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210][십자가지기교회 주일낮예배: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45)] 성령의 열매를 맺는 믿음 (갈 5:16-26) 문병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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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 5:16)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갈 5:17)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갈 5:18)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리라
(갈 5:19)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갈 5:20)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갈 5:21)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갈 5:22)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갈 5:23)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갈 5:24)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갈 5:25)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
(갈 5:26)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노엽게 하거나 서로 투기하지 말지니라
<녹취록>
1. 서론
1) 성령 충만한 스데반과 사도들
우리는 지난주 말씀에서 순교하는 신앙, 스데반의 순교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그가 그 자리에 간 것은 성령 충만과 믿음과 지혜와 은혜와 권능이 충만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가 많은 이적과 기적을 행하고 은혜와 지혜가 충만했다고 보았습니다. 과연 한 사람이 어떻게 이리될 수 있는가, 이것을 우리는 구원, 은혜, 믿음의 비밀이라고 합니다. 다름 아닌, 주의 영을 받았으므로 그렇게 된 것입니다. 오순절 성령을 받을 때 성령 충만한 자들 중 집사를 세우게 되는데 스데반은 그중 첫 번째로 오르면서 하나님의 일을 행하도록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땅끝까지 증인이 되는 목격자와 순교자 되는 일이 스데반으로부터 시작됐습니다. 우리는 그 동일한 성령을 다 받았습니다. 스데반, 바울, 베드로가 받은 것과 동일한 성령인데, 주도 성령도 하나인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입니다.
2) 본문 개관
오늘 본문은 성령으로 사는 사람이 어떻게 사느냐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16절은 “성령에 따라 행하라”고 하며 18절은 “성령의 인도하시는” 대로 나가라고 합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우리 안에 성령이 임해야 하는데 이것이 25절,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라고 합니다. 여기서 “살면”은 성령으로 생명을 얻은 것, 살아남을 의미합니다.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한다고 합니다. 성령으로 살아난 사람은 성령으로 행해서 22절, “성령의 열매”를 맺는다고 합니다. 그리하여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얻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생명을 얻고, 성령의 인도하심과 성령을 따라 살아서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얻으며, 성령의 열매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2. 성령으로 살아감
1) 십자가 은혜 아래 살아감
이 일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다 이루시고 십자가에 못 박히심으로 그러한 것입니다. 본문 24절입니다. —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육체는 우리 자신을 의미합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를 따르는 그리스도의 영을 받은 자들은 육체와 함께 정욕과 탐심을 못 박았다고 합니다. 십자가에 못 박았다고 하는 것은 십자가 은혜로 산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은혜로 사는 것이 우리를 십자가에 못 박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본문 18절은 이제는 우리가 더이상 율법 아래 있지 않다고 합니다. 십자가의 은혜 아래 있다고 합니다(롬 6:15-17). 은혜 안에 사는 것은 십자가 아래 사는 것입니다. 이제 십자가의 은혜로 사는 사람은 더이상 율법 아래 있지 않다고 합니다. 십자가 아래 있다는 것은 율법의 종이 아닌 율법을 즐기며, 진정한 자유를 누리며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갈라디아서 5장입니다. 그러니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 진정한 믿음으로 사랑의 열매를 맺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2) 믿음으로 살아감: 지혜
지난 주간에 스데반이 성령, 믿음, 지혜, 은혜, 권능 충만한 것으로 말씀을 보았습니다. 믿음으로 살면 그것이 지혜이고, 은혜로 살면 그것이 권능이라고 나누었습니다. 우리에게 여러 길이 있습니다. 지혜를 많이 이야기합니다. 지혜는 생명의 지식이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지혜로운 자는 믿음으로 사는 자입니다. 믿음으로 사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이것이 답입니다. 어떻게 사느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사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나머지는 답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큰 답을 이야기하자면, 믿음으로 사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그래서 믿음과 지혜가 충만한 것입니다.
3) 은혜로 살아감: 권능
또 누가 권능이 있는 사람이냐고 하면, 바로 은혜로 사는 사람입니다. 내 자질이나 재주로 사는 사람은 남에게 인정받고 드러날지는 몰라도 권능이라고까지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은혜로 사는 사람은 권능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에게 복을 내리실 때 아브라함을 축복하는 자는 축복하시고 저주하는 자는 저주하신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권능입니다. 저 사람을 보니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데 저 사람을 감히 어찌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 이것이 권능입니다. 믿음으로 지혜롭게 되고 은혜로 권능 얻는 것은 바로 보혜사 성령으로 사는 것입니다.
4) 평안히 살아감
여기 있는 우리 모두는 성령을 받았습니다. 아침에 눈 떠도 이미 성령이 내 안에 계십니다. 어떻게 보면 성령이 우리를 눈 뜨게 합니다. 밤에 곤하게 누워 자면서 평화를 맛보는 것도 성령이 함께 계시므로 그렇습니다. 성령이 없는 사람은 눈을 감으면 혼란스럽고 불안합니다. 그러나 우리 성도들은 눈 감으면 평화가 옵니다. 고요해지고 마음이 즐겁습니다. 그래서 눈을 감으면 임마누엘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는 것이 느껴집니다. 그러니 우리 안에 임마누엘 성령이 있음을 우리가 압니다. 그러니 우리의 심령이 여기저기 기웃거리지 않습니다. 아무 일 없어도 소망과 기쁨이 넘치고 평안합니다. 그것이 바로 보혜사 성령이 우리에게 임한 것입니다.
3. 단회적 임재하시며 떠나지 않으시는 성령
1) 우리를 이끄시는 성령
보혜사 성령, 임마누엘, 예수의 영은 우리에게 한 번 임하시면 떠나지 않으십니다. 단회적으로 우리에게 임하면 다시는 떠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을 주장하십니다. 보게 하시고 알게 하십니다. 온전케 하시되 떠나지 아니하십니다. —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요 14:16). 모세가 결국 모세가 된 것은 여호와를 대면했기 때문인데, 모세가 가서 대면했다기보다는 여호와 하나님이 그를 떠나지 않으신 것입니다. —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있으리라”(출 3:12). 기도하는 사람이 잘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찾아오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계시는데 우리는 내가 하나님을 찾는다고 이야기하곤 합니다. 그러니 하나님을 찾는 것도 은혜입니다. 그러니 전부 은혜입니다. 자석이 저쪽에서 끌어당기는데 우리가 자석을 당긴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성령을 주사 그 성령이 내 안에서 내가 성령의 것을 삼으사 하나님께 끌어당기는 것입니다. 성령이 내 것이 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성령의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하니, 본문처럼 육체의 소욕이 아닌 성령의 소욕으로 사는 것입니다. 저는 부족하고 안타까운 부분이 많으나, 하나님이 경륜에 따라 저를 이끄시는 것을 믿습니다.
2) 진리의 성령
보잘것없고 불완전한 작은 피조물인 이 인간이 전능하신 피조물을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성령이 임하면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그리하여 하나님이 우리에게 떠나지 아니하시고 영원히 함께 계셔 알게 하십니다. 이 성령이 임하면 진리의 영이 임하는 것입니다. —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요 16:13). 성령이 하시는 일은 전부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성령이 오시면 성령이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셔서 내가 그 안에 그가 내 안에 계심을 알게 하십니다(요 14:20). 지금 예배 자리에 앉아 있다는 것이 아는 것입니다. 내 지식으로는 잘 모르겠다고 말할 수 있으나 내 전부는 지금 이 자리에 와 있습니다. 아니까 이 자리에 와서 예배드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내가 그 안에 그가 내 안에 계심을 아는 것입니다. 우리가 마음에 빛이 있고 즐거울 때는 지식도 내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이끄셔서 내가 그 안에 그가 내 안에 있는 것을 알게 하십니다. —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요 14:26). 보혜사 성령이 임하면 크게 두 가지가 있습니다.
(1) 십자가를 보게 하시는 성령
첫 번째는 십자가가 보입니다. 매사에 말입니다(갈 3:1). 이것이 보혜사 성령의 진리입니다. 십자가의 형상이 보이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나의 구주이심과 그의 죽으심이 나를 살리기 위하심임이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니 제1 진리는 십자가가 보이는 것입니다. 보혜사 성령이 임하면 말입니다. 내 정욕과 육체와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는 것이 십자가가 보이는 것입니다.
(2) 말씀을 심령에 새기시는 성령
두 번째는 하나님의 말씀이 새겨집니다. 말씀이 버릇이 되고 말씀대로 피가 돌고 움직이게 되어 있습니다. 말씀대로 보고 듣게 됩니다. 그래서 예레미야 선지자는 말씀을 우리 심령에 새겨진다고 말씀한 것입니다. 주의 법이 내 안에 새겨진다고 한 것입니다. 우리는 가장 귀한 비밀을 알고 있습니다. 여호와를 아는 지식을 알려 주셨으니 그것으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감사해야 합니다.
3) 능력의 성령
(1)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 하나님을 비추는 것이 능력이다 그리고 보혜사 성령이 임하여 우리에게 나타나는 것이 능력입니다. 알려 주신 대로 하나님이 행하시는 것입니다. 능력은 곧 잘 비추는 것입니다. 우리는 빛이 될 수 없습니다. 스스로 능력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니 잘 받아들이고 비추는 것이 능력입니다. 그러려면 하나님께 바짝 다가서야 합니다. 그러면 비춥니다. 그러니 성경에서 자주 명령하시는 것은 ‘내게 나오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 능력입니다. 그러니 사실상 우리가 복음서 등을 보면 세상에서 말단에 있는 것 같은 사람들이 잔칫상으로 나아온다고 말씀합니다. 구중궁궐에 있는 자들은 나아오지 않지만 말입니다. 바로 나아오는 사람들이 천국을 유업으로 얻는 것입니다. 성령이 임하면, 그것이 바로 능력입니다. 우리는 비추기에 힘써야 합니다. 비추는 것은 내가 하는 것이 아닙니다. 태양과 밝은 달 사이에는 아무것도 없지 않습니다. 그러나 달만 보이는 것은 그것이 태양을 반사하기 때문입니다. 성도도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비춥니다. 다른 것은 그러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력, 성령이라는 관점에서 말하자면, 하나님의 빛을 비추지 못하면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니 성도가 아닌 자들은 사실상 죽음입니다. 없는 것입니다. 있으나 없습니다. 있다고 해도 빛이 가도 비추지 않으니 말입니다. 그러나 성도에게 빛이 비추면 성도에게서 빛이 비칩니다. 우리 성도가 있으니 하나님의 빛이 비추어 세상에서 빛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능력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달이 아무런 빛을 생산하지 못하나 태양을 비추는 것처럼, 성도도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는 것이 능력입니다.
(2) 우리가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것이 능력이다 본문 25절입니다. “성령으로 살면”이라는 말은 ‘성령으로 살아났으면’이라는 의미입니다. 즉, ‘우리가 성령으로 살아났으므로’로 보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성령대로 산다는 것입니다. 즉, 25절은 가정문이 아니라, ‘우리가 성령으로 살아났으니 성령으로 행할지니’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생명을 주신 분이 성령이니 이제는 성령의 뜻대로, 지시대로 살아야 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성령은 생명을 줄 뿐 아니라 생활을 줍니다. 빛은 온기가 있고 빛을 비추기도 합니다. 생명을 주고 그저 떠나시지 않습니다. 보혜사 성령은 꼭 우리를 묶어 성령의 소욕대로 살게 하십니다. 그리하여 18절,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게 합니다. 이것이 바로 비추는 것이요, 우리의 능력입니다. 하나님 앞에 우리가 무엇을 하는지를 생각하지 말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비추시는 것을 생각하십시오. 내가 빛을 낸다면 안간힘을 써서 하루는 해보겠지만 내일은 어찌합니까? 너무 힘들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우리가 불변하는 빛, 생명, 말씀이신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살면 낮에 속한 백성으로 빛을 비추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하여 ‘성령을 따라 행하라’고 합니다. 성령은 하나님입니다. 우리가 성령을 좌지우지하지 않습니다. 본문 8절, 성령이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그것이 바로 능력입니다. — “내가 주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시 139:7). 따라가는 것입니다. 구약의 다윗은 법궤를 따라가는 것입니다. 법궤를 앞장세우고 이스라엘 백성이 요단강을 건넙니다. 구름기둥, 불기둥을 따라갑니다. 제사장들이 앞섭니다. 제사장은 하나님이 가장 가까이 세우신 중개자입니다. 그리고 백성들은 그 뒤를 따라갑니다. 보혜사 성령이 오늘날 이처럼 우리를 이끄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주의 영의 소욕대로 사는 것입니다. 에스겔 골짜기에 환상 가운데 마른 뼈가 힘줄과 살이 돋고 가죽이 덮혀 여호와의 군대를 이루었다고 합니다. — “생기야 사방에서부터 와서 이 죽음을 당한 자에게 불어서 살아나게 하라 하셨다 하라”(겔 39:7). 우리가 증인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한 발자국 따라가면 됩니다. 따라가는 것은 어린아이들이 잘합니다. 어른들은 잘하지 못합니다. 어린아이와 같이 되라는 것은 따라가라는 것입니다. 좋은 뜻으로 영적 호기심이 있어야 합니다. 저 말씀은 무엇인데 심오하고 기쁠까 하여 따라가는 것이 있을 때 여호와의 군대가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오합지졸입니다. 아이들도 있고 부녀자도 있고 가축도 있습니다. 그래도 모압, 암몬, 에돔을 다 이깁니다. 여호와의 신을 따라 다니는 백성이기 때문입니다. 이 백성을 당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백성이 뭐 하는 백성인지 의아해합니다. 손에 병기도 들리지 않고 생산도 못하는 자들입니다. 이 사람들이 누구냔 말입니다. 구름기둥, 불기둥, 성령을 쫓아갈 뿐인데 말입니다. 이 백성이 여호와의 군대를 이룹니다. 교회가 크게 사업 계획을 잡아서 큰 무엇인가를 합니까? 좋습니다. 그러나 영적인 중심은 성령을 따라가야 합니다. 내가 머리가 되면 안됩니다. 우리는 성령을 따라가야 합니다. 한국교회, 십자가지기교회가 그렇게 해야 합니다. 성령이 인도하는 바대로 행해야 합니다. 항상 버릇을 들여야 합니다. 성령이 지시하는 대로 따르는 것을 말입니다. 아무것도 그저 빨리 결정하지 마십시오. 사업에 대해서도 답은 한 가지입니다. 답은 아무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처음 제가 미국에 갔을 때 지엠은 결코 안 망할 줄 알았는데 지금 위태롭습니다. 소니도 다른 회사도 그렇습니다. 알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성령의 지시와 이끄심을 따라갈 뿐입니다. — “하나님의 영이 나를 지으셨고 전능자의 기운이 나를 살리시느니라”(욥 33:4). 우리는 따라가면 합니다.
4. 성령의 소욕과 육체의 소욕
1) 육체의 소욕이 아닌 성령의 소욕을 따르는 것이 즐겁다
본문에는 육체의 소욕이 많이 나옵니다. 개별적으로 말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눈에 띄는 것은 성령의 열매는 아홉 가지로 나오나 육체의 소욕은 훨씬 더 많이 나옵니다. 우리는 육체의 소욕으로 꽉 차 있습니다. 가만히 두면 죄입니다. 그렇게 아시면 됩니다. 세상은 가만히 있으면 착하다고 생각하는데, 성경은 정반대입니다. 깨어서 기도해야 하나님 편에 섭니다. 가만히 있어도 영광되는 것은 새 하늘과 새 땅에서입니다. 성경은 자연스러운 것은 죄에 속한 것으로 말합니다. 가만히 있어서 별일 없는 것이 죄짓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나를 쳐서 복종시키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는 다름 아닌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가고 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가는 것이 즐겁습니다. 우리 십자가지기 성도들은 이것 하나는 “아멘” 해야 합니다. 주와 같이 길 가는 것이 즐겁다고 말입니다. 이 땅에서 주와 함께 땀을 흘리고 이후에 함께 새참을 먹는 것이 가장 즐겁고 맛있습니다. 포도원에 가야 그 기쁨을 누립니다. 바깥에서 빈둥거리면 안 됩니다. 우리는 성령을 따라 행해야 합니다. 육체와 성령은 서로 원수가 됩니다. 성령으로 시작할 때 육체의 유혹이 있습니다. 그것이 영적 전쟁입니다. 성령의 소욕과 육체의 소욕이 내 안에서 다툽니다. 그때 우리는 한 가지만을 생각해야 합니다. 내 육체가 즐거워하는 것이 아니라 내 영이 즐거워하는 것을 하면 됩니다. 우리는 다 압니다. 거짓말하면 내 영이 근심합니다. 조금 죄짓더라도 잘살자는 것은 절대 하지 마십시오. 죄의 열매에 좋은 것은 없습니다. 성령의 열매가 좋을 뿐입니다. 혹 좋다면 조금 방법이 다르더라도 해보겠으나 나쁜 방법을 써서 얻어봤자 그것이 나를 죽이는 것인데 뭐 하러 합니까? —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갈 3:3).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롬 8:7). 본문 19절도 육체의 일은 분명하다고 합니다. 드러나는 것입니다. 몰라서 죄짓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주신 양심으로 안 믿는 자도 다 안다는 것입니다.
2) 육체의 소욕: 음란과 판단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숭배와 주술, 이것들은 영적인 음란입니다. 그 이후 나오는 원수 맺는 것 등은 영적인 판단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술취함과 방탕과 그와 같은 것은 다 육적인 간음입니다. 영적인 간음, 육적인 간음을 쭉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투기와 술취함과 방탕함, 그와 같은 것은 판단의 영역에 들어갑니다. 크게 보면 성경에서 말하는 죄는 두 가지인데, 음란한 것과 판단하는 것입니다. 잘 보십시오. 성경에서 말하는 죄는 크게 이 두 가지에 들어갑니다.
(1) 음란 음란함은 하나님을 멀리하는 것입니다. 육적인 음란은 하나님을 모시고 사는 내 육체를 더럽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영적 음란과 육적 음란이 서로 통합니다. 그러니 성경은 부부간에 용서되나 육적인 음란은 용서되지 않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특별히 성도들은 내 몸이 성령을 모시는 성전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니 영적, 육적 음란이 구별되지 않습니다. 나는 술 마시고 방탕하게 사는데 예배를 드리니 영적으로 음란하지 않다고 하는 신비주의자들이 초대교회부터 이단으로 있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지 않습니다.
(2) 판단 두 번째는 판단입니다. 판단을 성경이 금하는데 그것은 판단은 은혜가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살지 않으면 판단이 가장 먼저 들어옵니다. 은혜가 있는 사람은 판단하지 않습니다. 우리도 깨어서 기도해야 합니다. 판단하는 것, 이것은 다른 말로 하면 내가 은혜를 감사하지 않는다는 것과 같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많은 죄들은 여호와 하나님을 중심에 모시고 감사하며 은혜로 사는 자들에게 속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없으면 모두 육체에 속하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님들은 죄와 짝하지 말고 뒤에서 다른 사람에 대해 말하지 마시고 정식으로 밝게 일하십시오. 귀하신 주님이 내게 있으니 주 안에 늘 기쁩니다. 주님의 은혜가 있으면 기쁩니다. 여호와를 중심에 두고 예배드리고 여호와를 감사하면 육적인 것도 따라옵니다. 육적인 것과 영적인 것이 나누어지지 않습니다.
3) 성령의 소욕: 아홉 가지 맛을 내는 한 열매
(1) 아홉 가지 맛 그리고 나오는 것이 성령의 소욕입니다. 아홉 가지 열매입니다. "사랑"은 주는 것입니다. "희락"은 하나님 안에서 누리는 것입니다. "화평"은 평강, 제자리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리에, 하나님은 하나님 자리에 있는 것입니다. 절대 경계를 넘어서는 안 됩니다. 못한다고 하는 것은 괜찮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그리하지 마십시오” 하면 안 됩니다. 베드로가 그리 말했을 때 예수님이 “사탄아 물러가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못할 때 가슴을 치면 하나님이 하게 하십니다. "오래 참음"은 하나님의 섭리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자비"는 다른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말씀입니다. 우리 교회는 기도할 때 “거룩하고 자비로우신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거룩은 절대 거룩, 자비는 사랑과 긍휼입니다. 그래서 자비라는 말을 좋아합니다. 사랑을 베풀되 불쌍히 여겨서 베푸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다 자비입니다. "양선"이라는 것은 새긴 것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저 선한 것이 아닙니다. 내 안에 박혀서 선을 행하는 것입니다. 겉모습만 내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새겨진 것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진심으로 선을 행하는 것입니다. "충성"은 하나님께 끝까지 붙어 있는 것입니다. "온유"는 내가 주인이 되지 않는 것, 즉 하나님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따라가는 것이 성령의 열매입니다. 성령의 열매는 이와 같이 하나님이 주신 것을 잘 누리는 것입니다. 잘 누리는 것이 최고 권능자입니다. 믿음으로 행하면 지혜롭고 은혜로 행하면 권능이 있습니다. 능력이 있으려거든 은혜로 사십시오. 세상에서도 그렇습니다. 그리고 "절제"라는 것은 꼬리가 되는 것입니다. 구름기둥, 불기둥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2) 한 열매 성령의 열매는 단수입니다. 성령의 열매는 한 가지입니다. 한 가지 열매에 아홉 가지 맛이 있습니다. 성령을 주시면 이 아홉 가지를 다 주십니다. 어떤 것을 받고 어떤 것은 받지 않은 것이 아니라 한 열매를 먹는데 아홉 가지 맛이 퍼지는 것, 이것이 성령이 임하는 것입니다. 성령은 신분적, 고백적, 언약적, 불가항력적, 송영적으로 옵니다. 신분적이라 함은 내 자신이 바뀜이요, 고백적이라 함은 내 안에서 나옴이요, 언약적이라 함은 하나님의 약속 가운데 있음이요, 불가항력적이라 함은 내가 거부할 수 없는 은혜 가운데 살게 됩니다. 송영적이라 함은 모든 것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올리게 됩니다. 이것이 성령이 임한 모습입니다.
5. 결론
우리 안에 계신 성령에게 모든 것을 맡기십시오. 욕심내지 마십시오. 욕심내지 않으면 하나님이 거룩한 성령의 소욕으로 이루어 가십니다. 욕심이 있으나 성령의 욕심으로, 하나님께 더 가까이 가고 더 바짝 붙어 따라가는 것입니다. 어려움과 힘듦이 있어도 기뻐하십시오. 내가 앞장서지 않고 성령을 앞세우면 됩니다. 그러면 좌절하지 않습니다. 항상 기쁨이 있습니다.
[20190210][십자가지기교회 주일낮예배: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45)] 성령의 열매를 맺는 믿음 (갈 5:16-26) 문병호 목사
*음성파일: 게시물 하단 "관련링크"에서 청취 혹은 내려받기 가능합니다.
<녹취록>
1. 서론
1) 성령 충만한 스데반과 사도들
우리는 지난주 말씀에서 순교하는 신앙, 스데반의 순교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그가 그 자리에 간 것은 성령 충만과 믿음과 지혜와 은혜와 권능이 충만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가 많은 이적과 기적을 행하고 은혜와 지혜가 충만했다고 보았습니다. 과연 한 사람이 어떻게 이리될 수 있는가, 이것을 우리는 구원, 은혜, 믿음의 비밀이라고 합니다. 다름 아닌, 주의 영을 받았으므로 그렇게 된 것입니다. 오순절 성령을 받을 때 성령 충만한 자들 중 집사를 세우게 되는데 스데반은 그중 첫 번째로 오르면서 하나님의 일을 행하도록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땅끝까지 증인이 되는 목격자와 순교자 되는 일이 스데반으로부터 시작됐습니다. 우리는 그 동일한 성령을 다 받았습니다. 스데반, 바울, 베드로가 받은 것과 동일한 성령인데, 주도 성령도 하나인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입니다.
2) 본문 개관
오늘 본문은 성령으로 사는 사람이 어떻게 사느냐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16절은 “성령에 따라 행하라”고 하며 18절은 “성령의 인도하시는” 대로 나가라고 합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우리 안에 성령이 임해야 하는데 이것이 25절,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라고 합니다. 여기서 “살면”은 성령으로 생명을 얻은 것, 살아남을 의미합니다.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한다고 합니다. 성령으로 살아난 사람은 성령으로 행해서 22절, “성령의 열매”를 맺는다고 합니다. 그리하여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얻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생명을 얻고, 성령의 인도하심과 성령을 따라 살아서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얻으며, 성령의 열매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2. 성령으로 살아감
1) 십자가 은혜 아래 살아감
이 일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다 이루시고 십자가에 못 박히심으로 그러한 것입니다. 본문 24절입니다. —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육체는 우리 자신을 의미합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를 따르는 그리스도의 영을 받은 자들은 육체와 함께 정욕과 탐심을 못 박았다고 합니다. 십자가에 못 박았다고 하는 것은 십자가 은혜로 산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은혜로 사는 것이 우리를 십자가에 못 박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본문 18절은 이제는 우리가 더이상 율법 아래 있지 않다고 합니다. 십자가의 은혜 아래 있다고 합니다(롬 6:15-17). 은혜 안에 사는 것은 십자가 아래 사는 것입니다. 이제 십자가의 은혜로 사는 사람은 더이상 율법 아래 있지 않다고 합니다. 십자가 아래 있다는 것은 율법의 종이 아닌 율법을 즐기며, 진정한 자유를 누리며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갈라디아서 5장입니다. 그러니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 진정한 믿음으로 사랑의 열매를 맺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2) 믿음으로 살아감: 지혜
지난 주간에 스데반이 성령, 믿음, 지혜, 은혜, 권능 충만한 것으로 말씀을 보았습니다. 믿음으로 살면 그것이 지혜이고, 은혜로 살면 그것이 권능이라고 나누었습니다. 우리에게 여러 길이 있습니다. 지혜를 많이 이야기합니다. 지혜는 생명의 지식이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지혜로운 자는 믿음으로 사는 자입니다. 믿음으로 사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이것이 답입니다. 어떻게 사느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사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나머지는 답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큰 답을 이야기하자면, 믿음으로 사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그래서 믿음과 지혜가 충만한 것입니다.
3) 은혜로 살아감: 권능
또 누가 권능이 있는 사람이냐고 하면, 바로 은혜로 사는 사람입니다. 내 자질이나 재주로 사는 사람은 남에게 인정받고 드러날지는 몰라도 권능이라고까지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은혜로 사는 사람은 권능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에게 복을 내리실 때 아브라함을 축복하는 자는 축복하시고 저주하는 자는 저주하신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권능입니다. 저 사람을 보니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데 저 사람을 감히 어찌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 이것이 권능입니다. 믿음으로 지혜롭게 되고 은혜로 권능 얻는 것은 바로 보혜사 성령으로 사는 것입니다.
4) 평안히 살아감
여기 있는 우리 모두는 성령을 받았습니다. 아침에 눈 떠도 이미 성령이 내 안에 계십니다. 어떻게 보면 성령이 우리를 눈 뜨게 합니다. 밤에 곤하게 누워 자면서 평화를 맛보는 것도 성령이 함께 계시므로 그렇습니다. 성령이 없는 사람은 눈을 감으면 혼란스럽고 불안합니다. 그러나 우리 성도들은 눈 감으면 평화가 옵니다. 고요해지고 마음이 즐겁습니다. 그래서 눈을 감으면 임마누엘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는 것이 느껴집니다. 그러니 우리 안에 임마누엘 성령이 있음을 우리가 압니다. 그러니 우리의 심령이 여기저기 기웃거리지 않습니다. 아무 일 없어도 소망과 기쁨이 넘치고 평안합니다. 그것이 바로 보혜사 성령이 우리에게 임한 것입니다.
3. 단회적 임재하시며 떠나지 않으시는 성령
1) 우리를 이끄시는 성령
보혜사 성령, 임마누엘, 예수의 영은 우리에게 한 번 임하시면 떠나지 않으십니다. 단회적으로 우리에게 임하면 다시는 떠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을 주장하십니다. 보게 하시고 알게 하십니다. 온전케 하시되 떠나지 아니하십니다. —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요 14:16). 모세가 결국 모세가 된 것은 여호와를 대면했기 때문인데, 모세가 가서 대면했다기보다는 여호와 하나님이 그를 떠나지 않으신 것입니다. —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있으리라”(출 3:12). 기도하는 사람이 잘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찾아오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계시는데 우리는 내가 하나님을 찾는다고 이야기하곤 합니다. 그러니 하나님을 찾는 것도 은혜입니다. 그러니 전부 은혜입니다. 자석이 저쪽에서 끌어당기는데 우리가 자석을 당긴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성령을 주사 그 성령이 내 안에서 내가 성령의 것을 삼으사 하나님께 끌어당기는 것입니다. 성령이 내 것이 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성령의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하니, 본문처럼 육체의 소욕이 아닌 성령의 소욕으로 사는 것입니다. 저는 부족하고 안타까운 부분이 많으나, 하나님이 경륜에 따라 저를 이끄시는 것을 믿습니다.
2) 진리의 성령
보잘것없고 불완전한 작은 피조물인 이 인간이 전능하신 피조물을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성령이 임하면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그리하여 하나님이 우리에게 떠나지 아니하시고 영원히 함께 계셔 알게 하십니다. 이 성령이 임하면 진리의 영이 임하는 것입니다. —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요 16:13). 성령이 하시는 일은 전부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성령이 오시면 성령이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셔서 내가 그 안에 그가 내 안에 계심을 알게 하십니다(요 14:20). 지금 예배 자리에 앉아 있다는 것이 아는 것입니다. 내 지식으로는 잘 모르겠다고 말할 수 있으나 내 전부는 지금 이 자리에 와 있습니다. 아니까 이 자리에 와서 예배드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내가 그 안에 그가 내 안에 계심을 아는 것입니다. 우리가 마음에 빛이 있고 즐거울 때는 지식도 내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이끄셔서 내가 그 안에 그가 내 안에 있는 것을 알게 하십니다. —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요 14:26). 보혜사 성령이 임하면 크게 두 가지가 있습니다.
(1) 십자가를 보게 하시는 성령
첫 번째는 십자가가 보입니다. 매사에 말입니다(갈 3:1). 이것이 보혜사 성령의 진리입니다. 십자가의 형상이 보이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나의 구주이심과 그의 죽으심이 나를 살리기 위하심임이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니 제1 진리는 십자가가 보이는 것입니다. 보혜사 성령이 임하면 말입니다. 내 정욕과 육체와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는 것이 십자가가 보이는 것입니다.
(2) 말씀을 심령에 새기시는 성령
두 번째는 하나님의 말씀이 새겨집니다. 말씀이 버릇이 되고 말씀대로 피가 돌고 움직이게 되어 있습니다. 말씀대로 보고 듣게 됩니다. 그래서 예레미야 선지자는 말씀을 우리 심령에 새겨진다고 말씀한 것입니다. 주의 법이 내 안에 새겨진다고 한 것입니다. 우리는 가장 귀한 비밀을 알고 있습니다. 여호와를 아는 지식을 알려 주셨으니 그것으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감사해야 합니다.
3) 능력의 성령
(1)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 하나님을 비추는 것이 능력이다
그리고 보혜사 성령이 임하여 우리에게 나타나는 것이 능력입니다. 알려 주신 대로 하나님이 행하시는 것입니다. 능력은 곧 잘 비추는 것입니다. 우리는 빛이 될 수 없습니다. 스스로 능력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니 잘 받아들이고 비추는 것이 능력입니다. 그러려면 하나님께 바짝 다가서야 합니다. 그러면 비춥니다. 그러니 성경에서 자주 명령하시는 것은 ‘내게 나오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 능력입니다. 그러니 사실상 우리가 복음서 등을 보면 세상에서 말단에 있는 것 같은 사람들이 잔칫상으로 나아온다고 말씀합니다. 구중궁궐에 있는 자들은 나아오지 않지만 말입니다. 바로 나아오는 사람들이 천국을 유업으로 얻는 것입니다. 성령이 임하면, 그것이 바로 능력입니다. 우리는 비추기에 힘써야 합니다. 비추는 것은 내가 하는 것이 아닙니다. 태양과 밝은 달 사이에는 아무것도 없지 않습니다. 그러나 달만 보이는 것은 그것이 태양을 반사하기 때문입니다. 성도도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비춥니다. 다른 것은 그러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력, 성령이라는 관점에서 말하자면, 하나님의 빛을 비추지 못하면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니 성도가 아닌 자들은 사실상 죽음입니다. 없는 것입니다. 있으나 없습니다. 있다고 해도 빛이 가도 비추지 않으니 말입니다. 그러나 성도에게 빛이 비추면 성도에게서 빛이 비칩니다. 우리 성도가 있으니 하나님의 빛이 비추어 세상에서 빛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능력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달이 아무런 빛을 생산하지 못하나 태양을 비추는 것처럼, 성도도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는 것이 능력입니다.
(2) 우리가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것이 능력이다
본문 25절입니다. “성령으로 살면”이라는 말은 ‘성령으로 살아났으면’이라는 의미입니다. 즉, ‘우리가 성령으로 살아났으므로’로 보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성령대로 산다는 것입니다. 즉, 25절은 가정문이 아니라, ‘우리가 성령으로 살아났으니 성령으로 행할지니’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생명을 주신 분이 성령이니 이제는 성령의 뜻대로, 지시대로 살아야 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성령은 생명을 줄 뿐 아니라 생활을 줍니다. 빛은 온기가 있고 빛을 비추기도 합니다. 생명을 주고 그저 떠나시지 않습니다. 보혜사 성령은 꼭 우리를 묶어 성령의 소욕대로 살게 하십니다. 그리하여 18절,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게 합니다. 이것이 바로 비추는 것이요, 우리의 능력입니다.
하나님 앞에 우리가 무엇을 하는지를 생각하지 말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비추시는 것을 생각하십시오. 내가 빛을 낸다면 안간힘을 써서 하루는 해보겠지만 내일은 어찌합니까? 너무 힘들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우리가 불변하는 빛, 생명, 말씀이신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살면 낮에 속한 백성으로 빛을 비추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하여 ‘성령을 따라 행하라’고 합니다. 성령은 하나님입니다. 우리가 성령을 좌지우지하지 않습니다. 본문 8절, 성령이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그것이 바로 능력입니다. — “내가 주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시 139:7). 따라가는 것입니다. 구약의 다윗은 법궤를 따라가는 것입니다. 법궤를 앞장세우고 이스라엘 백성이 요단강을 건넙니다. 구름기둥, 불기둥을 따라갑니다. 제사장들이 앞섭니다. 제사장은 하나님이 가장 가까이 세우신 중개자입니다. 그리고 백성들은 그 뒤를 따라갑니다. 보혜사 성령이 오늘날 이처럼 우리를 이끄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주의 영의 소욕대로 사는 것입니다.
에스겔 골짜기에 환상 가운데 마른 뼈가 힘줄과 살이 돋고 가죽이 덮혀 여호와의 군대를 이루었다고 합니다. — “생기야 사방에서부터 와서 이 죽음을 당한 자에게 불어서 살아나게 하라 하셨다 하라”(겔 39:7). 우리가 증인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한 발자국 따라가면 됩니다. 따라가는 것은 어린아이들이 잘합니다. 어른들은 잘하지 못합니다. 어린아이와 같이 되라는 것은 따라가라는 것입니다. 좋은 뜻으로 영적 호기심이 있어야 합니다. 저 말씀은 무엇인데 심오하고 기쁠까 하여 따라가는 것이 있을 때 여호와의 군대가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오합지졸입니다. 아이들도 있고 부녀자도 있고 가축도 있습니다. 그래도 모압, 암몬, 에돔을 다 이깁니다. 여호와의 신을 따라 다니는 백성이기 때문입니다. 이 백성을 당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백성이 뭐 하는 백성인지 의아해합니다. 손에 병기도 들리지 않고 생산도 못하는 자들입니다. 이 사람들이 누구냔 말입니다. 구름기둥, 불기둥, 성령을 쫓아갈 뿐인데 말입니다. 이 백성이 여호와의 군대를 이룹니다.
교회가 크게 사업 계획을 잡아서 큰 무엇인가를 합니까? 좋습니다. 그러나 영적인 중심은 성령을 따라가야 합니다. 내가 머리가 되면 안됩니다. 우리는 성령을 따라가야 합니다. 한국교회, 십자가지기교회가 그렇게 해야 합니다. 성령이 인도하는 바대로 행해야 합니다. 항상 버릇을 들여야 합니다. 성령이 지시하는 대로 따르는 것을 말입니다. 아무것도 그저 빨리 결정하지 마십시오. 사업에 대해서도 답은 한 가지입니다. 답은 아무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처음 제가 미국에 갔을 때 지엠은 결코 안 망할 줄 알았는데 지금 위태롭습니다. 소니도 다른 회사도 그렇습니다. 알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성령의 지시와 이끄심을 따라갈 뿐입니다. — “하나님의 영이 나를 지으셨고 전능자의 기운이 나를 살리시느니라”(욥 33:4). 우리는 따라가면 합니다.
4. 성령의 소욕과 육체의 소욕
1) 육체의 소욕이 아닌 성령의 소욕을 따르는 것이 즐겁다
본문에는 육체의 소욕이 많이 나옵니다. 개별적으로 말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눈에 띄는 것은 성령의 열매는 아홉 가지로 나오나 육체의 소욕은 훨씬 더 많이 나옵니다. 우리는 육체의 소욕으로 꽉 차 있습니다. 가만히 두면 죄입니다. 그렇게 아시면 됩니다. 세상은 가만히 있으면 착하다고 생각하는데, 성경은 정반대입니다. 깨어서 기도해야 하나님 편에 섭니다. 가만히 있어도 영광되는 것은 새 하늘과 새 땅에서입니다. 성경은 자연스러운 것은 죄에 속한 것으로 말합니다. 가만히 있어서 별일 없는 것이 죄짓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나를 쳐서 복종시키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는 다름 아닌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가고 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가는 것이 즐겁습니다. 우리 십자가지기 성도들은 이것 하나는 “아멘” 해야 합니다. 주와 같이 길 가는 것이 즐겁다고 말입니다. 이 땅에서 주와 함께 땀을 흘리고 이후에 함께 새참을 먹는 것이 가장 즐겁고 맛있습니다. 포도원에 가야 그 기쁨을 누립니다. 바깥에서 빈둥거리면 안 됩니다. 우리는 성령을 따라 행해야 합니다. 육체와 성령은 서로 원수가 됩니다. 성령으로 시작할 때 육체의 유혹이 있습니다. 그것이 영적 전쟁입니다. 성령의 소욕과 육체의 소욕이 내 안에서 다툽니다. 그때 우리는 한 가지만을 생각해야 합니다. 내 육체가 즐거워하는 것이 아니라 내 영이 즐거워하는 것을 하면 됩니다.
우리는 다 압니다. 거짓말하면 내 영이 근심합니다. 조금 죄짓더라도 잘살자는 것은 절대 하지 마십시오. 죄의 열매에 좋은 것은 없습니다. 성령의 열매가 좋을 뿐입니다. 혹 좋다면 조금 방법이 다르더라도 해보겠으나 나쁜 방법을 써서 얻어봤자 그것이 나를 죽이는 것인데 뭐 하러 합니까? —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갈 3:3).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롬 8:7). 본문 19절도 육체의 일은 분명하다고 합니다. 드러나는 것입니다. 몰라서 죄짓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주신 양심으로 안 믿는 자도 다 안다는 것입니다.
2) 육체의 소욕: 음란과 판단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숭배와 주술, 이것들은 영적인 음란입니다. 그 이후 나오는 원수 맺는 것 등은 영적인 판단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술취함과 방탕과 그와 같은 것은 다 육적인 간음입니다. 영적인 간음, 육적인 간음을 쭉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투기와 술취함과 방탕함, 그와 같은 것은 판단의 영역에 들어갑니다. 크게 보면 성경에서 말하는 죄는 두 가지인데, 음란한 것과 판단하는 것입니다. 잘 보십시오. 성경에서 말하는 죄는 크게 이 두 가지에 들어갑니다.
(1) 음란
음란함은 하나님을 멀리하는 것입니다. 육적인 음란은 하나님을 모시고 사는 내 육체를 더럽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영적 음란과 육적 음란이 서로 통합니다. 그러니 성경은 부부간에 용서되나 육적인 음란은 용서되지 않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특별히 성도들은 내 몸이 성령을 모시는 성전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니 영적, 육적 음란이 구별되지 않습니다. 나는 술 마시고 방탕하게 사는데 예배를 드리니 영적으로 음란하지 않다고 하는 신비주의자들이 초대교회부터 이단으로 있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지 않습니다.
(2) 판단
두 번째는 판단입니다. 판단을 성경이 금하는데 그것은 판단은 은혜가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살지 않으면 판단이 가장 먼저 들어옵니다. 은혜가 있는 사람은 판단하지 않습니다. 우리도 깨어서 기도해야 합니다. 판단하는 것, 이것은 다른 말로 하면 내가 은혜를 감사하지 않는다는 것과 같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많은 죄들은 여호와 하나님을 중심에 모시고 감사하며 은혜로 사는 자들에게 속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없으면 모두 육체에 속하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님들은 죄와 짝하지 말고 뒤에서 다른 사람에 대해 말하지 마시고 정식으로 밝게 일하십시오. 귀하신 주님이 내게 있으니 주 안에 늘 기쁩니다. 주님의 은혜가 있으면 기쁩니다. 여호와를 중심에 두고 예배드리고 여호와를 감사하면 육적인 것도 따라옵니다. 육적인 것과 영적인 것이 나누어지지 않습니다.
3) 성령의 소욕: 아홉 가지 맛을 내는 한 열매
(1) 아홉 가지 맛
그리고 나오는 것이 성령의 소욕입니다. 아홉 가지 열매입니다.
"사랑"은 주는 것입니다.
"희락"은 하나님 안에서 누리는 것입니다.
"화평"은 평강, 제자리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리에, 하나님은 하나님 자리에 있는 것입니다. 절대 경계를 넘어서는 안 됩니다. 못한다고 하는 것은 괜찮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그리하지 마십시오” 하면 안 됩니다. 베드로가 그리 말했을 때 예수님이 “사탄아 물러가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못할 때 가슴을 치면 하나님이 하게 하십니다.
"오래 참음"은 하나님의 섭리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자비"는 다른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말씀입니다. 우리 교회는 기도할 때 “거룩하고 자비로우신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거룩은 절대 거룩, 자비는 사랑과 긍휼입니다. 그래서 자비라는 말을 좋아합니다. 사랑을 베풀되 불쌍히 여겨서 베푸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다 자비입니다.
"양선"이라는 것은 새긴 것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저 선한 것이 아닙니다. 내 안에 박혀서 선을 행하는 것입니다. 겉모습만 내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새겨진 것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진심으로 선을 행하는 것입니다.
"충성"은 하나님께 끝까지 붙어 있는 것입니다.
"온유"는 내가 주인이 되지 않는 것, 즉 하나님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따라가는 것이 성령의 열매입니다. 성령의 열매는 이와 같이 하나님이 주신 것을 잘 누리는 것입니다. 잘 누리는 것이 최고 권능자입니다. 믿음으로 행하면 지혜롭고 은혜로 행하면 권능이 있습니다. 능력이 있으려거든 은혜로 사십시오. 세상에서도 그렇습니다.
그리고 "절제"라는 것은 꼬리가 되는 것입니다. 구름기둥, 불기둥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2) 한 열매
성령의 열매는 단수입니다. 성령의 열매는 한 가지입니다. 한 가지 열매에 아홉 가지 맛이 있습니다. 성령을 주시면 이 아홉 가지를 다 주십니다. 어떤 것을 받고 어떤 것은 받지 않은 것이 아니라 한 열매를 먹는데 아홉 가지 맛이 퍼지는 것, 이것이 성령이 임하는 것입니다.
성령은 신분적, 고백적, 언약적, 불가항력적, 송영적으로 옵니다. 신분적이라 함은 내 자신이 바뀜이요, 고백적이라 함은 내 안에서 나옴이요, 언약적이라 함은 하나님의 약속 가운데 있음이요, 불가항력적이라 함은 내가 거부할 수 없는 은혜 가운데 살게 됩니다. 송영적이라 함은 모든 것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올리게 됩니다. 이것이 성령이 임한 모습입니다.
5. 결론
우리 안에 계신 성령에게 모든 것을 맡기십시오. 욕심내지 마십시오. 욕심내지 않으면 하나님이 거룩한 성령의 소욕으로 이루어 가십니다. 욕심이 있으나 성령의 욕심으로, 하나님께 더 가까이 가고 더 바짝 붙어 따라가는 것입니다. 어려움과 힘듦이 있어도 기뻐하십시오. 내가 앞장서지 않고 성령을 앞세우면 됩니다. 그러면 좌절하지 않습니다. 항상 기쁨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