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포하는 교회

주일낮예배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 2

선포하는 교회  |  주일예배 설교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2


           

[20181230][십자가지기교회 주일낮예배: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39)] 성도의 견인을 믿음 (눅 15:17-24) 문병호 목사

관리자
조회수 50


[20181230][십자가지기교회 주일낮예배: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39)] 성도의 견인을 믿음 (눅 15:17-24) 문병호 목사 


*음성파일: 게시물 하단 "관련링크"에서 청취 혹은 내려받기 가능합니다. 


(눅 15:17)이에 스스로 돌이켜 이르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눅 15:18)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눅 15:19)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눅 15:20)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눅 15:21)아들이 이르되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하나 
(눅 15:22)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눅 15:23)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눅 15:24)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그들이 즐거워하더라


<녹취록>



1. 세 가지 비유: 회개


누가복음 15장에는 세 가지 비유가 나옵니다. 첫 번째는 잃어버린 양의 비유입니다. 양 백 마리가 있는데 아흔아홉 마리는 우리에 있고 한 마리를 잃어버렸습니다. 그런데 그 아흔아홉 마리를 이정도면 됐다고 기뻐하지 아니하고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찾아 나서고 끝내 그 양을 찾을 때 즐거워하고 어깨에 매고 오는 비유입니다. 두 번째 비유는 열 개의 드라크마 비유입니다. 드라크마는 은전입니다. 그것을 열 개 가진 사람이 한 개를 잃어버리자 아홉 개면 됐다고 하지 않고 잃어버린 하나를 찾을 때 여러 사람이 모여 함께 기뻐한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 비유는 본문의 돌아온 탕자의 비유입니다.
이 세 가지 비유에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전부가 아닌 일부를 잃어버렸는데 그것을 찾기 원하는 주인의 마음, 그리고 그것을 찾을 때 잔치하는 모습입니다. 이 잔치는 천국의 잔치일 것입니다. 또한, 단순히 은전, 양을 찾았다는 개념이라기보다 본문의 7절과 같이 잃은 양을 찾아 돌아오는 기쁨은 의인 죄인 하나를 찾아 구원하면 의인 아흔아홉보다 기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부분은 주님께서 직접 설명해 주신 것입니다. 드라크마 비유도 마찬가지로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천사들이 기뻐하며 하나님 앞에 기쁘다는 것, 즉 돌아오는 사람의 회개를 뜻합니다.



2. 돌아온 탕자의 비유


그리고 오늘 본문이 나옵니다. 본문의 아버지는 재산이 많고 품꾼이 많을 뿐만 아니라 자식을 사랑하는 긍휼의 아버지입니다. 크게 보면, 창조주, 구속주입니다. 만물을 지으신 아버지시고 구원하시는 아버지 입니다. 불쌍히 여기시고 긍휼을 베푸셔서 아들까지 주신 하나님을 뜻합니다. 그리고 본문의 탕자는 두 아들 중 둘째입니다. 양의 비유는 백 마리 양 중 한 마리, 드라크마의 비유는 열개 중 하나, 이제 탕자의 비유는 두 아들 중 하나입니다.


1) 죄: 하나님의 품을 떠난 것


이 아들이 어떤 죄를 지었는지는 18-20절에 나옵니다. 하늘과 아버지에게 죄를 지었다고 합니다. 쉽게 생각하면 하늘 아버지께 죄를 지었다고 보면 됩니다. 결국 하나님께 죄를 지었다고 봐도 되는 것입니다. 물론 비유 자체는 집 나간 아들이지만 그 너머의 영적 뜻은 하나님을 떠난 것을 의미합니다. 장성한 아이가 재산을 받아 나간 것이 큰 죄는 아닙니다. 그리고 그가 나가서 방탕하게 재산을 허비합니다. 물론 잘못한 것이지만, 그것 자체가 핵심은 아닙니다.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다고 할 때, 스스로 아들이 될 수 없고 품꾼이 되어야 한다고 할 때 그 요지는 떠났다는 데 있습니다. 자식이 부모의 품을 떠난 것이 죄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품을 떠나는 것이 죄라는 것입니다. 나가서 무엇을 한 것이 핵심이 아니라 본문의 말씀은 하나님의 품을 떠난 것을 죄로 보는 것이며, 그것을 탕자가 깨달은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는 품꾼이라도 좋으니 함께 있게만 해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내가 어떤 처지에 있든 부모와 함께 있는 것을 중요하게 여긴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의 자녀를 향한 견인의 은혜


본문에는 세 종류의 사람이 나옵니다. 첫 번째는 아버지의 아들 된 사람입니다. 분깃 곧 유산을 얻는 자입니다. 두 번째는 품꾼입니다. 유산이 없고 삯을 받는 자입니다. 종은 아니지만 집에 머무는 자가 아닙니다. 세 번째는 종들입니다. 종들은 빨리 가서 기름진 송아지를 잡으라고 할 때 부름을 받는 자들입니다. 집에 머무나 유산은 없습니다. 자녀된 사람, 품꾼, 종들 이렇게 세 종류의 사람입니다. 자녀는 집에 머물기도 하고 분깃도 있습니다. 구약으로 열두 지파, 신약으로 그리스도를 믿어 자녀가 된 자입니다. 본문의 비유는 바로 이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돌아온 탕자에 대해 주로 구원에 대한 설교를 많이 합니다. 믿지 않는 자가 믿어 자녀가 된 것말입니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기본적으로 자녀된 자입니다. 성경에는 두 아들에 대한 이야기가 자주 나옵니다. 이삭과 에서처럼 말입니다. 오늘 비유도 그렇습니다. 아들이 나갔다가 들어온 것입니다. 아들은 하나님이 택하셨으므로 나갔다가도 들어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본문에 대해 택함받은 자녀는 하나님의 은혜로 끝까지 돌아온다는 것, 즉 성도의 견인으로 오늘 설교를 정한 것입니다.
"견인"은 한자로 여러 가지 의미가 있으나 끝까지 참을 수 있게 하시고 그 자리에 견디도록 은혜를 베푸시는 것이 핵심입니다. 그래서 영어로는 참는다는 의미로 되어 있습니다. 견인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끝까지 그 자리에 머물 수 있도록 하나님이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것으로 보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견인을 성도의 참음으로 번역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참음은 성도의 자질이나 공로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견인이라는 번역은 참으로 잘 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견인이라고 하면 끌고 가는 것, 끌려 가는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끌고 가십니다. 본문의 탕자 비유는 이미 자녀인 자가 아버지의 사랑을 누리면서 그 마음에 허탄함이 있어 유산을 빨리 받아 집을 나갔는데, 끝내는 그 자녀를 다시 집으로 돌아오게 하는 것, 이미 자녀가 나갈 때 아버지는 돌아올 것을 알고 내보내는 것이 본 비유의 핵심입니다. 어떤 사람은 그럼 아버지가 언제는 나가게 하면서 막지 않았다고 뭐라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탕자가 나가니 갑자기 흉년이 생깁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섭리인 것입니다. 나가면 모든 것이 풍족할 것 같은데 그렇지 않음을 보이기 위해 하나님이 품을 떠난 탕자에게 섭리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본문의 요지입니다.


3) 아버지로서의 하나님


본문의 아버지는 하나님이십니다. 구약에는 창조의 하나님, 홍해를 가르고 물을 반석에서 나게 하고 만나와 메추라기를 내려주신 창조주 하나님입니다. 이런 구약적 개념, 창조주의 개념이 신약에 오면 아버지로 나타납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산상수훈의 핵심 요지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제시하신 것입니다. 아버지로 부르는 것입니다. 구약에는 아버지의 개념이 거의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신약은 성취이고 실체이므로 아버지로 나타나는 것이요, 우리는 자녀와 양자의 영을 받고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니 얼마나 좋습니다. 공중의 나는 새와 들의 백합화에 대한 비유입니다. “하물며 너희일까보냐”라고 하시며 자녀 됨의 복됨을 우리에게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4) 부모의 기쁨: 품속의 자녀


품속의 자녀라는 말이 있습니다. 부모님이 계시지 않으니 가장 그리운 게 함께 있는 것입니다. 어디 좋은 곳을 가면 이곳에 함께 계시면 좋았으리라는 아쉬움이 생깁니다. 그러나 여행도 가기 싫습니다. 부모님이라도 계시면 함께 가는데 아니 계시니 회오만 생길 뿐입니다. 그래서 품속의 자녀라고 합니다. 자녀들은 그러나 그것을 잘 모릅니다. 입신양명해야 부모가 좋아하는 줄로 압니다. 그러나 아닙니다. 그저 안 아프고 크게 삐뚤어지지 않고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으며 부모에게 효도하고 공경하는 것, 그것을 원합니다. 성경에도 보면 다 그것입니다. 그래서 부모에 대한 효도가 약속 있는 첫 계명입니다. 부모의 품이 낯설고 스산하면 그 자녀는 결코 편안한 마음을 가질 수 없습니다. 나무 기둥도 하나 묶어 놓고 기댑니다. 부모도 그렇습니다. 나무가 잘나서 기대는 것이 아닙니다. 부모는 함께 있으므로, 그 자체가 귀하고 가치가 있는 것이지 어떠해서 귀한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함께 있는 것, 품안의 자녀입니다.


5) 하나님과 멀어진 성도는 세상에게 착취당함


본문의 탕자는 그것을 모릅니다. 그래서 빨리 분깃을 받아 떠나려고 합니다. 떠나는 것이 둘째의 가치관입니다. 저는 이 둘째가 아주 나쁘고 엇나간 아들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누구라도 자녀는 이런 마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세상에 나가면 다 똑같습니다. 주머니에 돈 쥐어 주면 철없는 자식들은 다 똑같습니다. 안 좋은 사람을 만나 사기당하고 봉변당합니다. 이 둘째 아들은 당시 관습에 따르면 부모 재산의 3분의 1을 받습니다. 아주 많은 돈이었을 것입니다. 본문 직전 13절을 보면 이 돈을 받아 먼 나라에 갔다고 합니다. 먼 나라는 하늘나라에서 먼 나라, 아버지 품을 멀리 떠난 것을 의미합니다. 바로 죄입니다. 재물을 가지고 먼 나라로 갔다는 것, 그 자체가 죄입니다. 아버지 품을 떠난 것, 나무 뒤로 아담이 숨는 것이 죄입니다.
주님의 품은 이 세상 어느 것도 대체하지 못합니다. 주고받는 세상의 이치, 남기는 것이 세상의 큰 매력입니다. 세상은 다 마약장사와 같습니다. 처음에는 백만 원 주고 한 봉지 샀다가 나중에는 천만 원 주고 사게 합니다. 처음에는 싸게 주었다가 나중에는 더 주어도 못 사게 되는 것이 세상의 이치입니다. 그것이 다 세상의 이치입니다. 세상의 주고받는 것, 이것이 젊을 때는 좋아 보입니다. 부모는 하라고 할 뿐이기 때문입니다. 부모는 은혜와 사랑으로 하라고 하지만, 세상에서 주고받는 것은 나를 착취하려는 것입니다. 세상이 악한 질서, 타락에 놓여 있으므로 그렇습니다. 그나마 법이 있어서 억제하는 기능이 있으나 기본적으로 그렇습니다. 그 세상으로 나가는 것입니다.
우리 찬송가에도 보면 "주 안에 있는 나에게 딴 근심 있으랴"고 합니다. "십자가 밑에 나아가 내 짐을 벗었네." "주와 함께 길 가는 것 즐거운 일 아닌가 우리 주님 걸어가신 발자취를 밟겠네"라고 합니다. "주의 음성을 들으니 사랑한단 말일세"라고도 합니다. 찬송의 가사입니다. 찬송을 보면 '함께 있다'는 가사가 참 많습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 함께 있는 것이 참 많습니다. 그리고 그와 반대되는 것, "주를 멀리 떠났다 이제 옵니다"와 같은 가사가 많이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품 안에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세상은 먼 나라입니다. 소돔과 고모라 같은 땅, 음란한 땅입니다. 롯은 그 성이 너무 좋아 그것을 선택했으나 아브라함은 믿음이 있으니 먼저 택하지 않았습니다. 첫눈에 반하는 것은 다 세상 것입니다. 우리는 그 밤에 기도하고 선택해야 합니다. 꼭 하루를 넘기십시오. 첫눈에 좋아 보이는 것은 세상 것이요 허탄한 것입니다. 롯은 소알의 평지가 첫눈에 마음에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 땅에 유황과 불이 내렸습니다. 지금도 그곳에는 풀 한 포기 자라지 못합니다.


6) 하나님과 멀어진 성도를 견인하는 방법: 흉년


오늘 본문의 둘째는 바로 그런 먼 땅으로 가서 허랑방탕하게 사용했다고 합니다. 허랑방탕은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게 재물을 사용한 것입니다. 우리는 성도요, 신자입니다. 천국 시민권을 가진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우리는 재물 하나를 쓸 때도 하나님의 뜻을 헤아려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허랑방탕한 것입니다.
이후 그 나라에 큰 흉년이 들었다고 합니다. 그 흉년은 하나님이 내리신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보통 비유라고 하면 그냥 흉년이 없고 평상시에 나가서 돈을 다 탕진했다고 하면 됩니다. 그런데 흉년이 나옵니다. 그것은 아무리 좋아 보여도 그 뒤에 환란이 숨어 있는 것을, 그런 것이 세상임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은혜는 구하되 세상에서 공짜를 구하면 큰일납니다. 일거에 떼부자 되는 것 등은 상상도 하지 마십시오. 세상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습니다. 빼앗는 데 유명한 것들은 많지만, 주는 것으로 유명한 것은 절대 없습니다. 하나님 안에서만 삼십 배 육십 배 백 배의 풍요함이 있습니다. 세상에서는 내가 노력해서 최소한의 것을 얻는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본문의 흉년은 하나님의 견인하는 방법입니다. 하나님이 다시 끌어오시려고 하는 섭리입니다. 탕자의 입장에서는 재앙처럼 보이지만 말입니다. 인간 하나 살리려고 기후까지 변화시킨 것입니다. 아흔아홉 마리 양과 드라크마의 비유처럼 잃어버린 자 하나를 위해 기후까지 바꾸신 것입니다. 우연인 것 같아도 날씨 하나도 우리를 이끕니다. 우리는 항상 그렇게 깨어 있어야 합니다. 역사 하나도 우리 삶의 하나님의 섭리 수단입니다. 돌아오라고 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나라 백성에게 붙여 산다고 합니다. 부잣집 아들이 하나님과 함께 살고 그 속에 살던 자(요 14:17)가 하나님의 품을 떠나니 인간에 붙어 비참하게 사는 것입니다.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떠나 제사장들에게 흥정하려 가니 문전박대를 당합니다. 가장 비참한 것이 이것입니다. 세상에 기울고 그것과 타협하면 우리가 다 세상에 빌붙어 사는 것입니다. 그것은 허무합니다. 아버지 품 속에 함께 살던 자녀가 세상 가서 의지할 것이 없어 빌붙어 사는 것입니다. 붙어 산다는 말이 바로 품꾼, 삯꾼이라는 의미입니다. 자녀가 다른 집의 품군이 된 것입니다.


7) 스스로 돌이키게 하시는 하나님


그리고 17절에 이제 스스로 돌이킵니다. 이것은 바로 잃어버린 양과 드라크마 비유에서 말한 회개입니다.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로 회개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스스로’는 세상이 도와줘서도 아니고 내 능력도 아닙니다. 하나님이 완전히 길을 되돌리게 몰아가신 것을 의미합니다. 스스로 돌이켜 생각이 바뀐 것입니다. 영적인 철이 드는 것입니다. 아이들의 가치관이 중요합니다. 저도 부모 품을 부단히 떠나려고 했습니다. 부모님이 많이 간섭하셨는데, 유학을 다녀오니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아버지만 계시니 그저 아버지와 같이 있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옆방에서 3주간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 아버지도 오래 계시지 않았습니다. "스스로 돌이켜"는 불가항력적인 은혜입니다.


8) 하나님의 품이 귀함을 깨달음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라고 합니다. 자녀 됨의 귀함을 품꾼이 되어 보니 알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18절,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다"고 합니다. 이미 말한 것처럼, 회개하고 본질을 깨달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져버린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약속 있는 첫째 계명이 부모를 공경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부모를 공경하면 장수하고 기업이 흥하다고 했습니다. 제가 이런 말씀 드릴 자격이 없으나 부모는 무조건 공경의 대상입니다. 길에 있는 말뚝 하나도 말을 매는 데 필요합니다. 그런데 부모가 아무리 잘해 줘도 조금만 잘못하면 나쁘다고 합니다. 사시사철 밥해 먹여도 부모에게 감사할 줄 모른다는 것입니다. 철이 들어야 합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육신의 부모와 비교할 수 없이 우리의 중심을 아시고, 시시각각으로 채워 주시고, 지혜를 주시며, 내가 한 것 없는데 하게 하시는 분입니다. 저도 그랬습니다. '생명의 말씀사'에게 큰 믿음을 가지고 이야기했습니다. <<기독교강요>> 라틴어 3권 번역을 12월까지 해 보겠다고 말입니다. 그런데 어제부로 3권까지 번역을 마쳤습니다. 예배 드리는 것이 세상에서 가장 규칙적입니다. 예배 일정대로만 살면 다 반듯해지고 질서가 잡힙니다. 아주 규칙적인 생활을 하게 됩니다. 그러니 쌓입니다. 조금씩 쌓이는 것을 무시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다 하십니다. 예배 드리는 것이 얼마나 귀합니까. 예배는 자녀가 아버지 품에 있는 것의 절정입니다. 그의 임재와 생명을 누리는 것, 천국의 잔치, 생명의 잔치, 영생 백성의 잔치입니다.
여러 가지가 있는 것 같아도 본질은 하나님에게 가까이 있는 것, 함께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치장해도 겨울의 추위를 막을 일은 햇볕으로 나아가는 것밖에 없듯이 말입니다. 태양 하나만 멀어져도 이렇게 추운데 하나님과 가까이 있으면 얼마나 따뜻하겠습니까?


9) 새로이 환영해 주시는 하나님


이 자식이 돌아옵니다. 아들이 아버지께 뛰어가지 않았습니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먼저 뛰어갑니다. 22절, 아직도 거리가 먼데 그러합니다. 아들은 망설였을 것입니다. 불안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아직도 거리가 먼데 뛰어갑니다. 이것은 아버지가 기다리고 있었음을 의미합니다. 기다리고 있다가 먼 곳에 점처럼 보여도 확 뛰어나가 자식을 맞이한 것입니다. 날마다 우리가 살아갈 때 하나님은 먼저 우리를 알아보시고 뛰어나오십니다. 제일 좋은 옷을 입혀 주시고 손에 가락지, 즉 언약을 베푸시고 발에 신발, 즉 보호를 제공해 주십니다. 이스라엘에서 신발이 없으면 못삽니다. 그리고 송아지를 잡아 잔치를 베푸십니다. 첫째 아들에게는 양 한 마리도 안 잡아줬으나 둘째 아들에게는 살찐 송아지를 잡아 잔치를 베풉니다.
사도 바울도 "날마다 내가 죽노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연약합니다. 그러나 성도의 즐거움은 바로 나를 끝까지 붙드는 주님의 은혜에 있습니다. 어제 저는 오늘 주보에 실린 글을 썼습니다. 모든 것이 새 것이라는 글입니다. 무슨 글을 쓸까 하다가 가만히 생각해 보니 모든 것이 새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전부 새롭습니다. 은혜 받으면 말입니다. 옛 것도 지금 것도 미래 것도 모두 새롭습니다. 그 글의 마지막에 보면 그냥, 단지, 그저 새롭다고 했습니다. 값없이 모든 것이 새롭습니다. 그저 자녀입니다. 이미 구원받은 백성이 "날마다 나는 죽노라, 날마다 나는 사노라"라고 말하는 새로움을 노래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오늘 본문입니다. 잠시 실족하더라도 하나님 앞에 기대고 의지합니다.
—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에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라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습 3:17).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을 찾는 것으로, 우리가 그에게 가까이 있는 것으로 기뻐하십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우리를 잠잠히 사랑하시고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즐거이 부르십니다. 잔치를 행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끝까지 이끄시는 하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녀 됨을 주셨습니다. 본문 21절입니다. — “아들이 이르되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하나.” 여기서 핵심은 "아들이 이르되"입니다. 이미 아들입니다. 여기서 모든 것이 다 끝난 것입니다. 착하고 충성된 종이 이르되 저는 무익한 종이라고 합니다. 거룩한 백성, 성도가 이르되 자신은 거룩하지 않다고 합니다. 우리는 이미 성도이고 아들입니다. 이 탕자는 영 믿음을 버린 자가 아닌 것입니다. "아들이 이르되"라고 하니 아들임을 믿고 있었던 것입니다. 스스로 아들이 아니라고 한 것은 아닙니다. 이것이 핵심입니다. 자녀는 자녀입니다. 더도 덜도 없습니다. 자녀이면 자녀입니다. 그러면 이래도 저래도 자녀입니다. 하나님이 끌고 가시되 다만 깨닫게 하십니다.



3. 결론


연말 연시, 한 해를 넘기는 이 때에 내가 참을 수 있고 그 자리에 있게 하시는 견인의 은혜를 다시 기억함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역사가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돌이킬 때마다 날마다 천국의 잔치가 있는 성도님들의 삶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