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후에 말씀하시기를 보시옵소서 내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셨으니 그 첫째 것을 폐하심은 둘째 것을 세우려 하심이라
(히 10:10)
이 뜻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히 10:11)
제사장마다 매일 서서 섬기며 자주 같은 제사를 드리되 이 제사는 언제나 죄를 없게 하지 못하거니와
(히 10:12)
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사
(히 10:13)
그 후에 자기 원수들을 자기 발등상이 되게 하실 때까지 기다리시나니
(히 10:14)
그가 거룩하게 된 자들을 한 번의 제사로 영원히 온전하게 하셨느니라
(히 10:15)
또한 성령이 우리에게 증언하시되
(히 10:16)
주께서 이르시되 그 날 후로는 그들과 맺을 언약이 이것이라 하시고 내 법을 그들의 마음에 두고 그들의 생각에 기록하리라 하신 후에 이하
(히 10:17)
또 그들의 죄와 그들의 불법을 내가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하셨으니
(히 10:18)
이것들을 사하셨은즉 다시 죄를 위하여 제사 드릴 것이 없느니라
<녹취록>
1. 그리스도께서 단번에 영원한 제사를 드리셔서 우리를 영원히 거룩케 하심
본문에서 히브리서 기자는 시편 40편의 다윗의 간증에 기초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단번에 영원한 제사를 다 드리셨음, 친히 자기 몸을 주셔서 우리를 온전히 거룩하게 하셨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시편 40편은 가장 절실한 다윗의 간구를 담고 있습니다. — “내가 여호와를 기다리고 기다렸더니 귀를 기울이사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셨도다 나를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서 끌어올리시고 내 발을 반석 위에 두사 내 걸음을 견고하게 하셨도다.” 다윗이 성군이요 큰 일을 이루고 통일왕조를 이룬, 다윗 언약의 다윗이지만, 그에게는 웅덩이와 수렁이 있었고 끊임없이 나락으로 빠져드는 일들이 있었습니다. 그는 주야로 말씀에 의지하여 주님을 불렀고 주님은 그를 인도하여 반석에 두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새 노래를 부르는데 6절에는 주님이 더 이상 자기의 제사와 예물을 원하지 않으신다고 합니다. 즉, 친히 한 몸을 예비하셨다고 합니다. 메시야를 예비하는 노래를 하는 것입니다. 본문 히브리서 10장 9절은 첫째 것을 폐하고 둘째 것을 세우려 하심이라고 합니다. 첫 번째 것은 구약의 제사, 즉 반복해서 매일 제사장이 드려야 하는 상번제입니다. 그런데 두 번째 것이라 함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제물이 되어 단번에 자기 자신을 영원히 드리심으로 인해, 더 이상 구약적 제사가 필요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로 족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본문 10-14절을 보면 예수님이 단번에 자기 자신을 제물로 드리셨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단번”의 제사, “한 영원한 제사,” “한 번의 제사”가 그 표현입니다. 짐승이야 길러서 또 드리면 되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 유일하신 독생자이므로 자기 자신을 단번에 드리셨습니다. 그리하여 단번에 영원한 제사를 드리신 그의 은혜로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으며(10절), 영원히 우리를 온전케 하시므로 우리가 거룩하게 된 자라고 합니다(14절). 우리는 날마다 거룩해져야 합니다. 그러나 본문은 이미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다고 합니다. 거룩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본문 18절은 다시 이런 제사를 드릴 것이 없다고 합니다.
2. 성도(聖徒)의 이름들
1) 그리스도인
우리 성도들을 부르는 이름이 여러 가지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것은 기름 부음받은 메시야, 즉 왕, 제사장, 선지자인 그리스도를 믿으니 우리를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바나바가 바울을, 당시 사울이던 그 자를 다소에서 데려와 안디옥에서 일 년 동안 신앙생활을 하고 안디옥 교회가 많은 감화를 하니 안디옥 교회 사람들을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렀습니다. 우리 성도들은 기독교인, 그리스도인으로 불립니다. 그리고 예수쟁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나라 말인데 좋은 표현입니다. 물론 믿지 않는 자들은 멸시, 경시하는 말이지만, 우리에게는 귀한 호칭입니다. 그 사람을 보니 예수 보는 듯하여 예수쟁이라고 한 것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영을 받으니 예수가 한 것처럼 서로 모여 예배하고 나누고 구제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예수 닮은 자라고 하여 예수의 영, 그리스도의 영을 받았다라고 한 것입니다. 우리도 바로 예수의 영, 그리스도의 영, 예수쟁이라고 불리는 것입니다.
2) 신자
또한 신자라는 말도 있습니다. 요새는 많이 안 쓰는 듯하나, 이것도 중요한 말입니다. 우리는 믿어서 구원에 이르고 믿어서 은혜 위에 은혜입니다. 믿음이 없이 하나님 앞에 의미 있는 것이 없습니다. 믿어서 거듭나고 거룩하게 되고 영화롭게 됩니다.
3) 성도
그리고 우리를 성도라고 부릅니다. 거룩한 무리라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 이번 주에도 우리 자신이 완전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 외형적으로 남 보기에, 특별히 드러나지 않게 잘 살 수는 있으나, 하나님이 보시는 내면과 마음의 탄식, 남에게 향한 시기, 질투, 업신여기는 마음을 생각해 보면 십계명에 비추어 봐도 우리는 온전하지 않습니다. 과연 성도의 삶을 살았을지 의문이 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성도라고 부르십니다.
3. 은혜로 이미 얻은 거룩함
오늘 설교의 제목은 “거룩함을 얻었음”이라고 하여 완료형으로 표현되었습니다. 거룩함을 주셨으니 믿음을 가지게 되고, 믿음을 가지니 더욱 거룩하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열심히 노력하고 몰두해서 내가 거룩하고 믿음을 갖는 것이 아니라 믿음을 선물로 주었으니 우리는 더욱 거룩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입니다. 본문 10절, 14절, 그리고 에베소서 2장 8절의 말씀입니다. 믿음도 선물로 주셔서 생명을 주시는 것이 단번에 일어나는 일이라면 생활을 거룩하게 하는 일은 이미 약속은 주어지되 전 생애를 거쳐 일어납니다. 그래서 우리는 거룩한 백성이라고 불리는 것입니다.
구약에는 제사, 절기, 언약이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세가지 입니다. 그런데 이 세가지의 기본은 구약의 정결례입니다. 먼저 깨끗해야 이 세 가지를 할 자격이 생깁니다. 깨끗해야 언약의 백성도 되는 것입니다. 8일만에 할례를 하고 40일에 정결례로 드려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의 출발입니다. 그런데 신약에서는 더이상 할례, 정결례가 없습니다. 그러나 신약시대에 세례 요한의 첫번째 선포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다'는 것, 예수님의 첫 번째 선포도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신약시대 때 회개하라는 것, 이것이 바로 죄 사함의 회개입니다. 옛것이 지나갔으니 새것이 된 그것입니다. 신약시대는 이 회개의 선포로 시작됩니다. 그래서 교회에 오면 세례를 받게 되는데 세례는 옛것이 지나가고 새것이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를 이미 거룩한 백성이라고 부릅니다. 우리가 가정에서 자녀가 되어 자격을 갖추듯 하나님 나라에서 백성이 된 자는 성도로서 인을 쳐 주십니다. —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벧전 2:9). 이것이 바로 성도입니다. 우리 각자가 하나님의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라고 말씀합니다. 이미 그런 것입니다. — “거룩하게 하시는 이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한 근원에서 난지라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히 2:11). 거룩하게 하는 자는 예수 그리스도, 거룩함을 입은 자는 우리입니다. 이 둘이 한 근원에서 나왔습니다. 예수님의 형제와 자매가 되는 것입니다. 거룩하지 않으면 어떻게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는 예수님의 형제로 불리나요? 거룩하게 하신 이와 거룩함을 입은 자가 한 근원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는 생수의 강이 배에 흐르는 것입니다. 이제는 그리스도의 영이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날마다 머리이신 그리스도께로 자라갑니다. 아이가 태어나면 자라는 것을 의심하는 부모가 없습니다. 우리를 영적으로 낳으셨으므로 우리는 날마다 자라가는 것입니다. 이것을 학자들, 정통신학자들은 결정적 성화라고 부릅니다. 칭의, 의롭다 칭할 때 이미 거룩함이 결정되었다는 것입니다. 완성은 아니나 결정된 것입니다. —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롬 8:30).
4. 은혜로 얻을 거룩한 삶
생명을 주시면 생활을 주시는 것입니다. 살아남도 살아감도 은혜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거룩함은 이미 결정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거듭남을 믿습니까?'라는 질문은 많이 하는데 '거룩해지는 것을 믿냐?'고 질문하면 머뭇거립니다. 우리는 생명을 얻은 것처럼 거룩한 삶을 기대해야 합니다. 봄되면 교회 앞에 유실수라도 하나 심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지상에 과일나무를 심는 것이 얼마나 좋은 일입니까? 우리도 나무를 심을 때 열매를 예상하고 기대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심으실 때 열매의 예정된 바가 있는 것입니다. 이미 우리를 부르실 때 거룩하게 하심이 결정된 것이며 그것이 다 은혜라는 것입니다. —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롬 8:32). 생명을 주신 이가 생활, 성품의 변화를 주시지 않을 수 없는데,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본문 10절과 14절은 거룩함을 얻었고 거룩하게 된 자라고 합니다. 율법이 구약의 모세오경에 나오는데 핵심은 레위기 말씀입니다. — "너희는 거룩하라 이는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레 19:2), “너희는 스스로 깨끗하게 하여 거룩할지어다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레 20:7). 저는 이전에는 이 말씀을 읽을 때 마음이 많이 힘들었습니다.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의 거룩하심처럼 거룩해지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항상 그렇습니다. 명령이 있는 곳에 약속이 있습니다. 명령하신 분이 친히 이루십니다. 우리는 당장 눈에 띄는게 콕 찌르는 것이나, 그 주변에 약속을 읽어야 합니다. — “나는 너희를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이니라”(레 20:8). 제가 이 8절을 읽지 않고 7절만 읽은 것입니다. 우리를 친히 거룩하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입니다. 명령만 보면 절망에 빠지고 위축됩니다. 그러나 바로 이어지는 말씀이 우리를 거룩하게 하는 그 명령을 이루는 자가 바로 여호와이심을 천명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피부 하나도 못 바꿉니다. 마음은 더 어렵습니다. 그러나 여호와가 하십니다. — “너희는 나에게 거룩할지어다 이는 나 여호와가 거룩하고 내가 또 너희를 나의 소유로 삼으려고 너희를 만민 중에서 구별하였음이니라”(레 20:26). 창세 전에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려고 선택하신 것입니다.
5. 거룩은 구별하여 드려지는 것이다
거룩은 구별하는 것뿐만이 아니라, 구별해서 하나님께 드려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드려지지 않으면 거룩이 아닙니다. 양과 소를 아무리 잘 구별해도 하나님께 드려져야 고르반, 거룩한 성물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과부의 두렙돈이라도 하나님께 드려지면, 비천한 여인이 깨드리는 향유 옥합이라도 예수님께 드려지고 그의 향품으로 사용되면 거룩한 것입니다. 오병이어도 작은 것이나 예수님의 손에 들려지면 거룩한 것이요, 모세의 지팡이도 흔한 막대기나 하나님이 쓰시겠다고 하면 홍해도 갈라지고 아말렉을 전쟁에서 물리치는 것입니다. 사렙다 과부의 기름통에 있는 기름과 가루도 하나님이 선지자를 위하여 쓰시고자 할 때 거룩해진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도 육체도 삶도, 온전하고 뛰어나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쓰시겠다고 하면 거룩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 입성하실 때 건장한 말이 아니라 새끼 나귀를 타고 오셨습니다. 주가 쓰시겠다고하면 거룩해지는 것입니다.
6. 오직 거룩하게 드려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다
1) 예수님의 거룩한 제사
십자가의 죽음은 저주입니다. 그러나 그 죽음을 하나님이 받으실 때 그것은 거룩한 죽음, 부활의 권능이 나타나는 죽음이 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겟세마네에서 ‘나의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시옵소서’라고 기도합니다. 십자가의 죽음은 가장 저주받은 죽음입니다. 멀리서 보면 몸을 떨고 온갖 것을 쏟아냅니다. 혀는 천장에 붙고 눈은 뒤집히고 이는 잇몸을 파고 듭니다. 십자가는 목불인견(目不忍見)이라 그림으로 보는 것과 완전히 다릅니다. 그 죽음이 거룩한 죽음이 된 것입니다. 저주의 죽음을 죽으셨으나 하나님이 사용하시면 거룩한 죽음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하나님의 거룩한 제물, 영적 산 제사를 드리는 제물이 되는 것입니다(롬 12:1). 주님의 십자가의 죽음에서 휘장이 하늘에서 땅으로 갈라지고 죽음을 삼겼던 땅이 죽음을 토해내고, 십자가의 죽음으로 죽음을 깨뜨리셨다면 그것은 주님이 자기 자신을 단번에 제물로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거룩함을 이미 얻었습니다. 내가 취한 것이 아닙니다. 선물로 받았습니다.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신 그 제사로 인해서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온전한 제물로 단번에 드리셨으나 평생 준비해서 드렸습니다. 죄없는 사람의 아들로 오셔서 흠없고 점없는 어린양(벧전 1:19)과 같이 거룩한 제물로 드려지시고 그 공로로 우리가 거룩함을 입은 것입니다. 우리는 거룩할 수 없습니다. 지금 이 순간조차도 말입니다. 우리의 곤고함에 애통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흠 없고 점 없는 어린양과 같은 보배로운 피로 된 것입니다(벧전 1:19). 그가 그 자신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거룩하고 하늘보다 높이 되신 이가 바로 그리스도이십니다(히 7:26). 예수님도 이 땅에 오셔서 순종을 배우셨습니다(히 5:8-9). 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몸을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 “하나님이 제사와 예물을 원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나를 위하여 한 몸을 예비하셨도다 번제와 속죄제는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히 10:5-6). 이 본문 바로 앞절은 시편 40절 말씀의 인용입니다. 다윗이 수렁에서 건져주심을 노래하는 것은 구약의 번제와 제사가 아닌 한 몸을 예비하사 그리스도가 단번에 자기를 제물로 드리사 이루신 것입니다.
구약의 제사는 그림자, 예표입니다. 그 실체와 몸은 바로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래서 이제는 제사가 아닌 예수 그리스도로 온전케 되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은 자기 자신을 모든 제물로 드리십니다. 속죄제, 속건제, 화목제, 번제로 드리셨습니다. 번제는 자기 자신을 드리는 것입니다. —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희생제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엡 5:2). 자기 자신을 드리신 것은 우리 자신을 사시기 위함입니다. 소유를 주신 것이 아니라 존재를 주셔서 우리 자신을 사신 것이요, 그래서 여러 번이 아닌 단번의 제사로 드리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나의 값입니다. 예수님이 나의 생명, 생활이십니다. 예수님이 번제로 자기 자신을 드리셨습니다. 번제는 내장까지 꺼내서 다 태워드리는 것입니다. 헌신제입니다. 흔적도 안 남습니다. 짐승의 종류와 상관없이 번제는 내장까지 다 씻어서 드립니다. 이것이 바로 거룩함입니다.
2)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하고 소망하라
본문의 13절은 그가 거룩하게 된 자들을 한 번의 제사로 영원히 온전하게 하셨다고 합니다. 이것을 믿어야 합니다. 공로로 나가면 안됩니다. 하나님이 내일 나를 다시 일으킬 것임을, 깊은 신음의 밤이 있어도 새벽에는 찬송의 새노래가 나의 입에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어제 밤에도 신음이 있었습니다. 가슴을 치는 것과 하나님 앞에 다시 일어나 붙드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자기의 아들을 주셔서 우리를 온전케 하셨습니다. 혹자는 전부 은혜이면 막 살지 않겠냐고 합니다. 그러나 그는 잘 모르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은혜라고 할 때 비로서 사람은 윤리적이 됩니다. 다 은혜라고 할 때, 내가 한 것이 없다고 할 때 한 톨의 쌀도 감사합니다. 생명 주신 이께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단번에 죄를 위해 죽으시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했다고 합니다(벧전 3:18). 베드로서에 이런 말이 많이 나옵니다. 베드로서는 네로의 박해를 앞둔 소아시아 교회에 위로의 편지로 쓴 것입니다. 우리에게 위로가 되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흠도 점도 없는 보배로운 어린양의 피입니다. 의로운 자의 불의한 죽음입니다. 아직 완성된 것이 아니라 그 거룩함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는 몇십 배의 결실을 얻을 수 밖에 없는 거룩한 나라, 왕 같은 제사장, 택하신 족속, 옥토에 떨어진 씨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이미 온전케 하시려고 정하셨습니다. 그러니 실망이나 좌절하지 말고 내 자신에 먼저 소망을 가지십시오. 우리에게 있는 것은 소망, 약속, 언약뿐입니다. 본문 16절입니다. — “내 법을 그들의 마음에 두고 그들의 생각에 기록하리라”(히 10:16).
뜻하신즉 이루시고 이루신즉 선합니다. 우리는 뜻해도 머뭇거리나 하나님은 즉시 이루시고 선합니다. 이 땅에서는 복이요 하늘에서는 상급입니다. 이 땅에서 복된 것은 하나님께 영광을 올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만이 하늘에서 상급이 됩니다. 내가 했다라고 하면 상급이 없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간혹 우리를 낮추십니다. 있는 그대로를 보게 하십니다. 그래서 좌절하고 힘듭니다. 그러나 그 때가 이 땅의 복의 출발입니다.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애통하면서 우리가 안된다고 할 때, 하나님이 이루시라고 하고 맡길 때 하나님이 친히 내 안에서 이루어 주시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십니다. 영광을 돌리게 돼야 복이고 상급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일하심은 항상 우리를 영광으로 이끌어 가십니다. 그러므로 내가 한 것은 하나님께 못가져 감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거룩함은, 우리가 날마다 거룩해지는 것은 어제보다 오늘 더 잘 기대고 의지하는 것입니다. 찬송으로도 계속 고백하는 것입니다. 세월 지나가도 의지할 것뿐입니다. 기대는 사람이 거룩한 사람입니다. 납작 엎드려 기도하는 사람이 거룩한 사람입니다. 반드시 내가 서고 가는 길이 반듯하고 하는 것은 다 거짓말입니다. 하나님 앞에 기댈 때만 반듯합니다. 기도할 때만 반듯합니다. 어제보다 오늘 더 잘 의지하고 십자가의 그늘에 거하고 신령한 음료와 양식을 하늘로부터 온 그것을 마셔 내 배에 생수의 강이 거하는 것이 거룩한 것입니다. 내가 태생이 좋고 거룩해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지상에서는 칭찬이 조금 있을지 모르나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거룩함은 거룩한 누림입니다. 하나님의 빛을 받으면 빛을 내고 향과 사랑을 받으면 향과 사랑을 발산하고 은혜를 받으면 감사하고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생명의 삶을 사는 것이 거룩한 것입니다. 주님의 신령한 살과 피를 마시고 신령한 몸이 되는 것, 그것이 거룩한 것입니다.
7. 결론: 하나님께 신령한 예배를 드리라
— “너희도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벧전 2:5). 이로 인해 우리의 공로가 아니나 이제 우리 몸을 로마서의 말씀과 같이 영적 산 제물로 드리는 거룩한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거룩함의 핵심은 그러므로 예배입니다. 예배를 소망하고 기대해야 합니다. 예배 가운데 하나님이 모든 것을 베푸십니다.
이번에 동해바다에 가서 문을 여니 수평선이 보였습니다. 자로 대지 않아도 반듯했습니다. 우리 교회의 선도 곱습니다. 하나님은 절대 공평하십니다. 애통함이 있으면 절대 기뻐하십시오. 그래야 내가 영광의 도구가 됩니다. 나의 부족함을 영광의 도구로 삼으시기 때문입니다. 내가 연약하고 모난것, 부족한 것 괜찮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쓰십니다. 이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아무리 하찮은 것이라도 주님께 드려저 받으시면 거룩한 것입니다. 이런 감사가 넘치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181223][십자가지기교회 주일낮예배: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38)] 거룩함을 얻었음을 믿음 (히 10:9-18) 문병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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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그리스도께서 단번에 영원한 제사를 드리셔서 우리를 영원히 거룩케 하심
본문에서 히브리서 기자는 시편 40편의 다윗의 간증에 기초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단번에 영원한 제사를 다 드리셨음, 친히 자기 몸을 주셔서 우리를 온전히 거룩하게 하셨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시편 40편은 가장 절실한 다윗의 간구를 담고 있습니다. — “내가 여호와를 기다리고 기다렸더니 귀를 기울이사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셨도다 나를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서 끌어올리시고 내 발을 반석 위에 두사 내 걸음을 견고하게 하셨도다.” 다윗이 성군이요 큰 일을 이루고 통일왕조를 이룬, 다윗 언약의 다윗이지만, 그에게는 웅덩이와 수렁이 있었고 끊임없이 나락으로 빠져드는 일들이 있었습니다. 그는 주야로 말씀에 의지하여 주님을 불렀고 주님은 그를 인도하여 반석에 두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새 노래를 부르는데 6절에는 주님이 더 이상 자기의 제사와 예물을 원하지 않으신다고 합니다. 즉, 친히 한 몸을 예비하셨다고 합니다. 메시야를 예비하는 노래를 하는 것입니다.
본문 히브리서 10장 9절은 첫째 것을 폐하고 둘째 것을 세우려 하심이라고 합니다. 첫 번째 것은 구약의 제사, 즉 반복해서 매일 제사장이 드려야 하는 상번제입니다. 그런데 두 번째 것이라 함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제물이 되어 단번에 자기 자신을 영원히 드리심으로 인해, 더 이상 구약적 제사가 필요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로 족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본문 10-14절을 보면 예수님이 단번에 자기 자신을 제물로 드리셨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단번”의 제사, “한 영원한 제사,” “한 번의 제사”가 그 표현입니다. 짐승이야 길러서 또 드리면 되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 유일하신 독생자이므로 자기 자신을 단번에 드리셨습니다.
그리하여 단번에 영원한 제사를 드리신 그의 은혜로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으며(10절), 영원히 우리를 온전케 하시므로 우리가 거룩하게 된 자라고 합니다(14절). 우리는 날마다 거룩해져야 합니다. 그러나 본문은 이미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다고 합니다. 거룩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본문 18절은 다시 이런 제사를 드릴 것이 없다고 합니다.
2. 성도(聖徒)의 이름들
1) 그리스도인
우리 성도들을 부르는 이름이 여러 가지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것은 기름 부음받은 메시야, 즉 왕, 제사장, 선지자인 그리스도를 믿으니 우리를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바나바가 바울을, 당시 사울이던 그 자를 다소에서 데려와 안디옥에서 일 년 동안 신앙생활을 하고 안디옥 교회가 많은 감화를 하니 안디옥 교회 사람들을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렀습니다. 우리 성도들은 기독교인, 그리스도인으로 불립니다. 그리고 예수쟁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나라 말인데 좋은 표현입니다. 물론 믿지 않는 자들은 멸시, 경시하는 말이지만, 우리에게는 귀한 호칭입니다. 그 사람을 보니 예수 보는 듯하여 예수쟁이라고 한 것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영을 받으니 예수가 한 것처럼 서로 모여 예배하고 나누고 구제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예수 닮은 자라고 하여 예수의 영, 그리스도의 영을 받았다라고 한 것입니다. 우리도 바로 예수의 영, 그리스도의 영, 예수쟁이라고 불리는 것입니다.
2) 신자
또한 신자라는 말도 있습니다. 요새는 많이 안 쓰는 듯하나, 이것도 중요한 말입니다. 우리는 믿어서 구원에 이르고 믿어서 은혜 위에 은혜입니다. 믿음이 없이 하나님 앞에 의미 있는 것이 없습니다. 믿어서 거듭나고 거룩하게 되고 영화롭게 됩니다.
3) 성도
그리고 우리를 성도라고 부릅니다. 거룩한 무리라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 이번 주에도 우리 자신이 완전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 외형적으로 남 보기에, 특별히 드러나지 않게 잘 살 수는 있으나, 하나님이 보시는 내면과 마음의 탄식, 남에게 향한 시기, 질투, 업신여기는 마음을 생각해 보면 십계명에 비추어 봐도 우리는 온전하지 않습니다. 과연 성도의 삶을 살았을지 의문이 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성도라고 부르십니다.
3. 은혜로 이미 얻은 거룩함
오늘 설교의 제목은 “거룩함을 얻었음”이라고 하여 완료형으로 표현되었습니다. 거룩함을 주셨으니 믿음을 가지게 되고, 믿음을 가지니 더욱 거룩하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열심히 노력하고 몰두해서 내가 거룩하고 믿음을 갖는 것이 아니라 믿음을 선물로 주었으니 우리는 더욱 거룩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입니다. 본문 10절, 14절, 그리고 에베소서 2장 8절의 말씀입니다. 믿음도 선물로 주셔서 생명을 주시는 것이 단번에 일어나는 일이라면 생활을 거룩하게 하는 일은 이미 약속은 주어지되 전 생애를 거쳐 일어납니다. 그래서 우리는 거룩한 백성이라고 불리는 것입니다.
구약에는 제사, 절기, 언약이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세가지 입니다. 그런데 이 세가지의 기본은 구약의 정결례입니다. 먼저 깨끗해야 이 세 가지를 할 자격이 생깁니다. 깨끗해야 언약의 백성도 되는 것입니다. 8일만에 할례를 하고 40일에 정결례로 드려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의 출발입니다. 그런데 신약에서는 더이상 할례, 정결례가 없습니다. 그러나 신약시대에 세례 요한의 첫번째 선포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다'는 것, 예수님의 첫 번째 선포도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신약시대 때 회개하라는 것, 이것이 바로 죄 사함의 회개입니다. 옛것이 지나갔으니 새것이 된 그것입니다. 신약시대는 이 회개의 선포로 시작됩니다. 그래서 교회에 오면 세례를 받게 되는데 세례는 옛것이 지나가고 새것이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를 이미 거룩한 백성이라고 부릅니다. 우리가 가정에서 자녀가 되어 자격을 갖추듯 하나님 나라에서 백성이 된 자는 성도로서 인을 쳐 주십니다. —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벧전 2:9). 이것이 바로 성도입니다. 우리 각자가 하나님의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라고 말씀합니다. 이미 그런 것입니다. — “거룩하게 하시는 이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한 근원에서 난지라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히 2:11). 거룩하게 하는 자는 예수 그리스도, 거룩함을 입은 자는 우리입니다. 이 둘이 한 근원에서 나왔습니다. 예수님의 형제와 자매가 되는 것입니다. 거룩하지 않으면 어떻게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는 예수님의 형제로 불리나요? 거룩하게 하신 이와 거룩함을 입은 자가 한 근원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는 생수의 강이 배에 흐르는 것입니다. 이제는 그리스도의 영이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날마다 머리이신 그리스도께로 자라갑니다. 아이가 태어나면 자라는 것을 의심하는 부모가 없습니다. 우리를 영적으로 낳으셨으므로 우리는 날마다 자라가는 것입니다. 이것을 학자들, 정통신학자들은 결정적 성화라고 부릅니다. 칭의, 의롭다 칭할 때 이미 거룩함이 결정되었다는 것입니다. 완성은 아니나 결정된 것입니다. —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롬 8:30).
4. 은혜로 얻을 거룩한 삶
생명을 주시면 생활을 주시는 것입니다. 살아남도 살아감도 은혜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거룩함은 이미 결정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거듭남을 믿습니까?'라는 질문은 많이 하는데 '거룩해지는 것을 믿냐?'고 질문하면 머뭇거립니다. 우리는 생명을 얻은 것처럼 거룩한 삶을 기대해야 합니다. 봄되면 교회 앞에 유실수라도 하나 심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지상에 과일나무를 심는 것이 얼마나 좋은 일입니까? 우리도 나무를 심을 때 열매를 예상하고 기대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심으실 때 열매의 예정된 바가 있는 것입니다. 이미 우리를 부르실 때 거룩하게 하심이 결정된 것이며 그것이 다 은혜라는 것입니다. —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롬 8:32). 생명을 주신 이가 생활, 성품의 변화를 주시지 않을 수 없는데,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본문 10절과 14절은 거룩함을 얻었고 거룩하게 된 자라고 합니다. 율법이 구약의 모세오경에 나오는데 핵심은 레위기 말씀입니다. — "너희는 거룩하라 이는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레 19:2), “너희는 스스로 깨끗하게 하여 거룩할지어다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레 20:7). 저는 이전에는 이 말씀을 읽을 때 마음이 많이 힘들었습니다.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의 거룩하심처럼 거룩해지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항상 그렇습니다. 명령이 있는 곳에 약속이 있습니다. 명령하신 분이 친히 이루십니다. 우리는 당장 눈에 띄는게 콕 찌르는 것이나, 그 주변에 약속을 읽어야 합니다. — “나는 너희를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이니라”(레 20:8). 제가 이 8절을 읽지 않고 7절만 읽은 것입니다. 우리를 친히 거룩하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입니다. 명령만 보면 절망에 빠지고 위축됩니다. 그러나 바로 이어지는 말씀이 우리를 거룩하게 하는 그 명령을 이루는 자가 바로 여호와이심을 천명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피부 하나도 못 바꿉니다. 마음은 더 어렵습니다. 그러나 여호와가 하십니다. — “너희는 나에게 거룩할지어다 이는 나 여호와가 거룩하고 내가 또 너희를 나의 소유로 삼으려고 너희를 만민 중에서 구별하였음이니라”(레 20:26). 창세 전에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려고 선택하신 것입니다.
5. 거룩은 구별하여 드려지는 것이다
거룩은 구별하는 것뿐만이 아니라, 구별해서 하나님께 드려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드려지지 않으면 거룩이 아닙니다. 양과 소를 아무리 잘 구별해도 하나님께 드려져야 고르반, 거룩한 성물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과부의 두렙돈이라도 하나님께 드려지면, 비천한 여인이 깨드리는 향유 옥합이라도 예수님께 드려지고 그의 향품으로 사용되면 거룩한 것입니다. 오병이어도 작은 것이나 예수님의 손에 들려지면 거룩한 것이요, 모세의 지팡이도 흔한 막대기나 하나님이 쓰시겠다고 하면 홍해도 갈라지고 아말렉을 전쟁에서 물리치는 것입니다. 사렙다 과부의 기름통에 있는 기름과 가루도 하나님이 선지자를 위하여 쓰시고자 할 때 거룩해진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도 육체도 삶도, 온전하고 뛰어나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쓰시겠다고 하면 거룩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 입성하실 때 건장한 말이 아니라 새끼 나귀를 타고 오셨습니다. 주가 쓰시겠다고하면 거룩해지는 것입니다.
6. 오직 거룩하게 드려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다
1) 예수님의 거룩한 제사
십자가의 죽음은 저주입니다. 그러나 그 죽음을 하나님이 받으실 때 그것은 거룩한 죽음, 부활의 권능이 나타나는 죽음이 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겟세마네에서 ‘나의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시옵소서’라고 기도합니다. 십자가의 죽음은 가장 저주받은 죽음입니다. 멀리서 보면 몸을 떨고 온갖 것을 쏟아냅니다. 혀는 천장에 붙고 눈은 뒤집히고 이는 잇몸을 파고 듭니다. 십자가는 목불인견(目不忍見)이라 그림으로 보는 것과 완전히 다릅니다. 그 죽음이 거룩한 죽음이 된 것입니다. 저주의 죽음을 죽으셨으나 하나님이 사용하시면 거룩한 죽음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하나님의 거룩한 제물, 영적 산 제사를 드리는 제물이 되는 것입니다(롬 12:1). 주님의 십자가의 죽음에서 휘장이 하늘에서 땅으로 갈라지고 죽음을 삼겼던 땅이 죽음을 토해내고, 십자가의 죽음으로 죽음을 깨뜨리셨다면 그것은 주님이 자기 자신을 단번에 제물로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거룩함을 이미 얻었습니다. 내가 취한 것이 아닙니다. 선물로 받았습니다.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신 그 제사로 인해서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온전한 제물로 단번에 드리셨으나 평생 준비해서 드렸습니다. 죄없는 사람의 아들로 오셔서 흠없고 점없는 어린양(벧전 1:19)과 같이 거룩한 제물로 드려지시고 그 공로로 우리가 거룩함을 입은 것입니다. 우리는 거룩할 수 없습니다. 지금 이 순간조차도 말입니다. 우리의 곤고함에 애통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흠 없고 점 없는 어린양과 같은 보배로운 피로 된 것입니다(벧전 1:19). 그가 그 자신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거룩하고 하늘보다 높이 되신 이가 바로 그리스도이십니다(히 7:26). 예수님도 이 땅에 오셔서 순종을 배우셨습니다(히 5:8-9). 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몸을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 “하나님이 제사와 예물을 원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나를 위하여 한 몸을 예비하셨도다 번제와 속죄제는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히 10:5-6). 이 본문 바로 앞절은 시편 40절 말씀의 인용입니다. 다윗이 수렁에서 건져주심을 노래하는 것은 구약의 번제와 제사가 아닌 한 몸을 예비하사 그리스도가 단번에 자기를 제물로 드리사 이루신 것입니다.
구약의 제사는 그림자, 예표입니다. 그 실체와 몸은 바로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래서 이제는 제사가 아닌 예수 그리스도로 온전케 되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은 자기 자신을 모든 제물로 드리십니다. 속죄제, 속건제, 화목제, 번제로 드리셨습니다. 번제는 자기 자신을 드리는 것입니다. —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희생제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엡 5:2). 자기 자신을 드리신 것은 우리 자신을 사시기 위함입니다. 소유를 주신 것이 아니라 존재를 주셔서 우리 자신을 사신 것이요, 그래서 여러 번이 아닌 단번의 제사로 드리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나의 값입니다. 예수님이 나의 생명, 생활이십니다. 예수님이 번제로 자기 자신을 드리셨습니다. 번제는 내장까지 꺼내서 다 태워드리는 것입니다. 헌신제입니다. 흔적도 안 남습니다. 짐승의 종류와 상관없이 번제는 내장까지 다 씻어서 드립니다. 이것이 바로 거룩함입니다.
2)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하고 소망하라
본문의 13절은 그가 거룩하게 된 자들을 한 번의 제사로 영원히 온전하게 하셨다고 합니다. 이것을 믿어야 합니다. 공로로 나가면 안됩니다. 하나님이 내일 나를 다시 일으킬 것임을, 깊은 신음의 밤이 있어도 새벽에는 찬송의 새노래가 나의 입에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어제 밤에도 신음이 있었습니다. 가슴을 치는 것과 하나님 앞에 다시 일어나 붙드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자기의 아들을 주셔서 우리를 온전케 하셨습니다. 혹자는 전부 은혜이면 막 살지 않겠냐고 합니다. 그러나 그는 잘 모르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은혜라고 할 때 비로서 사람은 윤리적이 됩니다. 다 은혜라고 할 때, 내가 한 것이 없다고 할 때 한 톨의 쌀도 감사합니다. 생명 주신 이께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단번에 죄를 위해 죽으시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했다고 합니다(벧전 3:18). 베드로서에 이런 말이 많이 나옵니다. 베드로서는 네로의 박해를 앞둔 소아시아 교회에 위로의 편지로 쓴 것입니다. 우리에게 위로가 되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흠도 점도 없는 보배로운 어린양의 피입니다. 의로운 자의 불의한 죽음입니다. 아직 완성된 것이 아니라 그 거룩함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는 몇십 배의 결실을 얻을 수 밖에 없는 거룩한 나라, 왕 같은 제사장, 택하신 족속, 옥토에 떨어진 씨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이미 온전케 하시려고 정하셨습니다. 그러니 실망이나 좌절하지 말고 내 자신에 먼저 소망을 가지십시오. 우리에게 있는 것은 소망, 약속, 언약뿐입니다. 본문 16절입니다. — “내 법을 그들의 마음에 두고 그들의 생각에 기록하리라”(히 10:16).
뜻하신즉 이루시고 이루신즉 선합니다. 우리는 뜻해도 머뭇거리나 하나님은 즉시 이루시고 선합니다. 이 땅에서는 복이요 하늘에서는 상급입니다. 이 땅에서 복된 것은 하나님께 영광을 올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만이 하늘에서 상급이 됩니다. 내가 했다라고 하면 상급이 없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간혹 우리를 낮추십니다. 있는 그대로를 보게 하십니다. 그래서 좌절하고 힘듭니다. 그러나 그 때가 이 땅의 복의 출발입니다.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애통하면서 우리가 안된다고 할 때, 하나님이 이루시라고 하고 맡길 때 하나님이 친히 내 안에서 이루어 주시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십니다. 영광을 돌리게 돼야 복이고 상급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일하심은 항상 우리를 영광으로 이끌어 가십니다. 그러므로 내가 한 것은 하나님께 못가져 감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거룩함은, 우리가 날마다 거룩해지는 것은 어제보다 오늘 더 잘 기대고 의지하는 것입니다. 찬송으로도 계속 고백하는 것입니다. 세월 지나가도 의지할 것뿐입니다. 기대는 사람이 거룩한 사람입니다. 납작 엎드려 기도하는 사람이 거룩한 사람입니다. 반드시 내가 서고 가는 길이 반듯하고 하는 것은 다 거짓말입니다. 하나님 앞에 기댈 때만 반듯합니다. 기도할 때만 반듯합니다. 어제보다 오늘 더 잘 의지하고 십자가의 그늘에 거하고 신령한 음료와 양식을 하늘로부터 온 그것을 마셔 내 배에 생수의 강이 거하는 것이 거룩한 것입니다. 내가 태생이 좋고 거룩해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지상에서는 칭찬이 조금 있을지 모르나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거룩함은 거룩한 누림입니다. 하나님의 빛을 받으면 빛을 내고 향과 사랑을 받으면 향과 사랑을 발산하고 은혜를 받으면 감사하고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생명의 삶을 사는 것이 거룩한 것입니다. 주님의 신령한 살과 피를 마시고 신령한 몸이 되는 것, 그것이 거룩한 것입니다.
7. 결론: 하나님께 신령한 예배를 드리라
— “너희도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벧전 2:5). 이로 인해 우리의 공로가 아니나 이제 우리 몸을 로마서의 말씀과 같이 영적 산 제물로 드리는 거룩한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거룩함의 핵심은 그러므로 예배입니다. 예배를 소망하고 기대해야 합니다. 예배 가운데 하나님이 모든 것을 베푸십니다.
이번에 동해바다에 가서 문을 여니 수평선이 보였습니다. 자로 대지 않아도 반듯했습니다. 우리 교회의 선도 곱습니다. 하나님은 절대 공평하십니다. 애통함이 있으면 절대 기뻐하십시오. 그래야 내가 영광의 도구가 됩니다. 나의 부족함을 영광의 도구로 삼으시기 때문입니다. 내가 연약하고 모난것, 부족한 것 괜찮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쓰십니다. 이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아무리 하찮은 것이라도 주님께 드려저 받으시면 거룩한 것입니다. 이런 감사가 넘치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