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929][십자가지기교회 주일낮예배: 갈라디아서 강해(25): 그리스도의 복음] 율법을 이루신 그리스도를 믿음 (갈 3:21-22) 문병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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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 3:21)
그러면 율법이 하나님의 약속들과 반대되는 것이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만일 능히 살게 하는 율법을 주셨더라면 의가 반드시 율법으로 말미암았으리라
<녹취록>
1. 예수 그리스도로 믿음으로 말미암는 언약의 복
우리 주님이 이 땅에 오셔서 모든 죄값을 다 치르고 구원의 모든 의를 이루셨습니다. 우리의 생명을 사실 뿐 아니라 생활도 거룩하게 하십니다. 모든 죄값을 치르심으로 사망의 형벌에서 우리를 구하시며, 율법에 모두 순종하심으로써 그 의로 우리가 거룩한 성도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딤전 2:5). 지난 주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든 율법을 다 이루신 율법의 중보자라는 말씀을 보았습니다. 율법의 모든 의를 다 이루시고 그 의를 우리 것 삼아 주시며 그래서 이제는 우리가 율법에 얽매인 것이 아니라 율법을 즐거워하고 누리게 되는 은혜를 주셨습니다. 이것이 아브라함의 복을 누리고 언약을 이루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언약 가운데, 어떤 것이든, 주어집니다. 약속, 명령, 지시, 찌르심, 징계까지도 약속 가운데 그 말씀을 주십니다. 우리가 조건을 이루어서 약속이 온전해지는 것이 아니라 약속으로 인해 모든 것을 이루는, 그것을 성도의 견인, 끝까지 이루어가심이라고 합니다. 아브라함은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 여김을 받았습니다. 창세기 3장 1절에서 12절을 보면 하나님의 자녀 됨의 복, 땅의 복, 기업의 복이 나옵니다. 땅은 그저 토지가 아니라 우리가 이 땅에서 누리는 터를 말합니다. 우리를 복되다 하는 자는 하나님이 복되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저주하는 자를 하나님이 저주하신다는 말씀을 말한 것입니다.
2. 우리는 율법을 능히 지키지 못하므로 약속이 있어야 한다
본문은 율법과 하나님의 약속이 반대된 것이냐고 반문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21절의 후반부를 보면 "만일 능히 살게 하는 율법을 주셨더라면 의가 반드시 율법으로 말미암았으리라"라고 합니다. 즉, 율법이 능히 살게 하는 것이라면, 우리가 율법을 지켜서 살 수 있는 것이라면, 반드시 의가 율법으로 이루어졌을 것이라고 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율법을 주셨을 때 우리가 그것을 다 이루고 지킬 수 있다면 의가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그것을 할 수 없으므로 약속을 주신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이 있으면 약속이 필요 없는 것이냐?’라고 보면 되겠습니다. 이에 대한 답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율법으로 능히 살 수 없으므로 약속이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달리 말하면 언약 가운데 주어지는 약속이 끝내는 430년 후에 주어진 율법에 앞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오직 믿어서 구원에 이르는, 아브라함, 이삭, 야곱에게 주신 믿음의 구원의 씨앗을 통해 우리의 구원을 이루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작은 것 조차도 지킬 수 없습니다. 약속이 있어야 합니다. 율법이 있으면 약속이 필요 없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약속이 있으므로 율법이 주어진 것이라는 말입니다. 약속이 없으면 하나님 백성에게 법도 안 주십니다. 약속 없이 율법이 우리에게 주어지면 우리가 지킬 수 없으므로 명령은 저주가 됩니다. 그러나 믿기만 하면 되는 약속을 주심으로 율법의 명령이 복인데, 그 믿음의 대상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아브라함도 한 후손, 그리스도를 믿은 것입니다(갈 3:16).
3.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율법은 약속거리이다
율법으로 안되니 약속이 있어야 합니다. 약속거리로 율법을 주신 것입니다. 율법은 약속거리입니다. 율법은 혼을 내거나 애를 먹이러 준 것이 아닙니다. 약속 가운데 은혜를 베푸시는데 율법으로, 명령으로, 지시로 베푸십니다. "말씀에 맺혀 있는 복"이라는 표현을 자주 해 봅니다. 말씀을 멀리한 복이 없습니다. 세상의 기복주의와 다릅니다. 이것은 쇠하지 않는 복입니다. 천국에 가져가는 복이며 곧 상급입니다. 복과 상급이 그러므로 구분되지 않는데, 하나님이 말씀을 주시고, 그것에 순종할 때 복을 주시며, 그것이 상급이고 공로입니다. 그러므로 상급도 은혜입니다. 우리가 약속 안에 있으면 율법이 약속거리가 되는데, 그것은 지난 주 본 바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습니다. 이것을 본문이 다시 말합니다.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에 가두었으니"라고 하는 본문 22절의 말씀은 이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바로 나오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약속"입니다. 이것을 아는 것, 익숙해지는 것이 성도입니다. 단단한 것을 먹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단단한 것을 먹는 것은 내 자질이 뛰어나거나 능력이 생겨서가 아니라, 나는 전적 무능, 전적 부패하니, 순간 좌절이 올 수 있으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약속으로 나의 죄와 허물이 드러날지라도 그것을 절망거리가 아닌 약속거리로 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든 조건을, 율법을 다 이루셨기 때문입니다.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한평생 매여 종 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히 2:15). 한평생 죽음을 극복하려고 해도 죽는 순간 인간은 두려워합니다. 그것이 바로 죽음에 매여 종노릇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죽음의 머리인 마귀를 물리치심으로 그를 믿는 자들이 더이상 죽음에 종살이 하지 않는 것입니다. 죽음을 더이상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은 죽음 이후를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짐승도 소멸 앞에는 떱니다. 인간의 존재에 가장 두려운 것은 소멸입니다. 우리에게 죽음은 부활로 가는 중간상태입니다. 우리는 천국에 갑니다. 죽음이 있어야 부활이 있고 부인이 있어야 상급이 있습니다.
4. 말씀 앞에서 애통하며 은혜를 구하라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건하심으로 말미암아 들으심을 얻었느니라”(히 5:7). 예수님도 자기의 경건하심으로 말미암아 들으심을 얻었습니다. 예수님이 심한 통곡과 간구와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우리 성도들도 애통함과 우는 것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아들로 완전하신 분이 이 땅에 오셔서 죄와 허물은 없으셨으나 연약함은 가지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시장하시기도 하고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셨다고 하는 것입니다.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 가둡니다. 그럴 때 모든 것이 은혜가 됩니다. 우리가 말은 전적 은혜, 오직 은혜라고 하면서 우리에게 허물이 있다고 하면 싫어합니다. 그러나 믿음의 경건의 비밀을 사도 바울은 "내가 죄인 중의 괴수"라고 고백합니다. 이 때 긍휼과 은혜와 약속이 넘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죄인이라고 손들어야 합니다. 내가 죄인이라고 손들고 외쳐야 합니다. 내가 의인이라고 해서는 안됩니다. 내가 죄인들 중에 일등, 죄인 중에 첫 번째라고 해야 합니다. 그래야 예수님이 알아 주십니다. 환자가 건강하다고 하면 의사는 모른 척합니다. 죄 없다고 하면 예수님이 모른다고 하십니다. 내가 죄인 중의 첫 번째라고 하면 주님이 나를 첫 번째로 안아 주십니다. 죄가 있는 곳에 은혜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단단한 것을 먹는 것이요, 영적으로 철이 드는 것입니다. 나는 날마다 죽고 날마다 사는 것이 매일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려 함"인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내가 부득불 자랑할진대 내가 약한 것을 자랑하리라"(고후 11:30)라고 합니다. 애통이 앞서야 합니다. 상한 심령이 앞서야 합니다. 그 이후에 수양이 있습니다. 애통은 말씀 앞에서 내가 찢기는 것이요, 그리고 은혜를 구해야 합니다.
5. 말씀 가운데 하나님의 영광의 임재가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찌르는 말씀을 주시고 깨닫게 하실 때는 자녀가 되게 하시는 은혜를 바로 주십니다. 약속은 막연히 약속이 아니라 말씀과 성경 가운데 주어집니다. 금요예배 때 민수기 말씀에서 법궤를 앞세워 이스라엘 백성이 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법궤 안에는 구름의 빽빽한 하나님의 임재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의 임재가 가장 앞서며, 뒤이어 세 지파와 성막을 드는 사람, 다시 세 지파와 성물을 드는 사람, 나머지 여섯 지파가 따라갑니다. 이것이 스데반이 말하는 광야교회의 모습입니다. 바로 영광의 임재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구름기둥이 빽빽한 것, 그것이 평소에 성막 안에 있다가 떠올라 움직이면 따라가는 것입니다. 그 임재 가운데 하나님을 대면한 유일한 자는 모세입니다. 그런데 그 영광의 임재를 대면하는 것을 수종들던 사람이 있는데 바로 여호수아입니다. 그래서 눈의 아들 여호수아는 모세의 종입니다. 그러나 다음에 여호수아를 하나님이 지도자로 세우십니다. 영광의 임재, 즉 구름기둥, 불기둥이 움직이면 법궤도 움직입니다. 법궤는 언약궤입니다. 법궤 위에는 속죄소, 시은좌가 있습니다. 죄를 속하고 은혜를 베푸는 자리입니다. 그리고 성경에는 여호와가 백성을 만나는 자리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 위에 그룹이 찬양을 합니다. 세 가지입니다. 말씀과 은혜와 찬송입니다.
6. 신약시대는 약속이 있기에 말씀에 더 충실해야 한다
신약시대 말씀에서 우리는 이 질문을 합니다. 예수님이 땅에 오셔서 모든 율법을 완전케 하셨고(마 5:17), 율법의 마침이 되셨는데(롬 10:4), 그것은 율법을 폐함이 아닙니다. 오히려 구약 때보다 더 엄격하게 율법을 지킵니다. 살인하지 말라는 것뿐 아니라 마음으로 남을 미워하지 말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율법을 이루셨기 때문에, 그리고 그것을 은혜로 우리에게 모두 주셨으므로 이제 우리에게 명령하시는, 요구하시는 말씀도 더 큰 것입니다. 그래서 말씀에 더 충실해야 하는 것입니다. 제가 어릴 때 생각을 해 봤습니다. 어머니가 저에게 잘해 주신 것도 생각나지만, 어머니가 저에게 원하셨던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았습니다. 당시 동네에 거지가 있었는데 그가 올 때 어머니가 항상 바가지에 밥과 나물을 넣어서 주시곤 했는데, 그 주는 것을 저에게 시키셨습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그것이 심부름이지만 상급이었습니다. 착한 일을 시키신 것입니다. 요즘에도 그래서 누가 길을 묻거나, 길에서 아이가 넘어지면 최대한 살피는 것이 몸에 배였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더 요구하실수록 우리에게 더 복이 됩니다. 율법은 그리스도를 믿는 백성에게 약속거리입니다. 그 약속을 우리가 왜 내버립니까? 더 율법을 달라고 해야지요. 이제는 마음으로도 간음하지 말고 탐심 갖지 말라고 하십니다. 더 은혜가 넘치기 때문입니다. 우리 교회도 말씀으로 더욱 충실해야 한다고 생각해 보았습니다. 주일 성수에 대해 생각해 보았습니다. 이태원에 여섯 평 장소에 있을 때 교회에 간판도 못 걸고 하다가 이제 여기로 옮겨온 지 1년 반이 되었습니다. 주변에 감리교, 성결교가 있습니다. 우리 건물에 입주자도 교회 다니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주변에게 우리가 주일을 잘 지키는 것을 보이는 것도 의미 있다고 생각합니다. 형식주의는 아니지만 구약보다 오히려 더 열심히 따르고 말씀을 지켜야 복이 있습니다. 약속거리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뜻을 다해 율법에 계시된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주일에는 와서 음식을 사서 먹는 것 등은 줄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안식일에 하나님이 만나와 메추라기를 주신 것은 하나님이 온전히 은혜 주심을 보이기 위한 것입니다. 주일학교도 어릴 때부터 그렇게 가르치라는 것을 말했습니다. 형식주의는 아닙니다. 양이 물에 빠지면 건져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라도 더 근신하고 두렵고 떨리고 삼가면 그것이 약속거리가 된다는 말입니다. 우리 교회 찬송도 생각해 보았습니다. 이태원에 있을 때 복음성가를 부르면 안되는 거 아니냐고 사람들이 물을 때 오히려 더 부를 수 있다고 제가 말하기도 했었습니다. 그런데 복음성가에 보면 아무래도 넋두리가 많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문제가 아니라 찬송을 더 불러 봐야 하겠다는 것입니다. 찬송가 79장을 보면 1절은 창조요, 2절은 피조세계의 찬송입니다. 3절은 구원과 부활, 4절은 종말이 나옵니다. 370장도 그렇습니다. 1절은 고백입니다. 2절은 기도와 노래입니다. 3절은 임마누엘의 하나님, 동행하시는 하나님, 4절은 영원히 동행하시는 하나님, 종말에 대해 노래합니다. 그래서 이와 같이 찬송을 많이 부르고 찬송을 많이 알고, 그 이후에 어느 시점에 복음송도 불러 보자는 말을 교역자와 했습니다.
7. 결론: 주님을 의지하라
주님이 우리에게 약속을 주셨기 때문에 우리는 조금이라도 더 말씀에 매여 살려고 합니다. 그것은 속박이고 형식주의가 아닙니다. 모든 성경이 다 죄 아래 가둡니다. 이것이 맞습니다. 은혜가 없으면 모든 명령이 우리에게, 우리가 할 수 없으니 저주입니다. 그러나 성도들이 조금 단단한 것을 먹는다면, 율법이 모든 것을 죄 아래 가두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에게 약속을 주려 하심을 알아야 합니다. 제가 어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더 전하려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에 엄격할수록 열매가 더 맺힙니다. 뿌리가 움직이는 나무에는 열매가 맺히지 않습니다. 주일은 주의 것으로 더 엄격하게 나아갔으면 좋겠습니다. 더 여호와를 의지하면 좋겠습니다. 어제보다 오늘 더 여호와를 의지하는 것, 이것이 거룩이자 성화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어쨌든 한 가지는 해야 합니다. 작년보다 올해 더 의지해야 합니다. 다른 것, 내 성품과 능력은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러면 강도가 낙원을 못갑니다. 그러나 어제보다 오늘 더 잘 의지한다면, 그것이 성화이고 거룩입니다. 제가 학교에서 학생들에게 항상 '작년보다 올해 더 주님을 의지하느냐'고 묻습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신학교 입학 전보다 더 의지하는지 물어봅니다. 그러면 모두 애통해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어제보다 오늘 더 잠잠하고 더 찬양에 힘쓰십시오. 어린아이와 같이 말입니다. 찬양을 예전에 마스터했고 나는 이제 성경 진리를 연구하면 된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기도하면 성숙해지고 찬양하면 순수해집니다. 찬양하십시오. 기독교 역사에 하나님이 크게 쓰신 분들은 모두 순수했습니다. 기도하면 성숙해지고 찬양하면 순수해집니다. 본문이 바로 그 말씀입니다. 율법이 은혜와 반대되는 것이 아닙니다. 율법이 모든 것을 죄 아래 가둔다는 것은 교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즉시 나오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은 약속을 주려 하심이라는 것입니다. 약속은 건드리지 마십시오. 그대로 두고 우리를 쳐서 지켜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은혜가 있으니 조건이 약속이 되고 명령이 약속이 되고 율법이 약속이 되고 성경이 약속이 됩니다. 그러니 "주여 말씀하소서 종이 듣겠나이다" 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그것에는 약속된 은혜가 있습니다. 뭐든지 말씀하시라고 기도하십시오. 갈렙과 모세가 연로하지만 주님이 사용하셨습니다. 이것이 비밀이고, 우리 기독교이며, 기독교의 본질입니다. 칼빈은 3장 22절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주석했습니다. "이 문장은 최상의 위로로 가득하다. 이 절은 우리가 성경에서 정죄 받았음을 듣는 곳이면 어디든지 만일 우리 자신이 그에게로 나아가기만 하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제공되는 도움이 있음을 말해 준다." 어디든지 정죄 받았음을 듣는 곳에서 그리스도께 나아가기만 하면 그 말씀에 우리가 일시적으로 애통하기는 하나, 그 상한 심령이 복되다. 영적인 것은 찾아서 애통해야 합니다. 달음박질 하십시오. 그러나 내가 의인이라고 생각해서 그러지 말고 내가 죄인이라는 생각으로 달음박질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이 와락 안아 주십니다.
[20190929][십자가지기교회 주일낮예배: 갈라디아서 강해(25): 그리스도의 복음] 율법을 이루신 그리스도를 믿음 (갈 3:21-22) 문병호 목사
*음성파일: 게시물 하단 "관련링크"에서 청취 혹은 내려받기 가능합니다.
<녹취록>
1. 예수 그리스도로 믿음으로 말미암는 언약의 복
우리 주님이 이 땅에 오셔서 모든 죄값을 다 치르고 구원의 모든 의를 이루셨습니다. 우리의 생명을 사실 뿐 아니라 생활도 거룩하게 하십니다. 모든 죄값을 치르심으로 사망의 형벌에서 우리를 구하시며, 율법에 모두 순종하심으로써 그 의로 우리가 거룩한 성도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딤전 2:5). 지난 주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든 율법을 다 이루신 율법의 중보자라는 말씀을 보았습니다. 율법의 모든 의를 다 이루시고 그 의를 우리 것 삼아 주시며 그래서 이제는 우리가 율법에 얽매인 것이 아니라 율법을 즐거워하고 누리게 되는 은혜를 주셨습니다.
이것이 아브라함의 복을 누리고 언약을 이루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언약 가운데, 어떤 것이든, 주어집니다. 약속, 명령, 지시, 찌르심, 징계까지도 약속 가운데 그 말씀을 주십니다. 우리가 조건을 이루어서 약속이 온전해지는 것이 아니라 약속으로 인해 모든 것을 이루는, 그것을 성도의 견인, 끝까지 이루어가심이라고 합니다. 아브라함은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 여김을 받았습니다. 창세기 3장 1절에서 12절을 보면 하나님의 자녀 됨의 복, 땅의 복, 기업의 복이 나옵니다. 땅은 그저 토지가 아니라 우리가 이 땅에서 누리는 터를 말합니다. 우리를 복되다 하는 자는 하나님이 복되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저주하는 자를 하나님이 저주하신다는 말씀을 말한 것입니다.
2. 우리는 율법을 능히 지키지 못하므로 약속이 있어야 한다
본문은 율법과 하나님의 약속이 반대된 것이냐고 반문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21절의 후반부를 보면 "만일 능히 살게 하는 율법을 주셨더라면 의가 반드시 율법으로 말미암았으리라"라고 합니다. 즉, 율법이 능히 살게 하는 것이라면, 우리가 율법을 지켜서 살 수 있는 것이라면, 반드시 의가 율법으로 이루어졌을 것이라고 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율법을 주셨을 때 우리가 그것을 다 이루고 지킬 수 있다면 의가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그것을 할 수 없으므로 약속을 주신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이 있으면 약속이 필요 없는 것이냐?’라고 보면 되겠습니다. 이에 대한 답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율법으로 능히 살 수 없으므로 약속이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달리 말하면 언약 가운데 주어지는 약속이 끝내는 430년 후에 주어진 율법에 앞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오직 믿어서 구원에 이르는, 아브라함, 이삭, 야곱에게 주신 믿음의 구원의 씨앗을 통해 우리의 구원을 이루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작은 것 조차도 지킬 수 없습니다. 약속이 있어야 합니다. 율법이 있으면 약속이 필요 없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약속이 있으므로 율법이 주어진 것이라는 말입니다. 약속이 없으면 하나님 백성에게 법도 안 주십니다. 약속 없이 율법이 우리에게 주어지면 우리가 지킬 수 없으므로 명령은 저주가 됩니다. 그러나 믿기만 하면 되는 약속을 주심으로 율법의 명령이 복인데, 그 믿음의 대상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아브라함도 한 후손, 그리스도를 믿은 것입니다(갈 3:16).
3.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율법은 약속거리이다
율법으로 안되니 약속이 있어야 합니다. 약속거리로 율법을 주신 것입니다. 율법은 약속거리입니다. 율법은 혼을 내거나 애를 먹이러 준 것이 아닙니다. 약속 가운데 은혜를 베푸시는데 율법으로, 명령으로, 지시로 베푸십니다. "말씀에 맺혀 있는 복"이라는 표현을 자주 해 봅니다. 말씀을 멀리한 복이 없습니다. 세상의 기복주의와 다릅니다. 이것은 쇠하지 않는 복입니다. 천국에 가져가는 복이며 곧 상급입니다. 복과 상급이 그러므로 구분되지 않는데, 하나님이 말씀을 주시고, 그것에 순종할 때 복을 주시며, 그것이 상급이고 공로입니다. 그러므로 상급도 은혜입니다. 우리가 약속 안에 있으면 율법이 약속거리가 되는데, 그것은 지난 주 본 바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습니다.
이것을 본문이 다시 말합니다.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에 가두었으니"라고 하는 본문 22절의 말씀은 이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바로 나오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약속"입니다. 이것을 아는 것, 익숙해지는 것이 성도입니다. 단단한 것을 먹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단단한 것을 먹는 것은 내 자질이 뛰어나거나 능력이 생겨서가 아니라, 나는 전적 무능, 전적 부패하니, 순간 좌절이 올 수 있으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약속으로 나의 죄와 허물이 드러날지라도 그것을 절망거리가 아닌 약속거리로 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든 조건을, 율법을 다 이루셨기 때문입니다.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한평생 매여 종 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히 2:15). 한평생 죽음을 극복하려고 해도 죽는 순간 인간은 두려워합니다. 그것이 바로 죽음에 매여 종노릇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죽음의 머리인 마귀를 물리치심으로 그를 믿는 자들이 더이상 죽음에 종살이 하지 않는 것입니다. 죽음을 더이상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은 죽음 이후를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짐승도 소멸 앞에는 떱니다. 인간의 존재에 가장 두려운 것은 소멸입니다. 우리에게 죽음은 부활로 가는 중간상태입니다. 우리는 천국에 갑니다. 죽음이 있어야 부활이 있고 부인이 있어야 상급이 있습니다.
4. 말씀 앞에서 애통하며 은혜를 구하라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건하심으로 말미암아 들으심을 얻었느니라”(히 5:7). 예수님도 자기의 경건하심으로 말미암아 들으심을 얻었습니다. 예수님이 심한 통곡과 간구와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우리 성도들도 애통함과 우는 것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아들로 완전하신 분이 이 땅에 오셔서 죄와 허물은 없으셨으나 연약함은 가지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시장하시기도 하고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셨다고 하는 것입니다.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 가둡니다. 그럴 때 모든 것이 은혜가 됩니다. 우리가 말은 전적 은혜, 오직 은혜라고 하면서 우리에게 허물이 있다고 하면 싫어합니다. 그러나 믿음의 경건의 비밀을 사도 바울은 "내가 죄인 중의 괴수"라고 고백합니다. 이 때 긍휼과 은혜와 약속이 넘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죄인이라고 손들어야 합니다. 내가 죄인이라고 손들고 외쳐야 합니다. 내가 의인이라고 해서는 안됩니다. 내가 죄인들 중에 일등, 죄인 중에 첫 번째라고 해야 합니다. 그래야 예수님이 알아 주십니다. 환자가 건강하다고 하면 의사는 모른 척합니다. 죄 없다고 하면 예수님이 모른다고 하십니다. 내가 죄인 중의 첫 번째라고 하면 주님이 나를 첫 번째로 안아 주십니다. 죄가 있는 곳에 은혜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단단한 것을 먹는 것이요, 영적으로 철이 드는 것입니다. 나는 날마다 죽고 날마다 사는 것이 매일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려 함"인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내가 부득불 자랑할진대 내가 약한 것을 자랑하리라"(고후 11:30)라고 합니다. 애통이 앞서야 합니다. 상한 심령이 앞서야 합니다. 그 이후에 수양이 있습니다. 애통은 말씀 앞에서 내가 찢기는 것이요, 그리고 은혜를 구해야 합니다.
5. 말씀 가운데 하나님의 영광의 임재가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찌르는 말씀을 주시고 깨닫게 하실 때는 자녀가 되게 하시는 은혜를 바로 주십니다. 약속은 막연히 약속이 아니라 말씀과 성경 가운데 주어집니다. 금요예배 때 민수기 말씀에서 법궤를 앞세워 이스라엘 백성이 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법궤 안에는 구름의 빽빽한 하나님의 임재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의 임재가 가장 앞서며, 뒤이어 세 지파와 성막을 드는 사람, 다시 세 지파와 성물을 드는 사람, 나머지 여섯 지파가 따라갑니다. 이것이 스데반이 말하는 광야교회의 모습입니다. 바로 영광의 임재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구름기둥이 빽빽한 것, 그것이 평소에 성막 안에 있다가 떠올라 움직이면 따라가는 것입니다. 그 임재 가운데 하나님을 대면한 유일한 자는 모세입니다. 그런데 그 영광의 임재를 대면하는 것을 수종들던 사람이 있는데 바로 여호수아입니다. 그래서 눈의 아들 여호수아는 모세의 종입니다. 그러나 다음에 여호수아를 하나님이 지도자로 세우십니다. 영광의 임재, 즉 구름기둥, 불기둥이 움직이면 법궤도 움직입니다. 법궤는 언약궤입니다. 법궤 위에는 속죄소, 시은좌가 있습니다. 죄를 속하고 은혜를 베푸는 자리입니다. 그리고 성경에는 여호와가 백성을 만나는 자리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 위에 그룹이 찬양을 합니다. 세 가지입니다. 말씀과 은혜와 찬송입니다.
6. 신약시대는 약속이 있기에 말씀에 더 충실해야 한다
신약시대 말씀에서 우리는 이 질문을 합니다. 예수님이 땅에 오셔서 모든 율법을 완전케 하셨고(마 5:17), 율법의 마침이 되셨는데(롬 10:4), 그것은 율법을 폐함이 아닙니다. 오히려 구약 때보다 더 엄격하게 율법을 지킵니다. 살인하지 말라는 것뿐 아니라 마음으로 남을 미워하지 말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율법을 이루셨기 때문에, 그리고 그것을 은혜로 우리에게 모두 주셨으므로 이제 우리에게 명령하시는, 요구하시는 말씀도 더 큰 것입니다. 그래서 말씀에 더 충실해야 하는 것입니다.
제가 어릴 때 생각을 해 봤습니다. 어머니가 저에게 잘해 주신 것도 생각나지만, 어머니가 저에게 원하셨던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았습니다. 당시 동네에 거지가 있었는데 그가 올 때 어머니가 항상 바가지에 밥과 나물을 넣어서 주시곤 했는데, 그 주는 것을 저에게 시키셨습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그것이 심부름이지만 상급이었습니다. 착한 일을 시키신 것입니다. 요즘에도 그래서 누가 길을 묻거나, 길에서 아이가 넘어지면 최대한 살피는 것이 몸에 배였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더 요구하실수록 우리에게 더 복이 됩니다. 율법은 그리스도를 믿는 백성에게 약속거리입니다. 그 약속을 우리가 왜 내버립니까? 더 율법을 달라고 해야지요. 이제는 마음으로도 간음하지 말고 탐심 갖지 말라고 하십니다. 더 은혜가 넘치기 때문입니다. 우리 교회도 말씀으로 더욱 충실해야 한다고 생각해 보았습니다.
주일 성수에 대해 생각해 보았습니다. 이태원에 여섯 평 장소에 있을 때 교회에 간판도 못 걸고 하다가 이제 여기로 옮겨온 지 1년 반이 되었습니다. 주변에 감리교, 성결교가 있습니다. 우리 건물에 입주자도 교회 다니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주변에게 우리가 주일을 잘 지키는 것을 보이는 것도 의미 있다고 생각합니다. 형식주의는 아니지만 구약보다 오히려 더 열심히 따르고 말씀을 지켜야 복이 있습니다. 약속거리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뜻을 다해 율법에 계시된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주일에는 와서 음식을 사서 먹는 것 등은 줄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안식일에 하나님이 만나와 메추라기를 주신 것은 하나님이 온전히 은혜 주심을 보이기 위한 것입니다. 주일학교도 어릴 때부터 그렇게 가르치라는 것을 말했습니다. 형식주의는 아닙니다. 양이 물에 빠지면 건져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라도 더 근신하고 두렵고 떨리고 삼가면 그것이 약속거리가 된다는 말입니다.
우리 교회 찬송도 생각해 보았습니다. 이태원에 있을 때 복음성가를 부르면 안되는 거 아니냐고 사람들이 물을 때 오히려 더 부를 수 있다고 제가 말하기도 했었습니다. 그런데 복음성가에 보면 아무래도 넋두리가 많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문제가 아니라 찬송을 더 불러 봐야 하겠다는 것입니다. 찬송가 79장을 보면 1절은 창조요, 2절은 피조세계의 찬송입니다. 3절은 구원과 부활, 4절은 종말이 나옵니다. 370장도 그렇습니다. 1절은 고백입니다. 2절은 기도와 노래입니다. 3절은 임마누엘의 하나님, 동행하시는 하나님, 4절은 영원히 동행하시는 하나님, 종말에 대해 노래합니다. 그래서 이와 같이 찬송을 많이 부르고 찬송을 많이 알고, 그 이후에 어느 시점에 복음송도 불러 보자는 말을 교역자와 했습니다.
7. 결론: 주님을 의지하라
주님이 우리에게 약속을 주셨기 때문에 우리는 조금이라도 더 말씀에 매여 살려고 합니다. 그것은 속박이고 형식주의가 아닙니다. 모든 성경이 다 죄 아래 가둡니다. 이것이 맞습니다. 은혜가 없으면 모든 명령이 우리에게, 우리가 할 수 없으니 저주입니다. 그러나 성도들이 조금 단단한 것을 먹는다면, 율법이 모든 것을 죄 아래 가두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에게 약속을 주려 하심을 알아야 합니다. 제가 어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더 전하려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에 엄격할수록 열매가 더 맺힙니다. 뿌리가 움직이는 나무에는 열매가 맺히지 않습니다.
주일은 주의 것으로 더 엄격하게 나아갔으면 좋겠습니다. 더 여호와를 의지하면 좋겠습니다. 어제보다 오늘 더 여호와를 의지하는 것, 이것이 거룩이자 성화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어쨌든 한 가지는 해야 합니다. 작년보다 올해 더 의지해야 합니다. 다른 것, 내 성품과 능력은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러면 강도가 낙원을 못갑니다. 그러나 어제보다 오늘 더 잘 의지한다면, 그것이 성화이고 거룩입니다. 제가 학교에서 학생들에게 항상 '작년보다 올해 더 주님을 의지하느냐'고 묻습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신학교 입학 전보다 더 의지하는지 물어봅니다. 그러면 모두 애통해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어제보다 오늘 더 잠잠하고 더 찬양에 힘쓰십시오. 어린아이와 같이 말입니다. 찬양을 예전에 마스터했고 나는 이제 성경 진리를 연구하면 된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기도하면 성숙해지고 찬양하면 순수해집니다. 찬양하십시오. 기독교 역사에 하나님이 크게 쓰신 분들은 모두 순수했습니다. 기도하면 성숙해지고 찬양하면 순수해집니다. 본문이 바로 그 말씀입니다.
율법이 은혜와 반대되는 것이 아닙니다. 율법이 모든 것을 죄 아래 가둔다는 것은 교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즉시 나오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은 약속을 주려 하심이라는 것입니다.
약속은 건드리지 마십시오. 그대로 두고 우리를 쳐서 지켜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은혜가 있으니 조건이 약속이 되고 명령이 약속이 되고 율법이 약속이 되고 성경이 약속이 됩니다. 그러니 "주여 말씀하소서 종이 듣겠나이다" 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그것에는 약속된 은혜가 있습니다.
뭐든지 말씀하시라고 기도하십시오. 갈렙과 모세가 연로하지만 주님이 사용하셨습니다. 이것이 비밀이고, 우리 기독교이며, 기독교의 본질입니다.
칼빈은 3장 22절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주석했습니다.
"이 문장은 최상의 위로로 가득하다. 이 절은 우리가 성경에서 정죄 받았음을 듣는 곳이면 어디든지 만일 우리 자신이 그에게로 나아가기만 하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제공되는 도움이 있음을 말해 준다."
어디든지 정죄 받았음을 듣는 곳에서 그리스도께 나아가기만 하면 그 말씀에 우리가 일시적으로 애통하기는 하나, 그 상한 심령이 복되다. 영적인 것은 찾아서 애통해야 합니다. 달음박질 하십시오. 그러나 내가 의인이라고 생각해서 그러지 말고 내가 죄인이라는 생각으로 달음박질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이 와락 안아 주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