로 자유는 무엇인가를 벗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말하는 자유는 오히려 입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 입으려 하는 것입니다.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갈 4:26). 이것은 비유인데, 우리가 자유자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무엇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입는 것입니다. 구석에서 자기들끼리 모여 있는 것이 아닙니다. 창조하는 것, 부요하게 하는 것입니다. 자유를 다섯 가지로 정리해 봤습니다.
첫째, 자유는 영생을 얻는 것입니다. 영생이 없으면 한평생 매여 죽음에 종노릇 합니다(히 2:15).
둘째, 빛을 얻으면 어둠으로부터 자유롭습니다. 어둠의 권세가 빛을 이기지 못합니다(엡 5:8).
셋째, 영혼을 얻으면 육체로부터 자유롭습니다. "너희의 인내로 너희 영혼을 얻으리라"(눅 21:19). 자유는 버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것을 취하는 것입니다.
넷째,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주로 삼으면 세상의 종으로 살지 않습니다. 세상의 종노릇 하지 않습니다(롬 14:8).
다섯째, 주님의 멍에를 매면 세상의 멍에로부터 자유롭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마 11:28-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