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함께 메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 하며 빛과 어둠이 어찌 사귀며
(고후 6:15)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고후 6:16)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내가 그들 가운데 거하며 두루 행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되리라
(고후 6:17)
그러므로 너희는 그들 중에서 나와서 따로 있고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라 내가 너희를 영접하여
(고후 6:18)
너희에게 아버지가 되고 너희는 내게 자녀가 되리라 전능하신 주의 말씀이니라 하셨느니라
<녹취록>
1. 하나님의 성전 된 성도
우리가 알다시피 고린도교회는 아주 부흥된 교회요 여러 이방인들과 유대인들이 있었으며 구제를 잘한 선한 부분이 있는 교회였습니다. 그러나 여러 부류의 사람이 있고 고린도 도시의 특성 상, 이견이 많고 여러 일을 하다 보니 시끄러운 일이 많았습니다. 심지어 사도 바울에 대해서도 사도가 아니라고 사도권을 부인하는 일이 있었으며 바울, 게바, 아볼로 파 등 당파를 짓기도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교회를 향해 두 편지를 씁니다. 고린도전서와 고린도후서입니다. 이 교회는 바울이 2차 전도여행 때 개척한 교회입니다. 특별히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를 향해 ‘너희들이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말합니다. 본문은 16절에서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말합니다. 구약시대 하나님의 성전이 어떤 것인가요? 다윗은 지으려고 해도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으시고 그 아들 솔로몬이 지은 그런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이 오셔서 성전을 헐면 3일만에 지으실 것이라고 할 때 그 성전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런 성전이라고 합니다. 성전된 성도들이 마땅히 살 바를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전은 여호와의 임재와 영광, 생명, 언약이 있는 곳입니다. 성전에는 단절이 없습니다. 모두 연결되어 있고 빽빽합니다. 홍색, 청색, 자색 꼬은 실로 빽빽하여 틈이 없는데, 이것은 여호와의 완전한 영광의 임재이자 영생, 생명을 의미합니다.
2. 영생
1) 하나님의 자녀 됨
성전이 이러한 곳인데, 이 성전 된 하나님의 백성은 16절,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나의 백성이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구약적인 표현입니다. 구약에서 영생의 표현인 것입니다. 이것을 신약시대 때는 18절, ‘나는 너희에게 아버지요 너희는 나에게 자녀가 된다’는 방식으로 표현합니다. 영생은 그저 죽지 않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로서 영원히 사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는 그의 자녀가 되어야 하고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가 되어야 합니다. 이것을 구약시대에는 자녀 됨의 개념보다 백성 됨의 개념으로 표현한 것이요, 본문에서 이 두 가지가 다 나오는 것입니다. ‘너희는 내 백성이고 나는 너희의 아버지라.’ 이것이 영생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과 자녀 삼으시는 것입니다.
2) 하나님과만 "함께"
그러니 본문은 여호와의 성전이요, 언약 백성으로 우리가 여호와와 함께 살아가는 것을 말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함께'라는 말을 많이 합니다. 직장, 가족, 학교에 함께 구성원 된 자들이 있습니다. 우리의 '함께'는 하나님과 이루어집니다.
3. 거룩과 "함께"
1) 진리와 "함께" 하는 거룩
이 ‘함께’에는 두 가지가 있어야 하는데, 우선 진리 가운데 거룩해야 합니다. 성전이 우상과 함께 할 수 없고 빛과 어두움이 함께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벨리알, 사탄이 함께 할 수 없다고 말씀에서 알려 주는 것입니다.
2) 사랑과 "함께"하는 거룩
하나님이 율법을 주실 때 그것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나뉩니다. 그리하여 율법의 모든 명령은 사랑입니다. 사랑은 서로 공유하는 것이고 이어보려는 것, 연결해 보려는 것입니다. 사랑은 어쨌거나 닿아보려는 것, 다시 매듭을 연결시켜 보려는 것입니다. 사랑은 담을 허무는 것이고, 한 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기본적으로 외향적입니다. 바깥을 향해 뻗치는 것입니다. 두 사람이 서로 안쪽으로만 향한다면 절대 사랑할 수 없습니다. 먼저 외향적이 되고 손을 내밀고 연결시키려고 해야 합니다. 거룩은 조금 다릅니다. 이것은 자기 자신을 닦는 것, 자기 자신 속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사랑은 상대가 필요하나 거룩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 홀로 서는 것입니다. 사랑은 그 본질이 여럿이 하나가 되어 하나님 앞에 앉는 것이라면, 거룩은 하나님 앞에 홀로 구별되어 있는 것입니다. 거룩이라는 것은 둘이 할 수 없는 것이고 떨어져 있는 것, 멀리, 높이 있는 것입니다. 거룩은 분별해서 하나님 앞에 드리는 것입니다. 율법은 크게 이 두 가지입니다. 율법의 요체는 사랑의 명령인데,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인 이 계명의 전제는 거룩하는 것입니다. 바로 레위기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는’ 말씀에 따라 거룩함을 전제로 하는 사랑인 것입니다.
(1) 거룩 가운데만 시작되는 사랑 거룩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거룩은 철저히 하나님 앞에 내가 단독자로 사는 것입니다. 그 거룩 가운데 온전한 사랑이 있으며 사랑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구약의 율법입니다.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인데 거룩하지 않은 백성은 사랑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지 않은 백성을 그저 대충 들어 사랑의 도구로 쓰지 않으십니다.
(2) 거룩은 하나님의 은혜로 연단하는 것이다 거룩은 절대 우리가 스스로 행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여야 합니다. 제가 얼굴에 뭐가 하나 났습니다. 아무리 떼려고 해도 뗄 수가 없습니다. 이전에 사마귀가 나면 실로 묶어서 뗄 수 있었는데 이번에는 아무리 해보려고 해도 안됩니다. 거룩은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여야 합니다. 그래서 거룩은 할례와 같이 베어 내는, 정결과 같이 씻어 내는 것, 화제와 같이 태우는 것, 소제와 같이 빻는 것입니다.
(3) 거룩 없이는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없다 이전에 벽을 쌓을 때 보면 냇가에서 모래를 먼저 퍼 옵니다. 그것에 그대로 시멘트를 부어 개지 않습니다. 모래를 채로 거릅니다. 그러면 맑고 고운 모래가 나옵니다. 그것에 시멘트를 붓습니다. 채의 굵기에 따라 벽돌의 거칠기가 결정됩니다. 채로 치는 것이 바로 거룩입니다. 우선 채로 쳐서 거른 뒤 시멘트를 부어 벽돌을 만들 듯 사랑의 도구로 쓰는 것입니다. 채로 칠 때는 괴롭지만 정금같이 나오는 것입니다. 채로 치지 않으면 지을 수는 있으나 곧 무너집니다. 거룩이 없는 하나님의 일, 사랑은 다 무너집니다. 당장은 괜찮아보여도 말입니다. 촘촘한 채로 친 그 모래 위에 시멘트를 부어야 견고하게 됩니다.
3) 사랑과 거룩의 조화
이 사랑과 거룩, 두 가지가 어떻게 조화를 이루는지 살펴보려고 합니다. 구약 백성들은 사랑보다 거룩으로 자꾸 치우쳐 갔습니다. 그러니 구약시대에는 형식주의만 남습니다. 거룩은 자기를 지키라고 하고 사랑은 자기를 던지라고 합니다. 이 두 가지를 다 해야 합니다. 나를 지키면서도 던져야 합니다. 사랑은 손을 뻗으라 하고 거룩은 손을 거두어 씻으라고 합니다. 우리 성도들은 이 두 가지 가운데 놓여 있습니다. 사랑과 거룩의 명령을 받습니다. 거룩하기만 하라고 하고, 내향적으로 살기만 하면 좋을 것 같으나 그렇지 않습니다. 한쪽에 치우칩니다. 사랑한다고 하면서 과격해지기도 합니다. 그것이 바로 열심당원들입니다. 반면 사랑은 무시하고 의식만 찾는 바리새인, 서기관과 같이 될 수 있습니다. 이 사이에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거룩하시면서 사랑이셨습니다. 거룩하시면서 세리와 창기를 만나시고, 최고 거룩하신 분이 가장 더러운 사람들을 만나 주셨습니다. 더불어 먹고 마시고 그들의 것을 귀하게 여기고 이야기를 들어주셨습니다.
4. 거룩과 사랑으로 진리를 변증하라
오늘 설교 제목은 ‘진리를 변증한다’ 입니다. 변증은 옳은 것을 옳다고 얘기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다면 십자가에서 예수님은 "저 죄인들을 죽이소서"라고 말씀해야 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들을 용서하라고 하셨습니다. 즉 변증에는 거룩이라는 측면과 사랑이라는 측면 두 가지가 있는 것입니다. 스데반을 생각해 보십시오. 돌을 던지는 자에게 진리의 설교를 했습니다. 분명히 진리를 말했습니다. 그러나 설교 마지막은 그들에게 죄를 묻지 말라고 했습니다.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행 7:60).
1) 진리 없는 사랑은 교만이며 거룩해야 사랑할 수 있다
우리 기독교는 지금 이 기로에 놓여 있습니다. 진리도 세워야 하고 사랑도 해야 합니다. 어느 교회는 사랑을 강조한다고 하면서 진리에 약하고 어느 교회는 진리를 이야기한다고 하면서 사랑에 약합니다. 그래서 서로 다툽니다. 우리 교단 같은 경우는 진리라고 많이 얘기하는데 사랑이 없다고 비판을 받고 한신 교단 같은 경우는 반대로 비판을 받습니다. 겉으로는 대체로 그렇게 이해됩니다. 그러나 저는 개인적으로 동의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거룩해야 사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둘 중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둘이 같이 있기 때문입니다. 진리가 없이 사랑할 수 없습니다. 먼저 사랑하다보면 진리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정말 위험한 것이고 교만한 것입니다. 저는 책을 보고 공부하며 가르치기만 했는데 정말 중요한 때 한국교회를 위해 하나님이 쓰셨습니다. 바로 wcc문제였습니다. 이 일이 있을 때 세계적으로 큰 화두였으나 우리 한국교회의 입장을 여러 권의 책을 써서 잘 변호했습니다. 또 한 가지로 알파코스의 문제입니다. 이전에 에딘버러에 있을 때 알파코스에 대해 들었지만 잘 몰랐는데 한국에 와보니 아주 성행하고 있었습니다. 아주 세속적인 가르침인데, 진리 없이 먼저 사랑만을 전하자고 한 것과 성령의 신비만 강조하여 위험성을 많이 내포하고 있습니다. 또 다락방 이단 문제가 있습니다. 총회에서 이 논의가 있을 때 글 한 편을 써서 총회에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래서 다락방이 교단에 들어오는 것을 막았습니다. 또한 평강제일교회 문제가 있습니다. 탁명환 소장을 살해한 운전수가 있었던 교회입니다. 이 교회가 교단에 들어오는 것을 여러 분과 함께 섬겨 막았습니다. 이단 문제가 매우 심합니다. 최근 한 교수님으로부터 들었는데, 기장 쪽의 땅을 박태선의 전도관에서 모두 구입하고 있다고 합니다. 정부와 결탁하여 신천지니 하나님의 교회니 모두 진리를, 한국교회를 혼탁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2) 분별하고 구별하라
사랑이라는 것과 거룩이라는 것이 그 순서가 따로 있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가 먼저 하나님 앞에 바로 서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13장이 사랑의 장일 뿐만 아니라 본문 14절에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함께 매지 말라는 말씀도 있습니다. 우리의 멍에는 그리스도의 멍에입니다. 예수님이 매어 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멍에와 세상 사람들이 매고 있는 불법의 멍에, 불의의 멍에를 함께 매지 말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너는 소와 나귀를 겨리하여 갈지 말며 양 털과 베 실로 섞어 짠 것을 입지 말지니라”(신 22:10-11). 소와 나귀를 겨리하지 말라고 합니다. 우리는 주로 한 마리 소에 멍에를 씌우는데, 이스라엘은 주로 두 마리에 쌍으로 매웁니다. 그런데 신명기에서 소와 나귀를 한 쌍으로 멍에 매우지 말라는 것입니다. 소와 나귀를 같이 일 시키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양실과 면실을 같이 사용하지 말라고 합니다. 이런 것들이 전부 구별, 분별입니다. 원수를 내 몸과 같이 사랑하되, 그들과 함께 멍에를 매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열심히 주님의 멍에를 매야 합니다. 그것은 은혜의 멍에요,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시는 것입니다.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법궤를 맨 암소처럼 세상의 일을 함께 멍에 매면 안됩니다. 이에 대해 본문은 다섯 가지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1) 의와 불법은 함께 할 수 없다 첫째, 의와 불법이 함께할 수 없습니다. 의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이요, 은혜로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려고 하는 사람은 은혜를 구할 수 밖에 없는데, 그것이 의입니다. 이 의와 불법이 함께 할 수 없다고 합니다. 여기서 "함께"는 동업의 의미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불법은 하나님의 뜻이 아닌 내 뜻대로 하는 것입니다. 내 공로, 내 자질을 의지하여 내 생각대로 하는 것입니다.
(2) 빛과 더두움은 사귈 수 없다 둘째, 빛과 어두움이 사귈 수 없다고 합니다. 빛은 생명에 속한 것입니다. 빛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임하시는 방식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함께하는 빛과, 마귀 사탄의 어두움이 함께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로마서는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고 합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고 합니다. 빛은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는 것입니다. 곧, 은혜로 옷 입는 것입니다. 이 빛과 어두움이 사귀지 못한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속한 것은 순수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순수한 것을 요구하십니다. 빈 것, 깨끗한 것을 요구하십니다. 자질을 요구하시지 않습니다. 우리의 몫과 공로가 들어가지 않습니다. 아무것도 우리에게 없으니 하나님이 전부 하시겠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빛의 역사, 하나님의 역사가 내 안에서 왕성하지 않다면 그것은 내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내가 덜 비워서입니다.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어야 합니다. 벗어 던져야 합니다. 빛의 갑옷은 그리스도로 입어야 하는데, 그의 성령을 힘입어 그의 공로를 우리 것으로 사귀는 것입니다.
(3) 그리스도와 벨리알은 조화될 수 없다 셋째,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조화될 수 없는 것입니다. 벨리알은 악의 두목 정도로 보면 됩니다. 십자가 옆에 불상을 놓을 수 없는 것입니다. 여기서 ‘조화’는 같은 자리에 놓인다는 의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유일하게 서셔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으로 안된다고 다른 것을 덧붙이면 예수 그리스도는 사라지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긍휼이요, 자기를 부인하는 자들에게, 바로 죄인인 우리를 위하여 오신 것입니다. 집에 보면 틈만 나면 구석에 곰팡이가 핍니다. 어디서 오는지 모르겠는데 조금만 놔두면 그렇게 됩니다. 우리 교회도 창고 쪽의 곰팡이를 많이 닦아 냈습니다. 같은 자리에 놓으면 틈만 나면 들어옵니다. 마귀 사탄이 틈만 나면 우리에게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리스도만 두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고난을 당하고 죽으시고 부활하실 것을 예언하실 때 베드로가 "그리마소서"라고 하니 예수님이 "사탄아 물러가라"라고 하십니다. 베드로는 주님이 당하시기만 할 필요가 없다고 말한 것일 텐데 "사탄아 물러가라"라고 하십니다. 베드로의 그 생각이 벨리알입니다. 내가 조금이라도 해보겠다고 하는 것을 사탄의 생각으로 지칭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열심히 일해야 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열심은 거룩해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내가 정결하지 않으니,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하지 않으니 게으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만 내 심중에 모시면 질서와 규칙과 열심이 생깁니다. 그럴 때 무엇이든 할 수 있습니다. 많은 큰일들을 우리 기독교인들이 해냅니다. 한국에서도 많이 욕을 먹지만 통계를 내 보면 가장 중요한 일을 많이 하는 사람이 기독교인입니다. 왜냐하면 은혜로 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조화되지 않는 것입니다.
(4)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상관할 수 없다 넷째,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상관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상관’은 이익을 나누는 것입니다. 믿음은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 11:6). 하나님을 향하여 가는 사람과 하나님을 멀리하는 사람이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입니다. 이 둘이 이익을 나눌 수 없다는 것입니다. 성도는 많이 외로울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때 하늘 문이 열리고 천군천사가 우리와 함께 합니다. 그 때 요나도 돕고 엘리야도 돕습니다. 그 때 불병거를 보여 주십니다. 내가 다수의 편에 설 때가 아니라 거룩하고 하나님 편에 서서 믿을 때 그렇습니다. 믿는 것은 하나님을 향하고 하나님을 향해 나아가는 것입니다. 믿지 않는 것은 하나님을 멀리하고 내 생각대로 하는 것입니다. 이 둘이 함께할 수 없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도우십니다. 그러나 전제는 제1계명, 다른 신을 두지 말고 하나님만 붙들고 의지하는 것입니다. 내 존재마저도 희미한 것처럼 느껴질때에서야 하나님이 도우십니다. 내 정신과 육신의 힘이 남아 있을 때는 아직입니다. 완전히 나를 깨고 무너뜨릴 때입니다. 우리가 세상 속에 살고 있으므로, 사랑이라는 측면이 있으니 떠나라는 말이 아닙니다. 그러나 먼저 하나님의 거룩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5)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함께 할 수 없다 다섯째,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함께 할 수 없다고 합니다. 이것은 역사적인 배경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다윗 성전에서 바알신, 온갖 이방신을 섬긴 것을 말합니다. 므낫세 왕부터 시작된 일입니다. 요시야 왕의 개혁이 있었으나 얼마 못 가고 이로 인해 실질적으로 망해 버립니다. 모세가 율법을 받으러 갈 때 그 형 아론은 금송아지를 만들고 있는 것, 바로 그것입니다.
우리 자신이 바로 성전입니다. 목회자로서 저도 좀 더 눈에 보이는, 좀 더 편안한 가이드가 되면 좋으리라고 생각해 보기도 합니다. 그러나 저의 전문적인 일은, 서로 권면할 일은 바로 거룩을 이야기하는 가운데 그 사람을 일으키고 세워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리를 떠나면서 그 사람을 사랑한다고 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많은 분들이 저에게 뭐하러 그렇게 까다롭게 따지냐고 합니다. 그래도 다 같은 하나님의 자녀인데라고 하면서 말입니다. 그러나 먼저 진리를 분별하여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거룩은 우리를 왜소하게 만들지 않습니다. 그릇을 열심히 닦고, 하나님 앞에 거룩, 분별함, 베어 내는 것, 태우는 것, 치는 것이 있어야 합니다. 고통스럽고 힘든 일입니다. 그러나 그 베어냄, 떼어냄, 치는 것, 풀무질이 없이는 절대 우리가 정금과 같이 나올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거룩한 자들만이 감당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고린도교회에 주는 교훈입니다.
5. 결론
어떻게 거룩할 수 있을까요? 바로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요 너희는 나의 백성이다," "나는 너희의 아버지고 너희는 나의 아들이라," 구약과 신약의 영생의 자녀 됨의 은혜를 말씀하시면서 거룩이라고 할 때, 내가 나를 부인하고 정결하게 할 때 전능하신 하나님이 내 하나님이라고 하는 것, 그것이 거룩이라고 본문은 말합니다. 우리 교회가 요즘 레위기 강해를 시작했습니다. 레위기 설교를 꼭 들어 보십시오. 하나님께 기도하고 붙들리기만 하면 우리 성도님들은 다 머리가 될 것입니다. 이것이 진리입니다. 자신을 비우고 낮출 때 큰 힘을 주시는 기도를 하게 하십니다. 우리가 낮추고 비우는 것, 곧 거룩할 때 사랑의 큰 일을 하게 하십니다. 베드로와 같이 하나님의 것이 아닌 능력을 쓰고자 하는 것을 단호히 잘라 내는 거룩이 있을 때,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십자가가 모든 백성을 살리는 빛의 역사가 되듯 우리 성도님에게 동일한 은혜가 있기를 축원합니다.
[20190106][십자가지기교회 주일낮예배: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40)] 진리를 변증하는 믿음 (고후 6:14-18) 문병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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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취록>
1. 하나님의 성전 된 성도
우리가 알다시피 고린도교회는 아주 부흥된 교회요 여러 이방인들과 유대인들이 있었으며 구제를 잘한 선한 부분이 있는 교회였습니다. 그러나 여러 부류의 사람이 있고 고린도 도시의 특성 상, 이견이 많고 여러 일을 하다 보니 시끄러운 일이 많았습니다. 심지어 사도 바울에 대해서도 사도가 아니라고 사도권을 부인하는 일이 있었으며 바울, 게바, 아볼로 파 등 당파를 짓기도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교회를 향해 두 편지를 씁니다. 고린도전서와 고린도후서입니다. 이 교회는 바울이 2차 전도여행 때 개척한 교회입니다.
특별히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를 향해 ‘너희들이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말합니다. 본문은 16절에서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말합니다. 구약시대 하나님의 성전이 어떤 것인가요? 다윗은 지으려고 해도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으시고 그 아들 솔로몬이 지은 그런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이 오셔서 성전을 헐면 3일만에 지으실 것이라고 할 때 그 성전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런 성전이라고 합니다. 성전된 성도들이 마땅히 살 바를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전은 여호와의 임재와 영광, 생명, 언약이 있는 곳입니다. 성전에는 단절이 없습니다. 모두 연결되어 있고 빽빽합니다. 홍색, 청색, 자색 꼬은 실로 빽빽하여 틈이 없는데, 이것은 여호와의 완전한 영광의 임재이자 영생, 생명을 의미합니다.
2. 영생
1) 하나님의 자녀 됨
성전이 이러한 곳인데, 이 성전 된 하나님의 백성은 16절,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나의 백성이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구약적인 표현입니다. 구약에서 영생의 표현인 것입니다. 이것을 신약시대 때는 18절, ‘나는 너희에게 아버지요 너희는 나에게 자녀가 된다’는 방식으로 표현합니다. 영생은 그저 죽지 않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로서 영원히 사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는 그의 자녀가 되어야 하고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가 되어야 합니다. 이것을 구약시대에는 자녀 됨의 개념보다 백성 됨의 개념으로 표현한 것이요, 본문에서 이 두 가지가 다 나오는 것입니다. ‘너희는 내 백성이고 나는 너희의 아버지라.’ 이것이 영생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과 자녀 삼으시는 것입니다.
2) 하나님과만 "함께"
그러니 본문은 여호와의 성전이요, 언약 백성으로 우리가 여호와와 함께 살아가는 것을 말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함께'라는 말을 많이 합니다. 직장, 가족, 학교에 함께 구성원 된 자들이 있습니다. 우리의 '함께'는 하나님과 이루어집니다.
3. 거룩과 "함께"
1) 진리와 "함께" 하는 거룩
이 ‘함께’에는 두 가지가 있어야 하는데, 우선 진리 가운데 거룩해야 합니다. 성전이 우상과 함께 할 수 없고 빛과 어두움이 함께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벨리알, 사탄이 함께 할 수 없다고 말씀에서 알려 주는 것입니다.
2) 사랑과 "함께"하는 거룩
하나님이 율법을 주실 때 그것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나뉩니다. 그리하여 율법의 모든 명령은 사랑입니다. 사랑은 서로 공유하는 것이고 이어보려는 것, 연결해 보려는 것입니다. 사랑은 어쨌거나 닿아보려는 것, 다시 매듭을 연결시켜 보려는 것입니다. 사랑은 담을 허무는 것이고, 한 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기본적으로 외향적입니다. 바깥을 향해 뻗치는 것입니다. 두 사람이 서로 안쪽으로만 향한다면 절대 사랑할 수 없습니다. 먼저 외향적이 되고 손을 내밀고 연결시키려고 해야 합니다.
거룩은 조금 다릅니다. 이것은 자기 자신을 닦는 것, 자기 자신 속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사랑은 상대가 필요하나 거룩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 홀로 서는 것입니다.
사랑은 그 본질이 여럿이 하나가 되어 하나님 앞에 앉는 것이라면, 거룩은 하나님 앞에 홀로 구별되어 있는 것입니다. 거룩이라는 것은 둘이 할 수 없는 것이고 떨어져 있는 것, 멀리, 높이 있는 것입니다. 거룩은 분별해서 하나님 앞에 드리는 것입니다.
율법은 크게 이 두 가지입니다. 율법의 요체는 사랑의 명령인데,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인 이 계명의 전제는 거룩하는 것입니다. 바로 레위기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는’ 말씀에 따라 거룩함을 전제로 하는 사랑인 것입니다.
(1) 거룩 가운데만 시작되는 사랑
거룩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거룩은 철저히 하나님 앞에 내가 단독자로 사는 것입니다. 그 거룩 가운데 온전한 사랑이 있으며 사랑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구약의 율법입니다.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인데 거룩하지 않은 백성은 사랑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지 않은 백성을 그저 대충 들어 사랑의 도구로 쓰지 않으십니다.
(2) 거룩은 하나님의 은혜로 연단하는 것이다
거룩은 절대 우리가 스스로 행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여야 합니다. 제가 얼굴에 뭐가 하나 났습니다. 아무리 떼려고 해도 뗄 수가 없습니다. 이전에 사마귀가 나면 실로 묶어서 뗄 수 있었는데 이번에는 아무리 해보려고 해도 안됩니다. 거룩은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여야 합니다. 그래서 거룩은 할례와 같이 베어 내는, 정결과 같이 씻어 내는 것, 화제와 같이 태우는 것, 소제와 같이 빻는 것입니다.
(3) 거룩 없이는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없다
이전에 벽을 쌓을 때 보면 냇가에서 모래를 먼저 퍼 옵니다. 그것에 그대로 시멘트를 부어 개지 않습니다. 모래를 채로 거릅니다. 그러면 맑고 고운 모래가 나옵니다. 그것에 시멘트를 붓습니다. 채의 굵기에 따라 벽돌의 거칠기가 결정됩니다. 채로 치는 것이 바로 거룩입니다. 우선 채로 쳐서 거른 뒤 시멘트를 부어 벽돌을 만들 듯 사랑의 도구로 쓰는 것입니다. 채로 칠 때는 괴롭지만 정금같이 나오는 것입니다. 채로 치지 않으면 지을 수는 있으나 곧 무너집니다. 거룩이 없는 하나님의 일, 사랑은 다 무너집니다. 당장은 괜찮아보여도 말입니다. 촘촘한 채로 친 그 모래 위에 시멘트를 부어야 견고하게 됩니다.
3) 사랑과 거룩의 조화
이 사랑과 거룩, 두 가지가 어떻게 조화를 이루는지 살펴보려고 합니다. 구약 백성들은 사랑보다 거룩으로 자꾸 치우쳐 갔습니다. 그러니 구약시대에는 형식주의만 남습니다. 거룩은 자기를 지키라고 하고 사랑은 자기를 던지라고 합니다. 이 두 가지를 다 해야 합니다. 나를 지키면서도 던져야 합니다. 사랑은 손을 뻗으라 하고 거룩은 손을 거두어 씻으라고 합니다. 우리 성도들은 이 두 가지 가운데 놓여 있습니다. 사랑과 거룩의 명령을 받습니다.
거룩하기만 하라고 하고, 내향적으로 살기만 하면 좋을 것 같으나 그렇지 않습니다. 한쪽에 치우칩니다. 사랑한다고 하면서 과격해지기도 합니다. 그것이 바로 열심당원들입니다. 반면 사랑은 무시하고 의식만 찾는 바리새인, 서기관과 같이 될 수 있습니다.
이 사이에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거룩하시면서 사랑이셨습니다. 거룩하시면서 세리와 창기를 만나시고, 최고 거룩하신 분이 가장 더러운 사람들을 만나 주셨습니다. 더불어 먹고 마시고 그들의 것을 귀하게 여기고 이야기를 들어주셨습니다.
4. 거룩과 사랑으로 진리를 변증하라
오늘 설교 제목은 ‘진리를 변증한다’ 입니다. 변증은 옳은 것을 옳다고 얘기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다면 십자가에서 예수님은 "저 죄인들을 죽이소서"라고 말씀해야 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들을 용서하라고 하셨습니다. 즉 변증에는 거룩이라는 측면과 사랑이라는 측면 두 가지가 있는 것입니다. 스데반을 생각해 보십시오. 돌을 던지는 자에게 진리의 설교를 했습니다. 분명히 진리를 말했습니다. 그러나 설교 마지막은 그들에게 죄를 묻지 말라고 했습니다.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행 7:60).
1) 진리 없는 사랑은 교만이며 거룩해야 사랑할 수 있다
우리 기독교는 지금 이 기로에 놓여 있습니다. 진리도 세워야 하고 사랑도 해야 합니다. 어느 교회는 사랑을 강조한다고 하면서 진리에 약하고 어느 교회는 진리를 이야기한다고 하면서 사랑에 약합니다. 그래서 서로 다툽니다. 우리 교단 같은 경우는 진리라고 많이 얘기하는데 사랑이 없다고 비판을 받고 한신 교단 같은 경우는 반대로 비판을 받습니다. 겉으로는 대체로 그렇게 이해됩니다. 그러나 저는 개인적으로 동의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거룩해야 사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둘 중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둘이 같이 있기 때문입니다. 진리가 없이 사랑할 수 없습니다. 먼저 사랑하다보면 진리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정말 위험한 것이고 교만한 것입니다.
저는 책을 보고 공부하며 가르치기만 했는데 정말 중요한 때 한국교회를 위해 하나님이 쓰셨습니다. 바로 wcc문제였습니다. 이 일이 있을 때 세계적으로 큰 화두였으나 우리 한국교회의 입장을 여러 권의 책을 써서 잘 변호했습니다.
또 한 가지로 알파코스의 문제입니다. 이전에 에딘버러에 있을 때 알파코스에 대해 들었지만 잘 몰랐는데 한국에 와보니 아주 성행하고 있었습니다. 아주 세속적인 가르침인데, 진리 없이 먼저 사랑만을 전하자고 한 것과 성령의 신비만 강조하여 위험성을 많이 내포하고 있습니다.
또 다락방 이단 문제가 있습니다. 총회에서 이 논의가 있을 때 글 한 편을 써서 총회에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래서 다락방이 교단에 들어오는 것을 막았습니다.
또한 평강제일교회 문제가 있습니다. 탁명환 소장을 살해한 운전수가 있었던 교회입니다. 이 교회가 교단에 들어오는 것을 여러 분과 함께 섬겨 막았습니다.
이단 문제가 매우 심합니다. 최근 한 교수님으로부터 들었는데, 기장 쪽의 땅을 박태선의 전도관에서 모두 구입하고 있다고 합니다. 정부와 결탁하여 신천지니 하나님의 교회니 모두 진리를, 한국교회를 혼탁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2) 분별하고 구별하라
사랑이라는 것과 거룩이라는 것이 그 순서가 따로 있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가 먼저 하나님 앞에 바로 서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13장이 사랑의 장일 뿐만 아니라 본문 14절에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함께 매지 말라는 말씀도 있습니다. 우리의 멍에는 그리스도의 멍에입니다. 예수님이 매어 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멍에와 세상 사람들이 매고 있는 불법의 멍에, 불의의 멍에를 함께 매지 말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너는 소와 나귀를 겨리하여 갈지 말며 양 털과 베 실로 섞어 짠 것을 입지 말지니라”(신 22:10-11). 소와 나귀를 겨리하지 말라고 합니다. 우리는 주로 한 마리 소에 멍에를 씌우는데, 이스라엘은 주로 두 마리에 쌍으로 매웁니다. 그런데 신명기에서 소와 나귀를 한 쌍으로 멍에 매우지 말라는 것입니다. 소와 나귀를 같이 일 시키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양실과 면실을 같이 사용하지 말라고 합니다. 이런 것들이 전부 구별, 분별입니다.
원수를 내 몸과 같이 사랑하되, 그들과 함께 멍에를 매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열심히 주님의 멍에를 매야 합니다. 그것은 은혜의 멍에요,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시는 것입니다.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법궤를 맨 암소처럼 세상의 일을 함께 멍에 매면 안됩니다. 이에 대해 본문은 다섯 가지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1) 의와 불법은 함께 할 수 없다
첫째, 의와 불법이 함께할 수 없습니다. 의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이요, 은혜로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려고 하는 사람은 은혜를 구할 수 밖에 없는데, 그것이 의입니다. 이 의와 불법이 함께 할 수 없다고 합니다. 여기서 "함께"는 동업의 의미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불법은 하나님의 뜻이 아닌 내 뜻대로 하는 것입니다. 내 공로, 내 자질을 의지하여 내 생각대로 하는 것입니다.
(2) 빛과 더두움은 사귈 수 없다
둘째, 빛과 어두움이 사귈 수 없다고 합니다. 빛은 생명에 속한 것입니다. 빛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임하시는 방식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함께하는 빛과, 마귀 사탄의 어두움이 함께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로마서는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고 합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고 합니다. 빛은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는 것입니다. 곧, 은혜로 옷 입는 것입니다. 이 빛과 어두움이 사귀지 못한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속한 것은 순수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순수한 것을 요구하십니다. 빈 것, 깨끗한 것을 요구하십니다. 자질을 요구하시지 않습니다. 우리의 몫과 공로가 들어가지 않습니다. 아무것도 우리에게 없으니 하나님이 전부 하시겠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빛의 역사, 하나님의 역사가 내 안에서 왕성하지 않다면 그것은 내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내가 덜 비워서입니다.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어야 합니다. 벗어 던져야 합니다. 빛의 갑옷은 그리스도로 입어야 하는데, 그의 성령을 힘입어 그의 공로를 우리 것으로 사귀는 것입니다.
(3) 그리스도와 벨리알은 조화될 수 없다
셋째,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조화될 수 없는 것입니다. 벨리알은 악의 두목 정도로 보면 됩니다. 십자가 옆에 불상을 놓을 수 없는 것입니다. 여기서 ‘조화’는 같은 자리에 놓인다는 의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유일하게 서셔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으로 안된다고 다른 것을 덧붙이면 예수 그리스도는 사라지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긍휼이요, 자기를 부인하는 자들에게, 바로 죄인인 우리를 위하여 오신 것입니다.
집에 보면 틈만 나면 구석에 곰팡이가 핍니다. 어디서 오는지 모르겠는데 조금만 놔두면 그렇게 됩니다. 우리 교회도 창고 쪽의 곰팡이를 많이 닦아 냈습니다. 같은 자리에 놓으면 틈만 나면 들어옵니다. 마귀 사탄이 틈만 나면 우리에게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리스도만 두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고난을 당하고 죽으시고 부활하실 것을 예언하실 때 베드로가 "그리마소서"라고 하니 예수님이 "사탄아 물러가라"라고 하십니다. 베드로는 주님이 당하시기만 할 필요가 없다고 말한 것일 텐데 "사탄아 물러가라"라고 하십니다. 베드로의 그 생각이 벨리알입니다. 내가 조금이라도 해보겠다고 하는 것을 사탄의 생각으로 지칭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열심히 일해야 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열심은 거룩해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내가 정결하지 않으니,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하지 않으니 게으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만 내 심중에 모시면 질서와 규칙과 열심이 생깁니다. 그럴 때 무엇이든 할 수 있습니다. 많은 큰일들을 우리 기독교인들이 해냅니다. 한국에서도 많이 욕을 먹지만 통계를 내 보면 가장 중요한 일을 많이 하는 사람이 기독교인입니다. 왜냐하면 은혜로 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조화되지 않는 것입니다.
(4)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상관할 수 없다
넷째,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상관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상관’은 이익을 나누는 것입니다. 믿음은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 11:6). 하나님을 향하여 가는 사람과 하나님을 멀리하는 사람이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입니다. 이 둘이 이익을 나눌 수 없다는 것입니다. 성도는 많이 외로울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때 하늘 문이 열리고 천군천사가 우리와 함께 합니다. 그 때 요나도 돕고 엘리야도 돕습니다. 그 때 불병거를 보여 주십니다. 내가 다수의 편에 설 때가 아니라 거룩하고 하나님 편에 서서 믿을 때 그렇습니다. 믿는 것은 하나님을 향하고 하나님을 향해 나아가는 것입니다. 믿지 않는 것은 하나님을 멀리하고 내 생각대로 하는 것입니다. 이 둘이 함께할 수 없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도우십니다. 그러나 전제는 제1계명, 다른 신을 두지 말고 하나님만 붙들고 의지하는 것입니다. 내 존재마저도 희미한 것처럼 느껴질때에서야 하나님이 도우십니다. 내 정신과 육신의 힘이 남아 있을 때는 아직입니다. 완전히 나를 깨고 무너뜨릴 때입니다. 우리가 세상 속에 살고 있으므로, 사랑이라는 측면이 있으니 떠나라는 말이 아닙니다. 그러나 먼저 하나님의 거룩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5)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함께 할 수 없다
다섯째,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함께 할 수 없다고 합니다. 이것은 역사적인 배경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다윗 성전에서 바알신, 온갖 이방신을 섬긴 것을 말합니다. 므낫세 왕부터 시작된 일입니다. 요시야 왕의 개혁이 있었으나 얼마 못 가고 이로 인해 실질적으로 망해 버립니다. 모세가 율법을 받으러 갈 때 그 형 아론은 금송아지를 만들고 있는 것, 바로 그것입니다.
우리 자신이 바로 성전입니다. 목회자로서 저도 좀 더 눈에 보이는, 좀 더 편안한 가이드가 되면 좋으리라고 생각해 보기도 합니다. 그러나 저의 전문적인 일은, 서로 권면할 일은 바로 거룩을 이야기하는 가운데 그 사람을 일으키고 세워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리를 떠나면서 그 사람을 사랑한다고 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많은 분들이 저에게 뭐하러 그렇게 까다롭게 따지냐고 합니다. 그래도 다 같은 하나님의 자녀인데라고 하면서 말입니다. 그러나 먼저 진리를 분별하여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거룩은 우리를 왜소하게 만들지 않습니다. 그릇을 열심히 닦고, 하나님 앞에 거룩, 분별함, 베어 내는 것, 태우는 것, 치는 것이 있어야 합니다. 고통스럽고 힘든 일입니다. 그러나 그 베어냄, 떼어냄, 치는 것, 풀무질이 없이는 절대 우리가 정금과 같이 나올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거룩한 자들만이 감당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고린도교회에 주는 교훈입니다.
5. 결론
어떻게 거룩할 수 있을까요? 바로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요 너희는 나의 백성이다," "나는 너희의 아버지고 너희는 나의 아들이라," 구약과 신약의 영생의 자녀 됨의 은혜를 말씀하시면서 거룩이라고 할 때, 내가 나를 부인하고 정결하게 할 때 전능하신 하나님이 내 하나님이라고 하는 것, 그것이 거룩이라고 본문은 말합니다. 우리 교회가 요즘 레위기 강해를 시작했습니다. 레위기 설교를 꼭 들어 보십시오.
하나님께 기도하고 붙들리기만 하면 우리 성도님들은 다 머리가 될 것입니다. 이것이 진리입니다. 자신을 비우고 낮출 때 큰 힘을 주시는 기도를 하게 하십니다. 우리가 낮추고 비우는 것, 곧 거룩할 때 사랑의 큰 일을 하게 하십니다. 베드로와 같이 하나님의 것이 아닌 능력을 쓰고자 하는 것을 단호히 잘라 내는 거룩이 있을 때,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십자가가 모든 백성을 살리는 빛의 역사가 되듯 우리 성도님에게 동일한 은혜가 있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