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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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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2


           

[20181028][십자가지기교회 주일낮예배: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31)] 환난 가운데 믿음 (행 27:20-26) 문병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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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028][십자가지기교회 주일낮예배: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31)] 환난 가운데 믿음 (행 27:20-26) 문병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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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 27:20)여러 날 동안 해도 별도 보이지 아니하고 큰 풍랑이 그대로 있으매 구원의 여망마저 없어졌더라
(행 27:21)여러 사람이 오래 먹지 못하였으매 바울이 가운데 서서 말하되 여러분이여 내 말을 듣고 그레데에서 떠나지 아니하여 이 타격과 손상을 면하였더라면 좋을 뻔하였느니라
(행 27:22)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이제는 안심하라 너희 중 아무도 생명에는 아무런 손상이 없겠고 오직 배뿐이리라
(행 27:23)내가 속한 바 곧 내가 섬기는 하나님의 사자가 어제 밤에 내 곁에 서서 말하되
(행 27:24)바울아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항해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하였으니
(행 27:25)그러므로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
(행 27:26)그런즉 우리가 반드시 한 섬에 걸리리라 하더라



<녹취록>


1. 사도 바울이 말년에 당한 고난

주의 일꾼 중 사도 바울만큼 핍박을 많이 받은 자가 없습니다. 다메섹 도상에 예수를 만나 영접하게 되어 열세 번째 사도, 마지막 사도가 되었으나 하나님이 그를 이방의 사도로 세워 많은 환란과 고초를 겪게 하고 그 가운데 고백이 자라 가게 하셨습니다.
사도행전 21-28장은 사도 바울이 3차 전도여행까지 마치고 주의 일을 다 끝냈겠다 싶은 부분입니다. 그러나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어떻게 바울의 말년의 이야기가 이렇게 길게 진행되는가 하는 것입니다. 무려 8장이나 그의 말년의 삶을 기록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를 다 사용하셨겠거니 생각되고, 죽으러 로마로 간다고 생각되어질 때 하나님이 그로 하여금 로마에 가서도 많은 말씀을 전하고 많은 사람을 구원하며 살아가게 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저는 요새 단풍을 보면서 그저 색이 바랜 것이 아니라 새로운 색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단풍나무 같은 경우에는 이전의 색이 푸르죽죽해진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강렬해진 것을 생각합니다. 봄보다 훨씬 더욱 생명력 있어 보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단풍은 그저 사라지는 희미한 색이 아니라 마지막에 잎을 태우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2. 고난을 피하지 않는 사도 바울

사도 바울의 삶도 이런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는 그동안의 어떤 색보다도 강렬한 색으로서 말년의 삶을 살아갑니다. 그는 많은 고난을 당하되 그것을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스스로 나서 감당합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에 들어가시고 성찬을 제정하시면서 살과 피를 나누셔서 이미 죽음을 보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겟세마네에서 임박한 고난의 크기를 알면서도 그 장(場)으로 나아가는 것을 봅니다. 그리고 잡으러 온 병정에게 자원하여 결박당하는 모습을 봅니다.
사도 바울의 삶도 고난을 찾아 나서는 삶임을 볼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이 사도가 아니라고 할 때, 부득불 약한 것을 자랑하겠다고 합니다. — “내가 부득불 자랑할진대 내가 약한 것을 자랑하리라”(고후 11:30). 고난당한 것을 단순히 열거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고난에 대해 하나하나 말하는 것입니다. 그는 고린도교회에 서신을 쓴 이후에도 많은 고난을 당했습니다. 고린도후서 11장 23-33절을 보면 그가 사십에 하나 감한 매는 39대를 말하는데 생명만 살려 주고 죽어도 상관없다는 듯 때린 것입니다. 태장을 맞았다고 하는데 이것은 불구를 만드는 벌입니다. 또한 스데반이 돌로 맞은 것처럼 맞았습니다. 배의 난파를 세 번을 겪고, 일주야를 깊은 바다에 있었습니다. 또한 강도의 위험, 이방인의 위험, 시내의 위험, 광야의 위험, 거짓 형제들의 위험, 자지 못함, 주리고 목마름, 춥고 굶고 헐벗은 위험을 당했습니다. 그런데 이보다 더 힘들었던 것은 교회를 위한 염려라고 합니다.



3. 고난 가운데 피어나는 고백
그러면서 사도 바울은 이 고난들을 이긴 요인이 그의 강인함이나 의지가 아닌, 약함으로 이겼다고 합니다. 강한 사람은 이런 것들을 이겨낼 수 없습니다. 이런 고난을 당하니 담대한 고백이 나옵니다. —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 8:35, 38-39). 저는 설교를 준비하면서 고린도후서 11장 말씀과 이 로마서 말씀을 같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이 모든 위험일지라도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라고 말한 것은 고난이 없이는 할 수 없는 고백입니다. 고난을 당하니 이런 담대한 고백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난 당하는 것이 유익이라는 생각을 해 보는 것입니다.



4. 성령의 인도하심과 함께하심

오늘 우리는 환란 가운데 믿음에 관한 찬송을 불렀습니다. 환란 가운데 믿은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세 차례 전도여행을 통해 기독교 역사에 획을 그었습니다. 이 기독교를 가장 널리 전하고 교리를 수립한 자가 사도 바울입니다. 이 사도 바울은 이방 선교를 감당했는데 그의 삶을 보면 성령의 지시함을 받은 삶입니다. 성령이 하라는 대로 한 것입니다. 구약의 광야 백성들이 구름기둥과 불기둥을 따라 간 것처럼 말입니다. 그것이 성령의 지시입니다. 내 심령과 힘이 아닌 신령한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가는 것입니다. 이 사도 바울의 삶도 계속 성령의 지시를 받았습니다.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눈에 비늘을 걷어 낸 후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바로 예루살렘으로 가려고 하는데 그 때 하나님의 지시가 나타납니다. 예루살렘을 떠나 다소로 갑니다. 그 때 또 성령의 지시가 나타나 안디옥 교회로 갑니다. 그곳에서 다시 성령의 지시를 받아 이방의 선교사로 바나바와 함께 파송됩니다. 그리하여 소아시아에서 선교를 하고 2차 선교에는 소아시아를 다시 돌아보려 했는데 다시 성령의 지시, 곧 예수의 영의 지시를 받아 마게도냐에 가게 됩니다.


1) 성령의 지시를 따라야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
그 후 사도 바울은 다시 성령의 지시를 받는데 예루살렘으로 가라는 지시를 받습니다. 그곳에는 환란과 핍박이 있음을 예고받습니다. 평소에 그는 성령의 지시를 받는 버릇이 있었습니다. 다른 사람들도 동일한 것을 보았습니다. 그들도 예루살렘에 들어가면 환란을 받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해석이 다릅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뜻은 환란과 핍박이 있어도 여전하다는 것을 믿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편하고 즐겁고 자신이 잘돼야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하는데도 말입니다. 그래서 그는 부득불 자랑한다고 할 때 약한 것을 자랑한 것입니다. 내 마음대로 해서는 감당할 수 없음을 안 것입니다. 성령의 지시대로 해야 내가 살아나고 하나님이 영화롭게 하심을 믿은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는 성령에 매여 예루살렘에 돌아갑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은 거기에서 잡혀 로마로 압송됩니다. 그곳에서 공회에 서는데 그날 밤 주께서 사도 바울의 곁에 나타나십니다. 가장 어려울 때 하나님이 지시해 주시고 나타나 주시는 것입니다. — “그 날 밤에 주께서 바울 곁에 서서 이르시되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언한 것 같이 로마에서도 증언하여야 하리라 하시니라”(행 23:11). 사도 바울의 삶이 이런 것입니다. 자신이 하고자 하는 것이 있어도 하나님이 지시하시는 대로 사는 것입니다. 로마로 가서 사람 살리는 일을 하라는 것입니다.


2) 성령의 지시를 해석하는 방법: 말씀

우리는 성령의 지시를 받습니다. 성령은 오늘 아침에도 내 발걸음을 인도했습니다. 내가 잘 때도 함께 하십니다. 그가 내 안에 사는 것이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므로 성령의 지시가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것을 어떻게 해석하느냐 입니다. 어릴 때 친구 집에는 사과가 맛있게 달린 사과나무가 있었지만, 그 앞에는 가시가 있는 탱자나무가 있었습니다. 무슨 일이든 가시가 있는 것입니다. 성령이 가시를 보여 주시는데, 그것을 어떻게 해석하느냐 입니다. 과일을 따기 위해 그 가는 길에 있는 가시로 인해 돌아서느냐, 계속 가느냐 입니다. 가나안 땅을 정탐할 때 동일한 모습을 보고 정반대의 반응이 나오듯 말입니다.

그래서 말씀의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속성과 역사하시는 방식을 말씀으로 잘 알아야 성령의 지시가 올 때 올바른 반응을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시온의 대로, 좁은 문, 좁은 길입니다. 그저 환히 열려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시온의 대로가 아닌 협착한 길일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의 삶이 이것을 보여 줍니다.


3) 성령의 지시를 따라가는 방법: 믿음의 인내

성령의 지시를 따라 성령에 매여서 말씀을 쫓아 나아갈 때 우리에게는 참음이 필요합니다. 본 교회에서 올해 많이 강조한 것이 말씀 읽고 말씀 붙들고 기도하고 참으라는 것입니다. 참는 것이 없이는 열매가 없습니다. 기다림이 없이는 강한 쇠도 잘 익은 고구마도 만들 수 없습니다. — “그리스도의 인내에 들어가게 하시기를 원하노라”(살후 3:5). 사도 바울은 일찌감치 로마에 가고 싶어했습니다. 그 때는 로마가 유럽의 끝인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계속 참는 것입니다. 칼빈도 서른살 때 마음먹은 것을 오십 세에 이루는데, 그것은 바로 대학교 설립입니다. 20년동안 아무도 모르게 혼자 고민하고 인내한 것입니다. 우리 성도님들도 이 인내가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인내에 들어가야 합니다. —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 12:2). 우리 주님도 많이 인내하셨습니다. 나서는 기술은 많은데 참는 기술이 없으면 아무것도 안됩니다. 참는 기술이 있어야 잘 됩니다. 주의 일도 그렇습니다. 참아야 합니다. 씨를 뿌리고 물을 주고 자라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입니다.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내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고난의 앞에 놓여 있습니다. 우리가 당하는 고난은 세상의 악한 영과의 전쟁입니다. 그 싸움은 내 안에서 날마다 일어납니다. 굳이 대문 밖을 안 나가도 그러합니다. 그래서 또 우리가 연약한 대로 기도하고 하나님 앞에 매이는 것입니다. 이 인내는 흔들리는 것이 아니라 지향점이 있습니다. 오래 참음에는 분명한 목표가 있습니다. 푯대를 향해 우리가 나아가면서 참는 것입니다.



5. 고난을 맞서는 방법


1) 하나님이 주신 고난의 유익을 믿고 고난을 당하라 

고난을 이기는 방법은 하나뿐입니다. 고난을 당하는 것입니다. 고난을 당하는 것이 고난에 맞서는 것입니다. 고난을 피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한 가지, 하나님이 주신 고난은 너끈히 이길 고난임을 알고 그것이 내게 유익이라는 것을 확신하며 맞서는 것입니다. 유익 없는 고난은 없습니다. 쇠를 달구는 것은 대장장이의 뜻이 있는 것입니다. 단련시키고 연단하여 정금과 같이 나오게 하려고 불에 태워 고난을 겪는 것입니다. 고난 없이 나오는 것이 없습니다. 만물이 그것을 알려 줍니다.
고난이라는 것은 당하는 것인데, 어떻게 당하느냐를 배워야 합니다. 피하는 것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말입니다. "환란의 경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고난을 크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환란의 경한 것"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것은 다 가볍다는 것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유익하다는 것입니다.


2) 죄로 인한 고난인지 하나님이 주신 고난인지 분별하라

우리는 이 고난이 죄로 인하여 생긴 고생이냐, 하나님이 주신 고난이냐를 분별해야 합니다. —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롬 8:17). 세상 연락(宴樂)으로 인해 얻은 고난은 유익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고난이 있습니다. “그가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셨은즉”(히 5:8-9). 우리 예수님도 고난으로 순종을 배워 흠없고 점없는 제물로 하나님께 영광을 드린 것입니다.


3) 주님의 고난을 생각하라
사도 바울이 고난당하는 것을 보면, 성경에서 직접 이야기하지 않지만, 그가 많이 기도하면서 예수님을 생각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의 고난이 예수님이 당한 고난과 매우 비슷하다는 것을 보면서 그 생각을 해 봤습니다.
예수님의 고난과 사도 바울이 당한 고난의 첫 번째 공통점은 둘 다 예루살렘으로 적극적으로 들어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여리고를 지나 마지막 준비를 다 하시고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십니다. 제자들에게 무슨 일이 있을지 알려 주시고 성찬을 제정하시고 겟세마네에서 마지막 기도를 드리고 들어가십니다. 그리고 병사들에게 자신을 드러내 잡아가게 하십니다.
사도 바울도 예루살렘으로 어떻게든 돌아가려고 합니다. 결박이 있는 것을 알면서 말입니다. 성경을 보면 얼마든지 도망갈 수 있는 여지가 있었습니다. 아킵보도 제자들도 모두 만류했고 예측했습니다. 그럼에도 사도 바울은 개의치 않고 들어갑니다.
두 번째 공통점은 유대인들에게 고난을 당한 것입니다. 그리고 총독에게 넘겨집니다. 우리 주님도 유대인들이 잡아 빌라도에게 넘김을 당하십니다. 바울도 무리가 없애려고 하는데 특별히 대제사장 아나니야, 그리고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 나섭니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벨릭스 총독에게 넘겨집니다. 자기들이 죽이려고 하면서 결국 로마 총독을 이용한 것입니다.
세 번째 공통점은 유사한 죄목입니다. 바울은 나사렛 이단의 우두머리라고 제소합니다. 예루살렘의 종교주의자들이 저 나사렛 시골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겠느냐, 나사렛 이단의 우두머리라고 바울을 참소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과 비슷한 죄목을 사도 바울에게 덮어 씌웁니다. 지난 주 설교에서 십자가를 생각하며 이김을 나누었습니다. 사도 바울도 이 고난을 이기고 예루살렘으로 들어간 것은 예수님을 깊이 생각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예수님도 유대인에게 음해를 당해 총독에게 넘겨졌는데 바울은 자신도 그런 것으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네 번째 공통점은 예수님이 헤롯 왕 앞에 서신 것처럼, 사도 바울은 아그립바 왕에 앞에 선 것입니다. 그가 사도 바울에게 ‘학문이 너를 미치게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벨릭스가 일시적으로 사도 바울의 전도를 받은 것으로 말합니다.
이런 것들을 보면, 사도 바울은 예수님과 함께 고난을 받았음을 알게 됩니다. —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따라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딤후 1:8); “하나님의 뜻대로 고난을 받는 자들은 또한 선을 행하는 가운데에 그 영혼을 미쁘신 창조주께 의탁할지어다”(벧전 4:19). 하나님의 뜻대로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는데, 이것은 예수를 따라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바라보면, 십자가 바라보면 다 보입니다. 내가 무엇을 참아야 하고 당해야 하고 나서야 하는지, 그리하여 예수님과 함께 높이 영화롭게 되는 것이 보입니다. 그 좁은 길, 좁은 문이 보입니다. 사도 바울도 그것입니다.



6. 그리스도와 함께 당하는 고난만이 유익하다


—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시 119:71). 이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예수님과 함께 고난 당하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고난을 당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알고 나의 부득불 약한 것을 자랑합니다. 고난이 나의 약한 것을 드러나게 해서 하나님의 강함이 나의 약함을 이기게 하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이 율법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복음을 따라 그리스도와 함께 당하는 고난만이 나에게 유익합니다. 세속적인 고민, 쓸데없는 걱정은 빨리 벗어나야 합니다. 남을 해코지하고자 하는 분노의 고생, 시기의 고생은 쓸모가 없습니다. 그러나 애매히 고난 당해도 주를 위한 고난은 정금보다 귀합니다. 그것을 우리에게 말씀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 고난은 우리에게 힘을 줍니다. 그 고난의 자리에 서려고 할 때 우리는 마지막 잎새같이 하나님이 데려가실 때까지 더 영롱한 색을 내는 것입니다.
요새 가을의 단풍을 보면서 단풍이라는 이름의 이유를 알게 되었습니다. 정말 붉은 단(丹), 붉습니다. 일년 내내 푸르다가 말입니다. 단풍나무는 이 가을에 가장 아름답고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 봤습니다.



7. 고난 가운데 담대해지는 비결


1) 하나님을 믿으라

본문 20절을 보면, 여러 날 동안 해도 별도 보이지 않고 큰 풍랑이 그대로 있다고 합니다. 이 바람이 부는 것은 서쪽에서 동쪽입니다. 그런데 지금 사도 바울의 배는 동쪽에서 서쪽으로 가려고 합니다. 역방향으로 가는 것입니다. 별도 보이지 않습니다. 여러 사람이 먹지 못하여 배고프기도 합니다. 그래서 구원의 소망도 없어졌습니다. 여기서 구원은 영생의 구원이 아닌 구조를 말하는 것입니다. 살아날 소망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본래 내가 떠나지 말자고 하지 않았냐'고 합니다. 앞에서 본 것처럼 사도 바울은 7일 동안이나 물속에 있었고 세 번이나 파선된 경험이 있습니다. 배를 잘 압니다. 그래서 가면 안 된다고 하는데, 그들은 사도 바울의 말을 듣지 않습니다. 그래서 완전히 한계 상황에 다다릅니다. 그 때 사도 바울이 "내가 속한 바 곧 내가 섬기는 하나님"이라고 그들에게 전합니다. 이 때부터 사도 바울의 권능이 드러납니다. 그전까지는 말을 안 듣다가 말입니다. — “내가 속한 바 곧 내가 섬기는 하나님의 사자가 어제 밤에 내 곁에 서서 말하되”라고 합니다. 성령의 지시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잘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본문 25절은 말씀하신 그대로 이루어짐을 믿는다고 합니다. 이 말씀에는 3가지 곧, ‘하나님께 속한다,' '하나님을 섬긴다,' '하나님을 믿는다’가 나옵니다. 나의 소속은 하나님입니다. 내가 섬기는 자도 하나님입니다. 내가 믿고 의지하는 바도 하나님입니다. 이 가운데 담대함이 생기는 것입니다. 이 담대함으로 사도 바울이 배에 탄 모든 자들의 생명에 손상이 없을 것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요즘 저는 절대 가치에 대해 생각해 봅니다. 낙엽은 떨어져야 열매를 맺습니다. 본문에서 배는 깨지고 생명이 손상이 없겠다고 했을 때 절대 가치는 생명입니다. 우리의 절대 가치를 잘 안다면 생명의 길이 보일 것이며 무엇을 감사하고 기뻐할지 알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이 얼마나 큰 것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생명, 영생이 절대 가치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와 함께 하시고 그 가운데 영생이 있습니다. 아무리 조화(造花)를 심어도 조화는 조화이기에 피지도 않고 지지도 않고 생명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생명이 있습니다. 생명이 있다는 것은 고백이요, 무한한 가능성이요, 영원성입니다. 일시적으로 소멸하는 것 같으나 생명이 본질이므로, 인간이 만든 것이 없어지더라도 절대 가치가 남는 것입니다.
상대적인 것을 가지고 너무 고민하지 마십시오. 돈 때문에 생명을 버리는 일을 하지 마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 생명으로 즐거워하십시오. 배는 깨질 수 있으나 생명에는 손상이 없을 것입니다. 내가 믿는 하나님, 내가 섬기는 하나님, 내가 속한 하나님이 내 생명을 지켜 주십니다. 세상 사람들도 자기 먹을 것을 가지고 태어난다고 말하곤 합니다. 사도 바울은 유라굴로라는 광풍 가운데서 잠잠히 하나님을 바라보는 믿음을 배우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고난에 맞서는 사도 바울의 모습입니다.


2) 주님을 생각하며 본받으라

 —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벧전 2:21). 베드로서는 특히 네로의 박해가 소아시아 교회에 임할 때 쓴 것입니다. 청년들은 인생을 살 방법, 취업에 대해 고민할 것입니다. 절대 가치를 생각하십시오. 상대적인 것에 대해서는 너무 연연하지 마십시오. 절대적인 것은 많은 경우 일시적으로 우리에게 부정적인 모습으로 보일 수 있습니다. 남과의 경쟁에 쳐져 보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하게 상대적인 것이 우리를 괴롭히는 것이 바로 고난입니다. 고난이 있으면 슬픕니다. 남이 안 아픈데 나는 아프면 눈물이 납니다. 가진 것도 없으면 슬픕니다. 그러나 주님을 생각하십시오. 일시적으로 나를 낮추는 듯 하시더라도 주님은 그 이름으로 우리에게 영광을 돌리게 하십니다.


3) 환난은 경하지만 영광이 중하다는 것을 믿으라

—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고후 4:17). "우리가 잠시 받는 환란의 경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 앞에 받는 고난의 본질은 경한 것, 가벼운 것입니다. 그리고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려 함이니"라고 하십니다.


4)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이 영광스러움을 믿으라

—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치욕을 당하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벧전 4:14). 혹자는 이것을 제9복이라고 합니다. 영광의 영, 하나님의 영이 우리 위에 계시므로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난을 당하면 영광이라는 것입니다.



8. 결론


고난은 우리의 언약의 복의 명찰입니다. 고난은 더 크게 가는 길인 것입니다. 어디든지 좁은 길이 있습니다. 속초에 가려면 한계령을 넘습니다. 한때 조금 막히는 듯 해도 그것을 넘어가야, 트여야 밝은 길이 나옵니다. 그 기다림이 있을 때 맑은 경치가 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