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630][십자가지기교회 주일낮예배: 갈라디아서 강해(12): 그리스도의 복음] 율법에 죽고 하나님에 대해 살아남 (갈 2:17-19) 문병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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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 2:17)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되려 하다가 죄인으로 드러나면 그리스도께서 죄를 짓게 하는 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갈 2:18)
만일 내가 헐었던 것을 다시 세우면 내가 나를 범법한 자로 만드는 것이라
(갈 2:19)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에 대하여 살려 함이라
<녹취록>
1. 구원받은 성도의 삶: 견인과 실족
하나님은 모든 일에 있어 변화가 없으십니다. 창조도 우리의 구원도 그렇습니다.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이 생명을 살리시는 것입니다. 살리셔서 살게 하시는, 시작과 끝이요, 알파와 오메가이신 하나님의 불변 영원하신 특성이 우리에게도 적용되는 것입니다. 성도는 생명을 한번 받으면 보호됩니다. 부모가 자녀를 낳기만 하지 않습니다. 낳으면 길러서 성장하도록 돕고 독립하도록 돕습니다. 간혹 자녀를 내팽개치는 것 같아도 그것은 훈련받고 자라가도록 하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성도의 삶에 대해 우리는 크게 두 단어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 견인입니다. 차를 끌어가는 것이 견인이라는 단어로 쓰이기도 합니다. 여기서 쓰이는 견인은 하나님이 끌고 가신다는 의미도 되지만 우리가 인내하면서 참는다는 의미도 있습니다. 즉, 포괄적인 개념으로 한번 구원한 백성을 하나님이 끝까지 책임지십니다. 하나님이 한번 믿음을 주시면 그것을 지키도록 하시고, 한번 생명을 주시면 그 가운데 살게 하십니다. 그래서 한번 인침을 받은 백성은 하나님의 새 하늘과 새 땅의 백성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로 살도록 지시받는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둘째, 실족입니다. 실족은 발을 헛디디거나 다른 길로 벗어난다고 쓰일 수 있습니다. 성경은 실족하게 하는 것이 없지는 않다고 말씀합니다. 지난 주에도 우리는 뭔가에 대해 실족했습니다. 우리의 행위나 마음이나 정서나 말입니다. 이 실족이라는 말은 성경에서는 걸려 넘어지는 것, 올바르지 못한 것에 넘어지는 것, 혹은 범죄를 범하는 것으로 쓰입니다. 이처럼 견인이라는 말과 실족이라는 말이 공존하는 것이 이 땅에서 우리의 삶입니다. 끝까지 끌고 가시는데 우리가 가끔 한번씩 넘어지는 것입니다. 이 두 단어는 서로 배척되는 것이 아니라 공존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견인을 믿으면 실족을 조심해야 하고 실족하면 견인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를 다시 일으켜 세우는 힘은 여호와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내가 넘어질 때 나를 인정하면 못 일어납니다. 그러나 여호와를 인정하면, 즉 하나님의 견인으로는 가능합니다. 택정한 자를 부르시고, 부르신 자를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한 자를 영화롭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믿습니다. 살아감과 살아남, 생명과 생활이 모두 은혜라는 것을 우리는 자주 고백합니다. 우리를 살리시면 끝까지 보호하십니다.
2. 은혜와 구원에 관한 질문
1) 두 가지 질문
두 가지 질문이 있습니다. 첫 번째 질문, 전적인 은혜로 거듭난 사람이 실족한다고 해서 과연 구원에서 떨어지느냐는 것입니다. 누가 봐도 크게 실족한 자가 과연 구원받은 백성인데 구원에서 떨어질 수 있나요? 답은 '아니요'입니다. 은혜로 구원받은 자는 실족하되 은혜를 떠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된 자는 실족케 하는 것이 없지 않으나, 걸려 넘어지는 것이 없지 않으나 하나님의 자녀에서 영 떨어지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아닌 자는 처음부터 구원받은 자가 아닙니다. 은혜의 빛을 받은 듯 하나 옥토에 떨어진 씨앗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두 번째 질문, 하나님의 거듭난 백성는 이제 거듭났으니 다시 율법을 다 지켜 구원에 이르게 하시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왜 저렇게 행동하는지, 스스로에 대해 한심하게 생각할 수도 있는 현실에서 그러면 우리가 모든 법을 다 지켜서 구원에 이르느냐는 것입니다. 답은, '이것에 대해도 아니요'입니다. 모든 하나님의 율법을 다 지켜서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본문은 바로 이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되려 다가 죄인으로 드러난다고 합니다.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는다고 지난 주 설교에 세 번이나 나왔습니다. 갈라디아서에서 가장 중요한 2장 16절의 말씀입니다.
2) 은혜가 죄를 짓게 하는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으로써 의롭게 되었는데, 살다가 죄를 짓는 우리로 인해 예수 그리스도가 죄를 짓게 하는 분이냐는 것입니다.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를 높이 세워놓고 쿵 넘어지는 것을 보려고 우리를 구원하셨겠냐는 것입니다. 괜히 높이 올려놓고 알아서 하라고 하고 떨어져서 크게 다치게 한다고 세상은 질문할 수 있습니다. 17절의 질문도 쉽게 풀어보면 바로 이것입니다. 모를 때는 오히려 수월한데 알고 보니 더 힘든 것이 있을 수 있습니다.
3. 은혜의 능력
1) 은혜는 죄를 분별케 하고 싫어하게 한다
분명히 거룩하게, 선하게 살아야 하는 것을 알게 되었는데, 오히려 더 크게 떨어져 실족하더라, 그러니 예수 그리스도가 더 큰 죄를 짓게 한 것이냐, 결코 그럴 수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 내용은 로마서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롬 6:2). 항상 우리가 그런 질문을 던질 수 있습니다. 은혜라고 하면 이제 죄 가운데 막 살겠다고 말입니다.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은혜는 죄가 추악하다는 것을 보여 주면서 나타납니다. 은혜는 죄를 좋다고 인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은혜를 안 받으면 그렇습니다. 그러나 은혜를 받으면 죄가 싫어집니다. 그러므로 은혜를 받았으니 막 살자고 하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은혜를 못 받았으니 막 사는 것입니다. 은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죄 사함 받는 구원입니다. 처음으로 주 안에서 영적으로 옳고 그름을 구별하는 심령이 생기게 하는 것이 죄 사함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죄를 지을 수 없습니다. 아마 어떤 것은 오래 숙성되면 맛있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감은 오래 달아 놓으면 곶감이 됩니다. 그러나 참외를 오래 냉장고에 넣어 두면 물러서 먹지 못하게 됩니다. 그러면 그것을 먹겠냐 말입니다. 한 번 냉장고를 꺼내 봤습니다. 감을 넣어 놓고 참외를 넣어 놨는데 감은 홍시가 되고 참외는 상해 버렸습니다. 그러면 홍시는 먹고 참외는 버립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그 분별력을 주시는 것이 바로 은혜입니다. 은혜가 임하면 가까이 하지 말아야 할 것을 멀리하게 됩니다. 그 좋았던 죄와 환락과 밤의 조명이 싫어집니다. 하나님이 주신 생명의 빛만 좋아집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입니다. 이것을 갈라디아 교인이 자꾸 묻는 것입니다. 오직 은혜면 마음대로 살아도 되겠느냐고 말입니다. 그런데 그것에 대해 그럴 수 없느니라고 대답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어떻게 보면 힘듭니다. 우리는 세상이냐 하나님이냐, 딱 결정을 해야 합니다. 바알과 여호와 중 결정을 해야 합니다. 중간에 미지근한 건 힘듭니다. 이것은 오래 둔 참외를 먹으면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미련을 가지는 것입니다. 차라리 아예 모르면 괜찮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분별력을 주십니다. 그러므로 결코 그럴 수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아멘" 해야 합니다.
2) 가장 은혜 받을 때 윤리적이게 된다
그러므로 가장 은혜 받을 때 가장 윤리적입니다. 전적인 은혜가 역사해야 가장 윤리적이 됩니다. 아무리 세상적으로 열심히 산다고 해도 윤리가 될 수 없습니다. 이것은 남에게 인정받는 것으로 결국 이기적인 것입니다. 우리는 날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을 받아 즐겁게 삽니다. 우리는 더 큰 짐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으므로, 그 믿음이 우리 안에 들어오면 성령으로 시작했다가 육체로 마치는 것이 아닙니다.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갈 3:3). 삶을 이야기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교회 설교에서 윤리는 '주의'가 되면 안 된다고 했습니다. 윤리주의가 아닌 복음입니다. 복음이니 무조건적 은혜, 전적인 감사이고, 그러면 우리의 삶에 윤리는 없고 은혜이면 되냐,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내 삶이 온전치 않으면 은혜가 떨어졌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은혜 따로, 삶 따로가 아닙니다. 충만한 감사와 기쁨, 전적인 하나님 앞에서의 감사, 쉬지 않고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하는 성도 됨이 있으면 법이 부담되거나 무섭지 않고 즐겁고 좋아집니다. 믿음으로 시작해서 생명공동체이니 뭐니 하다가 이제 거듭남 이야기는 그만하고 어떻게 살아 갈지를 말해 보자, 이제는 삶을 얘기해 보자라고 하곤 합니다. 그래서 모여서 격조 있는 삶, 문화적인 삶도 이야기해 보고 합니다. 그런 유수한 교회도 많이 생겼습니다. 격이 있는 교회, 젊은이와 호흡하는 교회 등 많이 생겼습니다. 그러나 은혜는 통달했으니 이제는 삶이다라고 하면, 그 순간 삶이 없어집니다. 삶만 바라보면 성도들은 실족합니다. 다시금 하나님 앞에 온전하게 되고 힘을 얻게 되는 것은 삶에서 삶으로가 아닌, 성령에서 성령으로, 은혜에서 은혜로 나아갈 때입니다. 그때 기쁘고 힘이 있는 것입니다.
3) 은혜 없이 내가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교만을 버리라
저는 설교 노트에 '하나님은 게으른 것보다 교만한 것을 싫어하신다'라고 조심스럽게 적어 봤습니다. 교만하게 부지런한 것을 싫어하신다는 것입니다. 겸손하게 게으른 것이 낫다는 말입니다. 윤리적으로 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은 사람이 나서는 것을 싫어하십니다. 은혜로 나아갈 때 내 삶을 받아 주십니다. 바벨탑이 그렇습니다. 다윗이 전쟁을 마치고 인구 계산을 할 때 더 큰 징벌을 내리십니다. 다윗이 밧세바를 범했을 때보다 국가적으로 보면 하나님이 더 싫어하시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은혜로 시작했다가 육체로 마치는 것입니다. 다윗이 물맷돌로 골리앗 앞에 설 때는 내 것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합니다. 그러나 연전연승하여 교만해지면 안 보이던 것이 보입니다. 밧세바가 보이고, 내 공로로 인구를 헤아리는 것이 보입니다. 그저 겸손해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도 하나님이 싫어하실 때는 홍해와 여리고를 건널 때는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좋아했습니다. 그러나 아이성을 공략할 때는 하나님이 싫어하셨습니다. 여리고를 무너뜨려보니 우리가 돌기만 하면 된다는 것 자체가 공로가 된 것입니다. 예배도 기도도 믿음도 공로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공로입니다. 믿음은 내 공로 아닙니다. 믿음이 좋아서, 기도 많이 해서 무언가 됐다고 여기면 안됩니다. 하나님이 하신 것입니다. 기도는 물론 합니다. 그러나 기도는 하나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볼 때 열심히 나서는 것은 윤리적이고 아주 좋을 수 있습니다. 삼백 데나리온을 왜 낭비하냐, 왜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붓느냐, 그것을 가지고 가난한 자를 도우면 좋았으리라고 한 것은 은혜의 질서를 모르는 것입니다. 예배를 왜 드리냐, 그 시간에 구제하는 것이 낫다고 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궁극적으로 구제는 하나님이 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예배의 존재입니다. 결론은 교만을 버려야 합니다.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시는 것은 교만한 부지런함입니다. 사울도 그랬습니다. 사무엘이 안 오니 스스로 제사장을 했습니다. 부지런합니다. 깨어 있고 예배가 중요한 것을 압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싫어하십니다. 아예 모르는 것보다 위험한 것이 절반만 알고 내가 나서는 것입니다. 그것이 성령으로 시작했다가 육체로 마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바라보고 시작했다가 지상의 것을 보고 마치는 것을 경계하는 것이 갈라디아서의 주제입니다. 우리는 은혜 위에 은혜, 믿음에서 믿음으로, 성령에서 성령으로를 계속 봤습니다. 성도로서 자격을 갖추었으니 이제 내가 살아야 한다, 성령에서 육체로 마치는 것, 이것을 가장 많이 하는 곳이 성당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은혜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4)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은 교만이 아니라 겸손이다
여호와가 기뻐하시는 것은 제물, 회향과 근채와 박하가 아닙니다. 상한 심령과 통회하는 심령을 기뻐하십니다. 욥기에는 사람들이 나를 낮추거든 사람들을 욕하지 말고 교만했으니 하나님이 낮추는 것이라 생각하라고 말씀합니다. "사람들이 너를 낮추거든 너는 교만했노라고 말하라 하나님은 겸손한 자를 구원하시리라"(욥 22:29). 이 말씀이 이번 주 제 삶에 귀하게 다가왔습니다. 사람들이 나를 낮추거든 그 일로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우리 주변에 일어나는 일, 내 직장의 모든 일을 틈타 하나님과 나 사이의 문제로 삼아야 합니다. 그 사람하고만 관계를 삼으면 세속적이게 됩니다. 사람들이 나를 짓밟을 때 하나님이 나의 교만을 꾸짖으려고 하신다고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저도 이번 주 조그마한 상처가 있었습니다. 그분들이 저를 상처 입히려는 것보다 제가 스스로 입은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내가 교만하니 그분들을 통해 하나님이 나를 낮추시는 것이라는 깨달음이 있었습니다. 학교에서 세미나도, 이 건물의 입주자 모임에서도 많이 힘들었는데, 이 말씀을 읽으면서 저의 교만을 하나님이 견책하신다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주를 찾는 모든 자들이 주로 말미암아 기뻐하고 즐거워하게 하시며 주의 구원을 사랑하는 자들이 항상 말하기를 하나님은 위대하시다 하게 하소서 나는 가난하고 궁핍하오니 하나님이여 속히 내게 임하소서 주는 나의 도움이시요 나를 건지시는 이시오니 여호와여 지체하지 마소서”(시 70:4-5). 우리가 영적으로 힘든 것은 은혜를 떠났기 때문입니다. 내가 잘났다고 하니 힘든 것입니다. 내가 옳다고 하니 힘든 것입니다. 스스로 실족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알아야 성도입니다. 저 사람으로 인해 실족했다고 하면 안됩니다. 그것은 이미 내가 온전치 않은 것이요 하나님 앞에 돌이켜야 합니다.
5) 은혜는 처음 행위를 가지게 한다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계 2:5). 세상은 이렇게 얘기하지 않습니다. 세상은 처음엔 낮았다가 점점 높아져 성숙해지는 것을 얘기합니다. 그러나 성도는 하나님이 전적 은혜를 베푸시는 것이므로 처음을 기억하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도 종 되었던 애굽 땅에서 구원해 내신 여호와라고 십계명을 주시면서 말씀하십니다. 어디서부터 떨어졌는지 알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져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모두 처음 행위가 있습니다. 저는 신학교 들어가기 전에 기도원에서 그랬던 것 같습니다. 기도하러 앉으면 눈물이 납니다. 가평 기도원에서 메뚜기도 이리저리 갈 곳이 있는데 나는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눈물만 났습니다. 그런데 신학교 들어와서 노련해지고 교수도 되다 보니 그것을 잊습니다. 하나님은 항상 처음 행위를, 우리가 무엇을 거창하게 하는 것보다 본질을 중요하게 여기십니다. 오늘 새벽예배 말씀에도 우리의 마음을 인도하셔서 그리스도의 인내와 하나님의 사랑에 이르게 하시라는 것을 알리십니다. 요한계시록에서도 처음 사랑을 알라고 합니다. “누구든지 어린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사람은”(막 10:15). 여기서 받든다는 말은 인정한다는 의미입니다. 어린아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으니 부모를 의지합니다. 그렇지 않는 자는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우리는 모두 이래야 합니다. 어디서 멀어졌는지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내가 잘나고 연단해서가 아니라 나를 불러주시고 자녀 삼아주신 그 순수한 사랑에서 얼마나 멀어져 있는지를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때나 지금이나 은혜에서 은혜로 믿음에서 믿음으로 성령에서 성령으로 가는 것입니다. 다시 율법주의, 공로주의, 자기 사랑, 자기 인정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전적 은혜로 오직 여호와만을 인정하고 새 것이 되어 십자가의 그늘에 머무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 성도의 모습입니다.
6) 윤리를 추구하면 윤리가 죽지만 은혜를 추구하면 윤리가 산다
본문 18절입니다. “만일 내가 헐었던 것을 다시 세우면 내가 나를 범법한 자로 만드는 것이라”(갈 2:18). 한번 은혜로 자기 공로를 부인했다가 다시 세우면 범법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성도가 자꾸 은혜를 떠나면 안됩니다. 연세 드신 분들이 "하나님 하나님", "주여 주여" 하는 것을 제가 이제 알 것 같습니다. 저도 혼자 버릇처럼 되뇌입니다. 삶의 무게는 더해 가니 "아빠 아버지"라고 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하신 것처럼 말입니다. 본문 마지막 절을 보면,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었나니"(갈 2:19)라고 합니다. 율법이 나쁘지는 않습니다. 율법만 바라보아 율법에 대해 죽은 것입니다. 율법만 바라본다는 것은 법만 바라보는 것, 내 자질을 내세우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율법에 대해 죽습니다. 저도 한국 교회에 대해 많이 이야기합니다. 서구 교회도 19세기, 20세기에 가장 복음에 방해된 것이 이것입니다. 윤리를 강조하면 윤리에 대해 죽습니다. 은혜를 구해야 윤리에 대해 삽니다. 은혜가 충만하면, 내가 한 것이 없다고 하면 서울이 가장 윤리적인 도시가 됩니다. 내가 했다고 하면 전쟁입니다. 모든 사람은 급부를 받으려고 싸웁니다. 자기의 정당한 몫을 말입니다. 그러나 내가 한 것이 없다, 은혜로 했다고 하면 싸움이 없습니다. 이것이 유일한 희망입니다. 율법의 터널에서만 헤매면 율법에 죽습니다.
7) 윤리주의, 공로주의에서 벗어날 길은 오직 하나님께 있다
그러나 "이는 하나님에 대하여 살려 함이라"(갈 2:19). 내가 눈을 들어 산을 보리니 나의 처소는 시온성이라고 합니다. 지성소, 성전, 즉 십자가를 바라볼 때 하나님에 대해 사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님들, 우리는 가장 힘든 일이 생기더라도 그 너머가 있습니다. 그것이 은혜입니다. 창조가 광대하고 위대하지만 그 너머에 은혜가 있습니다. 모든 창조 질서에 안 된다는 것이 있으나 그 너머에 기적적인 은혜의 질서가 있습니다. 그것을 믿는 것이 기도입니다. 내가 감옥에 있어도 기도를 할 수 있습니다. 기도는 생명만 있으면 할 수 있습니다. 바울과 실라처럼 찬송하는 것입니다. 호흡이 있는 자마다 여호와를 찬송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이 복잡하지 않습니다.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로마서, 갈라디아서 모두 간단합니다. 틀린 것이 복잡하지 옳은 것은 간단합니다. '예'와 '아니오'가 분명합니다. '오직 은혜', '전적 은혜'입니다. 율법을 바라보지 마십시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복음을 바라봅니다. 그러면 율법이 즐겁습니다. '여호와여 명령하소서, 말씀하소서. 종이 듣겠나이다.' 이것이 속박과 구속이 아닌 은혜 가운데 그 말씀을 누리는 것입니다. 그 때 율법이 꿀송이보다 달고 생명을 소생시키는 것입니다. 다음 주에 보면 이제 내 안에 내가 아닌 그리스도가 사신다고 합니다. 그리고 율법과 복음의 관계가 나옵니다. 그리고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이 나옵니다. 믿어서 잘사는 것입니다. 사랑한다고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잘 알 것은 사랑을 강조하다가 은혜가 많이 죽었다는 것입니다. 모이기만 하면 이렇게 저렇게 살자고 하니 우리가 어디서 멀어졌는지, 본질은 잘 이야기하지 않는 세태가 된 것입니다. 본문이 가르치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4. 결론
우리는 이전 것이 아니라 새 것이 되었습니다.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십시오. 그것만 있으면 됩니다. 끝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어쩌면 그 때가 하나님의 시간, 시작되는 시간입니다. 혼란스럽고 끝난 것 같은 아하스 때에 임마누엘 예수가 예언되는 것입니다. 가장 혼탁하고 힘들고, 헤롯, 안나스, 가야바, 빌라도가 있을 때 예수가 오십니다. 우리는 그 생각을 해야 합니다. 혼란스러울 수 있습니다. 그럴 때 반드시 우리는 모든 것을 접어 두고 기도해야 합니다. 직장 가거든 기도하시고 꼭 앞에 성경책 꽂아 두고 기도하십시오. 어디든지 가거든 성경책이 꽂혀 있으면 좋겠습니다. 틈틈이 한번씩 읽고 하루도 거르지 말고 꼭 기도하십시오. 그것이 중심입니다. 그러면 큰일 안 생깁니다. 실족하지 않습니다. 기도하면 말입니다. 말씀으로 그런 은혜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20190630][십자가지기교회 주일낮예배: 갈라디아서 강해(12): 그리스도의 복음] 율법에 죽고 하나님에 대해 살아남 (갈 2:17-19) 문병호 목사
*음성파일: 게시물 하단 "관련링크"에서 청취 혹은 내려받기 가능합니다.
<녹취록>
1. 구원받은 성도의 삶: 견인과 실족
하나님은 모든 일에 있어 변화가 없으십니다. 창조도 우리의 구원도 그렇습니다.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이 생명을 살리시는 것입니다. 살리셔서 살게 하시는, 시작과 끝이요, 알파와 오메가이신 하나님의 불변 영원하신 특성이 우리에게도 적용되는 것입니다. 성도는 생명을 한번 받으면 보호됩니다. 부모가 자녀를 낳기만 하지 않습니다. 낳으면 길러서 성장하도록 돕고 독립하도록 돕습니다. 간혹 자녀를 내팽개치는 것 같아도 그것은 훈련받고 자라가도록 하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성도의 삶에 대해 우리는 크게 두 단어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 견인입니다. 차를 끌어가는 것이 견인이라는 단어로 쓰이기도 합니다. 여기서 쓰이는 견인은 하나님이 끌고 가신다는 의미도 되지만 우리가 인내하면서 참는다는 의미도 있습니다. 즉, 포괄적인 개념으로 한번 구원한 백성을 하나님이 끝까지 책임지십니다. 하나님이 한번 믿음을 주시면 그것을 지키도록 하시고, 한번 생명을 주시면 그 가운데 살게 하십니다. 그래서 한번 인침을 받은 백성은 하나님의 새 하늘과 새 땅의 백성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로 살도록 지시받는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둘째, 실족입니다. 실족은 발을 헛디디거나 다른 길로 벗어난다고 쓰일 수 있습니다. 성경은 실족하게 하는 것이 없지는 않다고 말씀합니다. 지난 주에도 우리는 뭔가에 대해 실족했습니다. 우리의 행위나 마음이나 정서나 말입니다. 이 실족이라는 말은 성경에서는 걸려 넘어지는 것, 올바르지 못한 것에 넘어지는 것, 혹은 범죄를 범하는 것으로 쓰입니다.
이처럼 견인이라는 말과 실족이라는 말이 공존하는 것이 이 땅에서 우리의 삶입니다. 끝까지 끌고 가시는데 우리가 가끔 한번씩 넘어지는 것입니다. 이 두 단어는 서로 배척되는 것이 아니라 공존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견인을 믿으면 실족을 조심해야 하고 실족하면 견인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를 다시 일으켜 세우는 힘은 여호와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내가 넘어질 때 나를 인정하면 못 일어납니다. 그러나 여호와를 인정하면, 즉 하나님의 견인으로는 가능합니다. 택정한 자를 부르시고, 부르신 자를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한 자를 영화롭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믿습니다. 살아감과 살아남, 생명과 생활이 모두 은혜라는 것을 우리는 자주 고백합니다. 우리를 살리시면 끝까지 보호하십니다.
2. 은혜와 구원에 관한 질문
1) 두 가지 질문
두 가지 질문이 있습니다.
첫 번째 질문, 전적인 은혜로 거듭난 사람이 실족한다고 해서 과연 구원에서 떨어지느냐는 것입니다. 누가 봐도 크게 실족한 자가 과연 구원받은 백성인데 구원에서 떨어질 수 있나요? 답은 '아니요'입니다. 은혜로 구원받은 자는 실족하되 은혜를 떠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된 자는 실족케 하는 것이 없지 않으나, 걸려 넘어지는 것이 없지 않으나 하나님의 자녀에서 영 떨어지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아닌 자는 처음부터 구원받은 자가 아닙니다. 은혜의 빛을 받은 듯 하나 옥토에 떨어진 씨앗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두 번째 질문, 하나님의 거듭난 백성는 이제 거듭났으니 다시 율법을 다 지켜 구원에 이르게 하시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왜 저렇게 행동하는지, 스스로에 대해 한심하게 생각할 수도 있는 현실에서 그러면 우리가 모든 법을 다 지켜서 구원에 이르느냐는 것입니다. 답은, '이것에 대해도 아니요'입니다. 모든 하나님의 율법을 다 지켜서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본문은 바로 이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되려 다가 죄인으로 드러난다고 합니다.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는다고 지난 주 설교에 세 번이나 나왔습니다. 갈라디아서에서 가장 중요한 2장 16절의 말씀입니다.
2) 은혜가 죄를 짓게 하는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으로써 의롭게 되었는데, 살다가 죄를 짓는 우리로 인해 예수 그리스도가 죄를 짓게 하는 분이냐는 것입니다.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를 높이 세워놓고 쿵 넘어지는 것을 보려고 우리를 구원하셨겠냐는 것입니다. 괜히 높이 올려놓고 알아서 하라고 하고 떨어져서 크게 다치게 한다고 세상은 질문할 수 있습니다. 17절의 질문도 쉽게 풀어보면 바로 이것입니다. 모를 때는 오히려 수월한데 알고 보니 더 힘든 것이 있을 수 있습니다.
3. 은혜의 능력
1) 은혜는 죄를 분별케 하고 싫어하게 한다
분명히 거룩하게, 선하게 살아야 하는 것을 알게 되었는데, 오히려 더 크게 떨어져 실족하더라, 그러니 예수 그리스도가 더 큰 죄를 짓게 한 것이냐, 결코 그럴 수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 내용은 로마서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롬 6:2). 항상 우리가 그런 질문을 던질 수 있습니다. 은혜라고 하면 이제 죄 가운데 막 살겠다고 말입니다.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은혜는 죄가 추악하다는 것을 보여 주면서 나타납니다. 은혜는 죄를 좋다고 인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은혜를 안 받으면 그렇습니다. 그러나 은혜를 받으면 죄가 싫어집니다. 그러므로 은혜를 받았으니 막 살자고 하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은혜를 못 받았으니 막 사는 것입니다. 은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죄 사함 받는 구원입니다. 처음으로 주 안에서 영적으로 옳고 그름을 구별하는 심령이 생기게 하는 것이 죄 사함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죄를 지을 수 없습니다.
아마 어떤 것은 오래 숙성되면 맛있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감은 오래 달아 놓으면 곶감이 됩니다. 그러나 참외를 오래 냉장고에 넣어 두면 물러서 먹지 못하게 됩니다. 그러면 그것을 먹겠냐 말입니다. 한 번 냉장고를 꺼내 봤습니다. 감을 넣어 놓고 참외를 넣어 놨는데 감은 홍시가 되고 참외는 상해 버렸습니다. 그러면 홍시는 먹고 참외는 버립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그 분별력을 주시는 것이 바로 은혜입니다. 은혜가 임하면 가까이 하지 말아야 할 것을 멀리하게 됩니다. 그 좋았던 죄와 환락과 밤의 조명이 싫어집니다. 하나님이 주신 생명의 빛만 좋아집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입니다.
이것을 갈라디아 교인이 자꾸 묻는 것입니다. 오직 은혜면 마음대로 살아도 되겠느냐고 말입니다. 그런데 그것에 대해 그럴 수 없느니라고 대답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어떻게 보면 힘듭니다. 우리는 세상이냐 하나님이냐, 딱 결정을 해야 합니다. 바알과 여호와 중 결정을 해야 합니다. 중간에 미지근한 건 힘듭니다. 이것은 오래 둔 참외를 먹으면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미련을 가지는 것입니다. 차라리 아예 모르면 괜찮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분별력을 주십니다. 그러므로 결코 그럴 수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아멘" 해야 합니다.
2) 가장 은혜 받을 때 윤리적이게 된다
그러므로 가장 은혜 받을 때 가장 윤리적입니다. 전적인 은혜가 역사해야 가장 윤리적이 됩니다. 아무리 세상적으로 열심히 산다고 해도 윤리가 될 수 없습니다. 이것은 남에게 인정받는 것으로 결국 이기적인 것입니다. 우리는 날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을 받아 즐겁게 삽니다. 우리는 더 큰 짐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으므로, 그 믿음이 우리 안에 들어오면 성령으로 시작했다가 육체로 마치는 것이 아닙니다.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갈 3:3).
삶을 이야기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교회 설교에서 윤리는 '주의'가 되면 안 된다고 했습니다. 윤리주의가 아닌 복음입니다. 복음이니 무조건적 은혜, 전적인 감사이고, 그러면 우리의 삶에 윤리는 없고 은혜이면 되냐,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내 삶이 온전치 않으면 은혜가 떨어졌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은혜 따로, 삶 따로가 아닙니다. 충만한 감사와 기쁨, 전적인 하나님 앞에서의 감사, 쉬지 않고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하는 성도 됨이 있으면 법이 부담되거나 무섭지 않고 즐겁고 좋아집니다.
믿음으로 시작해서 생명공동체이니 뭐니 하다가 이제 거듭남 이야기는 그만하고 어떻게 살아 갈지를 말해 보자, 이제는 삶을 얘기해 보자라고 하곤 합니다. 그래서 모여서 격조 있는 삶, 문화적인 삶도 이야기해 보고 합니다. 그런 유수한 교회도 많이 생겼습니다. 격이 있는 교회, 젊은이와 호흡하는 교회 등 많이 생겼습니다.
그러나 은혜는 통달했으니 이제는 삶이다라고 하면, 그 순간 삶이 없어집니다. 삶만 바라보면 성도들은 실족합니다. 다시금 하나님 앞에 온전하게 되고 힘을 얻게 되는 것은 삶에서 삶으로가 아닌, 성령에서 성령으로, 은혜에서 은혜로 나아갈 때입니다. 그때 기쁘고 힘이 있는 것입니다.
3) 은혜 없이 내가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교만을 버리라
저는 설교 노트에 '하나님은 게으른 것보다 교만한 것을 싫어하신다'라고 조심스럽게 적어 봤습니다. 교만하게 부지런한 것을 싫어하신다는 것입니다. 겸손하게 게으른 것이 낫다는 말입니다. 윤리적으로 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은 사람이 나서는 것을 싫어하십니다. 은혜로 나아갈 때 내 삶을 받아 주십니다. 바벨탑이 그렇습니다. 다윗이 전쟁을 마치고 인구 계산을 할 때 더 큰 징벌을 내리십니다. 다윗이 밧세바를 범했을 때보다 국가적으로 보면 하나님이 더 싫어하시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은혜로 시작했다가 육체로 마치는 것입니다. 다윗이 물맷돌로 골리앗 앞에 설 때는 내 것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합니다. 그러나 연전연승하여 교만해지면 안 보이던 것이 보입니다. 밧세바가 보이고, 내 공로로 인구를 헤아리는 것이 보입니다. 그저 겸손해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도 하나님이 싫어하실 때는 홍해와 여리고를 건널 때는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좋아했습니다. 그러나 아이성을 공략할 때는 하나님이 싫어하셨습니다. 여리고를 무너뜨려보니 우리가 돌기만 하면 된다는 것 자체가 공로가 된 것입니다. 예배도 기도도 믿음도 공로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공로입니다. 믿음은 내 공로 아닙니다. 믿음이 좋아서, 기도 많이 해서 무언가 됐다고 여기면 안됩니다. 하나님이 하신 것입니다. 기도는 물론 합니다. 그러나 기도는 하나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볼 때 열심히 나서는 것은 윤리적이고 아주 좋을 수 있습니다. 삼백 데나리온을 왜 낭비하냐, 왜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붓느냐, 그것을 가지고 가난한 자를 도우면 좋았으리라고 한 것은 은혜의 질서를 모르는 것입니다. 예배를 왜 드리냐, 그 시간에 구제하는 것이 낫다고 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궁극적으로 구제는 하나님이 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예배의 존재입니다. 결론은 교만을 버려야 합니다.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시는 것은 교만한 부지런함입니다. 사울도 그랬습니다. 사무엘이 안 오니 스스로 제사장을 했습니다. 부지런합니다. 깨어 있고 예배가 중요한 것을 압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싫어하십니다. 아예 모르는 것보다 위험한 것이 절반만 알고 내가 나서는 것입니다. 그것이 성령으로 시작했다가 육체로 마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바라보고 시작했다가 지상의 것을 보고 마치는 것을 경계하는 것이 갈라디아서의 주제입니다. 우리는 은혜 위에 은혜, 믿음에서 믿음으로, 성령에서 성령으로를 계속 봤습니다. 성도로서 자격을 갖추었으니 이제 내가 살아야 한다, 성령에서 육체로 마치는 것, 이것을 가장 많이 하는 곳이 성당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은혜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4)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은 교만이 아니라 겸손이다
여호와가 기뻐하시는 것은 제물, 회향과 근채와 박하가 아닙니다. 상한 심령과 통회하는 심령을 기뻐하십니다. 욥기에는 사람들이 나를 낮추거든 사람들을 욕하지 말고 교만했으니 하나님이 낮추는 것이라 생각하라고 말씀합니다. "사람들이 너를 낮추거든 너는 교만했노라고 말하라 하나님은 겸손한 자를 구원하시리라"(욥 22:29). 이 말씀이 이번 주 제 삶에 귀하게 다가왔습니다. 사람들이 나를 낮추거든 그 일로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우리 주변에 일어나는 일, 내 직장의 모든 일을 틈타 하나님과 나 사이의 문제로 삼아야 합니다. 그 사람하고만 관계를 삼으면 세속적이게 됩니다. 사람들이 나를 짓밟을 때 하나님이 나의 교만을 꾸짖으려고 하신다고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저도 이번 주 조그마한 상처가 있었습니다. 그분들이 저를 상처 입히려는 것보다 제가 스스로 입은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내가 교만하니 그분들을 통해 하나님이 나를 낮추시는 것이라는 깨달음이 있었습니다. 학교에서 세미나도, 이 건물의 입주자 모임에서도 많이 힘들었는데, 이 말씀을 읽으면서 저의 교만을 하나님이 견책하신다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주를 찾는 모든 자들이 주로 말미암아 기뻐하고 즐거워하게 하시며 주의 구원을 사랑하는 자들이 항상 말하기를 하나님은 위대하시다 하게 하소서 나는 가난하고 궁핍하오니 하나님이여 속히 내게 임하소서 주는 나의 도움이시요 나를 건지시는 이시오니 여호와여 지체하지 마소서”(시 70:4-5). 우리가 영적으로 힘든 것은 은혜를 떠났기 때문입니다. 내가 잘났다고 하니 힘든 것입니다. 내가 옳다고 하니 힘든 것입니다. 스스로 실족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알아야 성도입니다. 저 사람으로 인해 실족했다고 하면 안됩니다. 그것은 이미 내가 온전치 않은 것이요 하나님 앞에 돌이켜야 합니다.
5) 은혜는 처음 행위를 가지게 한다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계 2:5). 세상은 이렇게 얘기하지 않습니다. 세상은 처음엔 낮았다가 점점 높아져 성숙해지는 것을 얘기합니다. 그러나 성도는 하나님이 전적 은혜를 베푸시는 것이므로 처음을 기억하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도 종 되었던 애굽 땅에서 구원해 내신 여호와라고 십계명을 주시면서 말씀하십니다. 어디서부터 떨어졌는지 알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져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모두 처음 행위가 있습니다. 저는 신학교 들어가기 전에 기도원에서 그랬던 것 같습니다. 기도하러 앉으면 눈물이 납니다. 가평 기도원에서 메뚜기도 이리저리 갈 곳이 있는데 나는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눈물만 났습니다. 그런데 신학교 들어와서 노련해지고 교수도 되다 보니 그것을 잊습니다. 하나님은 항상 처음 행위를, 우리가 무엇을 거창하게 하는 것보다 본질을 중요하게 여기십니다. 오늘 새벽예배 말씀에도 우리의 마음을 인도하셔서 그리스도의 인내와 하나님의 사랑에 이르게 하시라는 것을 알리십니다. 요한계시록에서도 처음 사랑을 알라고 합니다. “누구든지 어린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사람은”(막 10:15). 여기서 받든다는 말은 인정한다는 의미입니다. 어린아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으니 부모를 의지합니다. 그렇지 않는 자는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우리는 모두 이래야 합니다. 어디서 멀어졌는지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내가 잘나고 연단해서가 아니라 나를 불러주시고 자녀 삼아주신 그 순수한 사랑에서 얼마나 멀어져 있는지를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때나 지금이나 은혜에서 은혜로 믿음에서 믿음으로 성령에서 성령으로 가는 것입니다. 다시 율법주의, 공로주의, 자기 사랑, 자기 인정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전적 은혜로 오직 여호와만을 인정하고 새 것이 되어 십자가의 그늘에 머무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 성도의 모습입니다.
6) 윤리를 추구하면 윤리가 죽지만 은혜를 추구하면 윤리가 산다
본문 18절입니다. “만일 내가 헐었던 것을 다시 세우면 내가 나를 범법한 자로 만드는 것이라”(갈 2:18). 한번 은혜로 자기 공로를 부인했다가 다시 세우면 범법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성도가 자꾸 은혜를 떠나면 안됩니다. 연세 드신 분들이 "하나님 하나님", "주여 주여" 하는 것을 제가 이제 알 것 같습니다. 저도 혼자 버릇처럼 되뇌입니다. 삶의 무게는 더해 가니 "아빠 아버지"라고 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하신 것처럼 말입니다.
본문 마지막 절을 보면,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었나니"(갈 2:19)라고 합니다. 율법이 나쁘지는 않습니다. 율법만 바라보아 율법에 대해 죽은 것입니다. 율법만 바라본다는 것은 법만 바라보는 것, 내 자질을 내세우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율법에 대해 죽습니다.
저도 한국 교회에 대해 많이 이야기합니다. 서구 교회도 19세기, 20세기에 가장 복음에 방해된 것이 이것입니다. 윤리를 강조하면 윤리에 대해 죽습니다. 은혜를 구해야 윤리에 대해 삽니다. 은혜가 충만하면, 내가 한 것이 없다고 하면 서울이 가장 윤리적인 도시가 됩니다. 내가 했다고 하면 전쟁입니다. 모든 사람은 급부를 받으려고 싸웁니다. 자기의 정당한 몫을 말입니다. 그러나 내가 한 것이 없다, 은혜로 했다고 하면 싸움이 없습니다. 이것이 유일한 희망입니다. 율법의 터널에서만 헤매면 율법에 죽습니다.
7) 윤리주의, 공로주의에서 벗어날 길은 오직 하나님께 있다
그러나 "이는 하나님에 대하여 살려 함이라"(갈 2:19). 내가 눈을 들어 산을 보리니 나의 처소는 시온성이라고 합니다. 지성소, 성전, 즉 십자가를 바라볼 때 하나님에 대해 사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님들, 우리는 가장 힘든 일이 생기더라도 그 너머가 있습니다. 그것이 은혜입니다. 창조가 광대하고 위대하지만 그 너머에 은혜가 있습니다. 모든 창조 질서에 안 된다는 것이 있으나 그 너머에 기적적인 은혜의 질서가 있습니다. 그것을 믿는 것이 기도입니다. 내가 감옥에 있어도 기도를 할 수 있습니다. 기도는 생명만 있으면 할 수 있습니다. 바울과 실라처럼 찬송하는 것입니다. 호흡이 있는 자마다 여호와를 찬송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이 복잡하지 않습니다.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로마서, 갈라디아서 모두 간단합니다. 틀린 것이 복잡하지 옳은 것은 간단합니다. '예'와 '아니오'가 분명합니다. '오직 은혜', '전적 은혜'입니다. 율법을 바라보지 마십시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복음을 바라봅니다. 그러면 율법이 즐겁습니다. '여호와여 명령하소서, 말씀하소서. 종이 듣겠나이다.' 이것이 속박과 구속이 아닌 은혜 가운데 그 말씀을 누리는 것입니다. 그 때 율법이 꿀송이보다 달고 생명을 소생시키는 것입니다.
다음 주에 보면 이제 내 안에 내가 아닌 그리스도가 사신다고 합니다. 그리고 율법과 복음의 관계가 나옵니다. 그리고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이 나옵니다. 믿어서 잘사는 것입니다. 사랑한다고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잘 알 것은 사랑을 강조하다가 은혜가 많이 죽었다는 것입니다. 모이기만 하면 이렇게 저렇게 살자고 하니 우리가 어디서 멀어졌는지, 본질은 잘 이야기하지 않는 세태가 된 것입니다. 본문이 가르치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4. 결론
우리는 이전 것이 아니라 새 것이 되었습니다.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십시오. 그것만 있으면 됩니다. 끝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어쩌면 그 때가 하나님의 시간, 시작되는 시간입니다. 혼란스럽고 끝난 것 같은 아하스 때에 임마누엘 예수가 예언되는 것입니다. 가장 혼탁하고 힘들고, 헤롯, 안나스, 가야바, 빌라도가 있을 때 예수가 오십니다. 우리는 그 생각을 해야 합니다. 혼란스러울 수 있습니다. 그럴 때 반드시 우리는 모든 것을 접어 두고 기도해야 합니다. 직장 가거든 기도하시고 꼭 앞에 성경책 꽂아 두고 기도하십시오. 어디든지 가거든 성경책이 꽂혀 있으면 좋겠습니다. 틈틈이 한번씩 읽고 하루도 거르지 말고 꼭 기도하십시오. 그것이 중심입니다. 그러면 큰일 안 생깁니다. 실족하지 않습니다. 기도하면 말입니다. 말씀으로 그런 은혜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