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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728][십자가지기교회 주일낮예배: 갈라디아서 강해(16): 그리스도의 복음] 듣고 믿음으로 (갈 3:2-5) 문병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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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728][십자가지기교회 주일낮예배: 갈라디아서 강해(16): 그리스도의 복음] 듣고 믿음으로 (갈 3:2-5) 문병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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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 3:1)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 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녹취록>



1. 성경이 말하는 성령


우리 신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다 보면 이런 질문을 받습니다. 성령에 대한 부분이 성경 어디 있는지에 대해서 말입니다. 그러면 주로 사도행전의 오순절 성령 사건을 이야기합니다. 또한 갈라디아서 5장에 성령의 소욕을 따른 성령의 열매 정도를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령에 대한 사도행전 2장은 성령을 받은 당시 성도들의 모습으로서 믿음이 충만하고 기도하고 모이기에 힘쓰고 사랑하고 전도하고 이런 것들로 제시하는데, 한마디로 예수 모습이 나타나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안디옥 교회에서 예수 사람, 즉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2장은 성령의 현상이 주로 나타납니다.
그러나 성령에 대해 하나님은 주도면밀하게 알려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잡히시던 날 마가 다락방에서 제1의 성찬을 거행하시고 요한복음 14장에서 16장까지 가장 주요하게 성령에 대해 가르치십니다. 예수께서 하늘에 올라가셔야 우리에게 성령을 내려 주실 수 있다고 하면서 성령에 대해 가장 잘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리고 이 성령을 받은 성도들은 어떤 신앙고백과 자격을 갖추고, 어떤 삶을 사는지는 로마서 8장에 잘 나옵니다. 그리고 이제 성령이 그리스도의 영이라고 로마서 8장 9절에서 말합니다. 또한 계속해서 자녀이자 상속자, 의롭게 되고 거룩하게 되는 것에 대해 말합니다. 생명과 삶을 주셔서 살아가고 살아나는 것이 다 그리스도의 은혜라고 말하는 것이 로마서 말씀입니다.
그리고 중요한 말씀이 갈라디아서에서 나타납니다. 성령은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시는 자녀의 영이라고 갈라디아서 4장 6절이 말합니다. 그리고 성령의 소욕은 갈라디아서 5장 16절에서 26절까지 말합니다. 성령으로 살면 성령으로 행하여 성령의 열매를 맺는 말씀입니다.



2. 성령이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는 방식


오늘 본문은 가장 원리적인 것을 알려 줍니다. 오늘 말씀은 성령이 어떻게 우리 안에 역사하는지 말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성령과 들음과 믿음, 이 세 단어가 얼른 눈에 띕니다.


1) 율법의 행위가 아닌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칭의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는 것은 갈라디아서 2장 16절부터 계속 나오는 것입니다. 율법이 아닌 그리스도를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함께 사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내 안에 내가 아닌 그리스도께서 살아 계시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은 것이면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난 주 본문, 십자가가 밝히 보이니 우리를 아무도 꾈 수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 밝히 보이는 것 자체는 성령이 없으면 가능하지 않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보다, 느끼다, 깨닫다, 감사하다 등은 성령이 임하지 않으면 전혀 불가능한 일입니다. 본문이 바로 그것을 말합니다.
지금까지 본 가장 중요한 세 단어는 믿음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입니다. 그리고 십자가입니다. 믿음, 그리스도, 십자가, 이 세 가지와 조금 상대적으로 나오는 게 율법의 행위입니다. 율법은 귀합니다. 경건하고 거룩하고 선합니다(롬 7:12-14). 그러나 율법은 타락한 인류에게는 저주입니다. 이는 율법이 나쁘기 때문이 아니라 아무도 율법에 순종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율법의 행위로 되기는커녕 율법은 이제 타락한 인류에게 저주입니다.
그러므로 지난 주에 본 십자가의 유일성, 중심성, 절대성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막연히 누구에게 듣거나 본 것이 아니라 내 안에서 역사하는 지혜이자 능력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내 안에 사시는 그리스도의 영은 율법의 행위가 아닌 듣고 믿음으로 말미암는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2) 성령을 받음


(1) 인격적, 단회적, 절대적, 법정적
본문 2절은 성령을 받은 것, 5절은 하나님이 성령을 주신 것을 얘기합니다. 그러므로 이 두 절을 같이 보면 좋습니다. 2절의 "성령을 받은 것이"에서 ‘받았다’는 과거형으로 쓰여 있습니다. 단회적이라는 것입니다. 성령을 한 번, 절대적, 인격적, 법정적으로 받았다는 것입니다. 인격적으로 받았음은 내가 전적으로 새 사람이 되는 것이요, 단회적인 것은 단번에 받아 계속된다는 것이요, 절대적이라는 것은 성령이 인격이므로 절대적으로 우리 안에 오신다는 것이요, 법정적이라는 것은 하나님이 선포해 주신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이 하늘 법정에서 너는 내 것이라고 선포하시면 성령이 내 안에 오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을 받는 것은 과정이 아니라 완결된 것입니다.


(2) 그리스도의 영(보혜사 성령):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우리에게 주시는 방식
그런데 5절은 성령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부어 주신 것이라고 합니다. 사도행전에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우리에게 부어 주신 것이라는 말과 상통합니다. 이를 바라볼 때 갈라디아서 2장 20절의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심’을 반드시 생각해야 합니다. 여기서 ‘버렸다’는 말은 ‘주셨다’는 의미입니다. '파라디도미'(paradidómi)라고 하는데, 건네 준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을 한글 성경은 ‘버렸다’고 한 것입니다. 자기 자신을 주셨는데 그 방법은 성령을 받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를 위해 하늘에 올라 가신 것이요, 우리가 성령을 받는 것은 그리스도를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보혜사 성령을 그리스도의 영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그와 함께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입니다.


(3) 임마누엘의 영: 영원한 임재
이런 점에서 사실상 로마서보다 갈라디어서가 더 정교합니다. 바로 이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오셔서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나와 함께 사는 것입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요 14:16). 보혜사 성령은 그러므로 바로 임마누엘의 영입니다. 임마누엘은 예수님이십니다. 처녀가 잉태하여 아기를 낳는다는 예언의 성취입니다. 임마누엘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가 임마누엘이니 예수라는 이름이 백성을 위해 자기 자신을 주셔서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심이라는 의미가 되는 것이요, 그것이 바로 구원입니다. 예수가 내 안에 들어와 계심으로 우리가 아버지와 함께 사는 것입니다. 보혜사 성령, 임마누엘의 영이 임하면 그러므로 계속 떠나지 않고 우리와 함께 사십니다.


(4) 자녀의 영: "아빠 아버지"라 부르짖게 하심
그러므로 본문 3절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육체로 마치겠느냐고 묻는 것입니다. 2절에서 보혜사 성령은 갈라디아서 2장 20절의 임마누엘의 영, 떠나지 않는 그리스도가 내 안에 사시는 그 영입니다. 그러니 성령이 떠나가지 않는데 어찌 어제 성령을 받고 오늘은 안 받은 것처럼 하냐고 책망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열매를 갈라디아서 5장에서 보기 전에 이 부분을 읽어야 합니다. 즉, 갈라디아서 3장 2-5절, 4장 6절의 말씀입니다. “너희가 아들이므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갈 4:6). '아바'라는 말이 우리나라 말로 '아빠'와 같습니다. 그야말로 친근하게 여기는 말입니다. 성경에서 '아바 아버지'가 나오면 성경의 세 군데를 생각해야 합니다. 먼저는 겟세마네에서 예수님이 기도하실 때입니다. 성경 전체를 통해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르며 기도한 것이 유일하게 이곳입니다. 이 호칭이 바로 갈라디아서 4장 6절과 로마서 8장 15절에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 2-5절에서, 성령은 율법의 행위가 아닌 듣고 믿음으로 말미암았다고 하는데, 이 성령은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르는 자녀의 영이라는 것이요, 이 성령을 받으면 갈라디아서 5장의 열매를 맺고 성령의 소욕으로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갈라디아서의 중요한 주제 중 하나가 보혜사 성령임을 알 수 있습니다.

정통 신학자들은 성령이 약하다고 하는 말들이 있는데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갈라디아서를 답답하게 생각하면 안 됩니다. 보혜사 성령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 성령은 예수께서 떠나가지 않는 임마누엘의 영입니다. 지금 우리와 영원토록 함께 계십니다. 이 땅에서만 있는 것이 아니라, 천국에 가서도 이 영으로 삽니다. 말세에 다른 영이 있지 않습니다. 말세에는 내가 누군지를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오늘 새벽에 본 데살로니가후서의 교훈이기도 합니다.


3)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


(1) 성령의 임재의 무조건성: 무조건적 선택/은혜
이 성령이 떠나가시지 않습니다. 그러니 성령으로 시작했다가 육체로 마치냐고 책망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조건을 가지고 뽑습니다. 그러니 조건이 안 되면 쫓아냅니다. 직장생활 하시는 분들은 항상 남들의 평가를 생각해야 하니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무조건적으로, 자격에 관계 없이 자녀 삼으셨습니다. 무조건적인 선택, 무조건적인 은혜로 시작했으니 변함이 없습니다. 세상 만물을 짓기 이전에 이미 선택하였으므로 내 죄가 아무리 더럽고 답답하다 하더라도 내 죄를 이기는 것이 하나님의 경륜과 섭리, 작정, 성령의 역사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예민한 사람이 성령으로 시작했다가 육체로 마치는 경향이 있습니다. 구원 받아서, 성령 받아서 좋다고 하다가 너무 예민해서 실족합니다. 이런 사람의 특징은 못할 때 절망하는 것입니다. 교만보다 더 무서운 것이 괜한 겸손입니다. '저는 안되요'라고 하며 절망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그러니 로마서 8장은 성령에 대해 이야기하고 그 8장 후반부에 이 말씀이 나오는 것입니다. 이런 고백은 내가 잘해서, 내가 믿을 만하다고 여겨서 나오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영, 성령으로 시작했으니 이런 고백이 가능한 것입니다. 가장 혈기 왕성하여 예수 믿는 자를 잔멸하러 가는 길에 있는 사도 바울이 회심하였듯, 어찌보면 그보다 더 율법에 흠이 많고 죄 많은 우리도 이 고백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은혜로 내 죄를 보고 회개하고 빛이 들어오는 이 모든 일이 동시에 다 일어납니다. 성령의 역사로 말입니다.

 

(2) 다 이루신 그리스도의 의가 구원의 전과정에 미친다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육체로 마친다는 말은 은혜로 시작했다가 공로로 마친다는 말과 같습니다. 여기서 ‘마친다’(epiteleó)는 단어가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실 때 나옵니다. 접두어가 빠진 단어이긴 합니다. 내가 이루어 마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다고 했습니다. 시작은 하나님이 하시고 끝은 내가 보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다 이루었다는 것은 칭의도 성화도 살아남도 살아감도 모두 예수님의 의로 인한다는 것입니다. “다 이루었다”(요 19:30). 이것을 믿어야 성도입니다. 영안을 열어 직시하고 거침이 없어야 하는데 이는 곧 예수님의 공로 외에 다른 것이 없어야 하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마치는 것은 그리스도의 영으로, 곧 그리스도의 공로와 은혜로 마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로 마치는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갈라디아서가 절묘한 단어와 표현을 많이 쓰는 것입니다.
마친다는 단어를 또 볼 수 있는 곳이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telos)이 되시니라”(롬 10:4). 우리 대신 율법을 다 순종하고 이루셔서 이제 예수를 믿기만 하면, 나는 율법을 지킬 수 없는 자이지만,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이 말씀과, 본문의 성령/은혜로 시작해서 성령/은혜로 마쳐야 한다는 말씀이 연결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오래 믿었다고 인정하지 않습니다. 교회 질서상 장로를 정하기는 하지만, 신앙의 원리는 첫사랑, 처음 믿은 곳으로 돌아가라고 합니다. 그래야 성숙한 사람입니다. 처음은 전적인 은혜로 예수가 나를 붙들어주신 그 순간입니다. 요즘 구약을 보고 있으나 이스라엘 백성에게 그 순간은 출애굽 사건입니다. 우리가 항상 읽는 십계명의 첫 부분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실 때 절대적, 인격적, 단회적, 법정적으로 주셨습니다. 성령은 인격이므로 이 모든 것이 한번에 들어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다른 것이 없습니다. 영적인 철이 들어야 한다고 생각을 했는데, 그것은 다름아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을 기뻐하는 것입니다. 세상을 좋게만 살아가면 좋겠는데 하나님의 뜻이 그렇지 않습니다. 신학교에서만 살아봐도 그렇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이 옳다고 하는데 하나님의 뜻은 다를 수 있다는 말입니다. 별나게 행동하라는 것이 아니라 이런 은밀한 부분이 있습니다. 우리 십자가지기교회 성도님들은 나를 부인하고 은혜로 해야 합니다. 어쨌든 사람이 나를 욕하더라도 내가 못난 것이 사실이니 내가 나한테 욕할 때 관대하듯 나를 부인하고, 아내가 남편에게 남편이 아내에게 서로 충고하고 하더라도 참고 참는 부분이 있어야 합니다. 사실상 예수님이 다 이루셔서 우리에게 주무시지도 졸지도 않고 돌보십니다.
연초에 말씀을 듣고, 말씀을 붙들고 기도하고, 기도하면 참으라고 나누었습니다. 대체로 처음 두 가지는 하는데 기다리지를 못합니다. 농부가 안 기다리면 매번 설익은 것만 따서 버립니다. 다 가꾸었으면 영글 때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오래 참음이 그러므로 성령의 은사입니다. 인내로 영혼을 얻는 것입니다. 내가 참는 것이 아니라 성령이 내 안에 있어서 신실하시므로 그것을 믿고 참는 것입니다.
건강도 맡겨야 합니다. 내가 열심히, 건강히 살려고 노력하되 그러나 하나님이 하셔야 합니다. 지혜도 그렇습니다. 열심히 배우고 머리 쓰지만 아무리 해도 하나님의 지혜는 못 쫓아갑니다. 하나님이 하셔야 합니다. 아히도벨이 아무리 지혜로웠어도 하나님이 후새를 쓰시면 아히도벨은 안됩니다. 세상적으로는 아히도벨이 월등했습니다.


(3)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괴로움을 당하셨으니,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헛된 괴로움은 없다
본문 4절은 "너희가 이같이 많은 괴로움을 헛되이 받았느냐 과연 헛되냐"라고 합니다. 이것은 한 단어만 생각하면 풀립니다. 사도 바울이 환란과 핍박과 기근과 괴로움을 받았습니다. 여기서 '괴로움'(paschó)은 예수님이 받으신 고난에 대해 쓰인 단어입니다. 이 모든 단어, 개념들이 예수님과 연결되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괴로움을 당하셨으므로 우리의 괴로움이 유익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 잔이 넘치는 것입니다. 그러니 결국 내가 헛수고하고 허탄한 것으로 잃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큰 일을 하는 것처럼 안보여도 우리는 열매 맺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4절입니다.
요새 교회에서 행복이라는 말을 많이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언제 인상을 많이 썼습니까? 경외와 눈물과 인상쓰는 것을 구별하지 못합니까? 그저 좋다고 춤추고 기쁘고 그래야 합니까? 교회가 그런 곳입니까? 내밀하고 은밀한 기쁨이 있는 곳이 교회입니다. 이런 기쁨을 보혜사 성령이 주십니다. 떠나지 않으십니다. 오늘 예배 후에도 내일도 모레도 보혜사 성령이 함께 계시고 붙들어 주심을 믿으니 기쁩니다. 주 떠나가시면 내 생명 헛되다고 하는 찬양도 있는데, 이는 주님이 안 떠나가심을 고백하는 노래입니다. 안 떠나 가십니다.


4) 성령으로 말미암은 믿음의 들음


(1) 성령, 들음, 믿음의 동시성
2절 율법의 행위가 아닌 듣고 믿음으로 바로 이 보혜사 성령을 주시는 것입니다. ‘듣고 믿음’은 원어로 '들음의 믿음'으로 되어 있습니다. 주의할 것은 내가 듣는 것을 조건으로 하여 믿고 성령 임하는 것으로 보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사실, 이것은 동시에 일어난 일로 보아야 합니다. 듣는 것과 믿는 것은 성령이 임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성령이 임하지 않으면 성경이 말하는 들음이 아닙니다. 여기서 말하는 것은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입니다(롬 10:17). 중요한 것은 어떻게 믿느냐가 아닌 누구를 믿느냐 입니다. 내가 믿으면 그분이 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믿음과 들음이 동시에 있습니다. 우리는 믿어야 들리고 들어야 믿습니다. 믿지 않고 듣는 것을 이성주의라고 합니다. 또한 듣지 않고 믿는 사람을 맹목주의라고 합니다. 신비주의라고 합니다. 우리는 믿음도 들음도 같이 있습니다. 그래서 듣거든 믿는 줄 알고 믿거든 듣는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육체로도 밥을 먹으면 배부를 줄 압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영적인 것은 따집니다. 더 가닿지도 못하는데 말입니다. 우리는 듣거든 믿는 줄 알고 믿거든 듣는 줄 알아야 합니다.


(2) 성령으로 말미암은 '아멘'의 고백
성령의 역사로 듣고 믿는 것이 동시에 일어나는 것을 단어 하나로 하면, "아멘"이라고 합니다. 성경에서 듣는 것은 듣고 순종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고후 1:20). 보혜사 성령이 임하면 아멘의 역사가 우리에게 일어납니다. '그러하리이다'라는 '아멘'이 있습니다. 세상은 이것을 우리에게 줄 수 없습니다. 수천 날 교회 옆에 살아도 '아멘'이 안 됩니다. 그러나 성령이 임하는 순간 사도 바울이 바뀌고 삭개오가 바뀌고 베드로의 고백이 나옵니다. 성경이 임하면 내 안에 아멘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돌보다 더 굳은 내 마음이 쪼개집니다. 우리가 기도를 해도 말씀을 들어도 '아멘' 합니다. 이것이 본문의 말씀입니다.
보혜사 성령이 일하면 듣고 믿고 믿고 듣습니다. 율법의 행위로가 아니라 말입니다. 무엇을, 누구를 믿느냐가 중요합니다. 우리만 잘 신앙생활한다고 말할 필요는 없으나, 올바른 것을 믿고 그것에 '아멘' 하면 그 안에 믿음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3. 결론


갈라디아서의 본문 말씀은 성령의 대원칙을 이야기합니다. 이 말씀이 생각 외로 숨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잘 기억해야 합니다.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그저 여기 찔려도 저기 찔려도 아멘 나오도록 노력해 봅시다. '아멘'이 바로 그리스도의 의가 내 것이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가 살아남으로 내가 살고 그가 우리와 십자가에 함께 못박혔나니 하는 아멘의 순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