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노략할까 주의하라 이것이 사람의 유전과 세상의 초등 학문을 좇음이요 그리스도를 좇음이 아니니라
9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
10너희도 그 안에서 충만하여졌으니 그는 모든 정사와 권세의 머리시라
11또 그 안에서 너희가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으니 곧 육적 몸을 벗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할례니라
12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한바 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
13또 너희의 범죄와 육체의 무할례로 죽었던 너희를 하나님이 그와 함께 살리시고 우리에게 모든 죄를 사하시고
14우리를 거스리고 우리를 대적하는 의문에 쓴 증서를 도말하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
15정사와 권세를 벗어버려 밝히 드러내시고 십자가로 승리하셨느니라
<녹취록>
1. 어떠한 관점을 갖고 살 것인가
세상을 살아갈 때 가장 중요한 것이 관점입니다. 밤에 달을 볼 때 밝은 곳을 봅니다. 그래서 달이 밝다 하고 밝은 면을 생각합니다. 그러나 달을 볼 때마다 안보이는 부분을 본다면, 그리고 한가위 때는 보름달인데 지금은 하현달이니 하며 안 보이는 부분만 계속 응시한다면 그것은 부정적일 것입니다. 밝은 곳을 보느냐, 어두운 곳을 보느냐에 따라 내 마음의 밝음도 달라질 것입니다. 이제 올해도 10월이 지나가는데 지나간 한 해만 반추한다면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남은 두 달의 시간을 귀하게 여기고 앞으로 어떤 일이 전개될 것인지 기대하며 바라본다면 아름다운 마무리가 될 것입니다. 사시사철이 아름답고 매 새벽과 밤이 아름답습니다. 우리가 즐거운 시각을 가지고 항상 기뻐하라는 관점으로 본다면 기뻐하지 않을 것이 없습니다. 아름다움을 주는 큰 가로수는 못보고 떨어진 낙엽만 보면서 귀찮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1) 철학적/세속적 관점: 한계가 있음
본문은 두 관점을 우리에게 보여 주고 있습니다. 먼저는 철학적인 관점입니다. 본문의 8절은 철학과 헛된 속임수와 사람의 전통과 세상의 초등학문이 세속적 관점으로 제시됩니다. 철학은 존재가 무엇인가, 가치가 무엇인가, 그리고 윤리가 무엇인가를 알려줍니다. 그러나 잘해야 인본주의입니다. 사람이 사람을 평가하고 그것에 대해 가치를 정합니다. 결국 이것도 사람의 전통이고 그것을 초등학문이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피조물이 피조물을 판단하니 얼마나 그것이 어리석겠습니까? 그래서 바로 이어 그것이 헛된 속임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보는 것은 기본적으로 그릇되고 헛되고 망령됨이 있습니다. 인간의 시각은 한정되어 아래를 보면 위를 놓치고 평생 자신의 등도 눈으로 직접 보지 못합니다. 그만큼 우리 육신이 연약합니다. 내 정수리도 내 등도 내 눈이 직접 볼 수는 없습니다. 우주와 창공의 큰 것을 논한다 해도 인간의 연약함이 있습니다. 사람이 지도자를 만나 훈도를 듣고 선생으로 삼는 것도 아름다운 일이지만 그것도 한계가 있어서 그 선생조차도 길을 잃어버릴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는 모습이라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많은 꾀를 내서 모르드개를 괴롭히고 이스라엘 민족을 진멸하려 했던 하만은 결국 자기 자신이 장대에 달립니다. 이것이 바로 철학입니다. 자신의 많은 생각으로 말미암아 끝내 자신이 달려버리는 것입니다. — “너는 내일 일을 자랑하지 말라 하루 동안에 무슨 일이 일어날는지 네가 알 수 없음이니라”(잠 27:1). 당장 오늘 저녁에 무슨 일이 있을지 우리는 알 수 없다는 것이 인간의 유한성을 말해줍니다. 세상 사람들은 세상의 관점으로 보아서, 하나님 쪽으로 가면 어두워진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교회에 가면 하지 말라는 것도 많고 제약도 많은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세상의 눈은 어두운 곳을 보는 것이라 아무 능력이 없고 길을 알려 주지 않으며 끝내 쓰러지고 맙니다.
2) 그리스도의 관점: 주 안에서 만물을 바라봄
그런데 또 다른 관점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8절 후반부,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입니다. 전반부에 대응되는 것으로, 그리스도의 관점입니다. 주님의 렌즈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주님을 믿고 만난 사람의 관점이 있다는 것입니다. 주 안에 있는 내가 만물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주님 안에서, 주님을 비추어, 주님의 능력으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골 1:16).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롬 11:36). 이런 관점으로 만물을 보는 것입니다.
2. 그리스도의 관점으로 살라
1)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으니 그리스도께 구하라
사도 바울은 내 주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다고 했습니다(빌 3:8). 유대인들이 스데반을 죽일 때 내세워 사용한 사울은 그 이름이 권위자라는 뜻인데 그 후 바울이 되었습니다. 바울은 라틴어로 작은 자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지극히 작은 자가 되어 '내 주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다', '십자가만을 자랑하겠다'고 합니다. —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깨닫게 하려 함이니 그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느니라”(골 2:2-3). 그 그리스도 안에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다고 합니다. 이것을 믿어야 그리스도인입니다. 그 안에 모든 보화와 지식이 다 있습니다. 어디를 갈지도, 사업의 결정도 모든 가치 판단도 그리스도가 주시는 것입니다. 모든 보화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데 그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비밀입니다. 기독교 역사상 가장 많이 팔린 책 중 하나가 <<예수라면 어떻게 하셨을까>> 입니다. 매번 예수에 비추어 판단하는 것입니다. 소설 형식으로 한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일을 예수라면 어떻게 하셨을지 보이는 것인데, 그것이 가정으로, 도시, 마을로 확산되어 가는 내용입니다. 그 예수는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 있고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예수의 관점에서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신성의 모든 충만에 육체로 거함은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의 아들이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완전한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완전하신 사람이 된 것입니다. 우리가 그의 손을 잡으면 하나님의 손을 잡는 것이요, 그를 보면 하나님을 보는 것이요, 그를 따르면 하나님을 따르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마 11:27), “무릇 아버지께 있는 것은 다 내 것이라”(요 16:15). 그러므로 예수라면 어떻게 하셨을지 묻는 것입니다. 엘리야, 바울, 그 누구도 찾지 마십시오. 예수만 찾으십시오. 요새는 '예수라면 어떻게 하셨을까'라는 설교보다 '엘리야, 엘리사라면 어떻게 하셨을까'라는, 윤리적인, 인본주의적인 설교가 많습니다. 예수에 대한 것은 비밀의 영역입니다. 그런데 이 비밀의 순종이 아닌, 엘리사, 엘리야, 다니엘, 모세, 다윗에 대한 설교가 장안에 가득합니다. 어제도 학회에 갔는데 노년의 학자가 그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장안에 도덕설교, 윤리설교만 있지 그리스도가 없다고 했습니다.
2) 그리스도가 우리의 방편과 수단과 목적과 생명이시니 그리스도께 물으라
바로 주님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입니다. 방편이자 수단이자 목적이자 생명입니다. 목적도 수단도 주님께 맞춰야 합니다. 내가 어떻게 행할지 물으십시오. 내가 하는 것이 옳은지, 나의 삶의 목표와 방향을 물으십시오. 생명이 예수십니다. 그리스도 안에 방편과 목적이 있습니다. 그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진리를 알려 주시면 또한 은혜를 주십니다. —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 조금만 예수님께 엎드리면 길을 환히 알려 주십니다.
3) 범사에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이 성화이다
우리 성도들은 수시로 주님을 바라봐야 합니다. 바라볼 수 없을때, 내 혈기와 성격이 도무지 예수께로 가닿지 못하는 때일지라도, 가장 화가 날 때라도 예수를 바라보고, 가장 어렵고 방황할 때도 예수를 조금씩 바라보고 나간다면, 그것이 성화입니다. 예수는 혼내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를 감싸안고 우리를 안아주시면 은혜가 폭포처럼 쏟아 내리붓고 우리에게 진리와 지혜를 주시면 눈을 뜨고 세상이 줄 수 없는 평강과 위로가 넘칩니다. 그 예수의 충만을 10절은 ‘너희도 받았다’고 합니다. 바로 이것이 예수님의 관점으로 사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의 관점, 모든 것을 예수님의 관점에서 바라보면 그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요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주신 전능하신 분이요, 그 안에 생수가 흘러 넘쳐 내 배에 생수가 가득하고, 빛이시요 영원한 신령한 양식이 되시는 그분의 것을 우리가 누리는 것입니다.
4) 그리스도의 할례
(1) 완전하신 주님을 앎으로 누리는 복된 새 삶 그러므로 이제는 우리는 옛것으로 살지 아니하고 그리스도의 할례를 받아 사는 자입니다. 본문 11절입니다. 이전 것은 지나가고 이제는 새것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아는 즐거움이 있어야 합니다. 주님을 아는 즐거움은 현재적 즐거움과 미래적 즐거움이 함께 있습니다. 주님은 미래를 아시고 주장하시므로 소망 가운데 즐겁습니다. 우리는 소망 가운데 즐거움이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모든 약속된 가능성이 다 열리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라고 할 때 그가 누구인지 알아야 합니다. 충만하다는 말은 완전하다는 의미입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께 대하여 말할 때 우리는 절대적인 관점을 가져야 합니다. 내가 어느 동네에 가서 큰 이익을 남기려고 해도 하나님이 생을 거두어 가신다는 것입니다. 우면산 밑에 큰 집을 지어놓은 회사의 주인이 산사태로 인해 죽을지 누가 알았을까요? — “부요하신 이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8:9). 부요함이 바로 충만함입니다. 만유 안의 만유, 만유 위의 만유이신 그리스도를 믿을 때 그것이 충만하게 역사하는 것입니다. 이 기쁨이 있으면 옛 친구 없이도 친척 없이도 삽니다. 예수 하나로 만족하고 영광을 올립니다.
(2) 그리스도와 "함께" 죽어야 산다 또한 11절 후반부는 그리스도의 할례를 받았다고 합니다. 옛 사람을 죽이고 옛 관점을 버리는 것입니다. 새 관점, 기독교인의 관점을 가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만물을 그리스도의 눈, 믿음의 눈, 영안으로 직시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가 이런 은혜를 누림은 12절,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되고 함께 일으키시고 함께 살리셨기 때문입니다. 장사됨은 옛것이 죽은 것을 의미하고, 일으키시고 살아난 것은 그리스도와 함께 새 사람이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골로새서와 에베소서는 자매 서신이라고도 합니다. 유사한 부분이 많습니다. —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엡 2:5-6). 여기에도 “함께”가 세 번 나옵니다. 예수님이 아리마대 요셉의 집에서 눈을 뜰 때 우리도 함께 눈을 뜨고, 그 무덤에서 살아나서 일어나실 때 우리도 일으키시고, 승천하여 하늘에 낮으실 때 우리도 함께 승천하여 앉은 것입니다. 같은 표현이 본문에 나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어야 함께 삽니다. 죽는 것을 잘 죽어야 잘 살 수 있습니다. 내 생각대로 그냥 죽으면 안됩니다. 내가 자기 부인 한다고 하면 안됩니다. 겸손도 안됩니다. 내 마음대로는, 내 성격과 능력으로는 자기 부인도 겸손도 안됩니다. 내 뜻으로 하는 겸손은 오히려 더 큰 교만, 위장된 겸손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겸손은 땅에서는 억울하게 살다 죽어도 불만을 갖지 않고 오히려 기뻐합니다. 그리스도의 겸손은 하늘에서의 상급을 바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되고 함께 살리시고 일으키신 것입니다. 어른들은 그것을 압니다. 세상의 절반 이상은 죽는 것입니다. 학생들은 그저 사는 것을 사는 것으로 알 수 있지만, 사실 삶은 죽는 것이 절반입니다. 제가 집에서 나오는데 어떤 사람이 트럭을 세워 놓고 뛰어갑니다. 택배 배달원이었습니다. 그래서 '저 집에 자녀가 있다면 아빠가 저렇게 사는 것을 알까?'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리고 '만약 자녀가 이것을 본다면 우리 아빠가 가난하다고 불평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또 부모가 보면 자식도 고생합니다. 무거운 가방 들고 학교에서 공부하는 것이 딱합니다. 학생들에게 공부는 그 자체가 배우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단지 좋은 학교를 가는 것만이 아니라 말입니다. 학생 때 배운 지식들이 실상 사회에서 쓸데없는 것이 많지만, 안 쓰는 것도 배우는 것입니다. 죽는 것을 배우는 것입니다. 사는 것만 배우고 죽는 것을 안 배우면 죽음의 상황에서 어쩔 줄을 모릅니다. 그러니 어느 재벌의 가장 똑똑하고 바른 사람도 어느날 스스로를 죽이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절반 이상은 죽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도 죽는 것입니다. 죽는 것이 절반 이상입니다. 내가 이것을 하면 이것을 이루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참는 것입니다. 주님과 함께 장사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요나 같이 물고기 뱃속에 들어가지 않았으나 주님이 죽으셔서 사흘 동안 죽음에 계셨으므로, 더러운 구토물과 같은 것을 들이마시셨으므로, 우리가 그와 함께 옛것이 죽고 다시 살아나는 것입니다.
5) 십자가의 도가 우리의 능력이다
십자가의 도가 우리에게 능력입니다. —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 1:18). 십자가의 도로 만물을 바라봐야 합니다. —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전 2:2). 성경을 그저 지나가는 말로 읽지 마십시오. 한 절 한 절이 다 생명의 말씀입니다. 아무것도 알지 않기로 했다는 것은, 바로 이것을 중심에 두겠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을 중심에 두고 모든 것을 보겠다는 말입니다. 저도 억울한 것처럼 스스로 생각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에돔 후손, 잔인하고 영민한 헤롯왕과, 정치욕과 출세욕이 가득한 본디오 빌라도, 성전을 더럽힌 가야바와 안나스, 그 네 사람 앞에 주님은 무릎을 꿇었습니다. 흠 없고 점 없는 주님이, 그들을 심판해도 모자랄 판에 그들 앞에 우리 주님이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의 도입니다. 우리가 살면서 십자가를 볼 때, 참는 것도 애매히 고난 당하는 것이 복이라는 것도 배웁니다. 이것을 배워야 사업도 하고 세상에서 머리가 되는 것입니다. 직장이든 어디든, 내 마음의 영역이 있어야 합니다. 기도의 터가 있어야 합니다. 나는 이런 일이 있으면 그 자리에 앉아 기도해 봐야 하겠다는 그런 기도의 자리가 있어야 합니다. 저도 에딘버러에서 공부할 때 아무도 모르는 한 장소가 있었습니다. 기도하다 보면 스테인드글라스 너머로 북해 쪽에서 태양이 뜹니다. 우리가 모든 것을 십자가의 도에 비추어 보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억울한 것, 예수님의 십자가의 도에 비추어 보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는 전능하면서도 모욕을 당했습니다. 우리는 조금만 힘이 있으면 우리보다 약한 사람이면 혼을 내 주고 싶어하지만, 예수님은 열두 영도 더 되는 천사를 부르실 수 있으시지만 그냥 당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의 도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고 우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감추어졌다고 합니다. —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음이라”(골 3:3). 죽음에는 필히 생명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와 함께 죽어야 합니다. —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롬 6:3-4). 우리가 다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와 죽음과 함께 받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함께 장사되었습니다. 이는 우리로 하여금 새 생명 가운데 행하게 하려 하심입니다. 제가 뒷산에 가 보면 참나무들이 두껍습니다. 껍질도 두꺼워 벗겨집니다. 그것이 흔적입니다. 그저 겉에 붙어있는 것처럼 보여도 그것이 없이 큰 나무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해마다 장사됨이 있는 것입니다. 또 마디마다 보면 옹이가 있습니다. 그것도 참는 것, 생명의 몸부림처럼 보입니다. 옹이는 우리로 하면 종기, 고름입니다. 그것이 맺힙니다. 그것으로 한 마디가 자라갑니다. 그것을 보면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됨으로 생명을 얻는 것을 생각합니다.
6) 십자가로 승리한다
십자가로 이긴다는 것은 궁극적인 승리입니다. 이 세상의 악한 영도 주님이 다스립니다. 그래서 주님을 바로 바라보면 세상의 길이 열립니다. 무슨 학문을 하든, 예술, 사업을 하든 주님이 머리입니다. 통치와 정사의 머리가 되시는 것입니다. 15절은 그러므로 십자가로 그들을 이기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이김은 다른 것이 아닌,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기셨습니다. — “유대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가 이겼으니”(계 5:5). 예수 그리스도가 이기셨으니 우리는 새 노래를 부릅니다. — "일찍이 죽임을 당하사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에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 그들로 우리 하나님 앞에서 나라와 제사장들을 삼으셨으니 그들이 땅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계 5:9-10). 우리는 누구와 싸우나요. 야곱은 하나님과 겨루었습니다. 우리도 하나님과 겨루어야 합니다. 야곱은 에서와 겨루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과 우리가 어떻게 싸웁니까? 불쌍히 보이면서 싸워야 합니다. 무릎 꿇고 기도하면 하나님이 져 주십니다. 그래서 야곱, 즉 욕심이라는 이름이 이스라엘, 하나님과 겨루어 이긴 이름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겨루어 이겼다는 이름은 오직 야곱만 가집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힘이 있어서 그리 된 것이 아닙니다. 예전에는 욕심으로 해서 안 됐으나 이제는 기도로 하니 하나님이 져 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싸움입니다. 하나님께 울며 불며 매달려 하나님이 우리에게 져 주시는 것, 브니엘, 하나님의 얼굴을 바라보며 기도하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져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을 이길 수 없습니다. —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 16:33). 절대 못이깁니다. 그저 예수 그리스도에게 붙어 그의 이김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나를 장사시켜야 합니다. — “자녀들아 너희는 하나님께 속하였고 또 그들을 이기었나니 이는 너희 안에 계신 이가 세상에 있는 자보다 크심이라”(요일 4:4). 우리 안에 계신 이가 세상에 있는 자보다 크십니다. —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갈 2:20). 내 안에 사시는 분은 그리스도 예수이십니다. 우리의 전쟁은 대리전입니다. 우리가 기도하여 예수님이 대신 싸우십니다. 우리 안에는 그리스도가 있습니다. 그래서 내 육체를 깨드리면 그리스도의 영적 향기가 납니다. 그것이 성도의 전쟁이요, 싸움에서 이기는 것입니다. 젊은이들, 담대하십시오. 그러나 나를 믿지 말고 내 노력조차 믿지 마십시오. 내 노력은 기껏해야 2-3년 가지만, 하나님이 붙드시면 20-30년도 갑니다. 하나님이 오래 참음의 은사를 주셔야 세상 일도 할 수 있습니다. 항상 예수 그리스도께 맡기고 겁내거나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내 안에 세상을 이기신 그리스도가 계시므로 그를 힘입어 세상을 이깁니다.
3. 결론
본문에서 우리는 바로 그리스도의 할례를 받아 세상의 관점이 아닌 그리스도의 관점으로 바라보는 것을 보았습니다. 예수가 내 안에 사시므로 두려워하거나 무서워하지 마시고, 특히 어떤 일을 이루었을 때 내가 선 줄로 생각하여 교만하지 말고 더욱 그리스도를 기대야 합니다. 이로 말미암아 항상 기뻐하며 믿음으로 나가는 모든 성도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20181021][십자가지기교회 주일낮예배: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30)] 십자가로 이기심을 믿음 (골 2:8-15) 문병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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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노략할까 주의하라 이것이 사람의 유전과 세상의 초등 학문을 좇음이요 그리스도를 좇음이 아니니라
9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
10너희도 그 안에서 충만하여졌으니 그는 모든 정사와 권세의 머리시라
11또 그 안에서 너희가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으니 곧 육적 몸을 벗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할례니라
12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한바 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
13또 너희의 범죄와 육체의 무할례로 죽었던 너희를 하나님이 그와 함께 살리시고 우리에게 모든 죄를 사하시고
14우리를 거스리고 우리를 대적하는 의문에 쓴 증서를 도말하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
15정사와 권세를 벗어버려 밝히 드러내시고 십자가로 승리하셨느니라
<녹취록>
1. 어떠한 관점을 갖고 살 것인가
세상을 살아갈 때 가장 중요한 것이 관점입니다. 밤에 달을 볼 때 밝은 곳을 봅니다. 그래서 달이 밝다 하고 밝은 면을 생각합니다. 그러나 달을 볼 때마다 안보이는 부분을 본다면, 그리고 한가위 때는 보름달인데 지금은 하현달이니 하며 안 보이는 부분만 계속 응시한다면 그것은 부정적일 것입니다. 밝은 곳을 보느냐, 어두운 곳을 보느냐에 따라 내 마음의 밝음도 달라질 것입니다. 이제 올해도 10월이 지나가는데 지나간 한 해만 반추한다면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남은 두 달의 시간을 귀하게 여기고 앞으로 어떤 일이 전개될 것인지 기대하며 바라본다면 아름다운 마무리가 될 것입니다. 사시사철이 아름답고 매 새벽과 밤이 아름답습니다. 우리가 즐거운 시각을 가지고 항상 기뻐하라는 관점으로 본다면 기뻐하지 않을 것이 없습니다. 아름다움을 주는 큰 가로수는 못보고 떨어진 낙엽만 보면서 귀찮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1) 철학적/세속적 관점: 한계가 있음
본문은 두 관점을 우리에게 보여 주고 있습니다. 먼저는 철학적인 관점입니다. 본문의 8절은 철학과 헛된 속임수와 사람의 전통과 세상의 초등학문이 세속적 관점으로 제시됩니다. 철학은 존재가 무엇인가, 가치가 무엇인가, 그리고 윤리가 무엇인가를 알려줍니다. 그러나 잘해야 인본주의입니다. 사람이 사람을 평가하고 그것에 대해 가치를 정합니다. 결국 이것도 사람의 전통이고 그것을 초등학문이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피조물이 피조물을 판단하니 얼마나 그것이 어리석겠습니까? 그래서 바로 이어 그것이 헛된 속임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보는 것은 기본적으로 그릇되고 헛되고 망령됨이 있습니다.
인간의 시각은 한정되어 아래를 보면 위를 놓치고 평생 자신의 등도 눈으로 직접 보지 못합니다. 그만큼 우리 육신이 연약합니다. 내 정수리도 내 등도 내 눈이 직접 볼 수는 없습니다. 우주와 창공의 큰 것을 논한다 해도 인간의 연약함이 있습니다. 사람이 지도자를 만나 훈도를 듣고 선생으로 삼는 것도 아름다운 일이지만 그것도 한계가 있어서 그 선생조차도 길을 잃어버릴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는 모습이라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많은 꾀를 내서 모르드개를 괴롭히고 이스라엘 민족을 진멸하려 했던 하만은 결국 자기 자신이 장대에 달립니다. 이것이 바로 철학입니다. 자신의 많은 생각으로 말미암아 끝내 자신이 달려버리는 것입니다. — “너는 내일 일을 자랑하지 말라 하루 동안에 무슨 일이 일어날는지 네가 알 수 없음이니라”(잠 27:1). 당장 오늘 저녁에 무슨 일이 있을지 우리는 알 수 없다는 것이 인간의 유한성을 말해줍니다. 세상 사람들은 세상의 관점으로 보아서, 하나님 쪽으로 가면 어두워진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교회에 가면 하지 말라는 것도 많고 제약도 많은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세상의 눈은 어두운 곳을 보는 것이라 아무 능력이 없고 길을 알려 주지 않으며 끝내 쓰러지고 맙니다.
2) 그리스도의 관점: 주 안에서 만물을 바라봄
그런데 또 다른 관점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8절 후반부,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입니다. 전반부에 대응되는 것으로, 그리스도의 관점입니다. 주님의 렌즈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주님을 믿고 만난 사람의 관점이 있다는 것입니다. 주 안에 있는 내가 만물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주님 안에서, 주님을 비추어, 주님의 능력으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골 1:16).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롬 11:36). 이런 관점으로 만물을 보는 것입니다.
2. 그리스도의 관점으로 살라
1)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으니 그리스도께 구하라
사도 바울은 내 주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다고 했습니다(빌 3:8). 유대인들이 스데반을 죽일 때 내세워 사용한 사울은 그 이름이 권위자라는 뜻인데 그 후 바울이 되었습니다. 바울은 라틴어로 작은 자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지극히 작은 자가 되어 '내 주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다', '십자가만을 자랑하겠다'고 합니다. —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깨닫게 하려 함이니 그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느니라”(골 2:2-3). 그 그리스도 안에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다고 합니다. 이것을 믿어야 그리스도인입니다. 그 안에 모든 보화와 지식이 다 있습니다. 어디를 갈지도, 사업의 결정도 모든 가치 판단도 그리스도가 주시는 것입니다. 모든 보화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데 그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비밀입니다.
기독교 역사상 가장 많이 팔린 책 중 하나가 <<예수라면 어떻게 하셨을까>> 입니다. 매번 예수에 비추어 판단하는 것입니다. 소설 형식으로 한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일을 예수라면 어떻게 하셨을지 보이는 것인데, 그것이 가정으로, 도시, 마을로 확산되어 가는 내용입니다.
그 예수는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 있고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예수의 관점에서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신성의 모든 충만에 육체로 거함은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의 아들이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완전한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완전하신 사람이 된 것입니다. 우리가 그의 손을 잡으면 하나님의 손을 잡는 것이요, 그를 보면 하나님을 보는 것이요, 그를 따르면 하나님을 따르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마 11:27), “무릇 아버지께 있는 것은 다 내 것이라”(요 16:15). 그러므로 예수라면 어떻게 하셨을지 묻는 것입니다. 엘리야, 바울, 그 누구도 찾지 마십시오. 예수만 찾으십시오. 요새는 '예수라면 어떻게 하셨을까'라는 설교보다 '엘리야, 엘리사라면 어떻게 하셨을까'라는, 윤리적인, 인본주의적인 설교가 많습니다. 예수에 대한 것은 비밀의 영역입니다. 그런데 이 비밀의 순종이 아닌, 엘리사, 엘리야, 다니엘, 모세, 다윗에 대한 설교가 장안에 가득합니다. 어제도 학회에 갔는데 노년의 학자가 그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장안에 도덕설교, 윤리설교만 있지 그리스도가 없다고 했습니다.
2) 그리스도가 우리의 방편과 수단과 목적과 생명이시니 그리스도께 물으라
바로 주님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입니다. 방편이자 수단이자 목적이자 생명입니다. 목적도 수단도 주님께 맞춰야 합니다. 내가 어떻게 행할지 물으십시오. 내가 하는 것이 옳은지, 나의 삶의 목표와 방향을 물으십시오. 생명이 예수십니다. 그리스도 안에 방편과 목적이 있습니다. 그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진리를 알려 주시면 또한 은혜를 주십니다. —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 조금만 예수님께 엎드리면 길을 환히 알려 주십니다.
3) 범사에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이 성화이다
우리 성도들은 수시로 주님을 바라봐야 합니다. 바라볼 수 없을때, 내 혈기와 성격이 도무지 예수께로 가닿지 못하는 때일지라도, 가장 화가 날 때라도 예수를 바라보고, 가장 어렵고 방황할 때도 예수를 조금씩 바라보고 나간다면, 그것이 성화입니다. 예수는 혼내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를 감싸안고 우리를 안아주시면 은혜가 폭포처럼 쏟아 내리붓고 우리에게 진리와 지혜를 주시면 눈을 뜨고 세상이 줄 수 없는 평강과 위로가 넘칩니다. 그 예수의 충만을 10절은 ‘너희도 받았다’고 합니다. 바로 이것이 예수님의 관점으로 사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의 관점, 모든 것을 예수님의 관점에서 바라보면 그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요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주신 전능하신 분이요, 그 안에 생수가 흘러 넘쳐 내 배에 생수가 가득하고, 빛이시요 영원한 신령한 양식이 되시는 그분의 것을 우리가 누리는 것입니다.
4) 그리스도의 할례
(1) 완전하신 주님을 앎으로 누리는 복된 새 삶
그러므로 이제는 우리는 옛것으로 살지 아니하고 그리스도의 할례를 받아 사는 자입니다. 본문 11절입니다. 이전 것은 지나가고 이제는 새것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아는 즐거움이 있어야 합니다. 주님을 아는 즐거움은 현재적 즐거움과 미래적 즐거움이 함께 있습니다. 주님은 미래를 아시고 주장하시므로 소망 가운데 즐겁습니다. 우리는 소망 가운데 즐거움이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모든 약속된 가능성이 다 열리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라고 할 때 그가 누구인지 알아야 합니다. 충만하다는 말은 완전하다는 의미입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께 대하여 말할 때 우리는 절대적인 관점을 가져야 합니다. 내가 어느 동네에 가서 큰 이익을 남기려고 해도 하나님이 생을 거두어 가신다는 것입니다. 우면산 밑에 큰 집을 지어놓은 회사의 주인이 산사태로 인해 죽을지 누가 알았을까요? — “부요하신 이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8:9). 부요함이 바로 충만함입니다. 만유 안의 만유, 만유 위의 만유이신 그리스도를 믿을 때 그것이 충만하게 역사하는 것입니다. 이 기쁨이 있으면 옛 친구 없이도 친척 없이도 삽니다. 예수 하나로 만족하고 영광을 올립니다.
(2) 그리스도와 "함께" 죽어야 산다
또한 11절 후반부는 그리스도의 할례를 받았다고 합니다. 옛 사람을 죽이고 옛 관점을 버리는 것입니다. 새 관점, 기독교인의 관점을 가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만물을 그리스도의 눈, 믿음의 눈, 영안으로 직시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가 이런 은혜를 누림은 12절,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되고 함께 일으키시고 함께 살리셨기 때문입니다. 장사됨은 옛것이 죽은 것을 의미하고, 일으키시고 살아난 것은 그리스도와 함께 새 사람이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골로새서와 에베소서는 자매 서신이라고도 합니다. 유사한 부분이 많습니다. —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엡 2:5-6). 여기에도 “함께”가 세 번 나옵니다. 예수님이 아리마대 요셉의 집에서 눈을 뜰 때 우리도 함께 눈을 뜨고, 그 무덤에서 살아나서 일어나실 때 우리도 일으키시고, 승천하여 하늘에 낮으실 때 우리도 함께 승천하여 앉은 것입니다. 같은 표현이 본문에 나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어야 함께 삽니다. 죽는 것을 잘 죽어야 잘 살 수 있습니다. 내 생각대로 그냥 죽으면 안됩니다. 내가 자기 부인 한다고 하면 안됩니다. 겸손도 안됩니다. 내 마음대로는, 내 성격과 능력으로는 자기 부인도 겸손도 안됩니다. 내 뜻으로 하는 겸손은 오히려 더 큰 교만, 위장된 겸손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겸손은 땅에서는 억울하게 살다 죽어도 불만을 갖지 않고 오히려 기뻐합니다. 그리스도의 겸손은 하늘에서의 상급을 바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되고 함께 살리시고 일으키신 것입니다.
어른들은 그것을 압니다. 세상의 절반 이상은 죽는 것입니다. 학생들은 그저 사는 것을 사는 것으로 알 수 있지만, 사실 삶은 죽는 것이 절반입니다. 제가 집에서 나오는데 어떤 사람이 트럭을 세워 놓고 뛰어갑니다. 택배 배달원이었습니다. 그래서 '저 집에 자녀가 있다면 아빠가 저렇게 사는 것을 알까?'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리고 '만약 자녀가 이것을 본다면 우리 아빠가 가난하다고 불평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또 부모가 보면 자식도 고생합니다. 무거운 가방 들고 학교에서 공부하는 것이 딱합니다. 학생들에게 공부는 그 자체가 배우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단지 좋은 학교를 가는 것만이 아니라 말입니다. 학생 때 배운 지식들이 실상 사회에서 쓸데없는 것이 많지만, 안 쓰는 것도 배우는 것입니다. 죽는 것을 배우는 것입니다. 사는 것만 배우고 죽는 것을 안 배우면 죽음의 상황에서 어쩔 줄을 모릅니다. 그러니 어느 재벌의 가장 똑똑하고 바른 사람도 어느날 스스로를 죽이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절반 이상은 죽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도 죽는 것입니다. 죽는 것이 절반 이상입니다. 내가 이것을 하면 이것을 이루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참는 것입니다. 주님과 함께 장사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요나 같이 물고기 뱃속에 들어가지 않았으나 주님이 죽으셔서 사흘 동안 죽음에 계셨으므로, 더러운 구토물과 같은 것을 들이마시셨으므로, 우리가 그와 함께 옛것이 죽고 다시 살아나는 것입니다.
5) 십자가의 도가 우리의 능력이다
십자가의 도가 우리에게 능력입니다. —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 1:18). 십자가의 도로 만물을 바라봐야 합니다. —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전 2:2). 성경을 그저 지나가는 말로 읽지 마십시오. 한 절 한 절이 다 생명의 말씀입니다. 아무것도 알지 않기로 했다는 것은, 바로 이것을 중심에 두겠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을 중심에 두고 모든 것을 보겠다는 말입니다.
저도 억울한 것처럼 스스로 생각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에돔 후손, 잔인하고 영민한 헤롯왕과, 정치욕과 출세욕이 가득한 본디오 빌라도, 성전을 더럽힌 가야바와 안나스, 그 네 사람 앞에 주님은 무릎을 꿇었습니다. 흠 없고 점 없는 주님이, 그들을 심판해도 모자랄 판에 그들 앞에 우리 주님이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의 도입니다. 우리가 살면서 십자가를 볼 때, 참는 것도 애매히 고난 당하는 것이 복이라는 것도 배웁니다. 이것을 배워야 사업도 하고 세상에서 머리가 되는 것입니다. 직장이든 어디든, 내 마음의 영역이 있어야 합니다. 기도의 터가 있어야 합니다. 나는 이런 일이 있으면 그 자리에 앉아 기도해 봐야 하겠다는 그런 기도의 자리가 있어야 합니다. 저도 에딘버러에서 공부할 때 아무도 모르는 한 장소가 있었습니다. 기도하다 보면 스테인드글라스 너머로 북해 쪽에서 태양이 뜹니다.
우리가 모든 것을 십자가의 도에 비추어 보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억울한 것, 예수님의 십자가의 도에 비추어 보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는 전능하면서도 모욕을 당했습니다. 우리는 조금만 힘이 있으면 우리보다 약한 사람이면 혼을 내 주고 싶어하지만, 예수님은 열두 영도 더 되는 천사를 부르실 수 있으시지만 그냥 당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의 도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고 우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감추어졌다고 합니다. —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음이라”(골 3:3). 죽음에는 필히 생명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와 함께 죽어야 합니다. —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롬 6:3-4). 우리가 다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와 죽음과 함께 받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함께 장사되었습니다. 이는 우리로 하여금 새 생명 가운데 행하게 하려 하심입니다.
제가 뒷산에 가 보면 참나무들이 두껍습니다. 껍질도 두꺼워 벗겨집니다. 그것이 흔적입니다. 그저 겉에 붙어있는 것처럼 보여도 그것이 없이 큰 나무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해마다 장사됨이 있는 것입니다. 또 마디마다 보면 옹이가 있습니다. 그것도 참는 것, 생명의 몸부림처럼 보입니다. 옹이는 우리로 하면 종기, 고름입니다. 그것이 맺힙니다. 그것으로 한 마디가 자라갑니다. 그것을 보면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됨으로 생명을 얻는 것을 생각합니다.
6) 십자가로 승리한다
십자가로 이긴다는 것은 궁극적인 승리입니다. 이 세상의 악한 영도 주님이 다스립니다. 그래서 주님을 바로 바라보면 세상의 길이 열립니다. 무슨 학문을 하든, 예술, 사업을 하든 주님이 머리입니다. 통치와 정사의 머리가 되시는 것입니다. 15절은 그러므로 십자가로 그들을 이기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이김은 다른 것이 아닌,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기셨습니다. — “유대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가 이겼으니”(계 5:5). 예수 그리스도가 이기셨으니 우리는 새 노래를 부릅니다. — "일찍이 죽임을 당하사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에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 그들로 우리 하나님 앞에서 나라와 제사장들을 삼으셨으니 그들이 땅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계 5:9-10).
우리는 누구와 싸우나요. 야곱은 하나님과 겨루었습니다. 우리도 하나님과 겨루어야 합니다. 야곱은 에서와 겨루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과 우리가 어떻게 싸웁니까? 불쌍히 보이면서 싸워야 합니다. 무릎 꿇고 기도하면 하나님이 져 주십니다. 그래서 야곱, 즉 욕심이라는 이름이 이스라엘, 하나님과 겨루어 이긴 이름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겨루어 이겼다는 이름은 오직 야곱만 가집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힘이 있어서 그리 된 것이 아닙니다. 예전에는 욕심으로 해서 안 됐으나 이제는 기도로 하니 하나님이 져 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싸움입니다. 하나님께 울며 불며 매달려 하나님이 우리에게 져 주시는 것, 브니엘, 하나님의 얼굴을 바라보며 기도하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져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을 이길 수 없습니다. —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 16:33). 절대 못이깁니다. 그저 예수 그리스도에게 붙어 그의 이김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나를 장사시켜야 합니다. — “자녀들아 너희는 하나님께 속하였고 또 그들을 이기었나니 이는 너희 안에 계신 이가 세상에 있는 자보다 크심이라”(요일 4:4). 우리 안에 계신 이가 세상에 있는 자보다 크십니다. —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갈 2:20). 내 안에 사시는 분은 그리스도 예수이십니다. 우리의 전쟁은 대리전입니다. 우리가 기도하여 예수님이 대신 싸우십니다. 우리 안에는 그리스도가 있습니다. 그래서 내 육체를 깨드리면 그리스도의 영적 향기가 납니다. 그것이 성도의 전쟁이요, 싸움에서 이기는 것입니다.
젊은이들, 담대하십시오. 그러나 나를 믿지 말고 내 노력조차 믿지 마십시오. 내 노력은 기껏해야 2-3년 가지만, 하나님이 붙드시면 20-30년도 갑니다. 하나님이 오래 참음의 은사를 주셔야 세상 일도 할 수 있습니다. 항상 예수 그리스도께 맡기고 겁내거나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내 안에 세상을 이기신 그리스도가 계시므로 그를 힘입어 세상을 이깁니다.
3. 결론
본문에서 우리는 바로 그리스도의 할례를 받아 세상의 관점이 아닌 그리스도의 관점으로 바라보는 것을 보았습니다. 예수가 내 안에 사시므로 두려워하거나 무서워하지 마시고, 특히 어떤 일을 이루었을 때 내가 선 줄로 생각하여 교만하지 말고 더욱 그리스도를 기대야 합니다. 이로 말미암아 항상 기뻐하며 믿음으로 나가는 모든 성도가 되기를 기도합니다.