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포하는 교회

주일낮예배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 2

선포하는 교회  |  주일예배 설교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2


           

[20181104][십자가지기교회 주일낮예배: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32)]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 (갈 5:1-6) 문병호 목사

관리자
조회수 64


[20181104][십자가지기교회 주일낮예배: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32)]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 (갈 5:1-6) 문병호 목사 


*음성파일: 게시물 하단 "관련링크"에서 청취 혹은 내려받기 가능합니다.


(갈 5:1)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갈 5:2)보라 나 바울은 너희에게 말하노니 너희가 만일 할례를 받으면 그리스도께서 너희에게 아무 유익이 없으리라
(갈 5:3)내가 할례를 받는 각 사람에게 다시 증언하노니 그는 율법 전체를 행할 의무를 가진 자라
(갈 5:4)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
(갈 5:5)우리가 성령으로 믿음을 따라 의의 소망을 기다리노니
(갈 5:6)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나 효력이 없으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



<녹취록>
 


1. 무엇에 매여 살 것인가?


우리는 하나님 편이냐 세상 편이냐, 하나님 편이냐 바알 편이냐? 엘리야 시대와 같은 선택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성도의 신앙은 중간적인 위치에 있을 때가 없고, 이것이냐 저것이냐를 결정하는 것이 성도의 삶입니다. 그러나 이런 결정이 이성에 있지 않고 우리 안에 사시는 영의 역사에 있기 때문에 우리가 이성적으로 인식하지 못하는 가운데서도 성령이 시시각각으로 온전한 것을 결정하게 하심으로 우리가 삶을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육안으로 다 볼 수 없지만, 마음으로 믿어 하나님께 감사하고, 한 주간을 인도하셨음을 고백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올리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은 다 종인데, 의의 종과 죄의 종이 있다고 합니다. 죄의 종은 죄에 매여서 살고 의에 대해서는 무관심하고 자유로운 사람들이라고 하고, 의의 종은 의에 매여 살되 죄에 대하여는 자유로운 사람들입니다. 즉 죄 짓는 것 때문에 시간을 쓰고 죄 짓는 것에 매이는 사람이 아니라 남을 위해, 주를 위해 살려고 의에 매여 사는 사람은 의의 종입니다.



2. 기독교적 자유


1) 의에 매이는 자유

기독교인의 자유는 "~로 부터의 자유"와 "~에로의 자유"가 있습니다. "~로부터의 자유"는 죄로부터의 자유, 육욕으로부터의 자유입니다. "~에로의 자유"는 의로 나아가는 자유, 하나님의 말씀으로 나아가는 자유입니다.
갈라디아서는 흔히 자유의 서신서라고도 이야기 합니다. 오늘 말씀은 특별히 그리스도인이 자유자인데, 그 자유자는 방종하는 자유자가 아니라 의의 종입니다. 의에는 매여 있으나 죄에는 자유로운 사람들을 자유자라고 합니다.


2) 양자의 영으로 말미암은 자녀로서의 자유

갈라디아서 4:6과 로마서 8:15은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는 양자의 영을 받았다고 합니다.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는 영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고, 하나님의 품에 있는 사람을 자유하다고 말씀합니다.
자유는 행위의 문제가 아니라 신분의 문제입니다. 어떤 행위는 그때그때 매일 수 있습니다. 자녀는 부모의 말씀에 매입니다. 자녀는 부모의 말에 매입니다. 그것이 자녀에게 유익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신분은 자유한 것입니다.


3) 하나님의 질서에 매이는 자유

성경에서 자유는 하나님의 품에 거하며, 집에 거하는 사람입니다. 탕자가 집 밖에 거하는 것은 죄의 종이고, 집 안에 들어왔을 때 의의 종이 됩니다. 집 안의 아버지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것을 자유자라고 합니다. 포도원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포도원 안에서 일을 할 때, 그 때 성경은 자유하다고 부릅니다. 베드로가 자기 마음대로 살 때 자유롭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디베랴 바닷가에서 주님을 만나 내 양을 치라는 말씀을 듣고, 내 띠를 띠지 않고 하나님께서 그의 띠를 묶어 데리고 다니는 것이 성경이 말하는 자유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자유는 그저 풀려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매이는 것, 하나님의 품에 거하는 것,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종살이 할 때, 여러 고통을 겪고, 그들의 부르짖음이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애굽에서 건져 주셨습니다. 홍해를 갈라 생명을 주시고, 해방을 주셨습니다. 열 가지 재앙으로 그들을 건져내셨습니다. 그리고 그저 그들에게 먹고 싶은 것을 주고 하신 것이 아니라 시내산에서 말씀을 주셨습니다. 이렇게 은혜를 주시고 시내산에서 율법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생명을 얻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마땅하게 자녀로 살아갈 법을 주신 것이 자유입니다.


4) 사랑하는 자유

자유가 있다는 것은 성령을 따라 행하는 것이고 사랑으로 하나님이 우리 안에서 역사하는 것을 누리면서 우리도 하나님의 뜻을 쫓아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먼저 하나님을 사랑하고 옆으로는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자유입니다.


5) 영속적인 자유

오늘 1절을 보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다고 합니다. 자유를 주셨다는 것은 신분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자유자의 신분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자유자가 되었습니까? 양자의 영을 받음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양자의 영을 받았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죽으심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로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자녀가 되어서, 자유함을 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기 때문에, 우리가 그 은혜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녀의 영을 받으니 자유로운 것입니다. 집에서는 자고 일어나도 걱정하지 않고 쫓겨날 일이 없습니다. 그래서 걱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자유함입니다. 그러나 그 자유함에 아주 고상한 질서가 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법이고 말씀입니다. 그 때 우리는 진정한 자유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종에게는 질서가 없습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의 종이 있었을 때는 질서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시내산에서 하나님이 말씀을 주셨습니다.

마태복음 20:28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인자가 오셔서 우리를 섬기셨기 때문에 우리가 섬김을 받는 자리에 서는 것입니다. 그 섬김을 받는 것이 자녀 됨입니다. 어떤 것보다 귀한 것이 자녀 됨이고, 이것을 하나님이 자유로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 됨 없이 자유를 누릴 수 없습니다. 세상이 주는 자유는 다 단편적이고 소유적인 것인 것이지만, 우리가 누리는 것은 본질적이니, 우리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이요, 영원히 떠나가지 않는 자유인 것입니다.


6) 내가 쟁취한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말미암아 주어진 자유

주님이 우리를 좇아옵니다. 우리가 주님을 따르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자신을 주셨지, 우리가 주님께 먼저 드려서 갚음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로마서 11:35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냐?” 이것이 자유자의 모습니다. 하나님이 먼저 우리에게 주시고,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찾으시고, 다가오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임재하심으로 우리가 그것에 대하여 감사의 반응을 하는 것이 예배이지, 우리가 하나님을 찾음으로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자유라는 것은 "~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하여 나갈 때, 자유로운 것입니다. 물고기가 물 밖에 있다고 아무도 자유롭다고 얘기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밖에서 파닥일 뿐 자유가 아닙니다. 물고기는 물속에서 그 흐름을 좇아 헤엄칠 때 자유로운 것입니다. 우리도 여호와의 집에서 그분의 계명과 율례와 법도로 그 흐름을 좇아 움직일 때 자유로운 것입니다. 그 흐름을 벗어나면, 탕자와 같이 돼지가 먹는 쥐엄나무 열매를 먹으며 자유를 못 누리는 것입니다.
요한일서 4:10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요한일서 4:7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요한일서 4:8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혹시 여러분 가운데 목사님이 왜 자유를 얘기하지 않고 다른 얘기를 할까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게 자유입니다. 다른 자유는 없습니다. 문을 열고 나가는 것이 자유가 아니라 문을 열고 들어가는 것이 자유가 아닙니다. 포도원에 들어가는 것, 아침 일찍 들어가는 것이 더 빨리 자유를 누리고 더 큰 은혜를 받은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오해해서 왜 나를 빨리 불러서 고생시키냐고 생각하는 것은 크게 오해하는 것입니다. 자유는 일찍 포도원에 들어가고 하나님의 품에 거하는 것입니다.


7) 자유의 정점: 내 안에 계신 예수와 더불어 삶

자유의 클라이막스는 예수님이 우리 안에 사시고, 우리가 예수와 더불어 사는 것입니다. 주님이 자신을 주시는 그 사랑을 통하여 우리 안에 사시기 때문에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으로 믿음을 따라 의의 소망을 누린다”라고 말씀합니다. 갈라디아서는 전체적으로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 구원 받은 자녀의 삶에 대해 말씀합니다. 우리에게 성령을 주심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계심으로 우리가 자유를 누립니다. 요한일서 4:13 “그의 성령을 우리에게 주시므로 우리가 그 안에 거하고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아느니라.” 요한복음 14:17 “그[하나님]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갈라디아서 2:20을 보면, 예수님이 우리 안에 계십니다. 이제는 내 안에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사시기 때문에 그 영의 소욕대로 우리가 움직입니다. 내 안의 성령의 간구와 애통함을 쫓아서 우리가 기도하고, 그 영의 지시함을 쫓아서 우리가 움직입니다. 우리가 매순간 결정해야 하는데, 내 육체의 결정이 아니라 내 안에 사는 영의 결정에 맡깁니다. 그래서 오히려 우리는 잠잠합니다. 가장 중요할 때 잠잠합니다. 홍해 앞에서, 여리고 성을 돌 때, 엘리야가 세미한 음성을 듣는 그 잠잠함이 우리의 자유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 안에 거하심으로 임마누엘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감옥 안에 있어도 자유롭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와 함께 거하기 때문입니다. 바울과 실라가 감옥에서 찬미하는 것이 자유로운 모습니다. 자유롭게 돌아다녀도 온갖 굴레와 근심에 매이고 싸여 있는 것은 자유가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나와 함께 있으면 그것이 자유자이고, 즐거움입니다. 우리는 세상의 벽에 기대서는 평안이 없습니다. 세상의 벽은 견고해 보여도, 그게 무너져 나를 덥칩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함께할 때, 자유자가 됩니다.


8) 자유: 율법의 폐지가 아니라 다 이루신 그리스도 안에서 율법을 누림

갈라디아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자유의 복음을 받아 놓고도, 양자의 영을 받고도 다시금 갈라디아교회에 유대인들이 유대주의를 내세워 할례를 다시 받아야 한다고 한 것이 이 말씀의 배경입니다.
사도 바울은 할례를 받은 사람이 다시 율법주의로 돌아간다면, 할례를 받은 사람은 전체 율법을 다 지켜야 하는데, 다 지킬 수 있겠냐고 말합니다. 2절을 보면, 우리가 할례를 받으면,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아무런 유익이 없다고 말합니다. 할례는 육체의 포피를 조금 베어내는 것입니다. 그것으로 무슨 자유를 얻겠습니다. 그것은 단지 표일 뿐입니다. 그리스도는 단지 껍질을 벗긴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살을 찢기고, 빻으시고, 피를 전제와 같이 다 부어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있는데, 무슨 할례를 다시 찾습니까? 육체의 살을 베어낸다고 그것에 무슨 공로가 있다고 다시 할례로 돌아갑니까? 예수님은 창에 찔려 피와 물을 흘리셔서 할례의 표를 이루셨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상한 몸이 휘장이 되고 양의 문이 되어서 우리가 그 문에 들어가는 것이 자유를 누리는 것입니다.

자유라는 것은 은혜로 진리를 포맷(format)하는 것이라고 말해 볼 수 있습니다. 은혜로 질서를 포맷하는 것이 자유입니다. 온갖 근심, 염려, 더러운 것을 은혜로 포맷시키고, 진리로 포맷시켜 저장시키는 것이 자유입니다. 빈 공간이 아니라 하나님의 진리로 우리를 다시금 질서 있게 자리매김 시키는 것이 자유입니다. 요한복음 8:32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요한복음 17:17 “그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우리 안에 들어오면, 율법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 가운데, 다 이루신 율법의 성취 가운데 사는 것입니다. 오늘 4절 말씀에서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라고 얘기 합니다. 잘 아셔야 합니다. 율법이 폐지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율법을 완성하셨기 때문에 이제는 그리스도의 문으로 들어가야 율법을 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매주 십계명을 읽으며 새깁니다. 우리는 오히려 담대하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가운데 매주 십계명을 새기는 것이지요. 율법주의가 되면 안 됩니다. 항상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봐야 합니다. 요한복음 19:30 “다 이루었다”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선포에 귀 기울여야 합니다. 다 이루심에 거하면서 주님의 말씀에 순종합니다. 그 때 율법이 우리 안에서 꿀 송이보다 달고, 마음을 즐겁게 하고, 영혼을 소생시키고, 정금과 같이 나오게 합니다. 그것이 자유입니다.

그래서 우리 종교개혁자 칼빈은 “뜻을 다하여 율법에 계시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 자유이다”라고 말한 것입니다. 뜻에 순종하는 것이 자유입니다. 왜 이것을 자유라고 했을까요? 이것을 순종하는 것조차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달라고 하시지 않고 주십니다. 주시는 것이 자유입니다. 자유를 선물로 우리에게 줍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믿으면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다 누리게 되기 때문에, 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와 함께 머리이신 그리스도께로 자라가기 때문에 그것을 우리가 자유라고 하는 것입니다. 양재천의 물고기가 얼마나 힘차게 다닙니까. 그것이 자유입니다. 물 안에 있기 때문에 자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은혜 가운데 길을 좇아가는 것이 자유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자연히 자랍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누리는 것입니다.


9)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것이 반향되는 자유

세상의 모든 것은 이러한 자유를 방해하려고 듭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가운데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서 누릴 때, 우리에게는 사랑하는 것이 즐거움이 됩니다. 마지 못해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오늘 5:6에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죽은 믿음, 이름만 있는 믿음이 아니라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입니다. 믿음은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믿음은 빛을, 향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빛을 받으면 빛을 바깥으로 비치게 되고, 향을 받아들이면 향기가 납니다. 그래서 사랑으로써 역사로 역사하는 믿음은, 에베소서 2:8 말씀처럼 믿음을 선물로 받고, 그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 양자의 영을 받게 됩니다. 자녀가 되는 권세는 무엇이든지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하면,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친히 행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를 영접하고 예수의 영을 받고, 빛 되신 그분이 나에게 오면 빛을 비추고, 향되신 주님이 내게 들어오면 내가 향을 냅니다. 이것이 자유입니다.

자유는 그저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비추고 드러내고 증거하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빛이 있는데 닫아 두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은 닫아두라고 합니다. 그래서 마귀 사탄이 우리에게 가장 유혹하는 것이 있습니다. 첫째, 너는 빛이 아니라고 합니다. 너는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야라고 합니다. 마귀는 예수님도 시험했는데, 우리도 시험안하겠습니까? 둘째, 너는 하나님의 자녀는 맞는데, ‘너 능력이 없어’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바로 자유롭지 못한 사람의 모습니다.


10) 자유자의 삶의 방식: 성령으로 간절히 기도

자유자는 하나님이 우리 안에 들어오셔서, 우리 안에 역사하셔서 아들의 빛을 비추는 자입니다. 내가 스스로 행하는 자는 자유롭지 못합니다. 그래서 자유로운 사람은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하는 사람이 자유로운 사람입니다. 기도하는 사람치고 자유롭지 않은 사람이 없습니다. 엉엉 울면서, 가슴을 치면서 영적으로 기면서 납작 엎드려 기도하는 것입니다. “여호와여 종의 소망은 여호와의 불쌍히 여기심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고백하는 사람이 자유자입니다. 항상 파릇파릇한 생생한 육안을 가지고 사는 것이 아니라 기도의 눈물로 흐물진 영안을 가지고 사는 사람이 자유로운 사람입니다. 항상 카랑카랑한 목소리를 가진 사람만 자유로운 사람이 아니라 썩혀진 찬송의 목소리를 가진 사람이 자유로운 사람입니다.


11) 자유자가 누리는 주 안의 즐거움

사도 바울과 같이 몸이 약했지만 자유로웠습니다. 시편 89:15 “즐겁게 소리칠 줄 아는 백성은 복이 있나니 여호와여 그들이 주의 얼굴 빛 안에서 다니리로다” 이것이 자유로운 사람의 모습입니다. “즐겁게 소리칠 줄 아는 백성은 복이 있나니.” 이것이 우리에게 크나큰 복입니다. 우리는 어려운 일이 있어도 즐겁게 소리칠 수 있습니다. 아무리 힘든 일이 있어도, 사방에 우겨쌈이 있어도 우리에게는 결정적인 즐거움이 있어요. 안에서 다니는 것, 은혜의 길로 다시는 것, 그것이 자유입니다. 고린도후서 4:6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 이것이 즐거움입니다. 디도서 3:5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가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따라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오직 긍휼하심에 따라” 우리는 긍휼의 그릇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쌍히 여겨주셨습니다.

제가 하나씩 버릇이 생기는데, 감사하는 버릇이 생깁니다. 힘들 때가 더 감사한 것 같습니다. 뭔가 좁은 것을 넘어서야 넓은 것이 펼쳐집니다. 조금씩 배우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쓸데없는 그런 근심은 다 내려놓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선한 근심으로 살면 됩니다. 내일은 준비하는 것이지, 근심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일은 우리가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내일을 너무 세속적으로 즐거워하지도 마세요. 하나님을 소망하면서 감사 찬송 드리며 하루밤 하루밤 지내는 것입니다. 이것이 나그네 된 우리 삶이요 자유자의 모습입니다. 우리는 과거로부터도 자유해야 합니다. 과거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분계시지요? 자유로워야 합니다. 과거를 담대히 하나님께 맡기고 넘어서야 합니다. 우리는 현재로부터도 자유로워야 합니다. 현재 끼니가 어렵더라도 여호와 앞에서 자유로워야 합니다. 성경을 보면, 나는 궁핍해도, 여호와만 내게 있을 때 큰 일을 이루시는 것을 보게 됩니다. 사렙다 과부, 까마귀를 통해서 선지자가 먹이게 하셨습니다.



3. 결론: 소망 가운데 주님의 멍에를 매라


오늘 말씀 갈라디아서 5:6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사랑이 없는 믿음은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빛이 나에게 비취면 우리가 빛을 반사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다 거울과 같습니다. 그것이 사랑입니다. 우리에게는 그러한 믿음의 역사가 있습니다. 데살로니가교회에 믿음의 역사, 사랑의 수고, 소망의 인내가 있다고 했는데, 갈라디아교회에서 그것이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5:5-6 “우리가 성령으로 믿음을 따라 의의 소망을 기다리노니 ...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 믿음의 선물이 우리에게 주어지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면, 사랑을 비추고, 그 사랑을 비출 때, 소망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우리 교회가 많이 이야기 하듯, 말씀을 붙들고 기도하고, 기도하면 참고 기다려야 합니다. 오래 참음이 모든 일에 귀한 결실을 맺게 합니다.

요새 사회가 혼탁합니다. 사회가 무섭습니다. 참 힘듭니다. 도무지 다닐 직장은 어디며, 우리 자녀 보낼 학교는 어딘지, 곳곳에 험한 소식이 기다리니 너무나 힘든 현대인의 강박관념이 있습니다. 열심히 일하려면 은퇴하라고 하고, 끊임없이 경쟁을 시킵니다. 시골에 가면 자유가 있을까요? 시골은 시골대로 험난하고 새롭게 눈치보고 인사하며 다녀야 합니다. 시골은 시골대로의 굴레가 있습니다. 이 세상은 내 영혼 쉴 곳이 없고, 내 자녀 맡길 곳도 없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만 맡겨야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긍휼의 품에 안겨야 자유롭게 됩니다. 자녀를 여호와의 긍휼의 품에 안겨야 합니다. 사람 믿지 마세요. 썩은 고목보다 못한 것이 사람입니다. 갈대 하나의 힘도 없는 것이 사람입니다. 사람 믿다가 그 사람이 나를 깔고 죽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만 믿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를 누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빛을 비추면, 내가 그 빛을 비추어 다 사랑하게 됩니다. 그 빛의 역사에 소망이 있습니다. 얼마나 이 소망이 아름다운 단어입니까. “의의 소망.” 의가 영생입니다. 즉 “영생의 소망”입니다. 영원히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함을 받는 자녀의 소망. 이 말씀을 통하여, 우리가 진정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쉼을 얻고, 그 가운데서 주님의 멍에를 매야 합니다. 의의 종이 되어야 합니다. 세상의 멍에는 벗어버리고, 주님의 멍에를 매고 주님께 배워야 합니다.
마태복음 11:28-30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