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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331][십자가지기교회 주일낮예배: 갈라디아서 강해(2)] 사도 된 바울 (갈 1:1) 문병호 목사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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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331][십자가지기교회 주일낮예배: 갈라디아서 강해(2)] 사도 된 바울 (갈 1:1) 문병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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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 1:1)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 된 바울은  



<녹취록>



1. 사도 바울이 된 사울


본문에서 바울은 자신의 사도 된 것이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음을 선언하고 있습니다. 바울이라는 이름은 헬라화된 로마식으로서 그 뜻은 '작다'입니다. 본래 바울은 사울이었습니다. 베냐민 지파에 속한 자입니다. 베냐민 지파의 사울이라고 하면 사울 왕입니다. 그러니 어릴 때 바울의 이름인 사울은 히브리말로 '권위가 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사울과 바울이라는 이름은 그 뜻이 정반대인 것입니다. 사울이라는 말이 가장 의기 차고 내 능력이 있고 실제 사울 왕이 그런 사람이었다면. 바울은 그렇지 않습니다.
갈라디아서에서 바울은 사도권을 변호하면서 시작합니다. 바울은 이방의 사도로 불립니다. 바울도 가는 곳마다 유대인들이 있었고 그들에게 핍박을 많이 받았습니다만, 하나님은 특히 사도 바울을 유대의 경내를 넘어서는 이방인들의 전도자로 세우셨으니 그에게는 이방인의 사도라는 의식이 강하게 있었습니다.



2. 의문시 되었던 바울의 사도권


로마로 교회의 축이 옮겨지기 직전, 초대 예루살렘교회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스데반의 핍박을 계기로 흩어지게 됩니다. 그런데 당시 예루살렘의 지도자는 예수님의 동생인 야고보였습니다. 야고보는 대단한 자입니다. 기도도 많이 하고 의인이고 많은 사람들이 따르고 무엇보다 율법을 잘 지키는 사도로서 예루살렘교회의 장로였습니다. 그는 야고보서를 쓴 저자이기도 합니다. 야고보의 지도를 받던 예루살렘교회는 믿음으로 구원을 이루는 것을 말하지만 여전히 율법에 대한 강조점을 가지고 있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야고보서도 보면 행함이 있는 믿음의 중요성을 강변합니다. 그러니 사람들에게 사도 바울이 전하는 복음은 믿음만 강조하기에 사도 바울이 제대로 된 자가 아니요, 그의 과거 행적을 이유로 사도권을 부인하게 되기까지 합니다. 사람들은 사도 바울의 가르침을 야고보의 것과 다른 것으로 여기고, 가룟 유다를 대신하여 사도들이 제비를 뽑아 세운 맛디아와도 그가 다르다고 하여 사도 바울의 사도권을 의심합니다. 다메섹 도상에서 사도 바울이 예수님을 만난 일에도 불구하고 사도 바울이 사도가 아니라는 말이 퍼졌고, 갈라디아교회에도 이런 말이 퍼지기 시작했습니다. 왜냐하면 갈라디아에 율법 문제가 여전히 남아서 율법을 잘 순종해야 구원에 이른다는 주장이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물론 열매로서의 율법 순종이 맞기는 한데 예수님의 은혜로만이 아니라 행위로 구원에 이르고자 하는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복음은 부수적인 것이요 끝내는 율법과 행위가 주가 되는 일이 어디에나 있는 것입니다. 사실 믿는다고 하면 은혜의 세계이므로 ‘잘’이라는 말이 나오기 어렵습니다. 잘 믿는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전적인 은혜이므로 할 말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믿음이라는 말을 하면서 나의 ‘잘 믿음’을 내세우고 다른 사람을 낮게 보기도 합니다. 교회에서는 자기를 치는 복종이 있어야지 남을 판단하는 것이 있으면 안되는 것입니다. 갈라디아교회에도 이런 경향이 생긴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바울이 전하는 복음은 율법에 대한 삶을 강조하지 않고 믿음만 말한다고 하여 사도 바울을 열두 사도들보다 열등하다고 말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3. 사도: 사람이 아닌 하나님에 의해 보냄 받은 자


그러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사람으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전적 은혜이기도 하고, 구체적으로 사람들이 맛디아와 같이 제비로 자신을 뽑은 것이 아니라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또한 최종적인 권위가 사람에게 없음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사람들이 뽑은 것이 아니고, 내 자질로 목회하는 것이 아니므로 누가 나를 비난해도 욕을 얻어 먹어도 하나님이 세우셨으니 그 자리에 있는 것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이 세운 것이기 때문입니다. 끝내는 교회를 누군가는 붙들어야 하고 교회의 예배를 붙들어야 하기 때문에 그것을 던지는 것이 양보고 겸손이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의 직분과 소명은 양보할 수 없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어디에도 내가 사도가 아니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겸손하지만, 모든 것에 연약함을 보이지만, 자기가 사도가 아니라고는 말하지 않습니다. 왜요, 그것은 사람이 세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세운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에게 말미암은 것도 아닙니다.
사도라는 말은 보냄을 받은 자를 의미합니다. 영어로 'apostle'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헬라어에서 나온 것입니다. 헬라어 'apostolos'는 보냄을 받은 자라는 의미입니다. 수동태입니다. 내가 원해서 누구도 사도가 될 수 없습니다. 다윗의 일곱 형들은 원했으나 아무도 기름 부음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산중에 거해도 사무엘이 와서 기름을 부어 주었습니다. 내 뜻대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종이 주인보다 크지 못하고 보냄을 받은 자가 보낸 자보다 크지 못하나니”(요 13:16). 보냄을 받은 자가 사도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보냄을 받은 자의 권위, 권세는 보낸 분의 권위와 권세에 의지하는 것입니다. 누가 보냈느냐, 그것이 바로 권위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보냈다면 사람의 수하밖에 되지 않습니다. 겨우 해야 백부장, 천부장, 만부장이 될 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보낸 사도는 보낸 자보다 크지 않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이 보내셨으니 그 권세와 권위가 하나님께 있음이요, 둘째는 하나님보다 커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높임을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세례 요한의 고백과도 같습니다. 이 두 가지가 분명해야 합니다. 사도에게는 이 두 가지 권위가 있다는 것입니다.



4. 예수 부활과 사도성


본문 후반부에서 바울은 특히 부활의 사건을 생각하면서 자신을 말합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 된 바울은"(갈 1:1). 정오 쯤에 하늘에서 홀연한 빛이 내리게 하시며 바울에게 말씀하신 예수님은 부활하고 승천하신 영화로운 분이십니다.


1) 바울의 인간적 조건


(1) 정통 히브리인으로서 출중한 인물
사울은 본래 다소 사람입니다. 그는 자신에 대해 많이 이야기하지 않는데 빌립보서 옥중서신에 보면 그가 부득불 자기에 대해 이야기합니다(빌 3:5-6). 또한 사도행전 22장에는 3차 전도여행을 마치며 결박을 예상하고도 예루살렘에 들어가 잡힙니다. 그 자리에서 군중들이 바울을 죽이려고 하는데, 천부장과 백부장이 군중을 말릴 때 바울이 그 백성들에게 자신이 누구인지 말합니다. 자신의 신분을 밝힙니다. 자신이 로마 시민권자인 것과 자신이 누구였는지 직접 히브리말로 밝힙니다. 그곳에서 사도 바울이 바로 누군지를 알려집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에 대해서 사실 거의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로마인들에게는 로마 시민권자라는 것과 이스라엘인들에게는 베냐민 지파요 최고의 학파에서 수학한 율법으로 말하면 열심이 넘치고 흠이 없는 자로 소개합니다. 그는 로마에 가서 전도하고 싶었으므로 부득불 복음의 진보를 위해 자신을 밝힙니다. 세상적으로 바울은 아주 뛰어난 자입니다. 하나님 나라 입장에서는 큰 핍박자였습니다. 그런 청년 사울을 하나님이 하나님 앞에서 작은 자로 바꾸셔서 큰 일을 이루시는 것입니다. “나는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빌 3:5-6). 베냐민 지파라 함은 당시 유대인들 중에서도 이방인과 혼혈이 심했기에 자신이 순수한 히브리인, 순혈 히브리인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또한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고 말한 것은 그러므로 당시 자신을 능가할 자가 없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가말리엘 문하인 것은 역시 율법, 학문적으로도 최고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가 어디에서 자랐느냐 하니 유대인으로 길르기아 다소에서 나고 자랐다고 합니다. 다소 지방은 소아시아에 속한 곳입니다. 데살로니가 마게도니야 지방이 아닌 소아시아 지방입니다. 갈라디아, 즉 오늘날의 터키 지역입니다.

 

(2) 스데반 순교의 증인
이렇듯 가장 뛰어난 율법에 대한 계보를 잇고 있는 그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스데반 집사의 순교 자리입니다. 그 순교의 증인이 바로 사울이 된 것입니다(행 7:58). 이 당시는 이미 오순절 성령이 이미 임했고 하나님의 큰 일이 예루살렘에서 이스라엘 언어 외에 다른 언어, 즉 방언의 역사로 일어난 때입니다. 그러면 이 말씀으로 땅끝까지 가야 하는데(행 1:8), 그 일을 결국 하나님이 하십니다. 예루살렘교회를 흩으심으로 말미암아 그렇게 하십니다. 예루살렘에 큰 박해를 통해 그렇게 하시는데 그 시점은 스데반의 순교입니다. 그래서 교부 터툴리안은 순교자의 피가 교회의 씨앗이라고 한 것입니다. 성령을 받았으면 피의 역사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각국의 순교자들이 흩어져 복음이 전파되는데 그것의 시발점이 스데반의 순교입니다.
본디오 빌라도의 증인 됨이 없으면 예수님이 죽지 않으셨듯, 스데반을 죽인 자는 청년 사울입니다. “또 주의 증인 스데반이 피를 흘릴 때에 내가 곁에 서서 찬성하고 그 죽이는 사람들의 옷을 지킨 줄 그들도 아나이다”(행 22:20). 스데반이 죽고 난 뒤 예루살렘에 큰 박해가 일어납니다. 이때부터 순교가 일어납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도 순교합니다. 이 때부터 흩어지기 시작합니다. 야고보가 순교할 당시는 이미 예루살렘에는 예수를 믿는 자가 거의 남지 않고 흩어진 때입니다. 오늘날도 예루살렘에 예수를 믿는 자가 거의 없습니다. 그쪽이 예수를 죽인 자리이고 모리아산,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친, 시온의 다윗 성이 있는 곳인데 예수를 믿는 자들이 없고 다 흩어집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이렇듯 오묘합니다.
청년 사울이 혈기가 넘쳐서 기독교인을 없애려고 예루살렘의 각 집에 들어가 색출하여 대제사장에게 넘깁니다. 그리고 이제 다메섹에까지 가서 유대인들을 잡아오려고 합니다. 오늘날의 시리아 지역입니다. 그때 사울은 위협과 살기가 등등했습니다(행 9:1).


2) 바울의 사도성


그리고 사도 바울의 사도권은 다메섹 도상에서 이루어집니다. 예수님과 같이 지내고 예수님에게 파송을 받은 열두 사도와 다르게 말입니다. 누가 봐도 명백한 이것과 달리 사도 바울의 사도권 부여는 믿기 어려운 것이 사실입니다. 어제까지 술주정쟁이요 난봉꾼이 오늘 목사가 된다면 누가 믿겠습니까? 말로는 은혜가 크다고 하지만 그래도 이왕이면 어릴 때부터 착한 사람이 목사로 적절하다는 말을 합니다. 하지만 반드시 그게 답이 아닙니다. 평온한 장소와 시기에는 그게 맞기도 합니다. 하지만 사나운 시기, 핍박과 순교가 심한 시기에는 거친 자들을 세워 쓰시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면 사람들이 믿지 못합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이 부득불 말하는 것은 단 한 가지, 예수님이 전적인 은혜를 베푸셨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신앙의 간증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어릴 때 교육을 받고 잘 자랐으나 어떤 자는 인생의 끄트머리까지 있다가 알게 모르게 교회 구석에 가 기도하게 되기도 합니다. 사도 바울만큼 교회를 위해, 주를 위해 살고 핍박 받은 자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세상 사람들이 인정할 만한 사도의 명백한 증거가 없는 것 같습니다.


(1) 빛과 함께 받은 소명, 성령 충만, 세례
그에게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의 빛이 홀연히 비추었습니다. 가장 혈기가 솟구칠 때 하나님이 다스리신다는 말을 하기도 합니다. 위협과 살기 가득한 사울에게 하나님의 빛이 비추인 것입니다. 내게 조금이라도 부드럽고 흠모할 만한 것이 있을 때 하나님이 도움을 주셔서 조금 비추는 것이 아닙니다. 완전 정반대로, 예수 믿는 자를 잔멸하겠다고 살기등등한, 젊고 학식과 혈통과 율법에 완벽한 그 사울에게 완전한 예수님의 빛이 비춘 것입니다. 세상에서 아무리 잘나고 뛰어나고 착해도 예수님을 박해한 것입니다. 사울은 누구에게 욕한 적이 없고 기도도 금식도 많이 했을 것입니다. 율법에 완전한 자라고 했으니 말입니다. 그러나 그가 다 가지고 있으면 뭐합니까? 자기의 완전함을 가지고 예수를 대적했습니다. 그런 그에게 홀연히 빛으로 임한 것입니다. 땅에 납작 엎드릴 때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고 친히 말씀하십니다. 그러자 ‘주여 누구입니까?’라고 묻습니다. 예수님께 묻는 것이 시작입니다. 사울에게 이미 빛이 쳤을 때 주님에 대한 질문이 생긴 것입니다. 완전히 바꿔 놓은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나는 네가 박해하는 나사렛 예수’라고 하십니다. 사울의 눈이 사흘간 멀고 그 가운데 주님이 사울에게만 나타났을 뿐 아니라 아나니아에게도 나타납니다. 그러나 아나니아는 사울에게로 가려고 하지 않습니다. 사울을 두려워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주께서 이르시되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얼마나 고난을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 하시니”(행 9:15-16). “나더러 또 이르시되 떠나가라 내가 너를 멀리 이방인에게로 보내리라 하셨느니라”(행 22:21). 이미 사울은 이 사흘 동안 눈에 비늘이 덮이고 이미 성령이 임해 기도하던 중 아나니아가 와서 기도하고 눈이 밝아질 때 사울이 성령충만을 받고 세례를 받습니다. 주의 사도권을 받은 것입니다.


(2) 부활하신 예수의 흔적: 약할 때 강함
이후 눈을 뜨자마자 회당에 가서 말씀을 전하는데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요 그리스도이자 주라고 합니다. 다메섹에 그리스도인들을 잡으러 갔던 그가 불과 사흘만에 완전히 바뀌어 한 첫 말이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인 것(행 9:20)과 예수를 "그리스도"라 한 것(행 9:22)입니다. 이것은 베드로의 고백이기도 합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 16:16). 제가 이것을 깨닫고 깜짝 놀랐습니다. 그 부활하신 주 예수를 사울이 만난 것입니다. 이것이 사도성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가 사도라는 말할 때, 특별히 고린도교회에게는 ‘진리의 영이 내 안에 있다’고 많이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내 안에 계시고 그는 본문에서 특별히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 된 것으로 이야기합니다. 부활의 사도라는 것입니다. 부활이 중요합니다. 죽임을 당하시고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 주님을 그가 만난 것입니다.
“생명의 주를 죽였도다 그러나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그를 살리셨으니 우리가 이 일에 증인이라”(행 3:15). 이것이 초대교회의 설교의 세 가지 주제입니다. 생명의 주를 우리가 죽였고, 하나님이 그를 살리셨고, 우리가 그 일에 증인이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부활하신 주님을 붙들고 그로 말미암아 모든 것을 그의 사도성과 연결합니다.
그래서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가 밝히 보인다고 합니다. 지난 주에 말씀드린 것처럼 갈라디아서의 요지는 십자가입니다. 십자가에 못박힌 것이 밝히 보이거늘 누가 우리를 꾀며, 우리에게 십자가 외에 다른 것을 말하느냐 말입니다(갈 6:13-14). 그런데 이 십자가는 부활의 십자가입니다. 내 육체를 십자가에 못박고 새 것이 되는 부활의 십자가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녔다고 할 때, 예수의 흔적은 세상적인 강함이나 뛰어남이 아닙니다. 오히려 사도 바울에게는 눈의 가시, 눈병과 같은 것, 그리고 연약함이 생겼습니다. 사도 바울이 사도성으로 내세우는 것은 오히려 약할 때 강함입니다. 예수의 흔적은 연약함입니다. 야곱에게 예수의 흔적이 있다면 환도뼈가 빠진 것입니다. 십자가는 가장 연약하지만 부활의 십자가인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사도성을 이야기할 때, 특히 고린도후서에서, 내가 강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진리를 가진 것과 내가 약할 때 강하며, 부득불 자랑하노니 내가 약한 것을 자랑한다고 한 것입니다. 여리고 성이 무너질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강한 병기가 아닌 할례 받은 몸으로 절뚝거리면서 돌았습니다. 예수의 흔적은 강한 것이 아닌 약해서 강한 것입니다.



5. 결론


한 주간 말씀을 준비하면서 사도 바울의 사도성은 어디에서 찾아야 하는지 말씀을 묵상했습니다. 사도 바울의 사도성은 바로 홀연한 빛이 임하여 이방의 사도로서 받은 소명과 성령 충만과 세례와 예수의 흔적, 즉 예수 십자가의 부활의 권능에서 찾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사도 바울의 사도성과 잘 연결된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 나는 사도 중에 가장 작은 자라 나는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 받기를 감당하지 못할 자니라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 15:8-10). 사도 중에 가장 작은 자요,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하여 사도라 칭함을 감당하지 못하나, 나의 나된 것은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요 다른 사도보다 더 수고하였으나 이것도 오직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의 은혜임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보냄 받은 자를 사도라 부른다고 넓게 이해한다면 우리는 모두 다 사도입니다. 사도, 즉 보냄을 받은 자가 보낸 자보다 크지 못합니다. 사도의 권세와 권능은 보내신 자에 의지합니다. 우리는 약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강하시니 우리도 강합니다. 그러나 세례 요한과 같이 겸손해야 합니다. 우리는 그의 신발끈을 묶기도 부족함을 알아야 합니다. 나는 망하고 그분은 흥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의 사도권을 볼 때 이것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갈라디아서를 이해하는 데 사도 바울의 사도성은 매우 중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