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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616][십자가지기교회 주일낮예배: 갈라디아서 강해(10): 그리스도의 복음] 복음에 대적하는 외식 (갈 2:11-14) 문병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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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616][십자가지기교회 주일낮예배: 갈라디아서 강해(10): 그리스도의 복음] 복음에 대적하는 외식 (갈 2:11-14) 문병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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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 2:11)○게바가 안디옥에 이르렀을 때에 책망 받을 일이 있기로 내가 그를 대면하여 책망하였노라
(갈 2:12)야고보에게서 온 어떤 이들이 이르기 전에 게바가 이방인과 함께 먹다가 그들이 오매 그가 할례자들을 두려워하여 떠나 물러가매
(갈 2:13)남은 유대인들도 그와 같이 외식하므로 바나바도 그들의 외식에 유혹되었느니라
(갈 2:14)그러므로 나는 그들이 복음의 진리를 따라 바르게 행하지 아니함을 보고 모든 자 앞에서 게바에게 이르되 네가 유대인으로서 이방인을 따르고 유대인답게 살지 아니하면서 어찌하여 억지로 이방인을 유대인답게 살게 하려느냐 하였노라



<녹취록>



1. 베드로가 안디옥에서 외식을 하여 바울이 책망함


본문 말씀은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에 편지를 쓴 전체 이유를 드러냅니다. 한 사건이 나옵니다. 게바는 베드로입니다. 바위라는 뜻입니다. 베드로가 안디옥에 이르렀습니다. 안디옥은 최초로 선교사를 파송한 시리아에 있는 교회입니다. 거기에서 바나바가 바울을 데리고 가서 함께 1차 선교여행을 떠납니다. 아마 오늘 사건은 이 선교여행을 마치고 나서 일어난 일일 것으로 짐작합니다. 게바는 헬라어와 히브리어가 섞인 아람어로 바위라는 뜻입니다. 이것을 헬라어로 하면 페트로스, 베드로가 되는 것입니다. 또 본래 요한의 아들이니 바요나, 즉 요한의 아들 시몬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베드로의 고백에 대해 그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우겠다고 하여 게바라는 이름을 주신 것입니다. 이 게바라 불리는 베드로가 어떻게 보면 큰 일도 아닌 것 같은데 안디옥에서 이런 일을 한 것입니다. 안디옥은 도시 이름 자체가 왕의 이름이요, 로마와 헬라 간 교통의 요지이자 전략적 요충지였습니다. 특히 헬라인들이 많은 곳이었습니다. 아시아이지만 터키 쪽에 가까이 붙어있으니 말입니다. 헬라인들은 알다시피 할례를 거행하지 않는 이방인이요, 나면서부터 유대의 정결례를 당연히 지키지 않는 자들입니다. 유대의 음식과 의복과 제사의 의식을 지키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게바가 이방인들과 음식을 먹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 예루살렘 교회를 지도했던 야고보가 이 안디옥에 어떤 일로 일행을 보냅니다. 그런데 그들을 보내니 갑자기 게바가 그들, 즉 할례자들을 두려워하여 떠나 물러갔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방인들과 음식을 먹으면 안되는 것이 유대법인데 예루살렘 교회에서 보냄받은 사람이 오니 두려워하여 물러난 것입니다. 그러니 이것을 본받아 바나바도 그렇게 했습니다. 어떻게 보면 음식 하나, 아직까지 옛 버릇이 남아 있어서 그렇겠다고 볼 수 있기도 한데, 본문은 그를 대면하여 책망했다고 합니다. 얼굴을 맞대고 그 자리에서 베드로를 사도 바울이 꾸짖은 것입니다. 그리고 14절은 모든 사람들 앞에서 책망했다고 합니다.
지난 주에 본 바와 같이 사도 바울은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을 맡았고 게바는 할례자들에게 복음 전하는 것을 맡았다고 합니다. 즉 유대인에게 복음 전하는 일을 베드로에게 주로 맡기신 것입니다. 성경에 나오지 않아 정확히 알 수 없으나 그는 예수님 승천 후 15년간 예루살렘 근처에 있다가 로마로 들어가 순교했다고 합니다. 즉 베드로는 유대인들을 담당한 것입니다. 그러면 신약시대에 전할 것은 음식과 절기와 제사와 정결례와 의복과 금식과 기도법을 폐한 예수님의 은혜의 복음의 구원을 전해야 할 것입니다. 히브리서에서 말하듯 모세의 율법이 아닌 멜기세덱의 반차를 쫓는 예수 그리스도를 전해야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베드로가 바울보다 더 강해야 합니다. 아예 모르는 사람들은 믿기만 하면 된다고 할 수 있지만, 유대인들은 오직 믿음과 은혜의 구원을 믿기가 더 힘드니 말입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그렇지 못한 것이었습니다.



2. 바울이 베드로를 책망까지 한 이유


1) 구원은 형식의 변환이 아니라 영생이다


그리고 이것이 사소한 일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복음을 가로막을 수 있고 생명의 구원의 길을 막을 수 있는 큰 일이기 때문입니다. 의식을 내세워 본질적인 구원의 도를 방해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대노하여 대놓고 책망한 것입니다. 복음은 그저 옷 하나 갈아입고 친구 바꾸는 차원의 일이 아닙니다. 복음은 유일하신 구세주인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고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입니다. —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고전 1:24) 그가 우리에게 능력과 지혜가 되신 것입니다. 우리는 형식과 의식과 절기와 단체의 습관이 아닌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입니다. 이 십자가에서 죽음이 생명으로 바뀌었습니다. 예수님이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의 저주의 자리에 서서 구원을 다 이루셨습니다. 강도가 낙원으로 가고 땅과 휘장이 갈라져 지성소 문이 열리는 그 자리에서 예수님이 구원을 이루셨습니다. 복음은 이것을 전하는 것입니다. 아무도 성소에 마음껏 못 들어가는데 십자가에서 성소의 휘장이 갈라집니다. 성소와 지성소를 막던 휘장이 갈라졌습니다. 인간이 가르면 아래에서 위로 가르나 하나님이 하시니 위로부터 갈라져서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 휘장은 그리스도의 육체라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구원받은 도는 십자가의 도요, 생명의 권능이요, 전인적으로 우리의 신분을 바꾸는 것입니다. —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 1:18).
예수님을 믿어 구원에 이르는 것은 그저 형식 하나 바꾸는 수준의 것이 아닙니다. 강도가 낙원에 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땅이 갈라지고 무덤이 생명을 토해내고 휘장이 갈라졌기에, 모세가 장막을 지은 이후 아무도 마음껏 들어갈 수 없던 그 자리에 이제는 누구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들어갈 수 있게 되었으니, 이 생명의 구원의 역사를 형식으로 가로막지 말라는 것입니다.


2) 외식은 그리스도께 나아가는 것을 가로막아서는 안 된다


믿음이 연약한 자는 딱딱한 것을 먹지 못하므로 배려하고 돌봐야 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도 화를 내신 때가 세 번 있으셨습니다.
첫째, 아이들이 오는 것을 제자들이 막을 때입니다. 예수님은 뭔가 예수님께 다가오는 것을 막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십니다. 그것이 바로 형식입니다. 그것을 성경에서는 장로의 유전과 전통이라고 합니다.
둘째, 외식하는 자들에 대한 것입니다. 마태복음 20장에서 일곱 번이나 외식에 대해 분노하십니다. 외식은 형식주의입니다.
셋째, 성전을 더럽힌 것에 분노하셨습니다.
이 셋의 공통점은 하나님의 임재를 가로막는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휘장이 갈라져 아무도 못 나아가던 지성소에 누구나 예수님을 믿으면 은혜로 나아갈 수 있게 됐습니다. 우리는 누구나 다 더럽고 연약한 자로서 지성소로 들어갈 수 없다가 드디어 나아갈 수 있게 됐는데 그 길을 형식으로 가로막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예수님이 싫어하시는 것이요, 사도 바울도 이 핵심을 안 것입니다. 모세도 80세에 다시 부름을 받았을 때 온유함이 지상에서 승했다고 합니다. 사도 바울도 온유한 자였습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빚어 가신 것입니다. 화내고 분내는 사람은 고통과 환란과 핍박과 기근을 당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바울이 베드로에게 분을 발한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주님을 먼저 만난 자임에도 생명을 가로막는 행실을 하여 바울로부터 책망을 받았습니다.


3) 그리스도는 무조건적으로 우리를 받아주셨다


하나님은 외모가 아니라 중심을 보신다는 것을 지난 주 말씀에서 봤습니다.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은 것만 중요합니다(갈 6:14). 하나님은 할례나 무할례의 외모가 아닌 중심을 보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울이 예루살렘에 갔을 때 기둥이라 불리는 야고보, 요한, 베드로와 나눈 말씀입니다. 베드로는 할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해 놓고는 오늘 본문에서 실수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십자가를 믿고 그 외에 아무것도 의지하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예수가 왜 그렇게 좋습니까? 그가 우리에게 길을 열어 주시고 용납하셨고 나를 받아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가 내 형식, 모양, 과거, 성격, 기질을 다 넘어서서 나를 받아 주셨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이 없는 것입니다. 누가 나를 받아 줍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를 다 받아 주십니다. 그리고 우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신다고 하셨습니다. 천국에 우리 거처를 다 예비해 놓으셨습니다. 그리고 그가 영을 내려 주셔서 우리가 구원받고 부활하고 거처에 가서 영원히 사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 길을 막지 말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주님은 무능하다고 간질병 걸렸다고 게으르다고 혼내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나에게 오는 것을 가로막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것에 대해 분노하십니다. 아까 말씀과 같이 외식하는 것을 싫어하시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3. 알면서도 외식하게 된 베드로


1) 이방인을 멀리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닌 인간의 전통


유대인들은 정한 음식과 부정한 음식을 가립니다. 오늘날도 유대인들은 다 지킵니다. 금식법도 지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방인에 대한 것입니다. — “이르되 유대인으로서 이방인과 교제하며 가까이 하는 것이 위법인 줄은 너희도 알거니와 하나님께서 내게 지시하사 아무도 속되다 하거나 깨끗하지 않다 하지 말라 하시기로”(행 10:28). 잘 아실 것은 이것이 구약이 아닙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잘못 만든 것입니다. 구약에서는 이방의 객이라도 이삭을 따지 말고 남겨 두어서 나그네라도 먹게 하라고 했습니다. 세상에서 이방의 객을 가장 잘 대접하는 것이 유대인입니다. 성전에도 이방인의 뜰이 있습니다. 제사는 드리지 못해도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이방인들을 경원시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절차를 정하신 것입니다. 후에 사람들이 잘못된 것들, 탈무드니 미쉬나니 하는 것들을 만들어 낸 것일 뿐입니다. 그것에 베드로도 젖어 있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베드로에게 하나님이 환상을 주십니다. 이때가 베드로가 기도하러 올라가는 제육시인데, 이것도 역시 베드로가 이전의 형식을 그대로 따른 것입니다. 기도 하는 것이 나쁜 것이 아니라, 기도를 공로로 삼아서는 안됩니다. 그런데 이때까지 베드로에게 기도는 분명히 이방인들에 대한 법과 같이 의식법의 일부로 지켰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방인과도 같이 앉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우리 주님은 이방인을 멀리하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의 십자가를 구레네 시몬이 지고 갑니다. 바리새인, 서기관은 십자가를 지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우리 복음입니다. 강도가 구원을 받습니다.


2)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않으신다


베드로가 기도하러 가는데 깜빡 잠이 들었는지 환상을 봅니다. 하늘에서 그릇이 내려오는데 각종 짐승이 들어 있습니다. 네 발 가진 짐승, 기는 짐승, 나는 짐승, 정한 것과 부정한 것이 섞여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다 먹으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유대인들에게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베드로가 그럴 수 없다고 두 번이나 거절하자 세 번째까지 말씀을 하십니다. —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행 10:15). 그리고 이제 하나님이 베드로를 고넬료, 이방 백부장의 집으로 보내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이방인들인 고넬료를 만나려면 한 자리에 앉아야 하고 먹어야 하기에, 하나님이 베드로에게 환상 가운데 먹으라고 하신 것입니다. 제가 이 말씀을 준비하면서 생각한 중요한 것은 기도하러 가는 것이 참 좋은 것이나 아직 형식주의가 그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막힌 담을 허물고 형제 자매로 말하고 있는데 베드로는 아직도 버리지 못한 것입니다. — “베드로가 입을 열어 말하되 내가 참으로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보지 아니하시고 각 나라 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다 받으시는 줄 깨달았도다”(행 10:34-35). 이제 베드로가 깨닫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않으시며 각 나라 중 하나님을 경외하고 의를 행하고 하나님을 간구하여 행하는 자를 기뻐하신다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3) 무오한 인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 베드로가 오늘 본문에서는 그렇게 행하고 있지 않은 것입니다. 그는 아직까지도 그것을 못 버리고 정작 유대인들이 나타나니 화들짝 놀란 것입니다. 바울은 책망받을 일이 있어서 그를 대면하여 책망했다고 합니다. 로마 카톨릭은 베드로가 무오했다고 가르칩니다. 그래서 베드로를 계승한 교황도 무오하고, 그것이 이어서 사제도 무오하다고 가르칩니다. 지난 번 사제가 선교지에 가서 추행한 뉴스가 있었습니다. 절대 그들은 그런 일에 대해 잘못했다고 하지 않습니다. 그저 우려한다고 할 뿐 절대 잘못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로마 카톨릭은 강해서 국법도 세상법도 가까이 가지 못합니다. 성당에서도 죄 많이 짓습니다. 그러나 여기에 보면 베드로도 틀렸습니다. 그러니 책망을 받습니다. 사람이 오류가 없는 것이 아니라 복음의 진리를 따라 바르게 행하지 않은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4. 외식은 본질을 잠식한다


1) 외식은 본질을 주지 못하고 멀어지게 한다


복음의 진리는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하나님의 뜻이면 누구라도 구원을 가로막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요나도 니느웨에 구원을 전하러 가기 싫었으나 박넝쿨의 교훈을 받아 전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외식을 우리가 멀리해야 합니다. 외식은 본질에서 멀어지는 것입니다. 본문 13절을 보면 남은 유대인들도 그와 같이 외식했습니다. 외식은 바깥으로 장식하고 꾸미는 것입니다. 외식은 빛보다 빨리 전염됩니다. 남은 유대인들도 그와 같이 외식하므로 바나바도 그와 같이 되었다고 합니다. 복음의 진리가 전파성이 있지만, 자기 자랑, 외식하는 것도 전염병같이 그 전염 속도가 굉장히 빠릅니다. 비본질적인 것과 가식적인 것은 결국 어긋나는 것입니다. 배고픈 사람에게 수박 껍질만 주어서는 안 됩니다. 외식은 그저 치장 정도가 아닙니다. 외식은 본질이 틀린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대면하여 책망하고 화를 내는 것입니다. 계속 수박 껍데기만 갖다주고 왜 안먹냐고 하면 말이 안되는 것입니다. 배고픈 자에게 음식이 필요하지 말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물론 말도 귀하지만 음식을 줄 마음 없이 말만 하는 것은 외식입니다.


2) 거짓되지 말라


우리 성도들은 그런 것을 멀리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말이 내 마음을 지배합니다. 한두 번은 재미있습니다. 그러나 말은 사르는 불과 죽이는 독과 같다고 야고보서에서 말씀하기에, 말을 말은 계속 놔두면 무섭습니다. 본질과 형식이 같이 있으면 그나마 나은데, 형식이 본질을 갉아먹어 종국에는 본질을 없애버립니다. 그래서 우리 성도님들은 거짓말 하면 안됩니다. 가장 나쁜 것은 하나님 앞의 거짓말입니다. 기도의 문이니 뭐니 다 막힙니다. 그러므로 항상 우리는 정직한 영으로 나를 새롭게 해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가슴을 치는 것은 아무리 해도 안 죽습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기뻐하십니다. 애통하는 상한 심령을 기뻐하십니다. 중심에 통회하는 자를 바라십니다. 시편과 호세아서에 계속 나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가식하는 것을 싫어하십니다. 그래서 사탄을 거짓의 아비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마귀 사탄이 에덴 동산에서 유혹할 때부터 거짓말을 합니다. 피조물이 하나님과 같이 될 수 있다고 합니다.


3) 율법의 실체이신 예수 그리스도

—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초하루나 안식일을 이유로 누구든지 너희를 비판하지 못하게 하라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골 2:16-17). 몸은 그리스도의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실체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몸이요 다른 것은 그림자, 거짓이라는 것입니다. 그림자는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실체를 만나야 합니다. — “다 같은 신령한 음식을 먹으며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그들을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고전 10:3-4). 신령한 반석은 그리스도입니다. 이제는 먹는 것이 신령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살과 피가 신령한 양식과 음료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성찬을 거행하는 것입니다. 이제는 예수를 먹고 마시는 것이지 음식법, 절기법, 제사법을 따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다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외식을 멀리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4)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여"


마태복음 23장은 외식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에 대해 말합니다. 마태복음 24장은 종말에 대해 예수님이 가장 잘 가르치신 말씀인데 그 바로 전에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외식을 책망하십니다. 일곱 번 말씀하십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여"라고 합니다.
첫째, 그들은 천국 문을 닫고 자기도 남도 모두 못 들어가게 한다고 하십니다.
둘째, 교인들을 형식으로만 몰아가 지옥의 자식이 되게 한다고 합니다. 껍데기가 본질을 나중에는 대체해 버립니다. 교회는 그저 모여서 교제하고 어떤 슬로건을 내걸고 무엇인가 하고, 그래서 우리가 만족하고, 그것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나중에 돌려서 영광 올리는 것이 아닙니다. "이 모든 것을 더하시리라"는 지난 주 말씀처럼, 우리가 안 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본질에 충실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때 내 영이 삽니다. 내 영의 감동이 일어나면 전인적으로 중생한 사람으로 지식, 의지, 정서의 새로움을 받아 하나님 앞에 서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됩니다. 내 영혼이 독수리와 같이 날아오릅니다. 오늘도 교회에 오는데 얼마나 청명함이 좋은지요. 십자가에서 제육시부터 어둠을 모아 물리치니 우리 영혼이 얼마나 정결하냐는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어둠을 다 깨드린 것입니다. 어제 잠시 비가 오더니 오늘 얼마나 깨끗하고 맑은지요. 이와 같습니다.
셋째, 바리새인들은 눈먼 인도자라고 합니다.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는 것입니다.
넷째, 형식만 지키고 정의와 믿음과 긍휼을 버린 것입니다.
다섯째, 겉은 깨끗하나 속은 더럽습니다.
여섯째, 회칠한 무덤이요 살았다 하나 죽은 자입니다.
일곱째, 선지자들은 죽인 자들입니다. 형식은 그저 있지 않고 본질을 대적합니다. 오늘날 우리 교회가 14절처럼 복음의 진리에 바로 서지 아니하면 형식에 윤리에 기복에 심리에 삼켜버립니다. 십자가의 복음은 어디 가고 없고 내 정서, 내 심리 놀음만 남습니다. 기분 좋으면 다 좋은 것이고 기분 나쁘면 다 나쁜 것이 됩니다.
교회 안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순종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우리는 받는 자입니다. —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의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마 5:17-20). 형식주의자들의 특징은 지키지 못할 것은 빼버리는 것입니다. 즉 주님은 율법의 일점일획이라도 빼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은 자라고 일컬어지며 너희의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보다 낫지 못하면 안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의 의미는, 말씀은 그대로 두고 우리를 쳐서 맞추라는 것입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반대로 합니다. 자기가 할 수 있는 것, 인간의 법을 계속 수없이 만들어 냅니다. 탈무드나 미쉬나가 모두 그런 것입니다. 그래 놓고는 부모 공경에 대해서는 고르반 하여 피해 다닙니다.



5. 결론: 본질인 복음이 중요하다


우리는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외식이 아닌, 전적인 은혜로 구원 받았습니다. 우리는 형식이 아닙니다. 그러나 형식도 본질 가운데서 중요합니다. 교회에서 마구잡이로 행동하지 않습니다. 강대상에서 뛰어다니지 않습니다. 이것을 알려 주려고 레위기가 기록되었습니다. 그러나 복음의 진리 가운데 형식입니다. 우리 교회도 밖에 "복음의 진리, 십자가지기교회"로 써 붙이면 좋겠습니다. 복음이 무엇인지 다시 생각합시다.
첫째, 믿음으로 믿음에 이릅니다(롬 1:16).
둘째, 은혜 위에 은혜입니다(요 1:16).
셋째, 예수 믿어 예수 믿는 것입니다(요 14:6). 예수가 방편이고 수단이요 목적입니다. 예수 믿어 뭐 한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예수 믿어 예수 믿습니다. 우리는 지금 궁극적인 목적을 앞당겨 누립니다. 천국에 가서 다른 것이 있는 것으로 현혹하면 잘못된 종말론입니다. 그때도 그저 동일하게 예수 믿습니다. 그것을 지금도 정도가 다를 뿐 미리, 여전히 맛보며 사는 것입니다.

넷째,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한데 나는 너희를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니라’라고 합니다(레 20:7-8). 우리에게 거룩하라 명하시되 거룩하게 빚으시는 분이 바로 예수님이심을 잘 기억해야 합니다.
마귀 사탄은 본질이 아닌 형식으로 들어옵니다. 그것이 사도 바울이 베드로에게 대면하여 공개적으로 책망한 이유입니다. 별것 아닌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것을 생각하여 하나님의 은혜 누리시는 모든 성도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