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902][십자가지기교회 주일낮예배: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23)] 십자가를 밝히 보는 믿음 (갈 3:1-7) 문병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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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 1:1)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 된 바울은 (갈 1:2) 함께 있는 모든 형제와 더불어 갈라디아 여러 교회들에게 (갈 1:3) 우리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갈 1:4)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자기 몸을 주셨으니 (갈 1:5) 영광이 그에게 세세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갈 1:6)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을 따르는 것을 내가 이상하게 여기노라 (갈 1:7)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교란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게 하려 함이라
<녹취록>
1.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 교회에 전한 복음
사도 바울이 예수 믿는 자들을 핍박하고 없애려고 다메섹으로 가다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회심을 합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합니다. 그는 평생 율법을 연구하고 하나님을 믿고 유대 지도자로 촉망 받는 청년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니 이전 것은 아무 것도 없고 오히려 더럽고 없는 것보다 못한 인생을 살았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그의 눈에 비늘을 덮어서 이전의 것을 망각시키시고 영적 눈을 열게 하셔서 사도 바울을 통해 복음의 열매를 얻게 하십니다. 그가 사흘 만에 눈을 다시 뜰 때 즉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아라비아 광야로 갔다가 다소 자기의 고향으로 돌아가고 그곳에서 이제 바나바의 초청을 받아 안디옥으로 가게 되는데, 그곳에서 1호 선교사로 파송을 받은 자가 사도 바울과 바나바입니다. 이들이 전한 첫 번째 열매가 소아시아의 교회인데 그곳 중 넓은 지역을 차지하는 네 지역을 갈라디아 지방이라고 합니다. 요새도 갈라시안이라고 해서 이 지역이 터키 지방에 남아 있습니다.
1) 우리를 위해 모든 의를 다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갈라디아 교회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일찍 받아들였습니다. 특히 사도행전 비시디아 안디옥이라는 곳의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 안식일에 이 사람을 힘입어 우리가 죄 사함을 얻고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는 설교를 합니다. 이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유대주의자들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인 자들입니다(행 14:13-39). 갈라디아 지방은 이 복음을 받아들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즉시 죄를 사함 받고 의롭게 되는, 죄 사함과 의롭게 됨을 동시에 받는 이전 것이 지나가는 것과 새것이 되는 그 일이 동시에 일어나는, 어둠이 물러가고 빛이 들어오는 것이 동시에 일어나는 일이 이 사람 때문이라고 한 것입니다. 동일하게 본디오 빌라도는 이 사람이라고 말했지만, 경멸의 말로 했습니다. 그의 의를 우리 것으로 삼아 주시는 전가해주시는 그 분이 바로 이 사람이라고 사도 바울은 말하는 것입니다. 로마서와 더불어 갈라디아서는 복음의 핵심을 전하는 두 서신서로 알려져 있는데 2장 16절이 가장 주목해볼만 합니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그리고 같은 장 20절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율법의 행위가 아닌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받았는데 그 사람들은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내 안에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생명을 얻고 거룩한 삶을 사는 것, 그것이 복음의 핵심이라는 것이 갈라디아서의 요지입니다. 그렇다면 어찌하여 그가 우리 안에 사시느냐, 같은 장 20절 바로 앞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그는 우리와 함께 십자가에 죽어주시는 우리가 제대로 죽을 자리를 찾게 해주시는 분입니다. 여러분은 한 주간 얼마나 죽었습니까? 내 무능함, 혈기, 약함에 얼마나 많이 죽었습니까? 우리가 그저 허공을 헤매다 죽고 빠져 죽는 것이라면 헛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다 죽되 이제는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다면, 잘 죽는 것이고 다시 살아나게 되어 있습니다. 잘 썩으면 생명의 역사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잘 죽는 것을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죽지 않고 다시 살아남이 없습니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의 도입니다. 십자가의 도는 제대로 죽는데 십자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바라봄은 그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십자가가 우리에게 능력이 됨은 그 형틀 때문이 아닌,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가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2) 성령 내주와 은혜의 역사
이 갈라디아 교회는 일찍 복음을 받아들였는데 속히 그것을 떠났습니다. 유대주의자들이 들어오니 오직 믿음에서 그래도 내 행실이 조금 있다는 것으로 바뀐 것입니다. 의식을 지킨 공로로 구원에 일정 부분 기여한 것으로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다른 복음이 들어온 것입니다. 그 가운데 사도 바울이 편지를 쓴 것이 갈라디아서고, 특히 본문 일곱 절 안에는 귀한 기독교의 진리들이 들어 있습니다. 바로 성령을 받은 것이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은 것이냐 믿고 들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냐를 두 번이나 강조합니다. 믿음은 들음으로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라는 로마서의 말씀과 같은 얘기를 하는 것입니다(롬 10:17). 내가 열심히 공을 쌓아 비로소 성령을 받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령은 알게 모르게 우리에게 들어옵니다. 받은 줄도 모르게 들어옵니다. 뭔지도 모르고 성령을 오순절 때 받았습니다. 저는 교회가 뭔지도 모른다고 할 때, 맞습니다. 그 때 우리가 구원을 받습니다. 오순절 성령이 임할 때 이 성령에 대해 다 알아서 해석하고 받지 않았습니다. 각자 자기의 의견을 말할 때 사도권을 가진 베드로와 그의 제자들이 깨달은 것입니다. 마가 다락방에서 예수님이 자신이 떠남이 유익한 것은 또 다른 보혜사를 주시겠다고 한 것을 딱 깨달은 것이요 그것이 바로 베드로의 초대교회 설교입니다. 분별력이 있어서 받은 것이 아니라 성령을 받으니 분별력이 생긴 것입니다. 모든 것은 성령의 임재로 시작됩니다. 성령이 임하니 믿음을 갖게 되고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고백하게 됩니다. 이것은 순식간에 불가항력적으로 일어납니다. 은혜는 죄보다 더 강하게 역사합니다. 죄도 강하나 그보다 더 강한 것이 은혜입니다. 절대 버릴 수 없다고 하는 죄, 쓴 뿌리라고 하는 죄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내 죄보다 더 강하게 나를 사로잡는 것이 은혜입니다. 죄보다 더 강하게 홍수처럼 밀려오는 것이 은혜요 그것은 내가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찾아오는 것입니다. 이것이 본문에 들어 있는데 그런 은혜를 받은 자라야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합니다. 율법주의자들이 갈라디아 교회에 들어와서 조상들처럼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할 때 사도 바울이 이 말을 한 것입니다. 교회는 조심해야 해요 교회는 좋은 게 좋은 곳이 아니에요 교회는 다다익선이 아니에요. 교회는 순수한 게 본질이에요. 복음은 순수한 것이요, 예와 아니오가 분명합니다. 믿기도 하고 공력도 쌓는 것이 좋은 것이 아닙니다. 오직 믿음입니다. 믿음에 다른 것을 더하는 것 그것이 이단입니다. 구약시대 때 모세의 법으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모세의 율법으로 너희가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하던 모든 일에도 이 사람을 힘입어 믿는 자마다 의롭다 하심을 얻는 이것이라.”(행 13:39) 본문에서는 성령을 받는 것, 믿고 듣는 것, 그리고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언약의 자손으로 이런 모든 본질적인 은혜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이 밝히 보이거늘, 십자가로부터 나온다는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2. 성령으로 말미암아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를 밝히 보다
1) 십자가에 달리신 분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이 사람은 누구입니까? 오늘날 십자가 신학이라는 말을 합니다. 우리가 그렇게 이야기합니다. 십자가 신학에 십자가가 없고 예수가 없다고 말입니다. 저 독일에 몰트만이라는 학자가 십자가 신학이라는 말을 합니다. 그리고 판넬베르크라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데 십자가의 신학이라고 하면서도 십자가가 없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 달리신 그분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사람의 아들이십니다. 그런데 사회복음이라고 하여 사회의 모순을 해결해 주는 복음이라고 하여 십자가에 달린 분을 노동자로 규정하고 동성연애자로 규정하고 십자가에 걸어 놓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상징에 불과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는 오직 십자가에 달린 자는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의 아들이 되신 그분입니다. 그분이 달려 있으므로 십자가가 의미가 있는 것이지 그저 십자가를 상징으로 해서 믿음은 있을 수 없습니다.
2) 우리는 그리스도의 고난으로부터 모든 은혜와 의를 받는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밝히 보인다고 말합니다. 십자가는 인간이 만든 그 형벌 중 가장 잔인한 것입니다. 제가 읽은 바에 의하면 두 손가락에 꼽히는 잔인한 형벌입니다. 이 형벌은 고통도 많고 수치가 있습니다. 가족도 친지도 친구도 보는데, 그 백주대낮에 걸어 놓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의 형벌은 빨리 죽음을 가져가지 않습니다. 보통 이틀도 걸려 있고 2주 동안 안 죽는 사람도 있다고 합니다. 우리 예수님은 6시간 만에 돌아가셨지만 말입니다. 왜 서서히 죽이냐, 고통을 더하게 함입니다. 십자가의 사진을 보면 발에도 못을 박는데 그렇지 않으면 떨어져 빨리 죽기 때문입니다. 천천히 죽으라고 한 것입니다. 또 죽을만한 고통에서 스스로 죽을 수도 없습니다. 말도 할 수 없습니다. 혀가 입천장에 붙고 이가 떨리면서 깨지고 살로 파고들어가는 것, 이것이 십자가 형벌입니다. 그런 형벌이 바로 십자가의 형벌입니다. 우리가 찬송도 하지만 “거기 너 있었는가 그때에,” 이 흑인들의 찬송은 온갖 고통 중에 힘들 때 십자가만 바라보고 산 것을 보여 줍니다.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본 것입니다. 우리는 십자가로부터 모든 은혜와 의를 받습니다. “십자가 십자가 무한 영광일세, 요단강을 건너가 무한 영광일세”라고 찬송도 합니다. 이 십자가를 밝히 보인다고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이 말입니다.
3)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르게 믿고 영적 생명을 얻는다
여러분, 십자가를 어찌 보고 계십니까? 우리에게 성령을 부어 주셨습니다. 그것을 받은 사람들은 다 십자가를 보는데, 밝히 봅니다. 영적인 눈을 열어서 말입니다. 십자가를 본다는 것은 십자가를 믿는다는 것이요 내 유일한 공로의 자리로 인정하고 십자가에 내가 함께 못 박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쁠 때나 슬플 때 이 십자가를 항상 바라봐야 합니다. 십자가는 저주입니다. 십자가는 가장 무서운 형벌의 터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저주로부터 벗어나는 유일한 길은 그 저주의 십자가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저주의 십자가를 바라볼 때 우리는 모든 것으로부터 온전해집니다. —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요 14:26). 모든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생각나게 하는데 그것이 십자가로부터 흘러나옵니다. 십자가가 지성소고 십자가가 우리의 생명의 구원의 피가 되기 때문에, 그 찢기신 살과 흘리신 피와 물이 우리의 양식이고 음료이므로 십자가를 밝히 바라보지 않고는 영적인 생명을 얻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지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를 인정하고 자랑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밝히 보인다고 말합니다. 길게 말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율법을 지켜서가 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믿고 구원에 이른 것입니다. 이 복음을 받음으로 십자가의 은혜가 우리 안에 역사하는 것입니다. 율법의 저주에서 아무도 속량을 받을 수 없습니다. 율법은 우리에게 저주로 옵니다. 하나도 지킬 수가 없으니 우리를 책망하고 탓하고 몰아 부칩니다. 그것이 바로 율법입니다. 그러나 십자가의 율법이 걸리면 율법은 달콤한 것이 됩니다. 율법을 십자가에 새기면 율법은 생명의 길이 되고 그 말씀이 우리를 즐겁게 하고 눈을 밝게 하고 심령에 정금과 같이 나옵니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4)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나도 못 박혀 새 삶을 산다
그러므로 아무것도 자랑할 것이 없고 오직 우리는 십자가만을 자랑합니다. 이것 외에는 내세울 것, 자랑할 것, 바라볼 것이 없습니다. —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갈 2:20). 이것을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지고 있다고 합니다.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고후 4:10). “그리스도께서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나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아 계시니 우리도 그 안에서 약하나 너희에게 대하여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와 함께 살리라”(고후 13:4). 저주에서 벗어나려면 저주의 십자가 밑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그곳에는 은혜의 그리스도가 달려 있습니다. 그것이 우리 구원의 비밀입니다. 약함으로부터 강하게 되려면 가장 약해진 십자가의 터로 가십시오. 그곳에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달려 계신 곳입니다. 십자가 자체는 아무 것도 잘난 것이 없지만, 우리의 미련함을 들어 지혜를 부끄럽게 하고 없는 것을 들어 있는 것을 폐하시는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려 있습니다. 그래서 십자가의 미련한 것이 우리에게 지혜가 되고 없는 것이 부요함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하는 것은 이전 것을 버리고 예수 그리스도만 바라본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에 함께 못 박혔으므로 십자가만을 알고 전한다는 것이 사도 바울의 고백입니다. —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전 2:2). 물론 다른 지식도 많고 필요합니다. 그러나 본질적인 지식은 십자가만을 알기로 했다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얼마나 똑똑한 사람입니까? 그러나 모든 것을 내려놓게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고전 1:23). 그 십자가에 함께 못 박히게 되면 예수 안에서 만유의 만유를 누리게 되는데 그와 즉시 예수만을 자랑하고 그것을 전하기에 힘쓰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을 전하겠다고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첫째로는 존재가 바뀌고 둘째로는 지식이 바뀌는 것입니다. 세상의 지식은 초등 지식이고 고급스러운 영적 지식은 십자가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로 우리의 삶이 바뀝니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십자가지기가 되는 것입니다. —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 16:24). 이것이 바로 십자가의 역사입니다. 십자가를 밝히 보는 사람은 십자가를 지고자 하게 됩니다. 우리에게 십자가가 밝히 보이는 것입니다.
5) 십자가와 성령
우리의 영안에 십자가가 밝히 보입니다. 본문 1절의 “밝히 보이거늘”이라는 말은 원어에 ‘먼저 썼다’라는 의미입니다. 이전에 썼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성경 말씀이 많은 은혜가 있습니다. 우리가 본다고 하지만 성령이 십자가의 지식을 우리에게 직접 써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을 받은 것이 계속 본문에 나옵니다. 성령이 임하면 우리에게 십자가의 도가 심령에 기록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밝히 보인다고 합니다. 눈으로 본다고 신비주의적인 것이 아닌, 십자가가 밝히 보인다는 것은 아멘 하면서 십자가의 도를 믿고 시인하는 것입니다.
세상에는 십자가가 많습니다. 우리 십자가지기교회는 십자가가 없다는 말이 제 마음에 울려서 십자가를 달아 보고자 하는데 그런데 이상하게 그것조차 본질이 아니라는 마음을 주십니다. 그래서 마음이 그렇게 힘들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만 있습니다. 칼빈은 천개의 나무 십자가를 만드는 것보다 본문 말씀 갈라디아서 3장 1절의 말씀이 더 중요하다고 했습니다. 십자가의 말씀을 우리에게 성령이 임하여서 새겨 주는데 그것이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냐, 듣고 믿음으로 말미암냐, 말씀을 새겨 주신 것을 믿음으로 말미암음이냐는 말입니다. 이것에 복음의 핵심이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십자가와 성령입니다. 성령이 우리에게 임하면 십자가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내가 십자가에 그리스도와 함께 못 박히고 십자가만을 알고자 하고 내가 십자가를 즐거이 지는 것입니다. 보혜사 성령 하면서 이것저것 능력 받으라고 하지만, 본질은 십자가입니다. 십자가가 없으면 천국에 가지 못합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몸이 산 길이라고 히브리서에서 말씀합니다.
3. 성령의 감화로 믿게 된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을 순수하게 누리며 자랑하자
믿음이 무엇인가요?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입니다(히 11:6). 그러면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은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를 바라보면 하나님께 나아갑니다. 찬송가 439장에 보면 “십자가로 가까이 나를 이끄시고 거기 흘린 보혈로 정케 하옵소서”라고 합니다. 왕십리교회에 있을 때 1년간 설교를 하면서 이 찬송을 많이 불렀습니다. 무조건 하나님께 가까이 가는데, 십자가를 통해서입니다. 십자가로 가까이 나를 이끄시길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복음의 핵심입니다. 우리의 심령에 성령이 임하여서 십자가를 새겨 주셨습니다. 그 십자가를 새긴 사람이 본문 6절, 7절의 아브라함의 후손입니다. 육적인 할례를 받아서가 아닌 십자가를 보는 사람이 언약의 후손입니다. 십자가를 심령에 보는 사람, 십자가지기가 아브라함의 후손입니다. 십자가 안에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영원한 생명을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누리는 사람이 아브라함의 후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 저 예루살렘에 있는 사람들은 아직 예수 그리스도가 없습니다. 유대주의자들과 이슬람주의자들이 싸우는 것입니다. 그리고 희랍정교회가 있습니다. 마지막 때에 예루살렘에 개신교의 참 복음이 들어가야 하지 않겠냐 합니다. 십자가가 그 자리에 섰는데 그것을 믿지 않는 것이 이스라엘의 상황인 것입니다. 영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믿지 않습니다. 십자가가 선 자리에 지나가는 통행료는 받을지라도 말입니다. 그러나 동방의 작은 나라 사람인 우리는 믿습니다. 왜요, 보혜사 성령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늦게 된 자가 먼저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강한 표현을 쓸 때가 두 번 있습니다. 우리 주님도 가장 화를 낸 때는 성전이 더럽혀졌을 때입니다. 교회에서 돈놀이한 자들에게 말입니다. 그리고 또한, 아이들이 오는 것을 금할 때 싫어하셨습니다. 구령의 역사를 가로막을 때 싫어하신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많이 참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가장 힘들게 표현할 때가 있는데, “십자가의 걸림돌”(갈 5:11), “십자가의 원수”(빌 3:18) 등에 대해서는 아주 강한 표현을 합니다. 오직 은혜와 오직 믿음으로 어떤 죄인이라도 구원을 받는데 내 공로, 족보를 내세워서 복음을 가로막을 때 그렇습니다. 그런 사람들을 십자가의 원수고 십자가의 걸림돌로 말하는 것입니다. 복음은 본질이 순수함에 있습니다. 구약엔 남은 자, 그루터기 사상이 있습니다. 웬만하면 이스마엘, 아브라함의 아들도 후손으로 인정해주시면 좋을 것 같은데, 딱 잘라 버리십니다. 우리는 십자가만을 바라봐야 합니다. 내가 오랜 시간 신앙생활 했다고 영으로 시작했다가 육체로 마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본문 3절입니다. 성령의 역사는 십자가밖에 업습니다. 이것 외에 먼지라도 하나 보이거든 버리십시오. 십자가만이 보여야 합니다. 나머지는 전부 육체에 속한 것입니다. 십자가의 원수가 되면 안 됩니다. 오직 십자가만을 자랑하면 되는 것입니다. 이미 우리 안에 말씀으로 새겨주신 은혜가 있으므로 밝히 십자가를 보는 영안을 주셨으므로 이런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있을 줄을 믿습니다.
[20180902][십자가지기교회 주일낮예배: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23)] 십자가를 밝히 보는 믿음 (갈 3:1-7) 문병호 목사
*음성파일: 게시물 하단 "관련링크"에서 청취 혹은 내려받기 가능합니다.
(갈 1:1)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 된 바울은
(갈 1:2) 함께 있는 모든 형제와 더불어 갈라디아 여러 교회들에게
(갈 1:3) 우리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갈 1:4)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자기 몸을 주셨으니
(갈 1:5) 영광이 그에게 세세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갈 1:6)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을 따르는 것을 내가 이상하게 여기노라
(갈 1:7)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교란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게 하려 함이라
<녹취록>
1.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 교회에 전한 복음
사도 바울이 예수 믿는 자들을 핍박하고 없애려고 다메섹으로 가다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회심을 합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합니다. 그는 평생 율법을 연구하고 하나님을 믿고 유대 지도자로 촉망 받는 청년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니 이전 것은 아무 것도 없고 오히려 더럽고 없는 것보다 못한 인생을 살았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그의 눈에 비늘을 덮어서 이전의 것을 망각시키시고 영적 눈을 열게 하셔서 사도 바울을 통해 복음의 열매를 얻게 하십니다. 그가 사흘 만에 눈을 다시 뜰 때 즉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아라비아 광야로 갔다가 다소 자기의 고향으로 돌아가고 그곳에서 이제 바나바의 초청을 받아 안디옥으로 가게 되는데, 그곳에서 1호 선교사로 파송을 받은 자가 사도 바울과 바나바입니다. 이들이 전한 첫 번째 열매가 소아시아의 교회인데 그곳 중 넓은 지역을 차지하는 네 지역을 갈라디아 지방이라고 합니다. 요새도 갈라시안이라고 해서 이 지역이 터키 지방에 남아 있습니다.
1) 우리를 위해 모든 의를 다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갈라디아 교회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일찍 받아들였습니다. 특히 사도행전 비시디아 안디옥이라는 곳의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 안식일에 이 사람을 힘입어 우리가 죄 사함을 얻고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는 설교를 합니다. 이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유대주의자들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인 자들입니다(행 14:13-39). 갈라디아 지방은 이 복음을 받아들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즉시 죄를 사함 받고 의롭게 되는, 죄 사함과 의롭게 됨을 동시에 받는 이전 것이 지나가는 것과 새것이 되는 그 일이 동시에 일어나는, 어둠이 물러가고 빛이 들어오는 것이 동시에 일어나는 일이 이 사람 때문이라고 한 것입니다. 동일하게 본디오 빌라도는 이 사람이라고 말했지만, 경멸의 말로 했습니다. 그의 의를 우리 것으로 삼아 주시는 전가해주시는 그 분이 바로 이 사람이라고 사도 바울은 말하는 것입니다.
로마서와 더불어 갈라디아서는 복음의 핵심을 전하는 두 서신서로 알려져 있는데 2장 16절이 가장 주목해볼만 합니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그리고 같은 장 20절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율법의 행위가 아닌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받았는데 그 사람들은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내 안에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생명을 얻고 거룩한 삶을 사는 것, 그것이 복음의 핵심이라는 것이 갈라디아서의 요지입니다. 그렇다면 어찌하여 그가 우리 안에 사시느냐, 같은 장 20절 바로 앞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그는 우리와 함께 십자가에 죽어주시는 우리가 제대로 죽을 자리를 찾게 해주시는 분입니다.
여러분은 한 주간 얼마나 죽었습니까? 내 무능함, 혈기, 약함에 얼마나 많이 죽었습니까? 우리가 그저 허공을 헤매다 죽고 빠져 죽는 것이라면 헛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다 죽되 이제는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다면, 잘 죽는 것이고 다시 살아나게 되어 있습니다. 잘 썩으면 생명의 역사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잘 죽는 것을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죽지 않고 다시 살아남이 없습니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의 도입니다. 십자가의 도는 제대로 죽는데 십자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바라봄은 그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십자가가 우리에게 능력이 됨은 그 형틀 때문이 아닌,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가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2) 성령 내주와 은혜의 역사
이 갈라디아 교회는 일찍 복음을 받아들였는데 속히 그것을 떠났습니다. 유대주의자들이 들어오니 오직 믿음에서 그래도 내 행실이 조금 있다는 것으로 바뀐 것입니다. 의식을 지킨 공로로 구원에 일정 부분 기여한 것으로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다른 복음이 들어온 것입니다. 그 가운데 사도 바울이 편지를 쓴 것이 갈라디아서고, 특히 본문 일곱 절 안에는 귀한 기독교의 진리들이 들어 있습니다. 바로 성령을 받은 것이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은 것이냐 믿고 들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냐를 두 번이나 강조합니다. 믿음은 들음으로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라는 로마서의 말씀과 같은 얘기를 하는 것입니다(롬 10:17). 내가 열심히 공을 쌓아 비로소 성령을 받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령은 알게 모르게 우리에게 들어옵니다. 받은 줄도 모르게 들어옵니다. 뭔지도 모르고 성령을 오순절 때 받았습니다. 저는 교회가 뭔지도 모른다고 할 때, 맞습니다. 그 때 우리가 구원을 받습니다. 오순절 성령이 임할 때 이 성령에 대해 다 알아서 해석하고 받지 않았습니다. 각자 자기의 의견을 말할 때 사도권을 가진 베드로와 그의 제자들이 깨달은 것입니다. 마가 다락방에서 예수님이 자신이 떠남이 유익한 것은 또 다른 보혜사를 주시겠다고 한 것을 딱 깨달은 것이요 그것이 바로 베드로의 초대교회 설교입니다. 분별력이 있어서 받은 것이 아니라 성령을 받으니 분별력이 생긴 것입니다. 모든 것은 성령의 임재로 시작됩니다. 성령이 임하니 믿음을 갖게 되고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고백하게 됩니다. 이것은 순식간에 불가항력적으로 일어납니다.
은혜는 죄보다 더 강하게 역사합니다. 죄도 강하나 그보다 더 강한 것이 은혜입니다. 절대 버릴 수 없다고 하는 죄, 쓴 뿌리라고 하는 죄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내 죄보다 더 강하게 나를 사로잡는 것이 은혜입니다. 죄보다 더 강하게 홍수처럼 밀려오는 것이 은혜요 그것은 내가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찾아오는 것입니다. 이것이 본문에 들어 있는데 그런 은혜를 받은 자라야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합니다. 율법주의자들이 갈라디아 교회에 들어와서 조상들처럼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할 때 사도 바울이 이 말을 한 것입니다. 교회는 조심해야 해요 교회는 좋은 게 좋은 곳이 아니에요 교회는 다다익선이 아니에요. 교회는 순수한 게 본질이에요. 복음은 순수한 것이요, 예와 아니오가 분명합니다. 믿기도 하고 공력도 쌓는 것이 좋은 것이 아닙니다. 오직 믿음입니다. 믿음에 다른 것을 더하는 것 그것이 이단입니다. 구약시대 때 모세의 법으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모세의 율법으로 너희가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하던 모든 일에도 이 사람을 힘입어 믿는 자마다 의롭다 하심을 얻는 이것이라.”(행 13:39) 본문에서는 성령을 받는 것, 믿고 듣는 것, 그리고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언약의 자손으로 이런 모든 본질적인 은혜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이 밝히 보이거늘, 십자가로부터 나온다는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2. 성령으로 말미암아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를 밝히 보다
1) 십자가에 달리신 분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이 사람은 누구입니까? 오늘날 십자가 신학이라는 말을 합니다. 우리가 그렇게 이야기합니다. 십자가 신학에 십자가가 없고 예수가 없다고 말입니다. 저 독일에 몰트만이라는 학자가 십자가 신학이라는 말을 합니다. 그리고 판넬베르크라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데 십자가의 신학이라고 하면서도 십자가가 없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 달리신 그분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사람의 아들이십니다. 그런데 사회복음이라고 하여 사회의 모순을 해결해 주는 복음이라고 하여 십자가에 달린 분을 노동자로 규정하고 동성연애자로 규정하고 십자가에 걸어 놓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상징에 불과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는 오직 십자가에 달린 자는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의 아들이 되신 그분입니다. 그분이 달려 있으므로 십자가가 의미가 있는 것이지 그저 십자가를 상징으로 해서 믿음은 있을 수 없습니다.
2) 우리는 그리스도의 고난으로부터 모든 은혜와 의를 받는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밝히 보인다고 말합니다. 십자가는 인간이 만든 그 형벌 중 가장 잔인한 것입니다. 제가 읽은 바에 의하면 두 손가락에 꼽히는 잔인한 형벌입니다. 이 형벌은 고통도 많고 수치가 있습니다. 가족도 친지도 친구도 보는데, 그 백주대낮에 걸어 놓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의 형벌은 빨리 죽음을 가져가지 않습니다. 보통 이틀도 걸려 있고 2주 동안 안 죽는 사람도 있다고 합니다. 우리 예수님은 6시간 만에 돌아가셨지만 말입니다. 왜 서서히 죽이냐, 고통을 더하게 함입니다. 십자가의 사진을 보면 발에도 못을 박는데 그렇지 않으면 떨어져 빨리 죽기 때문입니다. 천천히 죽으라고 한 것입니다. 또 죽을만한 고통에서 스스로 죽을 수도 없습니다. 말도 할 수 없습니다. 혀가 입천장에 붙고 이가 떨리면서 깨지고 살로 파고들어가는 것, 이것이 십자가 형벌입니다. 그런 형벌이 바로 십자가의 형벌입니다.
우리가 찬송도 하지만 “거기 너 있었는가 그때에,” 이 흑인들의 찬송은 온갖 고통 중에 힘들 때 십자가만 바라보고 산 것을 보여 줍니다.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본 것입니다. 우리는 십자가로부터 모든 은혜와 의를 받습니다. “십자가 십자가 무한 영광일세, 요단강을 건너가 무한 영광일세”라고 찬송도 합니다. 이 십자가를 밝히 보인다고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이 말입니다.
3)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르게 믿고 영적 생명을 얻는다
여러분, 십자가를 어찌 보고 계십니까? 우리에게 성령을 부어 주셨습니다. 그것을 받은 사람들은 다 십자가를 보는데, 밝히 봅니다. 영적인 눈을 열어서 말입니다. 십자가를 본다는 것은 십자가를 믿는다는 것이요 내 유일한 공로의 자리로 인정하고 십자가에 내가 함께 못 박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쁠 때나 슬플 때 이 십자가를 항상 바라봐야 합니다. 십자가는 저주입니다. 십자가는 가장 무서운 형벌의 터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저주로부터 벗어나는 유일한 길은 그 저주의 십자가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저주의 십자가를 바라볼 때 우리는 모든 것으로부터 온전해집니다. —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요 14:26). 모든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생각나게 하는데 그것이 십자가로부터 흘러나옵니다. 십자가가 지성소고 십자가가 우리의 생명의 구원의 피가 되기 때문에, 그 찢기신 살과 흘리신 피와 물이 우리의 양식이고 음료이므로 십자가를 밝히 바라보지 않고는 영적인 생명을 얻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지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를 인정하고 자랑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밝히 보인다고 말합니다. 길게 말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율법을 지켜서가 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믿고 구원에 이른 것입니다. 이 복음을 받음으로 십자가의 은혜가 우리 안에 역사하는 것입니다. 율법의 저주에서 아무도 속량을 받을 수 없습니다. 율법은 우리에게 저주로 옵니다. 하나도 지킬 수가 없으니 우리를 책망하고 탓하고 몰아 부칩니다. 그것이 바로 율법입니다. 그러나 십자가의 율법이 걸리면 율법은 달콤한 것이 됩니다. 율법을 십자가에 새기면 율법은 생명의 길이 되고 그 말씀이 우리를 즐겁게 하고 눈을 밝게 하고 심령에 정금과 같이 나옵니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4)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나도 못 박혀 새 삶을 산다
그러므로 아무것도 자랑할 것이 없고 오직 우리는 십자가만을 자랑합니다. 이것 외에는 내세울 것, 자랑할 것, 바라볼 것이 없습니다. —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갈 2:20). 이것을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지고 있다고 합니다.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고후 4:10). “그리스도께서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나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아 계시니 우리도 그 안에서 약하나 너희에게 대하여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와 함께 살리라”(고후 13:4). 저주에서 벗어나려면 저주의 십자가 밑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그곳에는 은혜의 그리스도가 달려 있습니다. 그것이 우리 구원의 비밀입니다. 약함으로부터 강하게 되려면 가장 약해진 십자가의 터로 가십시오. 그곳에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달려 계신 곳입니다. 십자가 자체는 아무 것도 잘난 것이 없지만, 우리의 미련함을 들어 지혜를 부끄럽게 하고 없는 것을 들어 있는 것을 폐하시는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려 있습니다. 그래서 십자가의 미련한 것이 우리에게 지혜가 되고 없는 것이 부요함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하는 것은 이전 것을 버리고 예수 그리스도만 바라본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에 함께 못 박혔으므로 십자가만을 알고 전한다는 것이 사도 바울의 고백입니다. —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전 2:2). 물론 다른 지식도 많고 필요합니다. 그러나 본질적인 지식은 십자가만을 알기로 했다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얼마나 똑똑한 사람입니까? 그러나 모든 것을 내려놓게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고전 1:23). 그 십자가에 함께 못 박히게 되면 예수 안에서 만유의 만유를 누리게 되는데 그와 즉시 예수만을 자랑하고 그것을 전하기에 힘쓰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을 전하겠다고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첫째로는 존재가 바뀌고 둘째로는 지식이 바뀌는 것입니다. 세상의 지식은 초등 지식이고 고급스러운 영적 지식은 십자가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로 우리의 삶이 바뀝니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십자가지기가 되는 것입니다. —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 16:24). 이것이 바로 십자가의 역사입니다. 십자가를 밝히 보는 사람은 십자가를 지고자 하게 됩니다. 우리에게 십자가가 밝히 보이는 것입니다.
5) 십자가와 성령
우리의 영안에 십자가가 밝히 보입니다. 본문 1절의 “밝히 보이거늘”이라는 말은 원어에 ‘먼저 썼다’라는 의미입니다. 이전에 썼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성경 말씀이 많은 은혜가 있습니다. 우리가 본다고 하지만 성령이 십자가의 지식을 우리에게 직접 써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을 받은 것이 계속 본문에 나옵니다. 성령이 임하면 우리에게 십자가의 도가 심령에 기록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밝히 보인다고 합니다. 눈으로 본다고 신비주의적인 것이 아닌, 십자가가 밝히 보인다는 것은 아멘 하면서 십자가의 도를 믿고 시인하는 것입니다.
세상에는 십자가가 많습니다. 우리 십자가지기교회는 십자가가 없다는 말이 제 마음에 울려서 십자가를 달아 보고자 하는데 그런데 이상하게 그것조차 본질이 아니라는 마음을 주십니다. 그래서 마음이 그렇게 힘들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만 있습니다. 칼빈은 천개의 나무 십자가를 만드는 것보다 본문 말씀 갈라디아서 3장 1절의 말씀이 더 중요하다고 했습니다. 십자가의 말씀을 우리에게 성령이 임하여서 새겨 주는데 그것이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냐, 듣고 믿음으로 말미암냐, 말씀을 새겨 주신 것을 믿음으로 말미암음이냐는 말입니다. 이것에 복음의 핵심이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십자가와 성령입니다. 성령이 우리에게 임하면 십자가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내가 십자가에 그리스도와 함께 못 박히고 십자가만을 알고자 하고 내가 십자가를 즐거이 지는 것입니다. 보혜사 성령 하면서 이것저것 능력 받으라고 하지만, 본질은 십자가입니다. 십자가가 없으면 천국에 가지 못합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몸이 산 길이라고 히브리서에서 말씀합니다.
3. 성령의 감화로 믿게 된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을 순수하게 누리며 자랑하자
믿음이 무엇인가요?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입니다(히 11:6). 그러면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은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를 바라보면 하나님께 나아갑니다. 찬송가 439장에 보면 “십자가로 가까이 나를 이끄시고 거기 흘린 보혈로 정케 하옵소서”라고 합니다. 왕십리교회에 있을 때 1년간 설교를 하면서 이 찬송을 많이 불렀습니다. 무조건 하나님께 가까이 가는데, 십자가를 통해서입니다. 십자가로 가까이 나를 이끄시길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복음의 핵심입니다. 우리의 심령에 성령이 임하여서 십자가를 새겨 주셨습니다. 그 십자가를 새긴 사람이 본문 6절, 7절의 아브라함의 후손입니다. 육적인 할례를 받아서가 아닌 십자가를 보는 사람이 언약의 후손입니다. 십자가를 심령에 보는 사람, 십자가지기가 아브라함의 후손입니다. 십자가 안에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영원한 생명을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누리는 사람이 아브라함의 후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 저 예루살렘에 있는 사람들은 아직 예수 그리스도가 없습니다. 유대주의자들과 이슬람주의자들이 싸우는 것입니다. 그리고 희랍정교회가 있습니다. 마지막 때에 예루살렘에 개신교의 참 복음이 들어가야 하지 않겠냐 합니다. 십자가가 그 자리에 섰는데 그것을 믿지 않는 것이 이스라엘의 상황인 것입니다. 영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믿지 않습니다. 십자가가 선 자리에 지나가는 통행료는 받을지라도 말입니다. 그러나 동방의 작은 나라 사람인 우리는 믿습니다. 왜요, 보혜사 성령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늦게 된 자가 먼저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강한 표현을 쓸 때가 두 번 있습니다. 우리 주님도 가장 화를 낸 때는 성전이 더럽혀졌을 때입니다. 교회에서 돈놀이한 자들에게 말입니다. 그리고 또한, 아이들이 오는 것을 금할 때 싫어하셨습니다. 구령의 역사를 가로막을 때 싫어하신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많이 참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가장 힘들게 표현할 때가 있는데, “십자가의 걸림돌”(갈 5:11), “십자가의 원수”(빌 3:18) 등에 대해서는 아주 강한 표현을 합니다. 오직 은혜와 오직 믿음으로 어떤 죄인이라도 구원을 받는데 내 공로, 족보를 내세워서 복음을 가로막을 때 그렇습니다. 그런 사람들을 십자가의 원수고 십자가의 걸림돌로 말하는 것입니다. 복음은 본질이 순수함에 있습니다. 구약엔 남은 자, 그루터기 사상이 있습니다. 웬만하면 이스마엘, 아브라함의 아들도 후손으로 인정해주시면 좋을 것 같은데, 딱 잘라 버리십니다. 우리는 십자가만을 바라봐야 합니다. 내가 오랜 시간 신앙생활 했다고 영으로 시작했다가 육체로 마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본문 3절입니다. 성령의 역사는 십자가밖에 업습니다. 이것 외에 먼지라도 하나 보이거든 버리십시오. 십자가만이 보여야 합니다. 나머지는 전부 육체에 속한 것입니다. 십자가의 원수가 되면 안 됩니다. 오직 십자가만을 자랑하면 되는 것입니다. 이미 우리 안에 말씀으로 새겨주신 은혜가 있으므로 밝히 십자가를 보는 영안을 주셨으므로 이런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있을 줄을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