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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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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303][십자가지기교회 주일낮예배: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48)] 하늘 예배자의 믿음 (계 7:9-17) 문병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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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303][십자가지기교회 주일낮예배: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48)] 하늘 예배자의 믿음 (계 7:9-17) 문병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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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 7:9)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나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 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
(계 7:10)큰 소리로 외쳐 이르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 하니
(계 7:11)모든 천사가 보좌와 장로들과 네 생물의 주위에 서 있다가 보좌 앞에 엎드려 얼굴을 대고 하나님께 경배하여
(계 7:12)이르되 아멘 찬송과 영광과 지혜와 감사와 존귀와 권능과 힘이 우리 하나님께 세세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하더라
(계 7:13)장로 중 하나가 응답하여 나에게 이르되 이 흰 옷 입은 자들이 누구며 또 어디서 왔느냐
(계 7:14)내가 말하기를 내 주여 당신이 아시나이다 하니 그가 나에게 이르되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
(계 7:15)그러므로 그들이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고 또 그의 성전에서 밤낮 하나님을 섬기매 보좌에 앉으신 이가 그들 위에 장막을 치시리니
(계 7:16)그들이 다시는 주리지도 아니하며 목마르지도 아니하고 해나 아무 뜨거운 기운에 상하지도 아니하리니
(계 7:17)이는 보좌 가운데에 계신 어린 양이 그들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라



<녹취록>



1. 요한계시록 서론


1) 지금 우리를 위한 종말론적 말씀


우리가 지금 드린 찬송(240장 주가 맡긴 모든 역사)은 미래에 있을 천국에서의 소망을 노래한 것이기도 하지만 사실 현실적으로 오늘 우리가 이곳에서 예배를 드릴 때 우리의 예배가 동시에 하늘의 것이라는 소망을 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본문의 말씀은 앞으로 되어질 일에 대한 말씀인 것이 분명합니다. 마지막 때에 보좌의 어린 양, 일찍이 죽임을 당한 그 어린 양,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 일곱 인을 떼시고 일곱 나팔을 불게 하시고 일곱 대접의 마지막 심판을 예언하는 것이 요한계시록입니다. 이 책은 크게 보면 두 가지로 나뉩니다. 성도들의 영화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왕 되심, 다스리심입니다. 이 말씀은 그 때가 아닌 지금의 성도들이 받아 은혜를 누리라고 주신 것입니다. 이 말씀은 천국의 모습을 가장 잘 보여 주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무엇을 하셨고 지금 어디에 계셔서 무엇을 하시는지, 즉 보좌에 계셔서 앉으사 다스리는 말씀을 전달해 주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은 지금 우리에게 주는 말씀입니다. 지금 말씀을 듣고 지키고 행하는 자가 복이 있다는 것이 이 책의 요지입니다. 


2) 요한계시록의 예배: 종말론적 천국 예배의 현재성


이 책의 핵심 단어라고 한다면 어린 양입니다. 이 단어는 가장 많이 나옵니다. 그뿐만 아니라 마지막에 신부인 성도들이 신랑이신 그분과 영생을 누리는데, 그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가 이 책의 가장 큰 주제인 것입니다. 천국에도 지금 예배가 드려집니다. 그들은 인격적으로 먼저 죽은 성도들은 주를 뵙니다. 오늘 찬송의 가사처럼 말입니다. 구약, 신약의 24 장로가 흰옷 입고 관을 쓰고 모든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 전 세계가,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찬송을 부릅니다. 그러므로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라는 말씀만 보아도 14만4천이라는 수를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이단은 단번에 반박됩니다. 물론 각 지파에서 1만2천 명씩 14만4천이기는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로 구원받은 능히 셀 수 없는 허다한 무리가 찬송과 예배를 지금 이 시간에도 드리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흰옷 입은 무리는 누구냐 하면, 14절 큰 환란을 이기고 어린 양의 피에 씻은 자들이라고 합니다. 그들은 바로 우리이기도 합니다. 역사적으로 물론 여섯째 인을 떼고 일곱째 인을 떼기 전에 이루어지는 미래의 일이기도 합니다만, 지금 천국 예배로 여겨야 합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이 우리에게 은혜를 주는 것입니다. 역사적으로는 미래의 일이나 은혜로는 지금 우리에게 크게 역사하는 것입니다. 


3) 요한계시록의 문학적 형식


요한계시록은 시입니다. 문체가 산문이 아니라 운문입니다. 그러므로 일찍이 많은 사람들이 로마서와 갈라디아서를 외우지는 않으나, 요한계시록은 외웠습니다. 목포 가는 길에 톨게이트를 벗어나면 목포동문교회가 있습니다. 그곳에 담임 목사님으로 백중걸이라는 분이 계셨었습니다. 그분이 요한계시록을 앞으로 다 외우고, 뒤로도 다 외웠다고 합니다. 박윤선 박사님도 미국 가는 배에 요한계시록을 외웠다고 합니다. 요한계시록은 두려운 책, 징계를 내리는 철퇴로 볼 것이 아닙니다. 생명수가 흐르고 흰옷을 입은 무리들이 예배를 드리는 모습이 그려진 아름다운 책입니다. 


4) 요한계시록의 구조


이 책은 크게 1장에는 서론적인 말씀이 나오고 3장까지는 일곱 교회가 나옵니다. 4장부터는 천국의 모습이 나옵니다. 그리고 역사적인 계시가 본격적으로 나옵니다. 일곱 인은 말씀에 도장을 찍어 봉했다는 의미입니다. 두루마리에 봉한 말씀이 인을 떼는 것은 역사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일곱 인의 인봉을 떼기 직전에 나오는 노래가 이 노래입니다. 그리고 일곱 번째 인의 일곱 나팔이 있는데 이 일곱 나팔 중에 마지막 나팔에는 일곱 대접이 있습니다. 그 때마다 찬송이 나옵니다. 이것을 중간계시라고 하는데 요한계시록에 열 군데가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중요한 일이 있을 때마다 나옵니다. 여섯 번째 인을 떼고 일곱 번째 인을 떼기 전, 즉 일곱 나팔을 불기 전에 나오는데 거기에 천국 잔치와 찬양이 나옵니다. 또한 일곱 번째 나팔을 불기 전에 다시 계시가 나옵니다. 그리고 일곱 대접을 붓기 전에 찬양이 나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 계시가 나옵니다. 크게 네 사건 가운데 나오고 말씀으로는 열 곳이 나옵니다. 



2. 요한계시록의 예수 그리스도


1) 삼위일체적-기독론적 예배


결국은 보좌의 어린 양께 영광을 드리고 그 이름으로 삼위일체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것이 중요한 내용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가 드리는 예배에서 듣는 이 말씀이 귀한 것으로 알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단의 미혹에 흔들리지 않는 것입니다. 


2)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이시며 우리를 위해 무엇을 하셨는가?


그리하니 요한계시록은 예수님이 우리에게 무엇을 하셨는지를 보여 주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가장 젊을 때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가장 많은 일을 경험한 자입니다. 마지막까지 예수님의 곁을 지키고 예수님의 어머니를 맡은 자입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요한계시록을 사도 요한의 예수님에 대한 고백으로 보기도 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과 요한일, 이, 삼서 그리고 요한계시록은 일맥상통하는 것입니다. 제가 신학교에서 기독론을 가르칩니다. 기독론에서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배우는데, 예수님의 행적은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에서 배우지만, 그가 어떤 분이신지에 대해서는 요한복음에서 가장 많이 배웁니다. 요한복음에서 ‘나는 ~이다’라는 문장이 가장 많이 나옵니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요, 선한 목자요, 포도나무요, 양의 목자 등으로 계속 나옵니다.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욥 42:5). 우리가 환상이나 이런 것을 많이 이야기하는데 다음의 설명이 답이 될 것입니다. 즉 귀로 들은 것이 넘치면 눈으로 보입니다. 그 말은 곧 말씀을 많이 들으면 그려진다는 것입니다. 욥이 그러므로 이렇게 고백합니다. 평생 귀로만 들었는데 이제 눈으로 보인다고 말입니다. 구체적으로 예수님이 유배 간 사도 요한에게 찾아 오셔서 말씀을 주시지만, 사도 요한은 전체 말씀에서 예수님을 바라보고 있는 것입니다. 본문을 통해 크게 기억할 것은 첫째로 예수님은 누구이신가 하는 것입니다. 


(1) 제물이시며 제사장, 목자이시며 양, 주인이시자 종

예수님은 어린 양이십니다. 어린 양은 유월절 양입니다. 구약에 제사에 드려지는 제물로서의 양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 땅에 오신 예수께서 친히 제물이 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사장이 되시고 제물이 되셨습니다. 목자가 되시고 양이 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친히 제물인 양이 되신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은 우리의 주인이시자 종입니다. 


(2) 죽으시고 부활하신 자

이 어린 양이 우리를 위해 죽고 부활하셨습니다. "... 죽은 자들 가운데에서 먼저 나시고 ..."(요 1:5). 또한 곧 살아 있는 자, 전에 죽은 자입니다. “곧 살아 있는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계 1:18). 곧 전에 일찍이 죽음을 당하시고 죽으신 상태로 계신 것이 아니라 살아서 보좌 우편에 계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 유대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가 이겼으니 ...”(계 5:5) 유다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가 이겼다는 말은 자기 자신을 죽음의 제물로 내어주시고 부활하셨다는 말입니다.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예수님은 그러므로 죽으시고 부활하신 분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신이 다시 살아나서 하늘에 올라가는 것이 우리에게 유익이라고 한 것입니다. 우리의 처소를 예비하러 가시는데 그 처소에 든 자마다 생명을 얻는다고 한 것입니다. 도마는 그 길을 물었지만, 예수님이 길이요 생명이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죽으신 것이 유익인 것은 천국에 우리 처소를 예비하러 가시기 때문입니다. 죽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전날 밤에 미리 얘기하신 것입니다. 

우리 성도님들은 이 부활의 예수님을 바라봐야 합니다. 기독교는 관념이 아닙니다. 살아 있는 신앙의 고백입니다. 예수께서 날 위해 죽으시고 날 위해 다시 사셨습니다. 내가 그와 함께 죽고 살아, 지금 그와 함께 살아나고 일어나며 보좌에 앉은 것입니다(엡 2:5-6). 우리가 지금 이곳에서 예배드리지만 천상의 예배가 우리에게 예비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다시 사셨기 때문입니다. “... 그의 피로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시고”(계 1:5).


(3) 날 위해 죽음 당하셨었지만 영화로우신 예수 그리스도

“... 한 어린 양이 서 있는데 일찍이 죽임을 당한 것 같더라 ...”(계 5:6) 사도 요한이 본 것입니다. 일찍이 죽음을 당하셨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붙들고 '아멘' 하면 됩니다. 우리가 봐도 일찍이 죽으신 모습입니다. 그런데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몸에 흉터가 있니 없니 하는 것을 따질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가 보면 일찍이 죽임 당하신 어린 양 예수 같은 모습이 보입니다. 아주 영화롭지만 날 위해 죽으신 예수님의 모습이 보입니다. 아주 영화롭지만 말입니다. 우리 주님은 온갖 보석과 같습니다. 생명의 강이 흐르고 유리와 수정바다가 있는데 일찍이 죽임 당하신 분과 같은 것입니다. 그 영화로운 예수님이 날 위해 죽으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 일찍이 죽임을 당하사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에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요 5:9) 피로 물렀다는 것(대속), 곧 우리를 위해 죽으셔서 우리를 하나님께 드렸다는 것을 정확히 말하고 있습니다. 죽음과 사탄과 불의의 병기, 죄의 종 된 우리가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값을 치르고 무르셨으니 하나님의 백성으로 만들어 하나님께 드린 것입니다. 


3)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1) "성도들 위에 장막을 치시리니"

이 예수님이 이제 본문에서 더 직접적으로 노래되는 것입니다.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계 7:10). 이런 은혜를 받은 우리의 모습은 우선 15절, "그들 위에 장막을 치시리니"라고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장막을 치심은 영원한 천국을 의미합니다. 먼저 죽은 성도들도 이 장막 가운데 계십니다. 그러니 낙심하지 마십시오. 비가 올 때 파라솔 같은 것을 치면 안온히 거할 수 있습니다. 이 예수님이 치시는 장막이 영원한 예루살렘입니다. 그 안에 앉은 자는 다시 주리지도 목마르지도 않습니다. 이 말은 사도 요한이 가장 많이 쓴 말입니다.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요 6:35). 그래서 그에게 오는 자, 나아가는 자는 바로 그를 믿는 자입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 11:6). 또한 16절 후반부에는 해나 아무 뜨거운 기운에도 상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것은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우리를 인도하심을 의미합니다. 장막을 치셔서 말입니다. 생명의 떡, 갈하지 않는 음료가 되시고 뜨거운 것, 차가운 것의 해를 당하지 않게 하십니다. 사시사철 보호해 주시는 것입니다. 조금 부족함이 있어도 다 복됩니다. 

여호와를 즐거워하는 것이 우리의 힘입니다. 이 봄에 다 여호와를 즐거워하면 좋겠습니다. 천국도 좋지만 이 땅도 좋습니다. 어려움도 많지만 말입니다. 나비와 꽃이 이 지상에서 너무 아름답습니다. 내 주변 멀리 갈 필요도 없이 다 있습니다. 골목에도 있습니다. 겨우내 짚을 덮어놨는데 꽃을 피울 것 같습니다. 사시사철 보여 주십니다. 어려움이 있으나 힘든 일이 있으나 말입니다. 눈을 들어 하늘을 보면 천지 지으신 여호와의 복됨과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여호와의 장막에 거하면 말입니다. 해도 비도 가려주십니다. 이 너머의 행복이 없습니다. 이 안에서 행복이지 이것을 넘어서는 없습니다. 즉, 예수와 복된 것을 '아멘' 하지 않으면 어떤 복된 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2)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여 눈물을 씻어 주시는 목자

이어 17절은 보좌의 어린 양이 목자가 되고 생명수 샘이 된다고 합니다. 제물이시자 제사장이시고 종이시자 주인이시고 양이시자 목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우리 인간은 목자이거나 양이거나 둘 중 하나인데, 예수님은 그 모든 것이 되십니다. 그 양이 우리에게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십니다. 시편 23편의 말씀입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습니다. 우리가 어떤 새로운 것을 배우지 않습니다. 베푸신 것을 우리가 이 땅에 누리는 것입니다. 구름기둥과 불기둥의 지키심을 즐기고 성찬의 은혜를 누리고 우리를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 은혜를 누리는 것입니다. 지금 것을 '아멘' 하는 자가 천국의 것을 완전하게 누립니다. 

그리고 17절 후반부는 모든 눈물을 씻어주신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이 땅의 삶은 애통할 수 밖에 없고 애통하는 삶입니다. 그들에게 위로와 눈물 씻어주심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보좌의 어린 양이 우리에게 자기 자신을 주시므로, 제물이 되시므로, 능히 셀 수 없는 허다한 무리, 선택 구원받은 자들이 각 나라에서 나아옵니다. 주님이 부르시기만 하면, 그들이 큰 환란 가운데서 나오는데 어린 양의 피로 희게 씻은 자로 예배하고 찬양하는 것입니다. 



3. 종말의식: 다시 오실 그리스도 안에서 나를 아는 것


성도가 어떻게 다른지에 대해 가끔 생각합니다. 내가 그들과 어떻게 다른가 말입니다. 하는 일이나 동선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말입니다. 오늘 요한계시록의 말씀은 우리의 실존, 존재가 무엇인지를 알려줍니다. 예수를 통해서 내가 무엇인지 알려주시는 것이요 그것이 종말의식입니다. 종말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내가 나를 아는데 예수를 통해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를 기다리고, 마지막에 예수를 만나 얼굴을 맞대며 사는 소망이 종말의 소망, 삶입니다. 종말은 내가 누군지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상의 것에 매몰되어 헛수고를 하지 않는 것입니다. 지금 내가 먹는 것, 사는 곳, 보는 것이 아름다울 뿐입니다. 그것이 바로 종말의식입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다고 하는 온갖 유혹이 있는데, 그것이 환란입니다. 지금 너가 있는 곳이 행복하지 않다 저기 다른 곳에 좋은 것이 있다고 하는 것이 유혹과 환란입니다. 이것이 말세입니다. 말세는 다른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무슨 마지막 때 어떻게 사는지에 대해 다르게 볼 것이 아닙니다. 

어느 성경주석가는 본문을 결혼식 노래라고 했습니다. 결혼식은 한 몸이 되는 것인데 그것은 비로소 내가 나를 아는 것입니다. 내 존재의 확인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모든 것을 이루시고, 그의 죽음과 피로 우리가 구원을 얻으며, 우리가 그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십니다. 우리를 구름기둥과 불기둥, 쉴만한 물가로 우리를 안위하시고 우리 눈의 눈물을 씻어주시는 그 예수가 구름을 타고 다시 오신다는 것, 이것이 요한계시록입니다. 재림의 소망입니다. “... 전에도 계셨고 이제도 계시고 장차 오실 이시라 하고”(계 4:8). 요한계시록의 이 말씀은 마가 다락방에서 잡히시던 밤에 ‘내가 잡혀가는 것이 너희의 유익이라’는 말씀의 연장입니다. 하늘로 올라가셔야 영을 내려보내시고 그 영을 받아야 본문처럼 허다한 무리의 흰옷을 입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됩니다. 



4. 결론: 올려드리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찬송이 영원하리라


그리고 이 찬송에서 12절, "찬송과 영광과 지혜와 감사와 존귀와 권능과 힘"을 올려드리는데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 이것을 '아멘' 하며 올려드리면 우리도 그렇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일곱 가지를 올려드리지만 우리가 누리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받으시는 것은 우리 것을 되게 하시려 함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받으시는 이유입니다. 즐겁고 싶으면 기쁨을 하나님께 올리십시오. 존귀하고 싶으면 하나님께 존귀를 올리십시오.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우리의 누리는 것이 됩니다. 인생의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를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올리는 것이 우리의 즐거움이 될 때 진정 하늘나라에 가져가는 것이 됩니다. 이 찬송이 계속 나옵니다. 이것이 새 노래입니다. 새 노래는 하나님께 올려드리면 내 것이 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