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217][십자가지기교회 주일낮예배: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46)] 죽음으로써 살아가는 믿음 (고후 4:7-15) 문병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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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후 4:7)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고후 4:8)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고후 4:9)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고후 4:10)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고후 4:11)
우리 살아 있는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고후 4:12)
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역사하느니라
(고후 4:13)
기록된 바 내가 믿었으므로 말하였다 한 것 같이 우리가 같은 믿음의 마음을 가졌으니 우리도 믿었으므로 또한 말하노라
(고후 4:14)
주 예수를 다시 살리신 이가 예수와 함께 우리도 다시 살리사 너희와 함께 그 앞에 서게 하실 줄을 아노라
(고후 4:15)
이는 모든 것이 너희를 위함이니 많은 사람의 감사로 말미암아 은혜가 더하여 넘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
<녹취록>
1. 인간 창조와 부활의 연속성: 영혼과 육체로 구성된 인간
부활의 말씀은 부활절에만 혹은 부활의 찬송을 부활절에만 부르는 것이 아니라 연중 내내 성탄과 부활의 찬송을 불러야 합니다. 부활의 소망이 없으면 십자가의 죽음이 헛것이라는 것이 바울의 큰 선포입니다. 그래서 부활이 없으면 전하는 것도 헛것이요, 예수님의 죽음도, 모든 것이 헛됩니다. 그러니 부활의 신앙을 그렇게 이야기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변개치 않으시므로 모든 일을 창세 전에 작정하신 대로 이루시는데, 창세기 2장 7절에서 생기를 불으넣으신 그것이 영혼입니다. 흙으로 준비하시고 생기를 불어넣으니 그 흙이 육체가 되고 생기는 영혼이 되어 인간이 조성된 것입니다. 이 하나님이 인간을 지으신 경륜, 섭리, 목적은 바로 영혼과 육체 가운데 우리 인류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영혼으로만 사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철학자들, 세상의 이방종교는 육체를 벗어나 영혼으로 떠도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기독교적 진리는 하나님이 지으신대로 영혼과 육체로 영원히 사는 것을 소망하고 궁극적인 하나님의 뜻으로 받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부활체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영원히 신령한 몸"(고전 15:44)으로, "신령한 사람"(고전 15:46)으로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저는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할 때 언제부터인가 부활의 몸으로 영원히 사람으로 사는 것, 지금 저와 같은 본질이되 성질이 변하여 사는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육체에 속한 것이 신령한 것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그러니 지금 우리는 각자의 몸과 영혼으로 본질을 그대로 취하되 성질은 영화로운 것으로 변화하여 영원히 살 것을 믿는 것입니다. 이 지상의 교회는 그러므로 천상의 교회를 앞당겨 맛보며 교재하고 이해하는 것이며 성도들이 피차간 귀한 것입니다.
2. 부활, 예수의 생명, 부활 신앙
본문 7절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다고 합니다. 질그릇과 보배는 어떻게 보면 어울리지 않아 보입니다. 보배를 금그릇에 넣었다고 하면 뭔가 어울릴 것 같은데 질그릇이라고 하면 옹기와 같이 가장 천한 것입니다. 요새 얼마나 비싼지 모르지만 금그릇은 보이지 않으나 질그릇은 어디든지 보입니다. 이 질그릇에 보배를 가졌다고 합니다. 이 보배는 무엇이냐 하니, 10절과 11절을 보면 우선 "예수의 생명"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질그릇이고, 정말 하찮은데, 이것에 예수의 생명을 담은 것입니다. 그러면 이 예수의 생명은 무엇이냐 하니 '부활하신 생명'입니다. 일찍이 죽음을 당하시고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신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생명입니다. 이 예수의 생명이 우리의 질그릇에 담겨 있는 것입니다. 이 질그릇에 예수의 생명을 담으면 우리도 그와 같이 부활한다는 것, 부활의 소망이 14절에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가 부활의 첫 번째 열매요, 그 생명을 우리에게 담아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것을 믿어 그것을 가지고 사는 사람도 예수와 같이 살리시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초대교회의 가장 중요한 전파 내용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였다는 것과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 그리고 우리가 그 일에 증인이라는 것이 초대교회 세 가지 핵심 메시지입니다. 자나 깨나 이것만을 전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가 죽은 것은 우리가 죽인 것입니다. 내가 죽인 그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 것입니다. 우리가 그 예수를 보고 그 일에 증인이 되는 것입니다. 이 일에 증인이 됨은 그저 십자가를 보아서 그리한 것이 아니라 오순절 성령을 받아 예수 그리스도의 영, 생명이 내 안에 들어오니 증인이 되는 것입니다. 본문 말씀에서 사도 바울은 그것을 이야기합니다. 고린도 교인이 서로 내가 잘났다고 다투지만 사도 바울은 부활의 신앙으로 죽음은 나에게 있고 생명은 여러분께 있다고 말합니다. 본문 12절입니다 — “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역사하느니라.” 이 말은 우리가 너희를 위해 죽는다는 말입니다. 여러분을 살리려고 우리는 죽음의 길로 간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죽음의 길로 가는 것이 영 죽는 것이냐 하니 그것이 아닙니다.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한다고 예수님이 나사로를 살릴 때 하신 말씀이 이에 적용되는 것입니다.
3. 보배 담은 질그릇: 죽음을 맛보며 부활의 생명을 누림
1) 질그릇의 가치는 그 담긴 것에 있다
우리는 연약한 것을 담는 사실상 보배로운 그릇입니다. 세상에도 사실상 중요한 것은 내 자신이라기보다 그것에 담긴 것입니다. 봄(春)이나 봄이라는 시간이 중요하기보다는 그 봄에 하나님이 불어주시는 훈풍과 생명이 귀한 것입니다. 우리가 그냥 귀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보듬고 키워 주시는 부모님이 있으니 귀한 것입니다. 우리가 귀한 것이 아니라 당기는 것이 있으니 귀한 것입니다. 실로암에도 가보면 물이 별것 없습니다. 깊이 흐르는 그냥 흙탕물 같은 물입니다. 그 물이 동할 때 낫게 하시는데, 그 실로암, 그리고 그 옆의 소경 둘 다 귀한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다만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 귀한 것입니다. 소경의 연약함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하나님의 일을 증거하니 귀한 것입니다. 눈을 떠도 보이지 않으므로 그 눈이 하나님께 영광의 도구가 된 것입니다. 나사로를 살리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이 다 아시면서 사흘 동안 놔두신 것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심입니다. 나사로가 복된 것은 다시 살아나 생명을 얻은 그 자체보다 죽음에서 생명으로 살아나는 증인이 된 것입니다.
2) 예수님의 부활 생명이 나타나는 연약한 질그릇
그래서 예수님도 표적은 하나밖에 없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산이 옮기고 바위가 깨지고 물이 나오는 것이 표적이 아닌, 최고의 표적은 단 하나로 요나의 표적이라고 이야기하신 것입니다. 바로 물고기 뱃속에서 죽음을 맛보는 것입니다. 니느웨 성으로 가지 않겠다는 선지자를 모든 것을 녹이는 물고기의 뱃속에 넣어 죽음을 맛보게 하신 것입니다. 욥과 다니엘 등 성경의 인물이 지혜로운 것은 고난뿐 아니라 죽음도 맛보았기 때문입니다. 온몸이 상하고 자녀도 죽고 아내로부터도 어려움을 당하고 친구로부터 저주를 받은 자가 욥입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 정금같이 나오는 것입니다. 다니엘도 불에 던져지나 천사와 춤을 추고 사자 입에서 건져 주십니다. 야곱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두 죽음 앞에 선 사람들입니다. 칼날이 코앞에 있던 사람들입니다. 야곱은 20년까지 도망쳐도 에서가 아직 살아 있어 도저히 방법을 알 수 없었으나, 하나님이 야곱의 환도뼈를 쳐버리신 것입니다. 그가 꼼짝 못하게 만드신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 방식입니다. 이것도 죽음을 맛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말씀에 나오듯 심히 큰 능력이 하나님께 있고,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는데, 이것은 죽어서 살아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롬 8:35). 여기에는 죽음의 단어가 나옵니다. 우리의 신앙은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면서 또한 하나님께 붙어 있는 것입니다.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 기근, 환란, 곤고, 높음, 깊음, 정사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을 수 없습니다. 그 모든 것이 부활의 신앙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질그릇입니다. 연약합니다. 내 육체와 입이 문제입니다. 내 입으로, 내 육체로 모든 문제가 생깁니다. 또한 내 입이 있어야 찬미합니다. 죽음과 생명이 항상 같이 있는 것입니다. 내 입이 육체에 있으면 죽음이요 성령이 머물면 생명입니다. 내 마음도 생각만 하면 죄입니다. 그러나 내 마음이 여호와를 고백하고 심히 즐거워합니다. 정미한 주의 말씀이 내 마음에 있습니다. 역시 죽음과 생명이 함께 있는 것입니다. 육체가 주인이 되면 우리는 죽음이요, 성령이 주인이 되면 우리가 바로 생명인 것입니다. 그래서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는 것은 부활의 신앙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다 부활의 신앙입니다. 왜요, 죽음이 없으면 생명이 없습니다. 죽지 않고 살아나는 도가 없다는 것입니다. 가장 귀한 것이 가장 위험합니다. 공기가 가장 귀한데, 없으면 가장 위험합니다. 경치 없다고 죽지 않습니다. 그러나 공기가 없으면 죽습니다. 어떻게 보면 생명이 가장 귀하지만 가장 위험합니다. 살아 있고 걸어다니는 것이 위험합니다. 언제 무엇이 닥칠지 모릅니다. 그러나 가장 귀한 것이 가장 위험한데 가장 귀한 것은 하나님께 붙들림입니다. 우상의 그러한 세계에서 벗어나 하나님을 붙들면, 그것이 바로 부활인데, 이것이 가장 귀한 것입니다. 생명을 담으면 모든 것이 온전해지는 것입니다. 내가 무엇인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가 무엇을 담고 있느냐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끊임없이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 마음은 밭인데 무엇이 심겼느냐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본문은 우리를 질그릇이라고 하는데, 질그릇은 볼품이 없고 귀한 것이 없으며 처음부터 귀하게 보이기 위해 만든 것이 아닙니다. 또한 견고하지도 않습니다. 잘 깨집니다. 그런데 이 질그릇에는 비밀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맛을 담는 것입니다. 질그릇은 잘 깨지고 그렇게 아름답지도 않지만, 질그릇은 바로 맛을 담고 맛을 흡수하는 그릇입니다. 그래서 질그릇은 바로 맛이 있습니다. 그 맛은 무엇이냐, 이 질그릇에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담는 것입니다. 부자가 천국에 가는 것이 약대가 바늘귀를 통과하는 것보다 어렵다고 했습니다. 재물 자체가 아닌 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시면 세리와 창기, 병자와 광인, 눈먼 자가 모였는데, 이 사람들이 모두 질그릇입니다. 이 질그릇은 어떻게 보면 사람들 보기에는 볼품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 질그릇의 장점은 보배,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담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질그릇이 연약하고 볼품이 없으나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담으면 귀한 것입니다. —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고후 4:8). 몇푼으로 살 수 있는 이 질그릇에 예수의 생명이 담기니 이렇게 멋있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뭐가 있어야 낙담하지 않습니까? 힘들 때, 먼길 다녀올 때 어머니가 된장국만 끓여줘도 자신감을 얻고 마음이 풀립니다. 육신의 어머니가 해주는 된장국도 나를 위로합니다. 답답하고 낙심이 된다면, 질그릇인 우리가 아닌 그 안에 담긴 보배를 봐야 합니다. 질그릇에 맛있는 것, 보배가 담겨 있으니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그것에 침잠되지 않는 것입니다. 나는 잘 깨지는 그릇이나 거기에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들어가 있으니 싹 발라 주셔서 끝내 지키심을 받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바로 우리 안에 담긴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 그 부활의 생명이 있습니다. 예수의 생명이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납니다.
3) 내가 죽는 길이 예수의 생명을 나타내는 길이다
— “...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후 4:11).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쪽으로 살면 됩니다. 그것이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핍박받는 자가 복이 있는 것입니다. 나를 드러내는 쪽으로 살면 죽을 것이요, 예수를 드러내는 쪽으로 살면, 나를 죽음에 내여 놓는 것은 사는 길입니다. 우리가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집니다. 십자가를 집니다. 이것은 죽는 길이 아니라 생명의 길입니다. 내가 내 몸에 예수의 죽음을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나타나게 하려 함입니다. 예수의 생명이 나타나야 하는데, 그 방법은 질그릇, 긍휼의 그릇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셔서 채워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녹도 슬지 않고 변색도 되지 않고 보호하십니다. 사시사철이 좋습니다.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뜻하고 봄에는 향기가 납니다. 제가 여기 오니 이태원에 있을 때보다 너무 좋습니다. 꽃도 나무도 아름답습니다. 고양이도 보이면 불러보고 까치도 있으면 불러봅니다. 그러면 제가 그리 생각해서 그런지 몰라도 가까이 옵니다. 이 질그릇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기꺼이 즐겁게 질그릇이 되어야 합니다. 질그릇만 보배를 담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나 예수님의 주변에 있던 따르는 자들은 귀한 자들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장점이 있다면 그것은 예수의 맛을 담고 있는 자들입니다. 그들이 부활의 신앙을 가진 것입니다. 초대교회는 이 부활의 신앙을 전했습니다. — “생명의 주를 죽였도다 그러나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그를 살리셨으니 우리가 이 일에 증인이라”(행 3:15). 저는 이 말씀을 초대교회에서 가장 중요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우리가 그를 죽였고, 우리가 죽인 그를 하나님이 살리셨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은 죽으셨는데, 내가 죽인 것이라고 하는 것, 이것이 질그릇입니다. 금그릇, 은그릇은 담아 놓으면 자기와 담긴 것을 비교합니다. 내가 이렇게 좋은 그릇인데 이것밖에 담기지 않았다고 비교합니다. 그러나 질그릇은 무엇이 담기든 감사합니다. 바로 우리가 그를 죽인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질그릇입니다. 우리가 그 예수를 죽였는데, 그를 하나님이 살리셨고 그 일에 우리가 증인이라는 것입니다. 내가 예수를 죽였고 하나님이 그를 살리셨는데, 내가 그 일에 증인이라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내 안에 들어오신 것, 내 죄로 내가 죽인 예수가 내 안에 들어오셨다는 것입니다. — “...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행 2:36). “주 예수를 다시 살리신 이가 예수와 함께 우리도 다시 살리사 너희와 함께 그 앞에 서게 하실 줄을 아노라”(고후 4:14). 사도 바울은 이 고백을 절실히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부활의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4)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의 권세를 믿으라
죽음의 권세를 믿어야 하는데 그것은 예수와 함께 죽는 것이요, 그것은 곧 예수와 함께 다시 사는 것입니다. 죽어야 부활합니다. 죽음은 이미 부활을 담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권세가 있는 죽음입니다. 그가 죽을 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로 갈라졌습니다. 모세의 성막 때부터 한 번도 갈라진 적이 없는 그 휘장이 갈라졌고 우리가 그래서 지금 지성소 안에 들어와 있는 것입니다. 이 교회가 지성소입니다. 예수님이 죽으셨을 때 무덤이 쪼개지고 죽은 자가 살아났습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죽음의 권세입니다. 그것을 보고 로마 백부장, 당시 최고 모질고 상대하기 어려운 자가 예수님을 많이 쫓아옵니다. 그 사람들이 또한 질그릇입니다. 하나님의 생명의 역사는 이렇습니다. 전쟁터에서 가장 잔인하게 사람을 죽이는 백부장이 예수님을 고백합니다. — “예수를 향하여 섰던 백부장이 그렇게 숨지심을 보고 이르되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하더라”(막 15:39).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권능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이런 권능의 죽음입니다. 바울과 실라가 갇혔을 때 지축이 흔들린 것처럼 예수님의 죽음에 땅이 흔들렸는데, 죽음 가운데 계시나 이미 부활을 바라보는 것이므로 권세가 있는 것입니다. 아리마대 요셉, 이 사람은 예수의 제자인 것을 숨기며 살았는데 예수의 죽음을 보고 난 후에는 예수의 시체를 빌라도에게 달라고 해서 한 번도 사용하지 않은 동굴에 예수님의 시체를 안치합니다.
4. 결론
인생의 가치는 내가 무엇인가가 아니라 무엇을 담고 있느냐입니다. 스스로를 치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마음에 무엇을 지금 담고 있습니까? 그것이 귀한 것입니다. 옹기, 질그릇에는 맛있는 것과 정성이 담겨 있습니다. 우리는 '내가 무엇을 이룰까'가 아닌 '내가 무엇을 담을까'를 생각해야 합니다. 담는 것은 거듭나는 것입니다. 우리는 거듭난 것을 담습니다. 타고난 것보다 성취한 것이 더 귀하고 성취한 것보다 거듭난 것이 더 귀합니다. 세상은 선천적인 것과 타고난 것보다 열심히 일하고 공부한 것이 귀하다는 것까지말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보다 더 귀한 것, 거듭나는 것을 담고 있어야 합니다. 우리 안에 거듭난 것이 얼마나 담겨 있습니까? 잡히지도 보이지도 않으나 향기와 지시와 권면과 기쁨과 희락으로 계속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살면서 기도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봅니다. 이제 본문 13, 14, 15절에 나란히 나오는 말씀이 있습니다. 우선 부활의 믿음을 가지고 있으며, 부활의 소망, 부활의 사랑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어렵습니까?
부활의 맛을 보는 것으로 여기고 감사하십시오. 죽음이 없는 곳에 부활의 소망이 없습니다.
고난과 우겨쌈과 사방에 나를 매는 것이 있습니까?
그것이 있으므로 부활의 소망이 있는 것으로 삼고 감사하십시오. 우리는 질그릇이로되 예수의 생명, 보배를 가진 긍휼의 그릇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쌍해 여기셔서 채워주실 것을 믿습니다.
[20190217][십자가지기교회 주일낮예배: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46)] 죽음으로써 살아가는 믿음 (고후 4:7-15) 문병호 목사
*음성파일: 게시물 하단 "관련링크"에서 청취 혹은 내려받기 가능합니다.
<녹취록>
1. 인간 창조와 부활의 연속성: 영혼과 육체로 구성된 인간
부활의 말씀은 부활절에만 혹은 부활의 찬송을 부활절에만 부르는 것이 아니라 연중 내내 성탄과 부활의 찬송을 불러야 합니다. 부활의 소망이 없으면 십자가의 죽음이 헛것이라는 것이 바울의 큰 선포입니다. 그래서 부활이 없으면 전하는 것도 헛것이요, 예수님의 죽음도, 모든 것이 헛됩니다. 그러니 부활의 신앙을 그렇게 이야기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변개치 않으시므로 모든 일을 창세 전에 작정하신 대로 이루시는데, 창세기 2장 7절에서 생기를 불으넣으신 그것이 영혼입니다. 흙으로 준비하시고 생기를 불어넣으니 그 흙이 육체가 되고 생기는 영혼이 되어 인간이 조성된 것입니다. 이 하나님이 인간을 지으신 경륜, 섭리, 목적은 바로 영혼과 육체 가운데 우리 인류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영혼으로만 사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철학자들, 세상의 이방종교는 육체를 벗어나 영혼으로 떠도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기독교적 진리는 하나님이 지으신대로 영혼과 육체로 영원히 사는 것을 소망하고 궁극적인 하나님의 뜻으로 받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부활체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영원히 신령한 몸"(고전 15:44)으로, "신령한 사람"(고전 15:46)으로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저는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할 때 언제부터인가 부활의 몸으로 영원히 사람으로 사는 것, 지금 저와 같은 본질이되 성질이 변하여 사는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육체에 속한 것이 신령한 것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그러니 지금 우리는 각자의 몸과 영혼으로 본질을 그대로 취하되 성질은 영화로운 것으로 변화하여 영원히 살 것을 믿는 것입니다. 이 지상의 교회는 그러므로 천상의 교회를 앞당겨 맛보며 교재하고 이해하는 것이며 성도들이 피차간 귀한 것입니다.
2. 부활, 예수의 생명, 부활 신앙
본문 7절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다고 합니다. 질그릇과 보배는 어떻게 보면 어울리지 않아 보입니다. 보배를 금그릇에 넣었다고 하면 뭔가 어울릴 것 같은데 질그릇이라고 하면 옹기와 같이 가장 천한 것입니다. 요새 얼마나 비싼지 모르지만 금그릇은 보이지 않으나 질그릇은 어디든지 보입니다. 이 질그릇에 보배를 가졌다고 합니다.
이 보배는 무엇이냐 하니, 10절과 11절을 보면 우선 "예수의 생명"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질그릇이고, 정말 하찮은데, 이것에 예수의 생명을 담은 것입니다. 그러면 이 예수의 생명은 무엇이냐 하니 '부활하신 생명'입니다. 일찍이 죽음을 당하시고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신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생명입니다. 이 예수의 생명이 우리의 질그릇에 담겨 있는 것입니다. 이 질그릇에 예수의 생명을 담으면 우리도 그와 같이 부활한다는 것, 부활의 소망이 14절에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가 부활의 첫 번째 열매요, 그 생명을 우리에게 담아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것을 믿어 그것을 가지고 사는 사람도 예수와 같이 살리시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초대교회의 가장 중요한 전파 내용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였다는 것과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 그리고 우리가 그 일에 증인이라는 것이 초대교회 세 가지 핵심 메시지입니다. 자나 깨나 이것만을 전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가 죽은 것은 우리가 죽인 것입니다. 내가 죽인 그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 것입니다. 우리가 그 예수를 보고 그 일에 증인이 되는 것입니다.
이 일에 증인이 됨은 그저 십자가를 보아서 그리한 것이 아니라 오순절 성령을 받아 예수 그리스도의 영, 생명이 내 안에 들어오니 증인이 되는 것입니다. 본문 말씀에서 사도 바울은 그것을 이야기합니다. 고린도 교인이 서로 내가 잘났다고 다투지만 사도 바울은 부활의 신앙으로 죽음은 나에게 있고 생명은 여러분께 있다고 말합니다. 본문 12절입니다 — “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역사하느니라.” 이 말은 우리가 너희를 위해 죽는다는 말입니다. 여러분을 살리려고 우리는 죽음의 길로 간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죽음의 길로 가는 것이 영 죽는 것이냐 하니 그것이 아닙니다.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한다고 예수님이 나사로를 살릴 때 하신 말씀이 이에 적용되는 것입니다.
3. 보배 담은 질그릇: 죽음을 맛보며 부활의 생명을 누림
1) 질그릇의 가치는 그 담긴 것에 있다
우리는 연약한 것을 담는 사실상 보배로운 그릇입니다. 세상에도 사실상 중요한 것은 내 자신이라기보다 그것에 담긴 것입니다. 봄(春)이나 봄이라는 시간이 중요하기보다는 그 봄에 하나님이 불어주시는 훈풍과 생명이 귀한 것입니다. 우리가 그냥 귀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보듬고 키워 주시는 부모님이 있으니 귀한 것입니다. 우리가 귀한 것이 아니라 당기는 것이 있으니 귀한 것입니다. 실로암에도 가보면 물이 별것 없습니다. 깊이 흐르는 그냥 흙탕물 같은 물입니다. 그 물이 동할 때 낫게 하시는데, 그 실로암, 그리고 그 옆의 소경 둘 다 귀한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다만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 귀한 것입니다. 소경의 연약함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하나님의 일을 증거하니 귀한 것입니다. 눈을 떠도 보이지 않으므로 그 눈이 하나님께 영광의 도구가 된 것입니다. 나사로를 살리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이 다 아시면서 사흘 동안 놔두신 것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심입니다. 나사로가 복된 것은 다시 살아나 생명을 얻은 그 자체보다 죽음에서 생명으로 살아나는 증인이 된 것입니다.
2) 예수님의 부활 생명이 나타나는 연약한 질그릇
그래서 예수님도 표적은 하나밖에 없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산이 옮기고 바위가 깨지고 물이 나오는 것이 표적이 아닌, 최고의 표적은 단 하나로 요나의 표적이라고 이야기하신 것입니다. 바로 물고기 뱃속에서 죽음을 맛보는 것입니다. 니느웨 성으로 가지 않겠다는 선지자를 모든 것을 녹이는 물고기의 뱃속에 넣어 죽음을 맛보게 하신 것입니다.
욥과 다니엘 등 성경의 인물이 지혜로운 것은 고난뿐 아니라 죽음도 맛보았기 때문입니다. 온몸이 상하고 자녀도 죽고 아내로부터도 어려움을 당하고 친구로부터 저주를 받은 자가 욥입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 정금같이 나오는 것입니다. 다니엘도 불에 던져지나 천사와 춤을 추고 사자 입에서 건져 주십니다. 야곱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두 죽음 앞에 선 사람들입니다. 칼날이 코앞에 있던 사람들입니다. 야곱은 20년까지 도망쳐도 에서가 아직 살아 있어 도저히 방법을 알 수 없었으나, 하나님이 야곱의 환도뼈를 쳐버리신 것입니다. 그가 꼼짝 못하게 만드신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 방식입니다. 이것도 죽음을 맛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말씀에 나오듯 심히 큰 능력이 하나님께 있고,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는데, 이것은 죽어서 살아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롬 8:35). 여기에는 죽음의 단어가 나옵니다. 우리의 신앙은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면서 또한 하나님께 붙어 있는 것입니다.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 기근, 환란, 곤고, 높음, 깊음, 정사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을 수 없습니다. 그 모든 것이 부활의 신앙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질그릇입니다. 연약합니다. 내 육체와 입이 문제입니다. 내 입으로, 내 육체로 모든 문제가 생깁니다. 또한 내 입이 있어야 찬미합니다. 죽음과 생명이 항상 같이 있는 것입니다. 내 입이 육체에 있으면 죽음이요 성령이 머물면 생명입니다. 내 마음도 생각만 하면 죄입니다. 그러나 내 마음이 여호와를 고백하고 심히 즐거워합니다. 정미한 주의 말씀이 내 마음에 있습니다. 역시 죽음과 생명이 함께 있는 것입니다. 육체가 주인이 되면 우리는 죽음이요, 성령이 주인이 되면 우리가 바로 생명인 것입니다. 그래서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는 것은 부활의 신앙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다 부활의 신앙입니다. 왜요, 죽음이 없으면 생명이 없습니다. 죽지 않고 살아나는 도가 없다는 것입니다. 가장 귀한 것이 가장 위험합니다. 공기가 가장 귀한데, 없으면 가장 위험합니다. 경치 없다고 죽지 않습니다. 그러나 공기가 없으면 죽습니다. 어떻게 보면 생명이 가장 귀하지만 가장 위험합니다. 살아 있고 걸어다니는 것이 위험합니다. 언제 무엇이 닥칠지 모릅니다. 그러나 가장 귀한 것이 가장 위험한데 가장 귀한 것은 하나님께 붙들림입니다. 우상의 그러한 세계에서 벗어나 하나님을 붙들면, 그것이 바로 부활인데, 이것이 가장 귀한 것입니다. 생명을 담으면 모든 것이 온전해지는 것입니다. 내가 무엇인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가 무엇을 담고 있느냐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끊임없이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 마음은 밭인데 무엇이 심겼느냐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본문은 우리를 질그릇이라고 하는데, 질그릇은 볼품이 없고 귀한 것이 없으며 처음부터 귀하게 보이기 위해 만든 것이 아닙니다. 또한 견고하지도 않습니다. 잘 깨집니다. 그런데 이 질그릇에는 비밀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맛을 담는 것입니다. 질그릇은 잘 깨지고 그렇게 아름답지도 않지만, 질그릇은 바로 맛을 담고 맛을 흡수하는 그릇입니다. 그래서 질그릇은 바로 맛이 있습니다. 그 맛은 무엇이냐, 이 질그릇에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담는 것입니다. 부자가 천국에 가는 것이 약대가 바늘귀를 통과하는 것보다 어렵다고 했습니다. 재물 자체가 아닌 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시면 세리와 창기, 병자와 광인, 눈먼 자가 모였는데, 이 사람들이 모두 질그릇입니다. 이 질그릇은 어떻게 보면 사람들 보기에는 볼품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 질그릇의 장점은 보배,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담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질그릇이 연약하고 볼품이 없으나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담으면 귀한 것입니다. —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고후 4:8). 몇푼으로 살 수 있는 이 질그릇에 예수의 생명이 담기니 이렇게 멋있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뭐가 있어야 낙담하지 않습니까? 힘들 때, 먼길 다녀올 때 어머니가 된장국만 끓여줘도 자신감을 얻고 마음이 풀립니다. 육신의 어머니가 해주는 된장국도 나를 위로합니다. 답답하고 낙심이 된다면, 질그릇인 우리가 아닌 그 안에 담긴 보배를 봐야 합니다. 질그릇에 맛있는 것, 보배가 담겨 있으니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그것에 침잠되지 않는 것입니다. 나는 잘 깨지는 그릇이나 거기에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들어가 있으니 싹 발라 주셔서 끝내 지키심을 받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바로 우리 안에 담긴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 그 부활의 생명이 있습니다. 예수의 생명이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납니다.
3) 내가 죽는 길이 예수의 생명을 나타내는 길이다
— “...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후 4:11).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쪽으로 살면 됩니다. 그것이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핍박받는 자가 복이 있는 것입니다. 나를 드러내는 쪽으로 살면 죽을 것이요, 예수를 드러내는 쪽으로 살면, 나를 죽음에 내여 놓는 것은 사는 길입니다. 우리가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집니다. 십자가를 집니다. 이것은 죽는 길이 아니라 생명의 길입니다. 내가 내 몸에 예수의 죽음을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나타나게 하려 함입니다. 예수의 생명이 나타나야 하는데, 그 방법은 질그릇, 긍휼의 그릇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셔서 채워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녹도 슬지 않고 변색도 되지 않고 보호하십니다. 사시사철이 좋습니다.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뜻하고 봄에는 향기가 납니다. 제가 여기 오니 이태원에 있을 때보다 너무 좋습니다. 꽃도 나무도 아름답습니다. 고양이도 보이면 불러보고 까치도 있으면 불러봅니다. 그러면 제가 그리 생각해서 그런지 몰라도 가까이 옵니다. 이 질그릇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기꺼이 즐겁게 질그릇이 되어야 합니다. 질그릇만 보배를 담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나 예수님의 주변에 있던 따르는 자들은 귀한 자들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장점이 있다면 그것은 예수의 맛을 담고 있는 자들입니다. 그들이 부활의 신앙을 가진 것입니다. 초대교회는 이 부활의 신앙을 전했습니다. — “생명의 주를 죽였도다 그러나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그를 살리셨으니 우리가 이 일에 증인이라”(행 3:15). 저는 이 말씀을 초대교회에서 가장 중요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우리가 그를 죽였고, 우리가 죽인 그를 하나님이 살리셨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은 죽으셨는데, 내가 죽인 것이라고 하는 것, 이것이 질그릇입니다. 금그릇, 은그릇은 담아 놓으면 자기와 담긴 것을 비교합니다. 내가 이렇게 좋은 그릇인데 이것밖에 담기지 않았다고 비교합니다. 그러나 질그릇은 무엇이 담기든 감사합니다. 바로 우리가 그를 죽인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질그릇입니다. 우리가 그 예수를 죽였는데, 그를 하나님이 살리셨고 그 일에 우리가 증인이라는 것입니다. 내가 예수를 죽였고 하나님이 그를 살리셨는데, 내가 그 일에 증인이라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내 안에 들어오신 것, 내 죄로 내가 죽인 예수가 내 안에 들어오셨다는 것입니다. — “...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행 2:36). “주 예수를 다시 살리신 이가 예수와 함께 우리도 다시 살리사 너희와 함께 그 앞에 서게 하실 줄을 아노라”(고후 4:14). 사도 바울은 이 고백을 절실히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부활의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4)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의 권세를 믿으라
죽음의 권세를 믿어야 하는데 그것은 예수와 함께 죽는 것이요, 그것은 곧 예수와 함께 다시 사는 것입니다. 죽어야 부활합니다. 죽음은 이미 부활을 담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권세가 있는 죽음입니다. 그가 죽을 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로 갈라졌습니다. 모세의 성막 때부터 한 번도 갈라진 적이 없는 그 휘장이 갈라졌고 우리가 그래서 지금 지성소 안에 들어와 있는 것입니다. 이 교회가 지성소입니다. 예수님이 죽으셨을 때 무덤이 쪼개지고 죽은 자가 살아났습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죽음의 권세입니다. 그것을 보고 로마 백부장, 당시 최고 모질고 상대하기 어려운 자가 예수님을 많이 쫓아옵니다. 그 사람들이 또한 질그릇입니다. 하나님의 생명의 역사는 이렇습니다. 전쟁터에서 가장 잔인하게 사람을 죽이는 백부장이 예수님을 고백합니다. — “예수를 향하여 섰던 백부장이 그렇게 숨지심을 보고 이르되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하더라”(막 15:39).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권능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이런 권능의 죽음입니다. 바울과 실라가 갇혔을 때 지축이 흔들린 것처럼 예수님의 죽음에 땅이 흔들렸는데, 죽음 가운데 계시나 이미 부활을 바라보는 것이므로 권세가 있는 것입니다. 아리마대 요셉, 이 사람은 예수의 제자인 것을 숨기며 살았는데 예수의 죽음을 보고 난 후에는 예수의 시체를 빌라도에게 달라고 해서 한 번도 사용하지 않은 동굴에 예수님의 시체를 안치합니다.
4. 결론
인생의 가치는 내가 무엇인가가 아니라 무엇을 담고 있느냐입니다. 스스로를 치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마음에 무엇을 지금 담고 있습니까? 그것이 귀한 것입니다. 옹기, 질그릇에는 맛있는 것과 정성이 담겨 있습니다. 우리는 '내가 무엇을 이룰까'가 아닌 '내가 무엇을 담을까'를 생각해야 합니다. 담는 것은 거듭나는 것입니다. 우리는 거듭난 것을 담습니다. 타고난 것보다 성취한 것이 더 귀하고 성취한 것보다 거듭난 것이 더 귀합니다. 세상은 선천적인 것과 타고난 것보다 열심히 일하고 공부한 것이 귀하다는 것까지말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보다 더 귀한 것, 거듭나는 것을 담고 있어야 합니다. 우리 안에 거듭난 것이 얼마나 담겨 있습니까? 잡히지도 보이지도 않으나 향기와 지시와 권면과 기쁨과 희락으로 계속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살면서 기도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봅니다. 이제 본문 13, 14, 15절에 나란히 나오는 말씀이 있습니다. 우선 부활의 믿음을 가지고 있으며, 부활의 소망, 부활의 사랑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어렵습니까?
부활의 맛을 보는 것으로 여기고 감사하십시오. 죽음이 없는 곳에 부활의 소망이 없습니다.
고난과 우겨쌈과 사방에 나를 매는 것이 있습니까?
그것이 있으므로 부활의 소망이 있는 것으로 삼고 감사하십시오. 우리는 질그릇이로되 예수의 생명, 보배를 가진 긍휼의 그릇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쌍해 여기셔서 채워주실 것을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