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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006][십자가지기교회 주일낮예배: 갈라디아서 강해(26): 그리스도의 복음] 율법의 초등교사 역할은 끝났음 (갈 3:23-25) 문병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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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006][십자가지기교회 주일낮예배: 갈라디아서 강해(26): 그리스도의 복음] 율법의 초등교사 역할은 끝났음 (갈 3:23-25) 문병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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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 3:23)○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는 율법 아래에 매인 바 되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
(갈 3:24)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초등교사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라
(갈 3:25)믿음이 온 후로는 우리가 초등교사 아래에 있지 아니하도다



<녹취록>



1. 그리스도 안에서 율법은 약속거리로서 폐지되지 않았다


본문에서 율법은 초등교사로 비유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25절은 우리가 그 아래에 있지 않다고 말합니다. 이 초등교사는 옛말로는 몽학선생입니다. 어린아이들을 가르치는 교사라는 의미입니다. 과연 율법이 폐지된 것인지에 대해서는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갈라디아서 말씀을 계속 보면서 율법은 아브라함의 언약 가운데 주신 것이요, 본질적으로 저주나 정죄가 아니라 의롭고 거룩하고 선하고 신령한 것으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 가운데 약속이 됨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자들에게 율법은 저주가 아니라 약속거리임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명한 명령이 은혜가 된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가정의 아이가 아니면 심부름을 시키지 않는데 그것을 시키니 자라 가며 그것이 상급이 되고 이 모든 것이 은혜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율법이 끝나고 복음이니 아멘이며 은혜라고 할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율법은 폐지된 것으로 바라볼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2. "율법 아래에 매인 바 되고"


1) 그리스도 없이는 율법에 맹목적으로 매일 뿐이다


우리가 알 듯 사도 바울은 율법에 능한 자였습니다. 그리고 율법에 흠이 없는 삶을 살았습니다. 베냐민 지파, 가말리엘 문파요 히브리인 중 히브리인이라고 했던 그였습니다. 바로 이 바울은 율법에 대한 열심히 특심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는 자들을 다 잔멸하여 집까지 들어가 남녀를 옥에 넘기고 다메섹까지 가서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데려오려 했습니다. 이렇게 한 것은 그가 율법에 특별한 열심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율법 지상주의자입니다. 율법을 잘 지키는 자라야 하나님의 택함 받은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후손이요, 율법을 지키지 않으면 흩어져 있어도 잡아들여야 한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리고 예수쟁이들이 그들 중 하나라고 바라본 것입니다. 그래서 이 사도 바울은 바로 다메섹까지 가서 그들을 잡아 예루살렘에 넘기려 하는 예루살렘 지상주의, 종교주의자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복음을 거스른 것입니다. 주님은 그를 다메섹 도상에서 홀연한 빛으로 만나 주셨습니다. 주님은 그에게 왜 나를 박해하느냐고 물으시고 그가 박해하는 것은 예수 자신이심을 알려 주십니다. 사실 바울은 예수님을 박해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는 자를 박해하는 것을 예수님을 박해한 것으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명민한 바울은 스스로 예수를 박해한 적이 없는데 왜 그렇게 말하는지 의아했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율법을 주야로 묵상한 율법의 전문가였으나 빛을 보지 못했습니다. 율법의 실체가 되는 빛 되신 로고스, 하나님의 말씀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는 평생 율법을 연구하고 가르치고 탐구했으나 정작 율법이 지시하고 율법이 기다리는 선지자, 메시야, 유일하신 대제사장을 만나지 못했습니다. 그는 가장 뛰어났으나 어부만 못했습니다.
어부 빌립은 모세가 율법에 기록했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를 만났다고 나다나엘에게 말합니다. 이것을 말한 어부 빌립에 바울이 미치지 못한 것입니다. 사마리아 여인도 비참한 삶을 살았으나 메시아를 만났다고 합니다. 바울은 열심과 지식은 있었으되 정작 생명의 부활의 주님을 만나지 못한 것입니다. —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 11:25-26);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요 1:4). 율법을 열심히 공부했으나 생명의 빛을 만나지 못한 것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어떻게 해야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인지 물을 때 하나님이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라고 답하셨습니다. 이렇게 보면 바울은 엉뚱한 일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를 박해하고 영원한 생명과 부활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극히 박해했습니다. 제사에 충실하고 절기를 어김없이 지키고 언약을 붙들고 있었으나 정작 그것을 다 이루신, 제사와 언약의 실체를 드러내고 절기 때마다 바라보는 실체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가 오셨음에도 그를 영접하지 못한 것입니다. 이런 사도 바울의 모습이 본문 23절, 율법 아래에 매인 바 된 것입니다. 우리는 은혜 아래에 매인 바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나기 전 사도 바울의 모습은 지난 주 본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에 가두었으니"의 상태입니다. 바울은 율법을 마지막 목적지로 생각했습니다. 모든 율법을 지켜 구원에 이른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것이 율법에 매이는 것입니다.


2)  그리스도 없이는 율법에서 죄를 볼 뿐이다


—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갈 2:16);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롬 3:20). 하나 지키려면 하나의 죄가 보이는 것입니다. 아무도 율법을 지킬 수 없습니다. 율법의 행위로는 율법에 대해 무능하고 부패한 우리 모습만 발견합니다. 율법으로 구원에 이르고자 하면 나의 죄성과 부패만을 발견하고 아무 의와 영광과 공로가 없습니다. 종교개혁자 루터도 말씀을 깨닫기 전에는 율법 아래에 매인 바 된 상태였습니다. 몸부림을 치고 로마 베드로 성당에 순례를 가서 무릎이 터지도록 계단을 기어다녀도 시원치 않아 결국은 당대 최고의 어거스틴 수도원에 들어갑니다. 누구보다 열심히 금식하고 했으나 훗날 한 말이 ‘나는 그 수도원에서 육체도 망치고 영혼도 망쳤다’고 했습니다. 율법 아래에서 허덕이는 모습인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전의 바울의 모습이 바로 이것입니다.



3. 율법의 목적지인 그리스도를 믿으라


1) 믿음의 대상이신 그리스도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에 있나니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모든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갈 3:10). 그러므로 우리는 율법을 지켜 구원에 이를 자 없고, 그것을 본질과 목적으로 삼는 자는 저주 아래 있습니다. ‘떨어지고 멀어지는 것’인 저주의 반대는 하나님을 찾는 것입니다. 성령의 약속이 우리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게 되는 것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습니다. — “주 예수를 믿으라,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신 예수를 바라보라”(히 12:2). 우리에게 믿음을 주시고 또 그래서 우리는 그를 믿고 주라고 부릅니다. 온전케 하시는 것은 율법이 아닙니다. 예수입니다. 이것이 히브리서의 기록 목적입니다. 히브리서 11장까지는 구약의 인물도 믿음으로 의에 이름을 말하고 12장부터는 믿음의 주인 그리스도를 바라보자고 합니다.


2) 믿음의 내용: 율법을 다 이루신 그리스도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단지 그의 어떤 모양이나 풍채, 됨됨이뿐 아니라 그가 모든 율법을 다 이루시고 그리고 율법을 어긴 죄값을 치르신 것을 믿는 것입니다. 죄값도 다 치르시고 모든 율법을 순종하는 그것을 우리를 위하여 이루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모든 법을 이루심을 믿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모든 값을 치러서 나를 사주신 신랑, 보아스이심을 믿는 것입니다. 기업을 무르고 값을 치르고 우리를 사신 것입니다. 우리는 룻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그가 율법을 다 이루신 것을 믿는 것입니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마 5:17);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롬 10:4).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율법이 이루어졌고 율법의 죄값이 다 치루어짐을 믿는 것입니다.


3) 믿음의 결과: 완전한 죄 사함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율법에 모든 매인 것이 풀리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는데 아직 율법을 지켜야 하는 것은 없습니다. 율법의 죄값을 덜 치렀고 더 이루어야 한다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아담 이후 율법을 어긴 원죄와 우리 평생의 자범죄의 죄값을 치루신 것이요, 우리를 위해 모든 의를 이루신 것을 믿는 것입니다. —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롬 3:22);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롬 3:24).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그 의, 율법 외의 또 다른 의는 율법과 선지자들의 증거를 받은 것이라는 말입니다.


4) 구약은 그리스도를 바라보기에 유대주의와 다르다


사도 바울이 그렇게 율법을 암송하고 했으나 잘못된 율법관을 가진 것인데 그것이 바로 유대주의입니다. 유대주의는 구약이 아닙니다. 구약은 분명히 오실 예수를 지시합니다. 그래서 구약을 바로 읽으면 메시아를 기다립니다. 유대주의, 종교주의에 빠져 있던 바울은 빌립만도 못한 것입니다. 메시아 사상은 오히려 종교주의자가 아닌 일반 유대 백성들이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리새인, 사기관, 율법사들보다 먼저 예수님의 말씀에 '아멘' 한 자들은 평범한 자들입니다. 그들은 메시아가 오실 것을 믿었습니다. 그것이 기록된 것이 율법입니다. 어찌하여 메시아를 기다리는가, 왜 모압 족속인 룻이 보아스를 만났는가? 율법의 흠이 없는 자가 메시아를 기다리겠습니까? 사도 바울처럼 율법에 흠이 없는 자가 메시아를 기다릴까요? 바로 율법을 목적으로 삼고 그것으로 구원에 이르고자 하는 것입니다. 오히려 구약의 믿음을 밀어내고 탈무드니 하여 행위주의, 율법주의를 만든 것이 유대주의입니다. 유대주의는 구약이 아닙니다.



4. 율법은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초등교사이다


1) 율법으로 죄를 깨달아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어서 율법으로 죄를 깨닫는다


23-24절은 우리가 계시된 믿음의 때까지 율법 아래, 곧 저주 아래에 있는데, 그 율법이 우리를 또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초등교사가 됐다고 말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과연 그렇습니까?
믿음이 계시되면, 그때,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한다고 읽어야 합니다. 즉, 믿음이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한다고 읽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24절 후반부입니다 —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라.” 믿음이 있기 전에는 율법이 우리를 율법 아래 두게 합니다. 그러나 믿음이 임하면 은혜 아래 죄를 깨닫게 합니다. 먼저 율법으로 죄를 깨닫고 믿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믿음이 들어와야 죄를 깨닫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때서야 비로소 율법이 죄를 깨닫게 하는데 그것이 바로 초등교사입니다. 믿지 않는 자에게는 율법이 율법이 아닙니다. 율법이 우리 안에 초등교사로 작용하는 것은 이미 믿음의 선물을 받아 예수 그리스도를 구원주로 고백하는 동시에 회개가 일어날 때라는 것입니다. 죄가 없이는 예수를 믿을 필요가 없는 것이요, 율법으로 죄를 깨닫는다는 것은 예수가 죄값을 가져갔음을 아는 것입니다.


2) 그리스도인에게 은혜 없는 죄는 없다


내 죄가 많다고 회개하는 것은 우리 안에 이미 은혜가 역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율법으로 말미암아 죄를 깨닫고 율법의 저주 아래 있는 것이 아브라함의 언약 아래 있는 백성에게 즉시 은혜와 함께 나타납니다. 그래서 모든 죄에는 은혜가 있습니다. 은혜가 없는 죄의식은 사탄이 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죄인임을 고백하고 회개하는 것은 은혜의 영역입니다. 저주의 영역이 아닙니다. 초등교사라고 하는 것이 바로 그 때 우리에게 작용하는 것입니다. 순간 우리에게 저주이지만 이 저주는 영원한 저주가 아니라 그 순간 이미 은혜 가운데 있는 저주입니다. 모든 성경이 우리를 죄 아래 가두는데 순간 저주로 보이는 것이 우리를 바로 은혜로 이끕니다. 죄가 없는 은혜가 없습니다. 이제는 회개 다 했으니 죄 없는 은혜를 누리자는 것은 없습니다. 죄 사함이 은혜이기 때문입니다.


3) 그리스도인에게 은혜 없는 율법은 없다


율법도 그렇습니다. 율법을 지키는 것이 은혜입니다. 은혜는 그저 유람 다니고 구름같이 떠다니는 것이 아닙니다. 은혜는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것을 몰랐습니다. 율법은 율법이고, 메시아는 메시아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율법을 완성해서 메시아를 우리 쪽에서 불러들이듯 생각한 것입니다. 이 사람이야말로 진정 율법 아래에 매이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율법을 다 지켰으니 이제 오소서'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우리는 아무 준비하는 것이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가장 패역했을 때가 예수님이 오신 때입니다. 제사장도 부패하고 민족도 혼족되어 지파의 구분도 없던 때입니다. 그리고 에돔 족속인 헤롯이 왕이 되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혼탁하고 죄가 많은 시대에 오신 것이지, '이 시대는 죄가 없으니 예수님 오소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4) 그리스도 안에서 율법은 폐지된 것이 아니라 은혜를 힘입어 적극적으로 실천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23절부터 잘 알아야 합니다. 먼저 죄가 있고 믿음이 있고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가 역사하는 순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직 믿음으로 은혜 받으면 그순간 죄 사함을 받고 일시적으로 죄가 우리를 정죄하지만 그 정죄하는 율법이 우리의 약속거리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회개한다는 것이 바로 은혜입니다. 은혜 없으면 죄를 깨닫지 못합니다. 예수를 만나기 전에 죄에 대한 의식이 컸는데 이제 예수 만나서 죄에 대한 것이 다 풀렸다는 것은 거짓말입니다. 예수 만나니 죄가 보이고 콧물 눈물 흘리며 회개하고 가슴치는 것입니다. 예수 만나니 죄가 보여서 다메섹에서 바울이 죄인 중에 괴수라 고백한 것입니다. 죄를 고백하고 준비돼서 예수를 만나는 것이 아닙니다. 의사는 환자를 낫게 하기 위해 있고 예수님은 죄인을 고치기 위해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율법에 대한 위반의 모든 죄의 삯을 치르시고 모든 의를 이루셔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25절, "믿음이 온 후로는 우리가 초등교사 아래에 있지 아니하도다"를 율법이 폐지된 것으로 보면 안 됩니다. 어린아이 때 수건을 가슴에 달고 다닙니다. 코를 닦기 위한 것입니다. 그런데 어른이 되면 이것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눈물이고 땀을 닦기 위해 주머니에 가지고 다닙니다. 중요한 것은 초등교사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제는 율법이 보다 성숙하게 완전하게 작용하는 것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율법이 옛날에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만 작용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원수를 사랑하고 오리 가자면 십리 가는 것으로 작용합니다. 문제는 율법이 없어진 것이 아니라, 남을 죽이지 말라는 6계명이 남을 내 몸처럼 사랑하라는 것으로 바뀐 것입니다. 이것이 초등교사 아래에 있지 않다는 의미입니다. 율법이 폐지된 것이 아니라 제대로 된 의미로 성숙하게 작용하는 것입니다. 율법을 다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입니다. 명령이 있으면 약속이 있고 진리가 있으면 은혜가 있습니다. 우리는 포도원에 일찍 간 것을 부담스럽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조금이라도 일찍 부르시면 조금이라도 더 많은 은혜를 주시니 말입니다. 그것이 바로 초등교사의 수준을 벗어나는 신약시대 성도입니다. 그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내 것으로 삼아서 다 이루신 예수가 율법을 어긴 죄값을 치르고 또 율법을 다 이루신 것, 당하신 순종, 행하신 순종을 믿는 것입니다. 살아남도 살아감도, 생명도 생활도 은혜임을 믿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본문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다음 주에 볼 26-27절에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입니다. —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갈 3:26-27). 그리스도의 의가 내 것이 되니 이제 그리스도의 유업을 얻을 자가 된 것입니다. 이 유업은 바로 자녀이면 상속자니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해 고난도 받게 되는 것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예수 안에서 고난은 이제 우리에게 그러므로 즐거운 것이 됩니다.



5. 결론: 그리스도 안에서 율법은 초등교사일 뿐만 아니라 적극적 삶의 규범이다


다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의 의가 있으므로 이제는 내 죄와 연약함 무능이 선뜻 느껴져도 은혜가 이김을 아는 것입니다. 은혜 없는 죄 없고 죄 없는 은혜 없습니다. 그것이 바로 은혜 받는 비결입니다. 그래서 내가 죄인 중의 괴수라고 하면서 나서는 자는 사도 바울과 같이 큰 은혜를 받습니다. 의롭다 하면 은혜가 없습니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 없습니다. 은혜가 이미 임하고 율법의 작용으로 회개합니다. 회개 없는 구원이 없다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그러므로 죄를 깨닫는 순간 율법이 정죄로 작용하지만 즉시 그리스도를 믿는 이유는 바로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께 인도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스데반을 죽이는 데 가장 큰 책임이 있습니다. 그런데 다메섹 도상에서 회개를 합니다. 그러면 살인하지 말라는 말씀이 이미 끝난 것인가요? 살인하지 말라는 말씀을 이제 다른 사람을 구하는 일로 이어집니다. 그래서 남을 죽였던 죄가 사함을 받으면 그대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남을 살리러 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정죄거리가 약속거리가 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내가 죄를 지었다고 하면 심리적으로 힘들어하거나 잘못된 생각을 가집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는 회개하고, 그 회개의 법이 제대로 역사해서 초등교사 정도가 아니라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으로 완성되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생명을 얻는 단계에서, 즉 칭의 단계에서의 죄를 깨닫게 하던 율법이 성화 단계에서 부요하게 우리에게 역사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남을 죽였던 자가 이제 남을 살리러 나서는 것입니다. 그래서 유대인에게나 헬라인에게나 빚진 자라는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이제 율법을 초등교사로만 여기는 것이 아니라 율법을 누리고 더 적극적으로 지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가 그렇게 되 보자고 말해 본 것입니다. 더 율법을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초등교사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훨씬 더한 교사로 율법이 작용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많은 경우 이 구절이 정반대로 해석되고 있으니 안타까울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