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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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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203][십자가지기교회 주일낮예배: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44)] 순교자의 믿음 (행 7:54-60) 문병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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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203][십자가지기교회 주일낮예배: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44)] 순교자의 믿음 (행 7:54-60) 문병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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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 7:54)○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그를 향하여 이를 갈거늘
(행 7:55)스데반이 성령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행 7:56)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대 
(행 7:57)그들이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일제히 그에게 달려들어
(행 7:58)성 밖으로 내치고 돌로 칠새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 앞에 두니라 
(행 7:59)그들이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이르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행 7:60)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녹취록>



1. "내 증인(마르투스, 순교자)이 되리라"


예수님이 죽으시고 부활, 승천하시면서 감람산에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은 '성령이 임하면 너희들이 땅 끝까지 내 증인이 되리라'는 것이었습니다. 증인은 헬라어 '마르투스,' 즉 첫 번째로 목격자라는 의미와 두 번째로 순교자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증인이라는 것이 그만큼 귀한 비밀을 알고 있는 것이며 목숨을 내걸어야 그것을 밝힐 수 있으므로 두 뜻이 연결됩니다. 오순절 성령강림으로 초대교회가 형성이 되었습니다. 이미 그 전에 예수님께서 성령이 임하면 무엇을 해야 할지 알려 주셨습니다. 즉 땅끝까지 증인이 되라는 것, 즉 증인과 순교자가 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올라가신 그 모습으로 다시 오실 것이라고 천사에 의해서 예고되었습니다.



2. "순교자의 피는 교회의 씨앗이다"


1) 순교의 시작, 스데반


바울, 베드로 모두 신앙의 거장들입니다. 그러나 그 전에 큰 일꾼이 있었으니 그는 사도도 아니요 제자에 들어간 자도 아니었습니다. 그는 바로 초대교회의 최초 일곱 집사 중 첫 번째 집사인 스데반 집사입니다. 성경에 그의 태생과 가문에 대한 얘기는 없고 그의 믿음과 직분 맡은 것에 대해 기록되어 있습니다. —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받는 사람,”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 스데반," "스데반이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여 큰 기사와 표적을 민간에 행하니," "스데반이 지혜와 성령으로 말함을 그들이 능히 당하지 못하여"(행 6:3, 5, 8, 10). 충만하다는 말이 세 번이나 나옵니다. 성령과 믿음, 지혜,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다고 합니다. 이름의 등장 순서가 서열은 아니나 일곱 집사 중 첫 번째로 이름이 나온 것은 가장 많은 사람들의 신망을 받은 것으로 여길 수 있습니다. 그에게는 신앙과 삶의 모범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는 이러한 여러 덕목이 충만한 사람이었으므로 큰 기사와 표적을 행했다고 합니다. 그가 많은 기적도 일으켰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사도행전 6장 10절은 스데반이 지혜와 성령으로 말을 했으므로 그와 논쟁하는 자들이 능히 그를 당하지 못한다고 말씀합니다. 또한 15절은 그의 얼굴이 천사와 같았다고 합니다. 스데반의 순교가 바로 예수님의 말씀을 이루는 출발점입니다. 땅끝까지 증인이 되라는 것, 즉 스데반의 순교를 기점으로 이전에는 예루살렘에만 교회가 있었으나 하나님의 도, 천국 복음이 유대, 사마리아, 땅끝까지 나아가게 된 것입니다.


2) 순교적 신학자, 터툴리안


초대 교회 교부인 터툴리안은 순교자의 피가 교회의 씨앗이라고 했습니다. 교부라 함은 초대 교회의 신학자를 일컫습니다. 터툴리안은 '삼위일체'라는 용어를 처음으로 신학적으로 전개한 자입니다. 그는 처음 이단에 깊이 빠졌던 법학자였습니다. 평생 다른 학문에만 관심을 가지고 있다가 어느 한 기독교 성도의 순교를 목격하고 개종을 합니다. 그로 인해 삶이 바뀌고 하나님의 말씀을 평생 연구하여 최초의 신학적 기틀을 닦은 사람입니다. 그는 학문적으로 뛰어났을 뿐 아니라 신앙의 출발이 순교적 경건, 헌신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우리가 늦게 하나님을 믿으면 이런 것이 있습니다. 늦게 믿었으니 그래도 하나님을 위해 친구도 덜 만나고 세상일도 덜 생각하고, 포도원에 늦게 들어갔으니 주를 더 열심히 섬기고자 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터툴리안도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제가 초등학교 2학년 때 교회에 처음 갔는데 기억에 남는 것이 두 색깔입니다. 성서유니온이라는 이름이 박힌 진한 푸른색으로 겉표지가 된 작은 성경입니다. 집안 마당 구석에서 그것을 읽었던 기억이 선합니다. 또 한 가지 색은 핏빛입니다. 성경의 측면에 칠해진 색입니다. 신학교 들어오기 전에 겨울에 가평에서 기도하다가 피곤했던지 코피가 났는데 그것이 눈에 떨어지니 꼭 그것과 같은 색이었습니다. 선홍이면서도 진한 붉은색입니다. 이 성경의 색이 오늘날 없어졌습니다. 교회에도 성경이 그 색으로 다시 돌아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색이 물론 내용을 알려 주는 것은 아니지만 말입니다. 제가 그 성경책을 열심히 읽어서 두 권을 닳게 했습니다. 그 당시 그 성경은 활자가 세로로 써져 있었습니다. 차분하게 와닿는 그런 성경이었습니다. 우리 기독교의 색을 말하자고 하면 핏빛입니다. 또한 칼빈이 목회한 스위스 제네바, 제네바의 도시 색 역시 그와 유사한 색입니다. 핏빛의 색입니다.


3) 한국교회의 최초 순교자, 토마스 선교사


우리나라는 세계 처음으로 성경이 선교사보다 먼저 들어왔습니다. 이처럼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전래된 성경은 중국에서 번역된 것이었으나, 사실상 공식적으로 성경 전래의 시작은 토마스 선교사에 의한 것입니다. 그가 이 땅에 들어오다 대동강변에서 순교하면서 조선 땅에 발을 디디지는 못했으나 그가 들고 있던 성경은 박춘권이라는 병사를 통해 도입되었고 제가 나온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의 전신인 평양신학교를 세운 분이 그의 조카입니다. 그리고 그 분이 이눌서 선교사님과 성경 번역을 하게 됩니다. 즉 토마스 선교사를 찌른 병사의 조카가 성경번역을 하는 자리에 서게 된 것이니 하나님의 일은 묘합니다. 그리고 그 때 배가 불타고 싸우고 했는데요, 대동강 물에 떠다니던 성경을 또한 최치량이라는 사람이 주워서 박영식이라는 사람에게 주었습니다. 그런데 박영식이라는 자가 당시 종이가 귀하니 그 성경을 집에 벽지로 붙였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보면서 최치량이 깨닫게 되어 평양에 널다리교회를 세우게 됩니다. 장대재교회는 장대현교회로 길선주 목사님으로부터 평양 대부흥이 일어난 교회입니다. 이 두 교회가 평양, 서울, 부산, 대구, 대전, 광주 대부흥 등 유례없는 복음의 역사에 사용됩니다. 이것의 시작이 바로 토마스 선교사입니다. 그는 한마디 말도 전하지 못했습니다. 제가 총회의 위원으로 토마스 선교사 관련 웨일즈에 통역도 할 겸 간 적이 있었습니다. 그 웨일즈에서 토마스 선교사님이 나신 동네를 갔습니다. 아주 낮은 담이 있던 작은 교회였는데, 그 교회가 팔려 갈 지경이 되어 우리 총회가 그것을 막기 위해 헌금을 하러 간 것이었습니다.


4) 스데반 순교의 열매, 바울


사실 기독교는 이러한 순교의 피 위에 섭니다. 바울이 말한 ‘죽는 것도 유익’이라는 것이 그 말입니다. 오늘 스데반의 순교의 자리에 한 사람의 이름이 나옵니다. 그는 사울입니다. 그는 매우 뛰어난 자였습니다. 지파 개념이 없던 그 당시에도 베냐민 지파만은 인정을 받고 있었는데 사울이 바로 그 지파였습니다. 가말리엘은 당대 두 학파에게 모두 존경받던 학자였는데, 사울은 그의 수제자였습니다. 이 사울이 사실상 스데반을 죽이는 자리에 섭니다. 사울 앞에 사람들이 옷을 던졌는데, 그것은 증인으로 삼는다는 의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자를 죽이는 증인이 된 것입니다. 여기서 증인이라는 말이 매우 중요합니다. 사울이 법에 밝고 매우 뛰어난 자이니 그에게 스데반 사형의 최종 재가를 받는 것이었습니다. 본디오 빌라도는 그의 손을 씻었으나 사도신경은 그를 예수님을 죽인 자로 전합니다. 사울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스데반을 실제로 죽인 것은 돌은 던진 군인이 아니라 바로 사울인 것입니다. 스데반을 죽인 자가 바로 사울입니다. 사울이 없으면 스데반은 죽지 않았습니다. 돌로 쳐서 죽이는 것은 율법의 처형 방식입니다. 사울은 권세라는 의미요, 바울(파울루스)는 작은 자라는 의미입니다. 그가 바로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사흘간 눈이 멀고 아나니아가 안수하여 눈을 뜨자마자, 자신이 잡아서 죽이려고 들어간 다메섹에서 말씀을 전하는 것입니다. — “즉시로 각 회당에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하니”(행 9:20). 그가 전한 두 가지는 예수가 하나님이신 것과 예수가 그리스도이신 것에 대한 증언입니다. 그리스도의 증인인 스데반을 죽인 증언자가 이제는 땅끝까지 복음,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이 된 것입니다. 사흘 동안 육안을 덮은 후, 영안을 뜨게 해서 사울을 완전히 바꾸어 하나님이 쓰신 것입니다. 바로 아까 말씀드린 토마스 선교사, 최치량을 이어 한국교회의 부흥이 일어났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 그리고 스데반의 죽음, 그리고 그를 죽인 바울의 일로 신앙이 연결되는 것입니다. 이어서 디모데, 실라, 디도, 누가, 마가, 에바브로디도로 신앙이 뻗어 갑니다. 한 사람의 씨앗이, 터툴리안의 말처럼 순교자의 피가 오늘 스데반인데, 그의 순교로 하나님의 일의 역사가 연쇄적으로 일어나는 것입니다.



3. 순교의 본질


1) 말씀의 증인, 말씀의 순교자


사도행전은 선교행전이라고 합니다. 성령, 능력의 책이라고 하지만 그 능력은 말씀을 들음으로 인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실 사도행전은 설교행전이기도 합니다. 중요할 때마다 설교가 있습니다. 비시디아 안디옥 설교, 스데반의 설교 등이 있습니다. 그중 스데반의 설교가 전편에 걸쳐 실려 있습니다. 스데반이 이 설교 한 편을 하고 돌에 맞아 죽는데, 그 내용은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그를 믿어 우리가 구원에 이르는 것입니다. 바울이 다메섹에서 전한 것과 동일한 내용입니다. 이 설교를 읽다가 참으로 은혜가 되었습니다. 바울이 그렇게 죽이러 갔다가 어떻게 갑자가 저렇게 설교를 할까 생각하니, 스데반의 설교를 그가 들은 것입니다. 핍박하면서 그 설교를 들은 것입니다. 최권능 목사님이 예수천당 불신지옥을 외치다가 그를 때리던 사람들이 복음을 들은 것과 같습니다. 우리도 설교 한 편 들으면 됩니다. 하나님의 역사가 이처럼 묘합니다. 사울이라는 청년이 얼마나 스데반의 설교를 유심히 들었을까요? 죽이기 위해서 말입니다. 그런데 그 들은 것이 이제 하나님의 복음을 증언하는 것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루신 일은 이처럼 우리가 헤아릴 수 없습니다.


2) 순교는 감사의 넘침이다


어떤 사람은 순교가 은사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아닙니다. 순교는 은사가 아니라 사랑이 은사입니다. 사랑이 넘치고 감사하면 그 결과로 순교를 하는 것이지 저 사람은 순교의 타고난 은사가 있다고 하는 것은 사실상 그렇지 않습니다. 본문 7장 60절은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라고 합니다. 순교는 충만한 사람이 합니다. 능력과 지혜와 믿음과 성령과 은혜와 권능이 충만한 사람입니다. 충만이라는 단어가 세 번이나 나옵니다. 막 살다가 어느 순간 순교하는 것이 아니라 평소에 지혜와 믿음과 은혜와 권능으로 사는 사람이 그 감사가 넘치면 순교하는 것입니다. 순교는 꼭 어떻게 보면 육체적으로 생명을 끊어서 순교가 아니라 주의 이름으로 참고 봉사하고 땀흘리고 내 시간과 마음과 정성을 바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말처럼 교회를 향한 근심, 교회를 향한 근심도 순교입니다. 순교는 어떤 기질과 습성을 발휘해서 다른 사람은 못 가는데 나만 그 자리에 강단이 있어 가는 것이 아니라, 도수장에 끌려가는 주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것처럼 연약하고 말없는 사람이 순교하는 자입니다.


3) 순교는 성령충만의 열매이다


믿음으로 행하면 지혜고 은혜로 행하면 권능입니다. 지혜와 믿음과 은혜와 권능이 다 있었습니다. 믿음으로 지혜롭고 은혜로 권능이 있습니다. 스데반이 그렇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오순절 성령충만으로 인한 것입니다. 성령충만은 성령이 내 안에 마음껏 거하는 것입니다. 성령의 임재가 반복하여 것이 아니라 충만함이 있는 것입니다. 성령을 방해하지 말고 근심시키지 않는 것이 성령충만이지 성령을 새로이 반복적으로 받는 것이 아닙니다. 한 번 받은 성령, 주 내 안에 사심이 성령의 임재고 내 안에 마음껏 사심이 성령충만입니다. 말씀, 기도, 회개의 충만이 성령 충만입니다. 본문에는 지혜와 믿음, 은혜와 권능이 성령의 충만으로 나타납니다. 다른 것이 없습니다. 주일이 되면 교회에 가는 것이 즐거우면 성령충만입니다. 그리고 내 안에 교회를 향한 근심이 있는 것이 성령충만입니다. 이 땅에 살 때 주를 어찌하여 위할 것인지 생각하는 것이 성령충만입니다. 내가 이 세상에서 잘 살아 볼꼬 하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 주가 나를 두셨는데 무엇을 주를 위하여 할꼬 하는 것입니다.


4) 순교는 자신을 준비하여 드리는 것이다


순교는 감사의 영역입니다. 하나님 앞에 추억이 많아야 순교한다고 저는 자주 말을 합니다. 다른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베푸시고 동행하신 것, 유벽한 곳에 아무도 없는데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 것, 스데반이 하나님 보좌 우편에 예수가 앉으신 것을 바라보듯 그것을 추억하는 것입니다. 초대교회는 왠만한 자는 다 순교합니다. 초대 교부 중 한 명인 폴리갑은 불에 타죽으면서 한 번도 주님이 나를 배반한 적이 없는데 내가 어찌 배반하랴 하면서 기쁘게 순교합니다. 이것이 바로 감사와 은혜입니다. 순교는 나 자신을 준비하여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존 폭스의 <<순교사>>라는 책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열두 제자는 모두 순교했습니다. 우리 한국 교회도 주기철, 손양원, 최권능 목사님, 역시 모두 순교했습니다. 이분들은 극적으로 예수님을 만납니다. 그들 중에는 깡패였던 자, 도사가 되기 위해 허망한 것에 빠져 있던 자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은혜가 크니 감사가 크고 감사가 크니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입니다.



4. 말씀의 순교자 스데반


스데반의 설교는 7장 전체를 이룹니다. 설교라고 하지만 그의 믿는 고백이기도 합니다. 그것을 들은 자들이 미친 자처럼 분노하여 스데반을 죽입니다. 스데반의 설교는 사도행전에서 가장 긴 설교입니다. 그런데 뭔가 다른 것을 많이 말하지 않습니다. 우선 구약의 백성들이 어떻게 믿었는지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가장 많이 언급되는 인물은 아브라함, 요셉, 모세, 솔로몬입니다. 그들은 주로 피, 고난과 관련된 자들이요 여호와의 임재와 관련된 자들입니다. 바로 스데반은 고난 받으면서 여호와의 품 속에 안기는 자리에 있습니다. 그러니 가장 구약시대 때 핏빛, 할례로 연결되는 그것을 기억한 것입니다. 그것은 아브라함의 하나님의 피 백성 되는 할례언약입니다. 또 요셉을 많이 이야기합니다. 주로 야곱을 이야기하는데 말입니다. 이것은 역시 요셉이 팔려 가고 구덩이와 감옥에 들어간 것과 하나님이 그 가운데 동행하신 것(창 39:23)으로 인함입니다. 야곱도 고난을 많이 받았으나 요셉은 더욱 그러합니다. 또한 모세는 광야교회와 관련하여 나옵니다. 이 땅의 교회는 다 광야교회와 같다고 설교하는 가운데, 구름기둥과 불기둥을 따라 다니며 예배드린 것처럼, 우리도 이 세상에서 살아가되 지나가는 곳이요, 그러나 그곳에 여호와께서 함께하시는 곳이 장막이라는 맥락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리고 솔로몬 언급은 그가 성전을 지은 것과 관련됩니다. 하늘의 교회의 완성과 관련된 것입니다. 성령충만하니 이런 간증과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이제 그 설교의 마지막 부분에 유대인들에 대해 질책을 합니다.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레를 받지 못한 자들이 성령을 거스른다고 합니다. 완전히 죽을 작정을 한 것입니다. 유대인들을 육체의 할례를 받았을 뿐 교만하여 듣지 않는 마음과 귀는 할례받지 못한 자로 말합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에게서 보듯 성령을 훼방하면 하나님께서 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 선지자들이 의인이 오시리라 예언했는데 너희 조상이 그들을 죽인 것처럼 이제 오신 의인, 곧 예수 그리스도를 너희들이 죽였다고 선포합니다. 그리고 천사가 전한 율법을 받고도 너희들이 지키지 않았다고 합니다. 담대히 선포한 것입니다. 가장 유한 사람이며 성령과 지혜와 믿음과 권능과 은혜가 있었던 스데반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 것입니다.

그런데 54절, 본문에서 백성들의 반응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림에도 불구하고, 마음에 찔림이 있으면 명령에 약속이 있으므로 감사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이를 갈았습니다. 성령을 받지 못한 자들의 모습이 바로 이것입니다. 말씀이 나를 찌를 때 그것을 기회로 삼아 복된 것으로 알고, 진리가 있으면 은혜가 있으니 기뻐하기는커녕 이를 가는 것입니다. 그로 인해 스데반을 죽인 것입니다.



5. 그리스도의 죽음과 닮은 순교


스데반의 설교에는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보입니다. 첫 번째, 돌로 쳐서 죽입니다. 우리 예수님도 십자가에서 죽임 당하십니다. 이 둘의 공통점은 저주의 죽음이라는 것입니다. 스데반도 예수님과 같이 "성 밖으로 내치고" 난 후 돌로 쳐죽임을 당한 것입니다. 또한 스데반은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라고 합니다. 순교자는 누구나 그렇습니다. 내가 죄인의 괴수인데 그들보다 더 많이 은혜 받았다고 생각하는 자만 순교를 합니다. 내가 의인이라고 생각하는 자는 결코 순교하지 못합니다. —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 23:34). 주님이 하신 말씀과 같은 것입니다. 또한 본문 59절은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역시 하신 말씀입니다.  —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눅 23:46) 십자가의 말씀과 같습니다. 그리고 60절, "이 말을 하고 자니라"고 했는데, 예수님에 대해서도 "숨지시니라," "영혼이 떠나가시니라"라고 동일하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두 말씀은 누가복음에만 나옵니다. 사도행전은 누가가 기록한 책입니다. 즉 누가가 예수님의 죽음과 스데반의 순교를 비교하여 기록한 것입니다.



6. 결론: 순교적 삶을 살자


오늘날 순교신앙이라고 하면 고리타분한 것, 과거 초대교회에서만 있었던 것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번 주 북한에 다니시는 모 목사님이 저에게 오셔서 말씀하셨습니다. 14년간 아이들 음식해주는 등의 사역을 하는데, 두 달은 한국에 나오고 열 달은 북한에 있는데, 저에게 지나가면서 하는 말이 북한이 개방만 되면 만 명은 모일 것 같다고 하셨습니다. 순교는 별것이 아닙니다. 부모와 자식이 서로에게 순교합니다. 단번에 죽이는 것은 아니나 서서히 죽입니다. 서서히 죽어 가셨습니다. 그것이 순교입니다. 누군가를 사랑하고 내 살이 닳고 하는 것이 순교입니다. 부모가 자식에게 자식이 부모에게 상사는 부하에게 부하는 상사에게 순교해야 합니다. 순교는 초월적인 특별한 것이 아닙니다. 주기철 목사님도 그렇게 보면 담대하게 간 것이 아니라 기둥을 잡고 울었다고 한 기록이 있습니다. 정사입니다. 강단이 있어 순교한 것이 아닙니다. 내 기질이 강해서 한 것이 아닙니다. 도수장에 끌려가는 양과 같이 흠모할 만한 것이 없고 온유한 분들에게 은혜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 은혜가 저희에게도 있기를, 당대가 아니면 다음 세대에 또 그 다음 세대에 있기를 기도합니다. 십자가지기라는 이름을 주신 것도 어떤 다른이름보다 순교의 뜻이 있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토마스 선교사가 한국에 발 한 발자국조차 딛지 못하고 들어오는 강가에서 죽었으나 순교로 하나님 복음 전파의 큰 도구로 사용된 것처럼 우리 교회도 그렇게 쓰임받는 일이 있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