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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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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2


           

[20190224][십자가지기교회 주일낮예배: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47)] 눈을 뜨는 믿음 (막 10:46-52) 문병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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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224][십자가지기교회 주일낮예배: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47)] 눈을 뜨는 믿음 (막 10:46-52) 문병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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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 10:46)○그들이 여리고에 이르렀더니 예수께서 제자들과 허다한 무리와 함께 여리고에서 나가실 때에 디매오의 아들인 맹인 거지 바디매오가 길 가에 앉았다가  
(막 10:47)나사렛 예수시란 말을 듣고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막 10:48)많은 사람이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그가 더욱 크게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는지라
(막 10:49)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그를 부르라 하시니 그들이 그 맹인을 부르며 이르되 안심하고 일어나라 그가 너를 부르신다 하매
(막 10:50)맹인이 겉옷을 내버리고 뛰어 일어나 예수께 나아오거늘
(막 10:51)예수께서 말씀하여 이르시되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맹인이 이르되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막 10:52)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니 그가 곧 보게 되어 예수를 길에서 따르니



<녹취록>



1. 한계 상황에서 믿음으로 구원 받은 사람들


본문은 맹인이자 거지인 바디매오를 예수님께서 눈 뜨게 하시는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52절은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라고 합니다. 복음서에는 이런 말씀이 많이 나옵니다. 이세벨의 고향인 사렙다 지방, 즉 하나님을 믿을 수 없는 지역에서 수로보니게 여인이 개도 부스러기를 먹는다고 하니 그 믿음으로 예수님이 그녀를 낫게 하셨습니다. 또 로마 백부장도 주님을 찾아옵니다. 백부장은 전쟁의 가장 일선에서 잔인하게 사람을 죽이는 자입니다. 도무지 기약이 없는 삶을 사는 사람인데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찾아옵니다. 또, 구약에 기록된 부정한 병인 혈루병을 열두 해나 앓아 재산을 탕진하고 의사조차도 조롱한 여인이 도무지 예수님께 나아갈 수 없는 가운데 구원을 받았습니다. 히브리서 11장, 믿음의 장을 보면 믿음의 인물이 이어지다가 “믿음의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라고 하는데 이것은 믿음의 특성입니다. 즉 우리의 형편은 갈 바를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영안은 보이는데 육안은 보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본문에도 보면 육안이 닫혀 있는 맹인이 나옵니다. 이 사람은 먼저 믿음으로 영안이 열리자 육안도 열립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질서입니다. 먼저 죄를 사함 받고 믿음을 고백하고 병이 낫는 것이 전형적인데, 이것이 본문에 기록되었습니다. 



2. 맹인 거지 바디매오


1) 바디매오의 상황


(1) 바디매오 자신의 조건: 맹인, 거지, 변방 사람
본문의 맹인 바디매오는 디매오의 아들 바디매오라는 의미입니다. ‘바’는 누구의 아들이라는 의미입니다. 이 바디매오의 조건이 어떠했습니까? 먼저 바디매오의 내적인 조건과 외적인 조건을 살펴보면 좋겠습니다. 우선 그 자체의 조건은 맹인이자 거지입니다. 걸인입니다. 구걸하는 자입니다. 우리가 맹인이요, 거지다 하면 실로암에서 눈이 뜬 자가 금방 떠오릅니다. 그도 남에게 구걸하며 살았습니다. 대체로 눈먼 자는 이렇게 살아갑니다. 둘이 형편이 비슷합니다. 예수님께서 침을 뱉어 흙에 이겨 바르고 실로암에 가서 씻게 합니다. 그래도 실로암은 예루살렘 성 안에 있는 곳이었으나 본문의 바디매오는 여리고의 변방, 즉 사람이 한적한 곳에 살던 사람입니다. 여리고는 사해 근처 낮은 지역에 있는데, 그곳에서 쭉 고개를 들면 예루살렘이 보입니다. 그러므로 예루살렘에 가는 곳 변방이라고 하면 위험한 곳, 밤에 도적이 들만한 곳입니다. 이처럼 바디매오는 맹인이자 걸인이자 험한 광야에 사는 자입니다. 그러니 그의 조건은 아주 열악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2) 내적 조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초보적 신앙
본문 47절, 48절, 51절에서 바디매오는 예수를 3가지로, 즉 나사렛 예수, 다윗의 자손, 선생님으로 부릅니다. 나사렛 예수는 나사렛 사람 예수라는 의미입니다. 평범한 호칭입니다. 그리고 다윗의 자손은 다윗의 혈통으로 오시는 메시아를 의미합니다. 선생은 랍오니, 랍비라는 의미로 쓰였습니다. 바디매오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거창한 고백이 아니라 아주 초보적인, 기본적인 신앙고백을 한 것입니다. 귀동냥으로 들은 것입니다. 보이지 않으니 읽을 수 없고 단지 들은 것으로 부른 것입니다. 나사렛 예수가 지나가는데 사람들이 그에 대해 말한 것을 듣고 그대로 부른 것입니다. 이 세 호칭은 가장 실제적이면서도 그 당시의 사람들이 쓸만한 말입니다. 초보적인 신앙 가운데 있었던 것입니다. 아주 대단한 믿음이 있던 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 가운데 바디매오가 지푸라기라도 잡으려는 심정으로 소망을 가진 자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3) 외적 조건: 예수님을 뵐 마지막 기회
한편 외부적 조건은 이제 예수님은 일을 다 보시고 떠나가는 중입니다. 그리고 그 길은 예수님이 죽으시기 전 마지막으로 예루살렘에 올라가는 길입니다. 급박한 조건입니다. 다시는 돌아오시지 않을 그 길을 찰나에 지나가는 중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부를 때 많은 사람이 그에게 “잠잠하라”라고 한 것입니다. 당시 사회 분위기를 보면 ‘어찌 천한 맹인이 나서느냐’고 말한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꾸짖어 잠잠하라고 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지나갈 때, 바디매오가 괜히 나서서 욕 얻어먹느니 그냥 숨어 있을 수 있을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디매오의 부름과 예수님의 응답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처한 상황보다 그가 어떻게 하나님께 나아가느냐를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1장 1절의 말씀과 같습니다. —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히 11:1).


2) 내세울 조건이 없지만 필사적인 바디매오


이 바디매오의 모습에 대하여는 “길 가에 앉았다가”라고 합니다. 외진 곳에 떨어진 자입니다. 그리고 바디매오는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합니다. 많은 경우 자신이 가진 조건을 내세우고 할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바디매오는 그럴 것조차 없는 자였습니다.


(1) 소리를 지름
본문 47절을 보면, 그는 긍휼을 구하기 위해서 소리를 질렀다고 합니다. 맹인이 할 수 있는 것은 목이 터져라 소리 지르는 것뿐이었습니다. 48절에서는 그가 더욱 크게 소리를 질렀다고 합니다.


(2) 겉옷을 내버림
그리고 50절은 바디매오가 겉옷을 내버리고 예수께로 뛰어 일어났다고 합니다. 겉옷은 당시에 가장 중요한 재산입니다. 오늘날 집과 같은 것입니다. 이동이 잦은 당시의 사람들은 겉옷이 있어야 낮에 뜨거운 햇빛을 가리고, 밤의 추위로부터 체온을 유지합니다. 그런데 맹인이 겉옷을 내버려두었다고 합니다. 형편이 어려울수록 움켜쥐려고 하는 것이 인지상정입니다. 그러나 사실상 겉옷을 버려두면 누가 집어갈 수도 있는 것입니다. 눈먼 자로서 평소에 모든 것을 얼마나 움켜쥐려고 했을까요? 거지인데 그나마 겉옷이 하나 있으니 그것을 얼마나 잡고 움켜쥐었을까요? 아마 많이 만져서 올 하나하나까지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자기가 가진 생명과 같은 것을 벗어던진 것입니다. 사렙다 과부가 마지막 남은 가루와 기름을 선지자에게 공궤하듯 바디매오가 겉옷을 버린 것은 자기 버림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마지막 남은 그것을 원하십니다. 이처럼 바디매오는 겉옷을 버린 것입니다.


(3) 뛰어 일어나 나아감
뛰어 일어나서 갔다는 표현은 성경에 많이 나오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한 자는 심지어 맹인인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이제 그가 모든 것을 버리고 절박하게 뛰어 나간 것으로 알 수 있습니다. 우리도 기도하다 보면 그저 기도하다 죽어도 좋다고 여겨지는 그런 시기가 있습니다. 맹인도 그와 같은 상황인 것입니다.



3. 예수 그리스도의 응답


1) 예수 그리스도의 질문: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이 가운데 예수께서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고 묻습니다. 이에 바디매오는 ‘보기를 원한다’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왜 물으셨을까요?
당연히 맹인이 부르짖으면, 그 원하는 것이 눈뜨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왜 물으십니까?
여기에 본문 말씀의 가장 중요한 교훈이 있습니다.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고 물으시는 말씀은 바디매오의 심령을 치시는 말씀입니다. ‘눈을 떠서 진짜 무엇을 할 것인가’를 묻는 것입니다. 우리는 뭘 달라고 하고 낫게 해 달라고 하지만, ‘네가 진정 원하는 게 무엇이냐’고 물으실 때 대답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눈을 뜨는 것이 꼭 좋은 것만은 아닙니다. —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맹인이 되게 하려 함이라”(요 9:39). 실로암에서 예수님이 맹인을 낫게 하셨을 때 하신 말씀입니다. 그러자 바리새인들도 묻습니다. “우리도 맹인인가?”(요 9:40) 그러자 예수님께서 대답하시기를, “너희가 맹인이 되었더라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대로 있느니라”고 하십니다(요 9:41). 이 말씀을 우리가 붙든다면, 눈 떠달라고 쉽게 말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네가 무엇을 원하느냐’고 물으십니다. 배고프면 쉽게 밥 달라고 형편대로 구할 것을 빕니다. 하지만 정말 두렵고 떨림이 있다면, 꼭 그것이 좋은 것인지 우리가 어떻게 압니까? 당장은 좋아 보여도 그러나 그게 몸에 좋은지 어떻게 압니까? 맛있다고 다 몸에 좋은 것은 아닙니다.


2) 믿음을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


예수님의 질문에 맹인은 대답하기를, “보기를 원하나이다”라고 합니다(막 10:51). 그것에 대한 결과는 마지막 절에 있습니다. “그가 곧 보게 되어 예수를 길에서 따르니라”(막 10:52). 이것에 예수님이 물으신 그 비밀이 있습니다. 즉, 주님께서 바디매오에게 ‘내가 눈을 뜨면 주님을 따르겠다’는 믿음을 주셔서 눈을 뜨고 주님을 따르게 하신 것입니다.
저도 유학할 때 이런 경험이 있었습니다. 박사 논문 제출해 놓고 기도를 하는데 박사 논문을 통과시켜 달라는 기도가 안 되었습니다. 새벽에 로스채플에 가면 저 혼자 가서 기도하는데 다른 건 기도가 다 잘 되는데 박사 논문 통과시켜달라는 기도는 안 되었습니다. 정말로 그 기도가 안 되었습니다. ‘네가 진정 원하느냐’고 물으시는 것처럼 느껴져 박사 학위에 대한 기도가 안 되었습니다. 저는 박사 학위를 받지 않은 것이 반드시 나쁜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을 박사 학위를 받은 지금에도 여전히 합니다. 이 학위 때문에 교만해지거나 성도를 잘 못 섬기게 되면 없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도 들어 정말 두려운 마음이 있었습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은 죽음의 길을 떠나시는 첫 걸음을 떼고 계십니다. 그 첫 걸음에 바디매오를 만난 것입니다. 주님의 십자가 사건에 있어서 헌신을 보여 준 나귀 새끼, 구레네 시몬, 아리마대 요셉, 막달라 마리아도 있는데, 그 과정의 첫 번째 인물이 맹인 바디매오인 것입니다. 그가 주님의 길에 동행한 것입니다. 저는 이 사실을 알고 깜짝 놀랐습니다. 맹인이 눈을 뜬 후,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마지막 가는 길에 동행한 것입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라고 하셨을 때, 우리는 바디매오에게 정말 어떤 믿음이 있었는지 해석하기가 어렵습니다. 믿음을 주신 것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질문 하나로 말입니다. —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이 주님의 질문 하나가 우리에게 믿음을 주는 것입니다. 그 때 맹인 바디매오는 “보기를 원하나이다”라고 합니다.
왜 보려고 했을까요?
52절을 보면, 바디매오가 길에서 주를 따랐다고 합니다. 즉, 주님을 쫓아가기 위한 것입니다. 그 질문으로 주님이 믿음을 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이 있어서 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물으실 때, “주여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 “내가 주를 따르기 원하나이다”라고 할 때 믿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라는 역사가 그 때 있는 것입니다. 수로보니게 여인, 열두 해 혈루증을 앓은 여인의 믿음이 크다고 절대 볼 수 없습니다. 그 순간 예수님께서 믿음을 주신 것이요, 그런 후 데려가신 것입니다.



4. 오직 빛을 향하여


1) 빛의 아들로서 빛만을 바라보라


맹인은 빛을 보지 못합니다. 빛이 없으면 모든 것이 가로막히고 없는 것입니다. 모든 출발점은 빛입니다.  창세기 1장 3절, 4절에서도 창조 후 첫 번째로 보기 좋았다고 하신 것이 빛입니다. “큰 빛들을 지으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해로 낮을 주관하게 하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시 136:7-8)라는 말씀을 오늘 교독문에서 읽기도 했습니다. 세례 요한은 이 땅에 와서 빛을 증언했습니다. 또한 이렇게 말했습니다. — “너희에게 아직 빛이 있을 동안에 빛을 믿으라 그리하면 빛의 아들이 되리라”(요 12:36). 또한 사도 바울은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롬 13:12)라고 말씀했습니다. 빛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빛이 있어야 우리가 눈을 뜨고 길을 알고 생명의 역사가 있습니다. 빛의 갑옷을 로마서 13장 14절에서는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라고 말씀합니다. 영적 전쟁에서 우리는 흑암과 싸웁니다. 십자가를 구름이 감쌌으나 죽음으로 그것을 걷으신 것처럼, 우리도 그런 싸움을 합니다. 어둠이 앞뒤로 들어옵니다. 언제 마귀 사탄이 유혹할지 모릅니다. 가족을, 친구를, 직장 동료를 통해서도 그러할 수 있습니다. 그 때마다 우리는 빛으로 무장하고 빛의 갑옷을 입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빛의 아들, 낮의 아들입니다. 그러니 주님이 빛의 아들이 되라고 하십니다. — “너희는 다 빛의 아들이요 낮의 아들이라 우리가 밤이나 어둠에 속하지 아니하나니”(살전 5:5). 되도록이면 밝을 때 일하시고 밤에는 주무십시오. 이 빛은 괜히 봐서 죄만 쌓는 육안의 빛이 아닙니다. 영안의 빛입니다. 생물에도 주광성, 양지식물, 음지식물이 있습니다. 우리 성도들은 영광성(靈光性)이 있어야 합니다. 영의 빛을 쫓아가는 성질이 있어야 합니다. 핵심은 빛입니다. 영광, 영적인 광선을 쫓아가는 것입니다. 어둠의 아들이 아닌 밝은 곳으로 가는 빛의 아들입니다. 되도록이면 밝은 데로 가십시오.


2) 영안으로 절대 가치만을 바라보라


우리가 육적인 눈을 뜨는 것은 절대적 가치는 아닙니다. 주님은 절대적 가치, 영적 눈을 뜨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빼버리라 한 눈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막 9:47). 빛이 눈에 반응하므로 우리가 봅니다. 눈이 어두운 것을 보면 그것이 우리에게 들어갑니다. 눈은 창입니다. 보는 것이 무서운 것입니다. 내 인격과 영혼을 감싸고 존재를 물들이는 것이 보는 것입니다. 삼손은 육안이 있을 때는 잘 싸우기도 하나, 그 육안이 더러운 정욕에 빠져 들릴라에게 미혹됩니다. 그러나 육안이 뽑히니 주님의 일에 사용됐습니다. 우리는 육안을 닫고 영안을 열어 사용해야 합니다.
뒷길로 교회에 오다 보면 보도블록을 잘 깔려 있는 것을 봅니다. 누가 청소를 하는지 항상 깨끗합니다. 제가 그 보도블록을 보면서 지금 내게 가장 도움을 주는 것이 이 보도블록인데 이것에는 그리 무심하면서 나에게 도움을 주지도 않는 집에 있는 책을 걱정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소유욕입니다. 창고에 집어넣어 일 년 동안 거의 보지 않는 책을 닦고 걱정하면서 정작 매일 딛고 다니는 보도블록은 신경 쓰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소유욕 때문일 것입니다. 상대적인 것에 너무 매몰되어 사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절대 가치를 추구해야 합니다.
맹인 바디매오는 가진 것이 없는데도 생명과 같은 겉옷을 내버렸습니다. 중요한 것은 영안을 떠서 하나님을 보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쩌면 겉옷과 같은 육적인 것에 너무 신경을 쓰는지도 모릅니다. —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요 1:9),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요 1:4). 영안으로 보는 영광의 빛이 나를 지배해야 합니다.



5. 결론: 영안(靈眼)이란 무엇인가?


본문 말씀에서 영안은 무엇인가에 대해 다섯 가지로 정리해 봅니다.
첫째, 길가에서 주님을 맞으라는 것입니다. 구중궁궐이 아닌 바로 지금 길가의 자리에서 주님을 맞는 것입니다.
둘째, 안보여도 믿음으로 내딛으라는 것입니다. 갈 바를 알지 못하고 가는 것이 믿음의 본질입니다.
셋째, 겉옷이라도 버려두고 나아가라는 것입니다. 가장 내가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라도 버려두고 주님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넷째, 아뢰고 부르짖는 것입니다. 아뢰기만 해서는 안 되고 소리 내어 크게 불러야 합니다. 내 속의 것을 부르짖어야 합니다. 시편에서 기도는 부르짖는 것입니다. 삼손의 부르짖음입니다.
다섯째, 진정 원하는 것을 믿음으로 구하라는 것입니다. 눈 감으면 주님이 묻습니다. 진정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말입니다. 눈 감으면 진정 원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을 주님이 물으십니다. 왜요, 두 눈을 주는데, 그 두 눈이 진짜 있는 것이 없는 것보다 낫겠느냐고 물으시는 것입니다. 돈을 줄 텐데 과연 그것이 없는 것보다 있는 것이 낫겠냐고 물으시는 것입니다. 이 때 있는 것으로 주를 위해 쓰겠다고 하면 “네 믿음이 너를”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