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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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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125][십자​가지기교회 주일낮예배: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34)] 주님의 '예'에 '아멘' 하는 믿음 (고후 1:18-24) 문병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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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125][십자가지기교회 주일낮예배: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34)] 주님의 '예'에 '아멘' 하는 믿음 (고후 1:18-24) 문병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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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후 1:18)하나님은 미쁘시니라 우리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예 하고 아니라 함이 없노라 
(고후 1:19)우리 곧 나와 실루아노와 디모데로 말미암아 너희 가운데 전파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예 하고 아니라 함이 되지 아니하셨으니 그에게는 예만 되었느니라 
(고후 1:20)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
(고후 1:21)우리를 너희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굳건하게 하시고 우리에게 기름을 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고후 1:22)그가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우리 마음에 성령을 주셨느니라 
(고후 1:23)○내가 내 목숨을 걸고 하나님을 불러 증언하시게 하노니 내가 다시 고린도에 가지 아니한 것은 너희를 아끼려 함이라 


(고후 1:24)우리가 너희 믿음을 주관하려는 것이 아니요 오직 너희 기쁨을 돕는 자가 되려 함이니 이는 너희가 믿음에 섰음이라



<녹취록> 



1. 하나님의 미쁘심


우리는 이 가을에 하나님의 약속이 정확하게 성취되는 것을 목도하고 있습니다. 연초에 개별적으로 약속하신 것이 아니지만 가을에 꼭 열매를 주신다는 것은 하나님의 불변하는 약속입니다. 노아와 언약을 맺은 대로 이제 홍수로 멸하지 않고 주님 오실 때까지는 사시와 징조와 일자와 모든 자연의 운행이 온전할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그래서 이제 가을에 열매를 맺고 정확히 하나님이 약속을 지키시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국어사전을 찾아보지 않고 혼자 괜히 생각해 본 것인데, 열매라는 말이 좋은 것 같습니다. 열린다는 말과 맺힌다는 말이 저한테, 물론 복잡하게 생각하면 더 볼 수 있으나, 쉽게 생각해 보니 그렇게 된 말이 좋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처음에 봄에 싹이 나고 움이 돋고 이제 작은 열매가 맺히니 해마다 참 신기합니다.
감이든 사과든 배든 작을 때 보면 어린아이처럼 귀엽고 앙증맞습니다. 꽃도 예쁘지만 열매도 참 좋습니다. 꽃이 외향적이게 펼쳐진다면 열매는 내성적이게 뭔가 닫혀 있고 맺혀 있는 것 같아, 볼 때 평화가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어디까지 될지 알 수 없는 잠재성이 있습니다. 씨 하나가 남미로 가서 지금 뭐가 되었다, 목화씨가 들어와서 우리가 고려시대에 옷을 입었다는 말도 합니다. 그것이 바로 열매입니다. 사계절, 농부의 땀과 눈물을 생각하면 우리가 과일을 하나 먹는 것도 얼마나 귀한 것입니까. 씨는 사각하고 과육은 폭신합니다. 정말 귀한 것입니다. 자연의 열매를 통해 하나님은 끊임없이 우리를 깨닫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말입니다.
우리가 너무 나다니기 때문에 빛을 즐거워하지 않는데 한곳에 앉아있으면 운행이 보입니다. 그래서 옛날 사람들은 멀리 차타고 안 다니니 달이 옮겨 가는 게 보였다는 얘기를 책에서 봤습니다. 아마 현대인들이라면 별자리를 공부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별이 보이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옛 사람들은 한 자리에 있으니 뭔가 보이는 것입니다. 우리도 사실상 하나님 앞에 잠잠히 있고 묵상하면 하나님이 움직이시는 게 보입니다. 내가 너무 부산스럽고 움직이면 안보입니다. 자연도 그렇습니다.

그런데 사실 자연을 통해서도 하나님은 우리에게 정확한 약속을 지키시는 분임을 알려 주십니다. 우리가 덜 가지고 더 가진 것을 차치하고 하나님이 얼마나 이 가을에, 이제 11월의 마지막 주인데, 얼마나 귀하게 우리에게 주시는지 알 수 있습니다. 



2. 구원 약속에 미쁘신 하나님께 "예" 하라


그러나 이런 자연적인 것을 가지고는 하늘나라에 갈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영적인 것, 영생의 열매를 주십니다. 그런데 이 열매도 그저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조건을 내려 주셔서 수분과 양분과 농부의 땀으로 가을의 열매가 맺힙니다. 우리 영생의 열매는 오직 하나 예수 그리스도의 “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 “하나님은 미쁘시니라...”(고후 1:18). 미쁘다는 말은 신실하다는 말입니다. 믿음에서 나온 말입니다. 하나님은 'faithful,' 믿을 만하다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자연의 운행을 통해서도 믿을 만합니다. 겨울이 올까 봄이 올까 의심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봄은 그대로 온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자연이라고도 합니다. 우리 구원도 사실상 신실하신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을 이루어 주십니다. 본문 20절은 '하나님의 약속'이라고 정확히 말합니다. 하나님은 약속하시고 정확히 지켜 주시는데 자연의 약속을 통해 우리 구원의 약속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자연의 정확한 약속이 있듯, 해와 달의 운행과 같이, 어떻게 보면 이것보다 더 정확한, 영원하신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를 구원해 주시는 신실하심과 미쁘심은 우리에게 영원불변합니다. 그러므로 오늘 하나님은 미쁘시다는 본문 18절은 구원에 대한 본문 20절, 하나님의 약속이 우리에게 정확히 이루어지는 것으로 믿는 것입니다. 스스로 뜻하신 것을 이루심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든지 하나님을 향하여 "예"라고 하라고 합니다.
봄이 올 것을 의심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저녁에 달이 뜰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자연에 대해서는 "예" 합니다. 과학자들도 그렇습니다. 하물며 구원에 대해서는 과연 그럴지 의심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본문은 "예"가 되고 "아니라" 함이 없다고 합니다. 보이지 않는 것이 더 영원하고 확실하고 천국에 가져갈 것이라고 하는데, 이것에 대해 "예"라고 하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성향을 보면 보이고 들리는 것에 "예"를 잘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사물을, 혹은 일을 잘 믿습니다. 각양 각색의 사람들이 자기의 믿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가장 확실히 "예" 할 것은 영적인 구원의 약속입니다. 구원의 약속에 "예" 하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것을 할 수 있는 것, 우리 구원에 대한 "예"는 바로 예수님의 "예"가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1)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의 "예"에 "아멘" 하라


예수님의 "예"는 바로 순종입니다. 본문은 예수님의 "예"가 19절에서 20절 사이에 세 번 나옵니다. — “너희 가운데 전파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예 하고 아니라 함이 되지 아니하셨으니 그에게는 예만 되었느니라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고후 1:19-20). 주님의 "예"는 바로 주님의 순종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예"를 세 번 했다는 것인데 이것은 완전하다는 의미입니다. 우리도 "예" 해야 합니다. "예"가 네 번 나오는데, 세 번은 예수님이 "예" 한 것을, 나머지는 우리도 "예" 할 것을 말씀합니다. 예수님의 "예"는 순종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예"는 우리의 공로가 아닙니다.
우리는 이 가을에 열매를 먹기 바쁘지 열매를 맺게 하지 않습니다. 또한 따먹는 것조차 수고라고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하신 일을 인정하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예"는 순종의 "예"로서 우리를 끝까지 사랑하셔서 자기를 드리기까지 순종하신 것이고, 우리의 "예"는 주님의 "예"가 나의 "예"가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하셨다는 것입니다. 세월 지나갈수록 의지할 것 밖에 없다는 찬송도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예"는 "아멘"이라는 것입니다. —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고후 1:20). 주님이 하신 것이 내 것이 되었다고 인정하고 송축하고 감사하고 영광돌리고, 그래서 우리의 "예"는 "아멘"입니다. 나의 공로가 앞장서서 내가 무엇인가 해보겠다는 "예"가 아니라 주님이 다 하셨으니 저도 하라면 해 보겠다는 "예"입니다. 주님이 다 이루신 것을 인정하는 것이 바로 "아멘"인 것입니다. 


2) 교만과 헛된 자랑을 버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예"에 "아멘" 하라


본문의 요지는 이것인데, 우리의 기쁨은 “그리스도가 '예'가 되시고 그리스도의 '예'에 대해 우리가 '예'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아멘"입니다. 그리스도는 이 땅에 은혜 받으러 오시지 않았습니다. 배고프고 잘 곳이 없고 피곤하셨습니다. 끝까지 자신을 빻아서 우리를 위해 자신을 드리셨습니다. 이것에 대해 "예" 하신 것입니다. 주님의 "예"가 세 번, 완전한 것으로 나오는 것입니다. 본문 24절은 ‘너희 기쁨을 돕는 자가 사도’라고 합니다. 본문의 배경은 분쟁이 많은 고린도교회의 상황입니다. 이 가운데 사람을 따라 파를 나누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는 너희의 기쁨을 돕는 자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바울, 베드로, 아볼로는 모두 성도들의 기쁨을 돕는 자들이고, 그것은 그리스도에게서 생긴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은 빌라델비아교회, 서머나교회를 말합니다. 서머나교회는 핍박이 많았으나 실상은 부요한 교회라고 말합니다. 핍박이 많으면 세상은 딱하다고 생각합니다. 물질적으로 부유한 교회는 칭찬 받는 교회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요한계시록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핍박이 많으나 부요한 교회라고 합니다. 우리 성도님들은 이런 날렵함이 있기를 바랍니다. 조금 궁해 보이더라도 기쁨이 있는 자들입니다. 그런 자들이 진정한 부자입니다. 뭔가 거추장스럽고 비대한 부자가 아닌, 부자 같지 않으나 진짜 부유한 자 말입니다.
빌라델비아교회는 인내의 말씀을 지킨 것으로 칭찬을 받습니다. 천국의 열쇠, 열고 받는 권세를 받는다고 합니다. 데살로니가교회도 믿음과 소망의 인내로 칭찬을 받습니다. 그렇다면 가장 사랑을 받은 교회는 어떤 교회인가요? 그것은 바로 고린도교회입니다. 이 교회는 분쟁과 환란이 가장 많았습니다. 사도 바울을 심지어 사도로 인정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 “... 내가 구하는 것은 너희의 재물이 아니요 오직 너희니라 ... 내가 너희 영혼을 위하여 크게 기뻐하므로 재물을 사용하고 또 내 자신까지도 내어 주리니”(고후12:14). 마지막 주님이 오실 때 성도가 바로 서는 것, 그것이 사도의 열매인 것입니다. 고린도교회는 부유했습니다. 교회가 있는 지역이 상업의 요충지였기 때문입니다. 그런 바울이 그들에게 가려다가 두 번이나 길이 막혀 세 번째 가려고 하자 이에 대해 돈을 가지러 온다고 의심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말합니다. — “육체를 따라 계획하여 예 예 하면서 아니라 아니라 하는 일이 내게 있겠느냐”(고후 1:17). 하나님은 우리가 봐서 좋은 일이라도 막게 하십니다. 그러나 그것은 더 큰 일을 하시기 위함입니다. 우리가 전도할 때도 열매가 많으면 좋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아도 때가 되면 하나님이 일꾼들에게 기쁨을 주십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약한 것을 자랑합니다. 즉 고린도교회의 문제로 교만을 든 것입니다. — “내가 부득불 자랑할진대 내가 약한 것을 자랑하리라”(고후 11:30). “...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고후 12:9-10).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구유에 가장 연약한 가지로 오신 것처럼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에게 스스로 높아지지 말라고 합니다. 우리는 아무 자랑할 것이 없다고 말합니다. — “...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냐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 같이 자랑하느냐”(고전 4:7). 어찌 우리가 하나님 앞에 "예" 했다고 생각하냐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순종하신 공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는 말입니다. 저도 그렇습니다. 저에게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죄인 중에 괴수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사용하십니다. 바울이, 아볼로가 온전하겠습니까? 아볼로도 세속 철학을 했던 사람입니다. 예수님에 대해 그릇된 생각을 가졌던 자입니다. 베드로도 온전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들을 쓰십니다. 고린도교회에 대해 이것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내 은사도 능력도 자녀도 직장도 전부 하나님이 주신 것인데 어찌 그것을 너 스스로 취한 것처럼 자랑하느냐고 말하는 것입니다. — “...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는 외인이요 ...”(엡 2:12). 그런데 본문 20절은 그 약속이 우리의 것이 되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은 그리스도 안에서 얼마든지 "예"가 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나의 "예"가 아닙니다. 예수님이 세 번이나 순종하신 그 순종에 우리가 "예"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다른 말로 "아멘"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순종은 "아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의 순종은 그야말로 피를 쏟고 온갖 고난을 당하는 것이라면, 우리는 그저 믿음과 은혜로 "예" 하여 기쁨을 누리는 것입니다.


3) 하나님의 미쁘심: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모든 의를 다 이루심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됩니다. 그것은 언약입니다. 구약의 280번 약속된 언약이 얼마든지, 즉 충만하고 완전하게 "예"가 되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주님에게 죄가 없는 자가 어찌 죄 사함과 회개의 세례를 받는지 물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이렇게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다고 하십니다. 죄가 없으신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모든 죄를 다 가져가셔야 하므로 그것을 이루는 것이 합당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 “... 다 이루었다 ...”(요 19:30). 그러므로 예수님의 "예" 하심은 십자가 상에서 다 이루었다 하신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런즉 우리가 아멘 하여”라고 하는 것입니다. 구원의 약속은 하나님이 친히 하신 것이므로 친히 이루십니다.
하나님의 미쁘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미쁨이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 약속을 지킬 수 없습니다. 내가 나 자신에게조차 그렇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미쁘십니다. 그 존재와 뜻과 행사가 완전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유일하게 하나님만 바라봐야 합니다. 그 아들 예수를 보내셔서 우리가 이제 예수 안에서 얼마든지 "예"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바라보고 그에게 영광돌리고 송축하면 우리가 그 완전에 동참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맛보는 것, 그것이 예배고 찬송입니다. 그리고 완전히, 온전히 그 삶을 누리는 것이 천국의 삶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미쁘십니다. 바로 예수님이 우리를 위하여 다 이루었습니다.


4) 우리의 "예": 겸손과 순종과 자기부인의 믿음


그래서 우리는 "예" 합니다. 빨리 일찍 "예" 합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예"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할 수 없는데 "예" 하는 것입니다. 울며 눈물로 씨를 뿌리는 것입니다. 저도 그렇습니다. 제가 어찌 감히 말씀을 전하고 전도자가 됩니까.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를 의지하여 그렇게 합니다. 우리 십자가지기교회는 이런 "예"가 가득 차는 교회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하는 것입니다. 교회에는 "예"가 가득해야 합니다. 안 된다는 것은 세상 사람들도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라는 은혜는 하나님이 믿는 자들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일찍 일어나서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산으로 갑니다. 모세가 일찍 일어나 호렙산으로 갑니다. 마태가 돈을 세던 회관을 떠납니다. 엘리사가 몰던 소를 버려두고 갑니다. 베드로가 그물을 던지고 갑니다. 나아만이 일곱 번 요단강에 들어갑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침묵하여 여리고 성을 일곱 번 돕니다. 이 모든 것이 성도의 "예"입니다.
이런 순종이 있어야 성도의 능력이 있습니다. 우리는 "아니오"가 아닌 "예"입니다. 할 수 있습니다. 괜히 감사하고 괜히 "예" 합니다. 직장에서도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고 부끄럽지 않거든 "예" 하십시오. "예"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하나님의 미쁘심을 믿을 때 하는 것입니다. 내 안에 "예"가 퍼져야 합니다. "아니오"가 나를 위축시키면 안됩니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십니다.
"예"가 우리 안에 울려 퍼지려면 나를 부인해야 합니다. 본문 17절처럼 우리는 약속에 대해 다 외인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약속을 받은 언약의 백성들입니다. 다만 우리가 힘쓸 것은 더러운 것, 추한 것을 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서 올곧게 행하는 것입니다. 거추장스러운 부요함이 아니라 핍박을 받고 환란이 있어도 실상은 내가 부유한 자라고 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기름진 철학, 번드르르한 이론이 아니라 하나님의 소박한 말씀, 그 말씀을 붙들고 은밀한 때에 기도하여 "예" 하는 우리가 실상 부요한 자입니다. 저는 우리 성도님들 고관대작, 부유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멋있게 그러기를 바랍니다. 말씀대로 살면 그 많은 재산을 가지고 감옥에 가고 추해지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5) 우리의 모든 죄와 악을 짊어 가져가신 예수 그리스도께 "아멘" 하라


예수님은 자기 자신을 다 드려서 당하시고 순종하시는 공로를 우리 것으로 삼아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아멘" 하는 것입니다. 내가 잉태된 것도 예수의 것으로 인한 것입니다. 잉태 때부터 있던 죄까지도 그가 가져가셨습니다. 우리가 왕따 되는 것 같은 때에도 예수님의 임마누엘이 있습니다. 억울하게 남에게 고난을 당한다고 해도 예수님의 십자가를 보면 다 이길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4대 악한들에게 재판을 받으셨습니다. 안나스, 가야바, 헤롯, 빌라도. 대표적인 세상의 악인들에게 재판을 죄 없이 받으셨습니다. 이러한 일이 벌어지는 곳이 이 땅입니다. 하나도 죄가 없어도 예수님은 그 죄 덩어리들 앞에서 재판을 받고 계십니다. 바로 우리가 이 땅에서 살 때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다 하셨다는 것이요, 그러므로 무엇이든 예수님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가 찔림은 내 허물을 위함입니다.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으로 인함입니다. 그가 징계받으므로 우리가 화평을 누립니다. 내 허물이 있을 때, 나의 죄악으로 찔릴 때, 우리에게 화평이 없을 때 주님을 바라봐야 합니다.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가 나음을 얻었습니다. 부유하신 자로서 가난한 자가 되신 예수님으로 인해 우리가 부유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미련할 때 그가 우리의 지혜가 될 것이요 우리가 없을 때 우리의 부요함이 되십니다. 예수님이 "예"가 되시고 우리는 "아멘" 할 뿐입니다. 그럴 때 고린도교회에 화평이 온다는 것입니다.



3. 결론


교회에 대해 딱 한 가지만 말한다면, 내가 없고 주님만 있는 곳입니다. 그게 우리 교회입니다. 그때 우리에게 평화와 삶의 즐거움, 기쁨과 기름 부으심, 인침과 보증이 있는 것입니다. 성령의 기름부음과 인침과 확증하심이 있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다 하셨다' 할 때 우리 안에 기쁨이 있고 그것으로 우리가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은 사도들이 성도를 주관하는 것이 아니라 기쁨을 돕는 자가 될 뿐이라고 한 것입니다. 기쁨의 근원은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이 "예" 하셨습니다. 우리가 살아갈 때 모든 것을, 종일토록 얼마든지 "예" 하기를 바랍니다. 나의 고민과 땀도 예수님께 맡겨야 합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이루셨기 때문입니다. 이 고백과 "아멘"이 가득차면 우리가 하나님 앞에 칭찬받고 아름다운 교회가 될 것을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