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721][십자가지기교회 주일낮예배: 갈라디아서 강해(15): 그리스도의 복음]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보이거늘 (갈 3:1) 문병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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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 3:1)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 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녹취록>
1. 십자가 묵상
지난 주에는 내가 십자가에 그리스도와 함께 못 박혀 이제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산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 앞에 밝히 보이거늘”이라는 말씀입니다. 지난 주 설교 후 한 주간 십자가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1) 성경 속의 십자가
설교 준비를 하면서 성경에서 “십자가”라는 단어를 검색해 보았습니다. 물론 구약에는 십자가라는 단어가 나오지 않습니다. 신약에, 특히 복음서에서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실 것을 미리 예언하시면서 십자가라는 말이 처음 나옵니다. 그 이후에 가장 먼저 나오는 것이 군중들이 십자가에 주님을 못 박으라는 군중들의 외침입니다. 군중들은 예수가 아닌 바라바를 풀어 달라고 합니다. 그러니 빌라도가 바라바를 내어 풀어 주고 예수님은 옷을 벗겨 채찍질을 한 후 십자가를 지고 가게 하는데, 구레네 시몬이 그 십자가를 집니다. 그 이후로도 십자가에 대한 말씀들이 많이 나옵니다.
그리고 서신서들 중에서는 바울의 서신서들에 십자가가 많이 나옵니다. 특히 갈라디아서에서 많이 나오는데, 동사와 명사로 십자가라는 말이 6번 나옵니다. 제가 이 횟수 때문에 갈라디아서의 중심이 십자가라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갈라디아서의 말씀을 강해 형식으로 나누기 위해 처음 준비할 때 갈라디아서를 읽었습니다. 흔히들 갈라디아서의 주제를 은혜, 오직 믿음, 그리스도 등으로 파악하는데, 저는 십자가라는 단어가 계속 맺혔습니다. 모든 내용이 십자가를 중심으로 맺혔습니다.
그러나 로마서에서는 “오직 믿음”이 앞서고 그 가운데 그리스도인의 삶, 성령, 의의 종 등이 주제로 부각됩니다. 하지만 갈라디아서는 십자가가 부각됩니다. 존 스토트라는 유명한 복음전도자 및 설교자가 있었는데, IVF라는 단체의 가장 중요한 지도자이기도 했습니다. 이분이 갈라디아서 주석을 쓸 때 “자유”를 강조했습니다. 제가 신학교 때 그 책을 완독했는데 가장 제 기억에 남은 것은 “십자가”였습니다. 그래서 그 책을 읽고 나서 십자가에 관련된 다른 책을 읽기도 했습니다.
2)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음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두 가지 책망이 등장합니다.
첫째, 1장에서는 갈라디아 교인들이 다른 복음을 쫓아간 것에 대한 책망입니다.
둘째, 오늘 본문에 나오는 “어리석도다”라는 책망입니다.
2장에서 가장 강조된 부분은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에 이른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2장의 핵심입니다. 율법의 행위와 그리스도를 믿음, 이 두 가지를 연결시키는 것은 ‘그리스도가 무엇을 하셨는가’입니다.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막연한 이름이나 얼굴을 믿는 것이 아닌,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믿는다는 것은 그리스도가 달리신 나무 십자가 자체를 믿는다는 것이 아니라 그 십자가 위에서 우리를 위해 그리스도가 죽으신 의(義)를 믿는 것입니다. 날 위해 죽으시고 날 위해 모든 것 쏟으시고 날 위해 고초당하고 날 위해 수치 당하심으로 구원을 완성하신 터, 다 이루신 터가 십자가이므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2장 16절에서는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이 세 번 반복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가르침의 내용으로는 2장 16절이 가장 중요하다고 말씀을 드렸고, 삶의 영역에서는 2장 20절과 21절,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그리스도가 내 안에서 사심’이 중요함을 보았습니다. 이 모든 것은 그리스도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십자가가 없는 그리스도는 이름밖에 없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십자가의 유일성, 절대성, 중심성을 배웁니다.
3) 찬송가 속의 십자가
그래서 저는 한 주간 과연 ‘나는 주의 종으로서 우리 교회 이름을 십자가지기교회라고 유학 가서 가정예배를 드릴 때부터 지어 놓았는데, 과연 나에게 십자가는 무엇인가, 나는 얼마나 십자가를 기억하고 있으며 얼마나 십자가 중심적인 삶을 살고 있는가’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또는 ‘십자가를 내가 얼마나 옆에 두고 있는가’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런데 하늘을 쳐다봐도 십자가가 안 떠오르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 밝히 보인다는 것이 과연 시각적으로 보는 것인가?’라는 생각을 해 봤습니다. ‘나의 삶이, 내가 자고 일어나는 것이 다 그리스도의 은혜가 아니냐’ 하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찬송가도 생각을 해 봤습니다. 십자가로 시작하는 찬송가 말입니다. 이런 생각도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었는데, 십자가 찬송이 많습니다.
415장, “십자가 그늘 아래 나 쉬기 원하네 저 햇볕 심히 뜨겁고 또 짐이 무거워 이 광야 같은 세상에 늘 방황할 때에 주 십자가의 그늘에 내 쉴 곳 찾았네.” 이전 왕십리교회가 굉장히 어려웠습니다. 설교 때마다 큰소리로 매번 찬송했습니다. 출석교인이 천 명 정도 되는데 서로 많이 다퉈서 여러 가지로 많이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설교 때 찬송을 많이 불렀는데, 아무 어려움 없이 정말 감사하게 새로운 담임 목사님이 청빙되어 제가 나온 적이 있었습니다.
또한 439장, “십자가로 가까이 나를 이끄시고 거기 흘린 보혈로 정케하옵소서 십자가 십자가 무한 영광일세 요단강을 건넌 후 무한 영광일세.” 이 찬송가도 십자가로 우리가 이끌려 간다는 은혜의 찬송입니다.
또한 십자가 군사에 관한 찬송도 있습니다. 353장, “십자가 군병 되어서 예수를 따를 때 무서워하는 맘으로 주 모른 체할까 나의 주 그리스도 나를 속량 했으니 그 십자가를 벗은 후 저 면류관 쓰리.”
또한 352장, “십자가 군병들아 주 위해 일어나 ...”
또한 341장, “십자가를 내가 지고 주를 따라 갑니다 이제부터 예수로만 나의 보배 삼겠네 세상에서 부귀 영화 모두 잃어버려도 주의 평안 내가 받고 영생복을 얻겠네.”
그리고 십자가를 지고 가는 찬송도 있습니다. 461장, “십자가를 질수 있나 주가 물어 보실때 죽기까지 따르 오리 성도 대답하였다.”
지난 주는 상당히 교리적인 설교를 했습니다. 오늘도 물론 그래야 하지만 조금 더 은혜롭게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본문 말씀은 너무 어렵게 볼 필요 없습니다.
방금 본 찬송들이 십자가로 시작하는 것들이었는데, 십자가로 시작하지 않더라도 내용에 십자가가 들어가는 찬송은 내용은 절반 이상 됩니다.
144장, “예수 나를 위하여 십자가를 질 때 세상 죄를 지시고 고초 당하셨네 예수여 예수여 나의 죄 위하여 보배 피를 흘리니 죄인 받으소서.”
4) 십자가의 현재성
그리고 147장, “거기 너 있었는가 그 때에, 주님 십자가에 달릴 때”라는 찬송이 있습니다. 이 찬송은 흑인 노예들이 부른 노래입니다. “때로 그 일로 나는 떨려 떨려.” 흑인들이 얼마나 힘들고 핍박을 받았습니까? 그때 흑인들은 십자가가 내 앞에 있다는 마음으로 살았습니다. 십자가를 멀리 두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 그 자리에 내가 서 있는 것입니다. 이 찬송을 불러야 되느냐 말아야 되느냐 말이 많았습니다. 왜냐하면 미국에선 처음에 흑인들을 교회에 오지 못하게 했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나 서글프게도 아직도 알게 모르게 흑인교회와 백인교회가 나뉘어 있기에 아직까지 넘어서야 할 일이라 생각됩니다.
어쨌거나 이 찬송이 오늘 본문 1절의 내용입니다. “거기 너 있었는가 그때에.” 우리가 어떻게 2천 년 전 거기에 있을 수 있습니까? 그러나 십자가는 나와 함께 있고 십자가가 내 유일한 공로, 의지, 값, 그늘이고, 그래서 “거기 너 있었는가 그때에”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우리는 항상 언제든 십자가의 자리로 가야 합니다. 세상 전부가 어두운데, 그 가운데 내리는 한 줄기 빛은 십자가의 길입니다.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찢기고 상하시므로, 빛이 깨져 그 빛이 퍼뜨려진 그 자리가 십자가입니다. 그래서 “거기 너 있었는가 그때에”라는 찬송을 합니다.
(1) 십자가의 지성소
우리는 십자가 현장, 십자가 속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현실 도피가 아닙니다. 십자가로 들어가는 것은 우리가 왕 같은 제사장이 되는 것입니다. 왕 같은 제사장이 되려면 십자가로 들어가야 합니다. 십자가가 지성소이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강해를 하면서 대제목으로 정한 것이 “십자가의 지성소”입니다. 십자가가 지성소입니다. 대제사장도 일 년에 한 번 들어가는 그곳을 우리는 수시로 들어갈 뿐 아니라 아예 부여안고 삽니다. 그곳이 바로 십자가의 터, 십자가의 지성소입니다. 십자가는 우리의 본질을 완성하는 곳입니다. 십자가가 없으면 전부 껍데기고 날아가는 가라지입니다. 십자가를 붙들고 있어야 본질이고 생명과 빛의 역사가 있습니다.
(2) 신앙고백의 터인 십자가
십자가가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곳이고 영적 양식을 공급받는 곳이며 신앙고백의 터전입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고백은 십자가의 고백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모든 의를 이루시는 그 제사장으로서 자기 자신을 드리시고, 왕으로서 자기 자신을 우리에게 주시고, 선지자로서 그것을 깨닫게 하시는데, 예수님이 우리에게 오신 것은 십자가에서 모든 의를 이루시기 위함입니다.
2. 성령이 말씀을 우리에게 조명함으로써 심령에 기록된 그리스도의 십자가
1) “너희 눈 앞에 밝히 보이거늘”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 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에서 ‘밝히 보인다’는 말은 접두어 하나가 붙어 있습니다. ‘프로(προ)’라는 단어인데 ‘먼저’는 의미입니다. 이것에 ‘기록하다’는 의미를 가진 ‘그라포(γράφω)’라는 단어와 합성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먼저 쓴다’(προγράφω)는 의미입니다. “무엇이든지 전에 기록된 바는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롬 15:4). 여기서 “전에 기록된”이라는 말이 바로 같은 단어입니다. “... 내가 먼저 간단히 기록함과 같으니”(엡 3:3)의 이 말씀에서 “기록함”이라는 말은 그 단어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말씀에서 ‘밝히 보인다’는 ‘보인다’는 의미도 있지만 본래의 뜻은 ‘먼저 기록한다’는 의미입니다. 이 단어가 과거 수동태로 쓰였습니다. 십자가가 우리의 눈 앞에 먼저 쓰여졌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보혜사 성령이 우리에게 임하여서 십자가의 말씀과 도가 우리에게 전해진 것입니다. 성령의 역사로 영감된 말씀이 우리 안에서 비추고 감화하고 감동시킨 것입니다. 그래서 ‘밝히 보인다’는 것은 눈으로 본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말씀을 영의 역사로 기록해 준다는 의미입니다. 성령이 우리에게 임하여 십자가의 역사를 우리 영에 기록되는데, 우리는 그것을 ‘십자가를 본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신비주의적으로 몽롱히 보거나 환상을 보았다는 것은 모두 무의미합니다. 십자가를 먼저 우리의 마음에 기록해 주신 것입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밝히 보인다는 것입니다.
2)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원문에서 ‘십자가에 못 박다’라는 말은 한 단어(스타우루, σταυρόω)입니다. 십자가라는 명사가 따로 사용된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 못 박다’라는 한 단어가 완료 수동태로 사용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는 일이 완료되었고 그것을 우리가 한때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너희 눈 앞에 밝히 보이거늘”은 과거형이고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은 완료형입니다. “다 이루었다”(요 19:30)가 완료형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은 구체적으로 완료 수동태 분사형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 앞에 밝히 보이거늘,” 즉 ‘너희의 심령에 먼저 기록해 주셨거늘’입니다. 우리의 심령에 먼저 기록해 주셨다는 것은 나도 모르게, 성령의 역사로, 전적이고 절대적인 은혜로 성령이 내게 임하면 내 심령이 십자가를 기록해 주신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내 심령이 십자가에 화답하는 것인데, 그것을 우리가 ‘밝히 본다’라고 합니다. 성경에서 ‘밝히 본다’는 것은 눈으로 본다는 것이 아니라 영안으로 본다는 것입니다. 영안이 열려야 밝히 봅니다. 그래서 십자가가 우리 안에 밝히 기록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십자가 십자가 무한 영광일세”라고 즐겁게 찬송합니다. 십자가는 가장 모진 고통을 당한 곳임에도 우리에게는 기쁨을 줍니다. 이렇게 성령을 받아 말씀 가운데 “아멘” 하는 사람은 십자가를 밝히 보는 사람들입니다. 우리 모두가 이 믿음으로 십자가를 밝히 봅니다. 우리는 육안으로 십자가를 보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의 역사로 영적인 눈이 열려 “아멘” 하는 것이 밝히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이 있는데 “누가 너희를 꾀더냐”라고 사도 바울은 책망한 것입니다. 여기서 ‘꾀다’는 마술사나 점쟁이들이 육안에 보이는 것으로 속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니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라고 하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내 안에 있습니다.
3.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가진 세 가지 의미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세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1)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역사적 사건이다
첫째, 역사적인 사건입니다. 무리가 외쳤습니다. “그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막 15:13). 그래서 빌라도는 바라바를 놓아주고 예수를 채찍질하여 십자가에 못 박게 넘겨주었습니다(마 27:23). 구레네 시몬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었습니다(마 27:32).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마 27:35-38).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일곱 가지 말씀, 가상칠언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영혼이 떠나가셨습니다. 죽으셨습니다. 제가 성경 구절을 하나씩 밝힌 이유는 이것이 정확한 역사적인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직 십자가의 터가 발견되었느니 하는 것을 신경쓸 필요가 없습니다. 제가 이스라엘 가서 느낀 것이 그것인데, 하나님은 성경의 어떤 장소도 정확히 남겨 두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베드로의 집도, 예수님이 디베랴 바닷가 식사하신 곳도, 예수님이 세례받으신 곳도 정확하지 않고 여러 후보 지역이 있을 뿐입니다. 말씀 듣고 “아멘” 하면 보는 것이지 그 장소 가서 보는 것이 아닙니다. 그곳에 가서 보는 것은 영적으로 “아멘” 하기 위한 것이고, 역사적으로 그렇다는 것을 인정하기 위한 것입니다.
십자가는 역사적인 사건입니다. 그런데 이것에 대해 십자가의 유골이니 성찬의 성배니 하는 것이 있다고 해도 믿을 것도 없고 그것에 권능도 없습니다. 성유물이라고 섬기고 하는데, 성경의 어디에서 그것들에 권능이 있다고 합니까? 예수님이 입으신 옷이 권능이 있다고 생각하고 나누는 것은 로마 병정들이나 하는 짓입니다. 쓸데없는 일입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역사적으로 십자가를 지고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습니다. 일곱 가지 말씀을 하시고 “엘리 엘리 사박다니,” “다 이루었다”라고 우리를 위하여 선포하시고 돌아가셨습니다. 십자가를 역사적 사건으로 “아멘”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십자가를 역사적 사건이 아닌 상징으로만 생각합니다. 유럽도 미국도 모두 그렇습니다. 그런 학파가 90%인데, 그들은 역사적 사건이 아니라 의미만을 인정합니다. 우리에게 십자가는 단지 의미가 아니라 역사적 사건입니다. 이 역사적 사건으로 인해 사도들이 순교했고 오늘날 기독교가 존재하는 것입니다.
2) 언약적 의미: 약속된 구원의 성취인 십자가
둘째, 십자가는 언약적 의미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처녀에게 잉태되셨고(사 7:14) 그것은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하기 위함입니다(창 3:15).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함은 죄를 물리치는 것인데 그 장소가 바로 십자가입니다. 예수님이 처녀에게 잉태되신 일도 십자가를 목표한 것입니다. 이렇게 십자가에는 언약적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세례 받으신 일은 예수님이 죄가 없으신데 죄인의 자리에 서신 것입니다. 세례는 죄 있는 사람이 받는 것인데, 무죄하신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가져가시려고 죄인의 자리에 서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세례 받으러 오시니 세례 요한이 예수님을 말리자, 예수님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義)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세례의 자리에서도 십자가를 바라보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자신이 십자가에서 죽으실 것을 예언하셨습니다(마 20:19). 또한 예수님은 보여줄 표적이 요나의 표적밖에 없다고 말씀하실 때, 물고기 뱃속의 죽음으로 십자가의 죽음을 의미하신 것입니다. 즉 다른 이적이나 기사가 아니라 십자가만 바라보라는 의미입니다.
물 위를 걸어도 오병이어의 기적을 보아도 구원을 얻지 못합니다. 십자가가 유일한 구원의 능력입니다. 다른 것을 보고 쫓아다닐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 안에 먼저 말씀을 기록해 주셔서 십자가가 밝히 보입니다. 우리가 믿음이 부족해서 뭔가를 눈으로 봐야 하거나 이상을 쫓아다닐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출애굽 때 문설주와 인방에 발라진, 유월절 어린 양의 피(고전 5:7)입니다. 이것은 약속된 언약의 말씀인 것입니다.
민수기 21장 8-9절을 보면 백성들이 불평하다가 불뱀에 물려 죽습니다. 그때 여호와 하나님이 놋뱀을 만들어 장대에 걸어 보는 자마다 살게 하셨습니다. 민수기에서 놋뱀이 장대에 걸리는 것이 십자가입니다. “그 시체를 나무 위에 밤새도록 두지 말고 그 날에 장사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을 더럽히지 말라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신 21:23). 여기서 “나무에 달린 자”도 십자가를 의미합니다. 구약 전체가 십자가를 바라보고 가는 것입니다. 구약의 이 모든 것은 그림자이고 예표인데, 그 실체는 십자가입니다. 모세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는데(히 11:26), 구약의 모세도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본 것입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히 12:1)인데, 바라는 바와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라 한 그것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그 십자가에서 예수님은 멜기세덱의 반차로서 단번에 영원한 죽음을 죽으신 것입니다. 성경 전체에는 언약적으로 십자가를 바라보며 기록되었습니다.
3) 실존적 의미: 나를 위한 십자가, 내가 죽인 예수
셋째, 십자가는 실존적 의미가 있습니다.
(1) 내가 예수를 죽였다, 예수 나를 위해 죽으셨다
십자가는 우리 자신의 삶에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는 십자가 앞에 설 때 먼저 가져야 할 고백은 다음과 같습니다. “내가 그를 죽였다.” 우리가 그를 죽였는데 그가 우리를 위해 죽으셨으니 우리가 그와 함께 죽습니다. 이것이 갈라디아서 2장 20절 말씀입니다. 보혜사 성령을 받은 베드로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은 확실히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행 2:36). 십자가 안에서 내가 주를 죽였습니다. 나는 로마 병정도 아닌데 언제 예수님을 죽였나요? 내 죄 때문에 예수님이 죽으셨기 때문에 내가 예수님을 죽인 것입니다. 부모가 자식에게 도시락 싸주려고 가다가 교통사고 나서 죽었다면, 자식이 부모를 죽인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부모는 자식을 사랑하면서 자식을 위해 날마다 죽어가는 것이지요. 십자가 앞에 가면 이 의식이 시작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베드로가 나면서 못 걷게 된 이를 고친 후에 ‘우리가 죽였던 예수의 이름으로’ 고쳤다고 합니다. ‘우리가 죽였던 예수’라는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2) 달콤한 회개
예수님은 사울을 바울로 만들어 구원하시려고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라고 물으신 것입니다. 십자가 앞에서의 회개는 달콤한 회개입니다. 회개는 즐거워야 합니다. 좁은 문에 들어가려면 거추장스러운 걸 떼어 내야 합니다. 그래야 문 안에 있는 푸른 초장이 열립니다. 회개는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회개가 즐거운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성도는 죄가 정말 쓰고 비참하다는 것을 압니다. 그러나 동시에 성도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죄가 쓰다는 것을 알게 하신 하나님이 다시 회복시키십니다. 그러니 달콤합니다.
우리는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를 따르는 것입니다. 우리 각자는 십자가를 지고 있습니다. 구레네 시몬만 십자가를 지는 것이 아닙니다.
(3) 우리의 자랑, 십자가
우리는 십자가만 자랑합니다. 사도 바울은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고(고전 1:23)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않겠다고 합니다(고전 2:2). 십자가만 자랑한다는 것은 다른 걸 모르겠다는 뜻이 아니라 십자가가 모든 지혜와 지식이요, 나를 주장한다는 의미입니다. 우리 성도님들은 원컨대 십자가 중심, 십자가 절대성, 십자가 유일성이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있어야 즐겁고 화평이 있습니다. “십자가 그늘 아래 나 쉬기 원하네 저 햇볕 심히 뜨겁고 또 짐이 무거워 이 광야 같은 세상에 늘 방황할 때에 주 십자가의 그늘에 내 쉴 곳 찾았네”라는 찬양처럼 말입니다. 십자가만을 자랑해야 합니다. 히브리서 3:6에서 자랑하는 자가 하나님의 집이라고 했는데, 그 자랑하는 바는 십자가입니다.
(4) 십자가는 영광이다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는 영광의 주이십니다.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아니하였으리라”(고전 2:8). 십자가는 영광입니다. 십자가에서 멀어지면 다 부끄럽고 욕됩니다. 마치 세상과 여종 앞에 세 번 예수님을 부인한 베드로처럼 말입니다. 십자가에 무한 영광이 있습니다. “십자가 십자가 무한 영광일세.” 이 십자가에 대한 찬양을 많이 부르십시오. 부르다 보면 외워지고 좋습니다.
4. 결론
우리 교회는 십자가지기교회입니다. 이 이름을 생각할 때마다 감사하기도 하고 두렵기도 합니다. 그러나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시기에 감사합니다. 우리는 십자가 앞에 내 공로로 나가지 말고 은혜로 나가야 합니다. 우리 교회는 십자가를 매주 말하지 않고는 예배를 드릴 수 없습니다. 매주 말하는 “십자가지기 소명”(빌 2:5-11; 마 16:24)에 이 말씀이 모두 들어가 있습니다. 십자가는 가장 은혜롭게 우리에게 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십자가의 도”(고전 1:18)라고까지 말하고 이것이 우리의 능력이자 지혜라고 말합니다.
오늘 설교 제목은 “십자가의 그리스도”라고 하지 않고 “그리스도의 십자가”라고 했습니다. “십자가의 그리스도”라고 하면 십자가에 달린 이가 많이 있는데 그중 예수가 하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십자가”라고 하면 이 십자가는 이 세상에 유일합니다. 그리스도의 주리심과 고난과 십자가가 나를 위한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설교 제목을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보이거늘”이라고 한 것입니다.
칼빈은 천 개의 만들어진 나무 십자가보다 갈라디아서 3장 1절의 말씀 하나가 더 분명하다고 했습니다. 보혜사 성령이 임하여 그 역사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우리 안에 먼저 써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말씀으로, 영적으로 밝히 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보라고 구약과 신약의 말씀을 다 주셨습니다. 그 외에 다른 곳에 가지 마십시오. 그래서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 누가 너희를 꾀더냐”라고 한 것입니다. 우리 안에 새겨진 말씀으로 십자가가 밝히 보입니다. 아멘.
[20190721][십자가지기교회 주일낮예배: 갈라디아서 강해(15): 그리스도의 복음]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보이거늘 (갈 3:1) 문병호 목사
*음성파일: 게시물 하단 "관련링크"에서 청취 혹은 내려받기 가능합니다.
(갈 3:1)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 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녹취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