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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922][십자가지기교회 주일낮예배: 갈라디아서 강해(24): 그리스도의 복음] 율법의 중보자 그리스도 (갈 3:19-20) 문병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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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922][십자가지기교회 주일낮예배: 갈라디아서 강해(24): 그리스도의 복음] 율법의 중보자 그리스도 (갈 3:19-20) 문병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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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 3:19)그런즉 율법은 무엇이냐 범법하므로 더하여진 것이라 천사들을 통하여 한 중보자의 손으로 베푸신 것인데 약속하신 자손이 오시기까지 있을 것이라  
(갈 3:20)그 중보자는 한 편만 위한 자가 아니나 하나님은 한 분이시니라



<녹취록>



1. 약속


우리가 살다 보면 어려울 때가 많습니다. 모두가 그런 기억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려운 것도 여러 종류입니다. 몸 아파서, 일이 어려워서, 그러나 가장 어려울 때가 저로서는 유학 중에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입니다. 제가 유학간다고 시골의 병원에 어머니가 계시는데, 얼마나 우시던지요. 저도 얼마나 울었는지요. 자식으로 도리가 아니나 곡을 할 만큼 울고 3년 내에 돌아오겠다고 말씀드렸는데 그 기간을 못 채우고 큰 지병이 없었는데도 돌아가셨습니다. 그 때가 가장 힘들 때였습니다. 그래서 미국의 기숙사의 지하 세탁실이 있었는데 며칠이고 장지도 가지 못하고 울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 일이 저에게 가장 큰 일 또한 가장 큰 약속이 됩니다. 후일에 어머니가 출석하시던 교회 목사님으로부터 어머니가 새벽예배를 드리시고 집에 들어가서 씻고 돌아가셨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장례 치른 후 소포가 왔습니다. 음식을 바리바리 싸서 제가 좋아하는 음식을 보내 주신 것입니다. 고추장에 소고기를 잘게 썰어 넣으면 밥에 비벼 먹기도 하고 오래 먹습니다. 그 전에는 어머니가 미국에 소포를 못 보내는 줄 알고 안 보내셨는데 그때 어떻게 해서 보내 주신 것이 미국에 온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우리가 약속이 없으면 과연 견딜 수 있을까 생각을 해 봅니다.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약속이 뭔지 잘 잡히지 않지만, 고린도전서 15장의 부활의 약속이 없으면 헛것이라는 말씀처럼, 그것이 없으면 어떻게 죽음 앞에 의연하고 죽음을 이길 지 생각해 봅니다. 항상 우리에게는 어떤 어려움이 닥치고 있습니다.
지난 주간에 본 말씀은 유업이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라 약속에서 났다고 했습니다. 약속에서 났다는 것은 약속이 먼저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먼저 존재하고, 우리는 그것을 잘 알지도 못하나 무슨 일을 당하면 그 때 비로소 그 약속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평소에는 알지 못하다가 그 약속이 비로소 어떤 일을 당해 선명해지는 것입니다. 이런 일들을 통해 우리에게 약속이 선명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끝내는 다시 믿음으로 돌이키고 그것으로 말미암아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시 119:71). 곤고가 없지 않고 연단이 없지 않으나 그것이 불에 타면 없어지는 금보다 더 귀하다는 것(벧전 1:7)을 알게 됩니다.



2. 하나님의 사랑과 질서와 약속


1)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은 살아 계시고, 살아 계신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하나님은 살아 계시면 사랑이시다."
저는 이것만은 신학교 들어가기 전에 확실히 믿었습니다. 친구나 가족조차도 살아 있어도 사랑이 아닌 경우가 있으나 하나님은 그렇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살아 계시면 사랑이시라는 이 말씀이 저에게 확 와닿았습니다. 막내로 사랑을 많이 받았으나 어쩐 일인지 이 말이 그렇게 제게 다가왔습니다. 세상은 엄중하고 엄격하고 그것이 나에게 상처가 되기도 합니다. 내가 못나서 상처가 되는 것이지요. 그런데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는 것입니다. 살아 계시면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부석거리기만 하셔도, 후 하고 입김을 내쉬기만 하셔도, 함께 계시기만 하셔도 언제나 사랑이신데, 그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것에 대해 확신이 들었습니다.


2) 하나님의 질서: 율법


어느날 기도원에서 일하다가 비가 와서 우리가 만든 정자에 앉아 쉬고 있는데,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그리고 살아 계신 하나님은 질서가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죽은 부초는 여기 저기 떠돌아다니므로 이리 당기면 이리 오고 저리 밀면 저리 가지만, 아무 생명력이 없습니다. 그러나 살아 있는 것은 열매를 맺기도 하고 어느 누군가의 그늘이 되기도 합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시되 질서이신데, 그 질서가 바로 율법, 하나님의 법입니다. 본래 사랑을 공부하러 갔는데, 사랑은 살아 계시고 살아 계신 하나님은 질서의 하나님이니 율법을 배우자는 생각이 든 것입니다. 율법을 그때까지는 정죄하고 판단하고 나쁜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미국에 가서 한 학기를 마친 후 크게 깨우쳤습니다. 율법은 꿀송이보다 단 것이고 거룩하고 의롭고 선하고 신령하고 자유케하는 것임을 알게 된 것입니다. 디모데전서 1장에도 보면 적법하게 쓰면 율법이 선하다고 나옵니다. 모든 질서가 우리를 얽어매는 것이 아니라 살아 계신 하나님을 드러내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3) 하나님의 약속


겨와 티와 같은 것은 떠돌아다녀도 생명력이 없습니다. 이런 율법이 우리에게 온전한 것이되, 우리의 죄로 인해 다 누릴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대로 두지 않으시고 약속을 주셨습니다. 약속이 있는 백성이라야 참을 수 있습니다. 롯은 소알 땅을 선택할 때 아브라함은 가나안 땅을 택합니다. 이 아브라함의 마음은 성정이 좋아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으므로 가능합니다. 이삭이 가는 곳마다 우물을 파는데 그랄 족속이 빼앗아 갑니다. 그러면 이삭은 양보하고 떠나고 이 일을 반복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이제 다투지 않게 하시는데 브엘세바로 인도하신 것입니다. 첫 번째, 두 번째 우물이 난 곳은 지금 이름도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브엘세바는 지금도 큰 도시입니다. 큰 도시는 가장 큰 물이 나는 곳입니다. 예루살렘 갔을 때 성전 모형을 봤는데 그곳에는 수영장이 있었습니다. 그정도로 물이 많이 나니 하나님이 성막을 머물게 하신 것입니다.
결과적으로는 몰라도, 이삭이나 아브라함이 성격이 좋은 것이 아닙니다. 이삭은 나이가 들어 자식을 분간하지 못하는 우둔한 것으로 나옵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우리를 지배해야 양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없이는 원수를 사랑할 수도 오리 가자고 할 때 십리를 가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에게 천 리를 같이 가 주시는 약속, 우리가 옷을 벗으면 아예 채색옷을 새로 짜주시는 약속이 있기 때문에 그렇게 합니다. 우리가 소자에게 한 것이 하나님께 한 것이라는 것도 약속을 의미합니다.



3. 약속 가운데 주어진 율법


 —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하나님께서 미리 정하신 언약을 사백삼십 년 후에 생긴 율법이 폐기하지 못하고 그 약속을 헛되게 하지 못하리라”(갈 3:17). 하나님의 법은 약속에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약속이 성취가 되는 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19절의 "그런즉"이 바로 이 의미입니다. 19절은 성경에서 어렵다고 하는 구절입니다. 이 구절에 대한 해석이 430가지가 있다고 우스개로 말합니다.


1) 율법은 약속거리이다


그러나 "그런즉"을 보면 어렵지 않습니다. 율법은 약속 가운데 주어진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율법은 무엇이냐, 바로 언약의 법이라는 것입니다. 율법은 바로 언약의 약속의 조건입니다. 그래서 약속거리라는 것입니다. 약속을 하는 거리라는 말입니다. 아까도 말씀했으나, 하나님은 살아 계시고 살아 계신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인데 질서 가운데 살아 계시고 질서 가운데 사랑하시는 것이 율법이고 언약이고 약속이라는 것입니다.


2) 질서 가운데 이루어지는 약속


하나님의 약속과 사랑이 무질서하지 않고 오히려 질서 가운데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빗으로 머리를 빗는 이유가 무엇인가요? 가지런히 만들기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법은 약속 가운데 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율법이 아브라함의 언약 가운데 믿는 백성에게 주어지는 율법입니다.


3) 율법은 죄를 생기게 하는 것이 아니라 죄인을 온전케 하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19절과 20절을 믿음의 백성에게 주어지는 말씀으로 저는 봅니다. 그렇다면, 바로 이어서 "범법하므로 더하여진 것"이라 한 것은 율법을 어겨서 법을 주셨다는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것을 잘못 이해해서 율법이 더한 곳에 사망이 더하다고 보기도 하는데 그것은 아닙니다. 모세의 율법이 있기 전에 이미 살인죄가 있었습니다. 가인이 아벨을 죽인 것이 이미 죄가 되었습니다. 제6계명이 있기 전에 말입니다. 제7계명이 있기 전에 이미 음란함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율법이 있어서 죄가 있는 것이라는 것은 말이 안 됩니다.
죄가 있는데, 언약 백성의 연약함으로 인해 율법을 주신 것이라는 말입니다. 즉, 죄가 있는데 율법을 주신 것은 혼내기만 한 것이 아니라 다시 돌이켜서 하나님의 백성을 온전하게 하려 하는 것이라는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그래서 율법을 이루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바로 이어 "한 중보자의 손으로 베푸신 것"이라고 합니다. 죄가 있는데 법이 들어왔으면, 법은 일단 죄가 잘못됐다고 징계할 것입니다. 그렇다고 율법 때문에 죄가 생겼다고 하면 안됩니다.



4. 율법의 중보자 그리스도


1) 그리스도가 베푸신 율법


율법이 있어서 이미 있는 죄를 깨닫게 하는데, 거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거기서 돌이켜 언약의 율법으로 우리가 받아 누리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하시려고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 “그런즉 율법은 무엇이냐 범법하므로 더하여진 것이라 천사들을 통하여 한 중보자의 손으로 베푸신 것인데 약속하신 자손이 오시기까지 있을 것이라”(갈 3:19). 한 중보자는 많은 사람들이 모세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칼빈 이후로 그리스도라고 생각합니다. 한 중보자의 손으로 베풀었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손으로 베푼 것을 의미합니다. 천사들을 통해 베풀었다고 할 때 천사는 그리스도가 부리는 자들입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가 천사들을 통하여 준 것으로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천사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천사들은 항상 하나님이 일을 하실 때 부리십니다. 성경에서 천사가 나온다고 해도, 안 나온다고 해도 특별히 볼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항상 천사를 사용하십니다. 그러므로 천사들이 율법을 주었다는 것은 전혀 의미를 둘 것이 아닙니다.


2) 그리스도께서 율법을 다 이루셔서 그 의를 우리 것으로 삼아 주신다


그 후에는 "약속하신 자손이 오시기까지 있을 것이라"라고 합니다. 구약 때부터 한 사람을 가리켜 자손이라고 단수로 명명했는데 이는 바로 그리스도이십니다(갈 3:16). 아브라함에게 후손의 약속을 할 때 후손은 단수로 사용됩니다. 그 후손이 바로 그리스도입니다. 그러므로 본문의 자손도 그리스도로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율법이 예수 그리스도가 오실 때까지 있다고 하면 어떻게 보아야 할까요?
그것은 예수님의 손으로 율법을 정하고 주셨는데 그것을 예수께서 오셔서 이루신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는 율법 아래에 매인 바 되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갈 3:23). 이것은 디모데전서 2장 5절과 유사합니다. 즉 아버지께는 다 이루어야 하고, 우리에게는 그것을 베풀어주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하신 일은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함으로써 아버지 뜻을 이루신 것입니다. 그래서 중보자는 한 편만 위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은, 위로는 아버지께 율법에 순종하여 의를 이루고, 아래로 우리에게는 보혜사 성령을 통해 예수께서 이루신 이것을 우리 것 삼아 주시는 것을 의미합니다(딤전 2:5). — “너희가 그리스도의 것이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갈 3:29). 즉, 그리스도의 의가 내 것이 되면, 나는 그리스도의 것, 즉 그리스도의 사람이 됩니다(롬 8:9). 곧 그리스도의 영, 보혜사 성령이 내게 임하면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아브라함의 유업을 받을 자라고 합니다.


3) 그리스도 안에서 율법의 명령은 약속거리, 즉 우리에게 그렇게 살게 해 주시겠다는 약속이다


그런데 율법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약속거리가 된다는 말입니다. 율법이 없으면 약속거리가 아무것도 없습니다. 즉 믿기만 하고 아무 복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명하신 것은 주시려고 하신 것입니다. 거룩하라, 사랑하라는 명령은 우리를 사랑하시고 거룩하게 하시리라는 약속인 것입니다. "율법의 중보자 그리스도." 칼빈의 불란서 갈라디아서 주석에서 갈라디아서 3장 19절, 20절의 주석에 이 용어가 나오는데, 이것이 바로 우리 신앙의 핵심입니다. 제 박사 논문 제목이기도 하구요. 이것이 우리 언약신학의 핵심입니다.
우리가 서 있는 자리, 우리의 신학에서 앞뒤 말씀을 보면 다 연결되어 있습니다. 율법의 약속을 생각하지 않고 명령으로만 보면 잘 풀리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미 "한 중보자의 손으로 베푸신 것인데 약속하신 자손이 오시기까지 있을 것이라"라고 하면 충돌되어 헷갈립니다. 그러나 이것도 그리스도의 손으로 베푸시되 그리스도가 이루어 주신 것으로, 그래서 율법의 중보자는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4) 하나님의 명령에는 약속과 성취가 있기에 은혜를 구하라


금요일 설교에 구름기둥과 불기둥을 보았습니다. 출애굽기에는 이것이 여호와의 임재로 나타납니다. 그런데 민수기 9장에서는 이것에 대해 "여호와의 명령을 따라"가 여덟 번이나 나옵니다. 그 의미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구름기둥 불기둥은 영광의 임재,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둘째, 하나님의 영광의 임재에는 명령이 있다, 말씀이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임재할 때는 항상 명령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호와의 임재가 있으면 우리가 움직여야 합니다. 명령이 있고 지시가 있고 우리가 움직이는 그 때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십니다. 달란트는 영어로 선물이라는 말입니다. 달란트의 비유는 많고 적음이 아니라 우리를 통해 일하신다는 것을 보이기 위한 것입니다. 명령을 받으면 그것을 가지고 움직이라고 하는 것을 가르칩니다. 우리가 움직여야 상급이 있습니다. 움직일수록 상급이 커집니다.
영광의 임재가 있고 약속이 있고,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 즉 하나님의 법이 있는데 이것이 특히 산상수훈에서 보인 것처럼 구약보다 더 엄격하게 주어집니다. 구약은 이에는 이, 눈에는 눈인데, 이제는 업신여기는 말만 해도 안되고 생각으로도 간음하면 안되는 지경으로 주어진 것입니다. 왜 이렇게 신약시대의 법이 더 어렵냐고 하지 마십시오. 이것은 약속거리가 많아진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우리를 얽매려고 주신 것이 아니라 신약시대 더 큰 은혜를 주시려고 한 것입니다.
우리 십자가지기교회 성도님들은 한 말씀이라도 경히 여기지 말고 땅에 떨어지게 하지 마십시오. 그대로 두십시오. 왜냐하면 율법의 중보자 예수께서 날 위해 다 이루셔서 우리는 그를 의지하고 담대히 나아가기 때문입니다.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고 말입니다. 그걸 어떻게 지키냐고 세상 대하듯 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이 모든 법을 오직 은혜로 합니다. 율법은 약속거리입니다. 예수님이 다 이루신 것을 말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는 율법을 폐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자신이 율법의 완성이 되시는 것입니다. —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롬 10:4).



5. 결론: 그리스도 안에서 율법을 누리라


그러니 하나님의 법이 무겁다고 생각하지 말고 더 찔러 주시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명령이 있는 곳에 약속이 있고 성취가 있습니다. 크게 명하시고 크게 꾸짖으시면 크게 주시고 크게 이루십니다. 결코 율법을 폐지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율법을 누리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신약시대입니다. 구약에는 물질적인 것을 통해 보이시고 주시는데 신약에는 왜 이러냐고 하지 마십시오. 신약시대의 은혜가 바로 이것입니다. 그래서 구약은 아동기라고 하고 신약은 성년/장년기라고 합니다. 구약은 어린애와 같은 수준의 은혜이고 지금은 어른의 은혜라는 것입니다. 힘든 것을 명하시는 것 같은데 오히려 은혜가 넘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 19절의 말씀이 있는 것입니다. 율법을 더하시고 분명히 범법이 있습니다. 헬라어로 '파라바시스'인데, 죄라는 말과 조금 다릅니다. 죄는 '하마르티아'입니다. '파라바시스'는 말씀을 들었는데 까먹은 것을 말합니다. 그것이 범법입니다. 말씀을 들으면 지나가지 말고 꼭 묶어 두십시오. 율법을 주시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어 주시고 그리하여 우리가 누리게 하십니다. 그래서 신약시대는 율법으로 말미암지는 않으나 그리스도의 은혜로 율법이 약속거리가 됩니다. 말씀이 약속거리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율법주의도 율법폐지도 아닌 것입니다. 율법을 붙들고 있지도 율법을 버리지도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이것을 정하고 이루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우리 약속입니다.
저는 이 말씀 가지고 글을 쓰고 하는 것이 참 감사합니다. 율법의 중보자 그리스도라는 제목과, 그리스도는 삶의 규범이고 살리는 규범이라는 부제로 논문을 출간했던 것이 참 감사합니다. 이것이 우리 장로교의 고급스러움입니다. 그래서 우리 장로교가 가장 삶이 있는 신학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잘 알고 누리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