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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407][십자가지기교회 주일낮예배: 갈라디아서 강해(3)] 은혜와 평강, 그리고 영광 (갈 1:2-5) 문병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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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407][십자가지기교회 주일낮예배: 갈라디아서 강해(3)] 은혜와 평강, 그리고 영광 (갈 1:2-5) 문병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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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 1:2)함께 있는 모든 형제와 더불어 갈라디아 여러 교회들에게 
(갈 1:3)우리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갈 1:4)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자기 몸을 주셨으니
(갈 1:5)영광이 그에게 세세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녹취록>



1. 갈라디아서의 목적


1) 서신에는 목적이 있다


편지에는 수신자, 발신자, 그리고 쓴 목적이 드러납니다. 이 세 가지가 없는 편지가 없습니다. 받는 사람이 없는 것은 수필이지 편지가 아닙니다. 그리고 편지에는 뚜렷한 목적이 있습니다. 그러니 구체적인 사건, 형편, 무슨 말을 할 것인지가 뚜렷이 드러나 있습니다. 목회서신은 목회를 구체적으로 권면하는 서신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디모데전·후서, 디도서를 목회서신이라고 합니다. 옥중서신은 옥에서 썼다는 의미도 있으나 옥에서 기도하고 권면하는 내용입니다. 그중에서 우리가 갈라디아서나 고린도전·후서, 새벽기도 때 본 데살로니가전·후서는 굳이 목회를 어찌하라는 것도 아니고, 옥중에서 쓴 것도 아니며 전체적으로 보면 선교 가운데 교회를 지키고 양육하고 교회의 성도들에게 권면하는 그런 내용들을 진실되게 담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어떤 구체적인 일로 말미암아 그것을 해결하면서 성도들을 권면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린도전·후서는 교회 안의 여러 문제에 대해 여러 파가 생기고, 그리고 구제, 정결한 삶을 꾸리는 것, 결혼, 은사, 섬김과 직분의 문제 등을 어떻게 할 것인지에 쓰다 보니 내용이 아주 길어집니다. 데살로니가전·후서는 데살로니가 교회가 여러가지로 칭찬을 받지만 어려움이 많았던 상황에서 쓰인 것입니다. 그 가운데서도 말씀을 열심히 전해 믿음의 역사, 사랑의 수고로 칭찬을 받는데, 시한부 종말론이 들어와 삶이 나태하고 게을러지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러니 사도 바울이 이 심각함을 밝히고 데살로니가전서를 쓴 지 불과 몇 달 만에 데살로니가후서를 쓴 것입니다. 그리고 사전에 문제를 막기 위한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2) 갈라디아서의 목적


갈라디아서는 오직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는 도(道)와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 점점 교회가 정착하고, 초대 교회 당시 소아시아에서 가장 크게 부흥을 하는 가운데, 믿음으로 시작했다가 속히 다시 육체로 돌아가는, 소위 내 공로, 내가 잘 믿는다고 하는 판단이 들어옵니다. 성도들은 판단하면 안됩니다. 교회에는 판단이 들어오면 적신호라고 보면 됩니다. 허물을 덮고 사랑하는 곳이 교회이지 판단하는 곳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판단은 하나님이 하십니다. 그런데 갈라디아 교회에 이런 것들이 들어오니 사도 바울이 서신을 씁니다. 4절을 보면 서론이지만 가장 중요한 복음의 핵심이 들어 있습니다. 평소에도 제가 많이 인용하는 내용이기도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자기 몸을 주셨으니”(갈 1:4). "자기 몸을 주셨으니." 그리스도께서 소유를 주시러 온 것이 아니라 자신, 몸, 존재를 주시러 오신 것입니다.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말입니다. 이렇게 사도 바울이 편지 서문에 정확히 구원의 진리를 바로 직설적으로 말하는 것은 드뭅니다. 아버지의 뜻을 따라 아들이 이 땅에 오셔서 악한 세대, 즉 모든 것이 혼탁하고 불확실하고 절망이 많고 사람들이 흩어진 그런 당시 시대에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해 자기 몸을 주셨다고 뚜렷이 편지 서술의 목적을 이야기합니다.



2. 갈라디아서의 발신자


1) 함께 있는 모든 형제와 더불어


오늘 이 편지의 발신자는 2절, "함께 있는 모든 형제와 더불어" 쓴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편지를 쓸 때는 여러 동역자들의 이름을 같이 쓰는 경우가 많습니다. 데살로니가전·후서는 실루아노(실라)와 디모데의 이름으로 편지를 쓴다고 합니다. 고린도전·후서와 빌립보서, 빌레몬서 역시 사도 바울이 디모데와 같이 쓴다고 합니다. 주로 저자 소개는 1절에 나오고 여러 사람들의 이름과 더불어 편지를 씁니다. 갈라디아서는 "함께 있는 모든 형제들과 더불어" 편지를 쓴다고 합니다. 갈라디아서는 1차 전도 여행 때 개척한 교회입니다. 사도 바울이 2차 전도 여행을 하면서 이곳에 편지를 쓰는 것입니다. 저술 시기는 조금씩 다를 수 있으나, 형제들이라고 함은 헬라어로 ‘아델포이’(adelpoi)입니다. 빌립보서 4장 21절은 ‘형제들'과 '성도’라는 표현이 두 번 나옵니다. 성도는 헬라어로 ‘하기오스’(hagios), 거룩하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니 어떤 학자들은 형제들을 주의 일꾼으로, 성도는 일반 성도로 주석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동일한 빌립보서 4장 8절은 무엇에든지 "형제들아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 받을 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 받을 만하며"라고 합니다. 그러니 문맥상 형제들은 모든 성도를 지칭한다고 보아도 될 것입니다. 사도 바울과 일을 하는 주의 종들과 성도들이 모두 이 편지를 쓴다고 보면 되는 것입니다.


2) 형제


(1) 예수와 함께 형제 됨
원래 우리나라는 이름을 잘 안 부릅니다. 그런데 자꾸 호칭을 하다 보니 '형제,' '자매'라는 말이 쓰이게 된 것으로 보입니다. 좋은 일입니다. 초대 교회에서 형제라고 함은 교회 안의 고유한 표현입니다. 그러니 교회 안의 사람들이 아니면 이런 표현을 쓰지 않습니다. 일반 사람들이 정치를 한다고 '형제'라는 표현을 쓰지 않습니다. 이 형제들이라고 하는 것은 상당히 성경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당장 알다시피 주 안에서 형제 됐다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그래서 예수와 함께 형제 됐음을 의미합니다. 그러니 예수 믿는 자들은 더이상 계보가 내려가지 않고 그저 예수와 형제일 뿐입니다. 영적으로는 전부 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맏형이자 첫아들 되시고, 우리는 그와 함께 접붙임을 받은 그의 동생들입니다. 그러므로 초대 교회에서 형제들이라는 것은 신앙으로 거듭난 사람들의 생명을 표현하는 말입니다. 우리가 예수와 함께 생명을 얻고 한 피 받아 한 몸 이룬 형제가 된 것입니다. 찬송에도 있듯 말입니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딤전 2:5). 우리는 다 형제, 자매입니다. 아이들도 어른들도 영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와 형제 됨으로 다 한 계보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초대 교회에서는 이 호칭은 생명을 함께하는 호칭입니다. “몸이 하나요 성령도 한 분이시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받았느니라 주도 한 분이시요 믿음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요 하나님도 한 분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엡 4:4-6), “거룩하게 하시는 이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한 근원에서 난지라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히 2:11).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형제라 부르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형제와 자매라는 호칭을 써야 합니다.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롬 8:17).


(2) 한 신앙고백을 함
형제라는 말은 남자에 대한 것이 아니라 모든 성도를 통칭하는 것입니다. 남자들만 예수님을 많이 섬긴 것이 아닙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부활의 첫 증인이요, 자주 장사 루디아가 마게도니아 첫 번째 빌립보교회를 개척하는 데 힘을 도운 자입니다. 우리는 한 세례를 받고 한 입교를 하고 한 신앙고백을 합니다. 요새 목에 칼을 대며 신앙고백을 시키지는 경우는 없지만, 제가 공부했던 스코틀랜드의 장로교 전통에도 언약 성도들이 있는데, 그때 예수 그리스도와 여왕 중 하나를 머리로 선택하도록 강요받았습니다. 여왕을 선택하지 않으면 다 죽임을 당한 것입니다.


(3) 선택과 부르심 받은 공동체
또 달리 이야기하면 형제와 자매는 선택과 부르심의 공동체입니다. 한 부르심을 받았고 부르심의 한 소망 가운데 있으므로 아무도 형제 자매됨을 막을 자가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형제 자매가 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와 한 피를 받아 한 몸이 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에 참예하는 성례 공동체요, 예수 그리스도를 땅끝까지 전하는 증인 공동체입니다. 또한 종말론적인 연합체입니다. 지상과 천상의 삶은 잇대어 있습니다. 단절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 지상의 우리 교회는 인격적으로 천상의 교회와 잇대어 있고 교감하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종말론적인 의미를 갖습니다.
한국전쟁 때 보면 교회 단위로 피난가고 움직입니다. 일반 사람들은 각자 흩어져 가지만 교회 다니는 사람들은 교회 단위로 피난 가고 순교하고 그렇습니다. 이런 것이 바로 형제입니다. 평소에는 아무것도 아닌 것 같으나 환란과 어려움, 힘든 일이 있을 때는 이 악한 세대에서 함께 움직이는 것입니다. 로마의 압제 가운데 지하 교회에 함께 한 자들을 형제 자매로 부른 것입니다.
어떤 주석을 보니 성도에게 교회는 제2의 집이라고 합니다. 저는 교회가 제1의 집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사는 터, 아파트를 천국에 가져가지 못합니다. 제가 예전에 살았던 대림아파트를 요즘 지나다 봐도 아무 의미가 없고 기억도 없습니다. 어릴 때야 산 곳이 의미가 있으나 어느 정도 크면 부질없는 것을 느낍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한 자녀로 거듭난 형제라는 것입니다. 본문 4절에서 봤으나, 형제라는 말과 예수 그리스도가 자기 몸을 우리에게 주셨으니라는 것은 서로 연결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자기 몸을 주신 우리가 형제들입니다. 그래서 형제들의 마음으로 간곡하게 갈라디아 교회에 전하는 것입니다.
근 10년 전에 군산 노회에서 초청을 받아 가본 적이 있습니다. 그분들이 제 신학을 좋게 여겨 가본 적이 있는데 옥정교회라는 곳에서 전도사님이 오셨습니다. 그분이 권하여서 옛날에 군산 연못가에 있는 교회를 가 보았습니다. 그런데 지금도 장년부에서 그 당시의 연을 계기로 그 교회에 헌금을 한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사실상 우리가 교회가 죽었다 믿음이 없다고 해도 한국 교회가 소망이 많습니다. 네팔, 캄보디아, 인도네시아 곳곳에 가서 이런저런 말이 많다고 해도 어쨌든 선교사를 보내고 선교사가 갑니다. 선교사들이 군데군데 가 계십니다. 이런 것들을 보면 한국 교회가 아직 살아 있다고 생각합니다.
본문에서 중요한 것은 결국 형제 됨인데, 이것이 있으니 교회가 서로 돕는 것입니다. 서신도 쓰고 말입니다. 고린도 교회가 그렇게 다투어도 헌금을 해서 예루살렘 교회를 돕습니다.

본문 4절은 예수 그리스도가 악한 세대에 우리를 구속하기 위해 자기 자신을 주셨음을 말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자기 자신을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자신을 주심은 신분입니다. 그러니 형제가 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밥을 10년 해 먹여도 형제는 아닙니다. 그러나 몸을 주셨으니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형제가 된 것입니다. 이 섭리와 은혜가 교회 안에 흐르는 것입니다. 그러니 주의 종도 섬기시고 연장자를 귀하게 여기시고 이런 모든 일들이 교회 안에서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하나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갈라디아의 여러 교회에 사도 바울이 서신을 쓰는 것입니다. 우리가 오늘날 군산의 교회들에게 편지 쓴다고 잘 하지 않습니다. 개교회를 지목하여 쓰지 말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의 모든 교회에게 씁니다.



3. 인사말


1) 은혜와 평강


(1) 우리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그래서 3절은 은혜와 평강을 기원한다고 합니다. 또한 4절도 그러는데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따라서라고 합니다.

왜 성부와 성자의 이름을 쫓아서 그렇게 할까요?

당시는 유대인들의 핍박이 심했습니다. 특히 지금 갈라디아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율법, 유대주의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구원을 받아도 율법주의를 지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구약이 완성되었는데 말입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만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성부와 성자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삼위일체 신앙입니다. 그러니 인사말에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말한 것은 삼위일체를 말하는 것이요, 유대주의자들이 구약을 각색해 성자와 성령을 싹 빼 버리고 단일신론을 말하는 것에 경종을 울리는 것입니다.


(2) 아버지의 사랑과 아들의 공로
사도 바울의 서신을 보면 이런 말이 자주 나오는데 이 맥락을 이해하시면 됩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주 예수 그리스도, 아들의 공로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 3:16). 니고데모에게 한 말입니다. 니고데모는 바리새인, 지도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모릅니다. 성자를 모릅니다. 그러니 성부와 성자를 같이 말한 것입니다. “예수께서 그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서 이러한 것들을 알지 못하느냐”(요일 4:10). 아버지의 사랑과 아들의 공로가 함께 있습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롬 8:32). 아버지의 주권적이고 전적인 사랑 가운데 아들의 은혜가 임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아무 공로가 없습니다.


(3) 다 이룬 아들의 공로
어제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에서 요한복음 19:28-32 말씀으로 ‘다 이루었다’는 설교를 하였습니다. 이렇게 설교를 하면서 마음에 감동이 컸습니다. 제가 고등학교 때 지방에 살다가 대학교 때 서울로 오면서 많이 빈곤하진 않았으나 고되게 살았습니다. 다들 그렇게 살았습니다. 그런데 모처럼 시골에 내려가면 어머니께서 "밥 다 차려놓았다. 먹고 가라"라고 하십니다. 이 말이 그렇게 감사했습니다. 깨우지도 않으십니다. 어디 가든지 알아서 가되 밥 차려놨으니 먹고 가라고 하십니다.
밥 한끼도 그렇게 감사한데 예수님이 나 대신 못에 찔리신 것을 생각하니 얼마나 감사한지요. 내가 지금 내 손에 못이 찔려 아파야 하는데, 병에 걸려 신음해야 하는데, 모든 재판을 받아야 하는데 예수님이 아프고 고통받고 심판받아 죽으시고 끝내 다 이루신 것입니다.


(4) 은혜와 평강
아버지의 사랑이 전제되는 아들의 은혜, 이것을 우리에게 말하는 것입니다. 은혜 위에 은혜입니다. 이것이 임하면 아버지가 아들의 은혜로 우리를 안아주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평강입니다. 은혜와 평강입니다. 은혜는 아들의 공로로, 그 값을 우리 것 삼아 주시는 것입니다.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의 값이 우리를 위한 것이라는 말입니다. 내가 찔려야 할 가시에 예수님이 찔리신 것입니다. 막연히 관념적으로 생각하지 마십시오. 주님이 당한 고통과 고난은 현실입니다. 당장 내가 내일 당할 것을 대신 당해 주신 것입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전적으로 버림받은 자리에 우리를 대신하여 서 주시니 임마누엘을 누리고 갈함이 없는 것입니다. 그 은혜 가운데 하나님이 우리를 품어 주시는 것, 그것이 평강입니다. 평강은 하나님과 함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자리에, 우리는 우리의 자리에 있어야 평강이 있습니다. 하나님과 같이 되려고 하면 그것보다 불안한 것이 없습니다. 가룟 유다는 예수 그리스도의 뜻에 조건을 달고 따지다가 자기 이성을 이기지 못하고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 죽은 것입니다. 무지막지하게라도 하나님의 뜻에 "아멘" 해야지 내 뜻을 내세우면 안됩니다. 그것이 바로 평강입니다. 하나님께는 맡기는 것이지 따지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는 전능하신 조물주요 우리는 피조물이기 때문입니다. 아담과 하와의 죄가, 바벨탑을 쌓은 인류의 죄, 모든 범죄가 다 이것을 어기기 때문입니다. 제2계명, 하나님 외에 다른 것을 갖다 놓은 것, 우상을 섬기기 때문입니다. 항상 일을 할 때 하나님이 하신 일이 더 큰 보따리로 있음을 알고 평강을 누리십시오. 꼭 오늘 밤에 기도해 보고 결정하십시오. 하루는 기다려 보십시오. 이 평강 가운데 우리가 나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희락과 화평, 평강을 주십니다.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우리에게는 평강입니다.


2) 영광


(1) 은혜와 평강 가운데 영광으로 나아간다
이 은혜와 평강 가운데 우리의 삶은 끝내, 본문 5절, 영광을 돌리는 자리로 나아가야 합니다. 은혜와 평강 가운데 영광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자기 자신을 주신 은혜, 그것을 우리의 것으로 삼아 주시는 아버지의 뜻과 사랑, 즉 아들을 우리에게 주시는 그 가운데 평강을 누립니다. 그리고 이제 화목하게 됩니다. 하나님 안에서 화목합니다. 그러니 이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2) 잠잠하라
우리에게는 은혜가 있습니다. 은혜가 있으므로 평강이 있습니다. 성도는 두려워할 것이 없습니다. 저도 책을 쓰다 보면 끝에 다 가서 힘들 때가 있습니다. 마음 속에 여러 생각이 들고 정신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하는 시기입니다. 제가 하나님 품 안에 평강 가운데 있다면 다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샬롬이 있으면 열매를 맺습니다. 그리하여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은혜에 거하면, 평강이 있으면 열매는 맺힙니다.
그러니 우리 성도님들은 잠잠히, 넉넉히 있으면 됩니다. 불쑥 불쑥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 아니하실지라도"라고 하며 예수님이 다 이루신 것을 믿고 우리 죄를 위하여 자기 몸을 주신 것을 믿고 잠잠히 있으면 됩니다. 여기서 ‘위하여’는 우리를 대신하여 주신 것으로 보아도 됩니다. 또는 대표하여 그런 것으로 보아도 됩니다. 그러니 우리가 그 평강 가운데 거합니다.


(3) 자기를 부인하라
평강 가운데 일이 되는 것입니다. 평강하려면 자기를 부인해야 합니다. 겨울 내내 부인해서 꽃이 피는 것입니다. 겨울이 없이 봄이 없습니다. 겨울 내내 찬바람을 속으로 견디는 생명 작용이 없이는 봄의 꽃망울을 터뜨리지 못합니다. 겨울을 참아내는 생명 작용이 있으니 봄에 꽃을 피우는 것입니다.


3) 아멘


우리는 평강과 희락 가운데 열매를 맺습니다. 고난이 있더라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평강을 누립니다. 이 악한 세대에, 그 가운데라도 평강을 누립니다. 조급하거나 따지는 것이 아니라 말입니다. 그리하여 끝내 평강을 누립니다. 이 모든 것이 완전하고 그 뜻이 이루어진다고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뜻이 완전하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것이 바로 "아멘"입니다. 이 일이 우리에게 있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