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딤전 4:1) 그러나 성령이 밝히 말씀하시기를 후일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따르리라 하셨으니 (딤전 4:2) 자기 양심이 화인을 맞아서 외식함으로 거짓말하는 자들이라 (딤전 4:3) 혼인을 금하고 어떤 음식물은 먹지 말라고 할 터이나 음식물은 하나님이 지으신 바니 믿는 자들과 진리를 아는 자들이 감사함으로 받을 것이니라 (딤전 4:4)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 (딤전 4:5)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라
<녹취록>
1. 하나님이 주신 것은 다 선하다는 것을 말씀과 기도로 안다
우리가 날마다 살아가는 성도의 삶에 있어서 본문 5절은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진다고 합니다. 무엇보다도 우리 자신이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지는 것, 우리 교회에서 종종 말씀드렸듯이 말씀 붙들고 기도하고 기도한 대로 참으며 믿음으로 기다리라고 하는데, 본문에서 그것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지는 것이 성도의 삶의 본질이요 덕목이요 신앙의 근본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입니다. 특히 본문은 우리 자신이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지는 것이라기보다 우리가 행하고 당하는 모든 일이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진다는 말일 것입니다. 그 "모든 것"은 죄는 아닐 것입니다. 4절은 하나님이 지으셔서 주시는 것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것은 일시적으로 힘든 것과 어떨 때는 편하지 않아 악한 것처럼 여겨질지라도, 하나님이 지어서 주신 것과 명령하신 것은 선하다는 것인데, 그것을 말씀과 기도로 안다는 것입니다. 말씀 붙들고 기도해 보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명령하시고 주시는 모든 것이 다 선하고 버릴 것이 없음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2. 말씀, 기도, 믿음, 성령의 감동
1) 말씀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이유는, 말씀이 아니면 우리와 교통하실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간은 하나님을 다 알 수 없습니다. 큰 산은 인간이 한 눈으로 볼 수 없습니다. 하늘도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시공을 지으시고 초월하신 분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알려주시기 위하여 우리에게 말씀을 주십니다. 이 말씀은 살아서 우리에게 역사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에 능력이 생기고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살이 되고 피가 됩니다.
2) 기도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능력을 드러내는 것이 기도입니다. 그래서 기도는 말씀으로 본 보화를 캐내는 것이라고 칼빈이 기독교 강요에서 말한 것입니다. 그래서 말씀이 본 것을 아무리 귀한 것이라도 기도로 캐내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우리가 그것을 쓴다는 것입니다. 농부가 밭을 갈다가 쟁기에 걸리는 것이 있어 보니 아주 귀한 보화입니다. 그것을 얻으려고 집에 가서 전 재산을 모아 밭을 삽니다. 그래서 밭을 사는 것은 그 보화를 얻으려 함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말씀을 읽다가 툭툭 채이는 것이 보화인데 그것을 어떻게 삽니까? 우리의 무엇으로 삽니까? 기도입니다. 기도하는 것이 밭을 사기 위해 전 재산을 파는 것입니다. 우리의 가진 전 재산은 기도입니다. 기도가 돈입니다. 기도로 보화를 사고 캐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은 말씀과 기도로 모든 것이 거룩해진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본래 선한 것이 우리에게 거룩한 역사를 이루어서 우리가 거룩한 삶을 살아가는데, 그것이 꿀송이보다 달고 마음이 기뻐지는 것은 바로 기도 때문입니다. 그래서 말씀과 기도로 온전하여진 사람이 믿는 자들입니다. 3절은 믿는 자들과 진리를 아는 자들을 말하는데, 그들은 동일한 자들입니다. 진리의 말씀을 알고 그것을 가지고 기도하는 사람들이 믿는 사람들입니다.
3) 믿음
한편으로 믿지 않는 자들이 나옵니다. 믿지 않는 자들은 본문 4절, 미혹에 빠진 사람들입니다. 성령의 감동과 감화에 "아멘" 하지 않고 미혹하는 영에 빠진 사람들입니다. 두 번째는 진리의 말씀을 붙들지 않고 불법과 교만에 빠진, 귀신의 가르침을 쫓는 사람입니다. 또한, 외식하는 자들입니다. 양심에 화인 맞은 자들입니다. 그래서 본문에서 우리가 귀하게 볼 것은 말씀과 진리 붙들고 기도하는 자들은 믿는 자들, 신앙의 양심을 지키는 자들이요, 그렇지 않은 자들은 미혹하는 영을 쫓아 다니는 믿지 않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외식하고 귀신과 마귀 사탄의 가르침을 따르는 것입니다. 바로 에덴 동산에서 아담과 하와가 한 것처럼 세속주의, 하나님을 떠나라고 하는 가르침을 따르는 것입니다. 이것에 쫓겨 가는 것이 믿음 없는 자들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믿음 외에는 아무것도 받지 않습니다. 요새 우리가 설교하는 것이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유 1:3)입니다. 믿음은 선물로 주신 것이며 단번에 주신 것입니다(엡 2:8). 그리고 믿음은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입니다(요 1:13).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단번에 우리에게 믿음을 주시고 모든 선한 것을 더불어 단번에 주셨습니다. 그 예수님의 자기 자신을 주신 것과 모든 좋은 것을 주신 것, 그것을 단번에 우리에게 인쳐 주시는데 그것이 성령을 부어 주시는 것이며, 그와 함께 믿음을 주시는 것입니다.
4) 성령의 감동
그러므로 믿음은 우리 편에서 성령의 감동입니다. 믿음을 받으면 성령의 감동이 일어나고 즐거움, 감사, 소망이 생깁니다. 바울과 실라를 깊은 감옥에 가두었는데, 그들이 없어졌습니다. 그러니 감옥의 간수가 스스로 죽을 생각을 합니다. 그때 "주 예수를 믿으라 너와 네 집에 구원을 얻으리라"라고 바울이 말하니 그 간수가 믿습니다. 그리고 바울과 실라가 다시 잡혀 갑니다. 그만큼 자신이 있고 담대한 것입니다. 그래서 핍박을 받고 빌립보를 떠납니다. 그 간수가, 그 죽으려고 했던 사람이 담대함을 얻은 것입니다. 성전 미문에서 기도하러 올라가는 사람들이 있는데, 거기에 들어가지도 못하는 앉은뱅이에게 베드로가 "주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노니 일어나 걸으라"고 하니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우리에게 들어오는 이 성령의 감동은 빛입니다. 이것이 있으면 미혹의 영들이 도망갑니다. 성령의 감동이 우리에게 들러오면 믿음이 부여되고 그 질서대로 우리가 살아갑니다. 성령의 감동이 있으면 성령이 우리에게 밝히 알려주십니다. 다만, 말씀과 기도로 성령이 함께 역사한다는 것입니다. 말씀과 기도로 할 때 우리가 여호와를 인정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처음 우리를 부를 때는 말씀과 기도 없이라도 성령의 역사로 하십니다. 그러나 구원을 받고 나면 하나님의 자녀이므로 그 자녀로 빛을 드러내기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구원을 받으면 말씀과 기도 가운데 성령의 역사를 보이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임하면 오직 말씀이 우리 안에 작용하고 움직입니다. 그리고 말씀이 역사하면 성령이 움직입니다. 언제요? 바로 믿고 기도할 때 말입니다. 홍해가 그저 갈라지지 않았습니다. 여리고도 그저 무너지지 않았습니다. 잠잠히 기도한 것입니다. 성 주위를 돌았습니다. 그것이 여호와의 약속의 말씀 붙들고 기도한 것입니다. 물론 그것도 우리의 공로가 아닙니다. 그렇지 않으면 다 잊어버리고 우리가 했다고 교만합니다. 우리에게 기도하게 하시는 것은 하나님이 준비하여 이루신 것을 인정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기도하지 않고 일이 이루어지면 우리는 단번에 교만해집니다. 밥이 매일 식탁 위에 그저 올려진 것이 아닙니다. 어머니가 차려 주신 것입니다. 이와 같은 것입니다. 우리에게 말씀과 기도 가운데 성령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이것을 칼빈이나 오웬이나 조나단 에드워드 같은 사람들은 신앙의 정서로 표현합니다. 신앙의 정서라는 것은 믿음이 우리 안에 들어오면 모르게 알게 혹은 알게 모르게 우리 안에 질서가 생기는데 그 질서가 무엇이냐 하니, 끝내는 말씀, 기도, 성령의 감화입니다.
3. 신앙의 양심
1) 말씀에 대한 믿음의 반응으로 형성되는 신앙의 양심
그 질서 가운데 중요한 것이 바로 본문 2절의 양심입니다. 신앙의 정서라는 것이 역사하면 성도의 양심이 생깁니다. 인간은 누구라도 양심이 있습니다. 아무리 악한 인간이라도 꽃을 짓밟고 가지 않습니다. 전혀 양심이 없는 자는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신앙의 양심이 있습니다. 세상의 사람들은 신앙의 양심에 화인을 받았습니다. 양심이 불로 태워져 지져진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계신 것을 인정하지 않고, 이 가을에 많은 것을 주셔도 감사하지 않는 것입니다. 어제 우리가 먹은 고구마가 그렇게 맛이 있었습니다. 어릴 때 생고구마를 많이 먹었는데 어제 고구마는 모든 고구마의 맛이 다 들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감사했습니다. 우리에게 신앙의 양심이라는 것은 누구에게라도 있는 신앙이, 믿음이 휘젓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양심에 믿음이 들어와서 컴퓨터를 포맷시키듯 쓸 수 있는 방과 공간을 만드는 것입니다. 신앙이 들어와서 우리 양심을 쓸만한 것으로 공간을 만듭니다.
2) 신앙 양심의 기능
이 신앙의 양심은 하나님의 법정 앞에서 사는 것처럼 날마다 살게 합니다. 양심은 원래 법정의 증인이라고도 합니다. 우리에게 끊임없이 무엇이 옳은지 말해 줍니다. 그런데 우리 안에는 신앙의 양심이 있어서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것과 좋아하시는 것을, 바른 것과 삿된 것을, 정사와 시비를 가리게 합니다. 그것을 우리가 믿어야 합니다. 내 안에 신앙의 양심, 하나님의 법정이 있어서 내가 기도하면 올바른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발을 움직이시는 것입니다. 기도하든 안 하든 내가 결정하는 것 같지만, 기도하고 행동하면 하나님이 내 발을 움직이십니다. 내 양심부터 움직이십니다. '이게 옳으니 해 보자'라는 것을 가능하게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이 바로 귀신과 사탄의 가르침을 따르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도 이단들도 막 나섭니다. 그러나 그들의 양심은 화인맞았으므로 쓸만한 것이 없습니다. 성도는 믿음으로 마음과 신앙의 칸을 만들고 질서를 세웁니다. 우리 양심을 쓸만하게 하는 것입니다. 창고도 이렇게 저렇게 모아 정리하여 구획을 나누면 쓸만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쓸 수 없는 것을 말입니다. 집만 넓으면 뭐합니까? 쓰는 것은 10평밖에 안되면 의미가 없습니다. 우리 양심이 그런 것입니다. 우리 신앙의 양심을 가져야 합니다.
3) 내 능력이 아니라 신앙의 양심을 따르라
신앙의 정서라는 말은 바로 성령이 말씀으로 우리 안에 작용할 때 우리 안에 반응이 일어나는 것인데, 그것 가운데 신앙의 양심을 가지는 것입니다. 이 양심을 가지고 우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라는 것이 본문의 요지입니다. 우리가 양심이 있으면 그것에 따라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이 음식을, 저 음식을 가리고 먹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말입니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와 더불어 증언하노니”(롬 9:1). 누구라도 있는 인간적인 양심을 바라보지 말고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양심, 신앙과 성령과 말씀으로 양심의 역사가 일어남을 바라야 합니다. “깨끗한 양심에 믿음의 비밀을 가진 자라야 할지니”(딤전 3:9).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의 양심을 새롭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화인 맞은 양심, 우리에게 모든 것이 죽어 있는 양심 가운데 새롭게 하셔서 성령의 역사로 믿음의 비밀을 주셨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누구나 가진 인간적인 양심이 아닌, 신앙에 사로잡힌 양심, 내 안에서 끊임없이 옳고 그름을 믿음과 성령 가운데 증언하는 그 양심을 따라야 합니다. 특히 우리는 하나님 앞에 살아야 합니다. 누가 보든지 안 보든지 내가 하나님 앞에 반응하는 것, 그것이 바로 신앙의 양심입니다.
신양의 양심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이것을 속이고 헛되이 여기기 시작하면 능력이 없어집니다. 판단력이 없어지고 외식하게 됩니다. 본문 2절입니다. 양심이 화인을 맞아 거짓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의 삶을 살 때 가장 답답한 것이 외식입니다. 이것은 남이 아닌 내가 답답합니다. 내가 중심이 없고 즐거움이 없고 답답합니다. 거푸집만 있지 살이 안 찝니다. 우리 안의 신앙의 양심에 따라 끊임없이 하나님 앞에 진실되게 해야 합니다.
우리는 자신이 못 하는 것은 나쁘다고 생각하곤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도 어려우면 그 말씀이 나쁘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부모 섬기는 것도 어려우나 나쁜 것이 아닙니다. 원수를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도 어려우나 나쁜 것이 아닙니다. 못하는 것과 나쁜 것을 잘 구별하십시오. 하나님이 나에게 하라고 하시는 것을 내가 못할지라도 '옳다'라고 할 때 기도하게 됩니다. 내가 하지 못하고 하기 귀찮은 것을 다 악한 것으로 여기면 안 됩니다. 오늘날 실용주의 철학처럼 그러면 안 됩니다. 신앙적 실용주의는 큰 문제입니다. 하나님도 나에게 쉽고 좋을 때만 선하다고 하면 안됩니다. 혼인도 하나님이 주신 좋은 것입니다. 하지만 결혼생활이 쉽지는 않습니다. 결혼 안하면 죄 지을 일도 줄어듭니다. 그렇다면 결혼이 잘못된 것입니까? 본문 3절에는 혼인을 금하는 일에 대해서 말합니다. 로마 가톨릭은 독신주의를 주장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명령하신 것이 어렵다고 해서 나쁘다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우리는 말하는 것을 아주 조심해야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말을 안 하고 살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로마 가톨릭은 묵언수행을 2-3년간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우리의 양심에 하나님의 말씀이 떨어져 어렵고 힘들 때, 그것을 나쁘다고 하면 은혜가 떠나갑니다. 편하고 실용적인 것만 좋다고 하면 안됩니다. 땅 끝까지 증인이 되고 듣든지 아니 듣든지 전하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말하는 것이 힘듭니다. 그러니 전하지 말고 살자고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어려운 것이 나쁜 것이 아니요, 오히려 더 좋을 수 있습니다. 쓴 약이 몸에 좋듯 말입니다. 본문의 음식물도 그것입니다. 음식물을 가려 먹으라고 하니 바로 음식을 먹지 말자고 합니다. 그것이 진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진리는, 우리 양심에 받아들일 만하면 어떤 음식이든 먹을 수 있습니다. 제사 음식도 먹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 신앙이 흔들리면 안하면 됩니다. 덕스럽게 해야 합니다. 일단은 안 먹는게 좋을 수 있지만, 중요한 것은 음식이 나쁜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본문은 혼인과 음식에 대해 나쁘게 말하는 사람들을 금하고 있고, 이런 사람들이 불법과 미혹으로 온다고 말씀합니다. 이단들은 신앙의 정서, 성령의 양심의 감동은 없으면서 이거 하라 저거 하지 마라고 하는 것입니다. 스스로 규칙을 만들어 지키게 합니다. 어렵더라도 하나님이 하라는 것은 해야 합니다. 우리 십자가지기교회 성도님들은 그런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원수를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면 내가 할 수 없으니 나쁜 것으로 생각하지 말고, 원수를 사랑하다 언제 뒤통수를 맞고 해를 입을까 생각하지 마십시오. 우리 교회를 다 들어 떠가는 사람이 있더라도 영혼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4) 매일 말씀과 기도로 신앙 양심의 소리를 듣고 순종하여 범사에 양심을 평안케 하라
“음식은 우리를 하나님 앞에 내세우지 못하나니 우리가 먹지 않는다고 해서 더 못사는 것도 아니고 먹는다고 해서 더 잘사는 것도 아니니라”(고전 8:8). 중요한 것은 우리 양심의 평안함입니다. 일단 우리가 매일, 매주 하나님의 명령의 말씀을 깨달아야 합니다. 하루 직장생활 시작하면서 남을 만홀히 여기지 말고 거짓말하지 말자는 말씀을 끝까지 되새겨야 합니다. 까다롭게 신앙생활 한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까다로운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버릇이 되어야 우리가 복을 누립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말씀과 기도로 우리가 거룩해집니다.
말씀과 기도의 가능성을 막지 말라는 것입니다. 할 수 없는 것을 '고르반' 하면서 피하지 말고 말씀과 기도로 붙들고 하나님 앞에 매달려 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내가 할 수 없는 것처럼 보여도 하나님이 하게 하십니다. 그것이 믿음의 백성입니다. 그래서 말씀과 기도로 거룩해진다는 것입니다. 미혹의 영, 불법의 영은 다 좋은 것만 이야기합니다. 광명한 천사 같으나 타락한 거짓 영입니다. 선지자, 목자 같으나 삯군 같습니다. 평강을 전하나 거짓 평강입니다. 사람들을 단단한 반석 위에 세운다고 하나 갈대 위에 세웁니다. 우리는 오직 말씀, 이 땅에서 성도의 삶은 하나입니다. 하나님의 명령과 말씀은 거룩하고 내 마음에 신앙의 양심을 주셔서 옳은 반응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하고 말씀을 들을 때 신앙 양심의 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그때 끝내 그것을 어기지 말도록 해 보십시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항상 아무도 보는 자 없어도 신전의식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서 행할 때 깊이와 넓이와 폭이 생기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곳으로 갈 수 있을 것입니다.
5) 다 이루신 그리스도를 의지하라
예수님이 우리에게 모든 것을 다 이루어 주셨습니다. 꼭 기억할 것은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입니다. “그는 육신으로 나타난 바 되시고 영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으시고 천사들에게 보이시고 만국에서 전파되시고 세상에서 믿은 바 되시고 영광 가운데서 올려지셨느니라”(딤전 3:16). 이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죽으시고 살아나신 그리스도가 그 능력을 우리에게 주심으로 우리가 말씀과 기도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항상 믿음을 가지고 의심하지 말고 세속적인 형식과 의식으로 신앙의 본질을 해치지 말고, 어떤 고난이 오더라도 말씀과 기도로 거룩해진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어떤 일이 말씀과 기도로 거룩해지면서 내 자신도 거룩해진다는 것입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 같이 되지 말아야 합니다. “믿음을 따라 하지 아니하는 것은 다 죄니라”(롬 14:23),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10:31),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전 6:20).
4. 결론
우리 안에 신앙의 양심이 있습니다. 화인 맞은 양심을 하나님이 다시 살리셨습니다. 딱딱한 양심으로 살면 재미가 없고 기쁨이 없고 능력이 없습니다. 내 양심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하나님이 하라는 대로 할 때, 나를 하나님께 맡길 때 소망과 감사와 즐거움이 생깁니다. 하나님이 주신 모든 것을 기도와 말씀으로 받으면 모든 것이 선하고 버릴 것이 없습니다. 고통도 환란도 어떤 어려움도 기도와 말씀 가운데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성도의 삶에 괜히 쓸데 없는 돌덩이 같은 것을 놓아 힘들게 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살아 계시고 모든 것을 아십니다. 그래서 말씀과 기도 가운데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습니다.
금방 찬송한 것처럼 밝을 때 노래하며 어두울 때 기도와 위태할 때 도움을 주께 간구합니다. 저는 이 찬송을 좋아합니다. 또 들으면 잘 외워지게 하십니다. 기도원에서 일할 때 힘드니 찬송을 하게 하셨습니다. 밝을 때 노래와, 어두울 때 기도와, 위태할 때 도움을 주께 간구합니다. 모든 것이 선합니다. 어떤 일이 있더라도 그것으로 인해 오늘 밤 내가 기도하고 있다면 그것은 선합니다. 어떤 일이라도 내가 그것으로 기도한다면 그것은 선한 일임을 아십시오. 아이의 일이든, 사업 때문이든, 어떤 어려움이든 구덩이에 갇힌 요셉의 기도처럼, 에스더의 기도처럼 우리가 그것으로 기도한다면 그것이 선한 일입니다. 이처럼 모든 일을 놓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20181111][십자가지기교회 주일낮예배: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33)]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을 믿음 (딤전 4:1-5) 문병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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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딤전 4:1) 그러나 성령이 밝히 말씀하시기를 후일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따르리라 하셨으니
(딤전 4:2) 자기 양심이 화인을 맞아서 외식함으로 거짓말하는 자들이라
(딤전 4:3) 혼인을 금하고 어떤 음식물은 먹지 말라고 할 터이나 음식물은 하나님이 지으신 바니 믿는 자들과 진리를 아는 자들이 감사함으로 받을 것이니라
(딤전 4:4)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
(딤전 4:5)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라
<녹취록>
1. 하나님이 주신 것은 다 선하다는 것을 말씀과 기도로 안다
우리가 날마다 살아가는 성도의 삶에 있어서 본문 5절은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진다고 합니다. 무엇보다도 우리 자신이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지는 것, 우리 교회에서 종종 말씀드렸듯이 말씀 붙들고 기도하고 기도한 대로 참으며 믿음으로 기다리라고 하는데, 본문에서 그것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지는 것이 성도의 삶의 본질이요 덕목이요 신앙의 근본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입니다. 특히 본문은 우리 자신이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지는 것이라기보다 우리가 행하고 당하는 모든 일이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진다는 말일 것입니다. 그 "모든 것"은 죄는 아닐 것입니다. 4절은 하나님이 지으셔서 주시는 것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것은 일시적으로 힘든 것과 어떨 때는 편하지 않아 악한 것처럼 여겨질지라도, 하나님이 지어서 주신 것과 명령하신 것은 선하다는 것인데, 그것을 말씀과 기도로 안다는 것입니다. 말씀 붙들고 기도해 보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명령하시고 주시는 모든 것이 다 선하고 버릴 것이 없음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2. 말씀, 기도, 믿음, 성령의 감동
1) 말씀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이유는, 말씀이 아니면 우리와 교통하실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간은 하나님을 다 알 수 없습니다. 큰 산은 인간이 한 눈으로 볼 수 없습니다. 하늘도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시공을 지으시고 초월하신 분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알려주시기 위하여 우리에게 말씀을 주십니다. 이 말씀은 살아서 우리에게 역사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에 능력이 생기고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살이 되고 피가 됩니다.
2) 기도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능력을 드러내는 것이 기도입니다. 그래서 기도는 말씀으로 본 보화를 캐내는 것이라고 칼빈이 기독교 강요에서 말한 것입니다. 그래서 말씀이 본 것을 아무리 귀한 것이라도 기도로 캐내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우리가 그것을 쓴다는 것입니다. 농부가 밭을 갈다가 쟁기에 걸리는 것이 있어 보니 아주 귀한 보화입니다. 그것을 얻으려고 집에 가서 전 재산을 모아 밭을 삽니다. 그래서 밭을 사는 것은 그 보화를 얻으려 함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말씀을 읽다가 툭툭 채이는 것이 보화인데 그것을 어떻게 삽니까? 우리의 무엇으로 삽니까? 기도입니다. 기도하는 것이 밭을 사기 위해 전 재산을 파는 것입니다. 우리의 가진 전 재산은 기도입니다. 기도가 돈입니다. 기도로 보화를 사고 캐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은 말씀과 기도로 모든 것이 거룩해진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본래 선한 것이 우리에게 거룩한 역사를 이루어서 우리가 거룩한 삶을 살아가는데, 그것이 꿀송이보다 달고 마음이 기뻐지는 것은 바로 기도 때문입니다. 그래서 말씀과 기도로 온전하여진 사람이 믿는 자들입니다. 3절은 믿는 자들과 진리를 아는 자들을 말하는데, 그들은 동일한 자들입니다. 진리의 말씀을 알고 그것을 가지고 기도하는 사람들이 믿는 사람들입니다.
3) 믿음
한편으로 믿지 않는 자들이 나옵니다. 믿지 않는 자들은 본문 4절, 미혹에 빠진 사람들입니다. 성령의 감동과 감화에 "아멘" 하지 않고 미혹하는 영에 빠진 사람들입니다. 두 번째는 진리의 말씀을 붙들지 않고 불법과 교만에 빠진, 귀신의 가르침을 쫓는 사람입니다. 또한, 외식하는 자들입니다. 양심에 화인 맞은 자들입니다. 그래서 본문에서 우리가 귀하게 볼 것은 말씀과 진리 붙들고 기도하는 자들은 믿는 자들, 신앙의 양심을 지키는 자들이요, 그렇지 않은 자들은 미혹하는 영을 쫓아 다니는 믿지 않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외식하고 귀신과 마귀 사탄의 가르침을 따르는 것입니다. 바로 에덴 동산에서 아담과 하와가 한 것처럼 세속주의, 하나님을 떠나라고 하는 가르침을 따르는 것입니다. 이것에 쫓겨 가는 것이 믿음 없는 자들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믿음 외에는 아무것도 받지 않습니다. 요새 우리가 설교하는 것이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유 1:3)입니다. 믿음은 선물로 주신 것이며 단번에 주신 것입니다(엡 2:8). 그리고 믿음은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입니다(요 1:13).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단번에 우리에게 믿음을 주시고 모든 선한 것을 더불어 단번에 주셨습니다. 그 예수님의 자기 자신을 주신 것과 모든 좋은 것을 주신 것, 그것을 단번에 우리에게 인쳐 주시는데 그것이 성령을 부어 주시는 것이며, 그와 함께 믿음을 주시는 것입니다.
4) 성령의 감동
그러므로 믿음은 우리 편에서 성령의 감동입니다. 믿음을 받으면 성령의 감동이 일어나고 즐거움, 감사, 소망이 생깁니다. 바울과 실라를 깊은 감옥에 가두었는데, 그들이 없어졌습니다. 그러니 감옥의 간수가 스스로 죽을 생각을 합니다. 그때 "주 예수를 믿으라 너와 네 집에 구원을 얻으리라"라고 바울이 말하니 그 간수가 믿습니다. 그리고 바울과 실라가 다시 잡혀 갑니다. 그만큼 자신이 있고 담대한 것입니다. 그래서 핍박을 받고 빌립보를 떠납니다. 그 간수가, 그 죽으려고 했던 사람이 담대함을 얻은 것입니다.
성전 미문에서 기도하러 올라가는 사람들이 있는데, 거기에 들어가지도 못하는 앉은뱅이에게 베드로가 "주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노니 일어나 걸으라"고 하니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우리에게 들어오는 이 성령의 감동은 빛입니다. 이것이 있으면 미혹의 영들이 도망갑니다. 성령의 감동이 우리에게 들러오면 믿음이 부여되고 그 질서대로 우리가 살아갑니다. 성령의 감동이 있으면 성령이 우리에게 밝히 알려주십니다. 다만, 말씀과 기도로 성령이 함께 역사한다는 것입니다. 말씀과 기도로 할 때 우리가 여호와를 인정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처음 우리를 부를 때는 말씀과 기도 없이라도 성령의 역사로 하십니다. 그러나 구원을 받고 나면 하나님의 자녀이므로 그 자녀로 빛을 드러내기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구원을 받으면 말씀과 기도 가운데 성령의 역사를 보이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임하면 오직 말씀이 우리 안에 작용하고 움직입니다. 그리고 말씀이 역사하면 성령이 움직입니다. 언제요? 바로 믿고 기도할 때 말입니다. 홍해가 그저 갈라지지 않았습니다. 여리고도 그저 무너지지 않았습니다. 잠잠히 기도한 것입니다. 성 주위를 돌았습니다. 그것이 여호와의 약속의 말씀 붙들고 기도한 것입니다. 물론 그것도 우리의 공로가 아닙니다. 그렇지 않으면 다 잊어버리고 우리가 했다고 교만합니다. 우리에게 기도하게 하시는 것은 하나님이 준비하여 이루신 것을 인정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기도하지 않고 일이 이루어지면 우리는 단번에 교만해집니다. 밥이 매일 식탁 위에 그저 올려진 것이 아닙니다. 어머니가 차려 주신 것입니다. 이와 같은 것입니다. 우리에게 말씀과 기도 가운데 성령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이것을 칼빈이나 오웬이나 조나단 에드워드 같은 사람들은 신앙의 정서로 표현합니다. 신앙의 정서라는 것은 믿음이 우리 안에 들어오면 모르게 알게 혹은 알게 모르게 우리 안에 질서가 생기는데 그 질서가 무엇이냐 하니, 끝내는 말씀, 기도, 성령의 감화입니다.
3. 신앙의 양심
1) 말씀에 대한 믿음의 반응으로 형성되는 신앙의 양심
그 질서 가운데 중요한 것이 바로 본문 2절의 양심입니다. 신앙의 정서라는 것이 역사하면 성도의 양심이 생깁니다. 인간은 누구라도 양심이 있습니다. 아무리 악한 인간이라도 꽃을 짓밟고 가지 않습니다. 전혀 양심이 없는 자는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신앙의 양심이 있습니다. 세상의 사람들은 신앙의 양심에 화인을 받았습니다. 양심이 불로 태워져 지져진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계신 것을 인정하지 않고, 이 가을에 많은 것을 주셔도 감사하지 않는 것입니다. 어제 우리가 먹은 고구마가 그렇게 맛이 있었습니다. 어릴 때 생고구마를 많이 먹었는데 어제 고구마는 모든 고구마의 맛이 다 들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감사했습니다. 우리에게 신앙의 양심이라는 것은 누구에게라도 있는 신앙이, 믿음이 휘젓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양심에 믿음이 들어와서 컴퓨터를 포맷시키듯 쓸 수 있는 방과 공간을 만드는 것입니다. 신앙이 들어와서 우리 양심을 쓸만한 것으로 공간을 만듭니다.
2) 신앙 양심의 기능
이 신앙의 양심은 하나님의 법정 앞에서 사는 것처럼 날마다 살게 합니다. 양심은 원래 법정의 증인이라고도 합니다. 우리에게 끊임없이 무엇이 옳은지 말해 줍니다. 그런데 우리 안에는 신앙의 양심이 있어서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것과 좋아하시는 것을, 바른 것과 삿된 것을, 정사와 시비를 가리게 합니다. 그것을 우리가 믿어야 합니다. 내 안에 신앙의 양심, 하나님의 법정이 있어서 내가 기도하면 올바른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발을 움직이시는 것입니다. 기도하든 안 하든 내가 결정하는 것 같지만, 기도하고 행동하면 하나님이 내 발을 움직이십니다. 내 양심부터 움직이십니다. '이게 옳으니 해 보자'라는 것을 가능하게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이 바로 귀신과 사탄의 가르침을 따르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도 이단들도 막 나섭니다. 그러나 그들의 양심은 화인맞았으므로 쓸만한 것이 없습니다. 성도는 믿음으로 마음과 신앙의 칸을 만들고 질서를 세웁니다. 우리 양심을 쓸만하게 하는 것입니다. 창고도 이렇게 저렇게 모아 정리하여 구획을 나누면 쓸만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쓸 수 없는 것을 말입니다. 집만 넓으면 뭐합니까? 쓰는 것은 10평밖에 안되면 의미가 없습니다. 우리 양심이 그런 것입니다. 우리 신앙의 양심을 가져야 합니다.
3) 내 능력이 아니라 신앙의 양심을 따르라
신앙의 정서라는 말은 바로 성령이 말씀으로 우리 안에 작용할 때 우리 안에 반응이 일어나는 것인데, 그것 가운데 신앙의 양심을 가지는 것입니다. 이 양심을 가지고 우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라는 것이 본문의 요지입니다. 우리가 양심이 있으면 그것에 따라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이 음식을, 저 음식을 가리고 먹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말입니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와 더불어 증언하노니”(롬 9:1). 누구라도 있는 인간적인 양심을 바라보지 말고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양심, 신앙과 성령과 말씀으로 양심의 역사가 일어남을 바라야 합니다. “깨끗한 양심에 믿음의 비밀을 가진 자라야 할지니”(딤전 3:9).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의 양심을 새롭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화인 맞은 양심, 우리에게 모든 것이 죽어 있는 양심 가운데 새롭게 하셔서 성령의 역사로 믿음의 비밀을 주셨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누구나 가진 인간적인 양심이 아닌, 신앙에 사로잡힌 양심, 내 안에서 끊임없이 옳고 그름을 믿음과 성령 가운데 증언하는 그 양심을 따라야 합니다. 특히 우리는 하나님 앞에 살아야 합니다. 누가 보든지 안 보든지 내가 하나님 앞에 반응하는 것, 그것이 바로 신앙의 양심입니다.
신양의 양심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이것을 속이고 헛되이 여기기 시작하면 능력이 없어집니다. 판단력이 없어지고 외식하게 됩니다. 본문 2절입니다. 양심이 화인을 맞아 거짓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의 삶을 살 때 가장 답답한 것이 외식입니다. 이것은 남이 아닌 내가 답답합니다. 내가 중심이 없고 즐거움이 없고 답답합니다. 거푸집만 있지 살이 안 찝니다. 우리 안의 신앙의 양심에 따라 끊임없이 하나님 앞에 진실되게 해야 합니다.
우리는 자신이 못 하는 것은 나쁘다고 생각하곤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도 어려우면 그 말씀이 나쁘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부모 섬기는 것도 어려우나 나쁜 것이 아닙니다. 원수를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도 어려우나 나쁜 것이 아닙니다. 못하는 것과 나쁜 것을 잘 구별하십시오. 하나님이 나에게 하라고 하시는 것을 내가 못할지라도 '옳다'라고 할 때 기도하게 됩니다. 내가 하지 못하고 하기 귀찮은 것을 다 악한 것으로 여기면 안 됩니다. 오늘날 실용주의 철학처럼 그러면 안 됩니다. 신앙적 실용주의는 큰 문제입니다. 하나님도 나에게 쉽고 좋을 때만 선하다고 하면 안됩니다. 혼인도 하나님이 주신 좋은 것입니다. 하지만 결혼생활이 쉽지는 않습니다. 결혼 안하면 죄 지을 일도 줄어듭니다. 그렇다면 결혼이 잘못된 것입니까? 본문 3절에는 혼인을 금하는 일에 대해서 말합니다. 로마 가톨릭은 독신주의를 주장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명령하신 것이 어렵다고 해서 나쁘다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우리는 말하는 것을 아주 조심해야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말을 안 하고 살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로마 가톨릭은 묵언수행을 2-3년간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우리의 양심에 하나님의 말씀이 떨어져 어렵고 힘들 때, 그것을 나쁘다고 하면 은혜가 떠나갑니다. 편하고 실용적인 것만 좋다고 하면 안됩니다. 땅 끝까지 증인이 되고 듣든지 아니 듣든지 전하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말하는 것이 힘듭니다. 그러니 전하지 말고 살자고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어려운 것이 나쁜 것이 아니요, 오히려 더 좋을 수 있습니다. 쓴 약이 몸에 좋듯 말입니다. 본문의 음식물도 그것입니다. 음식물을 가려 먹으라고 하니 바로 음식을 먹지 말자고 합니다. 그것이 진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진리는, 우리 양심에 받아들일 만하면 어떤 음식이든 먹을 수 있습니다. 제사 음식도 먹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 신앙이 흔들리면 안하면 됩니다. 덕스럽게 해야 합니다. 일단은 안 먹는게 좋을 수 있지만, 중요한 것은 음식이 나쁜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본문은 혼인과 음식에 대해 나쁘게 말하는 사람들을 금하고 있고, 이런 사람들이 불법과 미혹으로 온다고 말씀합니다. 이단들은 신앙의 정서, 성령의 양심의 감동은 없으면서 이거 하라 저거 하지 마라고 하는 것입니다. 스스로 규칙을 만들어 지키게 합니다. 어렵더라도 하나님이 하라는 것은 해야 합니다. 우리 십자가지기교회 성도님들은 그런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원수를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면 내가 할 수 없으니 나쁜 것으로 생각하지 말고, 원수를 사랑하다 언제 뒤통수를 맞고 해를 입을까 생각하지 마십시오. 우리 교회를 다 들어 떠가는 사람이 있더라도 영혼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4) 매일 말씀과 기도로 신앙 양심의 소리를 듣고 순종하여 범사에 양심을 평안케 하라
“음식은 우리를 하나님 앞에 내세우지 못하나니 우리가 먹지 않는다고 해서 더 못사는 것도 아니고 먹는다고 해서 더 잘사는 것도 아니니라”(고전 8:8). 중요한 것은 우리 양심의 평안함입니다. 일단 우리가 매일, 매주 하나님의 명령의 말씀을 깨달아야 합니다. 하루 직장생활 시작하면서 남을 만홀히 여기지 말고 거짓말하지 말자는 말씀을 끝까지 되새겨야 합니다. 까다롭게 신앙생활 한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까다로운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버릇이 되어야 우리가 복을 누립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말씀과 기도로 우리가 거룩해집니다.
말씀과 기도의 가능성을 막지 말라는 것입니다. 할 수 없는 것을 '고르반' 하면서 피하지 말고 말씀과 기도로 붙들고 하나님 앞에 매달려 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내가 할 수 없는 것처럼 보여도 하나님이 하게 하십니다. 그것이 믿음의 백성입니다. 그래서 말씀과 기도로 거룩해진다는 것입니다. 미혹의 영, 불법의 영은 다 좋은 것만 이야기합니다. 광명한 천사 같으나 타락한 거짓 영입니다. 선지자, 목자 같으나 삯군 같습니다. 평강을 전하나 거짓 평강입니다. 사람들을 단단한 반석 위에 세운다고 하나 갈대 위에 세웁니다. 우리는 오직 말씀, 이 땅에서 성도의 삶은 하나입니다. 하나님의 명령과 말씀은 거룩하고 내 마음에 신앙의 양심을 주셔서 옳은 반응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하고 말씀을 들을 때 신앙 양심의 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그때 끝내 그것을 어기지 말도록 해 보십시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항상 아무도 보는 자 없어도 신전의식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서 행할 때 깊이와 넓이와 폭이 생기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곳으로 갈 수 있을 것입니다.
5) 다 이루신 그리스도를 의지하라
예수님이 우리에게 모든 것을 다 이루어 주셨습니다. 꼭 기억할 것은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입니다. “그는 육신으로 나타난 바 되시고 영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으시고 천사들에게 보이시고 만국에서 전파되시고 세상에서 믿은 바 되시고 영광 가운데서 올려지셨느니라”(딤전 3:16). 이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죽으시고 살아나신 그리스도가 그 능력을 우리에게 주심으로 우리가 말씀과 기도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항상 믿음을 가지고 의심하지 말고 세속적인 형식과 의식으로 신앙의 본질을 해치지 말고, 어떤 고난이 오더라도 말씀과 기도로 거룩해진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어떤 일이 말씀과 기도로 거룩해지면서 내 자신도 거룩해진다는 것입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 같이 되지 말아야 합니다. “믿음을 따라 하지 아니하는 것은 다 죄니라”(롬 14:23),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10:31),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전 6:20).
4. 결론
우리 안에 신앙의 양심이 있습니다. 화인 맞은 양심을 하나님이 다시 살리셨습니다. 딱딱한 양심으로 살면 재미가 없고 기쁨이 없고 능력이 없습니다. 내 양심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하나님이 하라는 대로 할 때, 나를 하나님께 맡길 때 소망과 감사와 즐거움이 생깁니다. 하나님이 주신 모든 것을 기도와 말씀으로 받으면 모든 것이 선하고 버릴 것이 없습니다. 고통도 환란도 어떤 어려움도 기도와 말씀 가운데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성도의 삶에 괜히 쓸데 없는 돌덩이 같은 것을 놓아 힘들게 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살아 계시고 모든 것을 아십니다. 그래서 말씀과 기도 가운데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습니다.
금방 찬송한 것처럼 밝을 때 노래하며 어두울 때 기도와 위태할 때 도움을 주께 간구합니다. 저는 이 찬송을 좋아합니다. 또 들으면 잘 외워지게 하십니다. 기도원에서 일할 때 힘드니 찬송을 하게 하셨습니다. 밝을 때 노래와, 어두울 때 기도와, 위태할 때 도움을 주께 간구합니다. 모든 것이 선합니다. 어떤 일이 있더라도 그것으로 인해 오늘 밤 내가 기도하고 있다면 그것은 선합니다. 어떤 일이라도 내가 그것으로 기도한다면 그것은 선한 일임을 아십시오. 아이의 일이든, 사업 때문이든, 어떤 어려움이든 구덩이에 갇힌 요셉의 기도처럼, 에스더의 기도처럼 우리가 그것으로 기도한다면 그것이 선한 일입니다. 이처럼 모든 일을 놓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