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120][십자가지기교회 주일낮예배: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42)] 요동치 않는 믿음 (약 1:5-8) 문병호 목사
*음성파일: 게시물 하단 "관련링크"에서 청취 혹은 내려받기 가능합니다.
(약 1:5)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약 1:6)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약 1:7)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약 1:8)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
<녹취록>
1. 환난을 당할 때 꾸짖지 않으시는 하나님께 믿음으로 지혜를 구하라
본문 말씀은 크게 지혜를 믿음으로 구하라는 것으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특히 제목을 요동치 않는 믿음이라고 한 것은, 방금 찬양처럼 "주 나를 붙드네"라고 고백함은, 주님의 변개치 않는 사랑 때문입니다. 야고보서는 믿음으로 살아가는 성도의 행실, 행위에 대해 많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야고보는 주님의 형제, 동생이며, 많은 핍박이 있을 때 예루살렘 교회를 지도한 자입니다. 특히 야고보 때 여러 환란이 몰려 왔습니다. 이 때 무엇을 구해야 할까요? 본문은 지혜를 구하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기도해야 할까요? 의심하지 말고 두 마음이 아닌 한 마음으로 기도하라 합니다. 그러면 이 기도는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 받으신다는 것입니다. 이 세 가지가 오늘의 본문에 나오는 전체 요지입니다. 지혜를 구하고 한 마음으로 요동치 않는 믿음 가운데 구하면 하나님은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에 꾸짖지 않으십니다. 아무리 기도한다고 해도 우리의 권리를 주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기도에는 회개가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기도하러 나갈 때 항상 기본적으로 회개할 것이 있습니다. 그러하니 꾸짖으시는 분으로 하나님을 생각하면 그분께 나갈 수 없습니다. 자녀니까 염치 불구하고 꾸짖음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구하나, 담대함이 생기는 것입니다.
2. 환난을 극복하는 지혜
환란의 때에 특히 지혜가 필요합니다. 환란은 운동장에 트랙이 없는 것입니다. 트랙이 있어야 최단거리로 갈 수 있는 것인데, 인생은 미로 같아서 가는 길을 모릅니다. 그러나 지혜라는 것은 최단거리로 갈 수 있고 가장 안전하고 보장된 길과 같습니다. 지혜는 삼겹줄로 된 동아줄을 잡고 물결이 치는 계곡을 건너는 것과 같습니다. 지혜는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우리가 여름에 강을 건너는 것을 배워도 겨울에 얼면 그것이 쓸모가 없습니다. 지혜라는 것은 그런 것입니다. 여름에 물은 장애물이 됩니다. 그러나 겨울에는 지름길이 됩니다. 우리 인생은 이처럼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제가 살던 곳도 예전에는 큰 강이 있어 건널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얼음이 얼면 겨울에 건널 수 있습니다. 인생의 지혜라는 것은 딱 떨어지는 답이 없습니다. 하나님만이 상황에 맞는 지혜를 주십니다. 악하고 게으른 한 청지기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자가 쫓겨날 때 한 가지 꾀를 냅니다. 주인이 좋아하는 것이 무엇일지 생각을 해 봅니다. 그래서 이 자가 그 주인에게 빚진 자를 불러 빚의 크기를 차감해 줍니다. 이것은 말이 되지 않는 일입니다. 더 받아서 이익을 얻어야 하는데 오히려 감해 주어 손해를 더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자를 지혜로운 청지기라고 부릅니다. 왜일까요? 하나님의 관심사는 곳간의 재물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관심사는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람들의 빚을 탕감시켜 주었다는 것으로 인해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가진 자이시므로 우리가 무엇을 많이 해서 쌓아두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 무엇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잠잠히 나와 하나님의 영광을 인정하길 원하십니다. 지혜는 바로 이런 것입니다. 어느 상황 가운데 하나님 앞에서 그의 지시함과 뜻을 보는 것입니다. 평소에도 지혜가 필요하지만, 환란 때도 지혜가 필요합니다. 하나님은 비둘기와 같이 순결하고 뱀과 같이 지혜로우라고 하십니다. 비둘기와 같이 변함없는 진리를 가지고 있으되 매 때마다 맞는 지혜를 구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야고보서 1장 3절은 믿음이 시련이 있다고 합니다. 모든 환란은 믿음의 시련입니다. 모든 환란을 주시는 하나님의 목적은 믿음을 강화하는 것입니다. 모든 마귀 사탄의 시험의 궁극적인 목적은 믿음을 약화시키는 것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고 세상 것을 가까이 하게 되며 보이는 것만 추구하게 될 때 약화됩니다. 이것이 다 믿음의 시련입니다. 우리 주님도 세 가지 믿음의 시련을 받으셨습니다.
3. 시험을 이기신 주님의 지혜
1) 자신의 존재 이유를 아는 지혜
첫 번째 시련은 돌을 가지고 떡덩이가 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주님은 이에 대해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 말씀으로 산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은 떡을 먹는 것이 아니요, 만유의 하나님으로 그 분이 떡이시니 바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함이십니다. 우리가 왜 지금 이 자리에 존재하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먹으려고 사느냐, 무엇을 위해 이 땅에 왔고 지금 우리를 이곳에 두었는지, 존재 가치, 명분, 이유를 첫 번째로 시험한 것입니다. 우리가 원하는 명예와 재물 등은 모두 떡입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위해 이 땅에 오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니 첫 번째 시험, 달리 말하면 첫 번째 지혜는 내가 왜 지금 이곳에 존재하는지, 하나님이 나를 이곳에 두신 이유, 선택하시어 예배하게 하고 하나님 자녀 삼으신 것에 대한 뚜렷한 지식이 지혜입니다.
2) 하나님을 시험치 않고 믿는 지혜
예수님을 향한 두 번째 시험은 높은 곳에서 떨어져 보라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사실 천사의 도움조차 필요없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두 번째 지혜는 하나님을 시험하지 않고 믿는 것입니다. 이미 시편에서 천사가 돕는다고 했는데, 그것에 "아멘" 하는 것에 더하여 왜 하나님을 시험하냐는 것입니다. 우리는 믿음이라 하지만 은연 중에 하나님을 시험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것이 아닙니다. 말씀에서 우리를 지키신다고 말씀하면 그저 믿으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두 번째 지혜는 시험하지 않고 믿는 것입니다. 믿음은 시험하고 따지고 형편에 따라 하나님의 섭리를 의심하는 것이 아니라 말입니다. 요셉과 같이 구렁텅이에 가도, 감옥에 가도, 불속이든 사자 입이든 하나님이 하시려고 하면 하시는 분임을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시험하는 마음과 믿는 마음은 미묘하지만 차이가 있고 우리 안에 존재합니다. 우리는 그 때 믿어야 합니다. 평생 시험만 하고 사는 것이 아니라 믿되, 겨자씨만큼만 믿으면 됩니다. 이는 달리 말하면 탁 터놓고 하나님을 믿는 경우가 잘 없다는 것과 같습니다. 마귀 사탄의 유혹을 당해도 다 그렇게 따라가지 마십시오. 세상 사람들은 시험하라고 합니다. 그러나 성도는 그러지 않아야 합니다.
3) 세상 영화가 아닌 여호와께 속한 것을 구하는 지혜
예수님을 향한 세 번째 유혹은 한 번만 사탄에게 무릎을 꿇으면 세상 모든 것을 준다고 한 것입니다. 마귀 사탄은 한마디로 정하면,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속하는 것은 본질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나 마귀 사탄은 태생부터가 거짓이요 속고 빼앗고 없애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귀가 만국을 준다고 합니다. 그가 우리를 유혹할 때 더러운 것이 아닌 향기롭고 좋은 것을 보여 줍니다. 그러나 그것은 허상입니다. 멸절입니다. 소멸입니다. 멸망입니다. 그러니 세 번째 지혜는 세상 만국의 영화가 아닌 영원한 것, 여호와께 속한 것을 구하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지혜를 구하라는 것을 예수님의 시험을 통해 정리해 봤습니다. 첫째로 우리의 존재와 자리매김의 이유는 하나님의 영화/영광의 도구라는 것이요, 두 번째로 여호와를 시험하지 않고 믿는 자가 지혜로운 것이라는 교훈입니다. 믿음으로 구하지 않고는 주께 얻기를 바라지 말라고 합니다. 이것이 바로 지혜입니다. 세 번째로, 하나님께 속한 것을 구하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마귀 사탄이 보여 주는 것이 많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헛것입니다. 본질, 영생하는 것, 하나님께 속한 선한 것을 붙들고 구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지혜입니다. 말세와 환란을 이기는, 믿음의 시련을 이기는 지혜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4. 환난의 실체: 자기 부인과 유순케 하심
우리는 고난과 환란이 있을 때 그 실체를 바로 알아야 하는데, 고난이 고난이 아니라 많은 경우 고난 아닌 것이 고난입니다. 우리는 속고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래서 우리가 애통하고 우리가 곤고하고 하는 것은 불로 시험하는 은과 금보다 귀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레위기 강해에서 소제에 대해 나눴습니다. 빻아서 가루를 내어 그것에 기름과 향유를 부어 태운다고 했습니다. 가루를 내는 것은 나를 부인하고 유순해지는 것입니다. 특히, 하나님이 원하는 대로 빚을 수 있는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그 가루에 성령의 기름으로 버무리니 드디어 맛이 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거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향을 그 위에 얹어 태워 드리는 것입니다. 향기로운 제물로 드려지는 것입니다. --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 12:1). 지혜는 그러므로 하나님의 편에서 보는 것입니다. 꽁꽁 언 이 겨울에 지름길이 날 수 있는 것입니다. 물이 얼어 길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여호와 편에서 주님이 우리의 삶을 빻습니다. 아무것도 없게 만드십니다. 제가 간혹 벤치에 앉아 종이 같은 것이 하나를 보면 저는 그 종이만도 못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면도 형체도 공로도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를 빻고 채를 쳐서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5. 지혜를 얻는 방법: 기도
본문 5절은 이 지혜를 얻는 단 한가지 방법,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않는 하나님께 구하라고 합니다. 지혜를 구한 최고의 왕이 있었습니다. 솔로몬입니다. 그는 지혜를 구하려고 번제를 천 번이나 드렸습니다. 번제는 자기 자신을 다 태워서 드리는 것입니다. 그것으로 무엇을 하려고 했나요? -- “듣는 마음을 종에게 주사 주의 백성을 재판하여 선악을 분별하게 하옵소서”(왕상 3:9). 간단합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그것으로 다스리게 해달라고 한 것입니다. 세속적인 정치가 아닌 신정을 하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구약의 하나님의 통치입니다. 그러니 듣는 마음을 주셔서 재판을 잘 하게 해달라고 한 것입니다. 옛날에 성군은 재판을 잘하는 왕입니다. 솔로몬은 재판을 잘 했습니다. 자식을 가르라고 명령해 진짜 모친을 찾아냈습니다. 이런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그 지혜는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에게서만 얻는 것입니다. 바로 듣는 마음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혜로운 자는 자꾸 하나님께 귀를 기울이는 것입니다. 그것이 기도하는 자입니다. 성도는 어떤 상황에서든 기도하는 버릇이 있어야 합니다. 다른 것 많이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 버릇이 있으면 어떤 상황에서도 다 된 것입니다. 어떤 일이든 기도하면 다 된 것입니다.
6. 주님 앞에서 한 마음을 품는 것이 지혜이다
평소에 기도하는 습관을 들여야 합니다. 왜요?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않으시는 하나님이 우리의 마음을 지켜 주시기 때문입니다. 잠언의 말씀과 같습니다.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 4:23); “내가 네 말대로 하여 네게 지혜롭고 총명한 마음을 주노니”(왕상 3:12). 하나님이 우리의 마음을 지켜 주실 때 한 마음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 앞에 한 마음을 품는 것이 지혜입니다. 우리의 마음을 한 가지 색, 단색으로 수놓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지혜입니다.
7. 하나님의 말씀이 지혜이다
이 지혜를 구하면 생명이 있고 이 생명에는 열매를 맺음이 있습니다. 생명의 지식에는 열매가 있고 잠언 8장의 지혜가 요한복음 1장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지혜를 구하라는 말은 말씀을 구하라, 곧 예수 그리스도의 반석 위에 서라는 것입니다. 그러며 요동치 않고 흔들림이 없습니다. 베드로의 고백의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우는 그것입니다. 야고보는 행위만 이야기한다는 사람이 있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전제로 행위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지혜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요새 눈이 잘 안보여서 노안이겠거니 생각했는데 가만히 보니 형광등이 나간 것이었습니다. 나이가 드니 주변은 살피지 않고 내 몸만 잘못되었다고 생각을 합니다. 형광등을 갈면서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제가 지금 보는 책이 글씨가 매우 깨알같습니다. 이것을 보면서 세 가지를 생각했습니다. 책 자체의 글씨가 깨끗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 형광등이 밝아야 하고, 세 번째로 내 눈이 온전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본문 말씀이 그렇습니다. 글씨는 예수님의 지혜입니다. 먼저 우리가 명확한 말씀을 알아야 합니다. 두 번째는 빛, 배경이 있어야 하는데 그것은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입니다. 아무리 책의 글자가 뚜렷해도 어두운 곳에서는 읽을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이 아무리 은혜와 진리여도 하나님의 후히 주시는 은혜가 없으면 우리에게 유익이 없습니다. 영어로 하면 텍스트와 콘텍스트입니다. 그러면 세 번째로, 내 눈이 밝아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요동치 않는 믿음입니다. 우리는 먼저 정확한 말씀을 붙들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 목자의 음성입니다. 그것을 붙들고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을 바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얼마나 좋습니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동치 않는 마음을 주시고 은혜를 주시니 말입니다. 이 가운데에서만 7절 말씀처럼 주님께서 주시는 것이 있습니다. 주께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주께로부터 받는 것입니다. 한 마음으로, 믿음으로 받아내는 것입니다. 그것을 지혜라고 하고 있습니다.
8. 결론: 믿음의 열매를 바라고 누리라
말씀을 정리하면, 믿음에는 열매가 있는데 무엇보다 평안, 평화가 있습니다. 그리고 잠잠함이 있습니다. 믿는 사람은 잠잠합니다. 홍해 바닷가에서 잠잠한 것처럼 그렇습니다. 그리고 말세에 인내로 영혼을 얻는 것처럼, 참된 믿음에는 참음이 따릅니다. 참지 않는 믿음은 없습니다. 1분 후에 다른 것이 믿음이 될 수 없습니다. 네 번째로 믿음에는 사랑의 열매가, 다섯 번째는 희락이 따릅니다. 우리의 믿음에는 이렇게 다섯 가지가 부수적으로 따릅니다. 화평, 잠잠함, 오래 참음, 사랑의 열매, 희락입니다. 바로 칼빈의 말입니다.
사랑하는 주가 나를 붙드십니다. 요동치 않는 믿음, 한 마음 가운데 많은 열매를 맺는 은혜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190120][십자가지기교회 주일낮예배: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42)] 요동치 않는 믿음 (약 1:5-8) 문병호 목사
*음성파일: 게시물 하단 "관련링크"에서 청취 혹은 내려받기 가능합니다.
<녹취록>
1. 환난을 당할 때 꾸짖지 않으시는 하나님께 믿음으로 지혜를 구하라
본문 말씀은 크게 지혜를 믿음으로 구하라는 것으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특히 제목을 요동치 않는 믿음이라고 한 것은, 방금 찬양처럼 "주 나를 붙드네"라고 고백함은, 주님의 변개치 않는 사랑 때문입니다. 야고보서는 믿음으로 살아가는 성도의 행실, 행위에 대해 많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야고보는 주님의 형제, 동생이며, 많은 핍박이 있을 때 예루살렘 교회를 지도한 자입니다. 특히 야고보 때 여러 환란이 몰려 왔습니다. 이 때 무엇을 구해야 할까요? 본문은 지혜를 구하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기도해야 할까요? 의심하지 말고 두 마음이 아닌 한 마음으로 기도하라 합니다. 그러면 이 기도는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 받으신다는 것입니다. 이 세 가지가 오늘의 본문에 나오는 전체 요지입니다. 지혜를 구하고 한 마음으로 요동치 않는 믿음 가운데 구하면 하나님은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에 꾸짖지 않으십니다. 아무리 기도한다고 해도 우리의 권리를 주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기도에는 회개가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기도하러 나갈 때 항상 기본적으로 회개할 것이 있습니다. 그러하니 꾸짖으시는 분으로 하나님을 생각하면 그분께 나갈 수 없습니다. 자녀니까 염치 불구하고 꾸짖음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구하나, 담대함이 생기는 것입니다.
2. 환난을 극복하는 지혜
환란의 때에 특히 지혜가 필요합니다. 환란은 운동장에 트랙이 없는 것입니다. 트랙이 있어야 최단거리로 갈 수 있는 것인데, 인생은 미로 같아서 가는 길을 모릅니다. 그러나 지혜라는 것은 최단거리로 갈 수 있고 가장 안전하고 보장된 길과 같습니다. 지혜는 삼겹줄로 된 동아줄을 잡고 물결이 치는 계곡을 건너는 것과 같습니다. 지혜는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우리가 여름에 강을 건너는 것을 배워도 겨울에 얼면 그것이 쓸모가 없습니다. 지혜라는 것은 그런 것입니다.
여름에 물은 장애물이 됩니다. 그러나 겨울에는 지름길이 됩니다. 우리 인생은 이처럼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제가 살던 곳도 예전에는 큰 강이 있어 건널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얼음이 얼면 겨울에 건널 수 있습니다. 인생의 지혜라는 것은 딱 떨어지는 답이 없습니다. 하나님만이 상황에 맞는 지혜를 주십니다.
악하고 게으른 한 청지기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자가 쫓겨날 때 한 가지 꾀를 냅니다. 주인이 좋아하는 것이 무엇일지 생각을 해 봅니다. 그래서 이 자가 그 주인에게 빚진 자를 불러 빚의 크기를 차감해 줍니다. 이것은 말이 되지 않는 일입니다. 더 받아서 이익을 얻어야 하는데 오히려 감해 주어 손해를 더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자를 지혜로운 청지기라고 부릅니다. 왜일까요? 하나님의 관심사는 곳간의 재물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관심사는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람들의 빚을 탕감시켜 주었다는 것으로 인해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가진 자이시므로 우리가 무엇을 많이 해서 쌓아두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 무엇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잠잠히 나와 하나님의 영광을 인정하길 원하십니다. 지혜는 바로 이런 것입니다.
어느 상황 가운데 하나님 앞에서 그의 지시함과 뜻을 보는 것입니다. 평소에도 지혜가 필요하지만, 환란 때도 지혜가 필요합니다. 하나님은 비둘기와 같이 순결하고 뱀과 같이 지혜로우라고 하십니다. 비둘기와 같이 변함없는 진리를 가지고 있으되 매 때마다 맞는 지혜를 구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야고보서 1장 3절은 믿음이 시련이 있다고 합니다. 모든 환란은 믿음의 시련입니다. 모든 환란을 주시는 하나님의 목적은 믿음을 강화하는 것입니다. 모든 마귀 사탄의 시험의 궁극적인 목적은 믿음을 약화시키는 것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고 세상 것을 가까이 하게 되며 보이는 것만 추구하게 될 때 약화됩니다. 이것이 다 믿음의 시련입니다. 우리 주님도 세 가지 믿음의 시련을 받으셨습니다.
3. 시험을 이기신 주님의 지혜
1) 자신의 존재 이유를 아는 지혜
첫 번째 시련은 돌을 가지고 떡덩이가 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주님은 이에 대해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 말씀으로 산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은 떡을 먹는 것이 아니요, 만유의 하나님으로 그 분이 떡이시니 바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함이십니다. 우리가 왜 지금 이 자리에 존재하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먹으려고 사느냐, 무엇을 위해 이 땅에 왔고 지금 우리를 이곳에 두었는지, 존재 가치, 명분, 이유를 첫 번째로 시험한 것입니다. 우리가 원하는 명예와 재물 등은 모두 떡입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위해 이 땅에 오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니 첫 번째 시험, 달리 말하면 첫 번째 지혜는 내가 왜 지금 이곳에 존재하는지, 하나님이 나를 이곳에 두신 이유, 선택하시어 예배하게 하고 하나님 자녀 삼으신 것에 대한 뚜렷한 지식이 지혜입니다.
2) 하나님을 시험치 않고 믿는 지혜
예수님을 향한 두 번째 시험은 높은 곳에서 떨어져 보라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사실 천사의 도움조차 필요없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두 번째 지혜는 하나님을 시험하지 않고 믿는 것입니다. 이미 시편에서 천사가 돕는다고 했는데, 그것에 "아멘" 하는 것에 더하여 왜 하나님을 시험하냐는 것입니다. 우리는 믿음이라 하지만 은연 중에 하나님을 시험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것이 아닙니다. 말씀에서 우리를 지키신다고 말씀하면 그저 믿으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두 번째 지혜는 시험하지 않고 믿는 것입니다. 믿음은 시험하고 따지고 형편에 따라 하나님의 섭리를 의심하는 것이 아니라 말입니다. 요셉과 같이 구렁텅이에 가도, 감옥에 가도, 불속이든 사자 입이든 하나님이 하시려고 하면 하시는 분임을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시험하는 마음과 믿는 마음은 미묘하지만 차이가 있고 우리 안에 존재합니다. 우리는 그 때 믿어야 합니다. 평생 시험만 하고 사는 것이 아니라 믿되, 겨자씨만큼만 믿으면 됩니다. 이는 달리 말하면 탁 터놓고 하나님을 믿는 경우가 잘 없다는 것과 같습니다. 마귀 사탄의 유혹을 당해도 다 그렇게 따라가지 마십시오. 세상 사람들은 시험하라고 합니다. 그러나 성도는 그러지 않아야 합니다.
3) 세상 영화가 아닌 여호와께 속한 것을 구하는 지혜
예수님을 향한 세 번째 유혹은 한 번만 사탄에게 무릎을 꿇으면 세상 모든 것을 준다고 한 것입니다. 마귀 사탄은 한마디로 정하면,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속하는 것은 본질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나 마귀 사탄은 태생부터가 거짓이요 속고 빼앗고 없애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귀가 만국을 준다고 합니다. 그가 우리를 유혹할 때 더러운 것이 아닌 향기롭고 좋은 것을 보여 줍니다. 그러나 그것은 허상입니다. 멸절입니다. 소멸입니다. 멸망입니다. 그러니 세 번째 지혜는 세상 만국의 영화가 아닌 영원한 것, 여호와께 속한 것을 구하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지혜를 구하라는 것을 예수님의 시험을 통해 정리해 봤습니다. 첫째로 우리의 존재와 자리매김의 이유는 하나님의 영화/영광의 도구라는 것이요, 두 번째로 여호와를 시험하지 않고 믿는 자가 지혜로운 것이라는 교훈입니다. 믿음으로 구하지 않고는 주께 얻기를 바라지 말라고 합니다. 이것이 바로 지혜입니다. 세 번째로, 하나님께 속한 것을 구하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마귀 사탄이 보여 주는 것이 많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헛것입니다. 본질, 영생하는 것, 하나님께 속한 선한 것을 붙들고 구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지혜입니다. 말세와 환란을 이기는, 믿음의 시련을 이기는 지혜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4. 환난의 실체: 자기 부인과 유순케 하심
우리는 고난과 환란이 있을 때 그 실체를 바로 알아야 하는데, 고난이 고난이 아니라 많은 경우 고난 아닌 것이 고난입니다. 우리는 속고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래서 우리가 애통하고 우리가 곤고하고 하는 것은 불로 시험하는 은과 금보다 귀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레위기 강해에서 소제에 대해 나눴습니다. 빻아서 가루를 내어 그것에 기름과 향유를 부어 태운다고 했습니다. 가루를 내는 것은 나를 부인하고 유순해지는 것입니다. 특히, 하나님이 원하는 대로 빚을 수 있는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그 가루에 성령의 기름으로 버무리니 드디어 맛이 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거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향을 그 위에 얹어 태워 드리는 것입니다. 향기로운 제물로 드려지는 것입니다. --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 12:1). 지혜는 그러므로 하나님의 편에서 보는 것입니다. 꽁꽁 언 이 겨울에 지름길이 날 수 있는 것입니다. 물이 얼어 길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여호와 편에서 주님이 우리의 삶을 빻습니다. 아무것도 없게 만드십니다. 제가 간혹 벤치에 앉아 종이 같은 것이 하나를 보면 저는 그 종이만도 못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면도 형체도 공로도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를 빻고 채를 쳐서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5. 지혜를 얻는 방법: 기도
본문 5절은 이 지혜를 얻는 단 한가지 방법,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않는 하나님께 구하라고 합니다. 지혜를 구한 최고의 왕이 있었습니다. 솔로몬입니다. 그는 지혜를 구하려고 번제를 천 번이나 드렸습니다. 번제는 자기 자신을 다 태워서 드리는 것입니다. 그것으로 무엇을 하려고 했나요? -- “듣는 마음을 종에게 주사 주의 백성을 재판하여 선악을 분별하게 하옵소서”(왕상 3:9). 간단합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그것으로 다스리게 해달라고 한 것입니다. 세속적인 정치가 아닌 신정을 하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구약의 하나님의 통치입니다. 그러니 듣는 마음을 주셔서 재판을 잘 하게 해달라고 한 것입니다. 옛날에 성군은 재판을 잘하는 왕입니다. 솔로몬은 재판을 잘 했습니다. 자식을 가르라고 명령해 진짜 모친을 찾아냈습니다. 이런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그 지혜는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에게서만 얻는 것입니다. 바로 듣는 마음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혜로운 자는 자꾸 하나님께 귀를 기울이는 것입니다. 그것이 기도하는 자입니다. 성도는 어떤 상황에서든 기도하는 버릇이 있어야 합니다. 다른 것 많이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 버릇이 있으면 어떤 상황에서도 다 된 것입니다. 어떤 일이든 기도하면 다 된 것입니다.
6. 주님 앞에서 한 마음을 품는 것이 지혜이다
평소에 기도하는 습관을 들여야 합니다. 왜요?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않으시는 하나님이 우리의 마음을 지켜 주시기 때문입니다. 잠언의 말씀과 같습니다.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 4:23); “내가 네 말대로 하여 네게 지혜롭고 총명한 마음을 주노니”(왕상 3:12). 하나님이 우리의 마음을 지켜 주실 때 한 마음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 앞에 한 마음을 품는 것이 지혜입니다. 우리의 마음을 한 가지 색, 단색으로 수놓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지혜입니다.
7. 하나님의 말씀이 지혜이다
이 지혜를 구하면 생명이 있고 이 생명에는 열매를 맺음이 있습니다. 생명의 지식에는 열매가 있고 잠언 8장의 지혜가 요한복음 1장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지혜를 구하라는 말은 말씀을 구하라, 곧 예수 그리스도의 반석 위에 서라는 것입니다. 그러며 요동치 않고 흔들림이 없습니다. 베드로의 고백의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우는 그것입니다. 야고보는 행위만 이야기한다는 사람이 있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전제로 행위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지혜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요새 눈이 잘 안보여서 노안이겠거니 생각했는데 가만히 보니 형광등이 나간 것이었습니다. 나이가 드니 주변은 살피지 않고 내 몸만 잘못되었다고 생각을 합니다. 형광등을 갈면서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제가 지금 보는 책이 글씨가 매우 깨알같습니다. 이것을 보면서 세 가지를 생각했습니다. 책 자체의 글씨가 깨끗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 형광등이 밝아야 하고, 세 번째로 내 눈이 온전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본문 말씀이 그렇습니다. 글씨는 예수님의 지혜입니다. 먼저 우리가 명확한 말씀을 알아야 합니다. 두 번째는 빛, 배경이 있어야 하는데 그것은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입니다. 아무리 책의 글자가 뚜렷해도 어두운 곳에서는 읽을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이 아무리 은혜와 진리여도 하나님의 후히 주시는 은혜가 없으면 우리에게 유익이 없습니다. 영어로 하면 텍스트와 콘텍스트입니다. 그러면 세 번째로, 내 눈이 밝아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요동치 않는 믿음입니다. 우리는 먼저 정확한 말씀을 붙들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 목자의 음성입니다. 그것을 붙들고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을 바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얼마나 좋습니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동치 않는 마음을 주시고 은혜를 주시니 말입니다. 이 가운데에서만 7절 말씀처럼 주님께서 주시는 것이 있습니다. 주께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주께로부터 받는 것입니다. 한 마음으로, 믿음으로 받아내는 것입니다. 그것을 지혜라고 하고 있습니다.
8. 결론: 믿음의 열매를 바라고 누리라
말씀을 정리하면, 믿음에는 열매가 있는데 무엇보다 평안, 평화가 있습니다. 그리고 잠잠함이 있습니다. 믿는 사람은 잠잠합니다. 홍해 바닷가에서 잠잠한 것처럼 그렇습니다. 그리고 말세에 인내로 영혼을 얻는 것처럼, 참된 믿음에는 참음이 따릅니다. 참지 않는 믿음은 없습니다. 1분 후에 다른 것이 믿음이 될 수 없습니다. 네 번째로 믿음에는 사랑의 열매가, 다섯 번째는 희락이 따릅니다. 우리의 믿음에는 이렇게 다섯 가지가 부수적으로 따릅니다. 화평, 잠잠함, 오래 참음, 사랑의 열매, 희락입니다. 바로 칼빈의 말입니다.
사랑하는 주가 나를 붙드십니다. 요동치 않는 믿음, 한 마음 가운데 많은 열매를 맺는 은혜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