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포하는 교회

주일낮예배


갈라디아서 강해

선포하는 교회  |  주일예배 설교


갈라디아서 강해


           

[20190818][십자가지기교회 주일낮예배: 갈라디아서 강해(19): 그리스도의 복음]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 (갈 3:10-11) 문병호 목사

관리자
조회수 474


[20190818][십자가지기교회 주일낮예배: 갈라디아서 강해(19): 그리스도의 복음]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 (갈 3:10-11) 문병호 목사


*음성파일: 게시물 하단 "관련링크"에서 청취 혹은 내려받기 가능합니다.  


(갈 3:10)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에 있나니 기록된 바 ㄷ)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모든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갈 3:11)또 하나님 앞에서 아무도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ㄹ)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하였음이라



<녹취록>


1. 오직 그리스도의 복음만 믿음


갈라디아서는 그렇게 긴 서신서가 아니지만 복음의 진리가 핵심적으로 전개되어 있습니다. 갈라디아서의 사도 바울의 어체는 아주 긴급합니다. 전문적인 용어들도 적시적소에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종교개혁이나 신학적 논의를 할 때 본서는 로마서 못지 않게 중요하게 여겨집니다. 지난 주에는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가 아브라함의 복을 누린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본문에서는 10절의 "무릇"(gar)이라는 접속사를 눈여겨 보고자 합니다. 이 단어가 자주 나오는데 이것은 긴박한 상황 전개와 대조를 위한 목적으로 쓰이고 있습니다. 2장 16절 이후는 '율법의 행위가 아닌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성령으로 시작했다가 육체로 마칠 수 없음',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 '아브라함의 복' 등을 묘사합니다. 율법 행위에 속한 자는 복 아래 있는 자가 아니라 저주 아래 있는 자인 것을 본문은 대조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갈라디아서는 다른 복음이 없고, 오직 그리스도의 복음만 있음을 간절히 제시하고 있습니다.



2. 믿음으로 안다


1) 하나님이 영적으로 보고 듣게 하신다


우리가 믿음을 가지면 눈이 열립니다. 상투적인 표현이긴 하지만 사실 그렇습니다. 믿음을 가지면 귀도 열립니다. 남이 못보는 것을 듣고 보게 됩니다. 엘리야도 세미한 음성으로 들었습니다. 호렙산에서 말입니다. 사무엘은 대제사장도 듣지 못한 소리를 새벽에 들었습니다. 엘리사 시대에 아람, 즉 오늘날의 시리아가 북이스라엘에게 계속적으로 전쟁에 지는 가운데 도단성에 하나님의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아 그를 죽이고자 할 때, 하나님이 보여 주셔서 보게 된 불 병거의 군대를 보게 됩니다.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하나님이 영적인 귀와 눈을 열어 보고 듣게 하십니다.


2) 하나님의 자기 계시의 목적: 하나님을 인정하기


하나님이 인류를 지으신 목적은 우리가 하나님을 인정하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드러내기를 기뻐하시고 찬미 받기를 기뻐하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송영합니다. 여호와를 높이고 찬송합니다. 그리고 여호와의 행사를 기억하고 기념합니다. 이런 것을 하나님은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은 만물을 지으시고 만물 아래, 만물 너머에, 만물이 있기 전에 영원히 계시는 분이시므로 하나님이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시면 우리는 그분을 알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알려 주시고 보여 주셔야 알고 보고 듣습니다.


(1) 스스로 계신 하나님
하나님은 스스로 계심을 우리에게 알려 주십니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 또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출 3:14).


(2) 창조주 하나님
스스로 계신 분은 지음을 받지 않은 분이요 만물을 지으신 분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신을 만물을 지으신 창조주심을 보여 주십니다.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롬 1:20). 영적으로 우리의 눈이 열리고 귀가 열리면 들립니다. 육적이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뭐라고 들리느냐, '여호와가 계시다', '여호와가 행하셨다'는 것입니다. 꽃을 봐도 바람이 불어도 비가 내려도 그렇습니다. 녹음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인정하는 것입니다. 왜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깨닫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같은 것을 보아도 말입니다. 만물 안에 하나님의 능력과 신성이 밝히 보이거늘 변명치 못하는 것입니다.


(3) 구속주 하나님
그리고 하나님은 자기 자신이 우리의 구원주이심을 드러내시고 우리가 인정하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구약에서 ‘애굽 땅 종 되었던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네 하나님 여호와'라는 말씀에 '아멘' 해야 십계명을 받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구원주이심을 알려 주시는 것이고 우리가 인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 3:16).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롬 8:32). 갈라디아서 3장 1절, 십자가가 밝히 보이므로 우리가 이것을 아는 것입니다. 곧 주님이 날 위해 죽으신 것을, 하나님이 이 세상을 사랑하사 독생자를 보내주시고 그 아들이 죽기까지 내어 주신 것을 알고 믿는 것입니다. '십자가가 밝히 보이거늘' 우리를 꾈 자가 없는 것입니다.



3. 믿음으로 행한다


1) 계시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행하심을 안다


이것을 우리가 계시라고 합니다. 계시라는 것은 육안으로 보이지 않으나 하나님이 우리의 심령에 빛을 내려주셔서 우리가 빛에 반응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 빛이 임하면 생명을 얻고(요 1:4) 진리를 알고 은혜의 삶을 사는 것인데(요 1:14) 이런 사람이 바로 믿음을 가진 자입니다. 하나님의 성령의 빛이 임하면 하나님의 존재와 그가 창조주이심과 구주이심을 알려 주고 진리 가운데 은혜를 알려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알려 주시니 하나님이 행하신 것을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2) 계시의 반응인 믿음을 일으키시는 하나님


여호와가 우리에게 알려 주시는 것은 모두 그가 나를 통해 행하시는 것을 알려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명령하실 때 나를 통해 여호와께서 행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자신의 뜻을 우리에게 알리십니다.


3) 하나님의 약속이 있는 명령인 율법


(1) 율법을 우리에게 명령하시고 친히 이루심
하나님이 부족하고 모자라고 더 채워져야 해서가 아니라 여호와를 인정하고 아버지 삼으라고 우리에게 명령하시고, 명령하신즉 하나님이 친히 이루시는 것입니다. 그 명령이 바로 율법입니다.


(2) 하나님의 자기 계시인 율법
하나님의 어떠하심과 뜻을 알려 주시는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법입니다. 다른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법을 통해 자신을 알리십니다. 우리에게 거룩하라고 명령하시는 분은 거룩한 분이요, 의로우라고 명령하시는 분은 의로우신 분이요, 서로 사랑하라고 명령하시는 분은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3) 율법의 달콤함: 하나님이 이루신다
다윗이 일생 동안 하나님 앞에서 가장 즐거워하고 추구한 것이 바로 여호와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면서 주의 기이한 법을 믿음의 눈을 보는 것입니다. 그 법에는 하나님의 뜻과 어떠하심이 있습니다. 밤새 침상에서 눈물로 기도하는 것이 여호와의 법을 알게 해 달라는 것인데, 그것이 바로 여호와를 아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도하는 것입니다. 여호와는 우리가 실물이나 형상을 보고 알지 않습니다. 여호와는 자신의 법 가운데 우리에게 자신을 알려 주시고 법을 알면 여호와를 만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편 119편을 보면 176절로 히브리어 각 22자마다 8절씩 지어서 율법에 대해 노래하는 것입니다. “내 눈을 열어서 주의 율법에서 놀라운 것을 보게 하소서”(시 119:18). “주의 얼굴을 주의 종에게 비추시고 주의 율례로 나를 가르치소서”(시 119:135). 성도의 기도가 바로 이것입니다. 주의 얼굴을 비추시고 율례를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밥과 건강을 너머, 주의 율례를 나에게 가르치시기를 기도하는 것, 하나님의 법과 뜻을 갈구하는 것이 성도입니다.
“주의 손이 나를 만들고 세우셨사오니 내가 깨달아 주의 계명들을 배우게 하소서”(시 119:73). 다윗은 최고 크기의 통일국가를 이루었습니다. 다윗은 도망다닌 만큼 국가를 주셨습니다. 핍박당한 만큼 영화를 누리게 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연단을 주시는 것입니다. 다윗이 그 나라를 다스린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여호와의 법을 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다윗의 통치방식입니다. 하나님 앞에 지식을 내세우며 나가지 마십시오. 아무 것도 모르고 출입을 모르니 나를 빚으신 하나님이 알려 주시라고 기도하십시오. 출입을 모른다는 것은 똥오줌을 못 가리는 어린아이 같다는 것입니다.
“내 소유는 이것이니 곧 주의 법도들을 지킨 것이니이다”(시 119:56). 우리의 재산은 잔고나 소유가 아닌 주의 법도를 지킨 것입니다. 하늘나라 가져가는 유일한 소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천국의 소유는 내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애통하며 살았는지 입니다.
“여호와는 나의 분깃이시니 나는 주의 말씀을 지키리라 하였나이다”(시 119:57). 여호와는 나의 분깃이라고 할 때 그것은 그의 곳간에서 내가 먹는다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곳간과 땅이 내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 방법은 그의 말씀을 지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행위주의라고 볼 수 있지 않나 싶은데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게 하면 밤새 다윗이 기뻐하며 침상에 눈물을 흘리며 율법을 구하지 않습니다. 여호와의 율법에는 은혜가 있습니다. 즉 법이 있으면 친히 이루십니다. “내가 주의 법을 어찌 그리 사랑하는지요 내가 그것을 종일 작은 소리로 읊조리나이다”(시 119:97). 율법에 대해서는 19편과 119편이 가장 중요합니다. 19편은 119편의 요약입니다.
은혜가 없으면 법이 저주입니다. 율법의 행위에 속하여 있는 자에게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어떻게 그의 법을 사랑한다고 합니까? “나의 생명이 항상 위기에 있사오나 나는 주의 법을 잊지 아니하나이다”(시 119:109). 다윗이 얼마나 위경에 처하고 쫓겨다녔습니까? 창끝 앞에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때 다윗은 그 가운데 주의 법을 잊지 않는다고 합니다. 성도 여러분, 힘들고 어려운 일이 있을 때 말씀 찾으십시오. 엉엉 울면서 "주여 말씀하소서"라고 기도하십시오. 지금 말씀하시고 지금 들려 달라고 여호와의 말씀을 구하십시오. 협착한 길,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가더라도 여호와의 말씀이 시온의 대로를 열어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기쁘고 우리의 마음에 즐거움을 줍니다. 영안을 열어 주고 힘을 줍니다. 안 되는 일이 다 되는 것처럼 보이고 하나님 안에서 다 됩니다. 다윗도 그랬습니다. 성경의 한 절도 수사(修辭)처럼 읽지 마십시오. 다윗의 생명은 항상 위기 가운데 있었지만, 그 가운데 주의 율법을 잊지 않았습니다. 가장 위태로운 가운데 주의 법을 구한 것입니다.
“내가 주의 계명들을 사모하므로 내가 입을 열고 헐떡였나이다”(시 119:131). 다윗은 어린아이와 같은 열심이 있었습니다. 내가 주의 계명들을 사모하므로 내가 입을 열고 헐떡였다고 합니다. 헐떡이는 것은 짐승이 하는 것입니다. 다윗은 짐승이 목마를 때 헐떡이듯이 주의 율법을 사모했다는 것입니다.



4. 하나님의 율법


1) 율법은 의롭고 거룩하며 선하며 신령하다


본문에서 우리가 먼저 율법에 대해서 말씀을 살펴보았습니다. 이것은 율법은 결코 그 자체가 잘못된 것이 아님을 보이기 위함입니다. 율법에는 문제가 없습니다. 지키는 사람이 문제입니다. 율법은 의롭고 거룩하고 선하고 신령하다고 했습니다. “이로 보건대 율법은 거룩하고 계명도 거룩하고 의로우며 선하도다 그런즉 선한 것이 내게 사망이 되었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오직 죄가 죄로 드러나기 위하여 선한 그것으로 말미암아 나를 죽게 만들었으니 이는 계명으로 말미암아 죄로 심히 죄 되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율법은 신령한 줄 알거니와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에 팔렸도다”(롬 7:12-14).


2) 죄인은 율법을 지킬 능력이 없다


그런데 사람이 죄가 있으면 율법은 저주 아래 사람을 묶습니다. 우리는 율법을 바라보기는 하되 율법을 지킬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구원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로마서 7장 24절에 스스로 곤고한 자라고 합니다.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따르려 하지만 육체로는 죄의 법에 매여 있다고 합니다. 구원받은 성도라도 은혜가 떠나면 그 율법은 여전히 나를 묶고 있습니다.


3) 의의 종인 성도는 죄가 아닌 의에 매이기에 곤고함이 있다


그것이 바로 로마서 7장 24절, 25절의 말씀입니다. 여기서 곤고한 자라고 하는 것은 분명히 구원받은 자입니다. 사도 바울입니다. 곤고하다는 것은 믿지 않은 사람들이 하나님 받을 때 일어나는 일이 아닙니다. 죄의 종은 의에 대해 아무 신경을 쓰지 않습니다. 자유롭습니다. 의의 종은 의에 매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우리가 매이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듣고 마음이 상하고 아프면 그것이 바로 의의 종인 것입니다. 곤고한 자입니다. 의의 종은 하나님의 말씀에 매입니다. 그것이 의의 종입니다. 죄인들은 죄 지을 생각만 하지만 의인들은 죄에 대해 신경쓰지 않으나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에, 하나님의 말씀에 매인다는 것입니다.


4) 성도는 말씀을 지키며 살기 위해 은혜를 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듭난 성도인 우리는 죄를 지으며 살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럴 때 믿음을 구해야 한다는 것, 그것이 본문 말씀의 요지입니다. 이제 구원 받았으니 내 능력으로 말씀 지키고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그러다가 못 지키면 좌절하고 하나님의 자녀됨을 의심하는 것은 거꾸로 된 것입니다. 오죽하면 사도 바울이 자기 육신이 죄의 법에 매여 있다고 했겠습니까? 갈라디아 교회가 구원은 믿음으로 받고 이후의 행위는 자기 자신의 힘으로 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 교회에 대해 지금 진리의 말씀을 주는 것입니다. 믿음에서 믿음으로입니다. 은혜 위에 은혜입니다. 성령으로 성령에 이릅니다. 시작도 '성령으로'이고 그 이후에도 '성령으로'입니다. 거룩한 삶도, 생명을 얻은 것도, 칭의와 성화 모두는 '성령으로', '은혜로'입니다. 다윗이 노래한 것은 구원 받은 성도의 모습입니다. 구원받은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이제 은혜로 받습니다. 율법을 행위가 아닌 은혜로 받는다는 것입니다.
아이 성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이제 스스로 힘으로 해 보려고 하니 하나님께서 패하게 하십니다. 여리고 성에서는 믿음으로만 행하게 하시니 승리했는데 말입니다. 항상 그렇습니다. 처음 사랑을 회복해야 한다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처음 사랑은 아직 단단한 것을 먹지 못할 때입니다. 그럼 면에서 약합니다. 그러나 처음 사랑의 특징은 100% 사랑입니다. 어린아이들은 약하지만 부모님께 매입니다. 장성하지는 않았으나 전적으로 기대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처음 사랑을 회복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디에서 멀어졌는지 처음 사랑으로 돌아가라는 것입니다.



5. 하나님의 절대 의 앞에서 서라


본문 11절은 하나님 앞에서 아무도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다고 합니다. 이것은 이미 갈라디아서 2장 16절에서 확정된 것입니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갈 2:16). 11절에서 "하나님 앞에서"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절대적입니다. 절대적인 의와 거룩과 선이십니다. 하나님의 절대성에 비추어 우리는 하나님 앞에 서야 합니다.
사람과 비교하면 안 됩니다. 상대주의는 안 됩니다. 저 사람보다 저 성도보다 내가 낫다고 말하면 안 됩니다. 이것도 역시 처음 사랑입니다. 처음 사랑일 때는 하나님 앞에 나 혼자 섭니다. 그러나 지나다 보면 사람들과 비교합니다. 신학교도 그렇습니다. 입학 전에는 구석에서 산중에서 기도합니다. 단독자로 하나님 앞에 섭니다. 그러다가 기숙사 들어와서 동기들과 있으면 사람들이 보이는 것입니다. 심지어 어느 전도사님이 생활이 안 좋다고 투서가 들어 옵니다. 저 사람은 태도가 좋지 못하니 내가 같이 살기 힘들다고 말입니다.
하나님은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는 완전한 빛이시며 만홀히 여기심을 당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도 자기를 내세우지 못하며 하나님은 우리의 중심, 생각과 심사를 헤아리십니다.



6. 사람은 온전치 못하여 율법에 의해서는 아무도 의롭지 못하다


"하나님 앞에서" "율법으로 말미암아"라고 합니다. 이것은, ‘율법 안에서’와 같은 의미입니다. ‘안에서’는 ‘의해서’로도 해석 가능합니다. 그래서 11절, 하나님 앞에서 아무도 율법에 의해서 의롭다 함을 받지 못한다고 봐도 됩니다. 율법에 의해서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율법에 의해서는 아무도 의롭다 함을 받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아무도"는 헬라어로 대명사입니다. 이 말은 곧 사람이 잘났다고 율법으로 하나님 앞에서 될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즉, 율법이 문제가 아니라 사람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율법은 거룩하고 신령합니다. 그러나 사람이 제대로 된 자가 없는 것입니다. “자유롭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천하는 자니 이 사람은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약 1:25). 거울은 문제가 없는데 거울 앞에 선 내 모습이 추하다는 것입니다. 경찰은 문제가 없는데 범죄자가 문제라는 것입니다. 율법은 우리를 도우려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문제인 것입니다.



7. 믿음의 복은 율법의 복과 같다


“행위가 온전하여 여호와의 율법을 따라 행하는 자들은 복이 있음이여 여호와의 증거들을 지키고 전심으로 여호와를 구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시 119:1-2). 주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합니다. 여호와의 복에는 복이 있습니다. 지난주 7-9절에서 본 것처럼 믿음으로 말미암은 아브라함의 복이 있습니다. 그 복이 율법에서 누리는 복과 다르지 않습니다. 율법이라고 하면 행위로 생각하고 공로로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율법은 언약백성에게 복 주시기 위해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시절을 쫓아 과실을 맺는다고 하고 잎사귀가 마르지 않는다고 합니다. 주야로 율법을 묵상하는 자들은 말입니다.
율법으로 의롭게 되거나 구원받지 않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율법은 폐지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우리는 주야로 하나님의 법을 내 눈을 열어 보아야 합니다. 내 눈을 열어 주의 말씀에서 놀라운 것을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 말씀 붙드는 게 하나님을 붙드는 것입니다. 그것 외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받은 것이 진리의 영입니다. 그 영을 받으면 하나님의 말씀, 진리 계시가 우리 안에 역사하는 것입니다. 주의 말씀은 내 발의 등이요 내 길의 빛이라고 이야기합니다.



8.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율법에 나아간다


그런데 사람이 문제입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법은 내 발의 등과 내 길의 빛인데 사람이 먼저 타 죽습니다. 사람이 죄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법이 문제가 아니라 사람이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율법을 헐떡이면서 다윗과 같이 사모해야 하는데, 정작 율법 앞에 서면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11절 후반부,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우리는 믿음밖에 없습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삽니다. 율법을 헐떡이면서 찾고 주야로 찾되 우리에게는 율법으로 율법에 나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씀을 믿음으로 나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후반부에 의인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산다고 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오면 우선 나는 할 수 없다는 것과 은혜로 하나님이 이루시리라는 두 단계가 항상 있습니다. 옛 것이 죽고 새 것이 들어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빛이 임하면 이 두 단계가 항상 있습니다. 먼저 더러운 것 부정한 것을 태우고 여호와의 법에 거하게 하십니다. 이것이 믿음의 역사입니다. 율법에 대해서도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법이 우리에게 임하면, 거룩하라고 하고 각종 행위를 가르치십니다. 그러나 율법주의가 아닙니다. 은혜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언약 가운데 주신 것이 율법입니다. 진리를 알려 주시면 은혜를 주시는 것, 그것이 믿음의 세계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 법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법을 알려 주셔서 우리가 그 안에서 애통하고 의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애통하는 상한 심령을 기뻐한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임하면 순간 애통함이 생기는 것입니다. 아직 완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를 찌르고 우리의 무능을 보이거든 하나님이 나를 떠났다 하지 말고 하나님이 나에게 은혜 주시는 과정이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라는 고백의 의미입니다. 그러니 이 말을 한 다음 장에 양자의 영이 나오는 것입니다.



9. 자기 자질로서 율법을 준수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입니다. 지난 주 7-9절에서 봤습니다. 본문 10절은 율법 행위에 속한 자라고 합니다. 율법 행위에 속했다는 것에는 전치사 '에크'(ek, ~로부터)가 사용됩니다.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은 자들'로도 번역할 수 있습니다. '율법으로 말미암은 자들'입니다.
지난 주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믿음이 시작이고, 도구고, 본질이고, 믿음으로 믿음에 이른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본문 10절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도 동일합니다.
율법이 시작이고, 도구고, 율법이 본질입니다. 율법으로 시작하고 마치는 자들입니다. 율법이 시작이라는 것은 자기 자질이 시작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무슨 일이든 자질로 시작하면 안 됩니다. 아침에 깰 때 무슨 일이든 '은혜로라' 하면서 시작해야 합니다. 그리고 율법이 도구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믿음과 은혜가 도구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율법이 본질이 아닙니다. 은혜로 거듭나고 은혜로 삽니다. 아무것도 없어도 '은혜로라' 하면 여호와가 어디에 있든 동행하여 채워 주십니다. 사렙다 과부처럼 엘리야처럼 말입니다. 율법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저주 아래 있습니다. 은혜는 그저 이렇게 잘 받아 먹으면 됩니다. 그것이 축복입니다. 부자 청년에 비해 베드로는 볼품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베드로를 제자로 데려가십니다. 갈라디아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엇인가 끊임없이 하라고 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저주는 여호와로부터 멀어지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사는 것이 성도입니다.



10. 결론: 율법을 은혜로 누리라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믿음으로 거듭나는 도를 전하니 ‘무슨 일을 해야’ 천국에 가는지 묻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답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요 6:29). 하나님이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라고 하십니다. 제자들은 복수로 여러 일을 물었으나 예수님은 단수로 하나님의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주의 의로운 규례들로 말미암아 내가 하루 일곱 번씩 주를 찬양하나이다 주의 법을 사랑하는 자에게는 큰 평안이 있으니 그들에게 장애물이 없으리이다 여호와여 내가 주의 구원을 바라며 주의 계명들을 행하였나이다”(시 119:164-166). 주님이 나를 구원하실 것을 바라고 계명을 행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행하는 것은 은혜 가운데 행하는 것이지 내가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호와여 내가 주의 구원을 사모하였사오며 주의 율법을 즐거워하나이다”(시 119:174). 은혜로 다 해 주실 것이니 지키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명령하시거든, 찌르고 지시하시거든, 내 자질 따지지 말고 은혜로 헤아리십시오. '아멘' 하고 종이 여기 있사오니 쓰시라고 고백하면 명령하신 분이 이루십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뭐든지 행하라고 할 때 할 수 있고 없음을 따지면 율법의 행위에 속한 자로서 율법의 헤아림을 받는 저주가 있습니다. 모든 일을 하시되 은혜로 누리십시오. 그것이 주의 일을 하는 것이요 즐거운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