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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209][십자가지기교회 주일낮예배: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36)] 은혜가 왕 노릇 함을 믿음 (롬 5:17-21) 문병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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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209][십자가지기교회 주일낮예배: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36)] 은혜가 왕 노릇 함을 믿음 (롬 5:17-21) 문병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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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롬 5:17)한 사람의 범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그 한 사람을 통하여 왕 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은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롬 5:18)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 같이 한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롬 5:19)한 사람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이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롬 5:20)율법이 들어온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롬 5:21)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 한 것 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라






 










<녹취록> 


1.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은혜의 왕 노릇


로마서 5장 12-21절, 고린도후서 5장 14-21절 말씀은 성경 전체를 통해 언약이 무엇인지에 대해 가장 명확하고 상세하게 가르쳐 줍니다. 로마서 말씀 중 오늘 특별히 17-21절의 말씀을 통해 우리는 어떻게 은혜가 왕 노릇 하는 삶을 살게 되는지 성도의 삶을 특별히 살펴보고자 합니다. 오늘 말씀에 보면 '한 사람'이라는 단어가 계속해서 반복됩니다. 그러나 이 '한 사람'은 둘을 지칭합니다. 첫 번째는 아담이요 두 번째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한 사람, 아담으로 말미암아 죄가 들어와서 모든 사람이 죄인이 되고 죄가 왕 노릇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또 한 사람 예수가 이 땅에 오셔서 의를 행하므로, 이제 그를 믿는 은혜의 선물을 넘치게 받은 자들에 있어서 의가 왕 노릇 하게 되었습니다. 죄가 왕 노릇 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것을 오늘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21절은 '은혜가 왕 노릇 한다'고 합니다. 어떻게 은혜가 왕 노릇을 하느냐,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 말미암습니다. 그 은혜가 왕 노릇 해서 낳는 결과가 바로 영생이라고 21절이 말하고 있습니다. 은혜가 왕 노릇 하는데,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 말미암고 그 결과는 영생이니 우리가 살아가는 것이 은혜가 왕 노릇 한다는 것입니다. 17절은 한 가지를 더 말하는데, 즉 은혜의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은 자들이 왕 노릇 한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말할 나위 없이 '우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생명 안에서입니다. 그래서 본문에서 '은혜가 왕 노릇 한다'는 의미는 '예수 그리스도의 의의 선물을 받은 자들이 왕 노릇 한다'는 것입니다.



2. 예수님의 왕 직


성경에서 왕은 남에게 군림하거나 명령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베푸는 사람, 자기 자신을 남에게 주어서 그 다른 사람을 이끄는 사람이 성경에서 말하는 왕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왕이 되심은 그가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받아내고 착취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섬김을 받기 위해서 오신 것이 아니라 섬기려고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다 주셨습니다. 끝까지 사랑하시면서 자기 자신을 다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왕 직은 자기 자신을 주시고 이제는 보좌 우편에서 보혜사 성령을 주시며 그 가운데 자기 자신을 우리에게 주셔서 우리 안에서 사시는 것입니다. 즉, 우리와 더불어 드시고 호흡하시고 걱정하시고 위로하시는 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왕 직입니다. 세상에서도 성군이 있다면 그것은 왕이 없는 것처럼 느껴지게 하는 자입니다. 왕이 행차하면 백성이 난리나고 힘들어 하는 것이 아니라 없는 것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왕은 그 정도의 소극적인 왕이 아니라, 우리와 더불어 마시고 세세한 것도 염려하시며 시절을 좇아 필요한 것을 제공하시는 분입니다.



3.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왕 노릇: 은혜의 왕 노릇


예수 그리스도가 왕이신데, 이제는 우리가 그 은혜의 의의 선물을 받아 왕 노릇 하게 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벧전 2:9). 왕 같은 제사장이라고 베드로 사도의 편지에 우리를 부르고 있습니다. 우리가 왕 같은 제사장이라는 것입니다. 제사는 예배이자 기도입니다. 그것을 드리는데 왕 같은 제사장이라고 합니다. 어떻게 그럽니까? “...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였더니 이제는 긍휼을 얻은 자니라”(벧전 2:10).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한 자이나 이제는 긍휼을 얻은 자입니다. 불쌍함을 입어 이제는 왕 같은 제사장이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을 받아서 그렇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왕이고 왕 노릇 하는데 어떻게 하느냐, 은혜의 왕 노릇 한다는 것입니다. 은혜의 왕 노릇이란 쉽게 생각해 보면 은혜 받은 자로서 감사하고 비추고 나누는 것입니다. 그것이 은혜의 왕 노릇입니다. 공로의 왕이라고 하면 내가 했으니 내 것을 가져오라고 요구하는 것입니다. 내 노력의 왕은 그렇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공로의 왕 노릇 하지 않습니다. 세상에서는 열심히 일한 것을 따지는 공로의 왕 노릇 합니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은혜의 왕 노릇입니다. 가장 많이 불쌍히 여김을 받은 자가 왕입니다. 본문은 죄가 많은 곳에 은혜가 넘쳤다고 합니다. 누구라도 우리는 다 죄인인데 가장 은혜 가운데 사는 사람이 왕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왕이로되 로마서 6장은 의의 종이라고 부릅니다. 왕인데 종이라고 부릅니다. 죄의 종이 아니라 의의 종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받아 그것에 즐거워하고 감사하며 사니 의의 종입니다. 또 예수님은 우리에게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낫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는 의의 종이 왕입니다.



4. 은혜의 왕 노릇


1) 자기를 부인하며 오직 은혜로 사는 것


죄의 종은 죄에 살다가 죽지만 의의 종은 의로 살다가 영원히 삽니다. 그러므로 이 생명의 은혜의 왕 노릇 하는 것은 철저한 자기 부인이 있어야 합니다. 은혜에는 다른 것이 섞일 수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 왕으로 서기 위해서는 철저한 자기 부인이 있어야 합니다. “...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살아 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고후 5:14-15). 서론에 말씀드린 가장 중요한 성경 구절 중 하나입니다.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사는 것이 왕입니다.
동서고금을 통해 은혜에 대해 가장 많이 글을 쓰고 묵상한 자가 어거스틴일 것입니다. 그의 고백록을 보면 그는 뛰어난 자요, 명석한 철학자요, 연설가였습니다. 그러나 헛된 철학에 빠져 영혼이 고상하면 육체는 마음대로 살아도 된다는 그릇된 가르침에 따라 평생을 따랐습니다. 그런데 그가 갑작스럽게 회심을 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습니다. 그의 책을 보면 어디나 은혜를 말합니다. 루터의 책을 읽으면 믿음이 많이 나오는데 어거스틴의 책은 은혜가 많이 나옵니다. 루터는 어릴 때부터 로마가톨릭이지만 믿었습니다. 사제가 되려고 했습니다. 이론적으로 많이 고민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거스틴은 이방인이었습니다. 전혀 믿지 않았고 하나님을 몰랐습니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하나님을 만난 후 만사에 은혜를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 어거스틴의 글에 보면 은혜라는 말이 많이 나오는데 은혜는 존재와 관계되는 것입니다. 사시사철 변하는 것이 아니라, 구름이 덮었다 개는 것이 아니라, 하늘 자체입니다. 하늘이 맑다 흐리다 하지만 하늘은 사실 하늘입니다. 그 위에 구름의 변화가 있을 뿐입니다. 은혜는 보이는 것이 아니라 실체, 그 자체입니다. 우리 자신을 구원해 주신 것입니다. 사느냐 죽느냐의 문제입니다. 존재하느냐 존재하지 못하느냐, 천국에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입니다. 은혜는 중립지대가 아닌 '예'와 '아니오'의 문제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예' 한 백성, 양과 염소, 알곡과 가라지를 가려서 하나님이 결정하신 존재 자체가 은혜입니다.
이 은혜가 있는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즐거워하고 하나님을 찾습니다. 우리가 모자라든 낫든 관계 없습니다. 은혜의 영역은 하나님을 찾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했다는 것이 동일한 말입니다. 본질적인 것이 은혜라는 것입니다. 세상적인 것은 베풀면 줄어들고 먹으면 줄어듭니다. 은혜는 그렇지 않습니다. 베푸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오늘 말씀이 바로 언약입니다.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의 가운데, 본문 21절과 같이 그리스도의 의로 우리를 왕 노릇 하게 하는데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오셔서 이루어 주시는 것이 은혜입니다. 흠 없고 죄 없는, 죄를 짓지도 생각치도 않으셨던 예수님이 자기 값으로 산 의를 우리에게 베푸시는 것이 은혜입니다. 그러므로 은혜는 들락날락하거나 내가 어떻게 해서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절대적이고 일방적이고 무조건적이고 영속적이고 불변합니다. 은혜의 백성이 된 사람이 하나님 앞에 1초라도 무릎 꿇으면 그것이 은혜의 백성이라는 증거입니다. 절대적인 은혜에 속한 자라는 것입니다. 오늘 이 추위에 우리의 발걸음을 이끄셔서 예배하게 한 하나님께 속한 백성이 우리입니다.
그러므로 은혜는 다른 것을 섞으면 안됩니다. 내 절반, 하나님의 것 절반이 아닙니다. 나를 부인하고 여호와를 인정하고, 내 옛 사람을 죽이고 새 사람이 다시 살아나는 것만이 은혜입니다. 이것을 다 우리가 아닌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의 아들이 되사 이 땅에 오셔서 모든 의를 다 이루시고, 그 의 안에서 영생을 누리는 우리가 왕 노릇 하는 것입니다. 은혜는 절대성을 가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은혜를 받아서 어떻다고 말하는 것은 어폐가 있습니다. 만사가 은혜니까라고 말해야 합니다. 어떤 개별적인 일에 대한 판단으로 하나님이 그렇다고 말하면 안됩니다. 나는 은혜의 백성이니 이러저러하다고 해야 합니다. 은혜는 본질적인 것입니다.


2) 하나님의 관점으로 사는 것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히 11:3). 은혜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손길입니다. 하나님 자신이 우리의 은혜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판단하는 것을 옳다고 생각할지 몰라도 틀립니다. 나사로가 죽었다고 세상 사람들이 말했지만, 주님은 잔다고 했습니다. 십자가의 강도도 사람들은 죽어 마땅하다고 했으나 주님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했습니다. 세상에서 보이는 영역과 하나님이 보시는 은혜의 영역은 다르다는 것입니다. 사대교회가 살았다 하는 이름을 가졌으나 죽었다고 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겉으로 살았다고 하나 사실 죽었습니다. 지옥에 있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서 있는 것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생명은 영원히 존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서지 않은 것, 지옥에서의 존재는 존재도 아닙니다. 그러니 '멸망'이라고 합니다. 아브라함의 아내인 사라는 죽은 듯 방불하나 살아 있다고 했습니다. 은혜의 영역에서는 살아 있다는 것입니다. 은혜가 왕 노릇 하는 세상은 이렇습니다. 죽은 듯 하나 자는 것, 죽은 듯 하나 그 태가 열려 있는 것입니다. “... 우리는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아 있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고후 6:8-10). 은혜가 왕 노릇 하는 자들의 모습입니다. 은혜의 왕 노릇은 관점이 달라야 합니다. 세상의 관점에서 더 많이 가지는 것이 은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무명한 듯 하나 유명한 자요, 세상에서는 죽은 듯 방불하나 살아 있는 것이요, 세상 사람들은 저 십자가가 속인다고 하지만, 참된 것이요, 그것이 바로 은혜인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가난하다고 생각하지만 부요하고 모든 것을 가진 자들이 은혜의 백성이라는 것입니다. 보이는 것, 드러나는 것이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지 않음을 알아야 합니다.
요새 보십시오. 추우니 옷을 입습니다. 난방을 합니다. 이렇게 따뜻하게 예배드릴 수 있는 것이 감사합니다. 겨울에 우리는 옷을 주심을 감사하고 따뜻한 집을 주심에 감사하다고 하지만, 겨울에서 배우는 교훈은 그 너머의 것이 되어야 합니다. 태양이 감사한 것입니다. 우리가 여름에 그저 벗고도 살 수 있는 것은 태양이 있기 때문입니다. 태양이 조금만 멀어져도 안됩니다. 진짜 은혜는 안 보이는 것입니다. 그래도 우리는 일차적으로 옷과 난방을 주심에 감사해야 합니다. 그러나 본질적인 감사는 만물을 붙드시고 주관하시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감사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은혜라는 것입니다.


3) 은혜를 드러나며 베푸는 삶


우리는 이 은혜 가운데 왕 노릇 하는 것이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은혜를 드러내면서 남에게 베푸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성경에서는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사실 서로 사랑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셔서 사랑의 능력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은혜를 주셨기 때문에 남을 사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 이웃을 돕는 일도 해야 합니다. 아직 선교는 못하고 있는데 한 달에 십만 원이라도 선교하고 구제하고 해야 할 것입니다. 왜요? 우리는 사랑하려고 하지만, 은혜를 베풀 수는 없습니다.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은 우리가 은혜의 왕 노릇 한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넘치게 베푸신 것을 나눌 때 사랑하게 하시는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나에게 은과 금은 없거니와 나사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하노니 일어나 걸으라'고 한 것, 그것이 바로 은혜의 왕 노릇 하는 것입니다. 다윗이 나라를 잘 다스렸습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1장에 솔로몬은 없지만 다윗의 이름은 있습니다. 그러나 다윗의 능력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다윗에게 지혜와 권능을 주신 것입니다. 다윗이 '내가 다스리겠다'고 인구를 계수할 때 하나님은 가장 싫어하셨습니다. 다윗이 밧세바를 범한 것보다 더 싫어한 것이 인구 계산할 때입니다. 자신의 힘과 능력과 업적을 잴 때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신 것입니다. 아브라함도 은혜의 왕 노릇 하는 모습을 보여 줬습니다. 조카 롯에게 양보했습니다. 소알 땅, 소돔과 고모라 땅을 양보한 것입니다. 얼마나 기름진 땅입니까? 그 땅을 양보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은혜 가운데서 왕 노릇 하는 모습입니다.



5. 은혜가 왕 노릇 하는 삶을 사는 방법


1) 그리스도 안에서 상속자 된 자가 왕 노릇 한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신 모든 것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은혜와 긍휼의 왕 노릇을 합니다. 나의 나된 것은 예수 그리스도로 인한 것입니다.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고 한 것입니다. 다윗이 창검이 아닌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골리앗에 나아간 것입니다. 나의 가진 것이 아닌 은혜를 본질로 삼는 것이 은혜의 왕 노릇 입니다. “... 함께 상속자가 되고 함께 지체가 되고 함께 약속에 참여하는 자가 됨이라”(엡 3:6).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약속에 참여하는 자, 상속자, 지체가 됩니다. 그 안에서 왕 노릇 하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의 은혜를 고백해야 한다


어떻게 합니까? 먼저는 은혜의 고백이 확실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전적인 은혜를 입지 않는 자를 결코 쓰시지 않습니다. 이방의 왕처럼 쓰더라도 버리십니다. 말째인 다윗도, 이삭도, 야곱도 태생부터가 은혜의 백성입니다. 그러한 사람들을 쓰십니다. 육체의 장자가 아닌, 에서보다 야곱을, 므낫세보다 에브라임을 쓰십니다. 육체의 서열이 아닌 은혜의 서열을 쫓아 전적 은혜를 입은 백성을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은혜가 역사하고 나를 지배하며 왕 노릇 하지 않으면, 나는 결코 주님의 일을 하지 못합니다. 은혜가 없으면 불화, 시기, 반목, 판단, 죽이는 것뿐입니다. 그러나 은혜가 내 안에 역사하면 약할 때 강함이요, 내가 부득불 자랑하니 약한 것을 자랑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은혜가 왕 노릇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특히 사역자들이 볼 때 정말 흠모할 만한 사람입니다. 그래도 그가 부득불 자랑하노니 그의 약한 것을 자랑한다고 합니다. 이것이 은혜가 왕 노릇 하는 것입니다. 초대교회에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가 된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교회도 한국교회도 은혜가 왕 노릇 해야 합니다. 보이는 것이 나타나는 것으로 말미암지 않음을 알아야 합니다. 은혜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밖에 없습니다. 다른 것은 다 분토와 같이 여겨야 합니다. 섞이면 안됩니다. 자기 부인이 있어야 하나님의 인정이 있고, 내 자질이 죽어야 은혜가 역사합니다. 은혜가 왕 노릇 합니다. 이 한국 땅이 은혜가 왕 노릇 하는 땅으로 회복되기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교회 안에 자질이 들어오면 안됩니다. 어떤 세속적인 것이 들어오면 안됩니다. 교회는 오직 그리스도의 의로 구원 받은 은혜의 긍휼의 백성들의 모임인 것입니다.


3) 하나님으로부터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을 받아야 한다


우리가 어떻게 은혜로 왕 노릇 하나요? “너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으니”(고전 1:30). 은혜가 왕 노릇 하게끔 하나님이 우리에게 지혜, 의로움, 거룩함, 구원함을 주십니다. 지혜는 생명의 지식입니다. 기껏 알아 죽으면, 사망의 길로 가면 무엇 하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는 생명의 지식이요 의로움은 열매 맺는 의로움입니다. 하나님의 의로움은 똑바로 서 있으면 열매 맺는 나무와 같습니다. 그리고 거룩함은 자기 자신을 구별해서 드리는 것입니다. 거룩은 구별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구원은 영원히 하나님의 은혜를 찬송하는 것입니다.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신령한 몸은 영원히, 완전히 은혜만 찬송하는 것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한 가지는 '그래서 영원히 찬송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신령한 몸입니다. 이 땅에서 우리가 사모할 것이 있다고 한다면 내 자질, 공로를 죽이고 하나님의 은혜로만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중세에 수도원도 가고 하지만 그것으로는 안됩니다. 나를 부인하고 주님의 은혜만으로 살아야 합니다. 독생자의 영광을 보니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데 그 가운데 우리에게 은혜 위에 은혜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에게 지혜, 의로움, 거룩함, 구원함을 주십니다.

다시 말씀하지만, 지혜는 생명의 지식, 의로움은 열매 맺는 의, 거룩함은 구별하여 하나님께 드림, 구원함은 영원히 은혜에 감사하는 노래를 부르는 것입니다. 우리가 영생의 자녀로 포도원에 일찍 들어감은 우리를 불러주신 하나님을 기뻐하기 위함입니다. 그것이 은혜가 왕 노릇 하는 삶입니다.



6. 결론: 은혜로 살라


사망에 매인 삶을 버리고 은혜가 역사해야 합니다. 은혜가 이깁니다. 힘이 이기는 것이 아닙니다. 사망의 권세를 은혜가 이기는 것입니다. 다윗이 골리앗을 이기는 것입니다.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요 1:16). 예수님께 충만한 것을 받아야 합니다. “아기가 자라며 강하여지고 지혜가 충만하며 하나님의 은혜가 그의 위에 있더라”(눅 2:40). 사도 바울은 "은혜의 복음"을 다 마치려 한다고 했습니다(행 20:24). 그리고 우리가 은혜 아래 있다고 합니다(롬 6:14) “주 예수의 은혜가 모든 자들에게 있을지어다 아멘”(계 22:21). 이것이 요한계시록의 마지막 말씀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입니다. 우리는 은혜로 살아야 합니다. 은혜가 왕 노릇 해야 합니다.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내가 여호와께 무엇으로 보답할까”(시 116:12). 이것이 다윗의 감사의 노래입니다. 우리는 오직 은혜, 은혜의 백성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다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만을 의지해야 합니다. 은혜보다 더 기쁜 것이 없습니다. 이것보다 더 감사한 것이 없습니다. 이 신령한 기쁨을 맛보면 다른 것들은 다 분토같습니다. 은혜가 우리 삶의 기준이 되어야 합니다. 다 끝났다고 할 때 남은 것이 있습니다. 바로 은혜요 기도입니다. 다 결산할 때 은혜가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은혜를 구하며 기도할 수 있습니다. 요셉이 구덩이 감옥에 갈 때, 다니엘의 세 친구가 사자굴에 떨어질 때, 그때가 시작임을 알아야 합니다. 다 끝났다고 할 때 은혜가 발동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은혜를 계산하는 사람들, 누리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세상에서 다 끝났다고 할 때, '아니요,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역사하실 것이다'라고 고백하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이런 가운데 기쁨과 감사함이 있습니다. 요즘 추울 때 하늘을 바라보면 저도 돌아가신 어머니 생각이 납니다. 새벽예배 가셨다가 월요일에 돌아가셨습니다. 유학간 자식 주시려고 준비하신 전도 못 부치시고 말입니다. 그래도 감사함이 있습니다. 은혜 누리며 사신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 믿음으로 살아가고 소소한 일에 연연하지 않고 올 한 해도 은혜로 살았음을 감사하는 은혜가 있기를 진심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