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127][십자가지기교회 주일낮예배: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43)] 말씀과 계명을 지키는 믿음 (요일 2:1-6) 문병호 목사
*음성파일: 게시물 하단 "관련링크"에서 청취 혹은 내려받기 가능합니다.
(요일 2:1)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여도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요일 2:2)
그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
(요일 2:3)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 이로써 우리가 그를 아는 줄로 알 것이요
(요일 2:4)
그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되
(요일 2:5)
누구든지 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이 참으로 그 속에서 온전하게 되었나니 이로써 우리가 그의 안에 있는 줄을 아노라
(요일 2:6)
그의 안에 산다고 하는 자는 그가 행하시는 대로 자기도 행할지니라
<녹취록>
1. 요한일서 1장 1-6절 개관
우리가 사도 요한은 요한복음, 요한1, 2, 3서, 그리고 요한계시록으로 성경의 5권을 저작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요한복음은 가장 많이 읽히는 복음서이고, 요한1, 2, 3서는 사랑이 넘치는 서신서이며, 요한계시록은 마지막 때 이루어질 일을 밧모섬에 유배된 요한에게 하나님이 일러주신 것을 기록하게 하신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사랑의 사도라고 합니다. 그것은 그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많이 받았기도 하고, 그의 책이 사랑에 관해 많이 다루기도 하며, 어투가 실제로 아주 사랑스럽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본문도 1절은 "나의 자녀들아"라고 하여 부모가 자녀들에게 하듯 부드럽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런 방식으로 부르지 않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을 읽고 요한서신을 읽을 때 그 부드러움을 알 수 있습니다. 특별히 본문은 1-6절은 세 부분으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1, 2절은 우리가 죄를 짓기는 하지만 그 가운데 머물지 않고, 대언자가 계시니 그가 바로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며, 그는 화목제물로 자신을 드리신 분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죄를 짓지만 죄를 지으면 나무 뒤로 숨고 멀어지며 소외됩니다. 그런데 대언자가 계셔서 중보자, 속삭이는 자, 위로자로서 중간에서 화목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자신을 화목제물로 드려서 말입니다. 그래서 1, 2절은 우리가 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 대언자, 의로우신 분, 화목제물이 되시기 때문이라고 말하는데, 이것은 전체적으로 은혜에 관한 것입니다. 3, 4절은 이러한 예수의 은혜로 사는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 계명을 지키며 살 때 '그를 안다,' 그리고 '그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있다' 하면서 그 말씀을 지키지 않으면 진리가 없는 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안다고 하는 자는 계명을 지키고 살 때 진리가 있는 것이요, 너희 안에 진리가 있는지는 그의 삶으로 안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나 로마서에서 많이 이야기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3, 4절은 진리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5, 6절은 다음과 같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대언자, 화목제물, 의로우신 분으로 우리를 위하여 모든 것을 이루셨고(1, 2절) 그 진리가 우리 안에 있으면 우리가 그 말씀대로 살고(3, 4절), 그때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하게 된다(5, 6절)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온전하게 되는 것은 우리가 말씀대로 산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어떤 식으로 완전해지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말씀대로 살 때 사랑이 온전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 사랑에 산다고 하는 자는 하나님이 행하시는 대로 행해야 한다고도 말하는 것입니다. 즉, 1, 2절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3, 4절은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 그리고 5, 6절은 사랑에 대해 말하는 것입니다.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누리고, 그 사랑을 누리는 자마다 말씀대로 삽니다. 말씀대로 살 때가 사랑을 가장 많이 누리는 모습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가장 사랑을 많이 받은 사람, 지금 사랑을 받는 사람은 주를 위해 살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말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자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는 자라고 하는 것입니다.
2.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씀을 지키라
말씀을 지키면서 기도하라는 것은 우리의 공로가 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1) 은혜에 의한 행위
모든 세상 종교는 행실에서 행실을 따 내는 것입니다. 기본적으로 인본적입니다. 사람이 열매를 취하고 사람이 판단합니다. 좋은 사람을 만드는 것이 세상의 종교, 철학입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믿음으로 행위의 열매가 맺힙니다. 믿음을 가진 자에게 말씀이 떨어지고 그 말씀이 열매를 맺는데 그것이 바로 행위요, 사랑입니다. 사랑과 행위라는 것은 동의어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믿음 가운데 우리에게 행위를 주시기 때문에 그 행위가 바로 믿음의 열매입니다.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마 7:20). 이것은 다 은혜입니다. 우리가 행위를 해서 그것으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이처럼 사랑하니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의 행함도, 구원도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그의 은혜가 역사하니 사랑의 열매가 맺히는 것이요, 그것이 하늘에서 상급이 되는 것입니다.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롬 8:30) 영화롭게 하셨다는 것은 거룩의 완성입니다. 이것이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 인한 것입니다. 그러니 본문 2절은 로마서 3장 21절 말씀과 일맥상통합니다.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롬 3:21-22). 우리는 의의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이것은 정말 기쁜 것이요, 인류 창조의 가치, 목적입니다. 그 의의 열매를 맺는 것이 본문의 행함입니다. 그 행함으로 열매를 안다고 합니다. 이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은혜로 믿음을 주시고, 그 믿음이 필히 거룩에 이르게 하며, 거룩하게 한 자가 영화롭게 되는, 이러한 은혜를 말하는 것입니다.
2) 화목의 은혜
(1) 대언자 예수 그리스도와 보혜사 성령
본문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다고 합니다. 우리가 죄를 지어서는 안되지만 연약함으로 죄를 짓지 않을 수 없습니다. 거듭난 자는 항상 그 가운데 있습니다. 거듭난 자는 이 땅에서 의인이자 동시에 죄인입니다. 본질상 하나님의 자녀이나 완전함이 아직 이 땅에서 없으므로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에게 대언자가 필요합니다. 본문 1절은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를 대언자라고 합니다. 이것은 보혜사라는 말과 동일합니다. 보혜사는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서 속삭이는 분, 위로하고 중보하시는 분, 사다리와 같이 우리와 하나님 사이의 교제를 온전하게 하시는 분입니다. 계속 예수님이 이 일을 해 주십니다. 그러므로 끊임없이 날마다 새롭게 되고 하나님과 화해합니다. 날마다 우리가 하나님 편으로 향하고 하나님은 우리 쪽으로 얼굴을 향하시는데, 이것은 우리가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대언자가 하시는 것입니다. 대언자가 계속 속삭여 주십니다. 집에서도 그렇습니다. 중간자가 있어야 합니다. 아빠와 아들이 다투면 엄마가 중간에 대언자가 됩니다. 엄마가 더 바쁩니다. 서로 화해시키려고 왔다갔다 하니 말입니다. 우리에게는 대언자 예수님이 계십니다. 죄를 지어서는 안되지만, 죄를 짓는다고 해서 절망이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아들의 영, 아빠 아버지라 부르는 보혜사 성령, 즉 또 다른 보혜사를 받았으므로 그 성령이 우리 안에서 속삭이시는 것입니다.
(2) 화목제물 예수 그리스도
또한 예수 그리스도는 화목제물이 되셨습니다. 금요사경회에서 레위기 3장의 화목제물에 대해 말씀을 나눴습니다. 구약의 제사는 용도에 따라 5가지로 나뉩니다. 화목제는 다른 모든 제사를 드리고 난 후 마지막으로 드립니다. 온전해졌을 때 마지막으로 드리는 것이 화목제입니다. 하나님과 백성이 온전히 더불어 먹고 마시는 것입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계 3:20). 성경에 화목이라는 것이 가장 잘 드러난 것이 '더불어 먹고 마시는 것'인데 예수님이 이 땅에서 세리와 창기와 더불어 먹고 마심으로 보여 주셨습니다. 사람들은 이것으로 비난했지만, 이것이 화목제의 핵심입니다. 두세 사람이 있는 곳에 하나님이 함께 하십니다. 초대교회에 오순절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니 더불어 계속 모이고 떡을 떼고 나눕니다. 화목제물을 드린 후 피는 뿌리고 기름은 하나님께 태웁니다. 오늘날 기름을 나쁘게 생각하지만, 피와 기름이 본질입니다. 피가 없으면 죽는데, 피 이전까지 남아 있는 것이 기름입니다. 우리가 생명이 소진될 때는 피와 기름이 끝날 때입니다. 피는 제단에 뿌리고 기름은 태워 올리고 고기는 나누어 먹습니다. 더불어 먹고 마시는 것입니다. 이 화목제물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래서 화목제물을 드렸다는 것은 이미 자녀 됨이 있고 백성이 되고 번제, 소제, 내 자신과 정성을 드리고, 속죄제, 속건제, 나의 허물과 죄를 드리고 마지막에 하나님과 누리는 교통, 교제, 성찬, 예배, 이것이 바로 화목입니다. 이 화목제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드렸다는 것입니다. 이것에 다 들어 있는 것입니다. 화목제라는 단어 하나에 다른 모든 제사가 망라되어 있는 것입니다. 화목제로 자신을 드린 그 분이 이제 오순절 성령 강림으로 우리 안에 오셔서 하나님과 우리를 화목케 하십니다.
과실 하나 따먹었다고 나무 뒤에 숨지 않습니다. 우리는 과일 따먹는 것보다 더 큰 죄를 많이 짓습니다. 마음의 죄, 생각의 죄, 습관의 죄, 무의식의 죄, 모든 죄를 짓습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담대하게 예배드림은 우리에게 대언자,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가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서 화목제물이 되셔서 대언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자신은 하나님과 얼마나 멀어져 있는지도 모르는데 예수님이 다 아시고 치유하시고 온전케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본문의 말씀입니다. 사도 요한은 말씀대로 살라고 말하기 전에 전제로 예수 그리스도가 계심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부족하다고 좌절치 말고 하나님께로 나아가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당장 연약함이 있어 은혜가 없으면 나아갈 수가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대언하시고 화목제물이 되시므로 그 화목의 은혜가 우리에게 미쳐서 우리가 이제 하나님과 더불어 먹고 마시는 은혜를 누리는 것입니다.
3) 말씀의 은혜
(1) 그리스도를 알면 말씀을 지키는 복을 누린다 이 은혜가 있는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는 것이 본문 3, 4절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있으면 그것은 말씀의 은혜입니다. 그 말씀이 우리 안에 거하시는 것이므로, 그 계명을 지켜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지 스스로 확인하기 위해서는 말씀을 지키는지를 보면 되는 것입니다. 계명을 지키는 것은 의무이기 전에 복입니다. 계명을 지킨다는 것은 나무가 열매 맺는 것입니다. 마지못해 굴레를 쓰는 것이 아니라 나의 완성, 구원을 이루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씨앗이 30배, 60배로 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가 우리 안에 있음은 말씀을 지키는 것으로 압니다. 이에 대해 크게 2가지 잘못된 이해가 있습니다.
첫째, 초대교회에는 영지주의, 즉 신비주의가 들어왔습니다. 우리의 영이 하나님을 알기만 하면 구원이라는 것입니다. 내 안에 신령한 능력이 있어서 내가 하나님을 직접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초대교회 최초의 아딘이 바로 이것입니다. 여호와를 알기만 하면 되므로 내 행실은 상관이 없고 막 살아도 된다고 주장한 것입니다. 이 영지주의를 신비주의라고도 하고 율법파기주의라고도 합니다. 율법은 필요없다고 합니다. 저급한 육체에 속한 것은 지킬 필요도 없고 고상한 영으로 생각만 온전하면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이기도 합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도 이와 같은 생각이 있습니다. 이러한 영지주의는 잘못된 것입니다. 철학에 유심주의(唯心主義, spiritualism)라는 것인데, 오직 마음만 있으면 된다는 것입니다. 전도할 때 보면 그런 어려움이 있습니다. 마음으로는 동의하는데 굳이 교회에 나가지 않아도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유심주의입니다. 영지주의, 신비주의, 유심주의 이 세 가지가 모두 안됩니다. 본문처럼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있으면 그 말씀대로 계명을 행해야 예수를 안다고 하는 것입니다. 안다는 것은 한 몸입니다. 부부입니다. 부부가 혼인신고 서류만 들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함께 살아서 부대끼고 위하고 사랑해야 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부부가 이러한 것처럼 예수를 안다고 하면 그의 계명을 행하는 것입니다. 계명을 지키면 진리가 너희 안에 있는 것으로 안다는 것이 바로 이 말씀입니다.
둘째, 율법만으로도 안됩니다. 헬라인들은 율법을 폐기하고자 했으나 유대인들은 율법으로 구원에 이른다고 했습니다. 유대주의자, 율법주의자입니다. 우리는 율법주의가 아닙니다. 1, 2절의 은혜가 전제되어야 3, 4절의 행함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위해 살려고 하는 것은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화목제물이 되신 그 은혜 가운데 있는 것입니다. 은혜 가운데 진리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넘칠 때 그 은혜 가운데 진리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2)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씀을 즐거워하게 된다 “그런즉 어찌하리요 우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 그럴 수 없느니라”(롬 6:15). 예수 그리스도 은혜 안에 있는 자는 이제 하나님의 말씀을 즐거워합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못살아서 답답합니다. 어쨌거나 하나님의 명령대로 살아보고자 합니다. 말씀 전하라고 하니, 선교하라고 하니 그 말씀을 들으면서 어쨌든지 살아 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다 은혜입니다. 그러므로 세속적인 가치를 가지고, 나이가 들어서 이 땅의 삶이 얼마 남지도 않았는데도 아직까지 기업을 하려 하고 자녀들은 그 기업 때문에 다투는 삶은 우리에게 가당치 않습니다.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하거나 술 취하지 말며 음란하거나 호색하지 말며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롬 13:12-14).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어야 합니다. 어거스틴이 이 말씀으로 회심했습니다. 이 옷은 그냥 옷이 아닌 은혜입니다. 그러니 그것을 입으면 온전하고 단정해집니다. 은혜이니 그것 가운데 담대히 나아가는 것입니다.
(3)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씀을 지키고자 기도한다 말씀을 절대 그냥 듣고 놓지 마십시오. 그 말씀을 놓고 기도하고 몸부림치십시오. 거기에 놀라운 질서가 생기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고백됩니다. 계명대로 사는 것이 아니면 하나님을 모르는 것이요, 진리가 그 가운데 없는 것입니다. 내가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의로우신 예수님이 우리의 대언자와 화목제물 되신 것이 전제되어야 이제 은혜 가운데 진리가 충만하고, 진리의 명령을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저 그 도구일 뿐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을 지키고 닮아 가는 것은 그가 천지를 지으신 말씀이고 그가 우리의 구원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그 말씀이 꿀송이요, 빛과 방패요, 우리의 심령을 정결하게 하고, 우리 눈을 밝게 하며 마음을 즐겁게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전혀 부정적인 것이 없고, 하나도 변개치 않아서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나를 시험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나에게 언약의 말씀으로 은혜를 줍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나에게 한 가지도 어렵게 하지 않습니다. 말씀 때문에 우리가 힘들어지지 않습니다.
(4) 그리스도의 은혜에 의해서 말씀으로 말미암아 믿음이 역사한다 그렇게 된다면 우리를 바꿔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는 이미 우리에게 채워 주시는 은혜가 있습니다. 믿음은 들음으로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습니다. 변화산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라고 했는데, 듣는다는 것은 지키는 것이며 영적인 귀를 가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믿음과 말씀이 함께 역사합니다. 얼마 전에 양재천에 가보니 연을 날리는데 얼마나 연을 멀리 날렸는지 실타래는 보이는데 연이 안 보입니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연이 위에서 꼼짝도 않고 서 있습니다. 밑에는 바람이 많이 부는데 말입니다. 연은 바람의 역경을 안고 갑니다. 그러나 어느 정도 올라가면 그 바람으로 인해 고요해집니다. 말씀과 믿음이 그렇습니다. 말씀이 들어오면 어느 정도 믿음이 있는 자는 소용돌이가 일어납니다. 믿음이 없는 자는 이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어느 정도 소용돌이가 지나면 고요함이 있습니다. 말씀으로 인해 말입니다. 물은 물고기에게 어찌 보면 장애물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물이 있기 때문에 헤엄을 칩니다. 세상 것이 다 그렇습니다. 뭔가 나에게 장애가 되는 것 같으나 그래서 올라가는 것입니다. 믿음이 있는 자는 말씀에 부딪침이 있어야 합니다. 그 때 우리가 예수님을 알고 찾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내 안에 있음을 알게 되고, 그 역사가 있습니다.
(5) 말씀을 지킬 때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때이다 본문 5, 6절처럼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 그 때 비로소 온전하게 되는 것입니다. “자유롭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천하는 자니 이 사람은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약 1:25). 자유롭게 하는 온전한 율법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본문의 ‘말씀을 지키는 자에게 사랑이 그 속에서 온전하게 되나니’와 같습니다. 말씀을 지키는 자에게 사랑이 온전하게 됩니다. 말씀을 ‘지킨 자’가 아닙니다. ‘지키려고 하는 자’입니다. 마지막 할 수 있는 것까지 행하다가 하늘나라 가야 합니다. 정리하고 말년에 무엇인가 돌이켜 보는 것이 아닙니다. 마지막까지 행하다가 가야 합니다. 그것이 사랑받는 모습입니다. 그 때 하나님의 온전한 사랑이 임합니다. 부족한 종도 신학교 들어오기 전에 여러 가지로 기도도 하고 그저 앉으면 울었습니다. 주어진 일도 많고 앞의 길도 모르겠고 현실도 어렵고 막막했습니다. 그러나 오늘 아침에 전자 피아노를 들고 오는데, 꼭 25년 전 신학교 들어오기 전 철근을 들고 나르던 때가 기억났습니다. 그 때가 하나님이 가장 사랑할 때 같습니다. 피곤하고 지치고 감당하기 어려운 일 같으나 십자가를 지고 주를 쫓아갈 때, 그때가 사랑이 온전하게 된 때라는 생각됩니다. 사랑은 그저 관념이 아닙니다. 먼데서 판단하지 않습니다. 움직이는 것입니다. 향이 날 때 향이 되는 것입니다. 향이 병 속에 가둬져 있는 것이 아니라 터뜨려질 때 향이 됩니다. 성도도 그렇습니다. 내가 사랑할 때 사랑의 역사가 일어나고 온전한 사랑이 나에게 임합니다.
(6)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화목제물 되심 그리고 형제 사랑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요일 4:10). 요한일서에는 화목제물이라는 말이 2번 나옵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는 말을 하면서, 아들을 화목제물로 보내심을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한 화목제물이 되었으므로 이제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온전하게 누리는 것입니다. 계명을 지키며 기도하면 무엇이든지 받는다고 했습니다.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서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라”(요일 3:22). 말씀대로 행하려고 애쓰면서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요 15:7)라는 말씀과 같습니다.
3. 결론
예수님을 알고자 원하시면 움직이십시오. 여명을 가르십시오. 하나님의 사랑을 아시려거든 새벽에 자지 말고 새벽을 깨우십시오. 그러면 알게 됩니다. 그것이 오늘 답입니다.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 갈렙이 노인이나 끝까지 물리치지 못한 강한 여부스 족속에 대해 이렇게 기도합니다. 우리의 육체는 쇠하지만 믿음은 날마다 더합니다. 무엇이든 안 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행하고 사랑하고 계명을 지킵니다. 절대 두 번 세 번 생각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거든 무조건 따지지 말고 하십시오. 그러면 그 때 역사합니다. 나는 이것을 할 수 있고 없고를 따지면 그리스도의 진리가 없습니다.
[20190127][십자가지기교회 주일낮예배: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43)] 말씀과 계명을 지키는 믿음 (요일 2:1-6) 문병호 목사
*음성파일: 게시물 하단 "관련링크"에서 청취 혹은 내려받기 가능합니다.
<녹취록>
1. 요한일서 1장 1-6절 개관
우리가 사도 요한은 요한복음, 요한1, 2, 3서, 그리고 요한계시록으로 성경의 5권을 저작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요한복음은 가장 많이 읽히는 복음서이고, 요한1, 2, 3서는 사랑이 넘치는 서신서이며, 요한계시록은 마지막 때 이루어질 일을 밧모섬에 유배된 요한에게 하나님이 일러주신 것을 기록하게 하신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사랑의 사도라고 합니다. 그것은 그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많이 받았기도 하고, 그의 책이 사랑에 관해 많이 다루기도 하며, 어투가 실제로 아주 사랑스럽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본문도 1절은 "나의 자녀들아"라고 하여 부모가 자녀들에게 하듯 부드럽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런 방식으로 부르지 않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을 읽고 요한서신을 읽을 때 그 부드러움을 알 수 있습니다.
특별히 본문은 1-6절은 세 부분으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1, 2절은 우리가 죄를 짓기는 하지만 그 가운데 머물지 않고, 대언자가 계시니 그가 바로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며, 그는 화목제물로 자신을 드리신 분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죄를 짓지만 죄를 지으면 나무 뒤로 숨고 멀어지며 소외됩니다. 그런데 대언자가 계셔서 중보자, 속삭이는 자, 위로자로서 중간에서 화목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자신을 화목제물로 드려서 말입니다. 그래서 1, 2절은 우리가 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 대언자, 의로우신 분, 화목제물이 되시기 때문이라고 말하는데, 이것은 전체적으로 은혜에 관한 것입니다.
3, 4절은 이러한 예수의 은혜로 사는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 계명을 지키며 살 때 '그를 안다,' 그리고 '그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있다' 하면서 그 말씀을 지키지 않으면 진리가 없는 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안다고 하는 자는 계명을 지키고 살 때 진리가 있는 것이요, 너희 안에 진리가 있는지는 그의 삶으로 안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나 로마서에서 많이 이야기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3, 4절은 진리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5, 6절은 다음과 같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대언자, 화목제물, 의로우신 분으로 우리를 위하여 모든 것을 이루셨고(1, 2절) 그 진리가 우리 안에 있으면 우리가 그 말씀대로 살고(3, 4절), 그때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하게 된다(5, 6절)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온전하게 되는 것은 우리가 말씀대로 산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어떤 식으로 완전해지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말씀대로 살 때 사랑이 온전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 사랑에 산다고 하는 자는 하나님이 행하시는 대로 행해야 한다고도 말하는 것입니다.
즉, 1, 2절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3, 4절은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 그리고 5, 6절은 사랑에 대해 말하는 것입니다.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누리고, 그 사랑을 누리는 자마다 말씀대로 삽니다. 말씀대로 살 때가 사랑을 가장 많이 누리는 모습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가장 사랑을 많이 받은 사람, 지금 사랑을 받는 사람은 주를 위해 살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말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자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는 자라고 하는 것입니다.
2.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씀을 지키라
말씀을 지키면서 기도하라는 것은 우리의 공로가 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1) 은혜에 의한 행위
모든 세상 종교는 행실에서 행실을 따 내는 것입니다. 기본적으로 인본적입니다. 사람이 열매를 취하고 사람이 판단합니다. 좋은 사람을 만드는 것이 세상의 종교, 철학입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믿음으로 행위의 열매가 맺힙니다. 믿음을 가진 자에게 말씀이 떨어지고 그 말씀이 열매를 맺는데 그것이 바로 행위요, 사랑입니다. 사랑과 행위라는 것은 동의어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믿음 가운데 우리에게 행위를 주시기 때문에 그 행위가 바로 믿음의 열매입니다.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마 7:20). 이것은 다 은혜입니다. 우리가 행위를 해서 그것으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이처럼 사랑하니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의 행함도, 구원도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그의 은혜가 역사하니 사랑의 열매가 맺히는 것이요, 그것이 하늘에서 상급이 되는 것입니다.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롬 8:30) 영화롭게 하셨다는 것은 거룩의 완성입니다. 이것이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 인한 것입니다. 그러니 본문 2절은 로마서 3장 21절 말씀과 일맥상통합니다.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롬 3:21-22). 우리는 의의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이것은 정말 기쁜 것이요, 인류 창조의 가치, 목적입니다. 그 의의 열매를 맺는 것이 본문의 행함입니다. 그 행함으로 열매를 안다고 합니다. 이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은혜로 믿음을 주시고, 그 믿음이 필히 거룩에 이르게 하며, 거룩하게 한 자가 영화롭게 되는, 이러한 은혜를 말하는 것입니다.
2) 화목의 은혜
(1) 대언자 예수 그리스도와 보혜사 성령
본문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다고 합니다. 우리가 죄를 지어서는 안되지만 연약함으로 죄를 짓지 않을 수 없습니다. 거듭난 자는 항상 그 가운데 있습니다. 거듭난 자는 이 땅에서 의인이자 동시에 죄인입니다. 본질상 하나님의 자녀이나 완전함이 아직 이 땅에서 없으므로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에게 대언자가 필요합니다. 본문 1절은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를 대언자라고 합니다. 이것은 보혜사라는 말과 동일합니다. 보혜사는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서 속삭이는 분, 위로하고 중보하시는 분, 사다리와 같이 우리와 하나님 사이의 교제를 온전하게 하시는 분입니다. 계속 예수님이 이 일을 해 주십니다. 그러므로 끊임없이 날마다 새롭게 되고 하나님과 화해합니다. 날마다 우리가 하나님 편으로 향하고 하나님은 우리 쪽으로 얼굴을 향하시는데, 이것은 우리가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대언자가 하시는 것입니다. 대언자가 계속 속삭여 주십니다.
집에서도 그렇습니다. 중간자가 있어야 합니다. 아빠와 아들이 다투면 엄마가 중간에 대언자가 됩니다. 엄마가 더 바쁩니다. 서로 화해시키려고 왔다갔다 하니 말입니다.
우리에게는 대언자 예수님이 계십니다. 죄를 지어서는 안되지만, 죄를 짓는다고 해서 절망이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아들의 영, 아빠 아버지라 부르는 보혜사 성령, 즉 또 다른 보혜사를 받았으므로 그 성령이 우리 안에서 속삭이시는 것입니다.
(2) 화목제물 예수 그리스도
또한 예수 그리스도는 화목제물이 되셨습니다. 금요사경회에서 레위기 3장의 화목제물에 대해 말씀을 나눴습니다. 구약의 제사는 용도에 따라 5가지로 나뉩니다. 화목제는 다른 모든 제사를 드리고 난 후 마지막으로 드립니다. 온전해졌을 때 마지막으로 드리는 것이 화목제입니다. 하나님과 백성이 온전히 더불어 먹고 마시는 것입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계 3:20). 성경에 화목이라는 것이 가장 잘 드러난 것이 '더불어 먹고 마시는 것'인데 예수님이 이 땅에서 세리와 창기와 더불어 먹고 마심으로 보여 주셨습니다. 사람들은 이것으로 비난했지만, 이것이 화목제의 핵심입니다.
두세 사람이 있는 곳에 하나님이 함께 하십니다. 초대교회에 오순절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니 더불어 계속 모이고 떡을 떼고 나눕니다. 화목제물을 드린 후 피는 뿌리고 기름은 하나님께 태웁니다. 오늘날 기름을 나쁘게 생각하지만, 피와 기름이 본질입니다. 피가 없으면 죽는데, 피 이전까지 남아 있는 것이 기름입니다. 우리가 생명이 소진될 때는 피와 기름이 끝날 때입니다. 피는 제단에 뿌리고 기름은 태워 올리고 고기는 나누어 먹습니다. 더불어 먹고 마시는 것입니다.
이 화목제물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래서 화목제물을 드렸다는 것은 이미 자녀 됨이 있고 백성이 되고 번제, 소제, 내 자신과 정성을 드리고, 속죄제, 속건제, 나의 허물과 죄를 드리고 마지막에 하나님과 누리는 교통, 교제, 성찬, 예배, 이것이 바로 화목입니다. 이 화목제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드렸다는 것입니다. 이것에 다 들어 있는 것입니다. 화목제라는 단어 하나에 다른 모든 제사가 망라되어 있는 것입니다. 화목제로 자신을 드린 그 분이 이제 오순절 성령 강림으로 우리 안에 오셔서 하나님과 우리를 화목케 하십니다.
과실 하나 따먹었다고 나무 뒤에 숨지 않습니다. 우리는 과일 따먹는 것보다 더 큰 죄를 많이 짓습니다. 마음의 죄, 생각의 죄, 습관의 죄, 무의식의 죄, 모든 죄를 짓습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담대하게 예배드림은 우리에게 대언자,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가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서 화목제물이 되셔서 대언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자신은 하나님과 얼마나 멀어져 있는지도 모르는데 예수님이 다 아시고 치유하시고 온전케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본문의 말씀입니다. 사도 요한은 말씀대로 살라고 말하기 전에 전제로 예수 그리스도가 계심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부족하다고 좌절치 말고 하나님께로 나아가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당장 연약함이 있어 은혜가 없으면 나아갈 수가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대언하시고 화목제물이 되시므로 그 화목의 은혜가 우리에게 미쳐서 우리가 이제 하나님과 더불어 먹고 마시는 은혜를 누리는 것입니다.
3) 말씀의 은혜
(1) 그리스도를 알면 말씀을 지키는 복을 누린다
이 은혜가 있는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는 것이 본문 3, 4절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있으면 그것은 말씀의 은혜입니다. 그 말씀이 우리 안에 거하시는 것이므로, 그 계명을 지켜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지 스스로 확인하기 위해서는 말씀을 지키는지를 보면 되는 것입니다. 계명을 지키는 것은 의무이기 전에 복입니다. 계명을 지킨다는 것은 나무가 열매 맺는 것입니다. 마지못해 굴레를 쓰는 것이 아니라 나의 완성, 구원을 이루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씨앗이 30배, 60배로 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가 우리 안에 있음은 말씀을 지키는 것으로 압니다. 이에 대해 크게 2가지 잘못된 이해가 있습니다.
첫째, 초대교회에는 영지주의, 즉 신비주의가 들어왔습니다. 우리의 영이 하나님을 알기만 하면 구원이라는 것입니다. 내 안에 신령한 능력이 있어서 내가 하나님을 직접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초대교회 최초의 아딘이 바로 이것입니다. 여호와를 알기만 하면 되므로 내 행실은 상관이 없고 막 살아도 된다고 주장한 것입니다. 이 영지주의를 신비주의라고도 하고 율법파기주의라고도 합니다. 율법은 필요없다고 합니다. 저급한 육체에 속한 것은 지킬 필요도 없고 고상한 영으로 생각만 온전하면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이기도 합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도 이와 같은 생각이 있습니다. 이러한 영지주의는 잘못된 것입니다. 철학에 유심주의(唯心主義, spiritualism)라는 것인데, 오직 마음만 있으면 된다는 것입니다. 전도할 때 보면 그런 어려움이 있습니다. 마음으로는 동의하는데 굳이 교회에 나가지 않아도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유심주의입니다. 영지주의, 신비주의, 유심주의 이 세 가지가 모두 안됩니다.
본문처럼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있으면 그 말씀대로 계명을 행해야 예수를 안다고 하는 것입니다. 안다는 것은 한 몸입니다. 부부입니다. 부부가 혼인신고 서류만 들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함께 살아서 부대끼고 위하고 사랑해야 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부부가 이러한 것처럼 예수를 안다고 하면 그의 계명을 행하는 것입니다. 계명을 지키면 진리가 너희 안에 있는 것으로 안다는 것이 바로 이 말씀입니다.
둘째, 율법만으로도 안됩니다. 헬라인들은 율법을 폐기하고자 했으나 유대인들은 율법으로 구원에 이른다고 했습니다. 유대주의자, 율법주의자입니다. 우리는 율법주의가 아닙니다.
1, 2절의 은혜가 전제되어야 3, 4절의 행함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위해 살려고 하는 것은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화목제물이 되신 그 은혜 가운데 있는 것입니다. 은혜 가운데 진리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넘칠 때 그 은혜 가운데 진리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2)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씀을 즐거워하게 된다
“그런즉 어찌하리요 우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 그럴 수 없느니라”(롬 6:15). 예수 그리스도 은혜 안에 있는 자는 이제 하나님의 말씀을 즐거워합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못살아서 답답합니다. 어쨌거나 하나님의 명령대로 살아보고자 합니다. 말씀 전하라고 하니, 선교하라고 하니 그 말씀을 들으면서 어쨌든지 살아 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다 은혜입니다. 그러므로 세속적인 가치를 가지고, 나이가 들어서 이 땅의 삶이 얼마 남지도 않았는데도 아직까지 기업을 하려 하고 자녀들은 그 기업 때문에 다투는 삶은 우리에게 가당치 않습니다.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하거나 술 취하지 말며 음란하거나 호색하지 말며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롬 13:12-14).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어야 합니다. 어거스틴이 이 말씀으로 회심했습니다. 이 옷은 그냥 옷이 아닌 은혜입니다. 그러니 그것을 입으면 온전하고 단정해집니다. 은혜이니 그것 가운데 담대히 나아가는 것입니다.
(3)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씀을 지키고자 기도한다
말씀을 절대 그냥 듣고 놓지 마십시오. 그 말씀을 놓고 기도하고 몸부림치십시오. 거기에 놀라운 질서가 생기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고백됩니다. 계명대로 사는 것이 아니면 하나님을 모르는 것이요, 진리가 그 가운데 없는 것입니다. 내가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의로우신 예수님이 우리의 대언자와 화목제물 되신 것이 전제되어야 이제 은혜 가운데 진리가 충만하고, 진리의 명령을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저 그 도구일 뿐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을 지키고 닮아 가는 것은 그가 천지를 지으신 말씀이고 그가 우리의 구원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그 말씀이 꿀송이요, 빛과 방패요, 우리의 심령을 정결하게 하고, 우리 눈을 밝게 하며 마음을 즐겁게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전혀 부정적인 것이 없고, 하나도 변개치 않아서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나를 시험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나에게 언약의 말씀으로 은혜를 줍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나에게 한 가지도 어렵게 하지 않습니다. 말씀 때문에 우리가 힘들어지지 않습니다.
(4) 그리스도의 은혜에 의해서 말씀으로 말미암아 믿음이 역사한다
그렇게 된다면 우리를 바꿔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는 이미 우리에게 채워 주시는 은혜가 있습니다. 믿음은 들음으로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습니다. 변화산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라고 했는데, 듣는다는 것은 지키는 것이며 영적인 귀를 가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믿음과 말씀이 함께 역사합니다.
얼마 전에 양재천에 가보니 연을 날리는데 얼마나 연을 멀리 날렸는지 실타래는 보이는데 연이 안 보입니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연이 위에서 꼼짝도 않고 서 있습니다. 밑에는 바람이 많이 부는데 말입니다. 연은 바람의 역경을 안고 갑니다. 그러나 어느 정도 올라가면 그 바람으로 인해 고요해집니다.
말씀과 믿음이 그렇습니다. 말씀이 들어오면 어느 정도 믿음이 있는 자는 소용돌이가 일어납니다. 믿음이 없는 자는 이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어느 정도 소용돌이가 지나면 고요함이 있습니다. 말씀으로 인해 말입니다.
물은 물고기에게 어찌 보면 장애물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물이 있기 때문에 헤엄을 칩니다. 세상 것이 다 그렇습니다. 뭔가 나에게 장애가 되는 것 같으나 그래서 올라가는 것입니다. 믿음이 있는 자는 말씀에 부딪침이 있어야 합니다. 그 때 우리가 예수님을 알고 찾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내 안에 있음을 알게 되고, 그 역사가 있습니다.
(5) 말씀을 지킬 때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때이다
본문 5, 6절처럼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 그 때 비로소 온전하게 되는 것입니다. “자유롭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천하는 자니 이 사람은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약 1:25). 자유롭게 하는 온전한 율법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본문의 ‘말씀을 지키는 자에게 사랑이 그 속에서 온전하게 되나니’와 같습니다. 말씀을 지키는 자에게 사랑이 온전하게 됩니다. 말씀을 ‘지킨 자’가 아닙니다. ‘지키려고 하는 자’입니다. 마지막 할 수 있는 것까지 행하다가 하늘나라 가야 합니다. 정리하고 말년에 무엇인가 돌이켜 보는 것이 아닙니다. 마지막까지 행하다가 가야 합니다. 그것이 사랑받는 모습입니다. 그 때 하나님의 온전한 사랑이 임합니다.
부족한 종도 신학교 들어오기 전에 여러 가지로 기도도 하고 그저 앉으면 울었습니다. 주어진 일도 많고 앞의 길도 모르겠고 현실도 어렵고 막막했습니다. 그러나 오늘 아침에 전자 피아노를 들고 오는데, 꼭 25년 전 신학교 들어오기 전 철근을 들고 나르던 때가 기억났습니다. 그 때가 하나님이 가장 사랑할 때 같습니다. 피곤하고 지치고 감당하기 어려운 일 같으나 십자가를 지고 주를 쫓아갈 때, 그때가 사랑이 온전하게 된 때라는 생각됩니다.
사랑은 그저 관념이 아닙니다. 먼데서 판단하지 않습니다. 움직이는 것입니다. 향이 날 때 향이 되는 것입니다. 향이 병 속에 가둬져 있는 것이 아니라 터뜨려질 때 향이 됩니다. 성도도 그렇습니다. 내가 사랑할 때 사랑의 역사가 일어나고 온전한 사랑이 나에게 임합니다.
(6)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화목제물 되심 그리고 형제 사랑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요일 4:10). 요한일서에는 화목제물이라는 말이 2번 나옵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는 말을 하면서, 아들을 화목제물로 보내심을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한 화목제물이 되었으므로 이제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온전하게 누리는 것입니다. 계명을 지키며 기도하면 무엇이든지 받는다고 했습니다.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서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라”(요일 3:22). 말씀대로 행하려고 애쓰면서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요 15:7)라는 말씀과 같습니다.
3. 결론
예수님을 알고자 원하시면 움직이십시오. 여명을 가르십시오. 하나님의 사랑을 아시려거든 새벽에 자지 말고 새벽을 깨우십시오. 그러면 알게 됩니다. 그것이 오늘 답입니다.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 갈렙이 노인이나 끝까지 물리치지 못한 강한 여부스 족속에 대해 이렇게 기도합니다. 우리의 육체는 쇠하지만 믿음은 날마다 더합니다. 무엇이든 안 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행하고 사랑하고 계명을 지킵니다. 절대 두 번 세 번 생각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거든 무조건 따지지 말고 하십시오. 그러면 그 때 역사합니다. 나는 이것을 할 수 있고 없고를 따지면 그리스도의 진리가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