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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025][십자가지기교회 주일낮예배: 갈라디아서 강해(38): 그리스도의 복음]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 2 (갈 5:5-6) 문병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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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025][십자가지기교회 주일낮예배: 갈라디아서 강해(38): 그리스도의 복음]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 2 (갈 5:5-6) 문병호 목사



(갈 5:5)우리가 성령으로 믿음을 따라 의의 소망을 기다리노니
(갈 5:6)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나 효력이 없으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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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취록>



1.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면 은혜에서 떨어진다


지난 주에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이라는 제목으로 5-6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지난 주 4절의 말씀에서 그리스도에서 끊어지면 은혜에서 떨어진다고 했습니다. 감동이 있을지라도 그리스도가 없으면 은혜가 없는 것입니다. 침잠하고 답답하고 쫓겨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지 않고 있다면 은혜에서 떨어진 것이 아닙니다.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갈 자가 없느니라." 영적 분별력은 투시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그리스도에게 붙어 있는가 아는 것이고, 그리스도께 가까이 가려는 것입니다. 주님은 나와 함께 내 속에 계시다는 것을 알고 은혜 누림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순교의 자리라 할지라도 은혜에서 떨어지는 자리가 아닙니다. 


1) 보혜사 성령의 임재: 임마누엘


그렇다면 우리가 그리스도의 은혜에서 끊어지지 않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본문 5절은 바로 그것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성령이 임하면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 수 없습니다. 성령은 임마누엘이므로, 하나님이 우리 안에 계시며 절대적, 인격적, 단회적으로 임재하시므로, 상대적이지 않고 절대적으로, 물질적이 아닌 인격적으로 오시므로 다시 떠나가지 않습니다. 그래서 성령으로 임마누엘 하나님,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므로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자가 없는 것입니다(롬 8:35-39; 출 3:12; 마 28:20; 행 1:8). 하나님이 이렇게 약속하신 것입니다. 주님이 떠나시면서 이 말씀을 더욱 강조하셨습니다. 


2) 주어진 새로운 신분과 믿음


그래서 본문 5절은 성령이 임하면 우리에게 신분과 믿음이 주어짐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죄의 삯은 사망인데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지는, 영생의 하나님의 자녀로 천국 시민이 되고 하나님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새로운 신분이 생기고 그것에 걸맞은 것이 주어지는 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특권은 믿음입니다. 


3) 의를 이루는 소망을 가지는 믿음


믿음을 주시고 믿음을 사용해서 믿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으로 믿음을 따라', 원어에 따르면 '믿음으로부터' 나오는 의의 소망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 백성이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은혜에서 떨어지지 않는데, 그것으로 무엇을 하느냐, 바로 의를 이룹니다. 지난주에도 살아가며 부대낌이 있었을 것입니다. 예배도 준비해서 가는 것이 아니라 예배에 가서 비로소 준비가 된다는 것도 다 그런 것입니다. 성령이 임하고 믿음을 주시면 의의 소망이 생깁니다. 의는 하나님이 서신 자리입니다.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의 기뻐하심입니다. 그쪽으로 향해 갑니다. 그 소망이 생깁니다. 소망은 가능성입니다. 소망은 약속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은 성령이 임하지 않고 믿음이 없으므로 의에 대한 소망이 없습니다. 그래서 의에는 자유롭고, 즉 신경을 안 쓰고 죄에 매여 삽니다. 그러나 믿는 사람은 의에 소망을 가집니다. 



2. 의의 소망


1) 의의 소망은 자유의 표이다


내가 말씀을 보고 그렇게 살고 싶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성령이 임했기 때문입니다. 분별력도 주시고 믿음도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자유라고 해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갈 5:1). 더 이상 종의 멍에가 아닌 그리스도의 멍에를 매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못 살고 순종하지 못해서 힘들다고 해서 그것이 억압이라거나 노예의 상태라거나라고 생각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본문이 말하는 소망이고 진정한 자유의 표라는 것입니다. 


2) 자유자에게 말씀을 주신다


자유함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이 있는 것입니다. 성도님들은 이것에 익숙해져야 합니다. 무슨 일로 인해 어렵고 승하고 하면 우리는 판판 실패합니다. 조금만 어려운 일이 있으면 왜 교회 가는데 편안함이 없냐고 합니다. 성령으로 믿음을 주셔서 그를 따라 의의 소망에 이르게 하시는 것입니다. 농부가 가라지를 뽑는데 그것을 노예라고 하지 않습니다. 자기는 자유자라고 하면서 여름에 가라지를 뽑지 않으면 가을에 추수가 없습니다. 가라지 뽑는 것은 속박이 아닌 진정한 자유입니다. 그것이 바로 울며 눈물로 씨를 뿌리는 것입니다. 포도원에 들어가 일하는 것이 소망이 되는 것입니다. "주의 말씀대로 나를 붙들어 살게 하시고 내 소망이 부끄럽지 않게 하소서"(시 119:116). 성경에서 '붙든다'는 표현은 전부 보혜사 성령, 임마누엘 성령의 역사입니다. 주의 말씀대로 나를 붙들어 살게 하십니다. 내 소망이 부끄럽지 않게 하십니다. 내 소망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임하여서 우리가 넘어집니다. 울며 절며 기며 천국의 삶을 소망합니다. 이 땅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 가운데서도 소망을 가지는 것입니다. 다윗의 노래가 그것입니다. 의의 소망입니다. 바로 사는 소망입니다. 잘 먹고 잘 살고 잘 입는 소망이 아니라 말입니다. 이것이 멋있는 것입니다. 사람 자신이 번듯해야 멋있지 조금 잘 입고 잘 먹고 하는 것이 무엇이 멋있습니까. 꽃처럼 사람도 향기가 나야 멋있습니다. 사람이 겉은 멀쩡한데 악취가 나면 어떻겠습니까. 많은 경우 우리가 속는 것이 소망, 주의 말씀이 나를 억압한다고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3) 은혜로 말미암아 소망이 부끄럽지 않다


지난주 수업을 하는데 3가지 강의에 공통된 것이 있었습니다. 시편 19편에 나오는 율법의 달콤함이 그것입니다. 

첫째, 율법으로는 의를 깨닫습니다. 

그런데 둘째, 의를 이룰 수 없는 우리의 무능을 깨닫습니다. 

셋째, 그럼에도 불구하고 할 수 있다는 고백에 이르는데, 이것은 무능에서 비롯된 자기 부인으로 인한 것입니다. 바로 은혜인 것입니다. 은혜로 그리스도께 피하는 것입니다.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달콤함입니다. 하나님의 법의 달콤함입니다. 

율법, 무능, 은혜, 이 세 가지가 없으면 하나님께 영광을 안 돌립니다. 자꾸 교만해지고 그러면 더 크게 넘어집니다. 교만할수록 더 크게 넘어집니다. 바로 의의 소망인 것입니다. 지난주에도 말씀했지만 존 스토트 목사님은 갈라디아서의 주제를 자유에 이르는 오직 한 길이라고 말했습니다. 복음, 믿음의 의 등 많은 것을 말하지만 중요한 주제는 자유인데 그것은 의의 소망, 성령으로 믿음을 따라 의의 소망에 이르는 것입니다. 의로워지는 것이 우리의 소망입니다. 

우리는 부족하고 연약합니다. 그래서 일용할 양식을 위해 기도하는 것입니다. 두 끼도 못간다는 것이 우리의 영적 질서입니다. 그러니 매끼 기도해야 합니다. 내 성품도 착함도 의도 두 끼니를 못 갑니다. 아침에 약했다 점심에 강했다 다시 저녁에 약합니다. 사방에 우겨쌈을 당해도 매이지 않습니다. 우리를 붙드는 그리스도의 사랑은 불변하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변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그래서 믿음, 사랑은 귀하게 여기지만, 이 소망이라는 말도 귀한 것입니다. 5절에 나오는 이 소망,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라고 할 때 바로 이 소망인 것입니다. 의의 소망이 우리 속에 일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 믿음을 주시고, 그 가운데 우리가 사랑하게 하시는데, 그래서 상급받게 하시는 것, 그것이 다윗의 기도입니다. 


4) 나 자신이 최고의 소망거리이다


최고의 소망은 나 자신입니다. 우리 가족, 남편, 아내가 있지만, 바로 나 자신에 대한 소망이 최고의 소망입니다. 그것이 바로 의의 소망입니다. "복음의 소망"(골 1:23), 즉 복음이 주는 소망이 있습니다. "부르심의 소망"(엡 1:18; 4:4)이 있습니다. 불러놓고 아무 말도 안하거나 혼내는 것이 아닙니다. 부모가 자식을 혼내는 것은 절망이 아니라 소망입니다. 또한 "영광의 소망"(골 1:27)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완전하심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예배 드리기 전에 기도하는데 정말 우리 교회에 만나와 메추라기가 막 떨어지고 영광의 임재가 있습니다. 우리 교회뿐 아니라 오늘 예배 드리는 모든 교회가 그렇습니다. 그리고 "구원의 소망"(살전 5:8)입니다. 새로운 구원이 아닌 이미 얻은 구원에 대한 소망입니다. 생명이 있으니 생명의 열매에 대한 소망이 일어납니다. 그리고 디도서 등에 나오는 "영생의 소망"이 있습니다. 



3. 의의 소망이 열매 맺는 방편: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


1)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이와 같은 의의 소망이 이루어지는데 성령이 임하여서 믿음을 선물로 주심으로, 그 믿음으로 의를 행하고자 하는데, 나는 할 수 없는데 성령을 받은 백성이므로 담대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아멘' 하며 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니 못한다고도 하지 마시고 내가 잘한다고도 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없으면 다 절망에 빠집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능치 못함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야 새 힘이 생깁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에게 그 의의 소망을 어떻게 열매로 이루느냐, 그것이 바로 본문 6절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나 효력이 없으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갈 5:6). 우리의 의의 소망은 형식이나 의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할례 여부에 따른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할례를 받으면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무익하다고 했습니다. 그러니 이미 이 의의 소망은 형식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예수에 대한 믿음입니다. 


2)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 믿음이 역사하면 사랑의 열매가 맺힌다


그 믿음이 어떻게 역사하느냐, 바로 사랑으로써 역사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본문 6절의 말씀입니다.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 이것이 갈라디아서의 핵심적인 주제이면서도 논란이 많은 내용입니다. 사랑에 의해서 역사하는 믿음으로 고대부터 잘못 해석된 사례가 있는데 이에 따르면 사랑이 있어야 믿음이 따른다고 해석하면 문제가 됩니다. 펠라기우스와 어거스틴의 논쟁이 바로 이것입니다. 어거스틴은 오직 은혜로, 펠라기우스는 우리가 능력이 되니 하나님이 말씀을 명령하시고 그것을 지켜서 상급에 이른다고 했습니다. 펠라기우스와 그 제자들은 사랑에 의해서 역사하는 믿음으로 해석한 것입니다. 오늘날 로마 가톨릭도 그렇게 해석합니다. 사랑이 먼저 있어야 믿음이 있다고 해석하는 것입니다. 사랑에 의해 믿음이 작용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믿음이 사랑과 함께 역사한다고 보아야 합니다. 사랑의 열매를 맺는 믿음의 역사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번역하는 것이 맞습니다. 성경대로 옳게 번역하면 역사한다는 것은 수동태가 아닙니다. 능동태입니다. 믿음이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것입니다. 믿음이 역사하면 사랑의 열매가 맺는다는 것입니다. 내 능력으로 사랑을 해서 믿음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믿음을 주셔서 그 믿음으로 사랑에 이른다는 것입니다. 성령으로써 믿음을 따라 의의 소망에, 선물로 주어지는 것이 사랑의 열매입니다. "이 교훈의 목적은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이 없는 믿음에서 나오는 사랑이거늘"(딤전 1:5). 그것이 윤리이고 도덕이고 선입니다. 


3) 사랑보다 믿음이 앞선다


하나님은 거룩하고 의로우신 분임을 알기 때문에 하나님을 인정하면 윤리적이고 도덕적이게 됩니다. 무엇보다 그런 하나님을 의지하고 사랑하면 닮게 됩니다. 바뀝니다. 때려서도 안 되지만 사랑하면 닮습니다. 바뀝니다. 제 지도교수님인 데이비드 라이트 박사님은 "갈라디아서 5장 6절이 현저한 위세를 떨쳐 종교개혁 신학에 큰 유산을 남겼다"라고 했습니다. 로마 가톨릭이 계속해서 개신교를 공격합니다. 믿음만 이야기하고 사랑이 없다고 말입니다. 그러면서 루터와 칼빈은 사랑이 없다고 말합니다. 그렇게 말하니 바로 이 구절을 가지고 우리의 믿음은 죽은 믿음이 아니라 살아 있는 믿음, 행함이 따르는 사랑이라고 반박한 것입니다. 거짓이 없는 믿음에서 나오는 사랑입니다. 


4) 내 자질적 사랑이 아닌,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사랑


"주의 말씀대로 나를 붙들어 살게 하시고 내 소망이 부끄럽지 않게 하소서"(시 119:116). 하나님의 사랑이 나를 붙들어 매서 의의 소망이 생기고 그것이 내 소망이 됩니다. 우리 성도님들은 말씀에 그냥 '아멘' 하십시오. 내 능력을 헤아리지 말고 말입니다. 그때 바뀌고 도덕적으로 됩니다. 노예가 아닌 열매 맺는 자유가 됩니다. 겨가 아닌 나무에 붙어 있는 열매가 되는 것을 속박이라고 하면 안 됩니다. 우리의 자유는 바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부대끼면서 소망을 가지는 것입니다. 그 소망을 가지고 기도하고 하나님께 영광 돌립니다. 부대낌이 없이 누가 기도합니까. 온전하고 안 아프면 기도하는 자도 없고 의사 찾는 자가 없습니다. 내가 영이 곤고하니 여호와 하나님이 찾아갑니다. 그것이 바로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입니다. 

성령이 임하면 믿음을 선물로 주시고 믿음이 임하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소망이 생깁니다. 이렇게 의에 대한 소망이 생기는데, 이때 즉시 우리의 무능을 알게 됩니다. 그런데 거기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은혜를 찾아 갑니다. 믿고 사랑하기만 하면 사랑의 열매가 맺히는 것입니다. 이것으로 종교개혁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한국교회도 하나님의 의에 대한 소망으로 축첩과 음주 등의 문화가 없어진 것입니다. 잘 살아 보려고 윤리나 삶을, 사랑을 앞세우면, 그때야말로 사랑이 없어집니다. 믿음은 이제 됐으니 성숙한 사랑을 하자고 하면 복음이 희석됩니다. 오직 믿음, 전적 믿음이 없으니 사랑이 없어집니다. 윤리나 도덕이 틀렸다는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그 사랑이 나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고 나는 그저 믿는다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믿음은 우리에게, 사랑은 하나님께"라는 말을 <<기독교 강요>>에서 봤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의의 소망을 주시고 믿음을 선물로 주시고 그리스도의 의를 우리 것으로 삼아 주셨습니다. 어거스틴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믿음이 없으면 선행처럼 보이는 것도 죄로 변한다." 선행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믿음이 없으면 안 됩니다. 그리스도를 믿음이 없으면 선을 행하는 것조차 믿음에서 떨어지는 것입니다. 지난주 본 말씀입니다. 무슨 일이든, 아무리 뛰어난 화려한 뭐가 있어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면 은혜에서 떨어집니다. 은혜에서 떨어진 것은 전부 시험거리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셨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믿음의 의로움과 사랑의 거룩함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데, 그래서 살아남(의로움)도 살아감(거룩함)도 있는 것입니다. 믿음은 살아남, 거룩함은 살아감인 것입니다.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으니"(고전 1:30). 이런 말씀은 '아멘'이 되면 딱 붙들어야 합니다. 천국까지 가져갈 말씀입니다. 믿음도 사랑도 예수님의 은혜입니다. 

"믿음과 사랑의 호심경을 붙이고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쓰자"(살전 5:8). 오늘 본문인 5절의 핵심 단어는 소망입니다. 의의 소망입니다. 우리가 가진 최고의 소망은 의의 소망입니다. 우리는 의의 종입니다. 그리고 본문 6절,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을 말합니다. 이것이 데살로니가전서 5장 8절에도 나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용사인데, 믿음과 사랑의 호심경을 붙이고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씁니다.



4. 결론


우리는 사랑의 믿음의 열매를 맺습니다. 그러나 각자가 누구보다도 하나님 앞에서 부족합니다. 저도 매주 이렇게 설교하는 것이 은혜입니다. 그러나 다른 것은 몰라도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함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계신 것과 그를 찾는 자에게 상급 주시는 자이심을 믿어야 합니다. 그를 찾는 자에게 상급주는 것, 그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하나님이 계셔서 매번 일할 때마다 찾으면 내가 한 것이 아니라도 내 것으로 상급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그가 자기를 찾는 자에게 상급 준다는 것이 바로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입니다. 

매번 찾으면 하나님이 하시고 상급을 또 우리에게 주십니다. 내가 한 것이 아닌데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웁니다. 내가 한 것이 아닌데 내 것이라고 상급을 주시니 말입니다. 저는 <<기독교 강요>> 번역을 제가 썼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기독론>>도 그렇습니다. 제 진심입니다. 저는 절대 그 책을 쓸 수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나 주님은 자기를 찾는 자에게 능력을 주시고 상급을 주십니다. 그런데 그것으로 또 상급을 주십니다. 책을 쓰게 하신 것만도 감사한데 말입니다. 이는 바로 영광 받으시기 위해, 우리를 영광의 도구로 사용하시기 위해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